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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촌수, 변화하는 인간관계 ㅣ SERI 연구에세이 71
김유정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7년 1월
평점 :
98년이었던가. 처음 피씨통신을 했던게. 컴퓨터를 사니 유니텔 무료이용권을 줬고, 그리하여 달리 가입할 게 없었던 나는 인터넷을 하기 위해 유니텔에 가입했고 오래도록 그곳에서 노닐었다. 대학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록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철학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매일 같이 신기한 세상을 접했다. 그러다가 그 공간에서 떠들던 사람들과도 만나고, 따로 채팅하다가 번개란 것도 해보는 묘한 경험을 많이 했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였던거 같다. 사람을 먼저 만나고 사귀는 것보다 글을 보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호하게 된 때가. 글을 보고 만난 사람에게 실망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거 같다. 글은 그 사람을 담아낸다.
어쨌든, 이렇게 온라인의 인연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글을 통해 호감을 갖고 있던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그렇게 두 사람이 특별한 인연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생판 아무것도 모르는 소개팅이나 미팅보다 - 미팅도 꽤나 했었다 - 글을 통해 만난 인연이 나에겐 훨씬 마음으로 다가왔다. 별 다른 글도 아니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두 남녀가 글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면서, 그 남자 마음엔 그 여자가 어느새 들어앉았다. 비단 그때 뿐만 아니라 이런 경험은 나이를 먹은 이후에 또 있었다. 단지 드러내지 않았을 뿐. (영화 속에서) 전도연과 한석규가 채팅으로 만나 사랑을 나눈게 99년이었나. 여튼 그런 식으로 인연을 맺은 이들이 한 둘은 아니었던거 같다.
이 책은, 인터넷 상에서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디지탈 시대의 '관계맺음'에 대해 말한다. 시대의 변화 흐름을 잡아내고, 그 과정에서 인간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리해본다.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메일과 이동전화의 보편적인 사용, 다시 말하면 디지털 및 모바일에 의존하여 변화하고 있는 인간관계를 파악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점차 유비쿼터스 환경으로 전환하고 있는 오늘날 인간관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예측하고 또 향후 전개방향을 전망해보려" 한다고.
저자는 온라인상에서의 소통은 오프라인상에서보다 메세지를 착안하고 구상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반면, 같은 시간대에 의사 교환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이런 의미에서 효율적인 상호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상호 교류를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소통을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대에 오프라인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지만 말이 오갈 뿐 의사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소통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또 온라인 상에서의 관계 맺기의 특징으로 다음 네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 서로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의견 교환이 그만큼 솔직하고, 주고받는 주제나 내용에 보다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 둘째, 참여자들은 좀더 자기중심적이 되어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주로 교류를 진행한다. 셋째, 의사 교류를 하는 데 특정 개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전개된다. 넷째, 교류 과정을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적어서 보다 평등한 참여가 보장된다."
내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온라인 상에서의 관계 맺음에 있어선, 오프에서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맥이나 학벌, 상대방의 재산 정도, 얼굴이나 몸매의 미추가 거의 완벽하게 배제된다는 장점이 있다. 각자가 사진을 공개하거나 재산이나 학벌 등을 밝히거나 하지 않으면, 각자의 모든 정보는 차단된다. 물론 잡다한 자신의 일상을 떠들다보면 이런저런 정보들이 하나둘씩 노출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이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위 특징에서 언급하듯 교류과정에서의 독점적 지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오프에서보다 지위나 신분 등으로부터 독립되어 관계맺음에 있어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단점도 있어서, 자기중심의 교류를 하는 경향이 있고, 관계를 심각하게 보지 않은 나머지, 상대를 깊이 배려하지 못하는 면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싫으면 안 보면 그만, 이라는 식의 '관계의 가벼움'이 널리 퍼져있달까. 저자는 인터넷 뿐 아니라 휴대전화까지 다루면서 그와 같은 가벼움을 이야기한다. "이동전화는 사람을 느슨하게 한다. 언제라도 이동전화로 연락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기 때문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약속을 정하고 나가지 않으면 상대는 마냥 기다리다 지쳐 잔뜩 화가 난 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귀찮으면 핑계를 대고 못간다 통보하면 그만이다. 약속과 관계를 가볍게 여기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관계에 목말라있고 끊임없이 관계를 갈망한다. 동시에 그들은 관계를 가벼이 여긴다. 나 역시 이러한 현대인의 특징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관계와 소통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관계와 소통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은, 따로 떨어져 우주를 부유하는 운석 조각과 같다. 내 의지에 의해서 나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내 의지에 의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한 관계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란 인간은 내가 관계맺는 인물들에 의해 규정지어진다.
디지털 기기는 관계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시켰지만, 개인을 더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개인에게 많은 선택지를 주었고, 나의 선택에 따라 나의 존재가 변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온라인을 통해 인연을 맺었지만 어느 순간 연락이 두절된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한때 자주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는 남남이 되어버렸고, 다시 만난다해도 어색하기만 할 것 같다. 관계는 양자 모두 서로에게 충실했을 때 유지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한쪽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혹은 무심해지면서 남남이 된다. 아쉬운 인연도 있다. 더 알고 지내고 싶지만 한쪽의 일방적인 잠적으로 인해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 사람을 마냥 탓할 수 없는 건, 디지털의 특징 때문인걸 어쩌랴. 하지만 각 개인의 노력으로 그것을 메울 수 있는 부분은 분명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