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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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리프킨이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까지 세상을 이끌어온 아메리칸 드림의 생각으로는 더이상 드림에 걸맞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반대선상에 있는 동양적 사고가 해결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동양적 사고를 융합한 유러피언 드림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메리칸 드림이란 무한한 기회를 강조하며 물질적인 부를 쌓는 것을 성공이라 본다. 무한한 기회란 자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자율이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영역 밖의 상황에 영향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를 축적해야 한다. 부는 독립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배타성을 띄며 이 배타성이 안전을 보장해준다. 이러한 현세의 행복은 인내와 자기개선, 자립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내세의 구원추구라는 청교도적 근로 윤리와 맞물린다.

하지만 이런 아메리칸 드림의 장점이 점점 변질되면서 물질적 부를 운이나 뻔뻔스러움으로 추구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팽배해졌고 자기 이익추구라는 것도 단순히 부의 축적에서 쾌락과 심리적 생존으로 변화하게 됐다. 이것은 베이비붐세대 부모가 이미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젊은 세대들은 부에 대한 동기유발이 없어지고 대신 쾌락과 경험만에 사로잡혀 권태에 빠지게 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아메리칸 드림적 성격은 정부보다는 개인을 중시하게 됨으로써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해 비영리단체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게 된다. 또한 기회균등의 나라이지 결과 균등의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지금까지 생산성을 지녀 왔다. 단일 언어와 함께 값싼 노동력, 천연자원이 생산성과 효율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효율성에 대해선 유럽인들은 반대한다. 인간이 효율성만 따진다면 인간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러피언 드림은 무엇인가.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무제한적 발전보다는 환경보존과 지속가능한 개발을, 무자비한 노력보다는 심오한 놀이를, 재산권보다는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일방적 무력행사보다는 다원적 협력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기본 생각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자유와 달리 유러피언의 자유는 어딘가 소속되어 있음으로 보장된다. 타인과 수많은 상호의존관계속에서 안전이 보장됨으로써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지리적 환경 차이에 기인한다. 성을 중심으로 성 안에서 오밀조밀하게 생활했던 유렵과 광활한 대지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배타적이어야 했던 미국의 차이가 자유에 대한 개념에도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미국은 무료 교육기회를 제공한 후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한다. 반면 유럽은 적자생존 시장에서 사회가 균형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처지는 사람이 없도록 불운한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처럼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시장자본주의적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현재까지 발전을 이끌어온 아메리칸 드림이 유러피언 드림으로 바뀌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있을까.

저자는 공감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네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투쟁과 경쟁의 진화론이 상호관계와 공생의 생태학으로 바뀌듯 개별화에서 통합으로 바뀌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감은 단순히 이타주의나 온정보다는 취약성(핵에 대한 위험성과 같은)에 대한 인식과 안전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어야 그 바탕이 튼튼해진다. 이런 공감은 연습과 활력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궁극적 표현이 공감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어찌보면 이런 공감의 확대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재와 같이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이런 공감능력을 더욱 키워줄 수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시장의 변화는 또 어떤가. 현재 아마존과 냅스터가 경제모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단초를 보여준다. 아마존에서는 실제 책이나 CD를 판매한다. 그러나 냅스터는 시간을 판매한다. 소비자를 음악 네트워크의 일부, 일원으로 만들어 콘텐트를 제공해 접근권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는 시장이 적대적 공공장소, 즉 싸게 사고 비싸게 팔아야 하는 곳인데 비해 새로운 네트워크는 다른 사람과 전체 이익을 최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구조가 된다. 구매자가 부담해야 했던 위험부담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네트워크는 내것도 네것이 되는 것, 즉 소유와 사용권을 공유하는 중에 이익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때 주권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만 한다.

세상의 이런 변화는 개인의 발전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일생은 전체에서 자아를 분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아가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어머니와 분리되고, 청소년기에는 가족과 분리되며 성인 초기에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개인은 점차 넓어지는 사회적, 환경적 관계에 새롭게 동화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즉 점점 강해지는 개인화 노력과 더욱 커지는 사회적 의무 사이에서 미묘하게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라는 개인은 성장을 하다 어느 수준에서 정체에 빠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의 능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아메리칸 드림이 강조하는 독립성에서 멈춰서 있는 것이다. 고전적 시장에 대한 반발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트워크로의 전환은 이루지 못한 채 마지막 시장의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도 든다. 독립의 장점만에 취해 있다보니 정녕 네트워크가 주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공감의 능력을 점점 떨어지고 점차 누에고치처럼 안으로만 파고든다. 과연 '나'는 성장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독립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타인 또는 네트워크에 쏟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한가닥 희망을 가져본다.

스스로 일어서 스스로 걸어가 손을 내밀어 상대의 손을 잡아보는 것 속에 유러피언 드림은 살아 숨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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