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이 따로 없는 이 책에서 정희진 샘의 해제가 서문을 대신하고 있다.
서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하고자 하는지를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때 정희진샘의 해제 또는 서문은 역시 정희진이라는 감탄사를 터뜨리게 한다. 이러다 책 본문보다 해제가 더 좋으면 어떡하지? ^^;;
젠더 권력관계는 유동적이고 페미니즘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복합적 권력의 성격을 매 순간 고민해야 하는 상황적 지식이다. 페미니즘은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은 계급으로도 젠더로도 환원되지 않는 모순과 우연의 연속적 텍스트이고, 여성주의는 그 콘텍스트를 밝혀낸다. - 16쪽
여성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그 여성은 모두 다르다. 인종, 계급, 경제력, 사회적 위치, 연령 모두 다르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또 어느 쪽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트렌스젠더, 젠더 플루이드(성별이 유동적으로 전환되는 젠더), 논 바이너리(남녀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존재) 등등이 존재한다. 이런 모든 '다름'들을 '다름'으로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그 다름들의 연대를 세상의 모든 방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이 문장이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때는 이론은 세계를 통일적이고 일목요연하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맑시즘이 그런 이론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맑시즘 뿐만 아니라 어떤 이론도 그런 역할을 해 낼 수 있는 이론은 없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그 인간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모순과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정말 복잡다단한 곳이므로.... 이제 이론은 모순과 우연으로 가득찬 세상을 그 모순과 우연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 모든 세상의 연쇄와 연결고리들을 찾아내고 그 지점에서 손을 잡는 것이다. 모든 개혁과 혁명과 개량은 그 어느 지점에 한 자리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누구보다 뛰어난 이론가였고, 공산주의 혁명가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개량주의자로 끊임없이 공격받았다. 그런데 개량주의가 비난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건가? 개량이든 혁명이든 반동보다는 낮잖아. (실제 역사를 보면 혁명의 순수성이나 오로지 원칙을 강조하는 인간들을 더 경계해야 한다. 그들이 더 많이 더 쉽게 변절한다. 이 원리가 왜 그런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의 걸음이 더딘 것이 문제가 아니라, 혹여 나의 걸음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것이 문제이다. 페미니즘으로 돌아오면 급진적 페미니즘이든 무엇이든 나를 어떤 페미니스트로 규정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페미니즘이든 그것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불안하고 취약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삶을 한발짝이라도 나아가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라도 그 지점에서 웃으며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손잡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것! 안다. 실상은 서로 비난하고 쥐어뜯고 칼질해대는 악전고투의 현장들이 더 널려있다. 사람들은 적과 싸울 때보다 비슷한 편끼리 더 처절하게 싸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세상이 바뀌어 온 것은 그렇게 서로 싸워 대던 인간들이 어느 순간 손잡은 그 어딘가에서 일어난 결과다. 지금 존재하는 어떤 것도 싸우지 않고 이루어진 것은 없다.
그래서 해제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나는 누군가와 평등해지기보다는 난민과 가난한 이들과 내 경험을 공유하기 원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연대하라"가 아니라 "전 세계의 불안하고 취약한 이들이여 공감하라"라고 외친다. - 27쪽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할 때 프롤레타리아는 산업혁명기 유럽의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들은 연대할 수 있는 공감을 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뻗어나가면서 곧 유럽의 프롤레타리아와 식민지의 프롤레타리아는 같지 않다. 지금도 제3세계의 노동자와 제1세계의 노동자는 전혀 다르다. 한 국가 내에서도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다르다. 당연히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도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가 아니라 공감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흑인의 입장에서 본 미국의 역사를 썼다는 이 책을 통해 다른 계급, 다른 인종, 다른 젠더가 어떻게 다르게 구별되어 나갔는지를 보고 그런 구분과 배제의 작동원리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깨부술 것이다.
책을 읽게 만드는 해제는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