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꼬대를 하기 시작한 건 집 떠나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였다. 손주들에게 잔정이 전혀 없는 친할머니와의 동거는 하숙이나 자취의 어려움과는 또다른, 일면 내게는 더욱 힘들고 괴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할머니집이 마침 학교까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랜기간 혼자 사신 할머니에 대한, 못말리는 효자 장남인 아빠의 강압감 때문에 나는 4년 내내 그 집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 집에 내려오자마자 엄마는 내게 잠꼬대 버릇이 생겼다는 걸 알아챘고 엄마는 그 때 무척 가슴 아파하셨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잠꼬대는 주로 할머니에게 대드는 내용이었고, 가끔씩은 엉엉 울며 일어나기도 했다. "착한 애가 얼마나 눈치를 보고, 억압되고, 가슴에 묻어둔 것이 많았으면... " 하시던 엄마는  "20대에는 잠꼬대 버릇이 생기기도 한다더라. 좀 그러다가 없어진대"하며 애써 위로해 주셨다. 

동생 둘이 하나씩 서울로 올라오고, 한 명 이상은 더이상 집에서 돌봐 줄 수 없다는, 내가 이 나이에 애들 뒤치닥거리 해주게 생겼냐는 할머니의 의지에 따라 나는 동생들과 새둥지를 틀었다. 독립이자 해방이었다. 대학 4학년 때 IMF로 취업난이 생기면서 나의 걱정은 직장을 못 갖는 자체가 아니라 계속 할머니집에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클 정도였으니까. 결국 졸업도 하기 전 11월에 처음으로 시험 친 직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할머니집을 떠난 후에도 나의 잠꼬대는 계속됐다. 나는 가끔씩 밤마다 할머니에게 말대꾸했고, 고모들의 잔소리와 눈치에 억울한 통곡을 하며 일어났다.

할머니집을 떠난 지도 6년째, 당시와 관련된 악몽이나 잠꼬대의 빈도와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잠꼬대만은 계속된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처음에는 자다가 내 잠꼬대 때문에 번쩍번쩍 일어났다고 했다. 워낙에 잠꼬대가 또렷하고 크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이었냐 물어보면, 정확히 알아듣진 못해도, 대개는 아직도 무언가를 주장하고 따지는 내용이란다.

오늘 아침, 비몽사몽간에 그가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나중에 제 정신 차리고 보니 와이셔츠 단추 달고 있는 거였더만) 키득키득 웃음을 참고 있는 소릴 들었다. 굉장히 재밌는 걸 억지로 참는 웃음이길래 분명 내가 또 잠꼬대를 했구나 싶어 물어봤더니, 내가 매우 또렷하게 "여보세요?"라고 했단다. 잠결에도 피식, 웃었다.  

우스울 테다. 모든 잠꼬대가 혼자서 상대의 대화, 행동까지 주고 받는 것이긴 하지만 전화하는 듯이 "여보세요"라고 발화된 걸 들었을 땐,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재미를 선사한 건 난데, 나는 그걸 나중에 들어 알고, 억울하잖아, 나도 잠꼬대하는 사람을 고를 걸,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난 꿈도 잘 꾸고, 꿈을 그대로만 옮기면 판타스틱 소설이나 영화가 될 법도 한 정도고^^; , 게다가 잠꼬대까지... 그래도 다행이다. 내 상처 중 하나가 점점 잊혀지는 중인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아도 좋고, 노래를 불러도 좋으니, 그래서 때때로 같이 사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가 내 악몽에 안타까워 하며 달래주지 않게 되면 더 좋으니, 매일 매일 행복한 잠꼬대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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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4-2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심리학이나 머 여러가지 전문적인 면에서 볼 때 정신적 외상이 잠꼬대로 나타난 거잖아요.. 근데 키득키득 웃고 말았어요..;; '여보세요?' 땜에.. ^^ 저와 같이 사는 사람도 자다가 일 관련해서 막 설명해주다가 제가 '그래서, 어느 나라에 뭘 보낼 건데?' 라고 대꾸를 하면 잠이 좀 깼는지 피식, 웃더군요..^^

마냐 2004-04-2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기억'이 옆지기와의 따뜻한 일상속에서 엷어지고, 오히려 예쁘게 새로 태어나는 거 같아...결말이 무지 마음에 듭니다. ^^

프레이야 2004-04-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라비스님, 심각하게 공감하며 읽다가 "여보세요? 땜에 배를 잡았어요.
저랑 같이 사는 사람도 잠꼬대를 종종 하거든요, 그거 옆에서 듣는 사람 기분 제가 알죠.
얼마나 재밌다구요. 저도 예전엔 잠꼬대를 했어요. 님처럼 따지고 주장하는 내용이었어요. 잠꼬대하다 깨면 그 내용이 어느정도 기억나고, 나는 마구 억울해하며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죠. 근데 세월이 흐르며 그런 거 없어졌어요. 따지고 주장할 필요가 없어졌는지 제 생활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는지. 아무튼 좋은 쪽인 것 같아요^^

물무늬 2004-04-22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근래에 우연히 문학 비평, 시학 그런 것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글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 내용이 중에 중요하다고들 하는 개념이 하나 떠올랐어요.
"반전!"
뭔가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갔는데...."여보세요?" 와 "낭군님의 키득키득"....그리고 매듭 짓는 행복한 잠꼬대....노스롭 프라이의 "구원의 신화"에서 나오는 희극의 반전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제 입가에는 미소가....^^
물론 끝부분이 보기에 따라 조금은 그늘진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너무 예쁜 이야기였어요....방금 문지방에 새끼 발가락 부딛혀서 발톱이 꺽이고 피가 고여서 쓰라린 느낌이었는데, 님의 잔잔하고 포근하며 미소가 번지게 하는 이야기에 그 통증을 잊었네요..감사해요....^^

아라비스 2004-04-26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글을 재밌게 읽고 있는 터라, 재밌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제 성향도 그렇지만 글은 더욱 엄숙주의 색채를 지녔었다고 반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시도해 본 스타일인데, 역시 몸에 맞지 않은 옷 입은 듯 어색하고 어눌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