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수단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가.

 

2. 옥자는 수단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졌다. 가축은 목적적 삶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단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AI가 발생하면 온전한 가축들까지 살처분한다. 벌써 몇년째 되풀이되고 있지만 이 살처분 행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3. 옥자는 인간의 고기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줄 슈퍼돼지다. 만약 옥자가 그저 평범한 돼지였다면 어떻게 사육되고 도살되어 식탁 위에 오르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를 비롯해 많은 고기들이 어떻게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듯이 말이다.

 

4. 미자는 옥자를 가축으로 대하지 않았다. 생명체라는 목적으로 대했다. 친구인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10년간 키운, 아니 함께 자란 동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집으로 데리고 돌아와야 만 할 가족이 되었다. 미자가 슈퍼돼지를 생산한 미란도와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때문이다.

 

5. 수단으로서의 가축이 어떻게 취급되어지는 것인지는 현대인에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실상이 드라나면 도덕적 불편함이 자리잡는다. 그래서 미란도 회사는 홍보에 열을 올렸다. 편안하게 고기를 먹도록. 이런 포장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민낯을 마주 대하는 것은 불편할 뿐이다.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청바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거위털파카는 어떻게 시장에 나오는지 알더라도 눈을 감는다. 민낯을 대하기 보다는 예쁘게 포장된 것을 보고 만족해한다.   

 

6. 혹시 <워낭소리>라는 영화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와 '음메'라는 소가 40년을 함께 살아온 흔적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밭을 갈고 짐을 운반하고, 할아버지의 두 손, 두 발이 되어주었던 소는 수단으로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 아마도 목적으로서의 삶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옥자>를 보며 공장식 가축 사육을 비판하지만, 그들이 수단으로 존재하는한 이 행위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7. 수많은 옥자들 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또한 과연 목적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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