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는게 이래서 무섭다고 했던가.

여섯시~일곱시 사이에 퇴근하면서 조퇴하듯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는 팀원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좀 늦게 나가는 편인 나로서는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다행이지만. 야근수당 같은건 꿈에서도 못받아보면서 밤 9시 ~ 10시 퇴근은 애교이며, 12시 넘는건 뭐 기본인 분위기라서 요즘같이 정시 퇴근을 하는 며칠이 무슨 봄방학같은 분위기다.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빨리 나가야지, 하고 결심해놓고서도 어찌 그렇게 할일이 많은지 여섯시 반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일을 맡긴 외주 편집자가 출장 및 진행건에 대해 전화를 걸어와 십여분 통화하느라 또 지체, 결국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간 시간은 일곱시가 훌쩍 넘었다. 집에 오니 거의 여덟시.

나의 저녁은 간단한 샐러드. 마트에서 사가지고 온 양상추를 씻어서 먹기 좋게 손으로 찢고, 방울 토마토 10개를 씻어 넣은 뒤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소금을 쳐서 버무려 먹었다. 새로 사온 물결모양의 볼에 담아서. 레드 망고에서 나오는 그 그릇같이 생겼다. 그렇게 저녁을 먹으며 에프게니 키신의 DVD를 틀어놨다.

쌓여있는 백화점과 마트의 할인쿠폰을 뒤적거리다 구석에 밀쳐두고 잠시 심호흡.

그래, 나는 도무지 눈뜨고 봐줄수 없을만큼 끔찍한 문장을 휘갈겨 대면서 나를 실컷 조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하고나 대충 어울리면서 그렇게 한심하게 사는 내 삶을 조롱하며, 이죽거리고 그것을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내 모습을 스스로 자각하게 될 때는 무심결에 거울로 내 뒷모습이라도 본것 마냥 화들짝 놀라곤 한다. 엇, 저게 나야? 정말? 그런 물음표만 떠다니는 순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끔찍해져버린, 다시 복구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고 가면 같은것으로는 도저히 가릴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 끔찍한게 나라는 게 인정하기 싫으면서 역으로 스스로를 더 끔찍하게 해버렸다. 피동이 아닌 능동이 된다는 것 치고는 참 우울하다.

스스로 무척이나 끔찍해져 있는 지금에서야 슬슬 이제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제 이만큼 끔찍하게 나 자신을 방기하고 조롱했으면 되었다. 다시 돌아가봐야지, 싶은데. 의외로 나는 너무도 멀리 나와버려서 돌아가는 길을 그만 잃어버렸다.

눈만 꿈뻑거리고 두리번거리는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도대체 어디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왔던 길이 어디고 갔던 길은 또 어디며 가려고 하는 길은 대체 어디?? 주저 앉을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달릴 수도 없어서 그냥 서 있기만 한지도 꽤 오래. 그러다 가끔 용기내어 가보는 길은 죄다 막힌 길이거나 절벽을 향하는 길.

아, 나는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너무 민망하고 낯뜨거워 울지도 못하고 입술만 꾸욱 이빨로 누르고 참고 또 참는다. 지금의 치욕도 이전의 치욕도 이젠 그만 일상이 되어버려 무감각해졌다.

그게 가장 수치스럽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에게 사정없이 물려 보는 사람이 경악할 만큼 물린데가 심하게 붉어지고 부풀어 오르고 심지어 퍼렇게 변했더랬다. 너무 끔찍해서 피부과에 갔고, 주사를 맞은뒤 약을 먹었더니 빠르게 가라앉았다. 지금은 그냥 살짝 붉은기만 도는 상태.

벌레 따위에게 물린 상처는 이렇게 쉽게 잘도 드러난다. 그리고 그게 너무 끔찍해 보여서 치료를 안할 수 없게 만든다. 아마 그게 내 육체의 본능일지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물어뜯긴 마음의 상처는 이런 식으로는 알수가 없다. 얼마나 끔찍한지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치료를 하지 않고 앓다가 그것이 내 모든 것을 점령해버려도 누구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나 또한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태어나서 삼십년이 넘도록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 벌레 따위에게 심하게 물려 병원신세까지 지는 일을 겪으며 나는 스스로 마음이 아파 그만 혼자 밤에 울어버렸다. 물린데가 가렵거나 불편하고, 부풀어 오른데가 흉칙해서 겁이 나서가 아니라 이전에 아팠던 그 마음이 생각나 스스로가 안스러워 눈물이 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마음이 아팠을 때도 이렇게 어딘가에 두드러기라도 나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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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0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음이 아프면 몸이 같이 아파주었더랬습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종종 마음 아픈지 모르고 있다가 몸이 아픈 걸 보고 `아, 아픈 거였구나' 할 때도 있었더랬어요.

달콤한책 2006-08-1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한 소리 할게요. 저는 불개미도 아니고 까만 개미에 물려 쇽까지 일어났었지요.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외국에서 개미에 물려 죽었다는 말은 있어도 우리나라 개미는 그런 종이 아니라는데....어떻튼 저는 그랬단 말이죠...그래서 야외에 앉게 되면 온 식구가 개미만 나타나도 제게 주의를 줘요^^

마태우스 2006-08-1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추상적이라 상황은 모르겠지만...전 님 편이어요

2006-08-10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8-10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리스 2006-08-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아, 저도 물론 몸도 아프긴 했어요. 하지만 그냥저냥 아픈거죠. 완전히 뭔가를 못할만큼 고꾸라지지 못하는 걸 보면 제가 꽤 독한가봅니다. ㅠ.ㅜ
달콤한 책님 / 아, 저런. 많이 고생하셨겠어요. 개미라니.. 앞으로도 계속 조심하셔요.
마태님 / 감사합니다. ^^
속삭님 / 흐.. 네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혼자서 여행가는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시드니에서도 파리에서도 나는 공항에서 호텔까지 잘도 찾아갔었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갔고 또 한번은 프린트 해간 종이쪽지의 지도 하나를 달랑 들고 지하철을 갈아타가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밀라노에서 공항간 이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한 이 상황은 딱히 정말로 그 길을 잘 못찾아갈 까 불안해서 그런것은 아닌 듯 하다. 이태리어로 넘실대는 공항 사이트에서 찾아낸 공항간 이동 버스는 내 비행기 시간과 맞는게 없었다. (맞는 걸 못찾았을 수도 있지만..) 그러니 일단 시내로 나갔다가 거기서 이동을 하는게 나아보인다.

여하튼, 내가 두려운건 정말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몰라서일 거라는 생각이다.

불만은 많으면서 뭔가 개선하려는 노력을 실천하지 않는 그런 투덜이 루저의 삶을 살게 될까봐, 그게 두려운것 같다. 생각하는 대로 다 이루고 살 수는 없겠지만 올해 내내 나는 뭔가 나사가 빠져 있다고 할까. 제대로 몰두하고 매진하는 게 없이 그냥 부유하면서 살고 있다. 일이 바쁘면 바쁘고, 아니면 아닌 그렇고 그런 삶.

인정하기 싫은데, 나 사실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전에는 알았으나 어떻게 가야 할지 방법을 고민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알았다고 여겼던 것 역시 확신이 안선다. 그래서 발을 못떼고 있다. 내가 찾아야 할 길은 밀라노에서 알 이탈리아 비행기를 타러 가는 다른 공항 가는 길보다는, 내가 살아갈 길이다. 훗, 하지만 그걸 찾기 전에 당장 내일 모레 찾을 길이라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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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2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인생의 스포일러도 종종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아니면,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 정도.

이리스 2006-07-2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네비게이션.. 이 필요하지만 당췌 그게.. -_-''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엔가 제대로 온마음을 바쳐 미쳐 본적이 없다.

위와 같은 부정은 양면성을 지닌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닐 것이라는 기대, 무언가 '진짜'를 경험할 것이라는 설레임.

동시에 지금까지의 삶이란 '진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고 결국 '진짜'는 아니었다는 자괴감.

결국,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찾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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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07-26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라면 남도 충분하게 사랑하실거라 믿어요.
더 큰 사랑이 안에 속삭이며 숨쉬고 있을거예요..얼른 꺼내보이세요..^^-

이리스 2006-07-2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꽃님 / 움, 부끄러워요. ㅠ.ㅜ
 

한 때... 로 시작하는 문장은 달콤 쌉싸름하다.

지난 추억에 기대고자 하는 나약한 감상, 말랑한 감상에 젖지 말라는 차가운 이성의 충돌.

그리고 남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웃음이다. 여유를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웃음.

나는 지금 내가 한 때.. 로 묶을 수 있는 것을 갖고 있어서 기쁘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한 때.. 라는게 참으로 다행스럽다.

안녕, 나의 한 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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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7-2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가 아름다운 추억이지요^^

이리스 2006-07-23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7 님 / 그렇기도 하고, 아 그게 정말이지 한 때라서 다행인것도 있고요. ^^
 

회사는 영리를 목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그리고 그 조직은 인간들로 구성된다. 조직은 파트별로 나누어 해당 파트를 책임을 지는 자를 정해두고 그 아래로 조직원을 두어 구성한다. 회사의 사주를 상당 부분 갖고 있는 공동 경영자가 아니라면 사실 조직의 파트 책임자도 조직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가끔 나는, 자신은 간수이고 조직원은 죄수라고 착각하는 파트 책임자를 본다. 그것은 마치 영화 <엑스페리먼트>의 심리 실험과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자신이 경영인이라도 되는양 착각하고 하필 그 중에서 악덕 기업주로 돌변해 어이없는 주장을 하는 자. 하지만 실제 경영인의 입장에서는 그 자도 조직원일뿐이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그 자가 죄수처럼 여기는 조직원처럼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 을, 설마 그 자는 모르고 있을까?

그 어이없는 말을 들으면서 웃기도 아까워서 그냥 다른 생각을 했다.

농담처럼, 하고 싶은 말은.

그 자는 조직의 쓴맛을 결코 못봤을거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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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7-21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 의식'을 갖는 것도 '긍정적'이긴 한데, '주인님 행세'하는 거시기들 꼭 있더라고요....

이리스 2006-07-2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 그러게요. 화가 난다기 보다는 불쌍해뵈요, 그사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