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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엘리엇 전집 - 시와 시극
이창재 지음 / 동국대학교출판부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로고스는 공통적이지만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의 지혜를 가진 듯이 산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하나이고 같다
1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모두 미래의 시간 속에 현존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어떠한 시간도 되찾을 수/구속(救贖)될 수 없다.
있을 수 있던 일은 추상으로
영원한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다,
사색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가리키는데, 그 끝은 항상 현재다.
발자국 소리가 기억 속에 메아리 친다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 아래로,
우리가 열어본 적이 없는
장미원으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내 말은 울린다
그렇게 당신의 마음속에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잎 그릇에 먼지들을 흩트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른 울림들이
정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새가 말했다, 그들을 찾아봐, 그들을 찾아봐,
모퉁이를 돌아서. 첫 번째 문을 지나,
우리의 첫 세계 속으로, 우리
지빠귀의 환영을 따라갈까? 우리의 첫 번째 세계 속으로.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위엄있게, 보이지 않게,
압력 없이 움직이며, 죽은 잎들 위로,
가을 열기 속에서, 활기찬 공기 사이로,
그리고 새가 불렀다,
관목숲 속에 숨겨져 있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반응하여,
그리고 보지 못한 눈빛이 교차되고, 왜냐하면 장미는
응시되는 꽃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그들은 우리의 손님이었다, 환대하고 환대받는.
그래서 우리는 그리고 그들은 정형적으로 움직였다,
텅 빈 골목을 따라, 한 복판 안으로,
마른 연못을 내려다보기 위해
마른 연못, 마른 콘크리트, 물가가 갈색이 된
그리고 햇빛 속에서 연못은 물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연꽃이 조용히, 조용히 떠오르고,
수면은 빛의 중심에서 반짝인다.
그리고 다른 메아리들은 우리들 뒤의 연못에 반사되어 있다.
그때 구름이 지나가고 연못은 텅 비었다.
가, 새는 말했다, 왜냐하면 나뭇잎은 웃음이 머금고 흥분한 채로
숨어 있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가, 가, 가, 새는 말했다: 인류는
너무 많은 실재를 감당할 수 없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있을 수 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가리키는데, 그 끝은 항상 현재다.
엘리엇의 번트 노튼은 헤라클레이토스 단편을 제사로 사용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원성과 통일성이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이러한 대립물들을 통일하는 것이 로고스임을 강조한 철학자입니다. 이 제사는 의미심장하게 이 시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하나이고 같다”는 역설적 표현은 초월적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모순이 아닙니다. 길에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정반대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국 그 길은 하나입니다. 관악산을 오르다 마주치는 내려오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나는 올라가고 있는 길이지만, 내려오는 사람들에게는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는 결국 하나의 길입니다. 이러한 역설과 초월적 시선은 이 시에 지배적입니다.
시작부터 엘리엇은 이러한 역설을 제시합니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어쩌면 모두 미래의 시간 속에 현존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미래의 시간 속에 현존한다는 것은, 인과율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로 보일지 모릅니다. 특히 물리주의적 입장에서, 결국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래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만약 미래의 시간 속에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모두 현존한다면, 반대로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도 그대로 성립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의 문제가 남습니다. 양자역학과 같은 미시세계에서, 입자의 존재태가 ‘확률’로서 제시된다는 차원.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문제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서로에게 포함되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부정됩니다. 태초부터 시간의 종말(그런 것이 있다면)까지는 모두 예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아침에 계란을 먹을까 우유를 마실까 고민하는 것도, 사실은 이미 답은 태초부터 정해져있었고, 또는 제가 고민을 할 것조차 정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초월적인 시선,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런 것은 아닌지 엘리엇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의 ‘구속’의 문제, 구원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어떠한 시간도 되찾을 수/구속(救贖)될 수 없다.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즉 미래 속의 과거가, 과거 속의 미래가, 그리고 현재가 현존하고 있다면, 결국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있을 수 있던 일은 추상으로
영원한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다,
추측/사색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던 일들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합니다. 애초의 전제를 더 밀어붙인다면, ‘사색의 세계’조차도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이 사색의 세계를 인간의 ‘자유의지’와 같은 공간으로 열어두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는 출발합니다.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있을 수 있었던 세계, 영원한 가능성의 세계, 추측의 사색의 세계로서의 시를 쓴다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예정된 시간 축을 탈출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기억 속에 메아리친다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 아래로,
우리가 열어본 적이 없는
장미원으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내 말은 울린다
그렇게 당신의 마음속에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잎 그릇에 먼지들을 흩트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았던, 걷지 않았던, 열어본 적이 없던 ‘장미원’으로의 ‘기억’이 서술됩니다.
다른 울림들이
정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새가 말했다, 그들을 찾아봐, 그들을 찾아봐,
우리가 가보지 않았던 그 정원에는 다른 울림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새’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늘 새는 지상과 천상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나무에서 집을 짓는 동물. 그런 지상과 천상의 걸쳐져 있는 존재는, 나에게 말을 걸며 ‘그들’을 찾으라고 부릅니다.
모퉁이를 돌아서. 첫 번째 문을 지나,
우리의 첫 세계 속으로, 우리
지빠귀의 환영을 따라갈까? 우리의 첫 번째 세계 속으로.
여기서 ‘장미원’은 에덴동산과 같은 ‘첫번째 세계’임이 나타납니다. 새의 환영을 따라갔을 때 마주치는 것은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위엄있게, 보이지 않게,
압력 없이 움직이며, 죽은 잎들 위로,
가을 열기 속에서, 활기찬 공기 사이로,
지상의 존재가 아닌 존재들입니다. 위엄이 있고, 보이지 않고, 중력에서 자유로운 이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본다는 역설 속에, 죽은 잎들 위로 활기찬 공기 사이를 뛰노는 존재들.
관목숲 속에 숨겨져 있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반응하여,
그리고 보지 못한 눈빛이 교차되고,
계속 역설과 모순은 되풀이됩니다. 들리지 않는 음악에 반응하고, 보이지 않는 눈빛이 교차됩니다. 앞서 이것이 일어나지 않았던 기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는 어떠한 환상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현재적 시간이 아닌 가능성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텅 빈 골목을 따라, 한 복판 안으로,
마른 연못을 내려다보기 위해
마른 연못, 마른 콘크리트, 물가가 갈색이 된
그리고 햇빛 속에서 연못은 물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연꽃이 조용히, 조용히 떠오르고,
수면은 빛의 중심에서 반짝인다.
그리고 다른 메아리들은 우리들 뒤의 연못에 반사되어 있다.
그때 구름이 지나가고 연못은 텅 비었다.
마른 연못은 순식간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연못으로 보입니다. 이는 현재의 시간 속에 과거의 또는 미래의 시간, 또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가능성의 시간이 겹쳐져있는 모습입니다. 엘리엇이 불교에 심취했던 것과도 연관해보자면, 여기서 ‘연꽃’은 어떤 깨달음의 상징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에 모든 시간이 겹쳐져있다는 깨달음, 또는 예정된 시간을 깨고 나오는 ‘자유의지’의 시간. 이는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가, 새는 말했다, 왜냐하면 나뭇잎은 웃음이 머금고 흥분한 채로
숨어 있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가, 가, 가, 새는 말했다: 인류는
너무 많은 실재를 감당할 수 없다.
그 순간 새는 이제 그만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류는 너무 많은 실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서 실재는, 과거-현재-미래가 겹쳐져있는 시간이며 동시에 상상세계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엘리엇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립니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있을 수 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가리키는데, 그 끝은 항상 현재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축. 그리고 가능성의 세계와 있었던 일, 모두 현재에 수렴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져있으며, 가능세계와 실제세계가 겹쳐져있는 세계. 엘리엇은 우리의 삶을 입체적이고 풍요롭게, 마법과 같은 세계로 탈바꿈합니다. 역사가 현재를 조형한 과거를 밝혀내고, 이를 미루어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면, 문학은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을 그려냅니다. 엘리엇은 역사를 되살리며 동시에 문학의 지향도 겹쳐놓고 있습니다.
내 말은 울린다
그렇게 당신의 마음속에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잎 그릇에 먼지들을 흩트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는 마치 장미잎 그릇에 먼지를 흩트리는 일처럼, 사소하고 순간적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엘리엇 스스로도 이것이 어떤 목적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먼지들이 흩어지며 장미 잎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 한 순간. 또는 그 먼지들이 떠오르는 찰나의 환영. 오래 전에 사라진 과거의 인물(엘리엇)의 말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를 넘어서 독자의 가슴에 울리면서, 과거가 현재에도 겹쳐져 있다는 것을, 있었을지도 모르는 세계가 있는 세계에 울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