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8월에 다 읽었지만 아직 리뷰를 못쓴 책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책이 좋으면 좋을수록 리뷰쓰기가 너무 힘들다.
인문서들은 내용이 분명하니까 그래도 좀 나은데 특히 저 책탑에 있는 소설들
<나는 고백한다> <펠리시아의 여정> <모두 다 예쁜 말들>은 일치감치 내 인생의 책들의 반열에 오르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너무 좋은데 그 좋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안타깝고도 안타깝다.
좋은 책일수록 글을 잘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야지 하다보면 이렇게 리뷰 쓸 책들이 밀리고,
그러다보면 읽은 책들이 쌓여서 저 책탑이 막막 부담감으로 속에 콱 얹히게 된다.
이럴 때는 역시 꼼수다.
내 주제에 잘쓰기는 뭐...
능력이 안되면 한꺼번에 모아서 막막 좋다고 휘리릭 페이퍼 하나에 몰아주기!
그러고 깔끔하게 포기하고 나면 얹힌게 다 내려가고 마음이 막막 편해지면서 새 책을 향해 돌진하게 되는 나는 꼼수의 대마왕!
저렇게 쌓아놓고 보니까 역시 민음사판은 책등도 구리다.
역시 표지성애자인 내게는 문학동네! 책등조차도 산뜻하구나.... ㅎㅎ
두권은 도서관 책인데 <모두 다 예쁜 말들>은 빌려보는게 아니었어라고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표지가 책등이 구려도 책은 너무 좋은걸 어떡하리오!!!
이름도 처음 듣는 작가 자우메 카브레의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순전히 100% Falstaff님과 잠자냥님의 강력한 뽐뿌때문이었다고 쓰다가 덕분이라고 고친다.
그리고 Falstaff님을 따라 나도 외친다. 이런 작품을 명작이라고 부른다고......
바이올린 '비알'을 매개로 14세기 종교재판과 나치의 홀로코스트,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시기를 엮어내면서 인간을 옭아매는 빠져나갈 수없는 거대악의 존재를 너무도 절묘하게 묘사한다.
작가가 각각의 악을 교차시키는 순간들은 너무나도 절묘해서 시대와 상황이 달라져도 인간들이 행하는 악의 본질은 결국 같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그들의 머리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때로는 신의 뜻을 지상에 구현하는 것, 또 때로는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 그 거대한 신념이 무엇이든지 이런 이데올로기에 갇힌 인간들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거대 종교, 거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진실로 인간의 악함이 정점에 이르는 것은 이런 신념이 개인의 욕망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유부녀를 강간하고 그것을 신의 뜻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제나, 바이올린 비알을 차지하기 위해 서슴없이 총을 쏴 살인을 저지르는 나치 의사나 그들의 죄악은 신의 대리인, 민족의 전사라는 이름앞에 얼마든지 정당화 시킬 수 있다.
그곳에서 인간의 양심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해져 버린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이렇게 악의 그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데,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악인이 되는걸까?
작가가 그려내는 또 다른 악인은 주인공 아드리아의 아버지, 그리고 평생의 친구 베르나트이다.
아드리아의 아버지에겐 어떤 거대 종교든 이데올로기든 다 상관없다.
물욕이든 명예욕이든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 배신하는 인간들.
죄책감이란것은 너무도 비루해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죄책감이 커지면 인간은 자기합리화를 시작하는 법이다.
그 순간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종교재판관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을 고문할 수도 있고, 나치가 되어 타인을 거리낌없이 살해할 수도 있다.
어떻게 악이 탄생하는가를 이토록 유려하게 그려낸 책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나의 짧고 비루한 글이 이 훌륭한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소녀는 OO이 되었다.
책을 읽을 때, 특히 이런 식으로 주인공이 무슨 목적에서든 여행을 떠날 때 독자들이 기대하는 기본 문법이 있다.
해피엔딩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이, 책 속의 여정을 통해 어떻게든 주인공이 내적 성장을 이루리라는 기대 말이다.
책 소개를 보면 이 책은 성장소설이 아니라고 그렇게 광고를 하는데도 사실 책을 읽다보면 "그래 그래 펠리시아! 네가 조니를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너는 살아갈 수 있어. 이런 어려움을 겪어내고 있잖아"라고 하면서 펠리시아의 성장을 응원하고 있게 된다.
이 책의 압권은 그런 독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배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덮고 다가오는 그 먹먹함을 되씹어보면 맞아 이게 현실이지. 이것도 삶의 한 방법일뿐이야.
펠리시아 네가 만난 사람들을 생각해봐.
그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라고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라는 구호로 대변되는 영국의 복지정책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구조조정과 민영화가 몰아치던 대처수상 재임시절이 배경이 아닐까 싶다.
아일랜드의 소녀 펠리시아는 공장이 문을 닫으며 직장을 잃었다.
펠리시아만이 아니라 주변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난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겐 더 이상 이념도 민족도 중요하지 않다.
펠리시아가 찾아 헤매는 아이의 아버지 조니가 아일랜드의 적인 영국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취직을 위해서일뿐....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 앞에 오랜 세월 묵은 이념은 힘을 잃는다.
아일랜드만이 아니라 영국이라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작가는 이 책을 "선"에 대한 책이라고 했는데, 현실의 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펠리시아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녀를 대하는 것은 아니다.
힐디치씨조차도 나름의 선의를 가지고 그녀를 돕는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펠리시아는 타인의 이런 선의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펠리시아에게 필요한 선의는 그들의 선의와 다르다는 것이, 그래서 선함이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돕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대처리즘에 의해 황폐해가는 영국의 풍경과 함께 곱씹어보게 되는 소설.
읽을 때보다 읽고 난 이후의 여운이 훨씬 오래 가는 그런 소설이다.
코맥 매카시를 일컬어 서부의 세익스피어라고 하는데 나는 세익스피어를 제대로 읽지 못해 이 평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다만 이 책 한권만으로도 코맥 매카시는 누구에 빗대지 않아도 그 자신으로 충분히 이름값을 날릴만하다고 단언한다.
압축한다면 한 서부 소년의 성장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인공 소년 존 그래디는 이미 충분히 내면과 외면이 모두 성장한 너무 훌륭한 인물이므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겨준 농장에서 소를 키우고 말을 타는게 소원인 소년.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 알아서 이혼하고, 농장을 물려받은 어머니는 이제 퇴락해서 수입도 얻을 수 없는 농장을 경영하고 싶은 생각이 일도 없는 상황.
열여섯 살 카우보이 소년은 자신이 하고싶은 무언가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친구 롤린스와 그의 말 레드보와 함께.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외형을 취하지만, 사실상 길을 떠나는 순간 바로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이라 자신의 이름 존 그래디로 명명되는데 이는 그가 독립적인 하나의 인간으로 이미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텍사스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까지, 그리고 멕시코의 한 농장에 취직해 말을 다루는 그의 능력으로 농장주인에게 신임을 받고, 농장주의 딸과 연애를 하고, 하지만 그 연애 때문에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위기에 빠지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떠나는 순간까지.....
아! 이 얼마나 뻔한 스토리인가?
그러나 조심하시라!
문학작품의 스토리는 진짜 핵심의 1%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니 말이다.
존 그래디가 여행하는 황량한 서부의 풍경은 그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풍경과 주인공의 마음이 하나로 녹아드는 서술들은 작가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확실하게 느껴지게 해준다.
또한 존 그래디의 연애는 뻔했지만 헤어짐은 특별하여, 그는 나의 최애 캐릭터로 등극한다.
또한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 그가 저지르는 위험천만한 모험에서는 이 소년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강인하게 자신의 꿈을 지키고 싶어하는지 절절하게 느끼며 어느새 응원하게 된다.
그래 존! 네 이름은 너무 너무 평범하지만 넌 절대 평범하지 않아!
서부 영화의 모든 뻔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어떤 장면도 뻔하지 않다.
고향으로 돌아온 친구 롤랜드는 이제 지쳤고, 그냥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여긴 썩 괜찮은 나라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존 그래디는
그래.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의 나라는 아니야.
맞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찾고있다.
존 그래디라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름다운 인간 존 그래디를 만나라고 누구든 붙들고 얘기하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내 여행계획서에는 온갖 역사적인 건물과 미술관 박물관으로 꽉 차 있다.
가끔 괜찮은 그곳만의 공연이 있으면 공연을 예매하기도 한다.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는 너무도 재미없는 공연을 오로지 극장 내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이유로 예매하기도 했었다. 덕분에 공연 내도록 졸았다. ㅠ.ㅠ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여행기이다.
책의 시작은 알타미라, 라스코, 그리고 프랑스의 쇼베에서 시작한다.
이곳의 동굴벽화들은 구석기인들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산산조각낸다.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가장 절박한 시기에도 인간은 예술적 행위를 했다.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그 예술을 이해함으로써 어떤 도시, 어떤 역사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자의 여행은 바로 그 예술을 통해 도시를 이해하고, 인간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들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찾고자 한다.
멋모르고 떠났던 첫 여행과 두번째 다시 가게 되는 도시들의 모습이 다르게 다가옴을 보여주면서 생각하는 여행이, 예술과 함께 하는 여행이 더 풍부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을 읽다가 나는 어디를 다시 가고싶지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는데,
이미 캄보디아의 씨엠립은 너무도 다시 가고 싶어서 유일하게 두번 갔다온 도시였다.
그러면 그 다음은? 아마도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와 블루모스크, 보스포로스 해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그 호텔 옥상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다.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을 쫓아내 주세요. 그들은 위험하므로 먼저 죽이세요."
"나는 내 운명을, 아니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알아요. 난 한 명이라도 이스라엘 사람을 죽이라고 태어났어요."
"저는 커서 아빠처럼 해적이 되어 외국 배를 많이 납치할거예요"(소말리아)
대학교에 가고 싶어서 미군에 입대하는 17살의 미국 청년들,
형의 죽음을 앞에 두고 반군에 가담하는 아이들
세계는 끊임없이 싸우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증오와 복수로 몰아넣고,
또 그들을 처참하게 희생시키는가?
국제전쟁 전문 pd가 자기 아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들,
마지막 로힝야족 학살을 방관한 아웅산 수치여사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권의식이란 공부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음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또한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전혀 상관없는 먼곳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얼마 안된 미래의 내 문제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국제문제에 관심을 호소하는 글이기도 하다.
아프간사람들이 입국한 이 즈음에 어른도 아이들도 같이 보면서 평화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관심가지고 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위 모든 책들은 별 5개가 아니라 10개도 주고싶은 책들!
그런데 이렇게 리뷰를 대충 몰아쓰는 이유는?
역시 책을 읽고 싶어서....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여전히 좋다.
더군다나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책은
에밀 졸라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코뮌이 배경이라지 않는가?
예약주문 감질나서 왠만하면 안하는데 이 책은 바로 예약주문해서 따끈한 상태로 받았다.
자국이 패한 전쟁을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되고, 다락방님이 말한 저 병사의 코브라자세는 도대체 무엇때문인지도 궁금하고...
빨리 보고싶은데 자꾸 외출할 일이 생기네.... ㅠ.ㅠ
어쨋든 한 권 읽고 나면 한 권 리뷰쓰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번에 실패했으니 오늘부터 1일차 다시 시작이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