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가장자리의 그늘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아버지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는 남자처럼, 우리에게 절대로 상처 주지 않을 남자처럼 온화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시선을 돌린 뒤로도오랫동안 아버지는 그곳에 선 채 양팔을 허공에 흔들며 그쪽으로 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 P40

 "그때 학과사람들이 네 아버지에게 한 일은 부도덕했다. 스티브, 정말이야. 그건 모함이었고 다들 그걸 알았어. 그래서 그때 내가해야 했던 일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거였다고 생각해." 그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정말 그처럼 단순한 일이었어." - P45

이따금 창문 너머로 어머니 얼굴의일부분이나 우리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눈이 보였지만 그 밖에 다른 기척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어머니는 거기 있으면서도 없었다. - P64

"뭐, 말했듯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진 않을 거야." 그리고 그건 어쩌면 어머니가 자신에게도 해왔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선을 그어 그의 존재를 감당했을 것이다. 그가영원히 곁에 있진 않을 거라고. "있잖아. 어떤 사람은 우리삶에 잠시 들어왔다가." 어머니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고,
물위에 햇빛이 반짝였다. "그냥 그렇게 "어머니는 머리위로 손을 거칠게 내저었다.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 거야." - P146

"내 말은, 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어머니가 내 팔을 어루만졌다. "넌 절대 아빠처럼 되지 않을 거야, 스티븐, 넌 아빠와 전혀 달라." - P157

나는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는 나도 최근에 그녀에게서 멀어진 이유를, 적어도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이것이 내 인생 전반에, 그리고과거의 내 모든 연애 관계에 나타난 하나의 패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뚜렷한 이유 없이 물러나는 경향, 갑자기 상대에게 거리를 두는 경향. 내 태도가 앨리슨 자신이 처한 상황과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 P283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곁을 지켰던 어머니,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데릭과 끝났다는 말을 믿었던 어머니. 그를 믿고 또 믿었던 어머니. 에드워드가 좀전까지 묘사했던남자가 침실에서 어머니 앞에 서서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거듭해서 말했던 남자(여러 해가 지난 뒤 어머니가 내게 말해주었다), 부엌에서 어머니에게 수없이 키스하고 손을잡은 남자, 어머니에게 자신의 헌신과 책임, 그리고 사랑을거듭 다짐했던 그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 P305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라 원했던 것의 이상화된모습이 되었다. 그는, 우리가 죽은 이들을 두고 종종 그러듯이, 기억 속에서 미화되었고, 그래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되었다. - P333

 내가 그런일을 하는 이유는 착실하고 세심한 남편이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있어서, 남을 기쁘게 하도록 길들여져서, 그런 일을 하면 내게 힘과 통제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라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았다. - P350

예컨대 나는 아버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자기 옷을 손수만들어 입거나 동네의 중고 가게에서 산 헌옷을 고쳐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옷차림이 깔끔하고 세련된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늘 그렇게 보였다.
아버지의 가족은 늘 가난했고 최신 패션이나 유행과는 거리가 먼 형편이었는데도 말이다. 또한 아버지가 세상이 사람을겉모습에 맞춰 대접한다고 믿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세상에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친구들이나 여자들을 절대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고, 어떤 여자와도 그런 일을기대하게 할 만큼, 가족이나 집을 보여주어야 할 만큼 오래사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401

그건 다른 면에서도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도 데릭도 사랑했고, 학생들도 나도 사랑했지만 우리 모두에게 각기다르게 행동했다. 우리 모두가 아버지의 다른 면을 보고 퍼즐의 다른 조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 중 누가 아버지의 진정한 면을 보았을까? 글쎄, 바로 그것이 항상 의문이었다. - P406

아버지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물었을 때, 줄리언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형을 찾는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단다, 스티브.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나직해졌다. 그냥 아무도-그래, 정말 아무도 형을 진심으로 찾고싶어하지 않았던 거야. 그게 다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물었다.
말한 그대로야. - P417

아버지는 서재 책상 앞 벽에 프루스트의 다음 구절을 적은작은 쪽지를 우리에게 남겼다.
진정한 낙원은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이다. - P423

 다만 그때 나는 무엇이 어떤의미인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앨리슨과 핀이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어 나를 부르는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나와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내가 내려가 함께 놀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래서 잠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작은 풀밭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빠르게, 너무 급하게 걸어가느라 두 사람에게 다다르고 나서야,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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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기 품속에 들어오려는 사람을 두 팔 벌려 감싸안을 수 없는 사람-그런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었다. - P22

"그래요. 사랑이 주는 만족감을 아는 사람은 좀더 따뜻하게 말하는법이지요. 하지만...... 하지만 사랑은 죄악입니다. 그걸 아나요?"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P38

"과거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고 싶게 만들죠. 나는 미래에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서 현재의 존경을 거부하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외로울 미래의 나를 감당하며 사느니 외로운 현재의 나를 감당하고 싶은 겁니다.
자유와 자립과 자아가 판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 대가로서 이 외로움을 감내할 수밖에 없지요."
나는 그런 각오로 살아가는 선생님에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 P43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복수를 하지않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현재 난 개인에 대한 복수 이상의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이지. 그들만 증오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일반적으로 증오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난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위로의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 P83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나는 그의 경멸을 살 만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높은 곳을 바라본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나도 그걸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보는 곳만 높고 그 외의 것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불구자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차제에 만사를 제쳐놓고 그를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그의 머릿속이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훌륭해지지 않는 이상 아무 소용도 없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를인간답게 만드는 첫번째 수단으로 나는 우선 그를 이성 곁에 앉힐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분위기를 접하게 하여,
녹슬어가던 그의 피가 새로워지도록 시도한 것입니다. - P208

그래도 그가 하는 말의 어조만은 강하게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앞에서 말한 고통뿐 아니라 한편으로 어떤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는 나보다 강하다는 공포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 P234

오히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수행을 쌓아나가길 바랐습니다. 그런 수행으로 도를 깨치건 극락을 가진 그런 건 알 바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직 K가 삶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나의 득실과 충돌하는 게두려웠습니다. 요컨대 내가 던진 말은 단순한 이기심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정신적인 향상심이 없는 자는 바보다." - P246

"결혼은 언제 하는데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뭔가 축하 선물을 하고 싶은데, 전 돈이 없어서 드릴 수가 없네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주머니 앞에 앉아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 P261

나는, 남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절실히 느끼긴 했지만, 남만 나쁘게 여길 뿐 자신은 그래도 틀림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은 어떻든지 간에 나 하나만은 나무랄 데 없는 인간이란믿음을 어딘가에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K의 일로 그 믿음이보기 좋게 무너지고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란 생각이 들자, 나는 갑자기 어질어질해졌습니다. 남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나는 자신에게도 정나미가 떨어져 활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 P273

그런데 한창 더운 여름에 메이지 천황이 승하했습니다. 그때 나는메이지 정신은 천황에서 시작되어 천황에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보다 강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 세대가 그후에도살아남는 것은 필경 시대에 뒤처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세게 쳤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솔직하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내는 웃으며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뜸. 그럼 순사라도하시지그래요, 라며 나를 놀렸습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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