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때도 아닌데 갑자기 온 가족이 성묘를 가게 됐다. 지금까지 추석에만 성묘를 갔던 터라 봄기운에 뒤덮인 공원묘지는 매우 낯설었다. 죽음의 기운은 오히려 평화롭고 안온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죽음이 있어 봄과 생명이 되돌아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 마냥. 인근 화훼단지에서 산 꽃화분을 비석 곁에 심었다. 꽃이 심겨진 흙무더기가 무너지지 않게 검은 비닐 단지 안에서 쏘옥쏙 빼어내는 날 보더니 옆에 있던 동생이 "와, 제법이네"한다. 언제나 나를 과대평가, 과소평가 하기만 하는 동생. "그러엄~ 내가 타고난 가드너(gardener)인데"하니 삐죽, 한다. 의기양양해진 내가 썰렁하게 덧붙인 말 "존 엘리엇 가드너......." 그러자 동생이 묻는다. "존 엘리엇이 유명한 가드너야?"
(* John eliot gardner는 나름대로 유명한 지휘자 이름입니다.)
둘.
녹두 고시촌에는 고시생을 위한 일요일 5시 미사가 있다. 일반 본당이 아닌, 상가 건물 1층을 개조해 꽤 쓸만한 사무실, 만남의 방, 성당을 꾸며놓았다. 모대학 법대학장님이 기증했다는 기사를 언뜻 본 것 같은데, 역시 권력 언저리에 있으면 살기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시촌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성당이 또 하나 있는데 말이다) 고시생인 동생의 안내로 이곳에 갔는데, 들어가기 전부터 "여기는 성당이 좁아서 늦게 들어가면 쪽팔린다"고 투덜댄다. 나 땜에 늦은 것도 아니고 성묘 갔다가 시간이 딱 맞아 여기로 온 것 뿐인데... 끝나고 나오는데 입구에 빵과 우유가 준비되어 있다. 인원수에 비해 간식이 모자랄 것 같아 보였지만 건조한 봄바람에 목이 많이 말랐던 터라 냉큼 딸기우유 하나를 집었다. 동생은 또 핀잔이다. "10분이나 지각한 주제에 간식만 챙기냐" 지각과 간식이 무슨 관계지? 지각해도 영성체는 꼬박 주는데? 차라리 동생이 배고픈 고시생들을 위한 간식을 손님인 내가 왜 가져가냐, 목마르면 슈퍼에서 사먹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면 수긍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동생, 내가 신나게 꿀꺽꿀꺽 마시는 걸 보더니 자기도 목이 마른지 한 모금만 달란다. 내가 안주자 뺐기까지 하려는 통에 다급해진 난 용량 초과로 우유를 입에다 부어댔다. 길거리에서 이 나이에 동생이랑 먹는 걸로 아웅다웅 하자니 그러잖아도 우스운 터에, 노닥거리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남자 고시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웃음... 입이 터지도록 들어 있는 우유를 삼키지는 못하겠고 뱉지도 못하겠고.... 결국 몇 초간 애쓰다가 결국 쭈그리고 앉아 입에 있던 우유를 모두 토해버렸다. 분홍색 우유가 아스팔트 위에 적셔신 꼴이라니...다행히 내가 비참함과 쪽팔림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 광경을 처음부터 줄곧 지켜보았으면서도 쪽팔리다 도망가지 않고, 괜찮냐 걱정하며 등 두드려주고, 휴지로 아스팔트 바닥의 우유를 닦는 날 도와주던 우리 오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