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구석에 있다가 시간 맞춰 약속 장소에 나가려고 서두르면, 꼭 뭔가를 빠뜨리기 마련이다. 오늘도, 저녁에 종로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평소 외출시 준비물을 다 챙겼다고 생각하고 머나먼 버스정거장까지 열심히 가주셨다. 종로로 나가는 버스정거장은 집에서 한 15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거의 도착할 무렵, 뭔가 많이 허전했다. 주머니가 텅텅. 철푸덕. 지갑이랑 열쇠랑 손수건을 안가지고 나오고, 왼쪽 손목에 보니 시계도 없네. 어째, 지갑이라도 있었으면 그냥 가겠지만, 지갑이 없으니 버스를 못타는거야 당연한거고. 다시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준비물 챙겨 나오니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버스는 포기하고 마을버스-지하철을 선택함으로써 약속시간엔 늦지 않았지만,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만해도, 분명 가방 안에 책 한권, 수첩 하나, 형광펜, 플러스펜, 우산을 넣고 다 됐다, 하고는 집을 나선건데, 정작 제일 중요한 지갑을 안가지고 오다니. 외출모드일 때 언제나 준비물의 마지막은 책이다. 어떤 책을 집어넣을까를 항상 고민한다. 읽던 책이 두껍고 머리 아픈 책이면 이거 말고 다른 가볍고 머리 덜 아픈 책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어떤 책이냐 이거 만지작 저거 만지작 하다가 출발시간이 지연된다.
그렇게 고민해서 가방 안에 넣은 책을 그럼 볼 수 있느냐, 아니다. 못 본다. 장거리 지하철 여행이라면 모를까, 다른 모든 경우엔 거의 책을 읽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겁지만 그래도 난 책을 항상 집어넣는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다.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다. 낮잠 30분을 자더라도 내 머리 맡엔 책이 놓여있다. 언제나 형광펜과 함께. 그럼 책을 보다 자느냐, 아니다. 불도 다 꺼놨는데 무슨 책을 보겠느냐, 못본다. 그래도 난 한 글자도 못 볼 거 알면서 머리 맡에 책을 두고 잔다. 티비를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언제나 마찬가지다. 항상 책은 따라다닌다. 얼마나 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몸의 일부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 생각해보면 그다지 오랜 세월 같지도 않다. 기껏해야 4-5년. 내 삶에 있어 음악이 차지하던 비중을 책이 대체해버린 이후 언제나 그랬던거 같다. 음악이 왜 책으로 대체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언젠가 읽었던, 어느 매체에 내 인생의 책으로 소개했던,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고, 눈물 흘렸고, 감동 받았던 그 시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매일이 고민의 연속이었고, 왜, 라는 질문을 항상 달고 살았었다. 어쩌면 고민을 안겨준 것도 책이고, 고민의 실마리를 풀어준 것도 책이었다. 이후로 손에서 책을 떼지 않고 살았던거 같다.
외출 할 때 책을 못 읽을걸 알면서 읽던 책이 몇 페이지 남지 않으면 난 다른 책과 함께 두 권을 넣고 다녔다. 그럼 얼마 안남은 책을 읽고, 다음 책을 펼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물론 그럴 때도 있다. 읽고 또 다시 새 책을 꺼내어 읽는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는건, '만일' 읽던 책을 다 읽었을 때 느끼게 될 허전함과 뭔가를 더 읽고픈 욕구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금 본 책을 또 보기는 싫고, 다른 뭔가를 보며 길거리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읽을 게 없을 경우 난감하다. 무가지 신문이나 광고문은 이 허전함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안읽을 확률이 높은 '다음 책'을 싣고 집을 나선다. 내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