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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나메기] 제2권(2000년 여름)에 게재



늪으로 빠지고 있는 젊은이를 위해                                                               김세균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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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는 어떤 존재인가?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젊은이란 대체로 한 인간의 생애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인 20대 나이를 지닌 사람층을 가리킨다. 그러나 같은 20대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본다면, 젊은이라고 해서 이들을 간단히 하나의 범주로 묶어 고찰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따른다.

한국사회는 '학력사회'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학력은 어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지위를 누리는가에 매우 중요한, 때로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대로 사람대접을 받고 살려고 하면 최소한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때 한국사회에서 그런 대로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산다는 것은 사회의 권력적 위계질서 속에서 최소한 중간적 위치는 차지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사회 속에서 그 질서의 하층에 속한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라도 자신이 하층에 속했기 때문에 받았던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도록 하기 위해 자식을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사회 속에서 부와 명망을 누리는 부모들도 자기 자식이 남보다 더 나은 대학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해 별 짓을 다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대학에 진학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젊은이들을 크게 보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층'과 '대학에 진학한 층'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빈한한 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된다. 이들 젊은이들은 초-중등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대체로 육체노동자나 기술직 노동자 또는 말단 사무직노동자 등으로 활동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미 젊은 나이에 사회적 위계질서의 하층으로 편입되어 대체로 노동자계급의 성원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오늘날 예를 들어 노동운동의 중요한 활동가나 중견간부들 중에는 고졸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후자의 젊은이들은 전자의 젊은이들이 이미 직업전선에 뛰어든 시기에 대졸 학력을 취득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들 젊은이들은 여러 사회층의 자제들로 구성되지만, 오늘날에는 이들 젊은이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 젊은이 중에는 사법고시 등에 합격하여 일찍부터 사회적 위계질서의 상층으로 편입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들의 많은 부분은 고위관리자층 등으로 상승할 기회를 지닌 - 그러나 그러한 기회는 실제로는 소수에게만 부여되지만 - 사무전문직 노동자나 중간관리자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때문에 같은 젊은이라고 해서 이미 노동자계급의 성원이 된 젊은이와, 대학졸업 후 사문전문직 노동자나 중간관리자로 취업하게 되는 젊은이들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무리이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몰라도 - 물론 생물학적으로도 영양상태와 건강상태 등에서 차이가 나타나지만, 그러한 차이는 본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에 기인하는 생물학적인 차이이다 -, 사회적으로 본다면 하나의 젊은이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같은 젊은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와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는 구분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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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일찍 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문제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 즉 젊은 노동자층의 문제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중간관리자층이 된 젊은이들의 문제는 젊은 중간관리자층의 문제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우리가 젊은이의 문제를 제기하면, 이 문제는 주로 아직 직업전선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의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앞서, 여기서는 먼저 한국의 젊은이들이 어떤 교육과정을 받으면서 자라왔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게 되는가는 기본적으로 이미 성립되어 있는 사회의 구성원리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사회가 출세와 돈벌이를 중시하고, 경쟁과 효율 등의 원리를 앞세우는 사회라면, 가정과 학교의 교육내용 역시 그러한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사회가 노동하는 대중을 존중하고, 연대적 우애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라면, 가정과 학교의 교육내용 역시 그러한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이 될 것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리는 성립된 사회질서의 유지와 재생산을 총괄하는 국가의 성격과 정책으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가정과 학교의 교육내용은 큰 틀에서는 국가의 성격과 정책에 의해 규정된다. 이 점에서 가정은, 국가와 구분되는 사회의 기초 생활단위이긴 하지만, 사회적 역할 면에서는 대체로 주어진 사회질서의 구성원리를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세포'로서 기능하게 되며, 부모는 대체로 그러한 국가장치의 '인격적 대변자'로서 기능하게 된다. 학교 역시, 그 학교가 비록 사립학교라 할지라도, 그러한 내용의 교육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기능하게 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가 '학벌사회'라는 점을 반영하여 가정과 학교로부터 '성적이데올로기'가 전능의 힘을 발휘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 이데올로기에서는 오직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 보다 좋은 상급학교나 좋은 대학으로 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을 받는 것만이 중시되며, 성적만으로는 결코 반영될 수 없는 아이들의 다른 잠재적 능력이나 적성들의 개발은 무시되거나 억압받게 된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주문이 부모와 학교로부터 끊임없이 전달되며, 좋은 성적을 받도록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일찍부터 과외공부 등으로 내몬다. 그런데 어떤 과외공부를 받는가와 가정형편이 어떠한가가 아이들의 성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유복하고 단란한 집안의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좋은 대학에 갈 비율이 오늘날에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조건 속에서 공부하든, 좋은 성적을 내는 아이들은 '우등생'으로 칭찬받는 반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열등생' 등으로 천대받는다. 그런 가운데 우등생들은 좋은 성적을 내고 더 나은 성적을 얻기 위해 자신의 다른 모든 욕구들을 억눌러야 하는 반면, 열등생에게 학교가 제공해 줄 것이라곤 질책과 천대 이외에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한마디로 오늘날 학교는 학생들을 외줄에 서도록 강제하고, 그 줄에 서지 못하는 아이들은 처벌하는 거대한 '생명억압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등생이나 열등생이나 오늘날 한국의 아이들은 그러한 억눌림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가운데 자라나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인기가수들의 공연 등에 몰려들어 열광하는 것과 방식으로 그러한 억압이 만들어내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의 다양한 욕구를 억압하는 질서에 대한 저항이자,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더라도 성적이데올로기를 강제하는 질서에 다시 순응하는 학생들이 '모범생'이라면, 많은 학생들은 '열등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불량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량생의 행위는, 억압에 대한 저항이긴 하지만, 모범생의 행위를 더욱 빛나게 하고, 학생들이 따라서는 안될 이탈행위의 모범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억압적 교육질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그 질서를 더욱 완고하게 만든 데에 기여하게 된다.

학벌이 사회적 지위확보에 결정적 중요성을 차지하고, 좋은 지위 획득을 위한 좋은 성적 확보를 지고의 가치로 앞세우는 성적이데올로기가 판치는 곳에서 교육내용이 우리가 사는 사회과정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상당한 비판정신을 가진 부모일지라도 자신의 자식이 그러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두렵게 여기며, '자식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서 자식이 체제순응적인 인간이 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학교 역시 학생을 체제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교육목표로 삼고 있다. 게다가 한국의 학교교육은 학생들에게 완고한 반공의식을 주입시켜왔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수준을 반영하여 가장 기초적인 민주적 시민교육의 내용조차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학생들은 기초적인 기능적 지식들을 두루 습득했지만, 사회과정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결여한 상태에서, 그리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정의감은 가지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대학졸업 이후 좋은 직장을 구해 안락하게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를 삼는 상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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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직업전선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산 노동을 착취하는 노동현장의 체험을 통해 자본주의사회가 지닌 구조적 모순에 일찍부터 눈을 뜨게 된다. 이 점에서 착취의 현장인 노동현장은 착취당하는 사람에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자각하게 만드는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을 자각할지라도 자신을 짓누르는 구조적 힘에 압도되어 저항을 포기하거나 체념하기도 하지만, 많은 젊은 노동자들은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들과 힘을 합쳐 투쟁에 나서는 주역으로 활동한다. 이들의 투쟁은 대체로 경제투쟁을 거쳐 정치투쟁으로 발전해 간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자본이데올로기에 포섭하고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막으려는 자본과 권력의 기도에 항상 맞서지 않으면 안된다.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은 전자의 젊은이들과는 판이한 환경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환경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변모했다. 특히 유신체제 이후, 그리고 광주민중봉기 등을 거치면서 군부독재체제는 학생들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학생들의 일거수일거족을 감시-통제하는 가운데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욕구를 전면적으로 억압했다. 그로 인해 많은 학생들은, 그리고 1980년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입시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제대로 만끽해 보지도 못한 채 군부독재 타도와 정치적 민주주주의의 쟁취를 위한 대정부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정부투쟁에의 참여는 이들로 하여금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뜨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학생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획득에서 더 나아가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노학연대를 추진하거나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자기 자신을 노동자로 변신시켜 나갔다. 선후배간에 행해진 토론과 자체학습 등도 후배학생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뜨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면 대학생들의 행동양식은 크게 변하게 된다. 1987년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 이후 민주화가 일정하게 진척됨과 더불어 대학공간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학생들의 자유의 폭이 크게 신장되었다. 게다가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한 젊은이들조차 민주화의 일정한 진척과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등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기 시작함으로써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뜨게 만드는 선후배간의 토론과 자체 학습 등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오늘날 젊은이들은 대학에 입학하면 우선 그간 자신들을 억눌러온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려고 한다. 이들은 우선 놀고, 친구들과 사귀고, 억눌려온 자신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들을 충족시키려고 든다. 게다가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는 젊은이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흡수시키는 다양한 기제와 공간들을 제공해 줄 능력을 지니고 있고, 또 실제로 제공해 주고 있다. 이로 인해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젊은이들의 활동은 자본이 친 그물망 안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점에서 이들의 문화적 욕구의 충족은 자본에 의해 포섭된 문화적 욕구 충족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대학생들에게는 고학년에 들어가면 갈수록 대학 졸업 이후의 취업문제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문화적 욕구 등을 충족시키기 위한 생활만을 마냥 즐길 수 없고, 대체로 고학년에 들어가면 대학 졸업이후의 취업을 위한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IMF 위기가 발생하고, 사회전반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재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후에는 고학력실업자의 수가 늘어나고 취업경쟁이 치열해면서 고시공부나 취직공부의 열풍이 대학가에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게다가, 대학교육의 내용은 크게 보면 학생들을 체제순응적인 기능적 지식인으로 양성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오늘날의 한국의 대학생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뜬 비판적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은 다른 한편으로 아직 성장과정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떠나 사회 전체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사회를 위해 유익한 활동을 하려는 욕구를 아울러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젊은이의 문제를 중요시여기는 것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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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구조의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고용 불안정성을 극도로 높이고 있고,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약자로 만들고 중간층의 몰락을 재촉해 사회를 '20 대 80의 사회'로 급속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환을 맞이하여 오늘날 많은 대학생들은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맞서 '20 대 80의 사회'를 변혁시키려기 보다는, 그러한 전환에 적응해 20%의 대열에 끼이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80%도 크게 보면 국민의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운명을 앞으로 겪게 될 것이다. 때문에 모든 대학생들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일지라도 80%에 해당하는 이들은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20%에 끼이기 위한 노력이 치열해 질수록 '20 대 80의 사회'는 더욱 견고한 구조로 정착하고, 80%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배가될 것이다. 그리고 설령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20%의 대열에 끼이게 된다고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모는 구조 속에서 누리는 '행복'이란 결국 반사회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회성을 결여한 행복의 추구란 결국 '허무주의'의 추구에 불과하다. 허무주의에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 자체를 착취의 영역으로 포섭하고 포획하는 메커니즘인 황금과 황금지배를 보장하는 권력이 우상으로 격상하고, 그러한 메커니즘으로 포섭되지 않는 모든 인간적-사회적 가치들이 부정되고 파괴된다. 허무주의에서는 황금신의 지배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불행이 외면되고, 사회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사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허망한 것으로 배격된다. 허무주의에서는 사회과정에 대한 진지한 지성적 성찰과 변혁적 실천 등이 냉소의 대상이 된다. 허무주의는 타인의 행복과 고통 위에 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체념과 절망을 강제한다. 허무주의가 판치는 곳에서는 황금신의 지배하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불행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허무주의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1980년대의 젊은이들이 사회 속에 만연되어 있는 허무주의를 깨뜨리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한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이러한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지 않을 수 없다. 다수대중이 겪는 사회적 고통이 커지는 가운데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힘찬 행보에 나서고 있는 시점에 많은 젊은이들이 오히려 허무주의를 전파하는 전도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만연하고 있는 이러한 허무주의는 그러나 젊은이 자신의 본래적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이 그들을 허무주의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가정과 학교가 행한 역할, 대학생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 정치지형의 변화, 한국자본주의의 문화적 능력의 제고, 한국사회의 급속한 신자유주의적 개편 등이 그들에게 허무주의를 만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허무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현상이 비록 그들 자신의 탓이 아닐지라도 그 직접적인 피해자는 젊은이들 자신이며, 그러한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도 일차적으로는 젊은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허무주의는 젊은이들에게서 사회성을 지닌 인간으로 무한히 성장해갈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가고, 지성과 비판적 실천의식을 마비시키는 독버섯이다. 이 점에서 허무주의의 극복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당면한 최대의 당면과제이다.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그 극복을 위한 젊은이들 자신의 움직임은 참으로 소중하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바치는 젊은이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젊은이들에 대한 희망을 결코 저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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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퍼온글] 교육사령부를 해체하라 - 홍세화

'교육사령부'를 해체하라

[한겨레 2005.06.01 19:08:00]



[한겨레] “전시 좌경학생 지도 및 교원. 교직단체 대책 : 순화가 곤란한 학생은
관계기관과 협조하여 격리 조치한다. 배후 조종 교사는 격리 차원에서
교원징계위원회에 회부해야 한다. 학교장은 관련 교사를 ‘전시범죄 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위반으로 수사기관에 고발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의 ‘예비검속’을 돌아보게 하는 이 지침은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유물이 아니다. ‘민주화된 시대’ 노무현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의
작품이다. 그들은 최근에 “학생과 교사를 ‘좌경’과 ‘건전’으로 구분해
좌경학생을 격리조치하고 좌경교사를 감찰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16개
시도교육청에 내려 보냈다. 학생들을 전시대비 학도호국단 체제로 편제하여,
학교장을 대대장으로, 교련교사 군복무 경력 교직원을 중대장으로, ‘건전한’
학생을 소대장급으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어도 그들의 발상은 식민지
때나 권위주의 독재 시기 그대로다. 이 참에 교육인적자원부를 그들의 정신과
구실에 맞게 교육사령부로, 교육부 장관과 관료를 사령관과 참모로 바꿔 부르기로
하자.

군국주의 일본이 이땅에 학교를 세운 일차적 목적은 황국신민화에 있었다. 조선
백성의 민족적 정체성을 스스로 배반하고 일왕한테 충성하는 의식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학교의 일차적 목적이었다. 둘째 목적은 전시동원 체제의 요구에 따른
총알받이가 되도록 미리 훈련시키는 교육장으로서의 학교였다. 셋째 목적은 식민지
중간관리자 양성, 곧 식민지 ‘마름’ 양성에 있었다. 지주가 마름을 통해
소작농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듯, 식민지 수탈과 관리는 식민지 출신 중간
관리자들을 통하여 지배할 때 더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군국주의 일본의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절한 학교는 그 구조부터 달랐다.

일반적인 학교가 아닌 군사학교를 본뜬 것이다. 우리네 초·중·고등학교가
‘수위실=위병소’, ‘운동장=연병장’, ‘조회대=사열대’의 병영구조를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앞으로 나란히!”로 시작되는 학교생활을
통하여 권위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인 군사문화를 내면화하면서 기존 체제와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의식을 형성했다. 군국주의 일본이 사라졌고 권위주의
독재정권이 물러났지만, 학교 구조는 예전 그대로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교육장이란 구실은 그대로 남은 것이다. 일왕에게 충성하던 의식을 길러내던
곳에서 안보와 반공의식 세뇌의 장으로, 다시 질서의식과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는
곳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늘날 이주 노동자들의 처지가 사장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듯이, 학교
분위기와 교사와 학생의 일상은 교장에 따라 달라진다. 걸핏하면
교사·학생·학부형이 ‘교육의 세 주체’라고 강조하지만, 교사회, 학생회는 아예
없거나 유명무실하고, 학교의 실제 주인은 ‘대대장’인 교장인 게 현실이다.

교육사령부에 충성해야 대대장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 마름은
단위학교에서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교육사령부-교육청-교장-교감-부장-교사-학생으로 일사불란하게 관철된다.

교육사령부 참모에게 일선교사는 말단 소총부대 소대장이다. 역대 정권의
충성스런 마름 노릇으로 닳고닳은 교육사령부는 노회하게도 학부모들을 앞장세워
소대장 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민주화된 시대’에 맞게 학교를 민주화하는 일이다. 그것은 ‘대대장’
임용제도를 바꾸는 데서 시작되며, 구시대적 ‘마름정신’의 본산인 교육사령부를
해체해야 가능할 것이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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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6-0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분노에 살이 떨리는군요. 미친 자본주의 하의 학교가 체제순응적인 양순한 머저리들을 길러내는 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좌경학생이란 허울 좋은 잣대로 그나마 깨어있는 학생들마저 체에 걸러 버리려는 저 세뇌권력의 매카시즘, 그 음탕함, 폭력성에 토할 것 같습니다.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에 나오는 폐쇄 병동이나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이나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추천하고 제 서재에 좀 옮겨 가겠습니다.

알고싶다 2005-06-05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런데 어떻게 퍼가는거죠? 서재 연지 두달도 안된지라.... 뻘쭘 ^^; (후다닥 도망간다)

라주미힌 2005-06-05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페이지의 하단에 보면 추천하기, 퍼오기 가 있는데.. 거기서 퍼오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좋은 주말 되십시오.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


△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 발행인

아인슈타인이 생애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만약 다시 일생을 살게 된다면 결코 과학자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로 이 세계가 가공할 핵전쟁의 위험 속에 빠진 현실에 절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하고 싶은 유일한 직업은 지식추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 즉, 배관공과 같은 일이라고 토로하였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드물기는 하지만, 예외적인 게 아니다.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과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로 지구가 갈수록 거주불가능한 곳으로 되어간다는 데 대하여 크게 우려하고 괴로워하면서, 종래의 연구방식을 변경하거나 포기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과학자들은 아마도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과 양심의 소유자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향을 떠나서, 정말 문제는 이러한 과학자들을 견딜 수 없게 하는 현대적 과학연구의 근본경향일 것이다.

비엔나(빈) 출신의 미국 콜럼비아 대학 교수였던 생화학자 에르빈 샤르가프는 DNA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 결정적인 공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90살을 훨씬 넘긴 긴 생애 동안 서양 고전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와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에 걸쳐 저술활동을 계속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은 현대 과학문명과 과학연구의 현실에 대한 그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비판적 에세이들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자연과학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리고 외경의 염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장엄함이라고 하는 관점에 대한 쉴새없는 공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연과학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한 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사라질 운명에 있다. 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에 의한 인간영혼의 고체화와 물질화에 이어서 이제 인간의 신체도 단순한 연구재료가 되어버렸다…인간의 태아가 다른 인간을 위한 재료로서 생산되는 미래의 공장은 결코 더 이상 공상이 아니다.” 샤르가프는 상황이 이렇게 뒤틀려버리게 된 것은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악마의 교의(敎義)’가 현대과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전형적인 예가 핵분열과 생명조작 기술이라고 지적한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인간 초기생명을 재료 이용 이번 ‘쾌거’에 대해
윤리의식 부재 비판도 가능 무병장수 현실 된다면 가공할 디스토피아일 것

국내의 한 연구팀이 배아줄기세포 연구라는 이른바 첨단 생명공학 분야에서 또다시 선구적인 업적을 세웠다고 해서 지금 한국사회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연구가 구체적으로 자기들에게 어떤 이익을 어떻게 가져다줄 것인지 아무런 이해도 없이 덮어놓고 환호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연구의 성과로 한국인들의 국제적 위신이 크게 높아졌다는 의식이 이런 분위기의 바탕에 깔려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 연구의 결과로 앞으로 막대한 부가가치가 생겨나서 한국의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 거라고 하지 않는가. 연구 책임자가 어느새 민족의 영웅이 되고, 따라서 그에게 국가 최고급의 경호를 포함한 온갖 특혜조치가 강구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 연구가 조만간 난치병 극복에 획기적인 의료기술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난치병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는 아마도 이보다 더 큰 복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에는 허다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 연구가 쉽사리 인간복제로 이어질 위험성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동안 제기되어온 연구방식 자체의 비윤리성도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연구는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맹아상태의 인간의 초기생명을 ‘재료로’ 이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따져 보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기초적인 도덕적 기반을 훼손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른바 문명국가들에서 생명윤리의 이름으로 이런 종류의 연구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과학기술적 ‘쾌거’는 그러한 윤리의식 혹은 윤리적 규제의 부재의 소산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말 민족적 긍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찬양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연구에 대한 열광적인 찬양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냉철한 성찰과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한겨레>의 조홍섭 기자는 이 상황에 대하여 “어딘가 전체주의 냄새가 난다”고 썼다. 나는 작고한 일본의 정치사상가 후지타 쇼조의 말을 빌려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생명조작에 의한 의료기술의 궁극적 지향은 무병장수의 세상이라고 한다. 무병장수의 꿈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욕망이겠지만, 그러나 정말 질병없는 세상이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가공할 디스토피아일 것인가. 모든 전통문화는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근본은 우리가 인간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가르쳐왔다. 삶의 기술은 본질적으로 고통을 견디고, 죽음에 순응하는 기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질병도, 고통도, 시련도, 죽음도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은 심히 공허하고 천박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성장이라는 신(神)을 오랫동안 섬겨오는 동안에 어느새 이러한 삶의 근본이치도 망각해버릴 만큼 우리의 정신은 마비되고 빈곤해졌는지 모른다.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는 실로 무서운 억압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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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06-03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종철씨에게 고마워 하셔야죠 ^^; 이런 글들은 요즘에 소금과 같다고 생각되어 여기 저기서 퍼오고 있습니다.

알고싶다 2005-06-0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쓴 취지에 대단히 공감은 하지만, 질병없는 세상은 디스토피아이며, 질병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삶을 공허하고 천박하게 만드는 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글쓴이의 생각에는 동조할 수가 없군요.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의 갱생을 위하여 새우잠을 자면서 현대 의학을 발전시키는 많은 의학자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굳이 정신의학을 예로 들자면, 물론 어느 정도의 슬픔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회란 없으니까요. 불완전한 사회를 보고 어느 정도 분노하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울증은 없어져야 합니다. 슬픔이 정상적인 것이라면 우울증은 병리적인 것입니다.

라주미힌 2005-06-0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네요. 기계가 되어 불사의 몸이 되는 세계.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그 한계가 존재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아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순환이 정상적인 것이라면, 그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병리적인 것입니다. 의학자들의 노고가 격하되어서는 아니되겠지만, 그러한 노고가 인류에게만(생태계의 수 많은 생명체들을 제외한) 그 중에서도 특정 소수의 계층(자본, 권력을 소유한 자들)에게만 그러한 혜택이 돌아간다면, 그것을 디스토피아로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인간의 고통이 줄어들면, 행복 또한 줄어듭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도 있듯이 생명의 가치는 수명의 연장만큼이나 줄어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늘어난 수명은 누군가의 또는 어떤 생명체의 생존을 먹고 자라난 독이니까요.

알고싶다 2005-06-0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이 교회나 성당에 다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세포 유전자를 핵이 제거된 난자와 융합하는 것을 의학적 관점에서는 생명의 탄생이라 부르지 않음에도 이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독교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데, 죽음을 방해하는 의료 기술의 발달이 병리적인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보니 그렇지 않은 듯 하군요. 내세에서라도 영생을 추구하는 면이 니체가 비판한 기독교의 본질이었으니까요. 하기야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황교수의 연구가 인간 복제의 가능성을 연 것은 사실이니 윤리적인 고려가 행해져야 함은 마땅하고 라주미힌님이 김종철씨에게 공감하는 점도 바로 이 점일 겁니다. 물론, 이런 의학적인 성취가 여타 생명체들을 배제한 인류에게만 행복을 준다면 문제겠지요. 그러나 수의학 및 축산업 등에서 동물의 생명 활동을 증진시키는 데에도 생명공학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소수 계층에게만 그러한 혜택(역설적이게도 라주미힌님은 혜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네요)이 돌아가는 것도 문제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이 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의 연구의 프로세스를 중단하게 하는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컴퓨터의 발명은 부자와 빈자의 정보 격차를 초래했지만, 컴퓨터가 발명되지 않아야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컴퓨터는 민주주의의 기폭제 역할을 할 가능성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언론을 주도하는 언론이 개혁 언론이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보수적인 종이 신문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갈수록 인터넷 신문의 영향력이 강화되리라 봅니다.) 같이 언급해야 할 것은, 과학자들도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권력 집단이지만, 푸코의 지적대로 권력의 구조는 거시적이라기 보다는 미시적이라는 겁니다. 정치적 권력을 지닌 자들과 과학 전문가 집단의 관계가 반드시 이해타산적 타협의 속성을 띄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은하철도999를 언급하셨는데, 감정이 없는 기계인간으로 영원히 사는 것보다는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한 철이의 심정이 님에게 투영되었겠군요. 맞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어둡고 괴로운 현실과 극을 이루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기쁨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기쁨은 더욱 황홀한 희열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을 더욱 많이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이 슬픔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연장하면 그 생명체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자명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님의 그 생각에 공감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제가 중병을 앓아 몇 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요.

라주미힌 2005-06-0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기에 확정지어서 말할 수 없는 부분이구요. 여기서 순수한 생명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배아는 당연히 생명체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는 '인간성의 유무'일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윤리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것일테고요.(전 의학적 관점만이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상당히 철학적인 문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현실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거든요.
대체로 알리님의 생각과 크게 틀리지 않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알리님은 인간의 시선으로 인간의 편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고, 전 그 틀 안에서만 있어왔기에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의 만행이 점점 가속화되고 무자비해지고 있다는 것이 우려한다는 점입니다. 수의학, 축산업에서 축적된 생명공학이 짐승을 위한 것인가요? 이것은 마치 야생동물을 잡아다가 야생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호혜적인 행위로 착각하는 것과 괕습니다. 이러한 착각이 가져온 재앙은 지구상의 생명체에 대한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님께서 인지하고 계실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과학자와 의학자들이 윤리적인 책임의식을 가지고 연구에 임해야 할 당위성을 내포하게 됩니다. 미시적인 집단(?)이라면 거시적인 집단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만큼의 영향력을 보여줘야하고,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따지면 연구 못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부분이 있다면 연구에만 몰두하라는 식(?)의 지지(현 우리나라의 상태)는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당연히 윤리적이어야 하고, 그들의 연구성과가 아무리 상업적으로 뛰어나고, 동기가 훌륭하더라도 문제의식의 부제는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장치의 철저한 보완과 감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현실이 그런가요? 인간이 겪는 고통과 슬픔, 참으로 참기가 힘듭니다. 그것을 줄이겠다는데 어찌 반대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인간들 틈에서도 '가치있는 생명'이 있고, '좀 죽어도 상관없는 생명'들이 있는 세상속에서 너무 큰 것을 바라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알리님의 리플은 다시 한번 깊은 생각들을 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

알고싶다 2005-06-0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저도 라주미힌님 글을 보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인간의 편의만 대변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조건없는 사랑이 모든 생명체에게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저의 두서없는 댓글을 통해서 라주미힌님에게 잘 전달되지 못한것 같네요. 인간들 틈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하는 많은 귀중한 생명들! 사랑해야겠지요! 심지어 저는 여름철에 휴가가서도 제 몸에 달라붙은 모기 한마리 안죽인답니다~ (못죽이는게 아니라) 이런, 어젯밤꿈에서도 바퀴벌레들이 방에서 알을 까고 계속 번식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인상만 찌푸리던 기억이 나네요. (솔직히 귀엽지는 않잖아요. ^^*) 이런 괴상(?)한 꿈을 꾸는 걸 보니 아무래도 라주미힌님과의 토론에 대해 너무 심취했나봐요, 흐흐. 라주미힌님은 좋은 꿈 꾸세요.
 

역사적인 순간, 똥이 마렵다

오월 광주의 성스러움을 일상으로 끌어내린 <오월의 신부>, 그리고 <봄날>

▣ 장정일/ 소설가

황지우의 희곡 <오월의 신부>(문학과 지성사, 2000)에는 ‘배설 모티브’가 자주 나온다. 특히 도청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 시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계엄군이 쳐들어오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한 주인공이 아랫도리를 꼬면서 “이렇게 귀중한 시간에 똥이 매려우면 되겄냐?”라고 익살을 부린다.

네 속에 빨갱이 있다!!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이 장면은 늘 엄숙하게 말해지는 광주민중항쟁을 일상으로 끌어내리면서, 동시에 성화(聖化)한다. 작가는 그 대목을 통해, 광주민중항쟁은 하늘에서 떨어진 고귀한 영웅이 아니라 공포 앞에서 변의를 느끼는 연약하고 하잘것없는 인간들이 치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이 지각되어야, 광주의 성스러움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이 희곡에는 ‘지상으로 끌어내려진 성화’만 아니라, 곧장 ‘천상으로 들어올려진 성화’도 있다. 5월22일 낮 한때, 계엄군을 물리친 5만명의 시민이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하는 8장은 물줄기가 뻗는 도청의 분수를 한 그루 나무로 형상화해놓고 한바탕 씻김굿을 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이때 밥을 나누어 먹으며 피흘려 싸워 지킨 공동체가, 일순 아무런 억압 없는 천상의 나라로 화한다.

시간과 무대, 등장인물의 제약을 받는 희곡은 상징과 압축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추출하려 한다. 반면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은 그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이 소설에 묘사된 폭력의 수위는 한국 문학사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을 낳은 폭력의 기원이다. 광주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5월18일, 공수부대원의 만행을 목격한 오십대 초반의 남자는 “틀림없어. 그놈들은 김일성이가 남파시킨 무장공비들”이라며 112로 신고해야 한다고 울부짖는다.

계엄군의 잔학을 목격한 광주 시민은 특히 공수부대원들을 “공산당보다 더 악독하고 잔인무도한 짐승”으로 부른다. 그 열흘 동안 어린 학생들은 “공산당이 쳐들어와”서 학교가 휴교하는 줄 알 정도였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전두환과 신군부의 지시를 받은 말단 지휘관들은 “대한민국이 빨갱이놈들에게 적화되는냐 마느냐는 바로 우리 어깨에 달려 있”다면서, 거리에 나선 시위대와 광주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계엄군이 ‘너희 속에 빨갱이 있다!’고 아무리 선무 공작을 해도, 시민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때 광주는, 시위를 하는 사람이나 진압을 하는 사람이나 서로가 상대방을 향해 “이 빨갱이새끼들아! 네놈들은 김일성이나 똑같은 새끼들야!”라고 선공(先攻)을 하고 선방(善防)을 펼쳐야 하는, 한국 근대사의 극점(極點)을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갱이가 한국 사회의 절대적 타자라는 것과, 권력을 가진 자만이 피권력자의 이마에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계엄사는 25일, 서울역 앞 간첩 체포사건과 광주 도청 안에서의 독침사건을 조작하는 데 성공하여 가까스로 광주라는 제어하기 힘든 불길에 낙인을 찍는 데 성공했다. 그 소식이 전국을 강타하는 순간, 광주 시민은 자신들의 패배를 예감했다. 그날을 고비로 전의를 상실한 시민들은 더 이상 모이지 않았다. 또 죽음이 두려워서거나 여러 가지 정파적 이해와 지역적 편견 때문에 봉쇄된 광주로 달려가지 않았던 사람들 역시 ‘그들은 빨갱이였어’라며 비겁한 양심을 위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80년 5월의 광주가 절해고도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고, 그 흔한 민주화 인사들이 송두율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 까닭이다.

아직 기소되지 않은 레드 콤플렉스

이 작품은 대학 1학년생인 명기가 도청 진압 직후, 6·25와 가짜 간첩단 사건으로 섬 전체가 풍비박산 나버린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5·18의 원인이 분단 체제에 있다는 명백한 암시다.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광주에 빨갱이 낙인을 찍는 데 성공함으로써 최고 권좌에 올랐으나, 1996년 군사반란죄와 5·18특별법에 의해 기소되어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우리들을 이중인격자로 만들었던, 우리 안의 레드 콤플렉스는 아직껏 기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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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제80호 2005년 1-2월호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

   강양구

 

  지난 11월 과학기술부는 황우석 교수에게 2005년에 265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는 개별 과학자에게 지원하는 금액으로는 파격적인 것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하지만 이런 과학기술부의 방침은 민주노동당 등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이런 파격적인 지원에 당연히 따라야 할 공식적인 선정 과정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번 지원은 ‘이종간 장기이식’, ‘인간배아 복제 연구’ 등 첨예한 윤리적 논란의 중심에 있는 연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이런 ‘정당한’ 지원철회 요구는 언론과 정부로부터 묵살당했다.1) 더 놀라운 사실도 있다. 민주노동당이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무서운 것이 없어 보이던 민주노동당의 한 ‘스타 의원’도 황 교수에 대한 문제제기를 ‘자살골’에 비유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일도 있다. 지난 11월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의원들이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황우석 교수와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의원들이었다. 일부 의원들은 황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보조석에 앉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평소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없어 하는 의원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면 ‘진풍경’이었다. 그날 강연회에서 황 교수는 매우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연구에 쓰인 난자를 어떻게 얻었는지, 여성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난자를 기증했는지”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이 황 교수를 불편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언론에서는 ‘과학기술과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황 교수의 모습만이1)보도되었다.2)

  잠시 살펴본 것처럼 2004년은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기자들에게는 아주 ‘보람찬’ 한해였을 듯싶다. 진보, 보수 구분 없이 전 언론사 과학기술 담당기자들이 황우석 교수를 ‘스타 과학자’로 만드는 데 나섰고, 그 결과 그는 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과학기술 담당기자들이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슈를 만드는 것이 드문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자들로서는 뿌듯했을 법도 하다. 물론 인간배아 복제 실험이라는 감히 다른 나라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미국의 과학잡지《사이언스》에 게재한 황 교수의 능력(?)이 그 바탕이 됐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모두가 한목소리로 황우석 교수와 생명공학 띄우기에 나설 때, 명색이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기자로서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황 교수나 생명공학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학기술 발전의 발목을 잡는 ‘반(反)과학기술주의자’라는 비난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지내면서, 언론이 과학기술을 보도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이 글은 이런 개인적인 고민의 결과물이다.

 

  과학기술 보도, 어디로 가는가

  최근 들어 언론의 과학기술 관련 보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과학기술이 삶에 주는 큰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관심의 증가는 반길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관심의 증가와 함께 언론의 과학기술 관련 보도에 대한 문제점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 보도가 양적으로는 늘었지만 그 질은 여전히 낮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과학기술 보도의 질에 대한 비판은 보통 ‘전문성의 결핍’에 대한 지적으로 모아진다.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기자를 만나는 일이 제일 싫다”며 언론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심지어 경멸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인식 때문이다. 과학기술 보도에는 아주 높은 전문성이 요구되는데, 비전문가인 기자들이 과학기술 연구를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왜곡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 보도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서는 흔히 언론의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성 강화’가 중요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과학기술자들뿐만 아니라 언론 스스로도 이것에는 깊은 공감을 표시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과학기술 분야를 오래 담당해온 기자들이 아예 ‘과학기술 전문기자’를 자칭하며 과학기술만 담당하는 게 큰 추세로 자리잡았다. 더 나아가 일부 언론에서는 전문인력을 기자로 채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이미〈동아일보〉의 경우 총 10여명의 이공계 출신 석사 졸업 이상자를 과학기술 담당기자로 뽑아 잡지와 신문에 배치했고,〈중앙일보〉와〈한겨레〉에서는 의사를 공채해 의료분야를 전담하게 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번 근본적인 의문을 품어봄직하다. 도대체 과학기술 보도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 대개 언론은 과학기술 시대에 과학기술(자)의 목소리를 잘 대변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과학 기사의 배포를 위해 최초로 만들어진 통신사인 ‘사이언스 서비스’가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래 언론은 지속적으로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3)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보도가 지향하는 것도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언론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할수록 과학기술(자)과 대중의 거리가 가까워졌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대중은 과연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에 대해서 과거에 비해서 더 호의적인가? 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답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갈수록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커지고 있다. 그 불신의 정도를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최소한 그 추이를 짐작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 한가지 방법으로서 대중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영화 속에서 과학기술이 어떤 식으로 비춰지는지 살펴보자. 영화 속에 비친 과학기술 이미지를 계속 추적해온 한 과학기술 학자는 “영화 속에 비춰지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유토피아보다 디스토피아의 전망이 우세하며, 과학자의 이미지 역시 이타적이고 선하기보다는 사악하고 미친 과학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한다.4) 상업적인 영화들이 대중들의 정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영화 속 과학기술 이미지는 대중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근본적인 우려와 불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중은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대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져올 미래를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지적도 살펴보자.《코스모스》,《콘택트》등의 저자로 국내에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평생을 ‘과학기술 대중화’에 노력해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책인《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미국에만 국한해 볼 때 ‘과학기술 대중화’는 실패했다고 단언하고 있다.5) 대중들이 현대 과학기술에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현대 과학기술이 부정하는 ‘사이비 과학’이나 ‘반(反)과학’에 더 경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이건의 완고한 ‘과학주의’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그의 지적을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와 연관해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비록 세이건이 ‘과학기술 대중화’가 실패한 한가지 원인으로 언론의 상업적 접근을 지적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언론은 훨씬더 일찍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졌고, 그 질도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과학기술자의 성과를 언론 또는 대중에게 매개하는 세이건과 같은 훌륭한 과학 저술가들도 다수 활동하고 있다. 이런 미국에서도 과학기술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은 현대 과학기술이 주는 여러가지 ‘확신’들에 반감을 갖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더 높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는 현실, 이 현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상황에서 ‘전문성 강화’라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해법인가? 언론의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성 강화가 언론과 과학기술자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대중과 과학기술자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더 멀게 하는 것은 아닐까?

 

  과학기술 보도의 현실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의 현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 한 언론사 과학기술 담당기자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보도의 특징을 크게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요약했다. ‘최초’의 힘, 경제적 관점, 애국주의, 재미있는 ‘이야기’.6) 이 네가지는 사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보도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과학기술 보도의 특징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먼저 기자들은 그 속성상 끊임없이 ‘최초’를 좇는다. 특히 항상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주목을 받는 과학기술 영역의 경우 이 ‘최초’가 더욱더 힘을 발휘하는 분야이다. 기자들은 “이런저런 자연의 비밀이 국내에서 처음 규명됐다”, “이런 구조의 물질이 개발되기는 이번이 세계 처음이다” 등의 의미를 과학기술 연구를 보도할 때 찾고자 한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특별히 주목받아 미국의 과학잡지《사이언스》에 실린 것도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 복제 줄기세포를 추출해냈기 때문이다.

  한편 과학기술이야말로 현재와 미래의 경제성장 동력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도 과학기술 보도의 큰 특징이다. 보도내용 가운데는 “이것이 실용화 또는 상용화하면 수입 대체효과는 ○○○억원에 이를 것으로 기대된다”, “이 분야의 미래 세계시장은 ○○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등으로 연구결과를 경제가치로 환산하는 표현이 빈번히 등장한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해서도 각 언론들이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것은 “10년 후 황우석 교수 연구가 우리나라를 먹여살린다”는 내용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민족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우리나라에서 ‘애국주의’가 과학기술 보도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과학기술 선진국에서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나라 과학기술자가 해냈다는 사실은 과학기술 연구 자체보다 더 대중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황우석 교수에 대한 언론보도에서 “태극기를 꽂고 왔다”는 제목이 등장한 것은 과학기술 보도의 ‘애국주의’를 가장 선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7)

  과학기술은 재미있는 읽을거리로 보도되기도 한다. 최근 각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과학기술면이나 국제면의 과학기술 기사에서 특히 이런 보도를 찾기 쉽다. 이 경우 새로운 과학기술이 등장하면서 도래할 장밋빛 미래가 은근히 제시되곤 한다.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을 정복할 길을 열었다”는 식의 보도 역시 이런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여기서 제시한 과학기술 보도의 네가지 특징은 과학기술이 언론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과학기술이야말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과학주의’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사회와 비교적 무관하게 발전하며 그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 사회의 발전 방향을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런 통념이야말로 과학기술 보도를 재구성하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유럽의 근대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적어도 과학기술에 대한 접근만을 놓고 봤을 때 언론은 아직 18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세가지 특징

  언론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주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것과 달리, 정작 현대 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세기 현대 과학기술은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현대 과학기술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특징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이 글의 과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가장 중요한 특징 세가지를 포착할 수는 있다.
 

  (1) 자본의 힘

  우선 과학기술에 대한 자본의 영향력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물론 여전히 국가는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과 관련한 자원을 배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미 과학기술에 대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자본이지 국가가 아니다. 단적으로 2005년도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예산은 7조원 정도지만, 삼성의 연구개발 예산은 삼성전자 4조 8,000억원을 포함해 총 7조 3,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여기에 다른 기업들의 연구개발 예산을 넣으면 자본이 주도하는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은 정부의 그것을 압도한다. 더구나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 7조원의 상당 부분은 기업의 연구개발 예산이 쓰이는 분야를 보조하거나, 그것과 경쟁하는 용도로 쓰일 게 뻔하다. 과학기술 영역의 경우에는 국가와 자본의 시각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학기술에 자본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과학기술 연구 현장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8) 미국의 경우 과학기술 연구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대학은 기업의 막대한 후원에 의존하게 되면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변화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생명공학처럼 이윤추구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는 장려되는 반면 생태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여러 분야들은 지역사회, 환경 등을 고려할 때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존폐 위기를 맞고 있다. 심지어 유전자조작 작물(GMO)을 생산하는 초국적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대학의 경우 GMO의 안전성에 대한 연구가 제약을 받게 됐다.

  과학기술 연구와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관행이 사라진 것도 큰 문제다. 우선 기업들이 연구를 설정하는 데 깊숙이 개입하고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과학기술자 사이에 연구 과정에서 얻은 여러가지 정보를 공개하는 전통적인 관행이 사실상 중단됐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연구와 관련된 비밀을 지킬 것을 과학기술자에게 요구하고, 이를 승낙할 때만 연구비를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 상당수의 과학기술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들도 다른 실험실보다 더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내, 기업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은 현재의 과학기술 연구를 ‘전쟁’으로 인식한다. 이기면 막대한 ‘부’가 약속되는. 과학기술 연구를 전쟁으로 인식하는 한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관행이 설 자리는 없다.

  이렇게 기업이 깊숙이 개입한 과학기술 연구의 성과는 고스란히 기업의 것으로 귀결된다. 영국의 노벨상 수상 생물학자인 존 설스턴은 영국 쪽 책임자로 10여년이 넘게 참가한 ‘인간 유전체(게놈) 프로젝트’를 회고한 책에서 이런 현대 과학기술의 경향을 통렬히 고발한다.9) 현대 과학의 최전선에서 연구를 수행한 그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이 시대 자본이 주도하는 과학기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세기에는 과학과 인간성 사이에 균열이 있었다…더욱 좋지 않은 것은 개발과 탐구가 단기 이윤을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향후 4반세기의 이익을 위해 개인, 기업과 국가가 광적으로 성급하게 서로 경쟁하도록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거대한 초국적기업은 이제 국가보다 더 강력해졌다. 도처에서 그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부자 나라의 수도에서 집중적으로 로비를 하는 경우, 그 힘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우리는 지금 개인 소유권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공공의 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유전자 시대의 적들》385, 400, 403쪽)
 

  (2) 무너지는 과학기술자

  과학기술 연구가 그 기반부터 기업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학기술자 공동체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현실은 암담하다. 현대 과학기술의 두번째 특징은 과학기술자 공동체가 이미 ‘자기비판을 통한 쇄신’과 같은 ‘반성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우선 과학기술 활동이 분화되고 개별 분야의 전문성이 심화되면서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검증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초끈 이론’이라는 물리학의 최신 이론이 있다. 우습게도 우리가 접하는 이 ‘초끈 이론’은 최소한 두 단계의 중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초끈 이론’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들이 내놓은 논문을 이해할 수 있는 과학자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초끈 이론’에 대한 최초 논문을 해설하는 2차 논문이 나온 뒤에야, 과학 저술가나 언론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최초 논문의 똑같은 진술에 대해서 2차 논문들조차도 상이한 해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최초 논문의 진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과학자들끼리 논란을 벌이는 상황이 발생한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긴 했지만 현대 과학기술의 전 분야에 걸쳐 이와 같은 검증의 어려움이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과학기술자들은 의도적인 기만행위에 나서기도 한다. 연구결과에 대한 과학기술자 공동체 내의 검증이 어려워진 현실을 틈타 그 결과를 조작하거나, 다른 연구를 표절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2002년 과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던, 물리학자 얀 헨드릭 쇤의 논문조작 사건일 것이다. 독일출신의 30대 초반의 물리학자인 쇤은 1997년 미국의 벨 연구소에 자리를 잡은 뒤 약 4년여에 걸쳐 약 100여편의 논문을 쏟아내며 동료 물리학자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4년여에 걸친 쇤의 연구는 모두 날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아무리 애를 써도 쇤의 실험을 재연하는 데 실패한 몇몇 과학자들이 실험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결국 쇤이 데이터를 날조하는 방법을 통해 연구결과를 조작해왔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과학계는 수차례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저명한 연구소에서 실험 관리가 허술하게 이루어졌다는 점,《네이처》,《사이언스》같은 유명한 잡지에도 쇤의 조작된 연구가 25편이나 실렸다는 점 등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들 연구소나 유명 과학잡지들이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기업으로부터 관심을 끌 수 있는 획기적인 연구성과에 목을 매면서 과학기술 연구의 검증을 소홀히 한 것이다.10)

  사실 이런 기만행위는 오히려 부분적인 문제이다. 이미《네이처》나《사이언스》같은 유명한 과학잡지들조차도 초국적기업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2002년에 있었던 ‘GMO의 유전자 전이’ 연구에 대한《네이처》의 미심쩍은 태도일 것이다. 버클리대학의 대학원생이자 환경과학자인 데이비드 퀴스트와 그의 지도교수인 멕시코인 생물학자 이그나시오 차펠라는 멕시코의 유전자조작 옥수수의 유전자가 인근 농장에서 재배되는 토착 종자에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2001년 11월에《네이처》에 보고됐고, 2002년 4월에《네이처》에 게재될 예정이었다. 만약 이 논문이《네이처》에 발표된다면 그 파장은 매우 컸을 것이다. 하지만《네이처》는 이 논문을 싣는 대신 그것을 반박하는 두편의 글을 게재했다.《네이처》가 GMO를 생산하는 초국적기업의 압력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네이처》에 실린 반박 글의 저자들이 모두 버클리대학에, GMO를 생산하는 초국적기업 노바티스의 막대한 지원금을 끌어오는 데 직접 관련된 인물이라는 사실만이 진실을 짐작케 할 뿐이다.11)《사이언스》역시 만만치 않다.《사이언스》는 2003년 1월에 생명공학 기업인 몬산토의 후원을 받고 있는 과학자 로저 비치가 쓴 GMO 지지 글을 게재해 큰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업과 과학기술자 사이에 일종의 유착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기업들은 때로 자기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연구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한다. 쉘과 같은 석유 메이저들이 지구온난화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해온 것은 그 단적인 예다. 과학기술자들이 기업으로부터 연구비를 받는 것을 넘어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는 경우도 이런 유착관계에 해당된다. 신약의 부작용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주식을 갖고 있는 기업의 주가가 떨어질 것을 감수하면서 부정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데는 큰 이해갈등이 따를 것이다.
 

  (3) 되돌릴 수 없는 현대 과학기술

  앞에서 살펴본 현대 과학기술의 두가지 특징이 다분히 현상적인 것이라면, 지금부터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본질에 관계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 과학기술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그 효과 자체가 되돌릴 수 없다는 큰 특징을 갖는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생명공학, 나노기술, 로봇공학, 또 이 세가지를 극적으로 결합시켜주는 정보통신(IT) 기술의 발달은 과학기술자 스스로도 그 결과를 가늠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과학기술자의 불안감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빌 조이의〈미래에 우리는 왜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이다.12) 2000년 4월에《와이어드》에 발표한 이 글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토론을 촉발시키고 있다. ‘IT업계의 현자’로 칭송받는 과학기술자이자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창립자인 그는 이 글에서 “생명공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의 결합이 가져올 미래 과학기술이 결코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이 세가지 기술이 ‘인류의 절멸’에 이르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을 묵시론적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다. 그는 대신 과학을 인간을 위한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타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과 같은 강력한 윤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빌 조이의 글이 현대 과학기술의 압도적 영향력과 그 돌이킬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과학기술자 내부의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라면, 최근 국내외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는 현대 과학기술의 힘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특히〈한겨레〉에서 계속 연재하고 있는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에서 보이는 인문·사회과학 지식인들의 모습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유전자 복제’를 놓고 황우석을 만난 뒤 글을 쓴 왕년의 ‘진보적 지식인’ 이진경 교수는 단연 돋보인다.13)

  이진경 교수는 황우석 교수에게 끊임없이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의 ‘인위적인 변이’가 가능해졌다면, 이제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변이’의 가능성을 봐야 한다”는 식의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심지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황우석 교수에게 실망했는지 “생물학 자체가 충분히 정치적인 것이 됐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하지만 이진경이 몰랐을 뿐이지 현대 과학기술은 그 공공성 때문에 처음부터 충분히 정치적이었다. 현대 과학기술은 그 영향의 범위가 국지적이고 매우 포괄적이기 때문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 연구와 같은 최신의 과학기술 연구는 처음부터 그 공공성 때문에 매우 정치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대부분의 현대 과학기술이 그 연구개발 재원을 시민들의 세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다는 점이나 공공성을 갖는 과학기술 연구에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과학기술 활동을 ‘탈정치화’하려는 시도들이야말로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당장 황우석 교수 역시, 글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2005년에 세금 265억원을 지원받을 예정이다.

  이진경 교수가 과학소설(SF)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이런 현대 과학기술 활동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과 이해가 결여된 탓으로 보인다. 사실 이진경 교수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의 글에서 과학주의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런 무비판적 태도야말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다르게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반(反)과학기술’이 아니라 과학기술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적 성찰의 부재이다.

 

  현대 과학기술에 포섭된 언론

  앞에서 거칠게나마 현대 과학기술의 세가지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언론은 과학기술의 변화된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이런 세가지 특징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가? 변화된 과학기술의 모습을 공론화하고 이에 대한 사회의 대응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자극했는가?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한가지 두드러진 예를 살펴보자. 앞에서 물리학자 얀 헨드릭 쇤의 과학 기만행위를 소개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상 최대의 과학 기만행위가 국내 언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주 흥미롭다. 황우석 교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평소 우리나라 언론들이 ‘맹신’하는《네이처》나《사이언스》는 2002년 10월 초 머릿기사로 쇤의 기만행위를 다루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언론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의혹이 제기된 시점인 그해 6월에〈중앙일보〉에 한번 보도되었고, 기만행위에 대한 조사결과가 발표된 9월 말에〈동아일보〉에 짤막한 기사가 실렸을 뿐이다.〈연합뉴스〉가〈뉴욕타임스〉를 인용해 꽤 긴 기사를 송고했지만 언론들이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은 것도 의아한 일이다. 언론들이 쇤의 기만행위를 몰랐을 리는 없다. 쇤의 기만행위를 다룬《네이처》에 같이 실린 말라리아 모기의 유전자 판독에 대한 기사는 거의 모든 언론에서 대서특필했기 때문이다. 한가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쇤의 ‘조작된 연구’가 나노기술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해 왔다는 점이다. 2002년 말은 우리나라가 나노기술개발촉진법을 제정하는 등 전세계적인 ‘나노기술 열풍’에 본격적으로 편승하던 때였다.

  이처럼 오늘날 언론은 현대 과학기술의 변화된 모습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과학기술 담당기자들은 정부, 기업, 외국의 과학기술 관련 잡지들에서 보도할 거리들을 찾는다. 이들 정부, 기업, 외국의 과학기술 관련 잡지들이야말로 앞에서 살펴본 현대 과학기술 활동의 변화를 선도하는 핵심 행위자들이다. 언론은 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들의 활동을 공고화, 재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보도함으로써 현재 진행되는 생명공학 연구의 방향을 시민들이 수긍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 분야에 정부의 예산이 더 많이 투입되도록 한다. 또 언론은 기업의 연구개발 활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해 비판적 접근을 차단한다. 물론 언론의 보도는 기업의 주가를 높이고 자본에 대한 과학기술의 예속을 더욱더 가속화한다. 언론을 통해 이런 과정이 반복될수록 기존 과학기술의 구조는 더욱더 단단해지고 발전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구조 속에서 언론은 기존 과학기술의 방향과 다른 흐름을 철저히 보도에서 배제한다. 지역사회, 인권, 환경 등을 고려한 과학기술은 그런 흐름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소중한 성과들도 언론에서 배제돼 아예 사회적 공론화의 기회를 잃는다. 그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구성원들이 합의만 한다면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과학기술 수준으로도 충분히 실현가능한 ‘사회적으로 유용한 과학기술’이 계속 포기된다. 이미 1960년대 말 영국 루카스 항공의 노동자들이 간파했던 것처럼 “소리의 속도보다 빨리 가는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적 정교함을 가지고 있지만 혼자 살아가는 노인들을 체온저하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간단한 난방체계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현대 과학기술 시대의 역설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1969년 루카스 항공 노동자들은 비용감축을 위해 일부 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려는 경영진에 맞서 그때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시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들은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협력해 그때까지 그들이 만들었던 전투기 엔진이 아닌 150개의 혁신적 제품을 설계하고 그중 일부를 시제품으로 내놓았다. 여기에는 저렴한 의료기구, 저연료 엔진, 도로?철도 겸용 버스, 태양 집열장비 등 인권, 환경, 지역사회의 필요를 고려한 제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1970년대 10여년 동안 진행된 이 계획은 경영진에 의해 거부되었고, 결국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해고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만다.)14)

 

  ‘전문성 강화’, 대안이 아니다

  언론이 현대 과학기술 구조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인식하면 앞에서 품었던 의문이 어느정도 해결된다. 왜 언론이 대중들에게 과학기술을 더 전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대중과 과학기술(자)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는가?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가 대중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변화상을 대변하고 심화시키는 역할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에 대한 대안으로 언급되는 ‘전문성 강화’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현 구조에서 언론이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곧 정부, 기업, 과학기술자의 이해관계에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잘 갖춘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즉 정부, 기업, 과학기술자들이 생산하는 여러가지 기사거리들을 더 잘 받아쓰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전문성의 정체인 것이다. 이 경우 언론은 전문성을 강화할수록 기존의 과학기술을 둘러싼 구조를 더 단단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 연구결과가 나온 이후 5월,《네이처》는 ‘한국의 줄기세포 스타들, 윤리적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황우석 교수의 난자 획득 경위, 기관심사위원회(IRB)의 통과 문제,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공동저자로 포함된 경위에 대한 의문 등 여러가지 윤리적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프레시안〉,〈한겨레〉,〈동아일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들은《네이처》가 제기한 윤리 문제의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짧은 설명을 붙인 후 바로 황우석 교수의 반발과 해명을 그대로 싣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네이처》가《사이언스》의 경쟁지이고 특종을 놓쳤기 때문에 황우석 교수의 연구성과를 훼손시키려 한다고 크게 보도했다.〈프레시안〉을 제외한 전 언론이 식물학자인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논문의 공동저자로 포함된 것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정부에 흠집을 내는 기사라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던 일부 보수 언론들도 이 대목에서는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소한 이번 건에 관한 한 언론들은 황우석 교수를 비롯한 과학기술계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동일시한 셈이다.15)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과학부에서 정치부로 옮긴〈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과학기술계와 거리두기의 어려움을 고백한다. “정치 관련 기사를 쓰니 예전에 과학기사를 쓰던 때보다 훨씬더 자유롭게 느껴지더군요. (과학부 기자가) 과학계로부터 거리를 두기란 매우 어렵죠. 지금은 내가 지닌 기자로서의 타고난 감각을 동원해서 대통령에 관해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과학부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요.”16)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와 일부 언론의 조심스러운 문제제기가 나오자마자 일제히 “황우석 죽이기가 시작됐다”고 나선 과학기술 담당기자들 중에서 이런 고백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가지 덧붙이자면 언론이 이렇게 과학기술 핵심 행위자들의 충실한 대변자로 자처할수록 장기적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언론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은 기자들이 ‘받아쓰기’도 제대로 못한다고 불평하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기자들보다도 훨씬 ‘전문적 능력’을 갖춘 과학기술의 대변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10여년 사이 기자들보다도 훨씬더 정확하게 최신 과학기술 연구의 성과와 의미를 짚을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면서도, 기자들보다 더 쉽게 대중들에게 이것을 중개해주는 과학 저술가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고 언론은 결국 그들의 목소리를 싣는 공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상당수의 과학기술 담당기자들은 과학기술자들의 말을 받아쓰는 수준으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비판적 과학 저널리즘’의 조건

  이제 긴 글의 결론을 맺을 때다. 지금은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선회가 필요한 때다. 과학기술 시대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현대 과학기술 활동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그것의 사회적 영향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그 감시와 성찰의 결과를 대중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언론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비판적 과학 저널리즘’의 상이다.

  언론이 이런 역할을 맡고 나설 때 오히려 요구되는 것은 과학기술자-정부-기업의 시각이 아닌 전혀 다른 전문성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시민적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습득하거나 과학기술과 관련된 기존의 행위자들(과학기술자, 관료, 기업가 등)의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하고 과학기술 보도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회학자 넬킨은 이미 1990년에 미국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를 분석한 후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언론은) 과학 활동이 내포하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함의들, 의사결정을 뒷받침하는 증거의 성격, 그리고 인간사에 적용되었을 때 과학이 보여주는 힘뿐만 아니라 그 한계까지를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지적했다.17) 이것은 기자들이 항상 추구해야 할 사실에 대한 철저한 조사, 대담한 해석, 비판적 탐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요구’라고 볼 수도 없다.

  녹색평론사가 주최하는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의 첫번째 강연자로 나선 일본의 토다 키요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교양으로 ‘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교양’, 두가지를 강조했다.18) 우리나라의 언론이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비판적 교양을 가지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는가? 바로 이것을 진지하게 자문해 봐야 한다. 계속해서 과학기술의 사제들(과학기술자, 관료, 기업가)의 시종이나 나팔수 역할만 한다면, 결국 성난 시민들이 몽둥이를 들이댈지 모를 일이다.

 

1) “‘황우석 수백억 지원’ 놓고 과기부-민노당 격돌”,〈프레시안〉2004년 11월 16일.
2) “‘난자’ 질문에 분노하는 황 박사”,〈여성신문〉인터넷판, 2004년 12월 1일.
3) 도로시 넬킨〈과학과 언론보도〉,《대중과 과학기술》김명진 편저, 잉걸, 2001, 155쪽.
4) 김명진〈영화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 이미지〉, 2004년도 한국과학기술학회 후기 학술대회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 자료집, 한국과학기술학회, 2004년 12월 4일;〈대중영화 속의 과학기술 이미지〉,《대중과 과학기술》잉걸, 2001.
5) 칼 세이건《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상헌 옮김, 김영사, 2001.
6) 네가지 특징은 이 글을 참고했다. 오철우〈과학과 언론의 소통 가능성〉, 2004년도 한국과학기술학회 후기 학술대회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 자료집, 한국과학기술학회, 2004년 12월 4일.
7) “‘인간복제, 설계도’ 황우석 교수, ‘미 생명공학기술 고지에 태극기 꽂고 왔다’”,〈동아일보〉2004년 2월 9일.
8)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과학기술 연구 현장에서 관찰되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미국 대학을 중심으로 인상적으로 서술한 다음 글을 참고. 에이열 프레스·제니퍼 위시본〈닫힌 대학〉,《시민과학》통권 제29호,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2001년 7월.
9) 존 설스턴 · 조지나 페리《유전자 시대의 적들》유은실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10) 쇤의 기만행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리는 다음 글을 참고. 김명진〈과학계를 강타한 ‘역사상 최대’ 기만행위 사건〉,《시민과학》통권 제41호,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2002년 11월.
11)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리는 다음 글을 참고. 프레드 피어스〈멕시코 옥수수 스캔들〉,《시민과학》통권 제39호,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2002년 8월.
12) 빌 조이〈미래에 우리는 왜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녹색평론》통권 제55호(2000년 11-12월호).
13) 이진경 “자연을 거슬러 자연을 꿈꾸다”,〈한겨레〉2004년 11월 15일.
14) 마이클 쿨리〈루카스 항공에서의 협동계획〉,《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송성수 편역, 녹두, 1995.
15) “‘황우석 교수 연구, 윤리적으로 문제있다’ 파문”,〈프레시안〉2004년 5월 7일.
16) 넬킨, 같은 책, 165쪽.
17) 넬킨, 같은 책, 166쪽.
18) 토다 키요시 · 김종철 대담〈환경과 평화의 세기를 위하여〉,《녹색평론》통권 제73호(2003년 11-12월호);“미국의 패권은 오래 못 간다”,〈프레시안〉2003년 10월 1일.

 


  강양구―인터넷 신문〈프레시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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