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신학자로서 또는 수도자로서-이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무엇이 세상인지,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세상이 형성되고 구성되어 있는지 등 신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고서도 신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창조개념은 이로써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만다. 피조물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신의 창조사업을 진지하게 논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 하며 신을 찬미하고 사랑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신약성서 면면은 예수가, 자신이 속한 시공간의,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내며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았고 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그는 바리사이인들이 지닌 허위의 심층, 율법을 강조하는 그들의 문자지상주의, 패권주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내부를 통렬히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반대되는 사회 현실을, 그 내부를, 심장을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 또 예수는 종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비전을 민중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속담 등 그들 언어로 표현해 냈으며 그들의 생활상을 들어 비유로 설명했다. 예수는 단지 아름답고 고상한 말만 뿜어낸 교양인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활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고 그 교회의 최고 권력층은 점점 그들만의 성에 스스로 갇힌 채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듯 보인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은 그들에게 그저 속된 것, 세상적인 것, 하느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게 만드는 것, 비본질적인 것,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신경쓰지 말아야 될 것, 물리쳐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의 악과 고통, 있는 그대로의 세상살이 모습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그들에게 세상은 때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또 때로는 죄많은 인간이 더럽혀 놓은 천한 것의 양극단을 오간다. 그들이 사는 물리적 공간은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제 입으로 들어갈 밥을 자기 손으로 벌어먹지 않을 뿐 아니라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상의 행위마저도 그들이 고용한 '세상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가난하게 산다고, 세상에 대해 어떤 욕심도 없다고 착각하며 지낸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병들었을 때 치료해 줄 것, 죽으면 묻어줄 것이 보장된 상태에서 더이상의 욕심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 안락하고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는 곳에서 그들은 제 손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세상 사람들이 부디 죄악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에게 돌아오길,  하며, 그저 허황된 기도만을 되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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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7-22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교회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평생을 두고 제게 시험대처럼 다가올 듯한데 독실하다는 신앙의 선배들에겐 제 속을 드러낼 수 없으니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