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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ㅣ 동양문화산책 4
사라 알란 지음, 오만종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6월
평점 :
1. 사라 알란, "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오만종 옮김, 예문서원, 1999.
한문을 배울 때, 나는 해석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해석하지 않고 한국어 어휘 속에 들어와 있는 한자를 반복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만큼 한국어 속에 한자어 어휘가 가득 들어있어서, 수천년의 시간이 격해있는 타자의 문장인데, 거기서 나타나는 개념들을 별 의심없이 그대로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한국의 한자어로 이해했던 것이다. 氣나 道와 같은 단어들은 막연하지만, 애매한대로 그대로 번역하게 된다. 道可道, 非常道. 도라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가 아니다. 같은 식으로 해석하고는 그 문장을 이해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제대로 된 해석이 아니다. ‘도’란 무엇인가? ‘상도’라고 했을 때, 상도는 무엇인가 등등 따져야할 것이 많다. 그런데 현재 한국어 속에 사용하는 한자어들에 워낙 친숙하다 보니, 이를 묻기를 게을리 하게 된다.
미국에 있을 때 미국의 한문 교재를 보고는 깜짝 놀랐었다. 예를 들어 士를 knight로 번역해놓으니, 원문은 ‘이해’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번역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비의 모습이 갑자기 풍차로 돌진하는 기사의 모습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되물어보면, 士를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 ‘士’는 현재 한국적 맥락으로의 士로 이해하는 부분이 컸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라 알란의 이 책은, 영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하여, 이해하기 힘든 타자인 유가와 도가의 사유를 다룬다. 처음부터 맹자의 한 대목을 제시하고는, 이것이 왜 ‘서구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가를 설명한다. 한국인 독자로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물에 대한 맹자의 이야기가 서구권 독자들 입장에서는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가 근본적인 뿌리 은유의 차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라코프와 존슨의 '뿌리 은유' 개념을 토대로 고대 한문맥의 개념 안에는 물과 식물 뿌리 은유가 사유체계에 중요했다는 것을 논의한다. 뿌리 은유는 추상적 생각을 개념화하는 데 내재하는 구체적 모델이다. (38) 그에 따르면 서구의 뿌리 은유는 종교적 전통에 기초한 신화적 대화로부터 나왔다면, 동양의 뿌리 은유는 자연 현상의 구체적 이미지에 기반하고 있다. 서구사상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대립에서 초월적인 변하지 않는 것을 상정했다면, 동북아사상은 전일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자연현상, 특히 물(水)을 뿌리은유로 해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고대 중국 종교는 조상의 계보에 의해 영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직접 연결된다. 속세가 있고 그것과 근본적으로 대조되는 초월적 실체의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영계의 사이는 연속적이다. 더구나 초기의 의식에서 조상의 영령과 자연 현상의 영령들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 (51) 따라서 그들은 일반적인 원리들이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를 지배한다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고, 고대 중국에서 논증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유추는 수사학적 수단 이상이었다. 때문에 서구에서 도덕적 원리가 초월적 존재의 명령에 기초했다면, 동북아에서는 도덕적 명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윤리적 행동의 원리와 그 원리들을 구현시키는 개념들은 존재한다. (102)
고대 한문에서는 지나가는 ‘시간’(Time)을 의미하는 글자가 없다. 이는 영어에 時에 마땅한 번역어가 없는 것과 같다. 時는 원래 계절의 의미로, 계절에 맞는다, 때에 맞는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서구에서는 기하학적 은유로 시간을 설명한다. 직선이나 원이다. 동북아의 시간관은 원에 걸맞아 보이지만, 실제 동북아에서 시간을 은유할 때는 이러한 도형이 아니라 물과 식물을 뿌리은유로 사용한다.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샘을 원천으로 가진 채 흘러가는 물이 연속성과 무상성의 관념을 위한 모델이다. 일 년을 주기로 하는 식물의 변화 양식은 時 개념의 모델을 제공하고 재생되는 식물의 연속체는 조상 계보의 개념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 (38)
이후 道, 無爲, 心, 氣 등의 개념 속에 물의 이미지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3장에서 다룬다. 도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길이고 수로이다. 그것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이고 강 자체이기도 하며, 결코 멈추지 않는 물의 흐름이고 스스로 깨끗이 침전시키는 연못과 같다. 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양육시키지만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유가는 도의 자연적 질서를 강조하고 도가에서는 도의 변형체나 무정형성을 강조하지만, 도의 개념을 해설하는 데에서는 둘 다 뿌리를 물의 속성에 두고 있다. (124) 무위 개념의 뿌리에는 행위하지 않으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물이 있다. 무위는 또한 물이 행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무위는 물을 모델로 한 도의 최상의 표현이다. (132) 心은 방해받지 않을 때 안정되어 맑아지며, 침전물이 가라앉은 연못의 물과 같다. 또 물처럼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끌린다. 心은 일정한 경로에 志를 두었던 공자나 진정한 왕이나 선비의 경우처럼 인도를 받는다. 無爲라면 땅의 지형에 따라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물처럼 心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겠지만, 사람의 心은 자신의 의욕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그들을 위해 세워진 도에 따라 어떤 일정한 길을 따르도록 인도된다. 도에 이끌린다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 그들은 좋은 통치자에게로 가게 될 것이다. (135) 기의 개념은 물을 모델로 한다. 자연계에서의 기는 아래로 흐르고, 안개가 되어 위로 올라가며, 비가 되어 떨어지고, 식물들에게 생명을 주는 물의 순환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호흡으로서의 기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마음의 생명 에너지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도덕적 감각의 근원을 통제한다. (143)
4장에서는 物, 性, 仁, 才, 端, 自然, 德 등의 개념들이 식물과 관계된 이미지들과 식물 생명의 뿌리 은유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서구에서는 동물과 식물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은유체계 속에 있다. 그런데 동북아에서는 萬物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한데 묶고, 특히 식물 은유를 통해서 인간을 설명한다. 유대 기독교 전통의 종교 용어에서 개인은 신이 부여한 생명을 갖는 존재였다. 출생과 창조는 하나의 사건으로 개념화되었으며, 최초의 시작으로서 최소한 재림의 가능성을 갖고 죽음과 서로 연관되었다. 개인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죽을 때 신에게 답해야 한다. 반면에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조상 계보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생 동안 한 일에 대해 초월적 창조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조상이나 후손 또는 당대의 가족에게 책임을 진다.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식은 효자로서 행동해야 하며 죽은 후에도 부모가 늙었을 때 보양했듯이 제사 때 음식을 차려 예를 다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으며, 이것이 사회적 도덕과 이상적 유교 국가의 기초가 된다. 사람이 그의 생애에서 이름을 빛냈다면 그 명예는 후손에게 전해질 뿐만 아니라 조상의 지위까지도 드높이는 것이 된다. (155) 맹자에서의 性은 충분히 발육하여 식물이 될 수 있는 씨나 묘목의 첫 싹에 포함된 잠재력으로 그려진다.
5장에서는 맹자와 노자가 첨예하게 다른 철학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양자의 우주론은 모두 인간과 자연 세계에서 같은 원리를 발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들이 물과 식물이라는 같은 뿌리 은유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힌다. 물과 식물 생명을 모델로 한 철학적 개념들은 서로 연결되어 의미의 조직망을 형성한다. 氣와 道는 고립된 개념이 아니며, 그들의 개념 관계는 물의 이미지에 있는 공통된 뿌리를 반영한다. 그래서 수로를 모델로 하는 도의 개념은 의미가 확장되어 물의 여러 가지 형태를 모델로 삼는다. 물의 증기를 모델로 삼는 기나, 의미가 확장되어 얼음에서 움직이는 물, 흩어지는 증기에 이르기까지의 다른 형태들의 물을 암시한다. (186)
물과 식물 생명의 뿌리 은유에 근거한 논어, 맹자, 노자, 장자의 철학 체계는 사람을 완전히 자연 세계의 전체 구조 안에 놓고 있다. (217) 이러한 물과 식물에 바탕을 둔 개념 구조는 고대뿐만 아니라 전시대를 통해 중국 사상의 뿌리 은유를 대표한다. (219)
이러한 근본적인 사유체계의 차이가 근대에 어떻게 작용했을까? 현대에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 혹은 이것이 서구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수정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몇몇 답들은 황호덕 선생님의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을 근대시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 내 목표인데, 지금까지 근대의 ‘새로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결국 그 새로움이 새로움인지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고전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이 새롭고 무엇이 지속되었을까. 지속은 새로움을 만나서 어떻게 굴절되었나 등 아직 논의되기 시작조차 안 된 것들이 상재한다. 특히 이러한 “뿌리 은유”에 대한 관심은 시의 해석에 있어서 유용하다. (이에서 더 발전시킨 논의들이 “인지시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한문맥의 개념 도식 안에 내재한 “뿌리 은유”는 어떻게 확장 변용되고, 다른 문화권의 뿌리 은유들과 만나면서 굴절되고 상호습합되었는지를 탐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