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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노경아 옮김 / 느린서재 / 2025년 2월
평점 :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노동과 돌봄이 분리되지 않았고(정확하게는 분리될 수 없었고) 자본주의는 이 2가지를 공간적으로 완벽하게 분리해버렸다. 시장은 돌봄을 노동(급여를 받아 가치를 창출하는 시장에서의 노동)에서 쫒아내벼렸고, 따라서 돌봄은 가족애라는 신성 명제의 등장과 함께 온전히 여성의 의무로 규정되어 버렸다. 우리 사회에서는 오빠나 남동생의 대학 진학을 위해 딸이 10대 초반부터 공장에 가서 돈을 버는 K장녀 신화의 등장, 며느리가 된 여성이 병든 시부모나 남편을 봉양하는 효부 신화같은 것들이 노동을 노동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좀 오래된 이야기인데 내 여동생은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서 치매가 온 시어머니를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10여년간 돌아가실 때까지 돌봤다. 이렇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 구청에서 연락이 왔단다. 효부상을 주고 싶다고.... ㅎㅎ 이 건은 친정어머니의 "그런 상 받으면 뒷말만 많이 나오고 귀찮기만 하다. 니가 뭐 하나만 조금 삐끗해도 효부상 받은게 맞니 틀리니 하는게 사람들이다. 하나도 좋을거 없다"라는 강경한 말씀과 딱히 핅요도 없고 웃긴 상이라는 여동생의 냉소로 결국 여동생은 이 상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웃기는게 이 시대의 이런 상도 친정어머니를 돌보거나 남편이 아내를 돌보는 경우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거 같다. 아니면 그런 경우 자체가 희귀했던거 같다.
어쨌든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 내가 제대로 아는게 아니었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더 잘 보이는구나' 싶을 때가 있다. 이 책에서 아래와 같은 도표를 보았을 때다.

이 도표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배출하는 산업 폐기물과 노동 시장이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고 더 이상 노동력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때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노인, 환자, 장애인은 동률의 선에 위치한다. 자본주의의 공장들이 산업 폐기물을 아무렇게나 버렸듯이, 쓸모없어 진 노동력도 배출하고 나면 그들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시장은 관심이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시장이 노동력 제공 이후의 삶을 보장해주거나 아니면 그 시장의 세금을 계속 받아먹은 국가가 노동 이후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당연한 거 같은데 시장도 국가도 그럴 생각이 없다. 그렇게 되면 불만이 생길 테니 이 불만은 가장 싼 방법으로 무마한다. 그게 바로 효부상이니 뭐니 하는 장치들이다. 국가가 나서서 가족 이데올로기를 알아서 홍보해주고 효부상이니 뭐니 하는 장치를 통해 시장의 잔인함을 은폐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이전의 나의 생각은 돌봄 노동이 노동으로 취급 받지 못하는 것을 복지 시스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저런 도표 하나로 너무 명쾌해진다. 돌봄 노동이 노동으로 취급되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시장 자체의 원죄였음을.... 결국 산업 폐기물이 지구를 황폐화 시키듯, 임금 노동을 할 수 없는, 또는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한 돌봄의 부재는 모든 인간의 삶을 황폐화 시킬 것이다. 고령화 사회라는 것은 결국 환자와 노인과 장애인이 증가하는 것의 다른 말이니 말이다.
여전히 지금도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밀려난 노동력에 대한 돌봄노동을 가정과 여성의 문제로 밀어내고 있다. 여성의 인권, 정치적 권리, 사회적 평등은 일견 많이 나아진듯하다가도 돌봄노동의 영역에 가면 오히려 더 많은 부불노동(무임금 노동)으로 채워진다. 작가가 말하는 페미니즘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에 공감하게 된다.
마지막은(중략) 왜 인간의 생명을 낳고 기르고 그 죽음을 돌보는 노동(재생산 또는 돌봄 노동)이 다른 모든 노동의 하위로 취급되는가 하는 근원적 문제다. 이 의문이 풀릴 때까지 페미니즘의 과제는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27쪽,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재인용, 1990
나는 항상 페미니즘은 세상을 보는 시각의 문제라는 생각을 해왔다. 철학은 결국 세상을 보는 시각이고, 페미니즘은 기존의 철학의 시선이 놓친 틈을 기꺼이 벌려서 "자 보라고 이게 사소한 틈이 아니야. 이 틈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해 왔으니 이제라도 제대로 보자고"라는 말로 느껴왔었다. 짧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페미니즘의 문제를 확인하고,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명제,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 명제를 확인한다.
약자가 약자인 채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상이 페미니즘이다. -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