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에 가장 좋은 교통수단은? 역시 기차다.
일정한 속도, 딱 적당한 흔들림. 그리고 지나치게 편하지 않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할 정도의 좌석의 불편함.
뭐 이런 것들.
가끔 비행기를 타면서 놀랐던건 나는 장거리 비행에서 책이 잘 읽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비행기 이코노미석은 사육의 공간이자 이러다가 내 관절이 영원히 못움직이는건 아닌가 걱정때문에 책을 읽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코노미석의 가장 큰 즐거움은 눈앞의 조그만 모니터에 뜨는 비행경로도이다.
내 생애 딱 한번 타본 비즈니스 스마티움 좌석은 그 지나친 안락함으로 인하여 누워 감히 앉아 있을 수 없는 내 몸을 수평으로 만드는 사치를 부리고 말거야라는 의욕을 불태우다가 잠이 드는 곳이지 역시 책을 읽을 공간은 아니었다.
버스나 선박은?
에고 말을 말자. 멀미 안하면 다행이다.
정기적으로 서울 갈 일이 생기면서 요즘 자주 기차를 타고 있다.
커피 한잔과 책 한권은 기차 여행의 최고 동반자다.
오늘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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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지리학자라고 하는데 페미니즘에도 도시에도 관심이 많은 내게 딱 맞춤일듯하여 선택한 책.
내가 기대했던 내용은 "우리의 도시는 돌, 벽돌,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라는 말에서 연상되듯, 우리의 도시가 어떻게 특정 젠더 중심으로 건설되고 운영되는지를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얘기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거기까지는 아니고....
음 조금 더 원칙적이라고 할까?
여성에게 도시라는 공간이 어떻게 작용해왔는지의 원칙에 대해서 좀 더 치중해 있는 듯하다.
굳이 따지자면 전혀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지만 나름 생각 못했던 부분들도 있고 재밌게 읽고 있다.
중간에 같이 가던 남편과 얘기도 잠깐 하고, 게임도 잠깐 하고 그러다가 3분의 2쯤 읽었다.
서울에서 볼일 보는 중간에 시간이 2시간쯤 비어서 대학로 주변 산책이나 하던 중에 무려 <학림다방>을 발견했다.
"어 저거 학림이네"
"와 저거 우리가 아는 그 학림다방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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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간파과 진짜 다 쓰러져 가는 것같은 너덜너덜한 계단. 그리고 since1956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지방 출신인 우리 부부에게 학림은
70년대 학생운동의 방향과 80년 서울역회군과 광주를 둘러싼 무림-학림논쟁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곳이고
전민학련단체 결성의 첫모임을 여기서 하고 이후 그분들이 검거되면서 다방의 이름을 따 학림사건으로 알려졌던 사건.
그리고 부산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탄압사건이었던 부림사건이 부산의 학림사건의 준말이 되었던....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지만 그 사건들의 현장을 이렇게 그냥 길거리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게 되는건 참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당연히 들어가봤다.
이곳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밖에서 볼 때는 너무 낡아서 손님이 있을까 싶은데 내부는 생각보다 잘 관리되어있고, 손님도 많다.
들어서자마자 LP판을 돌리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좁은 공간을 꽉 채우면서 순간 80년대로 휙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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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꼭대기에 와인병들은 먼지가 소복히 앉아 있고, 장식장을 장식한 빈티지물건들도 제각각이고....
하지만 그것이 먼 옛적에 다니던 대학 앞의 커피샵들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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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좁게 넣은 다락같은 이층공간도 있다.
저기에도 손님이 다 앉아 있어서 그분들 피해 사진을 찍다보니 각도나 이런건 원하는대로 넣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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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바닥, 천장, 계단, 탁자 모두 여기저기 긁히고 흠집투성이지만 보기 흉한 곳이 하나도 없다.
여기를 스쳐간 사람들의 손때와 삶의 흔적들.
사진과는 다르게 저 계단이나 탁자 마루바닥 모두 너무나도 정갈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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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주인공은 저 넓은 창이다.
바로 아래로 대학로가 있고 저 넓은 창은 60년이 넘도록 저곳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들을 지켜보고 왔을 터이다.
저 창 역시 널찍하게 전체를 찍고 싶었지만 역시 다른 손님들이.....ㅠ.ㅠ
이곳에서는 백기완선생이 돌아가시기 두달 전까지도 아침마다 오셔서 차를 마시고 앉았다 가셨다고도 한다.
학림다방 유일의 공짜 손님이었단다.
전혜린작가가 자살하기 하루 전 절친했던 친구를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이곳에 있을까?
1980년대로 타임슬립한듯한 이곳에서 드립커피와 비엔나 커피를 주문했다.
80년대는 역시 비엔나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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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커피잔마저도 80년대스럽다.
그런데 반전은 여기 커피가 너무 맛있다. 80년대 커피맛이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