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좋다. 굉장히 깔끔하고 명쾌하다. 쉽게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이론서가 쉽게 술술 읽히면 그것도 문제다.), 읽는 것이 괴롭지 않다. 이건 이론서가 가지기 힘든 굉장히 큰 매력이다.
여러 장르들 중에서 비평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영화비평이나 문학비평 등등....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다기 보다 어려워서 이해를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거 같다. 사실상 문학이든 영화든 그것이 표현하는 세상은 굉장히 복합적이고 다채로운데 비평의 언어는 다채롭다기보다는 엄격하고 일관된 서사를 적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면 이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많은 비평들이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신의 이론에 작품을 뜯어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을 읽다보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에 도착하는데 이런 부분들은 또한 굉장히 현란한 언어유희로 이루어져 있어 독자가 더 알아듣기 힘들어진다. 나같은 어리석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거 제대로 말하기 힘든거 감추려고 알아먹지 못할 어려운 말로 덮어씌운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이론서에 대해 드는 생각 중 요즘 들어 많이 하는 생각이 이론서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막 펼쳐내는데 집중하긴 하는데 그걸 읽을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꽃밭이 펼쳐져도 실제로 그걸 현실에 말로 펼쳐보면 말이 좀 안되네 하는 경험 누구나 있지 않나? 물론 이론서가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저자가 생각하는 이론을 완결되고 풍부하게 다 제시하고싶은 욕망에 휘둘리다 보면 그의 머릿속 꽃밭을 독자가 짐작하기는 어렵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가 자신이 말하는 이론이나 개념이나 소재들을 모두 다 알고있다는 전제하에서 쓰는 것인가 이런 생각 말이다.
솔직히 1월에 읽은 도서 <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이 내게는 저 두 가지 문제를 다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나의 지적 부족함이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서도 남는 아쉬움이 결국 중간에 저 책을 접게 해버렸다. 페미니즘의 역사와 내용을 알고자 하면 나에게는 이미 <페미니즘 철학입문>이라는 훌륭한 책이 있으므로.... ㅠ.ㅠ
이런 내게 2월의 책은 <여성, 인종, 계급>은 굉장히 좋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다. 독자에게 전적으로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친절한 편이다.
일단 여기까지는 책 자랑과 책 뽐뿌였고, 이제 1장과 2장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을 그냥 적어본다.
산업자본주의의 도래에 따라 대부분의 백인 여성들은 생산적인 노동 영역에서 완전히 차단된 영역의 거주민으로 인식되어버렸다라고 한다. (이것은 약간 부가 설명이 따라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중세까지 주생산영역인 농촌사회에서 노동의 성별 분업은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여성과 남성은 모두 뼈빠지게 토지에서 일해야 한다. 따라서 여성의 노동 자체의 폄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고, 가부장제는 다른 형식으로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업자본주의는 가정과 직장을 완전히 분리했고, 그러면서 여성노동을 가정 노동으로 한정지으면서 그것을 여성의 진정한 의무로 규정짓는 한편 여성 노동은 비생산적이므로 열등하다는 신화를 창조한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모두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런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예외적인 것이 바로 미국 노예 공동체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여성 노예 역시 가혹한 노동에 투입되었으므로 성별간의 노동분업이 사실상 의미가 없다. 남녀 노예 모두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은 자신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노동이었던데 반해, 그들에게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노동은 가사노동이었다. 이는 노예 공동체 내부에서의 성평등으로 이어지고, 노예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도 서로가 똑같은 조건에서 맞서 싸우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노예 공동체 사회에서의 성평등을 이야기하면서 드는 생각은 또 왜 여성이든 다른 피억압자든 싸울 때는 연대해서 똑같이 싸우면서 싸움이 승리로 끝나고 난 이후 그 결과물들을 나눌 때는 다시 불평등해지는가에 대한 깊은 빡침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부르조아 혁명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7월혁명(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이걸 그린 그림이고, 레 미제라블이 7월 혁명 이후의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은 부르조아와 민중들이 똑같이 싸웠지만,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선거권을 가지게 된 이들은 전체 인구의 0.6%에 불과했다. 0.6%는 당연히 세금을 많이 내는 남자, 즉 부자 남자였다. 노예 공동체 사회의 투쟁이 노예 해방으로 이어졌지만, 이후 흑인가정의 운영원리는 성평등이 아니라 백인의 가부장제에 철저하게 포섭되는 결과로 이어졌음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역사에서 왜 좋은 것 훌륭한 것은 늘 배제되는가? 깊은 빡침은 더더욱 깊어만 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희망을 가지고싶다. 그런 희망의 근거, 내 희망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근거를 찾고싶다.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대에 가장 인기 있던 노예제 반대 소설은, 노예제와의 전투가 치러지던 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성차별주의적 관념과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적 사고를 고착화시켰다. - 69쪽
노예제 반대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었고, 가장 유명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보자. (나는 이 평가에 동의한다.) 이 소설 속 흑인들은 대부분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무방비한 유아적 인물들로 묘사되고, 여성은 모성애의 화신 어머니로 표현된다. 그래서 이들은 모성애를 발휘하여 사랑스러운 아이같은 흑인들을 동정하여 돕고자 하는 것이 되고, 실제로 이 소설은 수많은 여성들을 노예제 폐지운동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이 소설은 노예제 폐지나 여성운동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을까? 해악이 되었을까?
나의 결론은 이 소설은 발간되어야 한다이다. 이 소설의 나쁜 성차별주의적 관념과 인종주의적 사고는 당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 소설이 없다고 해서 이런 당대의 지배적인 생각들이 약화되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소설의 출간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쨌든 당대의 많은 여성들을 노예제 폐지운동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참여했던 간에 어쨌든 노예제 찬성론자로 남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이런 운동에의 참여가 사람들의 생각을 가장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참여와 운동과 교류속에서 사람들은 변화한다. 허위의 모성애에 기반한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성체제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킨다. 그 속에서 새로운 생각 - 톰아저씨의 오두막이 숨기고 있는 근원적인 가부장제와 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자도 나오는 것이다. 비평을 하는 사람은 엄격하게 이 소설이 가지는 문제와 한계를 비판할 수 있다. 동의한다. 그리고 그렇게 엄격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현실의 운동을 하는 이들은 소설이 가지는 한계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가능성에 더 주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노예제가 제도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자명하니까 말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은 논리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감정으로 설득된다. 책이 사람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책이 그 사람안에 있는 동정심이든 어떤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론은 그 감정이 건드려진 다음을 담당할 뿐이다.
실제로 노예 또는 노예제라는 단어는 쉽게 여성운동과 결합한다.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는 자신들의 결혼 생활이 노예로서의 생활이었다고 표현하고, 공장의 여성 노동자는 형식적 자유만 있을 뿐 실제 노동과 삶은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공감이 연대를 만들어 내었다.
프루던스 크랜들은 자신의 학교에 흑인 소녀를 받음으로써 백인 사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녀와 그녀의 학교는 백인의 실제적이고도 비열한 온갖 공격을 받았고, 결국 본인은 체포 당하고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실제로는 승리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여성교육과 흑인의 교육이 서로 공감하며 손을 맞잡았던 이 사건은 당대 여성운동에도 흑인 노예제 폐지운동에도 모두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백인 여성들은 흑인 해방투쟁을 하려면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열렬히 지켜야 한다는 인식에 눈을 뜨게 된다.(79쪽) 해제에서 말한 "전 세계의 불안하고 취약한 이들이여 공감하라"라는 말의 예를 여기서 발견한다.
노예폐지론자인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잡지 <리버레이터>창간호에 "저들이 내 목소리를 듣게 만들 것이다."라고 썼다. 지금 여기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우리들 역시 내 목소리를 듣게 만들게 하기 위한 그 한 발자국들을 열심히 내딛고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