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관용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생각해보자. '공적인 일에서나 개인적 사안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견해나 신조를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지 않는 태도'를 곧 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대한 다원론적 시각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이 관용은 개인의 다양성으로부터 '집단의 다양성'으로 강조점이 이동하게 된다. 요컨대 다원주의는 사회의 자연적 불일치, 말하자면 일반의지나 공통이해 등이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이에 따르면 사회는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집단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해 관계의 대립은 필연적이고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개별 집단 사이의 타협이 필수적인 덕목으로 등장한다. 이 경우 관용은 대립적인 이해관계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그 대립성을 풀어 나가려는 호혜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관용은 이처럼 자유주의에 내재해 있는 상대주의적 회의주의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박호성, <평등론 -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현실, 창작과 비평사, 1996, p75)
영화 보고 집에 돌아오던 길 버스 칸에서 읽던 논문의 한 대목. 예전에는 버스에서 잘 읽었는데 요새는 멀미나서 못 읽겠다. 그래도 오늘 너무 못본지라 - 매일 못봤대 - 조금이라도 더 보자 해서 읽던 중 얼마 못 읽고 이 부분에서 시선이 딱 멈췄다. 관용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의 관용은 호혜성을 의미한다. 호혜성이란건, '상호'간의 존중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게 안되니깐 이모냥 이꼴일 수 밖에. 최소한 나는 사안에 대해 토론할 의지를 가지고, 최초 문제제기자와 대화를 시도했고, 대화를 오래 나누었으며 - 내용은 비밀 - 그 결과 "리뷰를 둘러싼 몇 가지 개인적인 생각"이란 페이퍼를 작성한거다. 난 최소한의 의지와 자세를 보여줬지만, 이걸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음을 느낀다. 호혜성이란 언제나 쌍방의 존중을 전제로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