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의 여파가 꽤나 크다. 이럴바에야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할 토론이었다는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제대로(?) 마무리 된건지도. 이건 MBC에서 두시간 동안 <디워> 홍보해준거 밖에 안되는 꼴이지 않은가. <디워> 측에서는 영화에 대한 악평이든, 비평이든, 험담이든, 욕이든, 아니면 칭찬 일색이든, 호평이든 영화를 놓고 뭔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할 것. 그들은 일단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목표이므로. 그래야 아 성공했다, 우리가 드디어 해냈다, 이런 결론이 도출될 것이므로. 이대로 쭉 간다면 1000만 가능할거 같은데. 모르겠다.

  김조광수와 이송희일은 눈 앞에서 사라지고 진중권이 표적이 되었다. 표적이란 말이 좀 뭣하긴 하지만 마땅한 지금의 사태를 표현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디빠 임을 자처하는 이들과 디워를 옹호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진중권'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 듯 하다. 뭐하는 놈이야, 대학교수래, 대학교수가 왜 저따위야, 중앙대는 이제 발 아래 깔고 봅시다, 등등의 말이 나오고 있는데, 어젯밤에는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홈피가 다운됐다고. -_- 궁금해서 들어가봤는데 접속은 되는데 진중권 교수(교수라고 하니 어색하네) 홈피에는 연결이 안된다. 관리자측에서 일부러 빼놓았나보다. 마땅히 다른 블로그나 홈피를 운영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가 소속된 곳에 몰려가서 욕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나보다.

 진중권의 반응도 참 재밌다고 해야할지 뭐라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아그들 왔냐?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짓도 통할 사람에게 해야지 내 얼굴 봐라. 어디 통하게 생겼디? 모처럼 왔는데 어쩌냐? 엉아가 바빠서 놀아줄 시간이 없다. 열 받은 거 여기에 다 쏟아놓고 씩씩거리며 너그들끼리 놀다가거라. 그래도 분이 안풀리거든 그자리에서 쪼그려 뛰기를 해 봐. 잘자 내 꿈 꿔." 하하. 진중권 답다. 분명 토론 후에 자신에게 다가올 하늘을 가득찬 페르시아 화살을 염두에 두고 선수친거라고 볼 수 밖에. 뭐 딴에는 뭐 교수가 저러냐, 그러기도 하는데, 밑에 달린 댓글이 더 재밌다. 겸임교수랍니다. 그 밑에 아 그래서 그렇구나. -_-

  완전 요새 포털 사이트 들어가서 댓글들 구경하고 있으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진중권 입장에서 적절한 대응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디빠가 아닌 단순히 <디워>를 괜찮게 봤던 사람들이나 아니면 디워 논란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거부반응을 일으켜서 논란을 더 키워버린건 아닌가 싶기도. 이미 토론엔 익숙한 위인이니 100분 토론 나올 때부터 이같은 후속사태는 짐작했고,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마음먹고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신랄하게 까놓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욕먹을거 먹고, 또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 역시 미리 다 진중권 머리 속에 계획된 시나리오로 준비되어있었을 것이다.

  마음껏 독설을 퍼붓는 사람인지라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되거나, 분노를 일으키는 효과는 가져오게 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웃음과 쾌락을 선사하기도 한다. 아마 진중권은 지금의 디워 사태에 대해서 이것이 가장 적절한 대응 방식이라 생각했나보다.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했고, 차라리 그럴 바에야 시원하게 독설을 퍼붓고 끝내자고 스스로 다짐했을지도 모르겠다. 제대로된 논의가 이루어질 환경과 그렇지 않은 환경을 구분하고, 그렇지 않은 환경 속에서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대응해주자는 방식. 아마 이제 디워 논란이 서서히 식을 것이다. 더 이상 나올 말이 없으므로. 한쪽에서는 달려들어 물어뜯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표로(?) 한 사람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줬다. 더 이상의 말말말은 없을 듯 하다. 진중권이 또다른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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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씨 보면볼수록 매력있는거 같아요 ㅋㅋ

마늘빵 2007-08-12 12:04   좋아요 0 | URL
하하. 근데 돌 맞을 짓(?)을 잘하죠. 상대를 자극하고 분노를 유발케하는 기술이 있어요. -_- 이건 별로 좋은건 아니라고 보는데. 어떤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서는 이런 태도보다는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가 더 설득력있는데, 사실 전반적인 진중권의 성향 자체가 좀 공격적이에요. 이번건에 대해서도 지금과 같은 대응방식이 차라리 나은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러게 한다고 그가 원하는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건 아니라.

천재끼도 있고, 매력적이고 새겨둘만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는건 좀 위험해보입니다. 저는 그래서 80%의 신뢰와 20%의 의심과 비판을 보냅니다. :)

가넷 2007-08-1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으로는 안보여요. 물론 도움이 될때도 많지만.

마늘빵 2007-08-13 00:02   좋아요 0 | URL
하하. 저보다는 더 부정적이시군요. 어떤 논란이 있을 때마다 진중권이 등장하는데, 사실 진중권 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 토론모습도 보고픈데, 거의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진중권을 선호하나보더라고요. 다른 이들이 섭외를 꺼릴 수도 있고. 글쎄, 마땅히 나서기 곤란한 자리일 때 진중권이 총대 메고 나온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고픈 말을 대신 다 쏟아낸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Mephistopheles 2007-08-1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눈에는 이번 디워논란으로 부각되어지는 인물들이 제법 많더군요..
과연 그것이 순수한 의도인가는 의심스럽지만요..^^

마늘빵 2007-08-13 00:03   좋아요 0 | URL
흐흐. 이송희일, 김조광수, 하재일, 진중권, 심형래, 손석희, 변희재가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죠. 연예인도 아닌데. -_- 이 중 양쪽 진영에서 모두 괜찮게 보고 있는 인물은 손석희 뿐 입니다. 손석희는 이미지 상승, 심형래는 광고효과를 얻어갔고, 나머지는 -_-

일부에서는 MBC가 캠코더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100분 토론으로 디워를 부각시켜줬다고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_- 근데 주제가 언제 선정되었느냐에 따라서 이건 음모론이 될 수도, 사실이 될 수도 있을거 같습니다.

kleinsusun 2007-08-12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 멋있어요. 평소 과격한 말을 많이 하고 주위에서 미움을 많이 샀기 때문에 교수가 되지 못했죠.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라는 직책이 웃기죠. 서울대 미학과 교수가 아니라.
에쿠... 진중권은 이제 욕 먹는 것도 지긋지긋 할꺼예요.

마늘빵 2007-08-13 00:03   좋아요 0 | URL
매력은 있는데 그 태도와 독설이 참 문제가 됩니다. -_- 이런 부분은 스스로가 좀 자제하고 차단할 필요가 있는데. 어쩌면 미움을 살 수 밖에 없는 언행을 보여주니까요. 어쩜 그 매력이란 것도 태도와 독설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바라 2007-08-1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현재 디워 광풍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긴 하지만, 100분 토론에서 진중권의 모습은 좀 실망스러웠는데요. 잠깐 봤서 잘 모르겠지만 진중권은 디워에 대한 열광 속에 위험하게 자리잡고 있는 애국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보다는 디워는 영화로서 실격이라는 것과 비평의 본령에 대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 같더군요. 게다가 더 큰 문제라 생각하는 건 아프락사스님이 말씀하신 진중권 특유의 독설과 무시인데, 이런 감정적 태도(어쩌면 악플러들의 그것과 비교될 법도 한)는 대중들에게 진중권의 논의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이겠지요. 그리고 데우스엑스마키나 운운하면서 디워의 내용적 결함을 비판하고 싶은 심정은 알겠는데 TV토론에서 너네 이거 알어? 하는 식으로 깔보듯이 들이대는 게 얼마나 생산적일지는 의심스럽더군요. 과연 그런 장치라는 것이 없는 '완벽한' 플롯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제쳐놓더라도 말이죠. 예의 그 쇼맨쉽을 과시하고 싶은게 아니라면 굳이 진중권이 그 TV토론에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마늘빵 2007-08-12 13:2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동감입니다. 요 전의 글에서 그런 말을 했었는데, 진중권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가 보여주는 거친 표현이나 독설 때문에 가려지죠. 또 지적하신바와 같이 너희들보다 내가 한 발 더 올라서있다, 어디 까불고 있냐, 라는 식의 토론태도 또한 문제있습니다. 생산성을 저하시키는거죠. 생산적인 논의가 될 수 있는 토론도 그 같은 발언으로 격이 떨어져버리게 되고. 근데 이번건 어차피 생산적인 논의 안될거 알고 같은 방식으로 시원하게 독설을 퍼부은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이 진지한 태도로 나왔고, 시청자도 진지하게 보고 있는데, 진중권 혼자 그렇게 판단내리고 방향을 끌고 갔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이건 비생산적이야, 라고 혼자 생각하고 끌어갔다면 말이죠.



turnleft 2007-08-13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변희재까지 검색어 상위에 있습니까. 진중권이 자기 밥그릇 건드린데 대한 치졸한 반감이 덕지덕지 묻어나던 글이더만 진중권 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뜨나보죠 -_-;

마늘빵 2007-08-13 09:45   좋아요 0 | URL
네. 진중권의 대학 후배인데다가, 아무래도 디빠(이런 이분법적 구도는 별로 좋지 않지만 마땅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으므로 - 쪽에서는 나온 패널들도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고, 다른 여타할 글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변희재는 꽤나 매력적인 요소였겠죠. 변희재는 잠깐 떴다 말았습니다.
 


  정말 말들 많다. 한 영화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찬반 대립하여 각을 세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정말 말들 많다. 이 정도로 네티즌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영화도 없지 않았을까. 평론가들의 냉혹하고 차가운 비평이야 언제나 있어왔고, 특별히 그 대상이 '디워'가 된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건 없는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인터넷 안에서 본 '디워'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의 향연은 가히 '디워현상'이라 부를만 하다. 심지어 이걸 가지고 영화가 개봉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100분 토론> 주제로까지 삼고 있으니.

  논란이 된 김조광수의 글도, 이송희일의 글도 영화를 보기 전엔 몰랐고, 어제 100분 토론을 본 뒤에야 비로소 오늘 아침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하고 찾아내 읽었다. 정식 평론도 아니고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이가 개인 블로그에 주저리주저리 짜증섞인 불만을 토로한 정도로 보이는데, 네티즌들의 반응이 엄청나다. 네이버에서 '디워'라고 검색하면 화면을 가득채우는 온갖 글들은 대부분 뭐 저런 자식이 다 있냐, 게이라며, 성이 왜 두개야, 뭐 이런 식의 악플들이다. 물론 이들에 대한 정식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글쎄, 눈이 어두워서인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일단 화면 안에 보이는 것들만 읽기에도 버거우니까.

  이송희일이며 김조광수며 사실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고, 충무로에서 그다지 영향력있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어제 <100분 토론>을 봤는데, 여기서도 다들 인정하더라. 패널로 나온 김조광수가 충무로에서 그다지 주류세력도 아니고, 영향력 있는 이도 아니란 것에 대해서는. 이들의 글이 여기저기 퍼져나가 엄청난 '사건'이 된 것도 신기하지만, 솔직히 이 분들이 이런 짜증섞인 글을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사건이 확대되지도 않았으리란 생각이다. 심지어 디까 라고 자처하는 어떤 이는 이송희일과 김조광수가 심형래한테 돈 먹으거 아니냐, 이런 파장을 굳이 만들어서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고 너도나도 '디워'를 보게 만든거 아니냐, 고 음모론까지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송희일이며 김조광수며 그저 보이는 것에 대해서 개인 블로그에 불만을 토로한 것 뿐인데, 일부 디까에게도 디빠에게도 욕 먹고 있는 실정이다. (디까와 디빠라는 말도 사건확대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디까 아니면 디빠 라는 식의 이분법적 구도는 중간지대와 다른 시각을 사라지게 만든다.)

 읽어보니 이송희일의 글은 좀 거칠고 적나라하긴 했다만 그거야 블로그를 운영하는 한 개인의 토로 정도로 봐주면 될 일인데, 네티즌들이 매우 민감한거 아닌가 싶다. ('네티즌들'이라고 전체집단을 지칭해 이렇게 말하면 또 '디워'를 괜찮게 본 악의 없는 글을 쓴 이들까지 싸잡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코 아니다.) 솔직히 '디워' 재밌었다. 그러나 이때의 재미는 역시나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장면을 담아낸 빠르게 진행되는 화려한 액션씬 때문이었다. 재미는 있었는데 아쉬웠던 부분은, 스토리의 개연성이다. 이 부분은 어제 <100분 토론>에 나온 디워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청년필름 김조광일과 문화평론가 진중권, 그리고 반대진영인 학벌없는사회모임 하재근과 스포츠조선 기자 김천홍 네 사람 모두 동의하고 인정한 부분이다. 그러니 스토리의 개연성을 지적하는 진중권을 대상으로 개념없느니, 스토리가 뭐 어쨌는데 하는 비난 혹은 반론은 그다지 효과가 없어 보인다.

 어제 진중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쩌고 한 말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걸 모르고라도 개연성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두 알고 있다. 스토리의 개연성은, 하나의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원인과 결과 관계라고 보면 무리가 없지 싶다. 솔직히 화려한 영상에 비해서 스토리의 개연성이 너무나 부실했다. 하나의 사건 뒤에 나올 또다른 하나의 사건 사이에는 분명 다른 사건이 존재해야하지만, 그것이 빠져있다는 느낌은 비단 나만 느낀건 아닐게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도 자주 엥?! 한 부분이 많았다. 어쩌면 이것이 문제가 된 것도, 보여지는 화면과 스토리의 괴리가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둘 다 부실하면 악평을 해도 누구나 끄덕끄덕 할텐데 영상은 화려한데 스토리가 흘러가는 맥락이 뭔가 부실하고 하나씩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 크기 때문에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일게다.

  결국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화려한 영상에도 불구하고 부실한 스토리..." 혹은 "부실한 스토리이지만 화려한 영상을 선사하는..." 영상이냐 스토리냐 어느 것을 크게 볼 것이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호평과 혹평이 갈린다. 혹평을 하는 쪽에서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이 있고, 이 영화가 그걸 채우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호평하는 쪽에서는 그런건 없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결국 같은 것을 두고 어느 것을 더 크게 보느냐에 따라서 디까와 디빠로 나뉜다. 물론 다른 면에서도 디까와 디빠로 나뉘기도 한다. 애국심 마케팅이니 인간극장 코드에 호소했다느니 하면서 지적할 수도 있는데, 지적으로 끝나지 않고 관객들이 여기에 놀아났느니 어쩌니 하기 때문에 '놀아난(?)' 관객들은 이에 대해 발끈 하는게다. 내가 바보냐 그런거에 속아넘어가서 영화를 보게? 이렇게 되는거지. 그러다보니 점점 더 서로간의 대립각을 세울 수 밖에 없고 무차별 테러와 악플이 난무하는 요지경에 이르렀다.

  애국심 마케팅과 인간극장 코드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영화 개봉 전부터 온갖 유명한 오락프로그램에 나와서 시청자를 웃기고 자신의 인생사를 늘어놓으며 때로는 본인이 의도했건 그렇지않건 동정심을 유발하기도 - 동정심에의 호소가 아니라 유발 - 했다. '디워'가 헐리우드 영화였다면 이렇게까지 관객이 들어섰을까 싶기도 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관객이 얼마나 들어서는지가 판단의 잣대가 될 것이다. 근데 미국판은 120분짜리 라는 소리가 있던데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그리고 그 나머지 부분들이 스토리의 개연성 부족을 보완해줄 수 있다면 미국에서도 먹힐 수 있으리라 본다. 결국 이런 지적도 한국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바램에서 나오는 것이지, 무조건 까고 매장시키기 위해서 하지는 않을테다. 심형래 감독이 이 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희망사항일 뿐이다.


*   인터넷 여기저기를 보니 어제 <100분 토론> 패널 진중권의 열등감이 폭발했느니 어쩌니 하는 글들이 많다. 그러나 평소 토론에서의 진중권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네이버에는 디워 팬카페도 있던데 여기 글들도 재밌다. 아마도 디워를 옹호하려는 이들은 - 디빠, 디까라는 말은 사용하지말자. 대립구도를 부추긴다. - 대학원생 이미지씨의 발언이 효과적이었다며, 왜 진중권은 영화 <300>에 대해서는 스토리가 단순하다고 말했음에도 괜찮게 평을 내렸고, 영화 <디워>에 대해서는 스토리가 부실하다면서 혹평을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스토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앞서 본 글에서 지적했듯 스토리의 개연성 부족을 지적하고 있는게다. 영화 <300>은 하나의 사건 뒤에 오는 또다른 사건이 납득이 안되거나 머리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디워>는 그런 부분이 많다. 진중권은 그 부분에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지적하는거다.

* 하고픈 말이 많아지다 보니 자꾸 이런저런 주제가 나오는데, 지금의 디워현상에서 또하나 지적하고픈건 말을 할 수 있게 해달라, 는 것이다. '디워'에 대해 뭔가를 지적하고 안좋은 말을 하려고 하면 무조건 네티즌들 달려들어 무차별 테러하는 지금의 풍토에서는 영화를 재밌게 봤지만 뭔가 아쉽다고 말하는 것 조차도 말하기 무섭다. 난 <디워> 재밌게 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솔직하게 지적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디빠와 디까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바라보며 '디워'에 대해 뭔가 지적하는 이들은 모두 '디까'라는 범주 안에 집어넣고 까고 있는 현실은 누가봐도 아니지 않은가. 순수하게 영화를 보고 좋은 것은 좋았다고 나쁜 것은 나빴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게 왜 이리도 어렵다냐.

* 엔딩의 아리랑이 영화와 조화를 이루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색다르긴 했다. 다른 SF 영화들에 익숙해져인지 모르겠지만 강렬한 록비트의 엔딩으로 마무리하는게 더 잘 어울리고 깔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런 시도를 뭐라 할 수는 없다. 음악이 어색하게 느껴지는건 어쩌면 우리의 귀가 미국 헐리우드 액션/SF에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심형래가 자신의 인생사의 한편을 잘라내어 주저리주저리 관객에게 편지글을 보여주는 부분은 너무 오버지 싶다. 영화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간 고생한 거 모르는거 아니나 오히려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간직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당신을 더 생각합니다. 나 좀 알아줘, 나 이렇게 고생했어, 하며 대놓고 호소하는건 오히려 영화 재밌게 잘 본 사람들 눈살 찌푸르게 만들 수도 있답니다.

* 영화 <디워>의 영향력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밤 12시부터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100분 토론>의 시청률이 엄청나게 뛰었다고 하던데. 호. 좋은거야 나쁜거야.

* 진중권의 발언은 때로는 거침없고 솔직해서 시원하기도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다. 거친 표현법은 내용을 제거한 채 상대방에게 비수가 되어 꽂힐 수도 있고, 더 큰 분노를 유발할 수도 있다. 엉망진창이니 영구없다, 등등의 발언은 지루한 토론에 웃음을 주는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만, 그 웃음이 비웃음일 경우에는 경우가 다르다. 수용할 만한 내용을 전달하면서도 내용을 감싸는 대화법이 본질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진중권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 부록 (논란과 관련해 읽어볼 만한 것들은 이후에도 수집)

<디워>를 둘러싼 참을 수 없는 (이송희일)
<디워>를 둘러싼 짜증 외 다수글 (김조광수)
<디 워> 논란(씨네21, 남동철 편집장) 
'디워' 100분 토론에 나타난 소통 방향에 대하여 (데일리 서프라이즈, 김석수 칼럼니스트)
하재근 평론가 "진중권씨 맞는 말, 인신공격 말아라"  (마이데일리)
하재근 블로그 토론후기, "진중권씨 말이 맞는 말" (조선일보)
김천홍 기자, "'디 워' 평단이 관객 자극했다" (마이데일리)
김조광수 "'디워'는 충무로와 심형래 감독의 합작품" (조이뉴스24)
MBC 100분 토론 진중권, “<디워>에 대해 할 말을 못하는 현상” (맥스무비)
유지나 "디워, 어설픈 구석 있다는 거 인정해야"  (유지나)
디워 관객만큼 논란도 폭발… 영화평론가 이유 찾기
 (한국일보 좌담)
[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심형래가 아는 한 명뿐인 기자'의 생각 (한국일보 이대현 기자) 
[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심형래가 아는 한 명뿐인 기자'의 생각 (2)  (한국일보 이대현 기자)


* 빅뉴스의 변희재를 비롯 몇몇 인들의 글은 진중권 죽이기로 밖에는 안보이지만 참고 
  글이 주소가 따로 안나와서 사이트 주소만 http://bi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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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10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대로 가면 아마도.."디 워 디렉터스 컷" "디워 오리지날 노컷" "디워 완전판" 등등이 계속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던데...^^

마늘빵 2007-08-10 11:2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겠군요. 지금이 87분(?) 정도니깐 디비디 한정판으로 나올 수도 있겠군요. 뭐 그렇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는거 같습니다. 근데 확실히 '디워'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되어버렸고, 영화에 따르는 캐릭터 인형이나 기타 등등의 부수적인 상업 효과도 상당할 듯 합니다.

Mephistopheles 2007-08-10 11:37   좋아요 0 | URL
아 그럼 이제 용가리치킨은 안팔고 디워치킨이 팔리겠군요...용가리치킨 맛있는데...

마늘빵 2007-08-10 11:51   좋아요 0 | URL
아 메피님 저는 치킨은 다 싫습니다. -_- 닭이 싫어요.

울보 2007-08-1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100분토론 보았습니다,
솔직히 잘모르겟어요,
아직도 머리만 복잡해요 아직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님의 글을 읽으니 조금은 알것같기도하고 저도 오늘 컴에서 디워에 대해 찾아보았는데ㅡ,,,,ㅎㅎㅎ

마늘빵 2007-08-10 11:57   좋아요 0 | URL
영화를 안봐도 영화를 둘러싼 현상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볼 수는 있습니다. 영화흥행에 이런 논란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거 같아요. 어제 <100분 토론> 이후로 또 관객몰이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토론주제로 선정됐다는 것, 그리고 두 시간에 걸쳐서 토론을 했다는 것, 다음 날 포털사이트를 장악했다는 것만으로도 공짜로 엄청난 광고를 한 셈입니다. :)

2007-08-10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10 13:11   좋아요 0 | URL
마땅한 장르를 붙일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굳이 기존의 장르 중 어느 하나에 끼워넣는다면 SF물로 들어가게 되는거고. 혹시나 해서 검색해봤는데, 네이버 장르 구분에는 환타지/액션 으로 되어있군요. SF보다는 환타지가 더 잘 어울리는것도 같고. <반지의 제왕>과 <킹콩>의 조화? 환타지라면 더더욱 서사가 뚜렷해야할텐데.

kleinsusun 2007-08-1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분 토론, 정말 최고의 광고네요!
아... 다른 건 다 몰라도 제작 후기는 역사에 남을 코미디예요. ㅋㅋ

마늘빵 2007-08-10 13:13   좋아요 0 | URL
흐흐흐. 100분 토론 정말 오랫만에 봤습니다. 아 요새 토론 프로그램 너무 재밌어요. 조간신문 편성표에 주제까지 적혀있으면 더 좋을텐데. 그날 토론 프로그램이 있는건 알아도 주제가 뭔지는 찾아봐야 알 수 있거든요. 어제 영화사 대표 전화 연결도 하고 무비스트 편집장도 전화 연결하고, 광고 하나는 제대로 했습니다. 토론 시청률도 그렇지만, 오늘 아침 네이버 검색순위는 패널과 사회자, 영화제목, 토론프로그램 이름이 죄다 상위를 차지했어요.

전자인간 2007-08-1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우려하는 것은 디워를 둘러싼 일부 네티즌들의 비이성적 옹호 주장이 '네티즌 파시즘'으로까지 비쳐진다는 점입니다. 극단적인 배타주의에 애국주의 당의가 입혀져서 유행병처럼 퍼지는 현 사태를 볼 때 말이죠. 이러한 '네티즌 파시즘'은 황우석 사태 때도 이미 경험한 바 있고요. 제가 우리나라 정치의 미래에 대해 가장 암울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머지않아 파시즘 정권이 들어설 지도 모른다는...

마늘빵 2007-08-10 14:16   좋아요 0 | URL
저도 이거 매번 XX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벌어지는 이 같은 사태를 어찌 봐야할지 난감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네티즌 파시즘'이라 칭하면 딱일듯 합니다. 신조어가 생기려나요. 개인이 블로그에 주저리주저리 토로한거 가지고 대한민국 다수의 네티즌들이 작성자를 가운데 놓고 두드려패고 있다고 볼 수 밖에. 한 두번으로 끝날거 같지 않습니다.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대두될듯.

프레이야 2007-08-1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의 디워치킨! 압권입니다.^^
저도 어제.. 진중권이 시원하게 말하더군요. '영구없다' 이거요.. 완전!

마늘빵 2007-08-10 21:31   좋아요 0 | URL
아 그 멘트는 재밌긴 했습니다만, 비아냥 대는거 같아서 듣기는 웃고 나니 좀 뭣하더라고요. 평소의 진중권다운 멘트였지만. 비아냥을 뺀 채 의견을 전개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럼 디워 옹호측 네티즌도 지금처럼 분노에 가득차서 표적을 진중권으로 바꾸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죠. 이런 점은 좀 아쉽습니다. 네이버 검색어 1위가 진중권이더군요. 헐...

맑음 2007-08-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판과 비난의 연쇄 충돌사고.
비평이나 비판 논란은 예전부터 작가(예, 공지영이나 이외수)와 비평가 사이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했죠.
말하는 사람이 비평이나 비판을 가하면서 비난의 말을 차용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또 듣는 사람이 비평이나 비판을 자기에게 퍼붓는 비난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늘 논란거리를 달고 다니는 것 같아요.
며칠 전부터 심각하게 비판과 비난의 차이가 뭘까? 고민을 해봤는데,
아타(我他)가 수긍하고 받아들이면 비판비평이고 아타가 정서적 상처를 받으면 비난일꺼란, 아주 모호하고 개인적인 개념 정리하고도.
여전히 비판과 비난의 차이에 대한 기갈이...
똑같은 돈으로 1편이 아니라 몇 편을 제작할 수 있다거나 개인적인 성적 취향에 대한 비아냥거림은 누가 봐도 비평비판이 아니라 비난임을 알 수 있는데, 전 왜 이런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최근 웃긴 갑론을박 또 하나 있어요.
한 인터뷰에서 앙드레 김이 맘마미아의 박해미를 평하길, “극성스럽고 요란하다.”
이에 박해미는 “그분은 정중앙에 앉아 주무셨는데 잠을 깨워 화가 났나보다 생각하며 마음을 풀었다”라고 응수했어요. 전적으로 앙드레 김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소견인데, 문제는 그게 매체를 탔기 때문이죠.

사람마다 자신의 생각이 있는 것인데, 그래도 그 표현은 조심스러운 여과기를 거쳐야 한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상처받기 쉬운 인간이잖아요.^^

마늘빵 2007-08-10 21:57   좋아요 0 | URL
맑음님 도대체 이런 좋은 글을 왜 댓글로만 남기시는겁니까. 네네네? 페이퍼로 작성하시면 더 좋을텐데... :) 가끔 출몰하시는 님 덕분에 제 서재가 빛나잖아요. (저 원래 칭찬에 인색하고 아부 같은 것도 못하는데... 총총총)

비연 2007-08-10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전..이런 현상들 속에서 디 워가 더더더더더욱 보기 싫어진다는..;;;

마늘빵 2007-08-10 22:14   좋아요 0 | URL
재밌는 기사가 방금 눈에 띄었습니다. 100분 토론을 시청한 후 디워에 대한 생각은? 이라는 설문조사래요. 설문조사가 믿을건 못되지만 확실히 여러 시선 끌긴 했나봅니다. (http://www.maxmovie.com/movie_info/news_read.asp?idx=MI0052331040)

twinpix 2007-08-1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이 워낙 떠들썩이라 원래 영화 혼자서 잘 안 보는데 가서 봤죠. 'ㅁ'(흥행에 일조를...) 아무튼 묘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마늘빵 2007-08-10 23:14   좋아요 0 | URL
앗, 혼자서 이런 환타지를. 하긴 나는 멜로나 액션도 혼자봤는데. 이게 뭔데 이렇게 요란스러울까, 궁금해서라도 관심없던 사람들도 다 보러 가겠어요. 100분 토론 영화 제대로 홍보해줬습니다. 뭐 진중권이 스포일러를 뿌렸네 어쩌네 하는데 안본 사람 입장에서는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줄거리를 이야기한건 아니니까 영화보는데는 지장이 없을 듯 하고.

Jade 2007-08-1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전 집에 티비가 없어서 100분토론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ㅋㅋ 아 디워 볼 생각 없었는데, 한번 봐야겠어요~ ㅋㅋㅋ

마늘빵 2007-08-11 08:28   좋아요 0 | URL
헙. 거봐요. 요렇게 안보려고 했던 사람들까지 보게되는 광고효과. 천만 넘겠다. 이런저런 부수적인 효과들이 자꾸 관객을 동원하고 있어요. 이것도 나름 마케팅이라면 마케팅인가.

야클 2007-08-1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100분 토론 한번 다시보기로 봐야겠군요. 정리 잘 해 놓으셨네요. 덕분에 편안하게 정리가 됩니다. 추천 한방! ^^

마늘빵 2007-08-11 16:39   좋아요 0 | URL
하핫. 저도 어둠의 루트로. :) 토론 정말 재밌어요.

부리 2007-08-1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졸려서 못봤어요 근데 상영중인 영화를 가지고 토론을 한다는 게 참 이상하긴 하더군요. 시청률 차원에서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마늘빵 2007-08-11 16:4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다들 그러더라고요. 개봉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영화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게 참 이상하다고. 그만큼 영화 자체로만이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인 논란과 현상 때문에 주제로 잡은거겠죠. 어떤 이유에서든 영화 홍보는 제대로 했어요.

부리 2007-08-1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은 제 서재엔 안오시고....넘하세요.

마늘빵 2007-08-11 16:41   좋아요 0 | URL
야클님은 이제 부리님이 너구리님한테 갔다고 더이상 보기 싫대요 =333
 
자유주의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7
존 그레이 지음, 손철성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절판


나는 자유주의적 실천의 토대를 탐구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정권은 바람직한 보편적 통치 형태와는 거리가 멀고, 단지 근대 후기 또는 탈근대의 초기에나 정당화될 수 있는 제도들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사의 글 中) -11쪽

어떤 정권이 정당한지의 여부는 그 정권이 자국 국민들의 문화적 전통과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긜고 자국 국민들의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감사의 글 中)-12쪽

1장 근대 이전 : 자유주의의 예비적 모습

근대인에게 자유는 법의 지배에 의해 보호되는 간섭받지 않는 독립된 영역을 의미하지만, 고대인에게 자유는 집단적인 의사 결정에서 발언권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21쪽

그리스인들에게 그리고 아마 로마인들에게도 자유 관념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됐는데, 이런 공동체 차원에서 자유는 외부 통제가 없는 상태, 즉 자치를 의미했다. 심지어 자유 관념이 개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도 공동체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공동체의 협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닫는 의미로만 사용됐다. 이처럼 고대와 근대의 자유관은 상당히 심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21-22쪽

"정의란 잘못을 범하지 않거나 잘못을 당하지 않기 위한 계약이다"(글라우콘) 아리스토텔레스가 들려준 바에 따르면, 소피스트인 뤼코프론은 법의 유일한 목적은 개인의 안전 보장이며 국가는 정의롭지 못한 일의 방지 같은 소극적 기능을 담당하기에 법과 국가는 일종의 계약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연과 관습을 구분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자연적 노예 상태라는 관념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힘을 발휘했다. 수사학자인 알키다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신은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자연은 아무도 노예로 만들지 않았다."-22쪽

"모든 시민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 그래서 개인들이 지위와는 상관없이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은 허용하지만, 특정한 개인에게는 이익이 되고 타인에게는 피해를 주는 특권이나 법률은 제정되어서는 안된다." (로마 12표법 공법 제 1항) -27쪽

2장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

"자연법이 자기 보존의 욕구에서 도출되어야 한다면, 다시 말해서 자기 보존의 욕구가 모든 정의와 도덕성의 근원이라면, 근본적인 도덕적 사실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이다. 즉 모든 의무는 자기 보존이라는 근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서 도출된다. 그래서 절대적이거나 무조건적인 의무는 없으며, 의무는 그것의 수행이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구속력이 있다.오직 자기 보존의 권리만이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의 자연적 의무를 정식화 해주는 자연법은 아닌 것이다. ... 중략 ... 즉 의무와 구별되는 인간의 권리를 기본적인 정치적 사실로 간주하고 국가의 기능을 그런 권리의 보호나 보존으로 간주하는 정치적 교설로 생각해도 좋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의 창시자가 홉스였다고 말해야 한다." (슈트라우스) -31-32쪽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 존재는 (자연의 다른 모든 사물들처럼) 우선 자기 보존의 성향을 가진다고 봤으며, 그런 필연적인 자기 충족 행위들의 상호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인간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는 밑줄그은이가 첨가한 것-33쪽

[홉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법의 침묵과 같은 것으로서, 개인이 현재의 욕구를 추구하려고 행동할 때 방해받지 않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33쪽

홉스와는 다르게 스피노자에게 개인의 자유란 욕구 충족을 막는 장애물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가치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최고 목적이다. -33쪽

스피노자는 개인의 자유를 본질적 가치롤 간주한다는 점에서, 즉 가장 훌륭한 삶을 위한 필수 요소이자 선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홉스보다는 자유주의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스피노자와 홉스는 자유주의의 사회개량주의적 관점, 즉 인간사는 열려진 미래를 향해서 무한정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성찰이 제대로 적용된다면 인간의 운명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그들이 생각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인간의 영원한 무능력 탓에 사회 개량의 전망은 어둡다고 봤다. -35쪽

로크는 영구적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설립하는 데 어떤 선천적인 장애물도 없다고 본 점에서 자유주의자에 속한다. 로크는 자기 자신의 사회에서 일어난 절대군주제에 대한 반대 투쟁이 자연법이 요구하는 자의적 지배를 반대하는 운동의 모범적 사례이며 시민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40쪽

3장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권리로서 오직 법에만 종속될 수 있으며, 한 개인이나 많은 개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거나 고통 받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권리이다. 자유는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소질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다른 사람들과 왕래하고 연합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 끝으로 자유는 행정부 공직자들 전원이나 일부를 선출하거나, 권력자가 많든 적든 고려해야만 하는 충고, 요구, 청원을 통해서 국가 행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 (콩스탕) -51쪽

영국의 자유주의는 고대의 권리들과 역사적으로 선행했던 것들에서 자유권의 근거를 찾았던 반면에 프랑스의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연권이라는 추상적 원리에 호소했다.-53쪽

5장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바로 그 뒤를 이은 시기에도, 현대 자유주의나 수정자유주의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더 충실한 사상가들이 지적 영역에 훨씬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1944)이다. 하이에크의 주장은 대담하고 과감했으며, 모든 진보적 견해와는 반대로 나치즘의 뿌리는 사회주의 사상과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하이에크는 서구 국가가 사회주의 정책을 선택한다면 결국에는 전체주의라는 인과응보식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구 문명에 용인될 수 있는 미래는 사회주의 이념을 맹세코 부인해야하며, 그동안 포기됐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길(법의 지배를 받은 제한적 정부)을 다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77-78쪽

특히 노직의 작업은 자유주의 전통을 위해 유토피아적 전망을 복원, 활용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실 (하이에크를 제외한) 모든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이념이 요구하는 다원주의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이런 유토피아적 전망을 거부해왔다. 그러나 노직은 유토피아를 거부하지 않은 채 최소 국가의 제도들이 자유주의적 메타 유토피아의 구조틀, 즉 각자의 다양한 유토피아적 전망들을 실제로 실현하고자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려 하는 정치 질서를 구성해 준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노직의 작업은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과 비경제적 개인적 자유(언론이나 생활 방식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서로 관련되어있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재론한 노직의 주장은 오랫동안 미국 우파의 전통이 되어 왔던 자유 시장에 대한 보수주의적 옹호와는 뚜렷하게 대조된다.-84쪽

6장 토대에 대한 탐구

자연법이란 독립적으로 독자성을 지니는 인간의 선에서 직접 도출되는 옳은 행위의 원리나 도덕적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90쪽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는 자유의 원칙은, 밀이 원하는 자유주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피해라는 개념 자체는 매우 어려운 논쟁을 야기하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비록 피해라는 개념을 적절히 규정한다고 할지라도 자유의 원칙은 행동을 이끌기에는 여전히 불충분한 안내자이기 때문이다.-101쪽

밀의 원칙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이해관계에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적 영역에서만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그럴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늘 정당화되며, 또한 효용성을 계산해 본 결과 그런 제한이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입증된다면 자유의 제한은 늘 정당화될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 밀의 원칙은 결국 자유와 부자유가 형평성 있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개, 피해를 막고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킨다며 자유를 제한하는 정책은 특정 사회집단들에게 훨씬 불평등하거나 불공정한 부담을 지울 수 밖에 없다. 이런 결과를 막으려면 밀의 원칙은 공정성이나 형평성의 원칙(즉 전체의 복지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과 경쟁관계에 있는 원칙)을 더 많이 보완할 필요가 있다. 밀이 효용성의 원칙에서 자유의 원칙을 도출하는 데 성공할지라도, 자유의 분배를 규제하는 공정성의 원칙은 분명히 전체 복지의 증진과 갈등을 빚을 것이다. 자유의 분배에서 공정성을 보증해주는 그런 원칙은, 진정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의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래서 공리주의 관점에서는 옹호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밀의 기획이 전체 복지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과 자유의 우선성과 자유의 평등한 분배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심을 화해시키련느 기획이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을 지닌 기획이었다. 왜냐하면 피해 방지라는 공리주의적 정책이, 결과적인 부자유의 분배에 공정성이 제한을 가하는 일을 항상 존중해 주리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102-103쪽

계약론적 방법이 산출한 자유의 원칙은 애매하고 위험하기 그지 없는 밀의 피해 원칙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말하는 최대의 평등한 자유 원칙(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일체의 복지주의 정책을 제한하는 원칙)과 비슷하다. 롤즈의 이론이 밀의 자유주의보다 고전적 자유주의에 더 가까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롤즈의 최소극대화 원칙이 사회에서 가장 처지가 나쁜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불평등은 부당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지만, 롤즈는 제 1원칙인 최대의 평등한 자유 원칙은 밀의 원칙이 허용하는 부자유의 부당한 분배를 금지한다. 게다가 롤즈는 차등의 원칙에 따른 [부, 소득, 기회 등의] 재분배만을 정부의 기능으로 부과하는데, 이것은 자유의 보호와도 상관없고, 예술이나 과학의 장려를 위한 완전주의적, 공리주의적 정책들과도 상관없으며, 정의의 요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배제되었던 전체 복지와도 상관없다. 롤즈의 계약주의적 방법은 윤리학적 개인주의를 토대로 갖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공리주의 이론들보다도 자유주의적 자유를 옹호하는 데 고유한 장점을 갖고 있다. -103-104쪽

7장 자유 개념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립하는 현대 자유주의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준들 중의 하나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이나 수정자유주의자들이 했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자율성으로서의 자유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비나 시장의 작동 과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정을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해, 그리고 경제 조직의 작동과 관련해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기본적 자유가 계약의 자유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적 소유권에 대한 법률적 보호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옳았다고 주장할 것이다.-112쪽

7장 자유 개념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립하는 현대 자유주의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준들 중의 하나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이나 수정자유주의자들이 했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자율성으로서의 자유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비나 시장의 작동 과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정을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해, 그리고 경제 조직의 작동과 관련해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기본적 자유가 계약의 자유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적 소유권에 대한 법률적 보호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옳았다고 주장할 것이다.-113쪽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소한 그가 자신의 재능, 능력,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만약 이런 자기 소유권에 대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는 (노예 제도에서처럼) 타인의 소유물이나 (사회주의 국가에서처럼) 공동체의 자원 같은 한낱 물건으로 전락한다. 내게 내 자신의 신체와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나는 내 목표를 성취하거나 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없으며, 내 자신의 목표를 다른 사람의 목표나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의 요구에 종속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소유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에 수반해 계약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결사와 운동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자유를 갖는다는 말일 수 있으며, 이런 소유권은 그런 자유들이 축소될 때마다 손상된다. 이럴 경우 소유권과 기본적 자유들 사이의 연관성은 본질적인 것이지 단지 수단적인 것은 아니다.-114쪽

완전한 자유주의적 소유권 체계에서는 개인이 불가피하게 자신의 재능이나 자원에 의해서 제한되더라도, 자신의 이웃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나 의견에 의해서는 제한되지 않는다는 통찰이 그것이다. 오직 대지의 법에만 종속되는 개인은 자신의 소유물을 자신이 선택한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누구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그 누구에게서 허가를 받을 필요로 없다. 즉 지나치게 위험하다거나 관습적인 도덕적 견해를 벗어났다며 이웃들이 비판할 수도 있는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다. -117쪽

"이전의 노력들이 이미 공동의 견해를 산출한 경우, 무엇이 바람직한지 의견이 모아진 경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반적으로 인정된 가능성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일 경우에만 집단적 동의에 의한 행동은 이뤄진다." (하이에크)

... 중략 ... 왜냐하면 사적 소유 제도와는 달리, 공동체적 소유 제도에서는 개인의 계획이 실제적으로 실현될 수 있으려면 그 계획이 자신이 속한 사회나 자신이 속한 협동체의 다른 성원들에게 지배적 견해로 수용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권의 옹호는 단지 사적 소유권을 소극적 자유와 연결시키기보다는 개인의 자율성, 즉 자신의 인생 계획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연결시킨다. 자유주의 질서의 입헌적 구조는 기본적 자유를 형식적이거나 소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인데 비해, 사적 소유권은 기본적 자유를 실질적이거나 적극적으로 구체화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117-118쪽

비록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신의 소유물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소유물을 가진 사람보다 덜 자율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자신이 생산한 물건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더 자율적이다. -118쪽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는 저항이 굶주림에 의해 천천히 진행되는 죽음을 뜻한다. '복종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새로운 원칙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낡은 원칙을 대체했다." (트로츠키) -120-121쪽

9장 자유주의 국가

특히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 자를 처벌할 수 있는 로크적 자연 상태의 권리를 상실한 개인은 국가가 제공한 권리 보호 기능에 따라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노직의 제안을 봐도, 그가 설명한 최소 국가주의는 명백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권리 양도는 동의를 받지 못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노직의 이론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권리들이 축소되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이 제안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133쪽

결론 : 탈자유주의

"자유주의 사회란, 강제력보다는 설득에 의해서, 혁명보다는 개선에 의해서, 현재의 언어적 실천이나 다른 형태의 실천들과 새로운 실천들을 위한 제안들 사이의 자유롭고 열린 만남에 의해서 그 이념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이상적인 자유주의 사회가 자유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런 만남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보면서 그 결과를 준수하려는 자발성 이외에는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라는 점이다." (리처드 로티)-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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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한 주제에 관해, 한 작가에 대해 파고들다보면 요즘 책이 아닌 옛날 것들을 찾게 되는 때가 있는데, 새 책을 선호하는 나는 다른데 다 없으면 일단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고 - 가장 오래된 대형서점이 아닐까 - 거기에도 없으면 헌책방을 뒤진다. 다행히 얼마전 알게된 헌책방 검색 사이트를 통해서 일일히 모든 헌책방 사이트를 들어가 검색하는 불편을 제거할 수 있었는데, 이 검색에도 걸리지 않으면, 그 다음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오프라인 헌책방 발품팔이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 막연하고 있을 가능성도 거의 없으므로 '군대식 삽질'로 연결될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렇다면 책을 '소유'하는건 포기하고, '열람'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결국 모든 곳에서 찾아 없는 책을 보기 위한 최종 목적지는 도서관이다.

  그런데 만일, 도서관에도 갔는데 그 책이 없다면 어쩐다?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 나도 예전에 어디선가 봤는데 서울의 한 유명 사립대 - 어딘지 기억 안나 - 가 2000년 이후 10번 미만으로 대출된 책들을 1차로 걸러내 폐기 대상 목록에 올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책은 계속 늘어나고 도서관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삼풍백화점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선 책을 걸러낼 밖에. 그런데 대학들을 보면 일년 삼백육십오일 공사 중이던데 왜 도서관은 세우지 않을까. 맨 IT니, 전자공학이니, 경영관이니 하는 것들만 지으면서 왜 도서관은 짓지 않을까. 다른거 지을 돈은 있고, 지을 공간은 있어도 도서관 추가할 돈과 공간은 없단 의미일까? 도서관과 책은 대학에게 관리하기 귀찮은 부산물일까. 있는 것도 귀찮은데 차라리 없으면 더 좋다고 생각하는걸까.

  소설가 이기호씨가 한국일보  '아무도 찾지 않는 책들'에서 말한 바와 같이, 헌책을 버리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대학들은 대학 도서관이 무슨 동네 비디오 가게인줄 아나보다. 10번 이상 대출한 책 - 최소한도의 인기를 유지했다 - 만 소장/보관하고 최소한도의 인기 요건을 채우지 못한 녀석들은 퇴출시키겠다는. 부끄러운 줄 알아라 정말. 당신네 대학 도서관에서 카프카와 까뮈와 사르트르와 볼테르와 정약용과 이이 등등의 책들을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건 부끄러운 일이다. 10년간 다녀간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특정 책을 빌리지 않았음에서 미래에 들어올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그 책을 빌리지 않는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또, 앞으로 10년 동안, 20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책이라 하여 '버려야 할' 기본조건이 더 충족된다고 볼 수도 없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 책을 대하는 이들이 대학에 있다는 것이 화가 난다. 이기호씨의 말마따나 이들은 사람도 차별할 것만 같다.   

  최근 몇몇 절판본을 찾고 있는데 아무데도 없다. 책을 '소유'하고 싶어 대학 도서관은 아직 검색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도서관엔 있겠지. 근데 만약 대학 도서관에 갔는데도 없다면 원하는 책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방법이 없다. 저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 많아진다면 아마도 우리는 세상이 '허락하는' 한도 내의 책들만 읽어야 할 것이다. 그건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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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09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포크너의 "음향과분노" 읽으려고 찾아봤더니 - 저희 학교 도서관이 원체 책이 별로 없어서 얼마전 나온 개정판은 목록에도 없고, - 사실 개정판이 오타가 장난 아니라고 들어서 그 이전에 나온거 보려고 한건데 - 예전책들은 대출불가/실종 이더라구요 -_-;; 그나마 한권 있는건 70년대에 나온 문고판이었는데 상권은 없어지고 하권만 -_-;;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뭐 이런 책들은 열몇권씩이나 있던데.. 공간이 문제가 된다면 파일같은걸로 만들어 보관해도 좋을텐데 말예요~

마늘빵 2007-08-09 11:28   좋아요 0 | URL
파일로 보관하는 것도 귀찮아하지 않을까 몰라요. -_- 언제 다 스캔하고 있겠어요. 음 그 책은 처음 듣는데 - 워낙 편식하는지라 - 저는 서울대 철학과 황경식 교수의 책 한권을 헌책방에서 겨우 찾아 주문하고 오늘 받아봤는데 완전 책이 먼지에 찌들어서 갈색이 되었어요. 근데 86년판인지라 한자의 압박. 흡. 편히 읽진 못하겠더군요. 최근 절판된 책은 다 한글로 되어있을텐데.

2007-08-09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09 11:34   좋아요 0 | URL
음 그렇군요. 국회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에는 있다고 해도 행동의 제약이 심하죠.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장거리 이동할수도 없고. 최소한 대학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책들만큼은 계속 보존해야된다는 생각입니다. 보존하냐 마냐의 문제도 그렇지만 저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도 일단...

보석 2007-08-0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사람이 없으니 처분한다라..참 단순한 사고군요.

마늘빵 2007-08-09 11:44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_- 그러니 지원자가 적은 학과는 폐지하고, 듣지 않으려 하는 강의는 없애겠죠. 대학들이 아주 뚜렷하고 일관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BRINY 2007-08-0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교 때 [설마 이런 책이 여기!!!]하고 놀랐던 책을 도서관에서 찾은 적이 있었어요. 영국 원서였는데, 100년도 더 된 책이었죠. 19세기 어떤 귀족 여성이 개인적인 문학 연구 성과로 그런 책을 낸 적이 있다는 걸, 다른 영국 학자의 전기에 언급된 내용을 통해서 알고는 있었는데, 설마 그 책이 한국의 대학 도서관에 있다니! 미군이 기증한 책으로 되어 있던데, 그 책이 대출될 일이, 혹은 검색되어질 일이 있을까요...제가 그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대학 도서관이 전산화되기 직전이었는데, 대출기록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찾을 이 없을 거 같은데...순간 그 책을 갖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었는데, 지금 그 책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하네요.

마늘빵 2007-08-09 12:27   좋아요 0 | URL
흠. 진귀한(?) 책을 찾으셨군요. 저는 -_- 아직까지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워낙 책과 인연을 맺은지 오래지 않은지라. 미래의 어느 순간의 단 한명을 위해서라도 모든 책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twinpix 2007-08-09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도서관 건물을 하나 세우는 게 좋을 텐데요. 책을 폐기한다는 기사가 충격적이었어요.

마늘빵 2007-08-09 23:02   좋아요 0 | URL
책을 넣을 자리가 없으면 책을 폐기할게 아니라 도서관을 세워야지 이런 사고 방식이라니. 그죠.

비로그인 2007-08-0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소장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마늘빵 2007-08-09 23:03   좋아요 0 | URL
-_- 그건... 원하는 사람들이 못 보잖소. 개인이 소장하게 되면 더더욱.

nada 2007-08-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좋은 글에 왜 추천이 없죠?
도서관의 사고방식이 정말 황당하네요. 자기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계신 듯.

마늘빵 2007-08-09 23:04   좋아요 0 | URL
대학은 대학의 본연의 역할이 있고, 도서관은 도서관의 본연의 역할이 있는데, 이게 아무리 사회가 변화되어간다고 해도 '그러지 말아야 할 것'까지 함께 딸려 들어가니 영 못마땅합니다.

비로그인 2007-08-09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찾지않았다고 앞으로 들어올 사람들이 안찾을거란 근거는 정말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네요. 저렇게 보관을 안하니까 나중에 절판된 책을 찾느라 난리인데 말이죠. 쯧쯔쯔...차라리 어디 도서관에 기증을 하고, 기증했다는 기록을 연관시켜서 그걸 찾는 사람에게 전산정보를 제공하는게 나을터인데. 그냥 폐기 내지는 줘버리고 말다니.

마늘빵 2007-08-09 23:06   좋아요 0 | URL
아니면 정 공간이 없다면 파일로 만들어서 보관을 해도 괜찮을거 같고, 파일로 만들더라도 원본은 따로 보존을 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다못해 너무 낡아빠진 책이라면 일반 서고가 아닌 보존용 창고 같은 곳을 만들어서 보관해도 될테고요.

Kitty 2007-08-0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학관이나 경영관은 기업들이 돈을 대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거야 졸업생들 빼가려는 속셈이라서...
졸업생이 나올리가 없는...(...) 도서관은 누가 투자를 하나요..쩝.

마늘빵 2007-08-09 23:08   좋아요 0 | URL
그쵸. 공학관이나 경영관은 참 잘도 투자해요. 그만큼 투자하고 많이 빼먹겠다는건데, 도서관은 기업체가 투자해주길 바라는건 꿈도 못꾸고 국가차원에서 지원이 들어와야할텐데 말이죠.

코코죠 2007-08-09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댓글달기) 엄워 이기호님이 칼럼을 쓰고 계셨군요! 이런 좋은 정보를! 감사해요 아프님 잇힝

마늘빵 2007-08-09 23:46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잘 모르는 분인데 좋아하시나봅니다. 칼럼까지는 아니고 한국일보 오피니언 작은 란에 짧은 글을 자주 쓰시더라고요. :)

2007-08-10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10 00:15   좋아요 0 | URL
속닥님 / 네. 그런 식으로라도 보존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원본도 함께 보존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디지털화는 당연하고. 어떤 기사를 보니 어떤 대학 교수분들은 공동보관소를 만들어야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더군요. 그런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확실히 세월이 갈수록 예전에 강조되었던 대학의 역할과 도서관의 역할이 퇴색하는 것 같습니다. 인기나 경제논리만으로 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으니.

마노아 2007-08-10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이 찾는 책 제목은 뭔데요? 전에 가을산님은 책을 수소문하니 어떤 분이 갖고 있다고 보내주시기도 했는데^^;;;

마늘빵 2007-08-10 08:27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찾는건 몇 권 있는데 급한건 아니라 그냥 이러고 있습니다. 꼭 필요한건 아니고 보고 싶은데 없는 그런 책이에요.

꼬마요정 2007-08-10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학교 도서관을 뒤졌어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 찾으려구요.. 분명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거에요~ 물어봤더니 결국 분실/실종 뭐 이렇게 되더라고요.. 결국 못보고 있다가 얼마전에 스트렐라님께서 연락 주셔서 인터넷 헌책방에 책 올라온 거 잽싸게 샀죠... 너무 안타까워요.. 대학이 점점 '공장'이 되어가는 듯 하네요..ㅜㅜ

마늘빵 2007-08-10 18:51   좋아요 0 | URL
네 대학이 기업체가 되어가고 있어요. 돈벌이에 눈이 멀고 편리/편의 위주로 돌리고, 영어로 강의를 하려고 하고. 실제로 또 하고 있고. 대학이 大學 다워야할텐데 말이죠. 저 대학 1학년 때 교양으로 '논리학' 들으려고 신청했는데, 당일날 갔더니 두 명 앉아있더라고요. 저랑 한명. -_- 곧 조교가 오더니 폐강이래요. 이런거 수강인원 적어도 다 보호해줘야하는거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대학 1학년 이었을 때가 꽤 지났으니 지금에야 오죽하겠습니까. '도서관'이야기에서 좀 벗어났습니다. :)

참 저도 구하는 책 있는데, 존 롤즈의 <만민법>. 아무데도 없더군요. 소장하고 싶은데.
 
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로저 트리그 / 자작나무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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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물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란 누구인가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들어가는 말 中)-11쪽

<홉스>

홉스는 결정론자였고, 인간과 동물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의지하거나 의지하지 않음에 있어서 다른 생물체에 비해 더 자유로운 것이 아님을 단호히 주장한다. 홉스는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현대 철학자들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거나, 우리가 의지한대로 행위하는 능력으로 자유를 정의했다. 그러나 어떤 결단이나 선택을 행위로 옮기는 자유를 일차적인 선택의 자유로 간주할 수는 없다. 묶이지 않은 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홉스에게 인간의 자유는 단순히 강제의 부재에 불과하다. 언덕 아래로 구르는 돌이 자유롭듯이, 우리가 그렇게 자유롭다고 그는 생각한다.-25-26쪽

홉스는 사람들이 응분의 처벌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 자체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적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26쪽

홉스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연스런 애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했으며, 우리가 우리와 가까운 타인에 대해 애저을 품을 수 있음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낯설은 사람을 돕는 행위에 대해서는 좀더 회의적이었으며, 그러한 행위란 '우정을 구매하려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공포감에서 유발된 '평화를 구매하려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있어 자기 집착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과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도 배려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33쪽

"강제력이 없다면 계약은 한낱 말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을 안심시킬 수 있는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사람들은 합의에 이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근본적 경향이 변한다거나 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성은 계약의 준수가 그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국가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 지상명령이 되며, 따라서 우리는 저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힘을 어떤 집단이나 한 사람에게 양도하게 된다. 홉스는 군주제를 선호했지만, 그러한 선호를 철저하게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양도한 힘을 갖고서 주권자는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라는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우리에게 의무가 강제되는 절차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모든 개인이 주권자가 하는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36쪽

<흄>

오로지 욕구와 감정만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어떤 욕구도 없는 단순한 지적 이해만으로 우리의 행위를 유발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원할 때 생기는 동기가 원인이 되어야만, 인간의 행위는 설명될 수 있다. 동기 없는 인간 행위가 가능할지라도, 그것이 합리적일 수는 없다. 자유의지가 신성한 것으로 정의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이성적 행위를 모델로 삼아서 행위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흄은 그러한 일체의 시도를 배격한다.-49-50쪽

"인간이란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이거나 집합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서로를 결합시키며, 상호운동을 하는 항구적인 유동상태에 있다." -53쪽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 -56쪽

이제 도덕은 인간에게 내려지는 명령이나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특성의 결과일 뿐이다. 흄에 있어서 도덕은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도덕은 인간 본성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58-59쪽

정의란 '인위적' 덕이며, 따라서 사회는 정의를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한다. 인간 본성의 허약함과 고약함에 관해 흄은 "인간은 그들이 치유할 수 없는 특성을 완화하는데 전력해야 한다"고 말한다.-59쪽

"인간의 선의나 자연의 재화를 충분히 증대시키면, 당신에게 정의란 무용해진다" 사회의 관습이 생기는 까닭은 정의와 재산 때문이다. 사회의 보존이 우리의 공동 이익이긴 해도,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운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임을 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60쪽

"인간은 그들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켜서,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곧바로 직접적 이익을 얻게 하고, 정의를 어기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일 뿐이다"-60쪽

<다윈>

도덕은 공감처럼 우리 본성의 일부인 욕구와 도덕적 감정에서 발생한다. 다윈은 우리의 '사회적 본능'이 '저급한' 충동과 충돌하는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말한다. "미래 세대를 바라보면, 사회적 본능이 점점 약화될 것이라는 공포감은 생기지 않ㅎ는다. 우리는 덕있는 습관이 점점 더 강해져서 유전적으로 고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래에 우리의 고급한 충동과 저급한 충동간의 갈등은 덜 격렬해질 것이며, 마침내 덕이 승리할 것이다." -79쪽

다윈은 도덕이 개인에게 이득이 될 수 없을지라도, 부족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싶어했다. 그는 말한다. "애국심, 성실, 복종, 용기, 공감을 상당한 수준까지 소유함으로써 언제나 타인을 도와주려 하고, 일반적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포함하는 부족은 다른 부족을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연도태가 될 것이다." -82쪽

<니체>

"엄밀히 말해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95쪽

우리가 이 '세계 내에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범주일 뿐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결부되어 있으며, 결저되어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말한다. "진리는 일조의 오류로서, 그것 없이는 어떤 종족의 삶은 영위될 수 없다" 그는 사상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정신'이나 이성, 사유나 의식, 정신, 의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쓸데없는 허구이다. '주체와 객체'의 문제도 없다." -98쪽

'이 세계'와 '이 세계에 관한 주장과 믿음'의 이원론은 결코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다면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떤 주장이나 믿음도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니힐리즘의 결론이다. 이제 일관된 니힐리스트는 오직 침묵할 뿐이다. 무엇인가를 주장하려면 사실과 사실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을 전제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진리에 대한 주장을 포함하고 있는 데 반해, 니힐리즘은 그 어떤 것에의 집착도 허용하지 않는다.-99-100쪽

"나는 현재의 태양, 현재의 대지, 현재의 독수리, 현재의 뱀과 함께 돌아가련다. 새로운 삶이라든가, 더 유복한 생활이라든가, 그와 유사한 삶은 필요없다. 나는 만물의 영원회귀를 다시 한번 가르치기 위해서, 가장 큰 일이든 가장 작은 일이든 지금과 똑같은 동일한 자아를 유지하는 삶으로 영원히 돌아가련다." -103쪽

삶이 현재와 같은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삶을 가치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느낌 때문에 기독교와 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정치적 차원에서든, 구원의 문제가 등장한다. 분명히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는 우리가 현재 신이 의도한 대로 살고 있지 못함을 암시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삶이 어떤 방향을 갖는다는 확신은 현재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만큼이나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원회귀에 관한 니체의 사상은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거부한다. 우리는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는 끝없이 반복되는 지루함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암울한 묘사로서 어떠한 처방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 의한 지배욕구를 옹호함으로써,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115쪽

<마르크스>

"(미래 공산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냥꾼이나 어부, 양치기, 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마음먹은 대로 오늘 이 일을 하고 내일 저 일을 하면서,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먹이는 일을, 저녁 식사 후에는 토론을 할 수 있다." -117쪽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117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벗어나서는 개인이 되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동물이다." -119쪽

우리는 우리가 처한 경제적 상황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그것을 변혁시키기를 바랄 수 있다.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들이 처한 여건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중요한 절차가 된다. 경제적 여건은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지만, 그것의 불가피성은 무엇이 그들에게 진정한 환경인가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분명히 환경이 인간을 만들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이 환경을 만든다'는 것도 믿었다. -121-122쪽

흄이 자원의 결핍과 선의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크스는 완전한 사회에서는 풍요와 이타성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128쪽

마르크스는 사회적 전통이나 개인적 습관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흄처럼 관습을 강조하지도 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습관적 행동에 의한 덕 있는 성품의 계발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 놓인 우리의 기본 시념과 성향이 특정한 경제체제의 작용에서 유래하낟고 믿기 때문에, 대규모의 혁명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133쪽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는 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소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잘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선견지명을 갖춘 혁명주의자는 지독한 이타주의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역할을 마르크스는 강조함으로써, 자기 충족적이며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서만 결단하는 원자론적 개인사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개인들이 어느 정도까지 필요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것인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 모델을 악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면적 혁명의 과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자이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압박과 억압의 기제를 수립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로 하여금 혁명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드는 내적 모순을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명은 내적 모순을 예정하고 있다.-136쪽

<프로이트>

"에고와 이드의 관계에서 에고는 말을 탄 사람과 같다. 그는 말의 넘치는 힘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141쪽

<플라톤>

"철학자들이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자가 되어야 국가는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165쪽

동일성의 절대적 기준은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해야 하며, 그러한 기준에 호소할 때에만 우리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잣대라도 똑같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도덕 기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의 모양이나 소리를 초월한 다른 세계로부터 나온다. 선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형상'의 이름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공통으로 갖는 그 무엇으로, 사물들은 모두 그 공통 성질을 나누어 갖고(분유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선 그 자체'란 우리의 일상 세계의 특징과는 구별되며, 분명한 것은 그것의 타당성이 인간 판단에 좌우되지 않는닫는 것이다. 다른 형상들처럼 그것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그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영향받지 않는다.-170-171쪽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 안의 최선의 것들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191쪽

"국가가 더 이상 국가가 아니면서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는데, 그 지점에서 국가는 여전히 존재하면서도 합창이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이 작은 공동체가 된다." -194쪽

"우리가 말하는 것이 인간이든 가정이든 가족이든, 그것이 완전히 계발되었을 때의 그 무엇을 우리는 그것의 본성이라고 부른다. 목적인과 목적은 최선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목적과 최선의 상태는 자기 충족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또 인간이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196쪽

개인은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연은 노동의 분화, 따라서 계급의 분화가 존재하는 정치 체제를 산출했다. 사회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는 신과 짐승 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려는 본능이 우리에겐 주입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언제나 함께 연합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197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아무 것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반복한다. 인간과 인간이 사는 공동체는 적절한 목적을 갖지만,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그들의 적절한 목적을 실현하는 경우에는 최상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이것이 사실임을 자주 입증하고 있다.-198쪽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식물과 동물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식물도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활동을 한다. 동물도 사물을 감각하고 그에 따라 활동한다. 그러나 이성을 소유하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인간의 기능은 이성을 따르거나 이성을 함축하는 영혼의 활동에 있다"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선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성과 도덕적 선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202-203쪽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해 주는 것은 욕구가 아니라 이성이다. 우리가 무엇을 욕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론적 접근 방식은 우리가 서로 다른 근본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인간 본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거역해서 행위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가 믿는 바에 따를면, 우리의 참된 본성에 따라 행위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국가의 기능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의 목적은 도덕적이어야 한다.-211쪽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와 관습을 강조함으로써, 자유분방한 개인주의의 범람을 피하려 했다. 법과 도덕에 대한 그의 강조는 그가 여전히 개인의 자유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국가론의 근거는 각 개인의 도덕적 책임에 있으며, 집단의 강제력에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을 결집시키는 바탕은 가족간의 자연스런 애정이며 국민들 간의 친애이다. 남은 대안이 전체주의적 통치, 아니면 타인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 간의 갈등상태뿐인 것처럼 보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력적인 중도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를 수천 명의 시민들로 구성된 그리스 도시국가의 맥락으로부터 수백만 명으로 구성된 근대국가로 옮겨 놓을 때 분명히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214쪽

<토마스 아퀴나스>

자유와 합리성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자유롭지 않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기 때문에 비난받을 수 없다. 이러한 유형의 문제에 대해, 특히 의지의 박약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아퀴나스가 제시하는 한 가지 답변은 습관, 성향, 정념은 이성에 의해 간접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229쪽

도덕과 법이 아퀴나스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 까닭은, 도덕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법은 도덕 기능의 하나이다. 법은 자연법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부당해질 수 있으며, 그것의 목적은 반드시 공동선이어야 한다. 아퀴나스는 법이 상이한 도덕적 관점들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 그 역시 현대 자유주의의 여러 양상들을 거부했다. 실제로 그는 법이란 사람들의 도덕적 충동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고 부도덕한 충동을 억누를 수 있도록 하는 규범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법적 제재의 위협이 필요한 젊은이들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길들여지면서, 그들은 과거에 두려움 때문에 하게 되었던 행위를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덕있는 사람이 된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을 강제하는 이러한 종류의 제재가 바로 법적 제재이다." –-234쪽

<비트겐슈타인>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하여야 한다." -243쪽

"신비로운 것은 사물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245쪽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실재와 관련시켜 그것을 기술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미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어와는 독립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언어에 우선성이 부여될 때, 개인의 사적 믿음과 객관적 세계는 서로 대비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갖는 공적 언어는 규범을 형성한다. 이 세계는 언어의 가능성에 의해 제한되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서의 우리의 개념은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우리의 사유방식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혹은 일정하게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250-251쪽

"의도는 상황 속에, 인간의 관습 속에 그리고 인간의 제도 속에 새겨져 있다." -251쪽

고통을 기술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고통은 가려움, 전기충격, 구역질, 여타의 불쾌한 감각과 구별되는 종류의 감각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한 개인에게만 인지되고, 그 개인의 사적 감각과 결부되는 사적 언어란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 중요한 사항은 그가 언어와 관련하여서만 일정한 개인적 경험을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질 수 없는 언어란 있을 수가 없음을 입증하려고 하였다.-253쪽

기억을 통해서 언제나 우리의 판단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의 고통이 지난 주에 겪은 고통과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기억을 통해서 그때의 고통을 기술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따. 그렇지만 여전히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는 개잉ㄴ의 내면 경험에 의존하는 정당화가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다른 믿음에 호소하여 내 마음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과정이, 기사의 내용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고 조간신문을 여러개 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적 대상에 대한 관념을 항상 제거하라. 즉 사적대상의 관념은 항상 변하지만, 당신의 기억이 항상 당신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없다고 전제하라."

우리는 우리의 사적 경험이 마치 공적 세계의 대상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듯이, 어떠한 기술이 정확하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오류가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없다면, 정확성과 오류도 구별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254-255쪽

그에게 세계란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파악되지 않고 그와 별개로 인식되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적 경험을 언어사용과 분리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사적 경험이 일차적으로 언어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경험은 말해짐으로써 공적 세계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으며, 개념적으로 나의 행태와 연관되게 된다. 사적 경험이 언어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언어의 규제를 받으면서 경험이 형성되는 것이다.-257-258쪽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이 동일한 개념을 공유한다면 그들의 판단은 일반적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때의 일치는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심각한 불일치가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개념을 사용할 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259쪽

"본능이 우선하며, 이성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 언어게임이 생길 때까지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263쪽

"나의 정체성이 어떤 형이상학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개입된 사회적 언어적 활동 때문이라면, 나는 나의 정체성을 언어로부터 추상할 수 없으며 언어적 범주의 도움 없이는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언어가 자아를 형성하며 실재를 결정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성을 초월하는 문제로 번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므로 언어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26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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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09 23:17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 책 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신경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_- 알아먹기 힘든 문장이 많아서요. 첫째 질문은 그렇게 해석하는게 더 맞는거 같고요 - 번역상의 문제라고 해야하나 - 두번째 질문은 솔직히 저도 문장과 맥락이 완전히 머리에 들어온건 아닙니다. 훑어보는 책으로 보고 넘겼어요. 원서는 -_- 휴. 영어가 안되는지라 읽으려면 매우 오래걸리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읽더라도 매우 중요한 일차서적에 한해서만 봐야겠죠. 이런 책은 그 정도의 정력을 투자하기에는...

아마도 홉스에게 있어 일차적인 자유란, '강제성의 부재' 상태가 일차적이라고 보고, 그런 점에서 '어떤 결단이나 선택을 행위로 옮기는 자유'를 일차적이지 않다고 본거 같습니다. '언덕 아래로 구르는 돌이 자유롭'다는 말은, 그런 구르는 돌에겐 강제가 부과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유한 듯 합니다. :)

비로그인 2007-08-0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많았는데, 날아가버리기도 했고..힘이 빠져서..

그러나 다음의 글은 마음에 드는군요.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 117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벗어나서는 개인이 되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동물이다."


마늘빵 2007-08-09 23:36   좋아요 0 | URL
유명한 말이죠. :) 둘 다 마르크스의 말인데, 뒤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한 말입니다. 그걸 일부러 인용을 하고 있는데, 결국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를 떠난 생산은 생각할 수 없고, 사회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비로그인 2007-08-0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하간 핵심정리 요약 리뷰 써주세요. 정말 인간본성에 대한 해석들이 궁금하단 말이예요.

마늘빵 2007-08-10 00:00   좋아요 0 | URL
헙. 리뷰는 좀 미뤄두고 있는데욤. 쓸지 안쓸지도 모르겠어요. 요새 계속 관련 책 '읽기만'하는 중이에요. 리뷰 못쓴지 넘 오래됐다. -_-

비로그인 2007-08-10 13:00   좋아요 0 | URL
저도 리뷰 잘안쓰는데..안쓰면 잊어버리더라구요. 요즘 안그래도 진짜 이카테고리처럼 형광펜을 들고 긋고있어요

비로그인 2007-08-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홉스: 그러나 그는 낯설은 사람을 돕는 행위에 대해서는 좀더 회의적이었으며, 그러한 행위란 '우정을 구매하려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공포감에서 유발된 '평화를 구매하려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 참 마음에 안드는 아저씨네. ^^;;; [리바이던]의 저자군요. 아부지 서재에 꽂혀있는데, 읽을 가능성이 이제 더 낮아졌어요 ㅡ.,ㅡ

마늘빵 2007-08-10 13:07   좋아요 0 | URL
크크크. 홉스 재밌어요. 알고보면. 나름 일관된 논지를 펼치고. 요새 논술이다뭐다해서 쉽게 다시 쓴 <리바이어던> 같은 책들이 나와있더라고요.

비로그인 2007-08-10 13:36   좋아요 0 | URL
한사람의 이론이나 생각이 일관적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찌하면 정말, 그 뭐라고 그러죠? 하나에만 목을 맨 똘아이 (^^;;;)를 뭐라고 표현하드라?가 되겠지만, 여하간 서로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건 대단한거죠

마늘빵 2007-08-10 18:43   좋아요 0 | URL
삶에 있어서 자기모순을 점차 제거해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저보고 자기모순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학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부분 저도 공감합니다. 하물며 사회, 정치, 국가를 논했던 홉스같은 철학자야말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득시키려면 자기모순부터 제거해야했겠죠.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자기모순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흄: "인간은 그들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켜서,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곧바로 직접적 이익을 얻게 하고, 정의를 어기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일 뿐이다" ==> 가장 냉철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네요. 하지만,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수긍하기가 어렵네요

마늘빵 2007-08-10 13:09   좋아요 0 | URL
흄에게 있어서 기본은 "오로지 욕구와 감정만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어떤 욕구도 없는 단순한 지적 이해만으로 우리의 행위를 유발시킬 수는 없다."이기 때문에, 내 손가락의 상처가 당장 아프니까,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장 아픈 내 손가락을 돌보는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죠. 하핫. 흄도 나름 재밌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윈 : "미래 세대를 바라보면, 사회적 본능이 점점 약화될 것이라는 공포감은 생기지 않ㅎ는다. 우리는 덕있는 습관이 점점 더 강해져서 유전적으로 고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래에 우리의 고급한 충동과 저급한 충동간의 갈등은 덜 격렬해질 것이며, 마침내 덕이 승리할 것이다."

==>과연 유전자가 이를 기억할지는 의문이 되는데요. 여하간, 무척이나 긍정적인 분이셨군요. 전 사회적 본능, 타인배려에 대한 것이 점점 희미해져간다고 생각하는데요.

언제나 타인을 도와주려 하고, 일반적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포함하는 부족은 다른 부족을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연도태가 될 것이다

==> 이건 당최 이해가 안가는 걸요? 도와주고 희생하는 쪽이 지배를 하니까, 누가 자연도태가 된다는 건가요? ^^;;

마늘빵 2007-08-10 18:40   좋아요 0 | URL
너무 낙관적인 견해죠? -_- 다윈이 죽은지 오래인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결국 덕있는 습관을 유전적으로 고정시킨 부족이 그렇지 않은 부족을 '자연에서' 지배하고 압도한다는 말인데, 그다지...

비로그인 2007-08-1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 부분은 어려워요. 결국 이거 번역 너무 엉망인거 같아요. 뭐 전공자들은 뭔얘기인지 알고 넘어가겠지만 말이죠.

"나는 현재의 태양, 현재의 대지, 현재의 독수리, 현재의 뱀과 함께 돌아가련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니체는 힘 (power)를 좋아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인용한 것들이 강한 것들이니까요.

마늘빵 2007-08-10 19:49   좋아요 0 | URL
크크. 이게 일부분을 툭 잘라서 밑줄긋기를 해놔서 그럴거에요. 전후 문맥을 보면 쉬울텐데. 그렇다고 제가 다 쳐서 올릴 수도 없고. :) 크크크.

이건 고대 페르시아의 창시자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의 말을 인용한건데요, 이 책엔 니힐리즘에 대한 니체의 답변을 나타낸 대목이라고 써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긍정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게 된다고" 생각했으며 "삶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의미나 목적도 없으며, 더욱이 종착점도 없이 불가피하게 반복되는, 지극히 가공스러운 상태, 즉 '영원회귀'라는 것을 생각해보자."면서, 결국 해방이니 구원도 없고, 진보도 죄의식도 후회도 없고, 에라 "지금과 똑같은 동일한 자아를 유지하는 삶으로 영원히 돌아가련다"고 말합니다. :)

뱀이나, 독수리, 대지, 태양 등을 끄집어 낸건 글쎄요, 저도 함부로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 니체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는데. 대자연의 만물을 지칭하는 명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 "미래 공산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냥꾼이나 어부, 양치기, 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마음먹은 대로 오늘 이 일을 하고 내일 저 일을 하면서,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먹이는 일을, 저녁 식사 후에는 토론을 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제시한 공산주의는 환타스틱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더 깊숙한 인식이 없고서는 어떤 이즘이 성공적으로 실현된다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요. 과연 인간의 소유욕이나 집착 등 그런 부정적인 것들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실현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 놓인 우리의 기본 시념과 성향이 특정한 경제체제의 작용에서 유래하낟고 믿기 때문에, 대규모의 혁명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이것도 이상적인 생각인거 같네요.

"흄이 자원의 결핍과 선의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크스는 완전한 사회에서는 풍요와 이타성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 완전한 사회란 어떤건지, 공산주의 모델이 성공한 사회란 거 같은데.. 전체가 풍요롭지 않고 전체가 모두 가난하다면, 전체의 파이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인간본성을 잘못 전제하고 있다면 후자가 될터인데...


마늘빵 2007-08-10 19:53   좋아요 0 | URL
요 대목들만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상향은 대략 짐작이 되는데, 실현 방법이 안나와있죠. 이상적인 세계를 상정해놓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건 여기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인간본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고, 어떤 관점들을 가지고 접근했느냐를 보기 때문에. 결국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게, 그는 '자아실현'인데, '자유'와 '노동'을 '개인의 자아실현'에 일치시키려고 했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스스로가 자유롭다 느끼고, 그것이 자아실현으로 이어지는.

비로그인 2007-08-10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 : 에고(ego)는 'me'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 건가요? 말을 제어하기는 커녕, 사람들은 다 미미미미거리는데..

마늘빵 2007-08-10 19:54   좋아요 0 | URL
아 이런건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_-a

비로그인 2007-08-10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무지 많아서 조금 귀찮으시죠? ^^;;; 근데 너무나도 흥미로운 얘기인데다 모르는게 많아서...

마늘빵 2007-08-10 19:54   좋아요 0 | URL
크크크. 밑줄그어진것만 보면 앞뒤 맥락이 빠져서 이해하기 힘들텐데, 책을 보심이 어떨까요.

비로그인 2007-08-10 20:52   좋아요 0 | URL
네.

마늘빵 2007-08-10 20:59   좋아요 0 | URL
하하핫. 귀찮아서 그런게 아니구요. 물어보시면 저도 한번 더 확인해서 도움은 되는데, 제가 잘 몰라서. -_-a

비로그인 2007-08-13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참 마음에 드네요 ^^

=>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식물과 동물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식물도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활동을 한다. 동물도 사물을 감각하고 그에 따라 활동한다. 그러나 이성을 소유하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인간의 기능은 이성을 따르거나 이성을 함축하는 영혼의 활동에 있다"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선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성과 도덕적 선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 안의 최선의 것들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마늘빵 2007-08-13 22:41   좋아요 0 | URL
^^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이 마음에 드는건, 우리의 상식과 부합하는 내용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비로그인 2007-08-13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해 주는 것은 욕구가 아니라 이성이다. 우리가 무엇을 욕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론적 접근 방식은 우리가 서로 다른 근본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인간 본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거역해서 행위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가 믿는 바에 따를면, 우리의 참된 본성에 따라 행위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국가의 기능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의 목적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 여기서 국가라는 데에 좀 꺄우뚱하지만 말이죠

마늘빵 2007-08-13 22:43   좋아요 0 | URL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교되곤 하는데, 둘 다 어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은 무엇인가, 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고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억울하게 죽어버린 이후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 체제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또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배우면서도 플라톤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더랬죠. 인간의 본성은 결국 국가의 기능이나 역할로까지 확대되며 논의됩니다.

비로그인 2007-08-1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비트겐슈타인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사실 예전에 칸트돠 비트겐슈타인을 들춰본 적은 있는데 그때도 그랬는데. 아, 이 참을 수 없는 알고픔 때문에 그래24의 철학강의 신청할 거예요.

마늘빵 2007-08-13 23:08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은 저도 간접적으로라도 접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책 읽다가 중간중간 나오면 그때나 조금 읽어보고 그랬어요. <서양철학사> 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은 다루지 않아요. 아무래도 근래의 철학자이고 하다보니. 이 사람 맛보기로 조금 접해본 바로는 매우 끌립니다. :)

사실상 자신으로서 철학을 끝내려고 했는데, 그게 안되죠. 철학이란건 언제나 기존의 것에 대한 반박과 또 반박 또 반박이 계속 이루어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위에 나온 부분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어떤 한 개인의 경험이란 것은 몸으로 직접 부딪힘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바를 '언어'를 통해서 재생시킬 때 비로소 경험이 된다는 것이죠.

비로그인 2007-08-13 22:51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건 언제나 기존의 것에 대한 반박과 또 반박 또 반박이 계속 이루어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이란 말 참으로 마음에 드네요.

비로그인 2007-08-13 22:52   좋아요 0 | URL
"어떤 한 개인의 경험이란 것은 몸으로 직접 부딪힘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바를 '언어'를 통해서 재생시킬 때 비로소 경험이 된다는 것이죠."==> 이건 좀 생각해볼래요.

마늘빵 2007-08-13 23:07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