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는 책이 잘 안 읽어진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 이건 육체적 고통이다.
기차는 가장 책 읽기 좋은 공간인데 같은 이동수단이면서도 비행기는 그게 힘들다.
나만 그런가?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면 그동안 안보던 영화나 드라마를 다운받아 간다.
너무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한 시간 활용이랄까? ㅠ.ㅠ
이번 여행에서는 떠나기직전 올라왔던 오징어게임2를 다운받아 갔었다.
그런데 재미가 없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1편의 컨셉의 반복과 힘이 너무 들어간 배우들의 연기가 몰입을 자꾸 방해하는 것이다. 3편쯤 보다가 때려치고 비행기 화면에 있는 영화를 이것저것 둘러보다 졸다 깨다 했다.
돌아올 때는 딸에게 추천받은 요즘 핫한 드라마를 다운받아 탔는데 이것도 4편쯤 보니 아 도대체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납득이 안가 결국 때려치고 말았다.
딸이 "엄마 나는 재밌던데....:라고 묻는다.
"몰라, 책만큼 자극적이거나 짜릿하지가 않아."
"보통은 영상이 훨씬 자극적이고 짜릿하다고 하지 않나?"
"음 그렇긴 하네.... 근데 난 왜 그렇지. 늙어서 그런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걸 나는 안다.
영상을 볼 때 내가 충분히 부지런하지 않아서 그렇다는걸말이다.
내게 영상은 휴식 이상의 의미가 없기에 그럴뿐....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것이 있고, 내게는 그게 영상이 아닐뿐이고....
하여튼 내게는 재미없는 드라마 보기는 포기하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최근에 읽은 가장 짜릿한 책은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이다.
사람들이 묻는다. 그 책은 제목이 어느 나라 글자냐고? ㅋㅋ
영어의 Monster와 한글 괴물들이 겹쳐졌다. 참신하다.
이 책이 짜릿한 이유는 정해진 결론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 고민, 그러니까 널리 알려진 범죄자의 아주 뛰어난 예술, 문학, 영화 작품들을 우리가 기꺼이 소비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아동성애자이자 성범죄자였던 로만폴란스키나 자신의 배우자의 의붓딸과 결혼한 우디 앨런의 예를 들면서....
예상되는 답이 있지 않나? 그 예상되는 답으로 나아갔다면 아마 이 책은 짜릿함은 없는 그냥 음 그렇구나라는 책이 되어버렸을테다.
그런데 작가는 그 답을 넘어선다. 그리고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문학적 성취를 위해 떠난 도리스 레싱이나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오븐에 머리를 넣어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렇게 말해버리면 또 그게 어떻게 같냐는 물음에 직면하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책 읽기의 짜릿함은 이런 데서 등장한다.
이전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만나는 것.
범죄자의 작품을 소비할 것인가 말것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리는 순간 우리는 피해자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고통에 대해서 침묵하게 된다는걸 알고있나?
이 대목에서는 머리 한쪽이 쾅 울린다.
저자의 마지막 결론을 내가 아직 제대로 소화를 못해서 리뷰를 못쓰고 있지만 새로운 질문이나 다른 방향에서의 질문이 주어졌을 때 책읽기의 짜릿함은 내 머리를 한 번 리셋하는 느김이다.
이 책의 질문과 대답들을 곱씹으면서 또 지금 시작한 책은 류츠 신의 <삼체>다.
1부를 읽으면서 현실 세계와 게임의 세계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며 그 정체가 뭔지, 삼체는 뭔지(아 그리고 끝도 없이 나오는 과학지식들은 그냥 흐린 눈으로 읽는다. 어차피 읽어도 모른다.) 헤롱거리며 읽다가 1부 마지막에 그 정체와 연결이 쪽 한번에 이해될 때 아 또 하나의 책읽기의 짜릿함이란 이런 것이지 하면서 황홀해진다.
2부에서는 삼체에 대항한 온 지구인의 반격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는데 이 역시 온갖 인간 군상들이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움직여 나가는 모습들이 거대한 흥미를 준다.
이 책에서는 부분적인 발상들도 기가 막힌 것들이 많은데 1부에서는 외계 세계의 삼체인들이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디기 위해 자연환경이 생존에 불리할 때는 온몸을 수분을 빼서 가죽만 남겨 그 시절을 견딘다는 것이다.
그럼 자연환경이 좋아지면 어떡하냐고?
그냥 물에 들어가서 몸을 불리면 된다.
아 진짜 이렇게 말하면 너무 웃긴데 작가가 글을 잘 쓰니 그럴수도 있지 싶은 거다.
2부에서 삼체인과 지구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발화의 차이점으로 얘기되는 것도 기발하다.
삼체인은 입으로 말하지 않고 일종의 텔레파시랄까 그냥 생각하면 그게 저절로 전달되는 구조다.
지구인처럼 생각다르고 말 다르고에서 나오는 계략이나 음모가 불가능하다는...
이 차이점에서 지구인이 삼체인과 싸울 수 있는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아직 다 못봐서 모르겠고....
어쨌든 책 속에서 발상의 기발함을 볼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짜릿하다.
그보다 더 짜릿한건 이 거대한 서사가 어떻게 결말을 이룰까를 내내 두근거리며 보게 된다는 것.
전체가 1,900페이지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이제 겨우 700페이지 정도 봤다.
앞으로 1,200페이지를 더 봐야 결론에 도달할텐데 빨리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면서 한편으로는 아끼고 아끼며 읽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다.
역시 책이 좋다. 이렇게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다음 읽을 책을 고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