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9월 4일 도로시 카운츠는 15세의 나이로 그 지역의 백인 학교에 지원하였다. 그녀가 경찰과 주방위군의 경호를 받으며 등교하는 사진은 유명하다. 의연하게 등교하는 그녀에게 백인 어른들은 그들의 아이들에게 "침을 뱉어라"라고 요구했다. 또한 백인 학부모 여성은 진지하고 침통한 얼굴로 "주님은 살인과 간통은 용서하시지만 인종통합에 대해선 분노를 금치 못하시죠"라고 인터뷰한다. 사실 나를 더 경악케 하는 것은 어른들의 말보다도 도로시 카운츠가 간 학교의 백인학생들의 집단 괴롭힘이다. 웃으며 침을 뱉고 놀리고 욕을 하는 저 또래학생들의 행동이 사춘기의 도로시 카운츠에게 어떤 상처와 두려움이 될지를 짐작하기에 도로시 카운츠의 저 야무지고 결의에 찬 표정을 보고도 안심이 안되는 것이다. 차라리 다행스럽게도 도로시 카운츠는 아이의 안전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부모에 의해 나흘만에 결국 전학을 가게 된다. 잘 된 일이다. 우리의 신념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그것을 아이에게 감당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은 다른 한 사람을 움직였다. 흑인으로서 동성애자로서 미국에서의 억압과 생명의 위협을 견딜 수 없어 파리로 이주해있던 작가 제임스 볼드윈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도로시와 함께 있어야만 했다!
바로 그 날, 화창한 오후에 프랑스를 떠나자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파리에 눌러앉아 알제리 문제나 미국 흑인 문제를 논하며 빈둥댈 수는 없었다.
다들 자신의 몫을 하고 있었고 나도 돌아가 내 몫을 해야 할 차례였다. - 41쪽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 것은,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 때문이다. 역사속에는 어리석고 나쁘고 이상한 인간들이 정말 많지만 이렇게 훌륭한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꼭 하지 않아야 할 일에 자신의 양심과 마음속의 정의감때문에 행동하는 이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흑인 인권운동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도 여성운동도 있을 수 있었고,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싸우는 현재진행형의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늘 인간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를 묻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타적인 인간도 이기적인 인간도 넘쳐난다. 그냥 그게 세상이다. 다만 그 이타적인 인간들로 인해 그나마 인류가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일 뿐이다.
작가였던 제임스 볼드윈은 미국으로 돌아와서 텔레비전 출연, 강연 등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 흑인의 삶을 이야기 한다.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을 세웠던 나라 아이티출신의 영화감독 라울 펙이 제임스 볼드윈이 갔던 길을 따라가며 그의 삶을 되살린다. 제임스 볼드윈이 흑인 인권운동가들- 메드가 에버스, 맬컴 액스, 마틴 루터 킹-에 관해 썼던 <Remerber This House>의 초고 메모 또는 원고 등 30여페이지의 그 글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영화는 제임스 볼드윈의 여로를 따라가고 그의 말을 따라가고 그의 생각을 따라간다.
흑인들은 왜 항상 인종이나 종교에 집중해야 하느냐고? 당신은 흑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작가이고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크지 않느냐는 백인의 질문에 제임스 볼드윈은 "나는 파리에 정착했을 때 수중에 40달러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미국에서보다 더 나쁜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여기서는 한번 등을 돌렸다하면 죽을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과 눈빛은 그저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위험속에서 살아온 자신과 동족의 슬픔을 강렬하게 대변한다.
우리가 미국의 인종차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언어나 먼 나라의 사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
미국에서는 백인 아이들도 흑인 아이들도 같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랐다.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영화속에서 언제나 백인은 영웅이었고, 흑인은 사회적 루저 아니면 악당이다. 5살 6살 정도의 흑인 아이가 자신이 그 루저나 악당인 흑인임을 자각하는 순간을 생각해보라. 그 정체성의 혼란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는 차별받는 이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심지어 언제 어디서든 공격받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차별 말이다.
메드가 에버스, 맬컴 액스, 마틴 루터 킹, 이 세사람은 모두 흑인의 인권을 위해 싸웠지만 주장하는 바도 싸움의 방법도 모두 달랐다. 그러나 그들 모두 40세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암살당했다. 감히 흑인 주제에 인간이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제임스 볼드윈이 꿈꾸던 세상은 그저 흑인이 백인과 평등해지는 세상만은 아니었다.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세상에 대한 메타포가 그에게는 있었다. 다분히 공상적이고 이상적인 생각들. 그러나 언제나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길을 밝혀왔다. 인간은 앞으로도 여전히 이전투구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나아갈 바를 이렇게 얘기하는 이가 있어 우리는 길을 잃었다가도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새로운 메타포가 있다. 새로운 소리가 있다. 새로운 관계가 있다. 남성과 여성은 전과 달라질 것이다. 아이들도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돈버는 읽을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인간의 삶을 그보다는 가치있게 하라. 일의 개념을 고역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회복하라. -13쪽
영화와 극본집을 같이 보고 읽었다.
번역은 극본집이 훨씬 유려해서 내내 다시보기 하듯이 읽었다.
처음으로 영화와 극본집을 통해 제임스 볼드윈을 만났으니 이제 책을 통해 그를 만날 차례다.
아 참 책 <아이엠 낫 유어 니그로> 163쪽에
영화 편집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가 서문을 쓴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책의 앞에 서문에는 편집자 이름이 알렉산드라 스트라우스이다.
어느쪽이 맞을까? 알렉산드라쪽일 거 같은데.... 어쨌든 다음 판에서는 수정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라고 해서 올리버 키트리지의 그 엘리자베스인줄 알고 잠시 깜짝 놀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