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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들
보후밀 흐라발 지음, 송순섭 외 옮김 / 민음사 / 2024년 4월
평점 :
소설이란 뭘까? 여기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소설 한 편이 있다.
보후밀 흐라말의 소설집 <이야기꾼들>의 반은 중편인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가 차지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주 오랫만에 주인공에 완전히 동일시되어 버리는 경험을 해버렸다.
그래서 좀 많이 먹먹하고 슬펐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진짜 "안돼 안돼 밀로시"를 외쳤다.
17살의 소년 밀로시는 시골 작은 역의 견습철도원이다.
소설은 소년의 서사를 지나칠정도로 담담하게 따라간다.
소설 초반의 밀로시 가족의 서사를 얘기할 때는 너무 비참한데 또 너무 웃겨서 이 소설 뭐야하면서 도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지 너무 궁금해졌다.
너무 비참한데 너무 웃긴 가족들의 서사는 직접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서 패스!
그러고 보면 이 가족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전쟁으로 인해(보불전쟁에서 2차 세계대전까지) 삶의 방향이 바뀌어버렸다.
소설 앞부분의 추락한 독일군 비행기에 달려들어 온갖 비행기의 부품을 순식간에 도둑질하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보면 밀로시의 가족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산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런 풍경들을 묘사하는 밀로시의 서사는 또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더 슬프다.
소심하고 조용하고 예민한 소년 밀로시의 삶은 그저 평범하다.
전쟁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언제 어디서 죽음 앞에 설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순간은 너무나도 느닷없이 다가왔다가 순전히 우연으로 피해가기도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슬픔이랄까?
그런 슬픔의 순간이 너무 많으면 그것도 또 일상이 되는 것일까?
지금 밀로시에게는 열일곱의 소년답게 사랑이 제일 큰 고통이다.
그는 마샤라는 소녀를 사랑하고 그녀와의 첫 섹스에 실패한다.
어린 놈이 뭘 알았겠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밀로시는 어린 놈 답게 너무 심각하다.
그래 심각하지 않은게 이상하지.
손목을 그을 정도로 심각했겠지.
밀로시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이미 그런 시절을 지나 온 어른들에게는 낄낄 거리며 웃어넘길 그런 순간에도 전쟁은 계속된다. 마을이 폭격 당하고 폭격의 여파에 날아가는 사람들은 또 욕을 퍼대고, 그리고 마샤와 마샤의 엄마는 폭격에 날려가면서도 뒤집힌 치마를 신경쓰고..... 그러니까 그렇게 다들 어쨌든 살아가는거다.
저 전쟁통속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면서도 낄낄거리는 순간 순간들이 모여 나는 밀로시라는 이 소년에게 너무 가까워져버렸다.
그러면 안되었는데 어쩔수 없었다.
밀로시 너 아직 마샤랑 한번도 못해봤잖아. 이제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자신감도 생겼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밀로시는 어쩌면 나중에 영웅으로 추앙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밀로시에게 중요한건 마샤였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밀로시, 그리고 밀로시와 비슷한 나이의 독일군 병사를 교차하며 보여주는 그 한 장면만으로도 전쟁의 비극을 온전하게 보여준다.
적이 누구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전쟁 속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가련해지는지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만 등장하는 이 독일군 병사가 내가 내내 따라오면서 동일시해 온 밀로시와 다르지 않은 소년임을 절감한다.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에 밀로시뿐만 아니라 그 독일군 병사에게도 동화되어 버린거다.
길지도 않은 이 소설을 읽고 다시 나에게 묻는다.
소설이 뭘까?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나를 바꾸는 힘은 소설속에서 나온다.
그거면 된거지.... 그럴거다.
이 소설집의 뒷 부분은 단편 4개로 이루어져 있다.
읽다 보면 어이없다.
이거 무슨 아무말 대잔치야?
말이 되는게 하나도 없다.
등장 인물들은 죄다 헛소리다.
단편 4개 다 그렇다.
낄낄거리면서 읽긴 했는데 읽으면서는 또 아 뭐야 뭐야를 남발하게 된다.
결론도 없고 헛소리 대잔치 벌이다가 뚝 끊기는......
그런데 다 읽고 나면 또 그런 생각이 드는거다
내가 하는 말이 다 헛소리 아닌가?
그냥 사람들이 산다는건 또 이렇게 헛소리를 남발하며 사는거지 별게 있나 싶은거다.
앞으로 두달이나 남았지만 이후 뭘 읽더라도 보후밀 흐라발의 이 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를 능가하지 못할 것 같다.
내 맘대로 리스트 중 올해의 소설 선정이 끝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