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론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 한길사 / 2001년 9월
구판절판


<인간 정신의 자유에 대한 옹호> (송기형, 임미경)

우리에게 법을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인 고대 로마인들은 불관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들을 박해한 것은 단지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였다. 당시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도들은 사회를 교란하는 불순세력이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도들도 신앙에 앞서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법과 관습을 존중해야 할 의무는 있지 않았던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무엇을 믿거나 믿지 말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의 신념의 자율적 행사는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17쪽

"종교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은 후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세에 행복한 삶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세의 삶을, 우리 인간의 비뚤어진 본성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행복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을 알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볼테르) -18쪽

이성이 진정 그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효율성과 합리화와 더불어 관용의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20-21쪽

관용(tolerantia)이란 소극적 인정과 방임을 넘어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21쪽

내가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또한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 안에서도 가능한 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권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관용은 어떤 인간도 결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에, 모든 사람은 자기 관점에 얽매일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21-22쪽

<관용론 본문>

그러나 어쨌든 그들이 하나의 신을 정신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섬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의 종교에 대해 격렬하게 맞섰던 이상, 그 종교가 아무리 어리석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부정한 것이다. -98쪽

"종교에서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각자가 자신이 섬길 신을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강요된 복종을 달가워할 인간이 없듯이, 그 어떤 신도 강요된 숭배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 <호교서>, 24장) -167쪽

"강요된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설득해야 한다. 신앙은 명령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락탄티우스, 제3권)-167-168쪽

우리가 지켜야 할 교리가 적을수록 논쟁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논쟁이 줄어들면 그만큼 참화를 겪을 일도 없어질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종교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은 후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세에 행복한 삶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세의 삶을, 우리 인간의 비뚤어진 본성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행복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을 알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욕심일 것이다. 한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정신을 예속시키고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력으로 세계를 굴복시키는 편이 훨씬 쉬우리라.
-201쪽

결국 이 거룩한 작가(옮긴이 주 : 말보 신부. 볼테르의 <관용론>이 나올 당시 정반대의 의견을 피력한 <종교적 불관용에 대한 신앙과 인도적 정신의 일치>라는 책이 나왔다)는 불관용이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 이유란 "예수 그리스도가 불관용을 명시적으로 비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파리 온사방에 불을 지른 자들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로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 방화자들을 칭찬할 이유가 된다는 말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편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온유하고 자비로운 목소리로 관용을 설득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본성의 적인 광신이 광포하게 포효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들이 평화를 밎아할 때마다 불관용이 그것을 무너뜨릴 자신의 무기를 벼리고 있는 것이다. 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자들이여, 당신들은 유럽에 평화를 가져왔으니 이제는 다음의 문제를 결정할 때요, 평화와 화합의 정신과 불화와 증오의 정신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지 말이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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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칼국수.. 아니 장 칼라스 사건에서 볼테르에게 반했죠.

마늘빵 2007-09-18 16:57   좋아요 0 | URL
오홋, 테츠님 아시는군요. 아니 어떻게 사건 이름까지. 저도 이 책 2001년에 읽고 다시 읽은건데 확 반해버렸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로크가 쓴 관용에 관한 책이 있는데 이건 번역이 안되었나보더군요. <에밀>이나 <통치론>, <시민정부론>은 있는데...

비로그인 2007-09-18 20:17   좋아요 0 | URL
칼라스 사건과 관련해서 또 하나 중요한 저작이 있는데 (아마 아실테지만)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추천입니다. 요 사건때문에 썼다고 하는데. 사형폐지론의 고전이죠..줄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마늘빵 2007-09-18 20:23   좋아요 0 | URL
테츠님은 아는 것도 많으셔. 이건 몰랐던거에요. 찾아볼게요. 땡큐 :)

가넷 2007-09-1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라고 하면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을 받은 책이란게 아닌가요? 항상 볼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지원받은 책이 왜 저렇게 비싸 싶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살까 싶었는데 비싸기가 엄청...;ㅁ;

마늘빵 2007-09-18 21:08   좋아요 0 | URL
음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역자가 생활비를 받고서 번역작업을 하는게 아닐까요. 책값엔 그게 반영되진 않을듯. 덕분에 첨 듣는 책 한번 검색해서 구경해봤습니다. :)

2007-09-19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9-19 09:56   좋아요 0 | URL
장 칼라스 사건은 볼테르가 살던 당시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인데, 당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대립하던 시절 - 카톨릭의 우세 - 카톨릭 교도가 아니면 변호사 시험을 칠 수 없게 되어있었고, 장 칼라스 씨의 아들 중 하나가 변호사 시험을 치려하는데 종교의 제약으로 막히자 고민 끝에 자살한 사건이었어요. 근데 동네 카톨릭 교도 주민들 중 하나가 "개종을 하려하자 죽인거다!"라고 소리쳐서 장 칼라스씨와 그의 아들, 하녀, 엄마, 놀러온 아들의 친구를 살인범으로 몰아 결국 장 칼라스씨가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볼테르가 나중에 이 사건을 알고는 문제제기를 했고, 사건 딱 3년 뒤에 무죄판결이 났고 국왕이 보상금까지 쥐어줬답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사지를 찢겨 죽었고, 가족은 이미 뭉개질대로 뭉개진 상태였죠.

로크의 관용론에 관한 책은 번역이 안되었어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답니다. 그의 관용론이 언급된 책으로는 홍세화 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 라는 책이 있고, 한남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가 쓴 <관용과 열린사회>를 참조하시면 돼요.

지금 논문 관련해서 살짝 엿보고 있는 중인데 -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 아직 구체적으로는 모르고요, 간단히만 말하자면, 종교의 관념적 진리의 '불확실성'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다른 견해에 대해서 관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관념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불확실하다면 우리의 견해가 아닌 다른 견해가 진리일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곧 타자의 견해가 명백히 틀린 것으로 밝힐 수 없는 한, 그 견해를 탄압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제가 읽은 논문의 한 부분에 따르면,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 <관용에 관한 편지>에 보면 "그 문제에 대한 판단은 오직 모든 인간의 최고 주재자이신 하느님에 속한 것이고, 그에게만 그릇된 자의 처벌권도 속한다"라고 했답니다.

볼테르의 관용과 어떻게 다른지는 저로서는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생각을 물으신다면, 볼테르의 그것과 로크의 그것은 큰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볼테르는 철학으로서 관용을 대했다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삶의 태도로서 넓게 말한거 같고, 그의 <관용론>에도 철학적 분석이나 해석 작업보다는 장 칼라스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한 고전으로부터의 인용과 장문의 편지와 같은 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로크의 책은 안봐서 모르겠고요. -_-
 
방문자 숫자와 블로그 메타 사이트
나의 레종 데트르


  로쟈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든 생각. 현재 즐찾이 1300까지 늘어났다시면서 앞으로 몇백이 더 늘어나면 스스로 떠나야하지 않을까 생각하시는 듯 하다. 한쪽으로 쏠리는건 바람직하지 않다시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떠나는게 좋을거라고. -_- 해서 로쟈님의 페이퍼에 댓글을 달다가 즐찾이 뭘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개인적으로 로쟈님이 떠나시는건 원치 않는다. 떠나고 말고야 로쟈님의 선택이지만, 지금 떠나시겠다는 것도 아니지만, 성실하게 꾸준히 업데이트하시는 페이퍼 보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기에)

  알라딘 내에 즐찾 1000명이 넘는 분은 몇 안되신다. 바람구두님과 로쟈님 뿐인걸로 알고 있는데 - 혹시 또 계신가요 - 즐찾이 많다고 하여 인기서재인 것도 아니고, 즐찾이 어떤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즐찾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처음에 100명 넘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고, 200명 넘고, 300명 넘고 하면 더 많은 숫자를 위해 욕심을 부리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저 이번에 200명 넘었어요" 라는 장난스런 자랑과 기분 좋음 정도가 '즐찾 200'의, '즐찾 300'의 전부가 아닐까. 이게 어떤 문제가 된다면 즐찾표기를 지워버리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면 인터넷 상에서 어떤 쇼핑몰을 즐찾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어지니. 현재 다른 사이트를 즐찾하는 것과 차이점은 주인장이 자신을 즐찾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즐찾이 10인 사람과 즐찾이 500인 사람이 글을 썼을 때, 해당 글이 브리핑되는 숫자는 즐찾의 숫자와 동일하고, 그만큼 글 하나를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단지 좀 더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다는 의미. (댓글이 많이 달리고 적게 달리고 여부는 즐찾의 숫자보다는 글이 재미와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댓글이 얼마나 달리냐에도 사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아예 안달리면 서운하겠지만. -_-) 서재 2.0 개편 이후 페이퍼 창 아래에 '블로그 메타사이트' 라는 항목이 만들어졌는데, 더 많은 분들이 자신의 글을 보길 원한다면 즐찾 숫자를 늘리려 하지 말고, 브이자 체크 한 번 해주면 된다. 그럼 체크를 한 즐찾 10인 사람이 체크를 하지 않은 즐찾 500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줄 수 있다.

  알라딘 내에서 즐찾은 지극히 협소한 공간 내에서의 개념이고, 체크 한번에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에게 글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으니 우리는 즐찾에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서재 1.0에서 즐찾은 자랑거리 일지 모르지만, 2.0에서는 더 이상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알라딘 내의 즐찾과 대상을 알 수 없는 트랙백의 불특정 다수를 모두 고려해봤을 때도 즐찾 천명은 엄청난 숫자이긴 하다. 트랙백을 보내지 않는다고 해도 천명은 대단한 숫자이건 분명하고, 또 그것이 메타사이트를 향한 트랙백의 '불특정' 다수와 달리 '특정' 다수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서재 1.0 때 만큼이나 서재 2.0의 현재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로쟈님의 경우엔 외부에 원고를 쓰시고 거기에 알라딘 주소를 공개해놓으신지라 외부 연재글을 보고 알라딘에 계정이 없는 분들까지 계정을 만들어 들어와 즐찾'만' 해놓으신 분들도 다수 있으리라 본다. 사실 로쟈님 페이퍼 많이써도 댓글수는 나만 못하다. -_-v 자랑질이 아니고(크흣) 로쟈님께서 그만큼 즐찾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셨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로쟈님의 즐찾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것은 외부에서 글을 보고 들어와 즐찾해놓으신 분들 때문인데, 즐찾 숫자가 공개되어있다고 해서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개념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강준만의 선샤인뉴스 사이트가 새로 생겼는데 인터넷 상에서 이걸 즐찾해놓으신 분들이 몇명인지 강준만이나 선샤인뉴스측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공개되어있지 않다고, 알 수 없다고 하여 그 숫자가 미미한 것은 아니며, 적어도 강준만과 선샤인뉴스의 존재를 알고 있는 분들은, 그에게 관심있는 분들은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즐찾을 해놓았을테고, 그 숫자 또한 엄청나리라 본다. 로쟈님의 즐찾이 늘어나는 것도 외부에 로쟈님이 글을 쓰시고, 이 글이 읽혀지면서 더 많은 글을 읽겠다는 분들의 방문이 잦아지고, 그것이 '즐찾 1명 추가'로 드러나는 것인데, 여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이곳에 서재를 개설하고 처음 오프모임에 나갔을 때 H님과 M님, 또다른 M님 세 분을 만났던거 같은데, 당시에 지금은 미묘하게 이곳과 거리를 두고 있는 M님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농담삼아) 즐찾 100 안넘으면 우리는 끼워주지도 않아" 이런 비슷한 말이었는데, 장난스런 자랑질 멘트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즐찾 한 명 늘어나면 기분 살짝 좋고, 즐찾 한 명 떨어져나가면 기분 살짝 상하는게 당연하기도 하지만, 즐찾 50과 즐찾 500 이란 숫자놀음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블로그에서 꾸준히 글쓰고, 컨셉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거고, 자주 글을 올리지 않거나 댓글 차단해놓는 분은 혼자만의 공간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찾아가지 않는 것일 뿐. 혹시나 로쟈님 떠날까 두려워 한 마디 했습니다. :) 왠지 짝사랑 고백한 느낌인걸. -_-



 p.s.  그 많던 블로거들은 어디로 갔는가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전에 좋은 글 많이 쓰시던 분들이 돌아와 다시 글을 올리셨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서재 1.0 과 서재 2.0 의 개편 사이에 다른 곳으로 옮기신 분들도 많은 듯 하고, 이미 서재 개편 이전부터 중단하신 분들도 많은데, 더 많은 분들의 더 많은 좋은 글을 보고픈 욕심이 있다. 이곳에서 서재활동한지 2년반 정도 된거 같은데 - 하이드님 보다 꽤 늦게 활동시작했으니(하이드님 얼마나 되셨나요?) - 그간 이곳에서 밖에서 접하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많이 했다. 글을 읽다보면 이 분은 뭐하시는 분일까,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고, 그래서 실제로 만나보기도 했다. 조용히 글만 쓰시는 분들도 많아 조심스러웠지만, 조용히 있고 빨빨 거리고 여기저기 기웃대며 돌아다니는건 개인적인 성향이니 그를 탓할 것도 나를 탓할 것도 없고, 좋은 글 올라오면 찾아가서 글 읽고 아니면 나 혼자 또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며 놀고 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달까.

  일일히 닉네임 거론하기는 뭣하다. 얼마전 내가 즐찾한 사람들이 누가 있나 둘러보다가 활동 중단 하신 분들이 많다는걸 알았고, 그 분들의 글이 그리워지긴 했지만, 활동을 하고말고는 본인의 마음이니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다. 다만 그 분들이, 그 분들의 글이 그리울 뿐이다. 또 새로 활동 시작  하신지 얼마 안되시는 분들을 접하고 배워나가는 것도 재미다. 글에는 그 사람의 성격과 취향이 짙에 배어나고, 사람들마다 각자 모두 다양한 만큼 글쓰는 방식도 글의 내용도 책을 고르는 취향도 가지각색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은 배우고, 또 누군가는 나에게 배워나가고 그런게 서재 꾸리는 재미 아니겠는가. 나는 이곳에서 누군가로부터는 열정을 배웠고, 누군가로부터는 따뜻한 감성을 배웠고, 누군가로부터는 비판의식을, 누군가로부터는 인간다움을 배웠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은 '배웠다'기보다는 '접했다'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예전 분들은 돌아오고, 새로운 분들은 계속 들어와 활동함으로써, 서로 배워나갔으면 합니다. 그냥 즐찾 몇 되지도 않는 '검정하양후추통'의 개인적인 바람이었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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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7-09-1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정하양후추통..
누가 아프고 누가 사스에요?
그래서 아프랑사스 맞죠? :)

마늘빵 2007-09-15 11:18   좋아요 0 | URL
-_- '락'은 어디로 갔어요. 검정이가 '사스'에 걸려 '아프'니 하양이가 껴안아주고 있어요.

로쟈 2007-09-1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공연히 아침부터 아프님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네요.^^; '민주주의'를 이유로 댔지만, 사실 예전보다 많이 알려진 탓에 제가 하고 싶은 말도 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말의 수위도 조절해야 하고, 책에 관한 어떤 정보들은 그냥 혼자 알고 있어야 하고. 그래서 '로쟈'가 아닌 다른 '가면의 생'을 얼마전부터 꿈꾸고 있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마늘빵 2007-09-15 11:20   좋아요 0 | URL
하하. 아니에요. 전 이렇게 갑자기 멈춰서 문득 뭔가를 생각하는걸 좋아합니다. 많이 알려지는 만큼 말이 조심스러운건 어쩔 수 없겠죠. 그치만 여러 사람들을 '모두' 충족시켜줄 순 없을거에요. 그냥 로쟈님 하시던대로 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결정은 로쟈님 몫이지만. ^^

전자인간 2007-09-1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 시작(2003년 초)과 함께 했지만, 아직도 즐찾 40명/하루 방문객 30명도 못 채우는 서재도 있는 반면(제 서잽니다. ^^), 시작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하루 방문객 수백을 넘는 대박 서재도 있지요. 뭐 개인적으로야, 제 지난 글에서도 쓴 것처럼, 이건 서재 또는 블로그의 자본주의적 속성이라고 생각하고, 자본주의적 삶이란 것이 다 그런것이다.. 라고 편히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로쟈님 같이 그런 '블로그 거대자본'의 축적이 부담스러우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마늘빵 2007-09-15 11:29   좋아요 0 | URL
엇, 전자인간님 저보다 오래되셨군요. 크크. 얼만큼 블로그에 열정을 기울이고, 시간투자를 하며 페이퍼를 쓰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거겠죠. 내용물도 상관이 있을테고요. (그렇다고 전자인간님이 열정이 없다거나 그런건 아니고 크크) 서재마다 컨셉이 다 다르고, 어떤 컨셉은 특히 많은 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금방 즐찾이 늘어나는 것일테고.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자본주의를 배척할 순 없겠죠. 일정 부분 받아들일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건 비판하고. 즐찾이 많다하여 어떤 부정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닌데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지 않을까 합니다.

전자인간 2007-09-15 11:41   좋아요 0 | URL
변명같지만, 제 서재꼴(?)이 그런 가장 큰 이유는 별로 열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간투자 여력도 많지 않았고요. 다시 제 블로그 히스토리를 봤더니, 2004년은 아예 게시물이 없더군요. ^^;;
요즘에 서재에 다시 재미를 붙여서 서재질을 많이 하는 편인데, 역시나 느끼는 것은 직장인/아빠로서 대박 블로그를 만들기는 정말 어렵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바람구두님, 딸기님 등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죠!

마노아 2007-09-1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장문의 글을 읽고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저 이미지가 후추통이었단 말입니까?(갑자기 버럭!)

마늘빵 2007-09-15 11:24   좋아요 0 | URL
후추통이에요. -_- 저도 처음엔 모르고 이뻐서 썼는데, 서재활동 초창기에 누군가 알려주셨어요. 저어기 흰놈 눈 두개 뚫린거 보이시죠? 거기로 후추가 사사삭. 검은놈은 안보이지만 저 놈도 눈 두개 있겠죠. :)

부리 2007-09-1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마태한테서 열정을, 저한테서는 비판의식을 배우지 않으셨나요?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흠흠.

마늘빵 2007-09-15 17:12   좋아요 0 | URL
부리님한테는 춤을 배우고 싶고, 마태님한테는 승마실력을 배우고파요. :p

Kitty 2007-09-15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프님 서재 이미지(소금후추통 ㅋㅋ) 보고 바로 즐찾했어요 ^^
그러고 보니 그것도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저야 예전에도 지금도 열심히 업데이트하는 서재인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와보니 많이 글 올리시던 분들이 소원하셔서 안타까워요.
특히 ㅅㅂㅂ님이랑 ㅍㄹㅈ님 보고싶다는 ㅠㅠㅠ

마늘빵 2007-09-15 17:13   좋아요 0 | URL
저는 서재개편 이후 분위기를 좀 바꿨죠. 메뉴도 그렇고. 초창기 아프락사스 분위기와 현재의 아프락사스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어요. 근데 그 분들은 닉네임이 예상이 안된다는... 누구죠.

하이드 2007-09-1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콕 찍힌 하이드는 2년반인 아프님보다 꽤 일찍 활동 시작하여, 3년이요 -_-; 전 아프님이 더 오래 되었는 줄 알았어요. 제 즐찾은 600정도 됩니다. 물론 전 외부 즐찾도 많지만요. 방문자수는 20만을 앞두고 있지요. 마태님도 즐찾 천 넘으셨을꺼에요.

마늘빵 2007-09-15 17:15   좋아요 0 | URL
외부 즐찾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_-a 외부에 주소를 노출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건가... 제 즐찾은 다른 분들에 비하면 많고 하이드님에 비하면 턱없이 떨어지죠. 크크. 맨 처음 봤을 때 저는 홀로였고, 하이드님과 다른 분들은 좀 되신거였으니 저보다 하이드님이 오래됐죠. 근데 개설날짜를 따지면 모르겠어요. 개설해놓고 활동은 안하기도 해서.

하이드 2007-09-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워낙 활동하는 사람 수도 방문하는 사람 수도 타블로그에 비해 아주아주아주아주 적은 편인데, 그렇게 생각하시나니, 아프님 귀여우시군요.

마늘빵 2007-09-15 17:17   좋아요 0 | URL
그쵸. 아주아주아주 아주아주아주 적죠. -_- 네이버와 다음 같은 곳이 도쿄 수준이라면, 여긴 한국의 산골동네마을 수준. 근데 즐찾수치는 여기 밖에 공개 안되잖아요. 공개여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는거 같아서 생각해봤답니다. :) 제가 좀 귀'없'나요? ㅋㅋㅋ

Mephistopheles 2007-09-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수고스러울진 몰라도 로쟈님의 서재에선 즐찾을 빼야 겠군요.

마늘빵 2007-09-15 17:18   좋아요 0 | URL
아 그 정도까지... 크크. 이 페이퍼가 로쟈님 즐찾 빼기 운동의 시작인건가요?
-_-;;;;

비로그인 2007-09-1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그만둔다해도 아프님 신경도 안 쓸거같아 쳇- :b

소리소문없이 사라질테니 두고보슈~

마늘빵 2007-09-15 17:18   좋아요 0 | URL
-_- 왜 삐졌어. 체셔냥씨.

비로그인 2007-09-15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찾 나 보다 쪼금 많네 ㅎㅎ

마늘빵 2007-09-15 17:18   좋아요 0 | URL
이런 발칙한 테츠님!! 테츠님 얼마 안되는 즐찾을 빼버릴까부다. 크크크크.

프레이야 2007-09-1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외부즐찾은 없을 것이고 여기 즐찾만 있다고 보면 행복한 숫자에요.
그저 감사하죠. 그이상의 의미야 뭐 있나요? ㅎㅎ
즐찾수가 일정 수 이상된다고 닫으실 필요야 있을까요.. (물론 본인마음이지만요)
아프님의 바람(wish)이 제 바람이에요.

마늘빵 2007-09-15 17:47   좋아요 0 | URL
제 바람(wish)이 혜경님의 바람(wind)은 아니고요? =333
왜 자꾸 장난치고 싶지. 크크.
전 혜경님의 대략적인 즐찾수를 알아요. 어디서 본거 같은데 공개하셨나요?

프레이야 2007-09-15 22:18   좋아요 0 | URL
아, 얼마전 ***번째님 공개수배했다지요? 지금은 42명 더 늘었네요.
고맙죠... 아프님의 wish는 저의 wind ~~~ ㅋㅋ
아~ 비오는 9월의 해거름, 바람이고파~~~

누에 2007-09-1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시스님 즐찾추가하고 로쟈님 즐찾빼야겠습니다. (빼는거 귀찮아서 포기) ^^; 로쟈님의 우려 공감합니다. 사람들이 방문하는 길이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일단걸어놓고..' 즐찾이 많아지고 그건 서재지기에게 굉장한 압박이 될거라 생각해요.
알라딘 서재 재밌는 곳이에요. 그런데 망할거 같아 불안해요. ^^;

마늘빵 2007-09-16 11:25   좋아요 0 | URL
네. 재밌는 곳이에요. :) 로쟈님 걱정은 이해하지만... -_ㅜ

비로그인 2007-09-17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정하양 후추통'...'검정하양 후추통'....그랬군요.
아프님은 세상의 맛깔스런 양념이 되고 싶은거야.
처음에, '흑과 백의 포옹'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히죽 웃었었는데 말이죠.(웃음)

마늘빵 2007-09-17 17:55   좋아요 0 | URL
아, 어쩜 둘 다 이리도 해석이 멋있을 수 있어요?
와...

비로그인 2007-09-17 18:33   좋아요 0 | URL
헉....기억 못하는 것인가,정녕 !!
ㅡ.,ㅡ^....

'흑과 백의 포옹'이란 말은 내가 처음에도 해주었잖아욧!!
그래서 좋다고 아프님이 반응까지 보여놓고는 !! =_=

마늘빵 2007-09-17 22:37   좋아요 0 | URL
엇, 아녀 기억하는데. 그래서 새로운 해석도 멋있다고. 크크.

비로그인 2007-09-18 09: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_=
그러니까 아프님의 댓글에는 시제가 빠져 있어서 헷갈렸단 말이죠~
ㅡ . , ㅡ
 
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구판절판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가 '용납'보다 소극적인 표현인 것은 사실이나 관용 개념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극적 표현이 보다 유용할 것이다. 부정(반대)하면서 동시에 긍정(용납)하는 관용의 공식에서 생길 수 있는 모순과 역설적인 느낌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용납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서 용납이라는 말 대신에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로 대체하는 것이 적절하다.
-26쪽

반대하는 것(대상)에 대해 부정적인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용납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해 반대, 저항 같은 부정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용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용납은 '복종', '강제적 시인', '묵인'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관용 이외의 유사한 개념들로부터 관용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일을 곤란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관용은 본래 자발적 행위 또는 자유와 관련되어 있는데 복종, 강제적 시인, 묵인은 자유의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허가나 허용은 권리 개념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자유의 확대라는 관용의 기능과 어울리지 않으며 관용이 상호 교환적 행위임에 비해 일방적이다. 따라서 관용을 정의할 때 외연의 양이 많은 용납보단느 내포의 양이 증가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택하는 것이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다.-26-27쪽

관용되는 것에 대해 우선적으로 내려지는 부정적 평가(반대)는 개인의 존재론적 결점 같은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불충분한 정보의 제공, 통치 집단에 의한 이데올로기적인 조종, 사회적 관습 같은 외부적인 요인들 때문에도 생겨난다. 실제로 사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ㅇ가하는 일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물, 이념, 가치 체계들에 대해 불편부당하기란 곤란하거나 불가능하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리거나 그것에 대해 전면적인 거부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30-31쪽

"도덕적으로 말해서 관용은 보다 많은 도덕적 자각을 제공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우리의 도덕적 공감을 확대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관용은, 인간을 목적으로서 그리고 존엄성과 고유한 가치를 지닌 합리적 존재로서 간주하도록 명령하는 칸트의 정언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토마스 헌) -37쪽

... 관용과 불관용의 문제가 발생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의견, 행위 또는 행위가 예상되는 신념들이 동시에 주장되어야 한다. 충돌이 없이 서로 다른 의견을 단지 개진하는 한 관용과 불관용의 선택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둘째,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다르고 이해 관계도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다른 의견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동시에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제거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57쪽

관용은 '권리'의 일종이 아니며 권위를 바탕으로 해서 A가 B에게 제공하는 '허가'(PERMISSIVENESS)의 일종도 아니다. 관용은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자유를 확대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유없이는 관용도 있을 수 없다. 또 관용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반대'와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고 했을 때 자발적 중지 속에는 이미 관용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종교적 관용을 말할 때 이는 종교적 자유와 동일시될 수 있으며 근대 이후의 자유주의의 신장과 종교적 관용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77-78쪽

"정치적 행위들은 선한 삶에 대한 경쟁적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는 서로 다른 기질과 포부 그리고 종교적 신념들과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립성의 요구는 사람들에게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요구이며, 정부는 특정한 집단에 더 우호적이어서는 안된다."(수잔 멘더스)-81-82쪽

우리는 '다양성의 원리'로부터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우월하다는 독선주의가 그릇되며, 제도나 문화가 여러 가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독점적이고 유아적인 종교관을 고수하는 일이 위태롭다는 것을 배운다. -87쪽

가치 상대주의는 다양한 가치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나의 가치도 다른 사람의 가치 못지 않게 옳고 좋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킬 필요가 없고 또 그런 가치에 근거를 둔 자신의 삶의 방식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믿게 만든다. 이런 믿음은 정체성을 띠기 쉽고 그런 정체성은 자기 반성력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반성력의 결핍은 '완전주의'로 나가게 만들며,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던 원래의 태도에서 오히려 배타적인 태도로 변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가치 다원주의는 상대적 가치들을 충돌시키고 비교하고 검토해서 보다 나은 가치의 창출을 기대한다.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가치의 탐구를 지속하려는 것이 가치 다원주의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상대주의에 머무는 순간 진보는 중단되고 논의는 정체되고 만다. 어떤 가치 판단도 완전하지 않다는 고백을 해야 하고 보다 나은 판단이나 이론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관용은 이런 가치 다원주의가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고 지속적인 실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117쪽

각주 6) 완전주의라는 말은 '어떤 사람 또는 그의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삶의 방식보다 본질적으로 더 열등하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본질적 차이와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평등주의와 대립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열등한 사람이나 삶의 방식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불관용적 태도가 이미 완전주의자의 의식 안에는 자리잡고 있다. - vinit haksar, Equality, Liberty, and Prefectionism, Oxford. 1979, p.1. -117쪽

규모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최선의 의사 결정 방식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러나 이 다수결의 원칙이 종종 '다수의 전제'(tyranny of majority)로 전락하는 이유는 소수에 대한 정당하고 공정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소수 집단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언젠가는 소수도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다수결의 원칙이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119쪽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란 달리 말하면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선택은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지 강요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종교를 정통과 이단, 유일신 종교와 다신 종교, 토착 종교와 외래 종교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는 자율적 존재인 각각의 개인들이 자기의 양심과 성향에 따라 결정하는 선택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경우 선택의 행위는 배타적 행위가 아니라 선택되지 않은 것과의 공존 관계가 반드시 성립되어야만 하는 포괄적 선택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교적 공존이 선행되어야 하고 모든 종교는 끊임없이 선택을 기다리는 열려진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은 1회 이상 종교적 선택을 할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한다.-141쪽

'무한 경쟁 시대', '경쟁력 강화'라는 현실 인식이 개인의 생존 방식으로 강요되었을 때 발생하는 세 가지 도덕적 결함은 공통적으로 관용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배타적이고 불관용적인 경쟁의 논리를 극복하는 길은 관용을 실천함으로써, 그리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움으로써 가능하다.

첫째 무한 경쟁 또는 경쟁력 강화의 논리는 최소한의 생존이나 타자와 함께 공존하겠다는 방책이 아니라 '죽기 살기 경쟁'이며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겠다는 이기심과 탐욕을 그 바탕에 감추고 있는 전술이다. ... 중략 ...

둘째, 경쟁이라는 결정 방식 자체에 결함이 있다. 즉 경쟁은 불공정하기 쉽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이다. 처음부터 경쟁은 공정한 게임이 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경우 그 게임의 규칙은 경쟁자 개인들의 차이성과 개별성을 대부분 무시한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이라 비판될 수 있다. ... 중략 ...

셋째, 현실은 무한 경쟁의 시대이며 경쟁력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냉혹한 적자 생존의 법칙은 평등한 분배의 원칙 또는 분배적 정의 실현의 당위성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 결함을 가진다.-143-145쪽

대부분 이들이 보이는 배타성과 불관용성은 자기 충족적 확신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배제하고 불관용하는 것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무엇이 사실인지를 보다 명확하게 판단하려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 그 불관용성과 배타성은 강화된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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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자의 글쓰기 - 책이나 논문을 쓸 때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가?
하워드 S.베커 지음, 이성용ㆍ이철우 옮김 / 일신사 / 2006년 3월
품절


퇴고를 수없이 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초고의 엉성함과 일관성 결여에 대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초고는 발견을 위한 것이지 발표를 위한 것은 아니다.-45쪽

개요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개요를 가지고 글을 시작하면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개요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적어 가면서, 가능한 한 빨리 아이디어를 토해내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 당신이 작업해야만 하는 미완의 부분은 당신이 방금 적어놓은 다양한 것들이다 - 을 발견할 것이다.-100쪽

'가장 쉬운 것부터 하라'는 원칙을 지킨다. 가장 쉬운 부분부터 쓰고, 논문들을 분류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허드렛 일들을 먼저 하는 것이다. ... 중략 ... 우선 당신이 써온 것에 관해 메모를 하고, 각각의 생각을 카드에 적는 것부터 시작하라. 원고에 적혀 있는 어떤 생각도 없애버리지 말라. 그런 생각들은, 그 순간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없을지라도, 여러 가지로 유용하다. –-101-102쪽

연구자는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기본적인 생각을 명료하게 해놓아야 한다. 연구자의 생각이 명료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은 이미 영향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최고 또는 최악으로 만들어 준다.-198쪽

* 여기서부터는 <한국 사회과학자의 존재 이유>(이성용 역자후기)에 관한 밑줄긋기입니다.
-0쪽

각주 : 그 강사는 저서의 변환과정을 아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그것은 '번역물->편저->저서'라고 웃으면서 말했다(이한우, 1995 : 311-314는 번역물이 저서로 바뀐 책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우선 교수는 대학원생과 박사실업자에게 논문을 나누어주고 번역을 시킨다. 이것이 번역물이 생성되는 첫번째 단계이다. 두번째 단계에서 박사실업자는 번역물을 총괄적으로 다듬는 역할을 수행한다. 여러 사람들이 번역했기 때문에 출판사에 편저로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책이 출판될 무렵, 원고가 괜찮다고 생각되면 교수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저서로 바꾸라고 말한다(우리는 교수업적의 평가에 있어 번역물, 편저, 그리고 저서가 차지하는 점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교수의 행위가 얼마나 합리적(?)인 행위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논문을 진짜로 번역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저서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머리말에 적는다. 교수가 저서에서 진짜로 작성한 글은 머리말 뿐이다. ... 중략... 이것은 우리 학계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교수의 권위주의적 폭력과 비양심적 자세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278쪽

학자들은 왜 표절과 짜깁기로 글을 쓰는가? 나는 전공에 대한 자부심의 결핍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의무를 망각하는 도덕적 해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학문세계가 없는 사이비학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학계에서는 표절과 짜깁기로 쓰여진 글들이 판치기 쉽다.-280쪽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사이비 학자가 자신의 상품을 과대 포장할 수 있도록 '간판'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간판의 정당성은 우리 사회의 피라밋 유형 구조에 의해 합리화되고, 교육제도에 의해서 강화되어 왔다. 사실상 우리 나라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할 수있는 위치의 상당한 부분은 일차적으로 대학입시에 의해 결정된다. 고졸자보다 대졸자가, 그리고 비일류대학의 졸업생보다는 일류대학 졸업생이 좋은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에서 부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문제는 개인 또는 집단이 간판 또는 그 간판이 중심이 된 집단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부당하게 챙긴다는 데 있다. 최근 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고학력자일수록 학연과 같은 연고에 집착하고 질서의식과 비판의식도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똑똑한 자일수록 자신의 연고를 이용하여 자신의 밥그릇을 더 확실하게 챙긴다는 것이다.-282쪽

우리 학계 피라밋의 최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일류대 교수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대개 일류대 출신이고 박사학위는 한국의 일류대나 외국의 유명대학에서 취득한 자들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일류 대학에 입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우리 나라의 일류대학은 매년 그 당시에 가장 똑똑한 고등학교 학생들을 선발하여 정원을 채워왔다. 이렇게 선발된 똑똑한 대학생 가운데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대개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학원 과정에서도 경쟁에 승리한 자만이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국내 박사는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통해 학위를 취득한다. 한편 외국 박사는 학부시절부터 외국어 공부를 하고, 외국의 유명대학에서 유학하여 학위를 취득한다. 일류대학의 교수는 이렇게 뽑고 또 뽑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한 일류대학 출신 박사학위자 가운데에서 또다시 선발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일반 사람(특히 비일류대학의 학생)은 일류대학의 교수를 거의 신적인 학문의 권위자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교재 또한 거의 '성경'처럼 생각한다. -283쪽

사이비 전공자는 자신의 성품을 '내용'으로 팔면, 고객이 자신의 상품이 불량품인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책의 내용보다는 자신의 업적과 지위를 강조하는 '껍데기'(또는 간판)로 자신의 상품을 선전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 역시 비판 내용보다는 비판 자체를 가지고 반박한다. "내가 누군데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비판해." 이와 같이 사이비 교수는 오직 '껍데기'(결과)만 중요시하지 '내용'(과정)은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에,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암기식 교육을 선호하기 쉽다. 게다가 이치를 따지고 창의력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다보면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기 쉽다.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 포장함과 동시에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교수한테 교육을 받은 학생은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고 표절과 짜깁기를 비판할 수 있는 '감시의 눈'을 가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사이비 교수는 학계의 피라밋 구조뿐만 아니라 교육방식까지도 악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시켜 왔던 것이다.-286쪽

각주 10 : 한국사회에서 교재의 질은 주로 조직의 힘에 의해 평가되지, 교재의 '내용'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 것 같다. 출판사는 일류대학 교수의 권위와 연줄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저서를 출판하기를 희망하고, 또한 책의 출판을 결정할 때, 책의 내용보다는 저자의 간판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많다. 출판사의 이러한 행위는 비도덕적인 교수와 합세하여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고객은 과대포장에 한번 속지 그 이상은 속지 않는다. 출판사는 편집과정에서 글이 표절과 짜깁기로 일관되었거나, 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출판사는 저자의 간판보다는 저자가 쓴 내용을 가지고 출판 결정을 해야 한다. 저자 역시 출판사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하지 말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286쪽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한다. 이 말의 이면에는 교육이 잘못되면 그 나라의 국민은 100년 이상 고통의 나락 속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혼과 그것을 유지하고 창조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자들은 부실경영을 해서 회사를 부도낸 기업가들에게 사재를 털어 노동자에게 보상을 하라는 주장을 많이 해 왔다. 이제는 교수 자신이 부실교육을 한 대가에 대해 과연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각주 11 : 학계가 공멸할지라도 자신은 정년이 보장되어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교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교수조차 기억해야 할 법원의 판결이 있다. 자유당 말기, 많은 여성을 농락한 박인수 사건에서, 판사는 "법은 보호해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교수의 정년보장도 학생과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려고 노력하는 교수를 위한 것이지, 학생과 국민을 기만하고 자신만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사이비 교수를 위한 것은 아니다.-289쪽

학계에서 논문의 질은 주로 논문이 실린 곳이 어디인가에 근거해서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출판된 경우 학술지에 실린 글에 최고 점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국내 학술지보다는 외국 학술지에 실린 글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평가방법에는 고려되어야 할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사회과학자의 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글인가? 사회과학자인가 아니면 사회과학에 관심있는 일반 대중인가?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과학자의 논문은 '해외수출용'보다는 한국인의 이익을 위한 '내수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291쪽

왜 대부분의 학술지들이 동료학자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글로 가득차 있을까? 학술지는 주로 학회회원들에게만 배부되고, 사회과학에 관심있는 일반 대중들은 구입하기 매우 어렵다. 그 결과 학술지의 주고객은 '국민'이 아닌 '학술지 회원'이 된다. 학술지 회원은 동료이지만 보이지 않는 경쟁자이다. 경쟁에서는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진짜 전공자가 드문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서구에서 개발된 '최신 무기'를 과시하여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이비 전공자들은 그 최신 무기가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고, 최신 무기를 보여준 사람을 어설프게 공격하다가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 수 있다는 두려움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최신 무기를 가지고 남에게 폼을 잡고 싶은 마음으로 최신 무기를 소개한 신진학자들에게 입발린 칭찬을 하기 쉽다. 바로 이것이 학술지가 온갖 '서구의 최신 무기'들이 난무하는 학자들의 '지식과시의 전투장'으로 전환된 이유일 것이다. -291-292쪽

미래의 지식사회는 평생직장보다 평생직업이 강조되는 사회이다. 평생직장이 강조되는 현대 산업사회는 자신의 학문세계가 없는 학자일지라도 직장이란 울타리를 통해 자신의 일자리를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직업이 강조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학문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자신의 무기가 없는 학자는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대학원생들이 자신의 무기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교수와 과목을 찾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사이비 전공자도 학생에게 생존무기를 내용대신 '간판'으로 줄 수 있다. 이는 미래 한국 사회에도 사이비 학자들이 영속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의미한다. 반면 진짜 전공자는 '내용'으로 학생의 무기를 만들어주며, 학계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탄탄한 미래의 지식사회를 형성해주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제 학생들은 자신의 무기를 형성할 요인이 '간판'인가 아니면 '내용'인가를 결정할 중대한 시기에 왔다. 이러한 학생들의 결정에 따라 우리 나라의 미래는 크게 좌우될 것이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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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9-1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 글도, 아프님도.

마늘빵 2007-09-13 00:17   좋아요 0 | URL
이 책 본문 보다는 역자의 후기가 더 멋집니다. :)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즘 대학을 간다, 대학원을 간다, 하며 학력을 쌓는 것은, 대개는 자신의 불안정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인 경우이지 않을까. 나 역시 이기호씨의 이 글을 보고서 "등록금과 세월을 바친 만큼, 내 지식이, 내 의식이 한 뼘쯤이라도 성장했는가, 자문해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만다."  학력을 위조한 사람의 잘못을 탓할게 아니라, 자신의 학력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 이들을 비난하기보다, 자기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나는 내가 획득한 학력과 학벌만큼이나 내 지식과 의식이 성장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한다.

  나 역시 이기호씨의 이런 물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대학원을 다니는거야 학문의 목적보다는 - 물론 학문의 욕심도 있긴 하지만 -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꿈꾸는,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 때문이고, 결국 대학원은 그 수단이 된 상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대학에 가고 대학을 졸업한게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남들이 수능시험 보고 대학에 가니깐, 나도 수능시험 보고 대학에 간거지. 고등학교 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대학을 가야할까, 왜 가야할까, 가서 뭐할건데, 라고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해봤다. 그리고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고, 그다지 열심히 공부에 임하지도 않았다. 왜냐면 목표의식이 없으니까. 

  그런데, 막상 고3이 되고, 수능시험을 보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가게되더라. 그리고는 목표의식 없이 다니는 대학 대신에 밴드와 동아리에 열중했고, 결국은 목표를 찾기 위해 과를 바꾸는 시도까지 하게 된다. 이후로는 대학을 다니는 의미를 발견했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깨우침으로 다가왔고, 철학사적 지식은 깨우침을 위해 이용하고 버리면 된다, 지식은 중요치 않다, 그걸 통해 생각을 해라, 라는 마음가짐으로 나머지 3년을 다녔다. 그러나 다시 졸업 후 사회에 내던져진 상태에서 나의 최우선 관심은, 취직이었다. 결국 나 역시 "남들에 비해 뒤쳐진다는 두려움과, 사회에 안정적으로 연착륙하길 바라는 욕망, 그 마음이 늘 학문보다 앞섰다."

 학력을 위조한 사람들은, 학력이 사회에서 얻어낼 수 있는 부분을 얻어내고자 했을 것이며, 그들은 위조된 학력으로 꽤 오랫동안 쉽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위조된 학력 덕분이 아니라 실제로 능력이 있고, 위조된 학력은 그것을 발휘할 기회를 잡는데 도움을 줬을 수도 있지만, 기회의 획득 마저도 위조된 학력의 힘이라 할 수 있다. 확실히, 사회에 나와 몸으로 느낀 점은, 사람의 됨됨이나 능력, 성실성 등과 관련없이 학력과 학벌은 기회의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사실상 투덜거림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누군가를 평가할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공평해요, 라고 하기보단 에이씨, 정도로 그칠 수 밖에 없다. 좀 더 나은(?) 학력과 학벌을 갖춘 이보다 기회는 덜 오겠지만, 기회가 왔을 때 다른 걸로 잡을 수 밖에는 별 다른 수가 없다.

 이야기가 좀 샜지만, 이기호씨의 물음,"졸업장을 갖는다 해서 학력 위조에서 자유로운가? 너는 그래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서, 얼마나 대학을 나온 사람처럼 행동했는가? 대학에선 과연 무엇을 배웠는가?" 라는 물음 앞에 나 역시 그와 같이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떨군다. 

 * 학력위조 (이기호씨의 관련 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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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7-08-30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똑똑이들이 많다보니 사회가 참 피곤해 지는거죠.
알라딘 메인에 뜬 우석훈씨 인터뷰 봤어요? 의견은 많이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싸가지 없다고(잘난 체도 많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인터뷰에는 괜찮은 내용들이 많이 보여요.

마늘빵 2007-08-30 18:30   좋아요 0 | URL
음 우석훈씨가 88만원 세대 쓰신 분이죠? 아직 인터뷰는 못봤는데.
저도 헛똑똑이에 들어가는지라 부끄럽습니다. 하핫.

비로그인 2007-08-3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을 나온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뭔가요?
질문이 마구 생기네요,대답은 쉽지 않으면서..

마늘빵 2007-08-30 18:34   좋아요 0 | URL
이기호씨의 의도는, 뭔가 더 알고 더 배운 사람답게 행동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지적하는거겠죠. 저는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요즘 대학진학율이 높고 예전의 고등학교 진학율만큼이나 되니 사실상 대학이 대학답지 못하게 되고, 대학의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는 거겠죠.

대학의 역할이란 것이, 시대가 변했으니 기업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는 직업훈련장으로 이해해야한다는 시각도 있을테고, 실용적 지식보다는 자기성찰과 사색을 유도하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을테고.

저는 시대야 어떻게 변하든 후자의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사회가, 기업이, 사실상 전문대가 해야 할 역할을 일반 대학에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leeza 2007-08-3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이 지적 성장을 보증해주지 못하죠.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건 지적 성장이 가능하다 해도 지적 성장이 인격 성장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학력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단 하나일 거라 생각합니다. 주류에 편입하고자 하는 욕구~ 남들도 다 하는데 나만 하지 않으면 왠지 뒤떨어진다는 느낌~ 그리고 사회에서 그걸 인정해준다는 인정욕~
이번 사건을 볼 때 그런 사회를 먼저 탓해야겠지만, 그러기전에 우리의 '소위 대학 나온 사람은 뭔가 다르겠지? 그것도 일류대학이라면 더더욱~~~'이런 편견을 탓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락사스님의 의견은 어떤지도 궁금하고..해서 의견 남겨요. 좋은 글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네요~

마늘빵 2007-08-31 08:44   좋아요 0 | URL
지적 성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인격 성장이 더 큰 문제군요. 결국 대학 나온 답게, 라는 말은, 기본적인 예의나 상호 존중의 태도 등을 비롯한 '인격'을 염두에 두는 거겠죠. 어쩌면 님 말씀처럼 대학 나온 이들에 대해 뭔가를 요구하고,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어떤 편견을 가진 의식이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을 나왔건, 서울대를 나왔건, 박사학위를 취득했건 우리는 사람이라면 의당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와 상호존중의 태도를 '누구에게나' 요구해야할텐데. 이런 기본도 지켜지지 않는데 그 이상의 뭔가를 요구하는건 또 무리인가도 싶군요. 언제나 바람뿐이죠.

2007-08-31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31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즈행복 2007-08-31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나온 사람이 뭔가 다르다면, 잇속에 더 밝은것이 다른점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사실상 요즘의 대학은 아프님 말씀대로 예전의 대학이 아니잖아요. 정말 예전 고등학교밖엔 안되는데요,뭐. 얼마 안 있으면 대학 정원이 신입생수보다 많아질거라는 얘기도 있고.
대학에 너무 많은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전에 정말 아무나 못 가던 그 시절을 생각하고서?
사회전반적으로 학력상승은 이뤄어졌으나 의식상승은 커녕, 모두 돈에 더 얽매이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명문대를 나온 것과 소득과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말도 하잖아요? '저 사람은 S대 나왔는데도 지방대 나온 사람보다도 못버네?' 하고 말예요. 전적으로 대학을 경제적인 잣대로만 보고 있잖아요. 심지어는 연예인도 S대 나왔다는 이유로 뜨고... 누가 그랬더라? 미모와 연기만 보면 되는 연예인은 학력을 보고 있고, 학력과 실력만 보면 되는 회사에서는 미모를 보고 있다고.
어디 학력문제 뿐이겠어요?
아~ 모르겠다. 수습이 안되네요. 그냥 쉬어야겠네요.

마늘빵 2007-08-31 08:39   좋아요 0 | URL
어쩌면 대학에 너무 많이 바라는 게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일까요. 대학, 학력, 학벌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확 모든 대학의 이름을 없애버리고, 서울 1대학, 서울 2대학 이러면 어떻게 될까 싶어요. 또다른 부작용이 생기려나요.

비로그인 2007-08-3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

마늘빵 2007-08-31 11:24   좋아요 0 | URL
하하 아니 테츠님 뭐하시는거에요. 크크. 저도 7.

2007-08-31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31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방마니아 2007-08-3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글 잘 읽었다.

마늘빵 2007-09-02 11:36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