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야네 말 창비시선 373
이시영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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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특정 시에서 눈물이 난 것이라기보다, 시들이 계속 쌓이면서 감동이 온다. 이번 버클리에 가서야, 이시영 시인이 내가 정말 좋아하던 시 정님이의 시인이라는 것을 상기해냈다.

 

 

정님이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 매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 있니 맛 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 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시인의 첫시집 만월”(창비, 1976)에 실린 시이다. 당시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간 여성을 생생하게 그린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함축한 존재이다. 서비스 노동(이진경)이야말로 노동의 모순을 집약하고 있는 존재이며, 특히 여성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곧 죽음노동임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이 시는 1970년대 한국 리얼리즘 시가 한국사회를 집약하는 한 정점을 보여준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은 이런 점에서 백화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읽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화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회 모순을 드러내는 이러한 방식은 물론 식민지 시대부터 (특히 백석의 여승이 떠오른다) 이어져 내려온 것이지만, 70년대에 이론적 학습과 비평의 지원과 더불어 본격화된다.

이러한 시인은 21세기에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여전히 시인은 짧은 서사를 담고 있는 시들을 주로 쓴다. 과거의 추억을 기억하며, 역사를 넘어설 수 있는 시의 힘을 믿는다.

 

 

() 김정남 선생

 

양재역 12번 출구 앞에서 우연히 김정남 선생을 만났다. 평생을 별다른 직업 없이 살아온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를 한바퀴 돌며 골목을 깨끗이 쓸었다고 하는데, 세상엔 이렇게 그림자처럼 조용한 분들이 있으시다. 칠팔십년대 인권 탄압이 있는 곳엔 그가 늘 뒤에 있었으며 변호사를 대신해 쓴 '변론'만도 아마 수천 페이지가 넘을 것이다. '박종철 사건'도 보이지 않는 그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분을 잘 기억해 주지 않는다.

 

 

흔히 시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 역설이나 은유에서 오는 시적 긴장이나 압축미와 균질미가 야기하는 리듬감을 떠올리기 쉽다. 이 시는 이러한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시가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은, 김정남이라는 개인에 대한 기록이며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알레고리로 기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한 분들이 있으시다그리고 역사는 이런 분을 잘 기억해 주지 않는다.” 마치 역사가 잊어버린 정님이를 기록하는 것처럼, 시인은 기록한다. 이를 통해 시인의 고향에 살던 정님이와 김정남 선생은 개인을 넘어서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되고, 또 역사가 된다. 그리고 다시 역사는, 어떤 유형의 사람들은, 생생한 개인으로 살아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추억을 기록하며 역사를 증언하는 한편, 시인은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라는 공동체를 부각하고, 작은 우리를 위로한다.

 

 

 

대지의 잠

 

어제 내린 눈 위에 오늘 내린 눈이 가만히 닿습니다. "춥지 않니?" "아니." "어떻게 왔어?" "그냥 바람에 떠돌다가 날려서." "그래. 그럼 내 위에 누워보렴." 둘은 서로의 시린 가슴을 안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정원에서

 

태풍 속에서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한마리가

밤을 새워 울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방배3동의 모든 고양이들이 몰려와...

진심으로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이 위로는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것이며 역사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요동호텔에서

 

혁명성지인 중국 연안에 갔을 때다

동굴을 본떠 지은 요동호텔 일층에서 자고 나오다가 그를 만났다

나도 모르게 ○○ 동지, 안녕하십네까?” 라고 했다

깜짝 놀란 그가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리시영 동무, 거 앞에다가 경애하는이란 말 좀 붙이면 안되겠습나?”

 

요동은 원래 그러한 곳이다

 

 

내일을 향하여

 

또 한번의 민주정부는 오지 않았다

오늘밤 호남선으로 뻗은 철길 두가닥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다가 잠이 들었다

 

 

작고 사소한 것에서 민족이나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또는 민주주의의 말뜻 그대로, 작고 사소한 우리가 바로 민족이나 역사나 사회와 같은 거대해 보이는 것들과 일치하거나 오히려 이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을 시인은 담담하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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