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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빛
강운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찰나의 빛이 선사하는. 똑같은 풍경이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빛의 성격이 달라져 똑같은 감응을 일으키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면(정말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 빛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특히 디지털이 아닌 필름을 들고서 찍을 때면 한번의 셔터를 누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기 강운구라는 작가가 어렵게 어렵게 눌러온 셔터의 흔적들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책이 있습니다. 메밀꽃의 하얀 색에, 저물어 가는 분홍빛에, 버들강아지의 황토빛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바라보고, 그의 사진 또한 어떠한 의지도 갖지 않기에 사물의 본질마저 꿰뚫는 듯 합니다. 아니, 오히려 관조적인 그 시선에 보는 이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어떤 필터도 갖고 있지 않음은 그의 글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력으로 삼기 위하여 꼭대기나 탐하는 사람들을 서양에서는 '피크 베거 '(산정 구걸꾼)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이 산 저 산에 그런 거지가 많다. (P51)
난 정말로 순수하게 자연을 좋아해 산을 올랐는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어떤 산을 올랐다는 명함을 내민다거나 몇시간만에 올랐다는 자랑을 위해 올랐었는지, 내가 진정 그 산을 사랑했는지 반성하도록 만듭니다. 순수함은 그래서 아름다운가 봅니다. 그의 사진과 글의 순수함이 자꾸 저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순박한 메밀밭을, 메밀밭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서보다는 한 소설의 무대로서 바라보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봉평 아닌 다른 곳의 메밀밭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은 그저 보통 메밀밭일 뿐이다. (P129)
알려졌다는 것은 어찌보면 검증되었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자주 할 수 없기에 실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 유명한 곳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 또한 어찌보면 관광지 안내 책자의, 또는 영화 속의, 소설 속의 감정을 그대로 베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감정을 베껴내지 않고 진정한 그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선 우연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빛이 흘러가서 만드는 그 시간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나와 그 어떤 대상의 만남. 겉치례를 털어낸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