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붓다 - 붓다의 시선으로, 그의 삶으로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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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아가는 이들 중 특히 젊은이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종교를 믿는 이가 대한민국의 경우 40%가 채 되지 않는다. 그 중 20대와 30대는 20%도 안된다. 

이렇게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합리적, 이성적 사고방식을 중시한다는 점과 탈권위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진 성향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휴식의 필요성, 개인적 성취의 중요성, 재미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종교가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에 최근 불교계에서는 '뉴진스님'과 같은 젊은 층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지만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경향을 바꾸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를 종교적 측면이 아니라 수행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현대인에게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이 많아 보인다. 즉 기복적 관점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삶을 살아갈지에 대한 참고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참고서로서 붓다의 삶은 큰 도움이 된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도 붓다라는 한 인물의 여정은 경이롭고 흥미롭다.


이 책 법륜 스님의 <혁명가 붓다>는 부처의 실재 삶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기적을 행하는 성인으로서의 붓다가 아니라, 우리 삶의 고민을 해결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실천가로서의 붓다가 그려져 있다. 2000여 년 전의 성차별을 비롯해 계급제도 하에서도 그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 인류 보편의 권익과 평등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붓다는 혁명가에 가깝다. 이 혁명가 붓다는 현대의 문명 속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반대로 지극히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현재의 나를 점검해 보게 한다. 우리가 붓다와 같은 혁명가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내가 괴로움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내가 홀로 '나' 인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모두가 함께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더불어 삶에 대한 희망을 품게 만든다. 


혁명가 붓다를 친구로 둔다면 오늘 하루도 나는 괴롭지 않은 삶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른다. 더불어 현대가 갖고 있는 맹점에 대한 고민과 그 해결에 대한 실천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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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사과와 배 나무가 큰 차이를 보였다. 먼저 사과는 올해 7년 차를 맞이했는데 올해가 가장 많은 열매를 맺었다. 부사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4년 차로 아직 나무 크기가 크지 않은데다 서너 개 밖에 열리지 않았다. 반면 7년 차 된 사과나무는 100여개 정도 열린 것은 아닌가 싶다. 게다가 아직까지 병에 걸리거나 벌레로 인해 큰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 약 없이 키우는 '기적의 사과'가 가능한 것일까. 



아직 흥분하기엔 이르다. 병충해는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고, 한 번 닥칠 때 완전히 망하는 수도 있다. 게다가 알이 커지고 점점 익어갈 때 쯤이면 직박구리를 비롯해 새들이 다 쪼아먹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올해는 사과에 봉지를 씌우기로 했다. 



일단 봉지를 씌우기는 한데 전혀 사전 지식이 없어서 낭패를 보았다. 처음 구입한 사과 봉지는 한쪽에 철심이 없어서 봉지 입구를 아무리 접어도 다시 펴지면서 봉지가 떨어지거나 열매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유튜브를 통해 봉지 접는 동영상을 살펴보면 두 세 번 겹쳐 접으면 딱 고정이 되던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겹쳐 접는 것이 아니라 둘둘 말아버리는 방식으로 봉지를 씌웠지만 100% 제 기능을 발휘할 성 싶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 곰곰히 들여다보니 유튜브에 나오는 사과 봉지들엔 한쪽에 철심이 들어가 있었다. 이것이 접혔을 때 고정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철심이 들어간 사과 봉지를 다시 사서 접어 보니 접혀지는 것이 훨씬 낫다. 완벽하게 접는 방식을 아직 터득하지 못해 간혹 실수도 하지만 철심 없는 봉지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어떤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일의 능률과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친다.



하지만 배는 완전히 망했다. 적성병은 물론이거니와 벌레들 피해도 제법 있다. 괜찮은 것들을 찾아서 봉지를 씌워볼까 했는데, 건강한 것들을 찾아보는 게 힘들었다. 헛심을 쓰기가 싫어서 그냥 방치하기로 결정. 현재까지는 주위에 향나무 탓에 배나무를 친환경적으로 키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봉지를 씌운 사과나무는 올 가을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병충해를 이겨낼 수 있을지 사뭇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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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블루베리 삽수의 잎이 무성해지면서 옆의 삽수 가지와 겹치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뿌리내림으로 보았을 때도 이제 작은 화분으로 옮겨 심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삽목한 것 중 절반 정도는 잎도 뿌리도 나지 않았다. 이것은 폐기 처분하고, 잎이 나온 것들을 하나 하나 조심히 뽑았다. 





막상 삽수를 뽑고 보니 깊이가 깊은 화분에 심어 놓은 삽목들이 더 잘자란 듯 보인다. 그래서 뽑혀진 삽수 중 아직 뿌리를 많이 내리지 못해 흙을 움켜잡지 못한 것들은 높이가 긴 화분으로 모두 옮겨 심었다. 



흙을 제법 움켜잡은 삽수와 조금이라도 흙을 잡고 있는 삽수는 모두 작은 화분으로 나누어서 옮겨 심었다. 



대략 30여 개 정도 나온 듯 한데, 올 가을, 겨울을 잘 넘겨서 내년 봄에는 옮겨 심을 정도로 자라기를 희망해 본다. 그리고 내년에는 최소 50개 정도는 나올 수 있도록 삽목을 많이 해 볼 생각이다. 


한편 가시오가피는 삽목이 어려운 것인지, 방법을 모르는 것인지 뿌리내린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본 뿌리에서 뼏쳐 나가 자라는 것들을 잘 키우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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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모종 3개가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각자 자라는 곳이 다른데, 어떤 영향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달린 갯수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엄지손톱만큼 열렸던 수박이 다음날 사라져 버렸고(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대신 다른 가지에서 딱 그만큼 크기의 수박 열매를 찾을 수 있었다. 또다른 하나는 가지마다 수박이 열려 총 3개가 열린데다 크기도 주먹만하다. 마지막 하나는 열매가 아직 열리지 않고 줄기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같은 날 심었던 참외는 가지만 무성하고 열매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슬슬 열매를 맺혀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은데....  

수박이 열리고 40일 정도 지나면 수확할 시기라고 하는데, 8월 초 중순 쯤 맛있는 수박을 먹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지난해에는 딱 1통 따 먹어봤다. 크기는 4키로 정도에 당도는 그럭저럭. 약을 한 번도 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란 수박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지만, 상품으로 따진다면 판매가 가능할 지는 모르겠다. 올해는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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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3>: 죽음 앞 선택의 딜레마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3》는 생존을 위한 잔혹한 게임 속에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삶과 죽음,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심지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까지. 마치 밸런스 게임처럼 양 극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라는 본능을 거스르고 '양심'이라는 허구의 가치를 좇아 기꺼이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존재만이 진정 '인간'이라 불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드라마는 삶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타인을 위한 희생, 혹은 자기희생을 선택하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성의 숭고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선택은 분명 강렬한 감동을 유발하며, 시청자에게 '인간이란 그래야만 한다'는 정해진 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삶의 벼랑 끝에서 양심을 지키는 행위, 그것이 곧 인간다운 선택이라는 메시지는 강력한 울림을 준다.

 

인간적인 선택의 경계: 누구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오징어 게임 3》의 가장 큰 갈등과 동시에 현실과의 괴리가 발생한다. 과연 모든 사람이 삶이라는 가장 강력한 본능을 거부하고 양심을 따라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드라마가 보여주는 희생과 순교에 가까운 '인간적인' 선택은 현실 속 대다수 사람에게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냉정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우리는 《오징어 게임 3》 속에서 생존을 위해 타인을 해치거나,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인물들을 보며 때로는 분노하고 욕을 퍼붓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내면에는 '과연 나라면 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불편한 질문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 즉 생존 본능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는 타고나거나, 혹은 극한의 상황과 고통스러운 성찰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는 특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에게는 그러한 삶에 대한 본능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가 기본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오징어 게임 3》에서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다 죽어간 이들을 쉽게 '악마화'하거나 '악당화'하기 어렵다. 그들은 단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에 충실했던 존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택은 비난받을지언정, 우리 또한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희생' '순교',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미명' 뒤에 숨겨진 현실적인 본성과는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 그럼에도 던지는 질문

결국 《오징어 게임 3》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과 숭고한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통해 극적인 재미를 선사하지만, '인간다운 선택'이라는 정의를 너무나도 극단적인 희생으로 몰아세우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가 되어버린 측면이 있다. 모든 사람이 양심을 위해 삶마저 내던질 수 있다는 전제는, 인간 본성의 복잡다단함을 단순화시킨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 게임 3》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이 당신을 어떤 '인간'으로 규정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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