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구석에 있다가 시간 맞춰 약속 장소에 나가려고 서두르면, 꼭 뭔가를 빠뜨리기 마련이다. 오늘도, 저녁에 종로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평소 외출시 준비물을 다 챙겼다고 생각하고 머나먼 버스정거장까지 열심히 가주셨다. 종로로 나가는 버스정거장은 집에서 한 15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거의 도착할 무렵, 뭔가 많이 허전했다. 주머니가 텅텅. 철푸덕. 지갑이랑 열쇠랑 손수건을 안가지고 나오고, 왼쪽 손목에 보니 시계도 없네. 어째, 지갑이라도 있었으면 그냥 가겠지만, 지갑이 없으니 버스를 못타는거야 당연한거고. 다시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준비물 챙겨 나오니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버스는 포기하고 마을버스-지하철을 선택함으로써 약속시간엔 늦지 않았지만,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만해도, 분명 가방 안에 책 한권, 수첩 하나, 형광펜, 플러스펜, 우산을 넣고 다 됐다, 하고는 집을 나선건데, 정작 제일 중요한 지갑을 안가지고 오다니. 외출모드일 때 언제나 준비물의 마지막은 책이다. 어떤 책을 집어넣을까를 항상 고민한다. 읽던 책이 두껍고 머리 아픈 책이면 이거 말고 다른 가볍고 머리 덜 아픈 책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어떤 책이냐 이거 만지작 저거 만지작 하다가 출발시간이 지연된다.

  그렇게 고민해서 가방 안에 넣은 책을 그럼 볼 수 있느냐, 아니다. 못 본다. 장거리 지하철 여행이라면 모를까, 다른 모든 경우엔 거의 책을 읽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겁지만 그래도 난 책을 항상 집어넣는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다.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다. 낮잠 30분을 자더라도 내 머리 맡엔 책이 놓여있다. 언제나 형광펜과 함께. 그럼 책을 보다 자느냐, 아니다. 불도 다 꺼놨는데 무슨 책을 보겠느냐, 못본다. 그래도 난 한 글자도 못 볼 거 알면서 머리 맡에 책을 두고 잔다. 티비를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언제나 마찬가지다. 항상 책은 따라다닌다. 얼마나 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몸의 일부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 생각해보면 그다지 오랜 세월 같지도 않다. 기껏해야 4-5년. 내 삶에 있어 음악이 차지하던 비중을 책이 대체해버린 이후 언제나 그랬던거 같다. 음악이 왜 책으로 대체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언젠가 읽었던, 어느 매체에 내 인생의 책으로 소개했던,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고, 눈물 흘렸고, 감동 받았던 그 시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매일이 고민의 연속이었고, 왜, 라는 질문을 항상 달고 살았었다. 어쩌면 고민을 안겨준 것도 책이고, 고민의 실마리를 풀어준 것도 책이었다. 이후로 손에서 책을 떼지 않고 살았던거 같다.

  외출 할 때 책을 못 읽을걸 알면서 읽던 책이 몇 페이지 남지 않으면 난 다른 책과 함께 두 권을 넣고 다녔다. 그럼 얼마 안남은 책을 읽고, 다음 책을 펼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물론 그럴 때도 있다. 읽고 또 다시 새 책을 꺼내어 읽는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는건, '만일' 읽던 책을 다 읽었을 때 느끼게 될 허전함과 뭔가를 더 읽고픈 욕구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금 본 책을 또 보기는 싫고, 다른 뭔가를 보며 길거리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읽을 게 없을 경우 난감하다. 무가지 신문이나 광고문은 이 허전함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안읽을 확률이 높은 '다음 책'을 싣고 집을 나선다. 내일도.

 


댓글(3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렌초의시종 2007-08-2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추천을 할 수 밖에 없는 글은, 남의 일 같지 않은 글이지요.ㅎㅎ 왜 항상 읽고 있는 책 말고도, 행여라도 그 책을 다 읽고나서 읽을 책이 없을까봐 여분의 책을 챙기는 것인지 저도 저를 모르겠어요.ㅋ(심지어는 지금 읽는 책이 반 이상 남았는데도!)

이잘코군 2007-08-24 00:23   좋아요 0 | URL
지금 읽는 책의 반 이상 남았는데도 그러신다면, 로렌초의 시종님이 책을 빨리 읽거나, 아니면 저보다 욕심이 과하신가봅니다. :) 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니, 스스로 매일같이 반복하는 짓거리를 보면서 바보같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크크.

로렌초의시종 2007-08-24 00:28   좋아요 0 | URL
ㅋㅋㅋ 빨리 읽지는 못해요. 오히려 신경이 예민해서 아무데서나 책을 펴고 읽지도 않지요. 그저 욕심이 과한것 뿐이죠~ 저는 아프님을 보면서 제가 지나치기는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멜기세덱 2007-08-24 01:16   좋아요 0 | URL
저도 어딜 나설때는 반드시 여분의 책을 챙긴답니다. "책을 다 읽고나서 읽을 책이 없을까봐" 이기도 하지만,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서 다른 읽을 거리를 준비하기도 하는 것이죠. 이를테면, 책을 읽다가 지루해진다거나, 아주 짧은 시간에 간단히 읽을 수 있는 책들, 장거리 이동 시에는 침착하니 읽을 수 있는 책들, 그런 종류로 한 2~3권 정도의 여유분을 가지고 다닌답니다.
뭐, 책 욕심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쩌겠습니다. 그냥 책이 좋으니 여러 책들 넣고 다니면 좋죠 뭐....ㅎㅎㅎ

이잘코군 2007-08-24 09:52   좋아요 0 | URL
저만 그런건 아니었군요. :) 시종님은 저보다 욕심이 많으시고, 저보다 실천은 덜 되는듯 하군요. =333 저도 시종님 보면서 내가 그다지 지나치지도 이상하지도 않다는 걸 알았어요. ㅋㅋㅋ

세덱님도 역시 마찬가지. 저도 그런 때는 있습니다. 무거운 책과 가벼운 책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라)을 두 권 준비해서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다른 책을 읽죠. 책세상문고나 살림총서가 딱 좋습니다. 오가며 한권 뚝딱 읽기엔. 내용에 따라 좀 다르지만.

마노아 2007-08-24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함께 춤을~이군요. 외출할 때 책볼 짬이 없어서 무거우니까 두고가자!하고 빈 손으로 나가면 꼭 책 볼 일이 생기고, 바리바리 챙겨나가면 꼭 책 볼 짬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주구장창 들고 다니려구요^^;;;

이잘코군 2007-08-24 09:53   좋아요 0 | URL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한 권쯤은 준비를... :)

라로 2007-08-2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이잘코군 2007-08-24 09:53   좋아요 0 | URL
앗, 당황스럽습니다. 멋질건 없는데;;;

산사춘 2007-08-24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취해서 잠들었다가 일어났더니 머리맡에 책이 있었어요. 술취해서 꺼낸 격도 안나는데 읽기는 개뿔이었어요. 습관이 무섭삽니다.

이잘코군 2007-08-24 09:54   좋아요 0 | URL
아 심하시군요. -_- 저는 취하고 책을 꺼낸 적은 없는데 아직까지. 그 경지에 도달하려면... 도달하고 싶지 않아요.

시비돌이 2007-08-24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 책이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돌아다니면서 만행을 저지르는 체험 고백 소설인 줄 알았답니다. ^^ 전 가방이 넘 무거워서 책을 넣어가기 힘들때는 mp3 감상으로 시간을 때웁니다.

이잘코군 2007-08-24 09:55   좋아요 0 | URL
헙. -_- 어찌 이런 만행을... 저도 엠피쓰리는 항상 휴대합니다. 어제 같은 경우엔 책은 들고 나가고 귀에 이어폰 끼고 있었어요. 그럼 책은 왜 들고 나간건지. 그냥 생각이 많고 답답할 땐 음악 듣는게 최곱니다.

비연 2007-08-24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하시군요..ㅋㅋ 전 자그마한 핸드백만 달랑 들고 다니는 여자들이 젤 부럽슴다.
울 오마니는 제가 집을 나설 때마다 말씀하시죠. "가방에 뭐 들었니?"
밖에 나가서 잠시라도 시간이 남을 때 읽을거리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하게 되니...
추천입니다, 아프님^^

이잘코군 2007-08-24 09:57   좋아요 0 | URL
저도 밖에 잠깐 나갔는데 혹시 상대가 늦게 오거나 하면 책이 필요해요. 그럼 한시간 늦게 와도 봐줘요. 제가 그 동안 책을 읽었으니까. :)

antitheme 2007-08-24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방에 항상 책을 두권 넣고 다닙니다. 한권은 지금 읽고 있는 책, 또 한권은 혹시 읽는 것 다 읽고 나면 읽을 예비용. 하지만 요즘은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이잘코군 2007-08-24 09:57   좋아요 0 | URL
저랑 비슷하군요. 근데 그 예비용을 꺼내든 적은 별로 없어요. 언제나 무겁기만 하죠. 그래서 예비용은 가벼운 책으로. :)

비로그인 2007-08-24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요즘 두권 ㅠㅠ 무거워 죽겠어요.
안그래도 팔뚝도 두꺼운데 점점 더 두꺼워지는 듯!

이잘코군 2007-08-24 09:58   좋아요 0 | URL
체셔냐옹이가 엄살은! 세 권 들고 다녓. :p

비로그인 2007-08-24 10:04   좋아요 0 | URL
나만 미워해! 쳇!
:b

이잘코군 2007-08-24 10:0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토닥토닥

2007-08-24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잘코군 2007-08-24 09:59   좋아요 0 | URL
아니 속삭일거까지야... ㅎㅎ 끝에 몇장만 남기면... 아깝잖아요. 읽던 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다락방 2007-08-2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저렇게 몇장 안남았을때가 제일 고민되더라구요. 가뜩이나 가방이 무거운데 두권을 가지고 다녀야 하나, 싶어서 말이죠. 그래서 얼마전까지는 그럴때 두권 가지고 다녔는데 요즘엔 방법을 바꿨어요.

하나, 몇장 안남은 책은 집에 두고 새책을 꺼내들고 온다.
둘, 몇장 안남은 책을 들고오고 출근길에 다 읽으면, 출근하자마자 알라딘에서 새책을 주문한다. 오늘 배송되므로 퇴근할때 문제없다.

아하하하
재벌집딸모드로군요 --;;

이잘코군 2007-08-24 11:37   좋아요 0 | URL
너무 안남을 때는 다른 책을 가져가고, 애매할 때는 두 권을 가져가고, 많이 남았을 땐 한 권을 가져갑니다. 크크. 다락방님은 저보다 중증인듯 합니다. 퇴근시간 전에 '오늘 배송' 받는다. 이런건 생각지도 못한. :)

보석 2007-08-24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방 속에 책 한권은 필수죠.^^

이잘코군 2007-08-24 11:37   좋아요 0 | URL
넵. 단거리든 장거리든 한 권은 반드시 들어갑니다. 심지어 동네에서 친구를 만나러가더라도. -_-

비로그인 2007-08-2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 나랑 비슷한데!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바로 이럴 때죠.
그런데 왜 이리 댓글이 많습니까?
저같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잖아요.

비로그인 2007-08-24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웃음) 요즘은 이런저런 일들로 책읽기를 소홀히 하다가..
어제부터 다시 책을 잡았는데. 책을 읽다가 졸음에 밀려 나도 모르게 기절(수면)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후하핫. 그러니까 머리맡에 책이 있는 것을 좋아한달까.
운전을 안하고 대중교통(특히 지하철,장거리)을 이용할 때 저 역시 책 한권은 꼭 필수.
읽던 책이 모자를 것 같으면 여분 더 챙기는 것까지 다들 똑같군요.(웃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랄까. 그나저나 지갑 좀 잘 챙기고 다니세요~ㅋㅋ

향기로운 2007-08-2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출근할때 책을 놓고오면 하루가 다 심란해요..ㅠㅠ;; 더구나 몇장 남지 않은 책이라면 다른 책도 들고와야하는 수고까지..^^;; 다락방님처럼 서울에 살면 당일배송이라도 이용하면 덜 수고로울텐데ㅡ.ㅡ,,, 아 부럽당~

프레이야 2007-08-2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들 거의 공통의 습관일 것 같아요. 근데 어떤 날은 가지고 나간 두 권의 책 중
하나도 손 못 대는 날이 있어요. 괜히 무겁기만 했잖아, 투덜투덜.. ^^

이잘코군 2007-08-24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서님 / 다들 같은 상황인가봅니다. :) 정말 많이들 다셨네요.
엘신님 / 저도 기절수면 좋아해요. 어려운 책 집어들고 읽다가 어느 순간 철푸덕. 크크.
향기로운님 / 출근길에 읽을 책이 있었는데, 퇴근길에 책이 없으면, 난감합니다. 많이 허전해요.
혜경님 / 책을 읽는 이들의 공통된 습관인가봅니다. 저도 두 권 들고 나가도 그 중 한 권 손대지 않은 적도 많아요. 가방만 무거워지는거죠. :)

twinpix 2007-08-2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나갈 때 책을 들고 나가는데 읽을 분량 조절을 역시 잘해야겠더라고요. 너무 빨리 다 읽어버리면 남는 시간이 있어도 읽을 게 없고 그렇다고 또 너무 많이 가져가면 무겁고. 또 비오는 날은 가방까지 전부 젖어버려서 귀한 책이 젖는 경우도 있었죠. 'ㅁ';;;;;;

이잘코군 2007-08-25 15:44   좋아요 0 | URL
저는 요새 거의 들고만 다니는거 같습니다. 읽던 책도. -_- 그보다 이어폰을 선호하는 듯.

웽스북스 2007-08-28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완전 아프락사스님과 다른 알라디너님들 모두에게 공감 백배 보내며, 못읽을 거 알면서도 항상 두권은 넣어야 맘편한 아가씨 웃고있습니다 ㅋㅋㅋ

이잘코군 2007-08-28 07:43   좋아요 0 | URL
하하. 두 권 꽤 무거운데. 가벼운 놈으로다가 두 권 넣어야지. 두 권 넣고 못 읽을 때가 많아서 그 담부터는 가능성을 점쳐요. 오늘 나가면 이 책을 다 읽고 들어올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한 권을 다 읽게 된다면 어떤 놈을 가져가는게 좋을까, 둘 다 못 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벼운 놈으로 가져가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니까요. :)

비공개 2007-08-3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한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외출할때 책 고르다 시간이 지연된다는 데는 백배공감... ^^ 특히 저는 시댁이 안산이라서 지하철타는 시간이 긴데, 시댁갈때는 항상 책 몇권씩 고르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 남편한테 혼나거든요(다 읽지도 않을책 무겁게 들고 간다고도 야단).. 그래서 저는 항상 핸드백도 제일 큰놈만 고른답니다. 책이 안들어가는 핸드백은 무용지물이죠.. ㅎㅎ 아프락사스님 항상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잘코군 2007-08-30 12:35   좋아요 0 | URL
크크. 그쵸 외출할 때 꼭 30분에 나가야지, 하고 있으면 책 고르고 챙기느라 40분에 나가고, 약속 시간에 늦고. 일상이죠. 전 남자라 핸드백 이런건 없지만, 가방 구입할 때도 안에 얼마나 집어넣을 수 있나를 고려한답니다.
 

 
"인간의 오류 가능성이란 우리가 모두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진지로 보이거나 도덕적으로 옳은 것으로 보이는 것도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진리의 존재나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일과 양립 가능할 수가 있다. 오류가능주의는 진리와 선을 파악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까닭에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 지적 겸양의 태도를 갖추어야 함을 인정한다.

나아가서 오류 가능주의는 우리가 진리와 선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비판적 추구를 결코 중단해서는 안되며 타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특히 우리와 상이한 견해를 가진 자들로부터 배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에 더 가까이 가기를 진지하게 바라고 최선의 행위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상대주의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오류 가능주의는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의미할 뿐 진리에 대한 존재론적 상대주의를 함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퍼에 따르면,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나도 그를 수 있으며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는 말을 넘어서 "내가 그르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대화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 갈 수 있고, 둘이 모두 진리와 옳음에 더 접근해 갈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오류 가능주의, 혹은 인식적 상대주의로부터 관용과 대화의 근거를 발견하면서 포퍼는 이를 세 가지 원칙으로 정식화한다. 제 1원칙은 내가 그르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 2원칙은 합리적으로 대화해 가면 우리가 범하는 오류의 일부를 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3원칙은 합리적 대화가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진리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는 것이다. "

(<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황경식, 철학과 현실사, 2006, p208-209)



  이 책에서 지적하는 - 칼 포퍼의 지적 - 도덕적 일원론을 견지하는 사람의 문제점은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도덕적 일원론은 인간적 삶의 방식에 대한 최종적 진리를 발견했음을 함축하나, 이는 그 어떤 사람에 있어서도 현실성이 적으면서, 동시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둘째, "하나의 삶의 방식이 최선이며 최고의 가치를 대변한다는 견해는 논리적으로 견지되기 어렵다." (왜냐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인간의 능력이 서로 상이하고 상충하는 기술, 태도, 성향을 요구하는 까닭에 그들 중 일부의 실현은 다른 일부의 실현을 어렵게 한다. 둘째, 인간의 정력과 자원은 불가피하게 한정된 까닭에, 그 누구도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사회질서는 특정 구조를 갖기에 일부 능력에 대해 적대적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능력이 상충할 경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재화나 가치 또한 상충하게 마련인 것이다.) 

 셋째, "도덕적 일원론은 차이를 일탈로, 즉 도덕적 병리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넷째, "도덕적 일원론은 여타의 삶의 방식을 상당한 정도로 오해하게 될 지속적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우선 편향된 시각을 갖는 까닭에 그것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욕구를 거의 갖지 못한다. 편향된 참조틀과 그로 인한 편향된 시각은 상대에 대한 왜곡으로 귀결되고 열등한 삶으로 평가하게 된다. 열등한 것인 까닭에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노력조차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며, 결국 편향과 오해의 순환에 빠지게 된다. 유리한 증거에만 주목하고 불리한 증언에는 등을 돌리게 되니, 결국 악순환의 고리가 종식될 기회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내가 그르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대화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 갈 수 있고, 둘이 모두 진리와 옳음에 더 접근해 갈 수 있다.”는 포퍼의 말을 다시 되새긴다. 오늘 하루도 갔다. 자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urnleft 2007-08-23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대화의 목적이 아예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더 많다는거죠. 합의 혹은 더 거창하게 진리를 향하기 위한 소통이 아니라, 정복, 주도권 혹은 헤게모니 다툼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애초에 엇나가는게 아닐까 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권력투쟁을 통해서나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는게 안타깝기도 하구요.

이잘코군 2007-08-23 08:22   좋아요 0 | URL
그쵸. '대화의 목적'이 다를 경우엔, 시작부터 다를 수 밖에 없고, 목적이 다름을 확인한 뒤에는, 대화를 하고자 하는 쪽도 그만 둘 수 밖에 없는거겠죠. 포퍼의 오류가능성 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에 인용한 문장은 가슴에 새겨두어야겠습니다.
 


"여기서 관용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생각해보자. '공적인 일에서나 개인적 사안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견해나 신조를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지 않는 태도'를 곧 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대한 다원론적 시각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이 관용은 개인의 다양성으로부터 '집단의 다양성'으로 강조점이 이동하게 된다. 요컨대 다원주의는 사회의 자연적 불일치, 말하자면 일반의지나 공통이해 등이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이에 따르면 사회는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집단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해 관계의 대립은 필연적이고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개별 집단 사이의 타협이 필수적인 덕목으로 등장한다. 이 경우 관용은 대립적인 이해관계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그 대립성을 풀어 나가려는 호혜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관용은 이처럼 자유주의에 내재해 있는 상대주의적 회의주의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박호성, <평등론 -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현실, 창작과 비평사, 1996, p75)

영화 보고 집에 돌아오던 길 버스 칸에서 읽던 논문의 한 대목. 예전에는 버스에서 잘 읽었는데 요새는 멀미나서 못 읽겠다. 그래도 오늘 너무 못본지라 - 매일 못봤대 - 조금이라도 더 보자 해서 읽던 중 얼마 못 읽고 이 부분에서 시선이 딱 멈췄다. 관용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의 관용은 호혜성을 의미한다. 호혜성이란건, '상호'간의 존중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게 안되니깐 이모냥 이꼴일 수 밖에. 최소한 나는 사안에 대해 토론할 의지를 가지고, 최초 문제제기자와 대화를 시도했고, 대화를 오래 나누었으며 - 내용은 비밀 - 그 결과 "리뷰를 둘러싼 몇 가지 개인적인 생각"이란 페이퍼를 작성한거다. 난 최소한의 의지와 자세를 보여줬지만, 이걸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음을 느낀다. 호혜성이란 언제나 쌍방의 존중을 전제로 하므로.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8-2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버스안에서 책읽으면 눈버린대요 =3=3=3=3

이잘코군 2007-08-20 23:04   좋아요 0 | URL
네에, 얼마 안봤어요. 창 밖의 풍경을 더 많이 봤답니다. :)

향기로운 2007-08-2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이런.. 버스안에서 책을 자주 읽는데..ㅠㅠ;;

이잘코군 2007-08-21 08:03   좋아요 0 | URL
멀리 안나시나봅니다. 지하철에서는 항상 책읽는데, 버스에서는 이제 힘들어요. 속이 안좋아져요.

2007-08-21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잘코군 2007-08-21 16:38   좋아요 0 | URL
다녀오셨군요. 찾아도 안보이던데. 외국인들은 한국와서 한국여자 이쁘대는데, 님께선 외국여자가 이쁘다고 하고. -_-a 누굴 믿어야하나요? 크크.

2007-08-21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8-2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아프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
헤에. '호혜성' 덕분에 또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었군요.

이잘코군 2007-08-21 18:25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랫만입니다. 불러도 대답없구. 뭐하고 지내셨어요? :)

비로그인 2007-08-22 00:49   좋아요 0 | URL
뭐...본격적으로 임무에 충실해지려고 버둥거리는 ...
애벌레의 일상이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웃음)

이잘코군 2007-08-22 09:11   좋아요 0 | URL
이제 날으십시오. 훨훨.

비로그인 2007-08-22 10:22   좋아요 0 | URL
네. 어설픈 날개라도 나오려는지. 오늘따라 등이 더 아프군요.(웃음)

프레이야 2007-08-2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혜성하고는 무슨 관계 없나요? 아프님 버스에서 책 보면 정말 멀미나요^^

이잘코군 2007-08-21 21:01   좋아요 0 | URL
-_- 혜경님께서 이러시면 곤란하십니다.

비로그인 2007-08-22 00:49   좋아요 0 | URL
푸하하핫.

2007-08-22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체셔님과 승주나무님께서 관련 페이퍼를 쓰신 김에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도. 지난번에는 완전 진흙탕 되는 바람에 차분한 분위기에서 논의하기 힘들었다. 알라딘에서 2007년 1월경에 약 4일에 걸쳐서 '중복리뷰'논쟁이 일었는데, 사실 '중복리뷰'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논제들이 뒤섞여있다. ('중복리뷰논쟁'보다는 '리뷰논쟁'으로 칭하는게 좀 더 명확하다.) 이걸 분리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한 논의가 계속 겉돌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어떤 사안들이 짬뽕되어있는지 분리해서 살펴보려 한다.


사안 1. 중복리뷰

이때 '중복리뷰'가 의미하는 바는, 인터넷 서점 두 곳 이상에 걸쳐서 같은 리뷰를 올리는 경우를 지칭한다. 다른 '중복리뷰'의 사례로, 같은 책에 대해서 다른 리뷰를 작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중복리뷰'라고 칭할 수 있으므로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뒤의 사례는 여기서 제외한다.

중복리뷰가 논란이 되는 까닭은, 책을 구입하기 위해 여러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앞서 들렀던 인터넷 서점에서 읽었던 리뷰가 또 등장할 경우 '짜증'이 날 수가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중복리뷰는 '짜증'과 '불편'의 차원이지 '잘', '잘못'의 차원은 아니란 생각. 이와 관련해 이런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인터넷 공간에서 같은 콘텐츠가 중복됨으로써 다른 콘텐츠가 들어설 영역을 잡아먹어버린다는. 그러나 인터넷 공간은 개인메일처럼 용량이 한정되어 있는게 아니라 무한하므로 내가 두 번 올렸다 해서 다른 사람이 한번 더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복리뷰가 출판사들의 홍보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말도 있는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오히려 좋은 책 홍보하고, 안 좋은 책은 혹평함으로써 안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 없다. 내 리뷰가 객관적이기만 하다면. 게다가 내가 읽는 책들은 나온지 오래된 것인데도 리뷰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최근 목차와 저자, 역자만 보고 샀는데 내가 원하는 책이 아닌 것도 몇 권 있었고, 중복리뷰라도 안내되어 있었다면 구매결정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책 한 권 사기 위해서 여기저기 드나들지도 않을 뿐더러, 중복리뷰라도 이렇게 안내되어있다면 개인적으로 환영이다. 문제는 중복리뷰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서평이 객관적이냐 아니냐의 문제. 소외된 분야, 소외된 책에 대해서는 중복리뷰를 권장하는 바다.


사안 2. 공짜책

언젠가부터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공짜책 이벤트가 시작되었고, 지금은 다음, 네이버, 프리챌 등의 여러 책카페를 통해서 공짜책 이벤트가 확대되었다. 예전이야 공짜책 받아먹기 힘들다고 하지만, 지금은 공짜책 받으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글쎄 서점들마다 책을 주는 기준이 다른거 같은데, 알라딘은 출판사에서 직접 선정한다고 들은 거 같고, 예스24는 본인이 확실히 아는데 신간서적이 나오면 예스24 내에서 회의를 거쳐서 책을 선정하고, 출판사에 의뢰를 한다. 할 생각이 있는지. 하겠다면 하는거고, 출판사가 안하겠다면 안한다. 실제로 책이 좋아서 하려고 했는데 안하겠단 출판사도 있었다고 들었다. 교보와 모닝, 인터파크, 리브로, 그외에 각 인터넷 책카페 들은 내가 잘 모르겠다. 기준이 다 다르고, 글을 잘 써야만 혹은 별을 많이 줘야만 다음에 공짜책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말은 별로 근거 없는 소리 같다. 어느 곳에서는 글발을 기준으로, 또 어느 곳에서는 별을 기준으로 나누기도 할테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란 말씀. 개인적으로 과거에 알라딘에서 공짜책 좀 받아봤는데, 책을 읽어보고 아닌 책에 대해서는 별 두개, 세개도 줘봤는데 다음에도 또 뽑아주더라는. (영 아닌 경우는 없었기에 별 하나 준 기억은 없다.)

다른 한편에서 공짜책 이벤트는 먼저 출판사에서 시작했지만, 이걸 받는 독자가 있기 때문에 계속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독자가 이걸 거부하면 출판사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게 문제가 되는 데 대해서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봐야하는데, 자본력 있는 출판사들은 이런 이벤트 마케팅이 괜찮겠지만, 자본력 없는 출판사의 경우 이벤트가 힘든게 사실이다. 이런 소규모 자본력 없는 출판사들이 오래 버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출판계의 자정이 필요하고, 각각의 개인은 책을 좋아하는 일개 독자로서 이런 분위기 조성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 이건 아이엠엑스님이 일전에 리뷰논쟁과 관련해서 언급한 부분인데 일리있다. 하지만 모든 공짜책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걸 강요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고, 그 이유를 납득시키고 분위기를 조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이엠엑스님께서 이 이야길 하신 이후 - 그분은 소규모 만화 출판사에 다니는 걸로 알고 있는데 - 공짜책은 받지 않았다. 아이엠엑스님의 생각에 동의해 앞으로도 받지 않을 생각. (이 때 공짜책이라 함은, 개인적인 선물로 들어오거나 방출한 책을 주워먹거나 한 경우가 아닌 출판사 이벤트의 경우만을 지칭함.)

(* 이 부분에 있어서 생각이 다른 분들은 충분히 나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아  생각해보니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알고 있는 분이 저자인데 책을 줄 경우. 받지 않을 수는 없고, 책은 받지만, 내가 구입한 다른 책, 내가 모르는 다른 저자들의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모든 리뷰는 주관적이지만 - 평을 내리기로 한다. 지금껏 그래왔고.  친분 있는 사람의 책은 공짜로 받지 말고 사주자는 지인의 말씀은 끄덕끄덕. 이것도 역시 "잘/잘못"의 영역이 아니므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러는게 좋지 않겠느냐, 그게 예의가 아니겠냐 정도로 받아들일 문제.


사안 3. 주례사 서평(비평)

주례사 서평이라 함은, 실제 그 책이 받아야 할 응당한 평가를 넘어서서 지나치게 칭찬과 찬사 일색인 리뷰를 지칭한다. 그 책이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넘어서서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하여, 혹은 친분이 없어도 공짜로 받은 책이라 하여 별 두개 줄 것을 네개, 다섯개 주는건, 아니지 싶다. 리뷰라는게 책읽은 사람의 주관적인 평가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책들은 비슷비슷한 문제점을 지적당하고, 비슷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여행서나 소설 혹은 시라고 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독자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제 3의  평가와 지나치게 차이가 날 경우에는 문제가 있다. 또다른 제 3자가 리뷰를 보고 책을 구입했을 경우, 속았다, 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 리뷰를 통해 해당 책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진술해줄 필요가 있다. 선물로 받은 책이든, 이벤트로 받은 책이든, 내가 산 책이든, 길거리에서 주운 책이든 상관없이 모든 책에 대해서 지금껏 객관적으로 평가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사안 4. 출간 전 리뷰

요즘 또 눈에 보이는 문제점이 출간 전 리뷰인데, 책이 아직 나오기도 전에 리뷰가 달리는 경우가 있다. 주로 신간서적에 몰리는 경향을 보이는데, 아마도 땡스투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대개의 출간 전 리뷰들은 읽어보면 알 수가 있다. 작성하는 사람도 대놓고 이 책 아직 안 읽어봤는데요 너무 기대돼요, 라고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출간 전 리뷰에 다량의 땡스투가 붙기마련인데 - 예전엔 추천수에 땡스투수가 포함되었지만 지금은 땡스투 숫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 글 작성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하겠지만, 이런 리뷰에 구매자들이 땡스투를 주지 않음으로써 예방이 가능하다. 인터넷 서점 측에서 출간 전 리뷰는 삭제하고 - 명백히 출간 전 리뷰인 것에 대해서만. 애매모호한 건 순전히 '추측'일뿐이므로 걸러내기 힘들다. - 서점 이용자들은 보는 족족 신고하는 식으로 일단 해결해야 할 듯 하다. 



* 추가 발언 및 정리

대략 이 정도의 사안으로 분류해볼 수 있는데, 때로는 몇 가지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중복리뷰이면서 주레사 서평이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주례사 서평을 쓴 리뷰를 다른 곳에 옮겼을 때. 결국 주례사 서평으로 인해 한 곳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도 잘못된 안내를 해줄 수 있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건 중복 리뷰가 아니라 주례사 서평이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눈에 들어올 때는 이게 어디서부터 기인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단순히 중복리뷰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례사 비평을 한 서평을 중복해서 올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이라면, 그 근본은 주례사 서평이지 중복리뷰가 아니다. 이를 '중복리뷰'라는 이름 하에 논의해서는 안된다. 출간 전 리뷰를 중복해서 올린 경우에도 마찬가지.

지난번 논쟁 이후 내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적용한 결론이 있는데,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난번 것에서 조금 수정되었다.

 첫째, 나는 iamx님의 출판계에 대한 우려과 고민을 받아들이고, 공짜책에 대해서는 중복리뷰를 올리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 개인에게 국한된 사항일 뿐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이때의 공짜책이란 선물로 받거나 길거리에서 줍거나 한 기타의 경우를 제외하고 오로지 이벤트로 받은 책만을 지칭한다. 공짜책은 현재 받고 있는게 없다.)
          
  둘째, 내가 직접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는 대형출판사건 소형출판사건 상관없이 기존에 해오던대로 알라딘과 예스24에 중복리뷰를 올린다. 예스24에 올린 리뷰를 알라딘에 중복해서 올리는 것으로(나의 경우는 알라딘이 먼저고 예스24가 나중이지만) 땡스투를 받는다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땡스투 제도 생기기전부터 해왔으니 '땡스투' 때문에 이 짓거리를 한다고 보면 안된다. 다만, 맨 위에 언급했듯이 "이 리뷰는 알라딘(교보, 예스24 등)에도 올렸습니다" 정도의 메세지는 붙이도록 한다.

 셋째, 출간 전 리뷰는 당연하거니와 주례사 비평도 지금까지 해오던대로 하지 않는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쥬베이 2007-08-19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주례사비평이란 말이 다가오는군요. 좋은글입니다.
저도 가끔 주례사를 날리곤 하는데...내심 가슴이 쓰리곤 합니다.

뽀송이 2007-08-1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비로그인 2007-08-19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저 서재에 적은것 그 이상도 이하도 ^^ 없을 것 같아요.
서로 다름을 인정한 외 나머지는 관심 안가지기로 했습니다. :)

승주나무 2007-08-2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부당한 평가를 받았을 때 가장 분노하는 법이다 - 볼떼르"
이번 논쟁이 건강한 논쟁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아요.
몇 가지 혐의, 그것도 몇몇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같은 혐의를 명백한 사실인냥 호도하고,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석하고..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논쟁으로 만들어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더 이상 외풍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심스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

이잘코군 2007-08-20 09:28   좋아요 0 | URL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무시할 것은 무시하면 됩니다. :)

2007-08-20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잘코군 2007-08-20 22:05   좋아요 0 | URL
처음 뵙는듯 합니다. :)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나온지 오래된 것인데도 리뷰가 아예 없는 경우] 는 그쵸. 리뷰가 고파요. -_- 누군가 써줘야하고 안내해줘야 하는데 없어요. 그런 책을 많이 보는지라 자주 경험. 역시 분명 영역은 다르죠. '잘/잘못' 의 영역과 '불편/짜증'의 영역. 구분해야겠습니다.

2007-08-21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품절


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다.
- 조너선 색스 -5쪽

<서문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폭력을 막는 단 하나의 훌륭한 해독제는 '대화'이다. 서로서로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대화이다. -16쪽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 철학자 존 롤스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공적 이성'이다. 그것은 정치 논쟁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해야만 우리가 -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 "서로 변론"(이사야 1장 18절)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서로 변론한다'는 생각은, 도덕적 언어가 붕괴하고 '나는 해야 한다'는 어법이 '나는 원한다', '나는 선택한다', '나는 느낀다'는 어법으로 바뀐 20세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의무는 우리가 서로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시각을 강조하는 텔레비젼은 소리의 문화가 아니라 보기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미지는 언어보다 크게 말하고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결과 가장 시각적인 항의나 가장 목소리가 큰 분노의 외침, 극단적인 구호 등이 승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대결은 뉴스가 되고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결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우리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 능력이란 우리와 문화와 믿음,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충돌하는 사람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야기를 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17-18쪽

"(종교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히 많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조나단 스위프트)-19쪽

종교는 불화의 원천일 수 있다. 또한 종교는 갈등 해결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전자다. 반면 종교를 갈등 해결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할 수 있도록 인류의 연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희망은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이제 위대한 종교들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그리고 평화의 필수 조건인 정의와 자비를 널리 퍼뜨리는 데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20쪽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 (헨리 메인 경)-26쪽

"종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표현이자 그런 고통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학대받는 자들의 한숨이고 감정 없는 세상의 감정이며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 (칼 마르크스) -31쪽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의 제도가 본래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와 논리나 동력이 다른 주변 영역을 식민화할 때는 위험하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그런 경우였다. 18세기에는 과학이 그러했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정치가 그러했다. 21세기에는 시장이 그렇다. 화폐교환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거래에 대해서만 적합한 기제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가족이나 공동체, 교단, 자발적인 모임 등 경제적 계산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간관계이다. 이런 관계들은 시민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집단이지만, 소비 위주의 사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39쪽

내가 알고 존경했던 만년의 이사야 벌린 경은 훌륭한 에세이 <자유의 두 개념>에서 자유주의적 신조의 핵심을 이제는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자기 신념의 상대적 타당성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 신념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의 태도이다." 이는 대단히 고귀한 감정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가인 마이클 샌들은 이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념이 상대적으로만 타당하다면 그것은 끈질기게 옹호할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널리 반향을 얻은 물음이었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단지 서양 현대성의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퇴폐의 한 형태로서 거부하는 사람들을 내가 무슨 권리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자살 테러범을 내가 무슨 근거로 반대할 수 있겠는가? -43-44쪽

그것은 우리가 진리나 궁극적 실재를 찾기 위해서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하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특수성은 불완전한 것이고 오류와 편협과 편견의 원천인 반면, 진리는 추상적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보편적이고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특수성이 전쟁을 낳는다면 진리는 평화를 낳는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갈등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45쪽

그러나 갈등의 시기에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그런 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아니다. 그 때에는 국외자에게는 사소한 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띠면서 이웃을 분열시키고 예전의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작은 차이의 나르시즘'이라고 불렀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차이점이라 해도 정체성의 표지, 그래서 서로를 소원하게 하게 특징을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통의 신학, 인류 보편의 신학 뿐만 아니라, 차이의 신학도 필요하다.-48-49쪽

하나의 문화가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한 체계에 인위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하나의 체계가 번창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비극에서 나온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세상에 공헌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공헌한 바는 하나같이 소중한 것이다. ... 중략 ... 차이가 전쟁으로 이어질 때는 쌍방 모두 패배한다. 거꾸로 차이가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는 양쪽 모두 승리하는 것이다.-50-51쪽

우리의 이야기와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는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에 대한 논박에서 진리가 움터나온다는 소크라테스식 대화술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대화의 기술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타자들을 용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편적인 문명이 서로 충돌하면, 세상이 흔들리고 많은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문화와 문명과 종교가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아갈 하나의 세상만 주었다. 그 세상은 줄곧 작아지고 있다.-51-52쪽

<세계화 속의 불만>

세계화는 통합시키는 만큼 분열시킨다.
분열의 원인은 지구의 통합을 촉진하는 원인과 동일하다.
- 지그문트 바우마 <세계화>-54쪽

20세기 초에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시간 경험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나 늙었을 때나 별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반면 "오늘날에는 변화의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고" 앞으로는 더욱 짧아질 것이다.-56쪽

매튜 아놀드의 말을 빌리면, 마치 우리는 "하나는 이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날 만큼 힘이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이다. 현 상황의 특이성은 우리가 공통의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기 힘들 만큼 변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데 있다. 기술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신념은 점점 더 갈피를 잃고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57쪽

"사실 우리는 도덕성의 시물라크르(환영)를 가지고 있고 도덕의 핵심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저긍로나 실천적으로나 도덕성을 이해하는 능력을 -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 상실하고 말았다."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65쪽

세계화 시대에서는 무엇이 행동의 주역인가? 서양에서 지난 반 세기 동안 점점 더 강조된 것은 두 가지 제도이다. 하나는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현재 자신에게 지워지는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 시장은 본래 도덕과 상관없이 거래를 하는 곳이고 가치가 아니라 가격을 다루는 곳이다. 다시 말해 시장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교환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 교환의 장일 뿐이다. 한편 서양에서 정치는 우리가 공동으로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한 실질적인 도덕적 질문을 건너뛴 채 오직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더욱 더 절차적으로 관리적인 무엇이 되고 말았다. 존 롤스는 현대의 자유주의의 신조 가운데 하나인 이런 점을 두고 "선보다 정당함이 우선한다"고 지적했다.-68쪽

사람에 관련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에느 부의 소유주와 생산자 사이에 접촉이 활발했다. 봉건 영주와 산업 자본가는 비록 피고용인을 착취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복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오늘날의 글로벌 엘리트들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별다른 교섭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 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상품을 사는 사람들, 특히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사람들과도 거의 접촉이 없는 편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다. 도덕적 책임은 단지 추상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서 움터나온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이다. 현대 생활의 비인격화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서 행동과 결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앗아갔고 이는 우리의 도덕감을 약화시켰다. -69-70쪽

간단히 말해서 시장은 빈부 격차만을 극대화 한 것이 아니다. 시자은 사회의 일원을 공통 운명으로 맺어주는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와 같은 유대 관계를 파괴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나는 원한다'와 '나는 해야한다'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도덕적 담론을 무력화했다. 시장은 집단적 의무로 묶인 위계를 개인적인 생활 방식과 취향을 누리는 슈퍼마켓으로 대체함으로써 공공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허물었따. 여기서 공공선이란 공원에서부터 공공 서비스와 애국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거나 소유하거나 공유하지 않는 것들을 일컫는다. -71쪽

우리는 유일하게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며 '나는 어떤 이야기에 속하는가?'이다. 경제가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거기에 대답을 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오늘날 종교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 이데올로기 저치는 아마도 죽고 말겠지만, 그것을 대체한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정체성 정치다. -79쪽

정치는 차이가 있는 곳에 거주하지만, 종교는 그 차이를 뛰어넘는다. 종교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묶는다. 정치는 중재하고 조정한다. 정치에서 타협, 다의성, 외교, 공존 같은 종교의 관점에서는 악덕으로 보이는 덕목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81쪽

종교와 정치는 인간 조건의 서로 다른 측면에 말을 건다. 하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 묶어주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차이를 평화롭게 중재한다. 20세기의 커다란 비극은 정치가 종교화되었을 때, 국가(파시즘)나 이론체계(공산주의)가 절대화되고 신격화되었을 때 생겨났다. 21세기는 반대 상황이 발생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즉, 정치가 종교화될 때가 아니라 종교가 정치화될 때다. 종교는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공화국을 비판한 근거였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국가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가 없으면 정치도 있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치는 종교가 극복하려고 하는 것, 즉 의견의 다양성, 상충하는 이해관계, 복수성 등이 자리잡은 공간이다. 한때는 이러한 것들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필요했지만, 이제는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82쪽

<차이의 존엄 : 플라톤의 유령 몰아내기>

우리가 잘 아는 대답이 있다. 종교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정체성은 배제하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모든 '우리'에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 즉 '그들'이 있다. 혈족과 비혈족, 친구와 이방인, 형제와 남이 있고, 이러한 경계가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도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은 무리의 일원이 아니면 생명을 지킬 수 없었던 인류사의 새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식자가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무리에 들어가지 못한 개인들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한 어떤 본능들은 이때부터 유쾌한 것이며, 그 본능들은 우리가 인간관계에 맺고 소속 집단에 애착과 충성심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향을 '부족적'이라고 부른다.
-87-88쪽

유대교는 한 분인 하느님을 믿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진 명령을 인류 전체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유대교에는 extra ecclesam non est salus, 즉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에 해당되는 교리가 없다. 오히려 고대의 유대 현인들은 "여러 민족의 경건한 자들은 다음 세상에서 제 몫을 얻으리라"고 설파했다. 실제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지 않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97-98쪽

마이클 왈저는 '얇은' 혹은 보편적인 도덕성보다 '두꺼운' 혹은 맥락으로 가득 찬 도덕성이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사회는 특수할 수 밖에 없다.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 고유의 성원과 기억, 다시 말해서 제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사회 공통의 삶에 대한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성원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류는 성원만 있고 기억은 없는, 따라서 역사도 문화도 관습도 익숙한 생활방식도 축제도 사회적 재화에 대한 공동의 이해도 없는 집단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갖는 게 당연하지만, 그 방식잉 하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온갖 다양한 사회의 성원들은 인간이기에 서로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도움 요청에 응답하고 서로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며 - 때로는 - 다른 이들의 행진에 동참할 줄도 아는 것이다."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106-107쪽

<통제 : 책임의 의무>

20세기 초반에 윌리엄 오그번은 '문화지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오늘날처럼 기술을 비롯한 물질문화가 통치 방법이나 사회 규범 같은 비물질 문화에 비해 빠르게 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바깥 세계가 우리의 내부 세계(정신적, 정서적 반응)보다 빠르게 변할 때 우리의 환경은 당혹스럽고 위협적이다. 사회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125-126쪽

과거에는 엘빈 토플러가 '안정적인 사적 영역'이라고 부른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삶에는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생 종사하는 직업이고 평생 지속되는 결혼 생활이며 평생 살아가는 장소이다. 이것들은 누구에게나 허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경제적, 개인적, 지리적 연속성의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낯선 것에 대처할 힘을 주는 친숙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런 것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힘든 실정이다.-127쪽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기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다. 시장이 교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상태, 아무에게도 진실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삶은 자아 너머의 보다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과 점차 멀어지면서 점점 더 가벼워진다.-135-136쪽

인간관계가 정체성과 자존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은 그것이 계약과 시자 거래의 영역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이웃, 조언자들은 우리와 도덕적 호혜성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좋을 때만이 아니라 나쁠 때도, 다시 말해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듣기 싫은 충고를 해준다. 이런 면을 로버트 라이시가 인용하는 '개인 코치' 광고의 상품화된 우정과 비교해 보라.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함께 할 정도로 믿음이 가는 전문가입니까?" 이 수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다. 우리가 친구를 믿는 것은 우정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137-138쪽

"부자와 권력자를 부러워하고 숭배하다시피 하지만 가난하고 하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은 우리의 도덕감이 타락하게 된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애덤 스미스)-138쪽

우리한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 다시말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우리가 절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아의 좁아터진 영역 너머에 하나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역이 아니라 대상이다. 여기서 절망이 생긴다. -140쪽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예의를 갖추어서 내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고(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이해시키고)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 둘 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내 생각과는 다른 의견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이다. 논쟁에서는 한쪽이 승리하고 다른 한쪽이 패배하지만 애초의 의견을 바꾸지는 않는다. 대화는 어느 쪽도 패배하지 않지만 양쪽 다 변화한다.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현실이 어떤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쪽도 애초에 가졌던 확신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대화가 아니다. 남의 의견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상대방도 - 내 의견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 그래야 한다는 걸 깨달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것이 다원 사회에서 공공도덕이 성립되는 방식이다. 즉 하나의 목소리가 앞장서거나 도덕 문제를 가정이나 지역 주민에게 일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차이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으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만 공공도덕은 성립할 수 있다. -146-147쪽

'나'를 기꺼이 '우리'에 맞추어 형성하려는 태도에서 공동체가 이루어지듯, 사회 역시 개별 공동체의 '우리'가 기꺼이 다른 공동체들과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여야 이루어진다. 사회는 수많은 목소리가 들리는 대화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제적 힘이라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아니라 미래를 함께 써가는 공동 저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화를 통해서다. 상대에 대한 존경과 열성이 담긴 대화, 한없는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대화야말로 차이의 존엄함이 다스리는 세상의 도덕적 형식이다.-147-148쪽

<공헌 : 시장 경제의 도덕>

시장 경제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역사에 기여한 것은 그것이 태곳적부터 전해 오는 인간의 싸움 본능을 억제하는 힘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18세기에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예언했다. "상업의 자연스러운 영향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있다. 무역을 하는 나라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한 나라가 파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면 다른 나라는 사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 모든 제휴와 연합은 상호 필요에 기반을 둔다. 지난 세기에 두 번에 걸친 대전쟁을 일으킨 유럽 국가들이 화폐 통합을 이룬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두 나라가 서로 전쟁한 경우가 없다는 이른바 '글로벌 아치'이론을 만들어냈다.-177-178쪽

<자선 : 사회 정의>

이(체다카)는 점유와 소유의 차이를 강조한 유대 신학에서 나온 개념이다. 궁극적으로 세상 만물의 주인은 창조주 하느님이다. 우리는 점유하고 있을 뿐 소유한 게 아니다. 하느님이 맡긴 것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레위기>의 말씀이 명확한 사례다. "토지를 영영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잠시 머무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장 23절) 우리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다면, 정의(억지로 주어야 하는 행위)와 자선(아량으로 베푸는 행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의무이며, 후자는 도덕적인 의무, 자비와 연민의 촉구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우리는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한 관리인에 불과하므로 신탁의 조건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를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는 다른 법체계에서 자선으로 간주되는 것이 법의 엄격한 요구 사항이며 필요할 때면 법정이 강제로 시행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체다카는 흔히 '사회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니 누구나 삶의 기본 요건을 갖추며 살아야 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진 자들은 잉여의 일부를 덜 가진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망하던 사회, 즉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기본 권리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언약으로 맺은 공동체에서 평등한 시민이 되는 사회를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195-196쪽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의료 수단이 없는 사람은 막을 수 있는 병과 피할 수 있는 죽음의 희생자만 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반노예살이나 마찬가지인 채무 노동자, 억압적인 사회에 숨이 막히는 여자 어린이, 실질적인 벌이 수단이 없는 가난뱅이 노동자들은 행복이라는 면에서도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여기에는 기본적인 자유가 꼭 필요하다)이라는 면에서도 모든 걸 빼앗긴 이들이다. 책임 있는 삶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아마르티아 센)

센의 말은 절대적으로 옿다. 개인의 자유는 이사야 벌린이 '소극적 자유'라고 부른 것, 그러니까 제약에서 벗어난 없는 상태(성경의 초페쉬)를 뜻한다. 집단의 자유(성경의 체루트)는 그와 다르다. 무엇보다도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를 희생하여 얻는 게 아니다. 다수가 굶는 마당에 소수가 잘 사는 사회,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좋은 교육과 적절한 의료 혜택과 쾌적한 편의 시설을 누리는 사회는 자유로운 해방의 땅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려면 억압과 압제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198쪽

빈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그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는 최저 생활 수준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 율법에서 음식과 주거와 기본 가구나 결혼식 비용 등을 의미했다. 두 번째('그에게 없는 것')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예전 생활 수준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이는 랍비들이 빈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열쇠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사람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욕구 이상의 심리적인 욕구가 있다는 인식이다. 가난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좋은 사회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하는 사회다.-203쪽

체다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선'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자의 선의에 달린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율법이 강제하는 의무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경제 원리에 의존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시장 고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자유 시장과 양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인용하는 조지 소로스의 말은 옳다.

"국제 무역과 세계 금융 시장은 부를 창출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평화 유지나 빈곤 완화, 환경 보호, 노동 조건 개선, 인권 보호와 같은 다른 사회적 요구, 일괄해서 '공공선'이라 불리는 것에는 신경 쓸 능력이 없다.-208쪽

극단적인 가난과 기아를 종식시키고 기본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막을 수 있는 질병에 맞서 싸우고 유아 사망률을 낮추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실패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경제적 잉여를 개발도상국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그리하여 체다카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난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난한 국가의 존엄과 독립성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요청이다. 통신과 무역, 문화의 세계화는 인간의 책임도 세계화한다. 다수를 가난과 무지와 질병의 노예로 만드는 대가로 소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209-210쪽

<창조성 : 교육의 책무>

월터 J. 옹의 말을 빌리면 "글은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구술 문화에서는 지식의 전달이 언제나 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특정한 때에 특정 장소에서 화자와 청자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반면에 저자는 누가 자기 글을 읽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고 독자도 보통은 눈앞에 저자를 두고 구절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의 모든 관행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글은 기억력의 상실과 수동적인 배움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논쟁을 낳는다. 양자가 만나서 결론에 이를 때까지 논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서로가 쓴 글에 대해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글은 추상화하는 경향이 크다. 말은 모든 인간 집단이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적인데 반해 글은 인공적이다. 게다가 규칙과 관례가 필요하며 이것들은 의식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나 글은 추상적 사고를 촉진하고, 이야기의 반복으로만 과거를 알 수 있는 구술 문화로서는 불가능한 방법으로 과거를 고정시킬 수 있다. -219쪽

<협동 : 시민 사회와 그 제도>

계약이 자아에 관한 것이라면, 언약은 우리가 그 안에 정체성을 키우는 보다 큰 집단에 관한 것이다. 언약 안에서 '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언약의 관계는 신뢰로 유지된다.-249쪽

언약은 이해관계나 이익에 따라 묶인 유대 관계가 아니다. 언약은 소속감으로 묶인 관계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우리'를 이룰 때 언약이 맺어진다. 언약은 제한이 없고 영속적이라는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언약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헌신의 의미를 수반하며, 어려운 상황에도 곁에 있어 주는 신의의 개념을 내포한다. 언약은 때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251쪽

<보존 : 지속 가능한 환경>

"우리는 윤리가 전부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배우고 있다. ... 우리는 - 철부지 아이가 아니라(옮긴이) - 언약이야말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룩한 맹세로써 그 언약을 지켜낼 필요성을 받아들인 어른이다. ... 우리의 유전적 본성을 기계의 도움을 빌린 추론에 내맡긴다면, 그리고 신이나 된 것처럼 착각해서 오래된 유산에서 벗어나와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의 윤리와 예술과 우리 자신의 의미를 그 기계적인 추론에만 맡긴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284쪽

<화해 : 세상을 바꾸는 용서의 힘>

"핍박을 받은 모든 종교는 핍박을 가한다.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자기를 핍박한 종교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

"(민족주의는) 보통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자존심이나 영토에 가한 상처의 산물(이다)" (이사야 벌린) -294쪽

정의는 죄를 개인적인 보복 행위(복수)로 앙갚음하지 않고 비개인적인 법적 절차(응보)에 따라 취급한다. 용서는 정의만으로는 피해자의 감저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저을 바탕으로 한다. 증거를 구하고 평결을 내리고 형을 선고해도 피해자의 마음에는 고통과 슬픔의 앙금이 남아 있다.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307쪽

<희망의 언약>

언약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세 가지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첫째, 언약은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 제약되지 않는다. 둘째, 언약은 한계가 없고 오래 지속된다. 셋째, 언약은 다른 면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두 개인의 만남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언약은 '나'에게 정체성을 주는 '우리'에 관한 것이다. 계약에는 그것을 맺는 장소가 선행하지만, 언약은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무엇보다 근본적이다. 그것은 계약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인 상호성의 모형이다.-331-332쪽

"모든 진정한 언약은 도덕성의 기본적인 측면을 재진술하고 재확인한다. 자율적 의지 너머에 존재하는 판단의 원천에 대한 존경, 건설적인 자애심, 타인의 행복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특정 생활 방식의 원천을 수립한다. ... 그것은 추상적인 도덕이 아니다." (필립 셀즈닉) -332쪽

낙관은 상황이 나아지라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맏늘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낙관이 수동적인 덕목이라면 희망은 능동적인 덕목이다. 낙관론자가 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338쪽

<옮긴이의 말>

부족주의와 보편주의는 둘 다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절대주의에 가깝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주의(<문명의 충돌>)와 보편주의(<역사의 종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셈인데, 그 외줄타기의 이름이 바로 '차이의 존엄'이며 그 중심 논리는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이다.

서양 근대 사상이 자랑하는 '관용'의 원칙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옳다'라는 단언에 담긴 무게이다. 관용의 원칙은 '나는 옳다'는 확신보다는 '내가 틀린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더 바탕을 둔 가치이다. 이른바 데카르트의 '잠정적 도덕'의 논리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극단적인 부족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에는 그런 정도의 원칙만으로 부족하다. 관용의 원칙은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남의 일에 상관 않는 개인주의(혹은 냉소주의, 더나아가서는 허무주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종교적 열정의 폭풍우를 막기 위해서는 오직 그에 못지 않은 반대 열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옳다'는 확고한 가치관 위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들(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을 시정해야 한다는 확고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자신이 속한 유대교 전통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체다카, 언약, 시장친화적 태도 등)을 뽑아내고 풀어내면서,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자 시급하다고 본 인류의 대화에 참여한 것이리라. -351-352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ade 2007-08-17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책 읽는 것 보다 이거 쓰는게 더 힘드셨겠어요 ㅎㅎ 공부하신다더니, 독서중에 시간 내신건가봐요 ^^

찬찬히 읽어보니, 저 책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끙 언제다읽지 -_-;; 책 소유욕도 병인데 말예요 ㅋㅋ

이잘코군 2007-08-17 15:16   좋아요 0 | URL
어 과외 안가고 뭐해요. 불량선생 :p
저 책 논문 관련해서 본건데, 약간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약간'말고 조금 더. 근데 주석정도에서 써먹을 부분도 있어서 일단 옮겨놨어요. 저 중에 몇 군데 써먹을 데가 있어보여서. 이거 치느라 힘들었어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