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오류 가능성이란 우리가 모두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진지로 보이거나 도덕적으로 옳은 것으로 보이는 것도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진리의 존재나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일과 양립 가능할 수가 있다. 오류가능주의는 진리와 선을 파악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까닭에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 지적 겸양의 태도를 갖추어야 함을 인정한다.
나아가서 오류 가능주의는 우리가 진리와 선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비판적 추구를 결코 중단해서는 안되며 타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특히 우리와 상이한 견해를 가진 자들로부터 배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에 더 가까이 가기를 진지하게 바라고 최선의 행위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상대주의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오류 가능주의는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의미할 뿐 진리에 대한 존재론적 상대주의를 함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퍼에 따르면,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나도 그를 수 있으며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는 말을 넘어서 "내가 그르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대화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 갈 수 있고, 둘이 모두 진리와 옳음에 더 접근해 갈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오류 가능주의, 혹은 인식적 상대주의로부터 관용과 대화의 근거를 발견하면서 포퍼는 이를 세 가지 원칙으로 정식화한다. 제 1원칙은 내가 그르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 2원칙은 합리적으로 대화해 가면 우리가 범하는 오류의 일부를 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3원칙은 합리적 대화가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진리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는 것이다. "
(<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황경식, 철학과 현실사, 2006, p208-209)
이 책에서 지적하는 - 칼 포퍼의 지적 - 도덕적 일원론을 견지하는 사람의 문제점은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도덕적 일원론은 인간적 삶의 방식에 대한 최종적 진리를 발견했음을 함축하나, 이는 그 어떤 사람에 있어서도 현실성이 적으면서, 동시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둘째, "하나의 삶의 방식이 최선이며 최고의 가치를 대변한다는 견해는 논리적으로 견지되기 어렵다." (왜냐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인간의 능력이 서로 상이하고 상충하는 기술, 태도, 성향을 요구하는 까닭에 그들 중 일부의 실현은 다른 일부의 실현을 어렵게 한다. 둘째, 인간의 정력과 자원은 불가피하게 한정된 까닭에, 그 누구도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사회질서는 특정 구조를 갖기에 일부 능력에 대해 적대적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능력이 상충할 경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재화나 가치 또한 상충하게 마련인 것이다.)
셋째, "도덕적 일원론은 차이를 일탈로, 즉 도덕적 병리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넷째, "도덕적 일원론은 여타의 삶의 방식을 상당한 정도로 오해하게 될 지속적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우선 편향된 시각을 갖는 까닭에 그것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욕구를 거의 갖지 못한다. 편향된 참조틀과 그로 인한 편향된 시각은 상대에 대한 왜곡으로 귀결되고 열등한 삶으로 평가하게 된다. 열등한 것인 까닭에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노력조차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며, 결국 편향과 오해의 순환에 빠지게 된다. 유리한 증거에만 주목하고 불리한 증언에는 등을 돌리게 되니, 결국 악순환의 고리가 종식될 기회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내가 그르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대화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 갈 수 있고, 둘이 모두 진리와 옳음에 더 접근해 갈 수 있다.”는 포퍼의 말을 다시 되새긴다. 오늘 하루도 갔다.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