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프랑스 대선과 한국 대선

다 아는 바이지만, 지난 6일 프랑스 대선에서 집권 우파의 사르코지 후보가 당선됐다. 반대로 사회당 후보이자 첫여성 대통령을 꿈꾸었던 루아얄 후보가 패배했다. 좌파 이론의 지주 역할을 해온 프랑스인지라 '현지'의 정치 지형과 선거 뒷얘기도 흥미를 끄는데, 이와 관련하여 레디앙에서 '프랑스통'이라고 할 우석훈 교수의 '관전평'을 옮겨놓는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6250).

레디앙(07. 05. 08) 우파의 승리가 아니라 '복수'

1.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이 졌다. 정확히 말하면 루아얄 여사가 진 것인데, 어떻게 포장하든 좌파가 우파한테 졌다는 객관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회당을 지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래된 노조 간부출신이었던 뻬레고부아 총리가 권총자살한 이후로 사회당의 미셀 로까르니 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말장난이 싫기도 했지만, 동구의 몰락 이후로 몰락한 공산당에 간호부 출신의 노베르 위가 "코뮤날리즘(communalism. 공동체주의. 파리 코뮌을 상상해보자-편집자)은 인류에게 늘 필요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은 이후로 대체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막상 TV에서 토론하는 거 보면 공산당이든 아니면 녹색당이든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2.
루아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나는 루아얄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책이라는 눈으로만 보면 루아얄이 과연 좌파 후보인지 오락가락하기도 하는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고도 놀란다고, 선거 내내 나는 노무현을 연상했다. 사실 남자와 여자라는 점과 전문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는 점들 - 이런게 중요한가? - 을 빼고 나면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그들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측으로 급회전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래도 정치인으로서의 루아얄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동거 가정 1세대로서 그녀의 사회적 진출 등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다.



그녀는 1차 결선투표도 사실 간당간당했고, 막판에 차이가 더 벌어졌지만, 대체적으로 출발시점에 비하면 선방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선방이 사회당의 과실은 아니다. 프랑스 신문들은, 나머지 좌파들이 표를 몰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진 사회당이 정치적 타격이 크게 받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장 총선이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3.
사르코지의 승리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많다. 우파라고 다 같은 우파는 아닌데, 지스카르 데스탱 이후로 거의 30년만의 우파의 승리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조금 복잡하다. 이 얘기는 4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드골이 집권하면서 자신은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다고 말을 했는데,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독특한 의미가 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드골은 제 3세계 동맹국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하면서 서방세계 내에서 독립노선을 걸었고, 이런 일련의 입장을 드골주의라고 한다. 공화국연합(RPR)의 지금 시락 대통령이 이런 드골주의를 계승한다. 시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공한 드골주의자이다.

사르코지는 대중운동연합(UMP)라는 정당을 이끈다. 이게 진짜 프랑스의 우파 정당이다. 그냥 생각하면 시락이 자신의 후계자로 사르코지를 지명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둘 사이는 정적 관계이다. 노선도 다르고, 가는 길도 다르다. 우파도 연정하지 않으면 집권할 수 없는 이런 구도에서 시락이 밀렸고, 사르코지는 그야말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대선 후보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고, <르몽드>지의 편집진은 이것을 "우파의 복수"라고 부른다. 단순히 우파들이 좌파를 이긴 그런 의미만이 아니라 드골주의자들에게서 30년만에 권력을 찾아왔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첫 번째 한 얘기 중의 하나가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라는 것이다.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드골주의와의 결별이 사르코지의 당선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이다.

4.
미테랑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매력있는 사람이다. 가장 정확한 불어를 구사하고, 몇 분에 한 번 정도만 문법 실수가 나온다고 문법학자들의 연구 대상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로 프랑스를 상징했던 정치인 중의 한 명이다. 그 이후로 좌파가 대선에서 이긴 적은 없다. 프랑스에서는 언제나 좌파가 절대수치에서 부족하다. 우파와 시락주의자가 분열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틈을 타고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로 절대로 우파는 분열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좌파 대통령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는 조금 다르다. 지방정치가 우리나라처럼 지역색으로 호화찬란하게 도배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연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당이 카드를 내어주면서 다른 정당과 손을 잡을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식 여당에 해당하는 총리 자리는 대통령 집권에 실패하더라도 어떻게 해볼 여지가 좀 열려 있다. 내 관찰에 의하면 프랑스는 대통령직보다도 총리가 누구인가가 진짜로 국정운영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사르코지는 우파이면서 대표적인 강성이다. 이로 인해서 가장 타격을 받게 될 정치집단은 오히려 극우파들일 수 있다. 영역과 정책이 겹치기 때문이다. '68년의 종언'이라고 호기있게 사르코지가 치고 나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총선까지 지켜봐야 알 수 있다. 하여간 현재로서는 독기가 단단히 올랐다.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도입은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관리 강화 등 대체적으로 극우파 정책들이 도입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미테랑은 물론이고 시락도 극우파는 아주 싫어했다. 미테랑 시절에 우파들이 총리를 먹고 파스쿠아라는 아주 강성 정치인이 내무부장관을 했던 적이 있었다. 무섭던 시절이었는데, 이젠 대통령이 그렇게 하겠다니 사방에서 곡소리가 날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마냥 한 방향으로 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견제장치들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프랑스는 그 처절한 '민중'이라는 실체가 눈을 뜨고 버젓이 살아있다. 50%의 투표율을 기록할 수 없어서 투표에서는 지지만, 그래도 몸으로 정책을 막는 일 정도는 아직 할 정도의 정신과 기백은 남아있는 듯하다.

6.
프랑스 대선을 보다가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면 심란하다. 프랑스에서는 우파가 대통령이 되고 좌파가 졌다고 대서특필하던 언론들이 갑자기 우리나라 얘기만 하면 진보와 보수라는 또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이거 우습다. 프랑스식으로 살펴보면, 한나라당의 일부는 극우파에 가깝고, 그 안에 시락주의자들이나 일부 분파들이 열린우리당에 가깝다. 순전히 우파들끼리 나와서 서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이 우리나라 모습이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이미 권력에 깊이 물든 프랑스 사회당이 좌파 정당으로서는 민주노동당보다 더 선명할 정도이다. 좌우 대립의 구도로 간다면 민주노동당의 왼쪽에 또 다른 정당들이 '나래비'를 서 있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좀 다르다. 내 생각으로는 진보/보수라는 말장난하다가 이렇게 된 것 같기는 하다. 지금이라도 좌파들이 자신을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게 무슨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때로 우습고 때로 서글프다.

7.
패배를 자꾸 경험하거나 자꾸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먼 나라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당장 사르코지를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비교하거나 혹은 사르코지옹이라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걸면서 깃발 들고 나선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이 안쓰럽다. 먼 나라의 일이 아니라 당장 우리나라의 민주노동당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난다. 솔직히 민주노동당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당장 나부터 그렇다. 그래도 나름대로 선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셈인데, 그야말로 마음이 안 좋기는 정말 안 좋다.

8.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들은 너무 모범생 같아 보인다. 한 쪽에서는 사생결단을 내리고, 수틀리면 "당 뽀갠다"고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경선'을 다짐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범생 같아 보인다. 그렇다고 나라고 무슨 뾰족한 답이 있을 리 없으니 지켜보는 심정이 답답할 따름이다. 다당제가 제대로 정착해서 연정과 같은 고급스러운 메카니즘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좌파라면 경기들어서 손을 파르라니 떨 사람들이 당장 내 어머니, 내 아버지인데, 좌파의 깃발을 높이 들라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또 하고 있는 것도 우습다.

대선 시뮬레이션에서 한 번도 사르코지를 이기지 못했던 루아얄을 지켜보던 많은 프랑스 좌파들이 심정이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뭐 좀 쌈박한 거 없어?" 그런데 그게 정책의 눈으로 보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정책에는 기술적인 검토와 대중적 지지라는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필요한데, 이게 거의 마케팅에 버금가는 예술의 영역이라서 골방에서 죽어라고 계산해봐야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9.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많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면 좋겠다. 민주노동당이 대한민국 대선에서 승리한다... 국제적인 세계화의 흐름이 멈칫하고, 전세계적인 지형도가 바뀔 일이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다다익선 FTA'를 멈춰 세우고, 민중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일이 더 있겠는가?

꿈도 머리가 아파서 잘 못꿔진다. 우리나라의 좌파가 지금 그렇다. 현재로서는 민주노동당 외에는 대안이 없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당장 내 주위의 동료들만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뭔가 엑기스 하나가 더 필요한 것 같은데, 대선주자들이 모범생 같이 움직여서는 그런 엑기스가 생겨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프랑스는 프랑스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현실로 돌아오면 더 머리가 아프다.

"좌파가 돼도 나라 안 망한다"고 지금부터 편지를 쓰라고 하면, 나도 한 50통 정도는 못 쓰는 글씨지만 쓸 생각이 있다. 뭐든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래도 민주노동당이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가 뭘 좀 제시해주면 좋겠다. 연말에 소주 마시면서 "우리나라는 안 된다"는 소리나 하고 있기 보다는 팔 아픈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 있다.

하여간 루아얄에게는 사람들이 바라던 "뭔가"가 마지막 TV 토론 때까지도 결국 안 나왔다.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들에게는 "뭐"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뭣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래서 말도 안되는 대 역전드라마가 종종 나오는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우석훈 / 성공회대 외래교수)

07.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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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5-0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도 언능 독서문답 써주소서. santa가 목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출처 : 비내리는숲 > 섹스 대백과사전
섹스 - 사용설명서 1
스티븐 아노트 지음, 이민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이 사람의 눈길을 확 끌 정도로 자극적이다.  제목은 마치 섹스 테크닉을 가르쳐 주는 것 같지만 내용은 섹스에 관련된 잡다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사용설명서-섹스'보다 '대박과사전-섹스'가 더 잘 어울린다. 그런데 뒷 제목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전문적인 느낌이 들어 별로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판매부수를 위해서는 앞 제목이 나은 것 같다.

이 책 주제는 고작 섹스 하나지만 다루는 범위가 매우 넒고 다채로워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을 다 알아냈는지 궁금할 정도다. 눈길을 끄는 내용 몇 가지를 말하겠다.

 

1. 1991년 터키의 한 남성이 바람피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의 음경을 잘랐다.

2. 뉴기니의 한 부족은 성인식때 소년들이 부족의 전사들에게 구강성교를 해줘야 한다. 정액을 삼키는 것은 연장자의 힘과 생식력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3. 힌두 여성들은 서양 남성을 시골닭이라고 한다고 한다. 성교를 너무 빨리 끝내기 때문이다.

4. 항문성교는 전세계적으로 동성보다 이성간에 더 많이 일어났는데 그 까닭은 피임을 하기 위해서다.

5.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에서 팔린 포르노소설의 제목들

-어느 신사의 정원사가 최근에 처녀막의 숲에서 발견한 어린 메를랭의 동굴(이게 다 제목임)

-즐거운 방망이

-실화:어느 처녀의 지독한 채찍질과 그 유쾌하고도 참혹한 결과

6. 1980년에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천국에는 섹스가 없다고 선언했다.

7.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최음제들-마늘, 꿀, 장어, 고기. 고기는 높은 단백질이 아미노산을 만들어내어 몸속 감각활동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8. 고대 이집트 신 오시리스는 자위행위로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며 파라오는 대관식이 거행하는 동안 자위행위를 했다고 한다.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면서도 삶에 도움되는(?) 책을 읽어보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눈이 번쩍 떠지는 내용이 아주 가득하다. 단 이런 내용이 너무 많아서 뒷쪽으로 가면 좀 식상해진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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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새로운 주체로서의 다중과 다중운동의 방향

* 진보평론 제 28호  / 새로운 주체로서 대중과 대중운동의 방향

진보평론  제28호
윤수종󰋯전남대 교수/ 사회학과

1. 머리말

왜 인간들은 마치 노예상태가 자신들의 구원인 것처럼 완강하게 자신들의 노예상태를 위해서 싸우는가? 왜 대중은 복종을 달게 받고 있는가? 왜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억압을 자청하고 있는가?
대중의 권리를 대표자에게 양도한다는 계약론적 정치철학이 지배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라면, 위 질문들은 정치철학의 근본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공포와 희망의 정치학이라는 계보 속에서 대중은 왜 복종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결국 대중은 자유를 지니고 있는데 왜 그것을 버리고 비자유, 즉 복종을 하게 되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서구사상에서 볼 때에는 ‘홉스-루소-헤겔-하버마스’라는 지배적 사유노선의 계약론적 정치사상(통치학)에 대립하여,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라이히-네그리’라는 유물론적 사유노선(공포와 희망의 정치학)은 대중의 자유를 확장해 나가는 정치사상을 전개해 나간다.
이 글에서는 최근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 근거하면서 대중을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체로 설정해 나가고 있는 네그리의 논의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앞서의 질문들을 제기한 사람 가운데 라 보에티(La Boetie)와 라이히(Wilhelm Reich)의 논지를 간략히 소개하고 네그리의 논의를 소개하겠다. 마키아벨리 이후에 그리고 스피노자 이전에 앞서의 질문들을 제기한 사람으로 라 보에티를 들 수 있다. 16세기 중엽에 라 보에티는 󰡔자발적 복종󰡕이라는 텍스트 속에서 ‘과연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 그렇게 많은 마을과 도시, 그렇게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독재자의 전제정치를 참고 견디는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가’하고 질문한다. 그는 인민들의 자발적 복종이 독재자를 지켜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를 느끼고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 ‘인민들이 노예가 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면 전제군주는 즉시 굴복하였을 것이다.……폭군에게 허리를 굽히는 짓거리를 그만둔다면, 인민은 조만간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따라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들은 인민이다.……자유란 오로지 그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가?……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치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시킨다.……독재자가 너희의 적이다! 오직 너희가 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는 막강할 뿐이다.……독재자는 너희의 힘(역능)을 능가할 권력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너희에게는 자유에 대한 욕구와 의지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재자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라. 너희들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다만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족하다.’
이러한 라 보에티의 문제제기와 권고는 이미 마키아벨리에 의해, 그리고 나중에는 스피노자에 의해 대중의 역능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구성해 나감으로써 대중의 자유를 확장해 나가려는 정치론으로 이어진다.
맑스주의 등장 이후 대중의 자유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천의 문제로 제기되어 왔다.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에 의해 지도받는 대중이라는 그림이 그려지고 대중에 대한 논의나 민주주의의 구체화과정에 대한 문제는 온전히 이념을 확보한 전위당에게로 위임되었다. 물론 전위당은 노조나 다른 대중조직(인민위원회나 소비에트)들과 연계를 맺으면서 대중과 접촉하였으나 이러한 조직들은 전달벨트가 되어 버렸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이러한 현상을 누구보다도 빨리 감지하고 대중에게 관심을 돌린 사람이 바로 라이히이다.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제자로서 정신분석에 입문하여 프로이트의 리비도이론을 부여잡고 오르가즘론으로, 에너지론으로, 생체발생학으로 나아갔다. 그 와중에 라이히는 맑스주의와 접하면서 대중(Mass)의 정신건강이라는 문제를 제기했고 특히 대중의 정신건강은 치료보다는 예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노동자계급’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권위주의적 가족과 성억압이 대중의 성격구조를 비합리적으로 만들어서 파시즘에 복종하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것을 파헤치는 학문으로서 대중심리학을 제기한 라이히는 대중의 성억압을 철폐하고 오르가즘을 충만하게 함으로써 자율적인 인간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지배하는 정치’에 대립하는 ‘자연스런 노동민주주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이히는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계급의식)에 대해서도 대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도부, 혁명전위의 의식과 평균적 시민, 대중의 의식을 구분한다. 그는 계급의식의 구체적 요소들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청년들의 의식, 여성들의 의식, 어린이의 의식, 성인노동남성의 의식 등으로 구분하여 계급의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 의식과 결합해 나가는 것으로 고려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에 비추어볼 때, 라이히가 억압가설에 입각해 있다는 푸코의 주장에 따라 라이히의 논의를 축소하기보다는, 억압가설에 입각해 있을지라도 억압되어 있는 대중의 자유(해방)를 향한 그의 여러 가지 탐색들을 강조하고 새로운 주체로서 대중을 사고하는데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약간 다른 측면이지만, 가타리의 친구인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는 폭력의 집중화와 국가의 발생이란 문제에 천착하면서 아직 권력이 만들어지지 않은 원시사회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왜 인민은 복종을 원하는가 라는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민이 권력에 복종하게 되었는가를 원시사회를 분석함으로써 밝히려고 한다. 원시사회에는 권력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 다양한 기제들이 발동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흐름과는 달리 군중(crowd)이나 대중(mass)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의 흐름이 있다. 이성의 시대에 감정과 선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군중(대중)에 대한 불안한 시선이 있어 왔다. 르 봉(Gustave Le Bon)은 한 세기 전에 ‘현대는 군중의 힘을 중시해야 하는 군중의 시대다’라고 하면서 낡은 이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이념이 태동하지 못한 공백기의 불가피한 현상으로서 군중이 지배세력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군중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로봇처럼 비이성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군중의 시대에는 대중의 격정과 원동력을 이끌어 내는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실 르 봉은 대중의 자유를 생각하기보다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대중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를 군중이란 틀을 통해 분석하고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의 등장에 주목한 다른 사람으로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가 있다. 가세트는 1920년대 말에 󰡔대중의 반역󰡕이라는 책에서 ‘어디를 가나 군중들로 가득차 있다’고 하면서 당시의 특징은 대중의 출현이라고 얘기한다. 대중은 특별한 자질이 없는 사람들의 집합체이며, 따라서 ‘노동대중’을 포함하는 ‘평균인’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대중이 이전부터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대중이 스스로 지배하려든다는 것이 새로운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른바 대중의 반역이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주체는 개별 영웅이나 대중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거쳐 살아가는 당시대의 소수와 대중이 엮어내는 역동적인 조합이라고 본다. 따라서 선택된 소수와 대중이 각각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는 길(참된 도덕을 회복하는 길)이 해결책이라고 제시한다. 대중은 도덕이 없다고 한다. 가세트는 대중의 공포를 느끼면서 도덕으로 진정시키려고 한다. 물론 대중의 자유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군중(대중)에 대한 관심은 파시즘을 겪으면서 ‘군중(대중)과 권력’이라는 문제에 집중된다. 라이히도 왜 대중이 파시즘에 끌렸는가에 대해서 해명하려고 한다. 카네티(Elias Canetti)는 군중과 권력은 서로 극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둘 중 어느 한편이 결핍되면 나머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다양한 종류로 군중을 부분하고 군중의 움직임을 분석하면서, ‘오늘날 권력자들은 종전처럼 그들이 권력자이기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인과 동등한 사람이기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아주 오랜 구조, 즉 권력의 심장부이자 핵심부는 바로 권력자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해묵은 권력구조가 스스로 불합리함을 증명함으로써 산산조각 나 있다. 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덧없기도 하다.’(621쪽)고 말한다.
이러한 군중(대중) 논의는 미국식 ‘대중사회론’에서는 획일적이고 수동적인 대중과 대중매체에 의한 지배를 강조하는 쪽으로 간다. 물론 그 안에서 ‘고독한 군중’을 바라보면서 주체성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독점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자동인형처럼 되어 가는 일차원적 인간은 개인으로서는 군중 속에 있지만 고독함을 느끼는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대중 주체가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최근에는 휴대폰과 인터넷으로 무장한 새로운 군중이 등장하였다. 새로운 도구들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쟁점들에 개입하는 영리한 군중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리한 군중이 항상 현명한 군중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인터넷 공간도 단순히 도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군중의 또 다른 공간만들기 과정으로서 중요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군중 혹은 대중에 대한 관심이 최근 네그리의 대중론에서는 서로 얽혀들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네그리의 대중론은 기본적으로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의 논의에 기반하여 자유를 추구하는 대중을 강조하면서 맑스주의의 계급 개념을 확장해 나가려고 한다. 즉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게서 대중의 역능(puissance)에 입각하여 민주주의를 구성해 나가는 정치론을 발견하고 그것을 변형하여 현 시대에 적용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네그리의 대중 개념을 정리하고 그러한 대중의 운동 및 운동방향에 대해서 현상적인 정리를 하고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2. 대중―새로운 주체

네그리에 따르면 대중(multitude)은 제국 안에서 성장하는 살아 있는 대안이다. 전지구화(세계화)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의 얼굴로서 제국은 통제 및 항상적 갈등의 새로운 기제들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위계들 및 분할들의 네트워크를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킨다. 다른 얼굴로서 전지구화는 협동과 협력의 새로운 순환들을 창조하기도 한다. 이 다른 얼굴이 대중이다. 즉 제국에 대항하는 대중이라는 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 개념을 네그리는 스피노자에게서 끌어온다. 스피노자에게 대중은 공적인 무대에서, 집단적 행동에서, 공동체의 사태를 처리하는데서 하나로 수렴되지 않은 채 운동의 구심점인 형태 내부에서 소멸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존속되는 다원성(복수성)을 가리킨다. 스피노자에게서 대중이란 다수로서의 사회적․정치적 실존형태라고 한다.
이러한 대중 개념을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하여 다른 개념들과 비교해 보자. 앞에서 얘기되어온 군중(crowd) 혹은 ‘대중’(mass)은 수동적 주체들로서 이성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감정과 격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군중을 이루는 상이한 개인들이나 집단들은 비일관적이고 공통의 공유된 요소들을 전혀 인식하지 않으며, 그들의 차이의 집적은 활성화되지 않은 채 있으며 쉽게 하나의 무차별적인 결집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군중, ‘대중’, 무리(mob)로 표현되는 주체들은 스스로 행동할 수 없고 지도받아야 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다.
인민은 전통적으로 통일적인(unitary) 개념이다. 물론 주민은 온갖 종류의 차이로 특징지워지지만 인민은 그 다양성을 하나의 통일체로 환원하며 주민에서 단일한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즉 ‘인민’은 하나다. 인민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는 것을 배제하고 그것과 자신의 차이를 설정하면서 내적으로는 정체성과 동일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인민은 주권을 위해 준비된 구성된 종합이다. 인민은 대중의 다양한 의지들 및 행동들로부터 독립적이고 종종 그것과 충돌하기도 하는 하나의 단일한 의지 및 행동을 제공한다. 사실 인민 개념은 좌파의 민족해방운동을 통해서 국민국가의 진보성을 담지한 주체로서 인식되어 왔다. 흔히 인민민주주의로 표현된 정체에서 잘 드러나듯이 말이다. 또한 우파의 입장에서는 국민국가의 내실이 빈약할 때마다 인민 개념을 동원하여 채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실은 인민(민중) 개념은 주권국가(국민국가)의 토대로서 여겨져 왔다.
‘대중(mass)’은 통일성이나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인민과 대비된다. ‘대중’은 확실히 온갖 유형과 종류로 이루어져 있지만, ‘대중’의 본질은 무차별성(indifference)이다. ‘대중’ 속에 모든 차이들이 가라앉고 빠져버린다. 주민(일정한 경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모든 색깔은 회색으로 된다. 이러한 ‘대중’은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형태의 혼합체를 이룰 때만 하나가 되어 움직일 수 있다. 미국식 대중사회론에서는 특히 대중매체에 의해서 획일화되고 수동적인 주체로서 이러한 ‘대중’을 현대 사회의 주요한 사회구성원으로 분석한다.
대중, 인민 개념과 관련하여 살펴볼 개념으로는 국민 개념이 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사이에, 서구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국민 주권 개념이 출현하였다. 일정한 영토 안에서 언어적 생활적 인종적 공통성을 지닌 주민 집단으로서 국민(민족)은 국민국가의 토대로 생각되었다. 국민국가의 구성의 근거로서 말이다. 그러한 국민개념이 국가권력의 구도 위에서 통일된 주민집단이라지만 그 내적 역동성이 미약해지자 인민을 언급하게 된다.
인민이나 ‘대중’, 국민에 비해 대중(다중)은 복수성, 특이성들로 구성된 열린 집합이며, 그 자신과 동질적이거나 동일하지 않고 자신을 벗어난 관계들과는 불분명하고 포괄적인 관계를 지닌다. 즉 대중은 확정적이지 않은 구성적 관계이며, 하나가 아니라 다수이다. 대중은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차이들은 통일적인 혹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상이한 문화, 인종, 인종성, 젠더, 성적 지향, 상이한 노동형태, 상이한 생활방식, 상이한 세계관, 상이한 욕망 등등. 대중은 이 모든 특이한 차이들로 이루어진 복수성이다. 그리고 이 차이들은 어떤 동일한 것으로 환원(축소)할 수 없는 것이다. 대중을 구성하는 특이한 사회적 차이들은 항상 표현되어야 하며 동일성, 통일성, 정체성, 혹은 무차별성으로 평면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중 속에서 사회적 차이들은 다른 채로 남아 있다. 대중은 특이성들의 총화이다. 즉 대중은 여러 색이다.
이러한 대중 개념이 제기하려는 것은 내적으로 다른 채 있으면서 공통적으로 소통하고 활동하자는 것이다. 대중은 특이성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것의 기초 위에서 행동하는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를 가리킨다. 대중의 구성과 행동은 정체성이나 통일성(혹은 훨씬 덜한 무차별성)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지도를 받아야 하기보다는 스스로 공통성을 만들어 가고 자신들을 조직화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자 그러면 대중 개념을 맑스주의적 맥락과 연관시켜 좀더 파악해 보자. 맑스주의 논의에서는 자본주의사회의 기본계급이면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로 설정되는 노동자계급이 있다. 그런데 사실 노동자계급 개념은 배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노동할 필요가 없는 소유자들로부터 노동자를 구분하고 또한 노동자계급을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식으로 말이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노동자계급 개념은 농업, 서비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과 구분하면서 산업노동자들만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었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가난하고 임금을 받지 않는 가사노동자들 및 임금을 받지 않는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구분되는 ‘모든 임금받는 노동자들’을 나타낸다. 대중은 반대로 열리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대중은 전지구적 경제의 최근의 전환들의 중요성을 포착하려고 한다.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전지구적 경제에서 헤게모니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 수가 전세계적으로 줄어들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생산은 경제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더욱 일반적으로 사회적 생산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물질적 재화의 생산뿐만 아니라 소통․관계․생활형식의 생산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대중은 사회적 생산의 온갖 다양한 형상들로 잠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터넷 같은 분산된 네트워크가 대중의 좋은 첫 이미지이자 모델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노드(node)들은 다른 채 있지만 모두 웹에 연결되어 있으며, 네트워크의 외적 경계는 각 노드들과 새로운 관계들이 항상 추가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또한 인종, 성, 성정체성 차이들을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사회는 자본과 노동, 소유자와 비소유자, 비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분할로 특징지어지기도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경제적 차이들뿐만 아니라 인종, 종족, 지리(입지), 성, 성정체성, 그리고 다른 요소들에 근거한 잠재적으로 수많은 차이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중 개념은 이러한 차이들을 체현한 집단들을 포괄하려고 한다. 그와 더불어 대중 개념은 맑스의 계급투쟁이란 정치적 기획을 확장해서 제기한다. 필연적으로 존속하는 수많은 특정한 노동유형들, 생활형식들, 지리적 입지 등에 따라 공통적 정치적 기획을 해 나가기 위해 소통과 협동을 촉진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
적극적으로 규정한다면, 대중은 ‘자본 아래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그러므로 잠재적으로는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배제원리에 입각하여 구성된 노동자계급 개념을 사용할 경우,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다른 노동형식들을 배제하는 것은 예를 들어 남성산업노동과 여성재생산노동, 산업노동과 농업노동, 고용된 노동과 비고용된 노동,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빈민) 사이의 종류의 차이들이 있다는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일차적인 생산적 계급이고 직접적으로 자본 하에 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자본에 효과적으로 대항해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다른 피착취계급들도 자본에 대항해 투쟁할 수 있지만 노동자계급의 지도에 따라서 해야 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이에 반해 대중 개념은 노동형식들 사이에 어떤 정치적인 우선성도 없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즉 모든 노동형식들은 오늘날 사회적으로 창조적이며 공통적으로 생산하며 또한 자본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공통적인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산업노동이나 노동자계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 안에서 다른 노동계급들과 관련하여 어떤 정치적 우선권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노동자계급 개념을 특징짓는 배제와는 반대로 대중은 열린 확장적인 개념이다. 노동자계급 개념보다는 좀더 폭넓은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산업노동자 외에도 가사노동자나 여타 주변적 노동자들을 포함)에서 더 나아가 대중은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제기하는 것은 이제 노동을 분할하는데 사용된 종류의 차이들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달리 말해서 다양한 종류의 노동이 소통하고 협동하고 공통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실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 개념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가난한 사람(빈민)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먼저 네그리는 임금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빈민(가난한 사람들), 실업자, 비임금자, 홈리스 등―은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고 있고 당연히 대중에 속한다고 본다. 거대한 위계 및 복종 메커니즘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산의 엄청난 힘(역능)을 표현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국의 전지구적 질서의 희생자들이지만 동시에 강력한 행위자들이다. 다양한 서비스노동에 빈민이 참여하는 것, 농업에서 빈민들이 더욱 증대되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 거대한 이주 등에서 볼 수 있는 빈민들의 이동성 등은 그들이 사회적 생체정치적 생산의 순환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빈민은 전통적으로 노동하는 모든 계급들과 함께 사회적 생산과정에 점점 더 포함되고 있다.
전통적인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은 빈민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조직의 어떤 중요한 역할에서도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당은 전통적으로 헤게모니적인 생산형식에 고용되어 있는 전위노동자들로 이루어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조직의 성원이 될 수 없었고, 실업자 빈민은 더욱 더 아니었다. 더욱이 빈민은 위험하다고 인식되었다. 비생산적인 사회적 기생충―도둑, 매춘부, 마약중독자 등―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위험하다고, 혹은 비조직화되어 있고 예측불가능하고 경향적으로 반동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인식되었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는 종종 빈민 전체를 악마화하는데 기능하였다. 게다가 빈민은 산업이전적 사회형식들의 잔여로, 일종의 역사적으로 거부된 형태일 뿐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정당적 맑스주의의 편향이기도 했다. 대중파업을 강조하면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성과 봉기적 성격을 강조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있었고, 레닌조차도 정세에 따라서 소비에트와 농민들의 자생적 조직화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주류 공산주의적 흐름(정당적 맑스주의)에 눌려버렸지만 다양한 코뮌들을 확산시킬 것을 강조하는 평의회 맑스주의의 흐름도 있었다. 당연히 대중 논의와 관련하여 이러한 흐름을 강조하고 복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용어에서 빈민을 맑스주의자들은 ‘산업예비군’으로 분석하기도 하였다. 일시적으로 실업상태이지만 언제든 생산에 투여될 수 있는 잠재적 산업노동자의 저장고로서 말이다. 산업예비군은 현존노동자계급의 머리위에 걸려 있는 항상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산업예비군의 비참함은 노동자들에게 생길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끔찍한 실례로서 기능하며, 산업예비군이 나타내는 노동의 과잉공급은 노동비용을 낮추고 고용주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힘을 훼손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잠재적으로 파업파괴자로 기능한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론이 전지구화 상황에서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기업들은 일종의 노동‘덤핑’을 통해 노동의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 직무들을 이동시키고, 상이한 나라들에 있는 노동 및 노동조건의 거대한 차이들을 이용한다. 지배국들의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작업장이 폐쇄되고 그들의 직무가 수출될 것이라는 압력 아래 살고 있다. 그러므로 가난한 전지구적 남부는 전지구적 북부에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남부의 다른 부분들에 있는 노동자들에 대항하여 전지구적 자본이 지키는 산업예비군의 위상으로 나타난다(예를 들어 사업체들을 중국으로 옮기겠다는 위협이 남북 아메리카의 노동자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많은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 정치기획들이 각 나라 안에 있는 산업예비군의 파괴적 압력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구하려 노력했듯이, 오늘날 지배적인 나라들의 많은 노조들은 종속국들의 가난한 노동자들의 압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구하려는 책략들을 채택하고 있다. 즉 자본가들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분할 및 배제전략에 동조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빈민이나 전지구적 남부를 산업예비군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첫째, 일관된 정체성을 지닌 산업노동자라는 의미에서의 ‘산업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고용자와 실업자 사이의 사회적 구분이 더욱 더 흐려지고 있다. 안정되고 보장된 고용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란 어떤 직업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분명한 구분이 없고, 오히려 모든 노동자가 고용과 실업 사이를 불안하게 오가는 거대한 회색지대가 있을 뿐이다. 둘째, 어떤 노동력도 사회적 생산 과정을 벗어나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예비’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 빈민, 실업자는 그들이 임금지위를 가지지 못할 때조차 사회적 생산에서 사실상 활동적이다. 생존전략들 자체는 종종 비상한 자원상의 풍부함과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 사회적 생산이 더욱 더 비물질적 노동에 의해 규정되면서 빈민을 포함한 사회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활동성은 더욱 더 직접적으로 생산적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아무래도 경향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중 가운데 특히 빈민은 자본에게 직접적으로 고용되거나 연계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색다른 활동들에 개입하며 자본은 바로 이러한 부분을 이윤화하는데 열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빈민은 실제로 비상하게 부유하고 생산적이다. 생체다양성의 측면에서 세계의 가장 가난한 지역들 가운데 일부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전지구적 남부는 풍부하고 상이한 동식물 종들을 갖고 있다. 더욱이 가난한 주민들, 특히 원주민들은 이들 동식물종들과 함께 살고 그들과 관계 맺는 다양한 지식들을 갖고 있다. 물론 지배국들에서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비물질적 노동의 결과인 이러한 지식들은 경제적 부로 측정, 평가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부는 전지구적 사회적 생산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된다는 의미에서 정말 빈민은 자신들이 배제되거나 종속될 언어공동체에 참여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돕기 때문에, 능동적이고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고 잠재적으로 반란적이다. 언어공동체 안에서 빈민의 역설적 위상은 좀더 일반적으로 사회적 생산 안에서 그들의 위상을 나타내준다. 실제로 빈민은 이와 관련하여 모든 창조적인 사회활동의 공통적 표현으로 기능할 수 있다. 빈민은 저항뿐만 아니라 생산적 생활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을 구현한다.
특히 이주자는 바로 빈민의 특정한 범주로서 이러한 부와 창조성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항구적 이주자, 계절노동자, 뜨내기노동자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이나 관념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의 문화적 차이와 이동성으로 인해 그들을 안정된 핵심 노동자 형상과 구분하였다. 그러나 현대 경제에서 그리고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관계와 더불어, 이동성이 점차 노동시장 전체를 규정하고 모든 노동범주가 이주자에게 공통적인 이동성 및 문화적 잡종화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유럽 사람들은 외부의 빈 공간으로 이주했지만 오늘날 많은 이주자들은 충만한 곳, 지구의 가장 부유하고 특권적인 영역을 향해서 이주한다. 북미, 유럽, 아시아, 중동의 거대한 대도시들은 이주자들을 끄는 자석들이다.
이주자들이 지닌 부유함은 어떤 것에 대한 욕망,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확실히 대개의 이주자들이 폭력, 기아, 결핍이란 조건들을 피하기 위한 요구에 의해서 추동되지만, 또한 부정적 조건과 더불어 부, 평화, 자유를 향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탈주의 경험은 자유를 향한 욕망의 훈련과정 같다. 물론 모든 종류의 빈곤은 그 나름대로의 특정한 고통을 동반하지만 말이다.
20세기를 통하여 빈민들의 운동은 고립분산성을 극복해 왔다. 오늘날 빈민들의 투쟁은 더욱 일반적이고 생체정치적인 성격을 띨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경향이 있다. 전지구적 남부에서의 투쟁, 제1세계 속의 제3세계화라는 현상 속에서 서구에서의 실업자, 이민노동자의 투쟁이 전개되어 왔다. 이들은 ‘우리는 모두 빈민이다!’라는 구호 아래, 빈곤의 공통적 조건에 대한 저항, ‘보장된 소득’에 대한 요구를 해 왔다. 가난한 자는 빈곤하며, 배제되고, 억압받고, 착취당한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다! 가난한 자는 삶의 공통분모이며, 대중의 토대이다. 가난한 자는 어떤 점에서는 영원한 탈근대적 형상, 즉 횡단적이고, 어디에나 현존하고, 다르고, 이동적인 주체의 형상이다.
3. 비물질적 노동과 대중

이상과 같은 대중은 개념적 수준에서 분명한 것 같지만, 누가 이러한 대중인가? 노동하는 주체의 현실이 대중에 대한 일차적인 경험적 규정을 제시하기 때문에 현재의 노동 형식들과 노동 분업들을 탐구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네그리는 푸코의 생체권력 개념과 들뢰즈의 통제[관리]사회 개념을 끌어들어 탈근대 시대의 생산 및 정치의 변화를 설명한다. 이와 함께 주체성의 변화로서 대중의 형상을 노동의 변화에서 찾으려고 하며 그 형상은 산업노동의 헤게모니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로 바뀌어 간다고 강조한다.
네그리는 비물질적 노동의 논의를 맑스의 󰡔요강󰡕에 있는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 언급된 ‘일반적 지성’이란 개념에서 끌어오고 있다. 자동기계화가 진전되면서 필요노동이 0이 되는 지점에서 오히려 대중이 지닌 ‘일반적 지성’이 생산력을 담보해 나간다고 한다. 일반적 지성 개념은 그후 생산의 생체정치적 생산으로의 변화와 더불어 노동의 비물질적 노동으로의 변화를 설명하는 주요 축이 된다. 여기서는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러면 대중의 노동형상인 비물질적 노동에 대해서 알아보자.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헤게모니적인 위치를 잃고 대신 비물질적 노동이 등장하였다. 비물질적 노동은 지식, 정보, 소통, 관계, 혹은 감정적 반응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을 창조하는 노동이다. 서비스노동, 지식 노동, 인지적 노동 같은 관습적인 용어들이 비물질적 노동의 측면들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비물질적 노동의 일반성을 담고 있지는 못하다.
먼저 비물질적 노동은 두 가지 주요형식들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해결, 상징적 분석적 과업, 언어적 표현과 같이 일차적으로 지적이거나 언어적인 노동을 나타낸다. 이러한 종류의 비물질적 노동은 아이디어들, 상징들, 코드들, 텍스트들, 언어적 형상들, 이미지들 등등 다양한 것들을 생산한다. 두 번째 ‘정서적 노동’을 나타낸다. 정신적 현상인 감정과는 달리 정서는 신체와 정신을 동등하게 나타낸다. 기쁨, 슬픔과 같은 정서는 전체 유기체 속에서 현재의 생활상태를 나타내며, 어떤 사고양식과 함께 신체의 어떤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정서적 노동은 편함, 행복, 만족, 흥분 혹은 정념의 느낌과 같은 정서들을 생산하거나 조종하는 노동이다. 지배국들에서 정서적 노동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표시는 고용주들이 피고용인이 필요로 하는 일차적 숙련으로서 교육, 태도, 성격, 그리고 ‘친사회적’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비물질적 노동을 포함하는 대개의 현실적인 직무들은 이 두 가지 형식들을 결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통의 창조는 확실히 언어적이고 지적인 작동이지만 또한 필연적으로 소통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정서적 관계를 지닌다. 저널리스트들과 매체는 일반적으로 정보를 보고할 뿐만 아니라 그 뉴스를 매력적이고 흥분하게, 욕망할 만하게 만들어야 한다. 즉 매체는 정서와 생활형식들을 창조해야 한다. 사실 모든 소통형식들은 상징·언어·정보의 생산과 정서의 생산을 결합한다. 비물질적 노동은 거의 항상 물질적 노동형식들과 섞인다. 예를 들어 건강보호노동자들은 침대보를 청소하고 반창고를 갈아주는 것과 같은 물질적 업무와 정서적·인지적·언어적 업무를 수행한다. 모든 비물질적 생산에 포함된 노동은 물질적인 채 남아 있다. 즉 모든 노동은 우리의 신체와 두뇌를 포함하고 있다. 비물질적인 것은 그것의 생산물이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에 모든 노동과 사회가 산업화되어야 했던 것처럼, 오늘날 노동과 사회가 정보화하고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이게 되고 정서적이게 되려고 한다. 즉 비물질적 노동화 하려고 한다. 그리고 헤게모니적인 노동형상이란 양적인 의미에서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노동형상들에 대해 변형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에서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산업노동이 전지구적 경제에서 헤게모니적이었다고 해도 양적으로는 소수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현재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이라는 것도 이처럼 다른 노동형태들에 대해서 변형력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현재 농업노동과 여성노동은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변형되고 비물질적 노동의 성격을 띠어가지만, 농민은 전지구적 경제에서 더욱 잔인한 착취형태로 고통을 당하며, 여성들은 종속적인 지위에서 정서적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고도로 정서적인 요소를 지닌 노동은 일반적으로 여성화되고(여성이 담당하고) 권위는 적게 주어지고 보수도 적다. 더욱이 정서적 생산이 임금노동에 속하게 될 때 그것은 극도로 소외당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이처럼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는 모든 노동을 즐겁게 만든다든가 보상을 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고, 작업장에서의 위계와 명령이나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줄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는 노동조건을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특히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이 점점 더 명확히 구분되지 않게 된다. 점차 노동시간은 전체 생활시간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경향이 있다. 작업장(사무실)과 집이 구분되지 않고, 여가를 즐기면서도 일을 생각하게 된다.
고용상황을 보면, 공장노동자의 전형적이고 안정된 장기고용이 유연하고,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노동관계로 특징지어지는 고용으로 바뀐다. 노동자들이 상이한 업무에 적응해야하기 때문에 유연하며, 종종 직업간에 이동하기 때문에 유동적이며, 어떤 계약도 안정적인 장기고용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제국) 아래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를 증명해 주는 것들을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고용에서의 새로운 경향들이다. 지배적인 나라들에서는 음식제공자들, 판매원들, 컴퓨터엔지니어들, 교사들, 건강노동자들 등이 가장 빨리 성장하는 직업군이다. 전통적인 산업과 농업은 부차적인 부분으로 되어간다. 이러한 경향은 전지구적인 권력 및 노동 분할과 일치하여 나타나고 있다. 둘째, 다른 노동 및 생산 형식들이 비물질적 생산의 특성들을 채택(적용)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제조업 노동과 생산도 소비자의 수요와 취향을 조사하고 그에 기반하여 변형되면서 생산해 나간다. 셋째, 비물질적 노동이 생산하는 비물질적인 소유형식들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특허, 지적 재산권, 다양한 비물질적 재화들(최근 사적 재산으로 보호될 수 있는 것들)이 중요해 지고 있다.
이렇게 대중의 사회적 구성과 기술적 구성이 변해간다. 현재의 노동과 생산의 장면은 정보, 지식, 아이디어, 이미지, 관계, 정서를 생산하는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아래 변형되고 있다. 현실에서 비물질적 노동자는 전지구적으로는 소수이지만, 비물질적 생산의 질과 성격이 다른 노동형태와 전체 사회를 바꾸는 경향이 있다.
비물질적 노동은 엄밀히 경제적인 영역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생산 및 재생산에 개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비물질적 노동은 사회 생활양식들을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생체정치적이다. 여기에 포함된 생산은 주체성의 생산, 즉 사회에서 새로운 주체성들의 창조 및 재생산이다. 또한 비물질적 노동은 소통, 협력, 정서적 관계에 기반한 사회적 네트워크 형식을 띠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대중이 노동의 측면에서 공통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새로운 투쟁(조직)방향

특이성을 지닌 대중은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아래에서 점차 공통성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면 이러한 대중은 어떻게 공통적으로(함께) 행동하는가? 대중은 어떻게 현재의 제국 권력 형식들에 항의하고 어떻게 대안을 제시해 나가는가? 여기서는 전쟁(투쟁)형식의 변화를 정리해 보면서 투쟁방향에 대해 제언해 보고자 한다.

1) 인민의 군대에서 게릴라전으로

식민권력에 대항한 모든 근현대 혁명투쟁은 무장대, 빨치산, 게릴라, 반도(叛徒)들을 인민의 군대로 형성해 나갔다. 좌파에게서 시민전쟁이라는 혁명적 개념의 일차적 특성은 게릴라 무리에서 집중화된 군대구조로의 이행을 포함한다. 인민의 군대 형성은 농민적 경험에서 산업노동자의 경험으로의 이행과 일치한다. 근대적인 인민의 군대는 산업노동자이고 게릴라세력들은 농민무장대들이었다. 분산된 게릴라조직의 통일된 인민의 군대로의 변형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닌다. 하나의 얼굴은 근대화라는 일반노선과 일치한다. 게릴라전쟁과 해방전쟁은 근대화의 구조적 동력으로 기능했다. 다른 얼굴은 다양한 지역적 게릴라조직들과 반란적 주민 전체의 자율성의 드라마틱한 상실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근대계급전쟁과 해방전쟁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지닌 비상한 주체성 생산을 가져왔다.
1960년대에 게릴라조직의 재등장은 인민군대의 집중화된 모델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민적 군대와는 달리 게릴라 구조는 탈중심화와 상대적 자율성의 모델을 제공했다. 쿠바모델의 새로움은 게릴라 전투적 경험의 일차성(우선성)을 긍정하고 게릴라세력을 하나의 정당에 종속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게릴라 포코(foco)는 배아형태의 전위당이었다. 결국은 단일한 권위, 단일한 개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중국의 문화혁명도 외부세계에는 반권위주의와 급진적 민주주의의 이미지였으나, 모든 형태의 권위를 공격하라는 마오의 요구는 오히려 그의 중심적 지위와 통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들 게릴라모델은 혁명조직이 더욱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형태들을 갖출 것에 대한 지속적인 열망을 나타내는 과도적 형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2) 네트워크 투쟁의 재발명

근대 혁명들과 저항운동의 계보를 돌아보면 ‘인민’ 관념은 인민의 군대와 게릴라모델들에서, 조직화의 권위를 확립하고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인민’은 지배적인 국가권위를 대체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주권의 형식이었다.
이러한 관념에 1968년 이후 변화가 일어났다. 게릴라전쟁의 본성이 농촌에서 도시로, 열린 공간에서 폐쇄된 공간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게릴라투쟁은 거대도시적인 형상이 되었다(중국, 쿠바 모델에서는 농촌이 우선시됨). 물론 붉은 여단처럼 집중화된 군사적 모델로 후퇴하는 것도 있었지만 탈중심화되고 다중심적인 도시운동들이 나타났다. 지배 권력을 공격하기보다는 도시 자체를 변형시켜 나갔다. 1970년대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운동이 두드러진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전반적으로 투쟁의 공간이 도시공간들로 분명히 전환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정보․소통․협동의 네트워크들이 새로운 게릴라운동을 정의하기 시작했다. 쿠바모델에서 게릴라세력들은 하나의 군대로 변형되어 갔다. 반대로 네트워크조직은 그 조직의 소통의 네트워크와 요소들이 다원성에 기반하고 있어, 집중화되고 통일된 명령구조가 불가능하다. 게릴라모델의 다중심적 형식이 네트워크형식으로 진전한 것이다. 네트워크 형식에는 중심이 없고 서로 소통하는 노드들의 환원할 수 없는 다원성이 있을 뿐이다.
대중의 네트워크투쟁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생체정치적 영토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대중의 네트워크투쟁은 새로운 주체성과 새로운 생활형식을 직접 생산한다. 근대의 군대는 포드주의적 공장의 훈련[훈육]된 노동자처럼 명령을 따르는 훈련된 병사를 생산했다. 근대 게릴라 세력들에서 훈련된 주체의 생산과 매우 유사했다. 네트워크 투쟁은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처럼 동일한 방식과 훈련에 의거하지 않는다. 창조성, 소통, 자기-조직화된 협동이 일차적인 가치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힘은 적에 저항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점차 그 저항과 공격의 초점은 내부적이다. 즉 조직 자체 안에 새로운 주체성들과 새로운 팽창적 생활형식들을 생산한다. 이제 ‘인민’은 더 이상 토대로 간주되지 않으며 주권국가를 장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게릴라구조의 민주적 요소들은 네트워크 형식으로 더욱 대체되어 간다.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시민전쟁의 예들 가운데 거의 대다수가 여전히 낡은 모델들, 낡은 근대적 게릴라모델이나 전통적인 집중화된 군사(군대)구조에 따라 조직되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지,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필리핀의 신인민군, 페루의 상드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콜롬비아의 FARC와 ELN 등등. 이들 운동 가운데 다수가 패배했을 때, 네트워크 특징으로 변형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게릴라조직모델에서 네트워크형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반란들 가운데 하나가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Intifada)이다. 이것은 1987년에 1차봉기를 하였고, 2000년에 다시 봉기하였다. 그 봉기에는 두 모델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봉기는 내부적으로는 지역사회 지도자들과 인민평의회들을 둘러싸고 매우 지역적인 수준에서 가난한 젊은이(남성)들로 조직되어 있다. 이스라엘 경찰과 당국에 돌을 던지고 직접 싸우는 것이 첫 번째 인티파다를 가져왔고, 가자와 웨스트뱅크 지역의 대부분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다른 한편 그 봉기는 외부적으로는 기존의 다양한 팔레스타인 정치조직들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 이 정치조직들 대부분은 첫 번째 인티파다가 시작될 때는 망명해 있었고 1차 봉기 때의 청년들보다 더 나이든 세대의 사람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 두 조직형식은, 하나는 내부적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적이며, 하나는 수평적 자율적이고 분산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이고 집중화되어 있다. 인티파다는 낡은 집중화된 형식을 뒤로 하고 점차 새로운 분산된 조직형식을 향해 나아가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반인종차별(anti-Apartheid) 투쟁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두 가지 기본적인 조직형식이 훨씬 오랫동안 공존하였다. 인종차별체제에 도전하고 결국 그것을 전복한 세력들의 내부구성은 매우 복잡하고 시기에 따라 달라졌지만, 수평적 투쟁의 거대한 증식은 1970년대 중반 소웨토(Soweto) 봉기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백인지배에 대항한 흑인의 분노는 다양한 운동들에 공통적 요소이었지만, 다양한 운동들은 어떤 특정 조직의 지도를 받지 않고 사회의 상이한 부문들을 가로질러 비교적 자율적인 형식들로 조직되었다. 학생집단들이 중요한 행위자들이었고 노동조합들은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수평적 투쟁들은 예를 들어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같은 낡은 전통적인 지도자조직들의 수직적 축과도 역동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ANC는 1990년까지 비밀조직이었고 망명 중이었다. 인티파다처럼 반인종차별투쟁도 두 가지 다른 조직형식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짜파티스타민족해방전선(EZLN)은 1990년대에 치아파스에서 처음 결성되었는데, 이 조직이 네트워크 형태로의 변화의 가장 분명한 사례이다. 짜파티스타는 낡은 게릴라모델에서 생체정치적 네트워크 구조라는 새로운 모델로 넘어가는 이음새이다. 또한 짜파티스타는 포스트포드주의의 경제적 변화가 지역경험을 전지구적 투쟁과 연결시키면서 도시영토와 농촌영토에 기능할 수 있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원주민운동으로 태어나고 농민적이고 그런 채로 유지되었지만, 짜파티스타는 자신들의 코뮤니케를 외부세계에 알리는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조직 내부의 구조적 요소로서 인터넷과 소통기술들을 이용한다. 특히 남부멕시코를 넘어서 국가적 전지구적 수준들로 확대될 때에 특히 그러하다. 소통은 짜파티스타의 혁명 관념에 중심적인 요소이며, 그들은 수직적인 집중화된 구조들보다는 수평적인 네트워크 조직을 창조할 필요성을 계속 강조한다. 짜파티스타는 군대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고 남미의 전통적인 게릴라 모델을 채택하고 있지만, 집중화된 군사적 위계들을 실천적으로 계속 잘라내고 권위를 탈중심화하려고 한다. ‘복종하면서 명령한다’는 그들의 구호는 조직 내부의 전통적인 위계관계의 형성을 극히 경계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지도부의 직위는 순환되고 중심에는 권위의 공백이 있다. 마르코스는 자신의 상대적인 복종을 강조하기 위해서 부사령관의 직위를 지닌다. 더욱이 그들의 목표는 국가를 패퇴시키고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지 않은 채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짜파티스타는 전통적 구조의 모든 요소들을 채택해서는 그것들을 변형시켜서 조직형식의 탈근대적인 변화의 성격과 방향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티파다와 짜파티스타는 명령중심이 없고 모든 참여요소(분자)들의 최대의 자율성을 지닌 분산된 네트워크 구조로 향한다. 그들의 중심은 오히려 지배에 대한 그들의 저항, 빈곤에 대항한 그들의 저항 그 자체이다. 즉 생체정치적 공통들을 민주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그들의 투쟁이다. 그에 반해 알카에다나 콜롬비아마약조직들은 네트워크 형태를 취하지만 상당히 집중화된 조직들이다. 즉 네트워크 형태를 지닌다고 해도 밀수조직에서 주로 발견되는 사슬네트워크 형태나 카르텔에서 주로 발견되는 허브(스타) 네트워크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다른 모든 구성원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소통할 수 있는 모든 채널(full-matrix) 네트워크 형태가 민주적 내용을 담보해 낼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특히 미국에서 ‘정체성 정치’라는 이름 아래 종종 분류되는 수많은 운동들이 등장하였다. 페미니스트투쟁, 게이와 레즈비언 투쟁, 인종에 기반한 투쟁들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다양한 소수자운동도 바로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자율운동이나 보이지 않는 운동(생태투쟁)들로 포함해야한다. 이러한 다양한 운동들의 가장 중요한 조직적 특징은 자율성에 대한 강조와 집중화된 위계․지도자․대변인에 대한 거부이다. 당, 인민의 군대, 현대게릴라세력 모두 그들의 관점에서는 파산한 것처럼 나타난다. 이러한 조직들은 통일성을 강요하고 소수자들의 차이들을 부정하고 그 차이들을 다른 사람들의 이해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이다. 자율성을 유지하고 차이를 긍정하는 민주적인 정치적 결집형식이 없으면 소수자들은 분리를 주장한다. 민주적 조직과 독립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또한 운동들의 내부 구조들에서 생겨난다. 그 내부구조들에서 협동적인 의사결정, 조정된 친밀집단 등에서 다양한 중요한 실험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의 재등장은 자유와 민주적 조직을 강조하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율에 관한 이 모든 경험들은 가장 작은 수준에서조차도 운동의 발전을 위한 엄청난 부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새로운 공간인 컴퓨터네트워크를 이용한 대중의 다양한 투쟁과 운동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전자저항형태와 해커운동들도 추가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전자네트워크로 통제되는 엄청난 자원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며 사이버네틱 기술들을 사용한 새롭고 정교화된 통제형식들을 패퇴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운동들은 또한 자유에 대한 열망에, 그리고 네트워크가 가능하게 하는 협동 및 소통의 강력하고 새로운 형식들과 엄청난 부라는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전쟁(투쟁)의 조직모델은 분립된 게릴라 반란→인민의 군대 모델/집중화된 군사적 구조→다중심적인 게릴라군대/다중심적인 모델→분산된 네트워크 구조로 변해 왔다.

3) 대안세계화운동

네트워크운동의 최고의 발전은 대안세계화운동(반세계화운동)에서 나타난다. 대안세계화운동들은 시애틀에서 제노아로, 그리고 포르토 알레그로와 뭄바이의 세계사회포럼으로 확대되어 왔고 반전운동을 촉진시켰다. 이들은 분산된 네트워크조직의 최신의 가장 분명한 실례이다. 대안세계화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로 다르고 심지어 적대적인 이해를 지닌 집단들이 함께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이 노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교회집단들과,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감옥-산업복합체에 항거하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한다. 각 집단들은 어떤 단일한 권위 아래 통합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네트워크 구조 속에서 관계한다. 사회포럼들, 친밀집단, 다른 민주적 의사결정형식들이 운동의 토대이며, 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 함께 행동하게 된다. 각자의 자율성과 차이의 충분한 표현은 여기서 모두의 강력한 접합과 일치한다. 민주주의가 운동의 목표와 운동의 항상적 활동을 규정한다.
이러한 대안세계화운동은 분명 여러 측면에서 제한적이다. 첫 번째, 그들의 비전이나 열망이 전지구적이지만 지금까지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에 운동의 구성분자들이 상당수가 있다. 두 번째 정상회담들을 따라다니는 항의운동으로 남아 있는 한 근본적 투쟁이 될 수 없고 대안적인 사회조직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사실 1968년에 산업노동자와 학생의 투쟁, 반제게릴라운동의 전지구적 폭발 이후에, 국제적인 새로운 투쟁주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이 기간 동안 다양한 저항운동들이 있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반인종차별투쟁, 북아일랜드에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지속적인 반란,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여성운동, 스톤월과 게이 레즈비언 운동, 산업노동자·농민·피억압 주민들에 의한 수많은, 덜 알려진 지역적 일국적 반란들 등이 있었다. 또 일부 서로 연결된 운동도 있었지만, 대중적인 차원에서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쨌든 새로운 국제적 투쟁주기가 1990년대 말에 전지구화라는 쟁점을 둘러싸고 나타났다. 1999년 시애틀에서 WTO 정상회담에 대항한 투쟁에서 시작한 대안세계화운동은 반전운동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투쟁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새로운 주기에서 각 세력들이 공통으로 동원한 것은 단순히 공동의 적(신자유주의든 미국헤게모니든 전지구적 제국이든)일 뿐만 아니라 공통적 실천, 언어, 행동, 습성, 생활형식,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열망이기도 하다. 이 주기는 반응적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투쟁 주기에서 공통적인 것의 전지구적 동원은 각 투쟁의 지역적 본성이나 특이성을 부정하거나 감추지 않는다. 다른 투쟁들과의 소통은 각 단일 투쟁의 힘을 강화시키고 부를 증대시킨다. 이는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의 투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전지구적 투쟁주기에서 투쟁들은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으로 전개된다. 각 지역투쟁은 어떤 지적인 센터 없이 모든 각 노드들과 소통하는 하나의 노드로서 기능한다. 각 투쟁은 특이한 채 남아있고 자신의 지역적 조건들 에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공통적인 웹 속에 들어가 있다. 이 조직형식은 대중의 가장 분명한 모습이다.
이러한 조직모델은 예전의 두 가지 전통적 모델을 정리해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전통적인 첫 번째 조직모델은 투쟁의 정체성에 근거하고 있고, 조직의 통일성은 당과 같은 중심지도부 아래에 조직된다. 기층에서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다른 갈등의 축, 예를 들어 소수자 지위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들은 통일의 이름 아래 일차적인 투쟁에 종속되어야 한다(참조, 게이운동과의 관계). 노동자계급 정치학은 그러한 모델들로 꽉 차 있다. 두 번째 전통적 모델은 각 집단이 자신들의 차이를 표현하고 자신의 고유한 투쟁을 자율적으로 수행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모델은 인종, 성, 성적지향에 근거한 투쟁들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두 지배적인 모델은, 중심적 정체성 아래에서 통일된 투쟁을 하느냐 아니면 자신들의 차이를 긍정하는 분리된 투쟁을 하느냐 하는 분명한 선택을 제기하였다.
대중의 새로운 네트워크모델은 이 두 모델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 모델들을 변형시킨다. 시애틀투쟁에서 가장 놀랍고 당황스러웠던 것은 전에는 서로 대립적이라고 생각되던 집단들이 상대방을 복종시키거나 차이들을 무시하는 어떤 중심적인 통일화하는 구조가 없이 함께 활동했다는 것이다. 대중은 개념적으로 정체성-차이라는 모순적 쌍을 공통성-특이성이라는 보완적 쌍으로 대체한다. 특이성(특정 개별자)의 표현들이 투쟁중인 다른 사람(특이성)들과의 소통과 협력 속에서 환원(축소)되거나 줄어들지 않는, 더욱 더 커다란 공통적 습성, 실천, 행동, 욕망을 형성해 나가면서 말이다. 즉 공통적인 것의 전지구적 동원과 확장을 가져오는 모델, 다양한 조직형식들을 포괄하면서 열리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네그리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성격을 특징짓는 것으로 무리(떼)지성(swarm intelligence)모델을 제기하고 있다. 벌떼나 개미떼의 세계에서 무리들의 움직임처럼, 이 모델에서는 수많은 독립된 세력(힘)들이 특수한 지점에서, 모든 방향에서 치고나가고, 그 후 배경(환경) 속으로 사라져간다. 네트워크공격은 마치 무리/떼의 움직임과 같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일찍이 자기조직화의 모델로서 제시되어 왔다. 68년 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가타리는 집중화된 조직에 대한 대안을 생각하면서, 새떼들이 날아가면서 서로의 거리를 조절하는데 중앙의 통제나 명령 없이 전체적으로는 갈매기 모양을 만들어 낸다든지, 아메바가 자신의 먹이 환경이 풍족한 곳에서는 단세포로 나뉘어져 먹이를 먹다가 먹이가 부족해지면 여러 세포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단위로서 먹이가 풍부한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 분산되는 조직화의 방식에 주목하였다. 꼭 중앙통제가 없어도 전체적으로 잘 움직이는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에 대한 현실적인 그림은 소집단의 무한한 증식을 통한 국제적 네트워크라는 형식으로 제기되었다.
그러한 자기조직화 방식과 유사한, 무리(떼)지성에 입각한 조직모델은 벌떼, 개미떼 등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의 성과 위에서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운동방식 및 조직화방식으로서 제기되고 있다. 전쟁전술로서 무리지성 모델은 두 가지 기본적인 요건이 필요하다. 우선은 적을 사방에서 공략하기 위해서 언제든지 서로 연락이 가능하고 긴밀하게 엮여져 있는 많은 수의 소수의 집단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은 각 소수 집단이 그러한 공격의 상황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감시와 부분적 정보를 제공하는 감각기관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로가 가지는 작은 정보들을 긴밀히 교환함으로써 전체적인 통찰이 가능하도록 하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소수의 행동단위들에 명령과 제어권한을 분산, 위임해야만 한다. 이들 소수 단위들은 여러 다양한 형태로 분산되어 있다가 어떤 공통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 신속히 결집하고 임무를 완수한 뒤 다시 분산된다.
이러한 조직모델에 입각해서 움직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대인지뢰금지운동이나 러시아에 대한 체첸의 1994년 분리독립(자치)운동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앞서 네트워크형 조직으로 전환해간 운동들(특히 시애틀 투쟁을 비롯한 대안세계화운동)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4) 노동운동에 대한 제언

이러한 조직모델을 염두에 둘 때 노조운동에 대해서 몇 가지 제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거래를 위해 임금협상을 주로 하는 노조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첫째, 예전의 노조는 실업자, 빈민, 심지어는 단기계약을 하는 이동적이고 유연한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없다. 둘째, 산업생산이 한창인 때에 규정된 다양한 생산물과 업무에 따라서 노조가 구분되었는데, 이런 전통적인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방해물이 될 수 있다. 셋째, 예전의 노조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조직들이 되어 왔다. 지배적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조직은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그 대가로 경제적 요구, 특히 임금문제에만 집중하고 정치적 사회적 요구를 소홀히 하고 있다.
이처럼 준 국가장치화 되고 보장된 노동자를 보호하는데 치우친 노동조합 활동을 비보장된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을 향해 열어젖히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단순히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자는 주장은 서구의 역사에서처럼 노동조합-당-국가라는 일체화된 벨트를 만들어 노동자를 훈육하는 역할을 할 위험이 크다. 사실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민노당처럼 의회로 진출하거나 당형태로까지 가지는 않아도 노동운동을 국가장치화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집합적 정치세력을 만들어 나가는 방향이 과도적으로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항상 노조운동 위에 군림하는 당이나 정치조직이 될 위험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또한 노동형식들이 다양화되고 비물질적 노동이 점차 헤게모니를 잡게 되는 상황에서 산별조직화는 사업장별 노조의 분할을 극복하는 방향에서는 전진적일지 몰라도, 산업노동 시대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훨씬 더 다양한 노동형식들을 포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즉 서로 다른 산업 간에도 공통적인 것을 찾아서 조직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노조의 경우는 꼭 산업별로 엮이기 보다는 산업별 구분을 횡단하는 조직화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비정규직 노조의 경우 사업장이나 산업별 구분을 넘어서 횡적으로 조직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노동자계급 안에서 주변화되고 소수자화되는 층들을 포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노동자계급 안에서 순수한 노동자, 전위적 노동자를 강조할수록 다른 한편으로 주변화된 노동자층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갈 위험이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을 일차적으로 해고해 온 경험을 되돌아 볼 때, 언제든지 소수자들을 일차적으로 희생양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장애인노동자가 함께 일함으로써 작업장에 가져온 정서적 온화함 같은 것을 고려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노동운동은 사회적 부를 협동적으로 생산하는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를 대변할 수 있는 노동조직들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형식으로 하청화되고 있는 독립프로덕션들에서 밤샘작업을 하는 영상물 생산관련 노동자들, 디자인이나 패션(mode) 생산에 관련한 노동자들, 아르바이트로 위장된 광범한 학생-노동자층, 파트타임 노동을 선호하는 주부노동자들 등등을 조직화하는 새로운 과제들에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물론 노조형식도 기존의 보장된 노동자들의 노조형식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꼭 노조형식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온건하게는 노조들을 강력한 사회운동들과 결합함으로써 노조들을 사회의 다른 부분들에 개방하는 것, 즉 사회운동적 노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좀더 전투적인 예로 아르헨티나의 실업노동자들의 운동인 ‘피케테로(piqueteros)’를 들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실업자들의 노조를 정치화하고 작동하도록 하였다. 전통적인 노조틀을 넘어선 노조활동의 사례로 프랑스에서 2003년에 흥행, 매체, 예술에서의 파트타임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을 들 수 있다. 어쨌든 현대의 노조는 대중의 조직된 표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비물질적으로 노동화 되고 있는 다양한 노동형식들을 포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다른 부문운동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운동들과 접속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대중의 민주주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제국)의 지배 속에서 대중은 다양한 불만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중의 민주주의 기획을 위한 조건들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불만, 비판점을 제기할 수 있겠다. 첫째, 현존하는 대의제도양식에 대한 비판, 둘째, 빈곤에 대한 저항, 셋째, 전쟁반대이다.
대의제도와 관련하여 역사적 맑스주의를 되돌아보게 된다. 당(전위당)에 근거하였던 볼세비키들은 공산주의를 쟈코뱅적 전통과 연결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 초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스트 가운데 급진분파들은 의회대표제를 비판하고 국가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좀더 완전한 대표제 형식들과 심지어 직접 민주주의 형식들조차 제기하였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로 대변되었던 맑스주의는 정당 중심으로 사회변화를 꾀하려고 하였다. 레닌의 전위당론 전통에서 비롯된 정당적 맑스주의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현실사회주의에서는 당과 국가가 이데올로기까지 동원하여 일체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결국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당적 맑스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대표제 양식을 찾으려는 길에서는 경제적 관리와 사회적 행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직접적인 역할을 주는 메커니즘들을 창조하려고 하였다. 소비에트와 라트(Rat)형식들을 포함한 다양한 ‘평의회’형식들이 중요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정당적 맑스주의에 의해 압살당하였다. 당연히 정당적 맑스주의 파산 이후에 평의회 맑스주의 쪽으로 맑스주의를 전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실패한 역사 속에 교훈이 들어있다던가!
그러나 탈근대 시기에는 훨씬 더 자율적이고 네트워크화된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역사적 맑스주의에서 실험되었던 것 이상의 다양한 평의회들, 코뮌들이 실험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각 실험들의 특이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면서 횡단성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헤게모니적인 이론이나 조직형태를 설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특이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데올로기나 과학적 이론을 대신해서 여론이 점차 일차적인 대표제 형식이 되었다. 여론은 마침내 정치적 무대의 가장 커다란 곳에 도달하였다. 여론은 국민국가와는 아주 다른 성격의 정치적 주체이다. 사실 여론은 대표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19세기 중반 이후 여론은 매체의 엄청난 팽창에 의해서 변형되어 왔다. 합리적 개인의 표현인가 아니면 ‘대중’적인 사회적 조종인가 하는 논의가 있었다. 어쨌든 여론의 흉물스런 도구인 여론조사는 구심적인 심리적 효과가 있어서 모두를 다수의 입장에 순응하도록 강요한다.
물론 여론은 저항 속에서 생겨난 대안적 표현 네트워크들에 적합한 용어는 아니다. 통일된 목소리도 아니고 사회적 균형의 평균점도 아니다. 여론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소통·문화적 생산·다른 모든 생체정치적 생산형식들을 통해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개입해야 하는, 권력관계에 의해 규정된 갈등의 장이다. 물론 거대기업들이 매체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여론의 장은 매우 비대칭적인 장이다. 여론의 장 위에서의 갈등은 대중이 자신의 형성과정에서 통과해야 하는 문턱이다. 민주적 대표제의 문제에서 전지구적 여론으로 대중의 장이 옮겨가는 모습이 나타난다. 대중은 운동과정에서 바로 여론을 대중운동의 방향으로 틀어가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여론을 주도하려는 독점적이고 전지구적인 위성매체들에 대항하여 대중의 의사를 표현하고 대중들 자신들끼리 소통을 넓혀갈 수 있는 대안적인 매체전유 방식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빈곤에 대항한 저항은 대중의 불만과 개선운동의 주요 내용이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대중의 빈곤에 대한 저항은 민주주의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 다수의 민주주의는 모두의 민주주의로 바뀌어가야 한다. 근대 혁명들은 민주주의의 보편적 개념조차 제도화하지 못했다. 여성, 비소유자, 비백인, 그리고 다른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것은 ‘모두’라는 보편적 전제조건 자체를 부정하였다. 더욱이 빈곤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배제되는 문제이다. 현대의 빈곤은 굶어죽을 자유이기도 하지만 고독할 자유인 것이다. 따라서 빈곤에 대항한 저항은 다양한 사회관계에 대중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고 색다른 사회관계를 만들어 가는 투쟁인 것이다.
이러한 투쟁을 통한 민주주의의 창조는 대중의 힘(역능)을 견고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며, 반대로 대중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주체와 사회조직논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제국 시대에 민주주의의 척도는 국민국가에서 전지구로 도약하고 있다. 전지구적 체계의 정치경제적 측면들에 대항한 엄청난 저항은 전지구적인(모든 곳에서의) 민주주의의 위기의 강력한 징후로 볼 수 있다. 물론 민주주의는 위로부터 부과되거나 만들어질 수 없고, 아래로부터 생겨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온전히 대중의 몫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민주주의 문제는 전쟁의 문제와 함께 나타난다. 근대 주권은 내전을 종결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주권은 폭력과 공포를 종결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공포를 일관되고 안정된 정치질서로 조직함으로써 내전을 종결짓는다. 국민국가의 틀에서는 전쟁이 내전으로서가 아니라 국민국가들 사이의 갈등이지만, 제국 시대에 전쟁은 전지구적 자본주의화에 거스르는 전지구적 노동 대중들에 대한 테러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전쟁상태는 폭력과 공포로 망가지고 있는 주체들의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최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평화에 대한 요구와 일치한다. 평화는 대중에게는 최고의 가치로 되었고 모든 해방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제 대중의 해방전쟁은 결국 ‘전쟁에 대항한 전쟁’, 즉 불평등과 억압체제를 지지하고 우리의 전쟁상태를 영속화하는 폭력체제를 파괴하려는 능동적인 노력으로 향해야 한다. 이것이 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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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문학 임파서블 시대의 인문학

어제 시립도서관에 갔다가 정간물실에서 잠시 문학잡지들을 훑어보았다. 걔 중에는 <21세기문학>(2007년 봄호)도 껴 있었는데,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인문학 위기에 관한 기획좌담을 읽어보았다(실은 그 좌담자의 한 사람이었다). 사회자의 표현을 빌면, '인문학 임파서블 시대'의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서 다른 두 분 선생님들과 자유분방하게 의견을 나눈 자리였다. 생각난 김에 내가 거들었던 대목들만 추려서 창고에 넣어둔다.    

■ 최근 인문학 서적의 출판 동향

제가 출판동향 분석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기존의 인문학에 대한 도전’을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문학 서적의 새로운 수용자를 찾으려는 움직임, 소위 ‘쉬운 인문학’의 유행입니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처럼 인문학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반인들,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인문학의 희망을 나누려는 움직임도 있죠. 그런데 쉬운 인문학이 급증하는 현상은 논술시장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죠.

 

 

그리고 두 번째는 ‘제 3의 문화’인데, 일련의 자연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인문학자들도 포함시켜서 일종의 인문학과 자연학 사이의 구분, 곧 ‘두 문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존 브록만 같은 편집자와 리처드 도킨스, 재레드 다이아몬드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인문학자(New Humanists)’라고 부르더군요. 국내에서도 최재천․도정일 교수의 <대담> 같은 책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디지털 미디어와 인문학의 접속입니다. 소위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인데, 인문학 분야 가운데서는 가장 ‘돈 되는’ 축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정신분석학의 도전, 혹은 대중화를 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문학비평뿐 아니라 영화비평 쪽에서 라캉과 지젝 같은 이론가들의 작업이 활용되고 있지요. 아카데미즘 내부에서는 아직 비주류이지만 대중문화 비평이나 대중적인 채널 속에서는 이런 정신분석학 계열의 책들이 많이 유통되고 있고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인문학 위기 담론


사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제도적인 문제이고 학문 후속 세대와 관련된 문제이지요. 인문학과 내부에서도 서로 이해관계가 상당히 다르고요. 어문계열만 하더라도 영문과 중문과 독문과 불문과 등등 각각의 분위기가 다르죠. 요즘 학생들에게 인기 좋은 영문과나 중문과는 전혀 위기의식이나 문제의식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제도적으로 볼 때는 인문학 전공자들의 생계와 관련된 문제도 얽혀있죠. 같은 전공자라 하더라도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또 같은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학진(학술진흥재단)에서 제도적인 지원을 받고 있느냐 안 받고 있느냐에 따라서 서로 입장이 다르지요. 언론에서는 크게 뭉뚱그려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각자 자기의 소속이나 지위에 따라서 ‘위기의식’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멘토로서의 인문학


저는 포커스를 다른 점에도 맞추고 싶은데요. <천개의 공감>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은 독서치료, 문학 치료, 영화치료, 음악치료 이런 것들이 유행하는 현상과 관련이 있는 듯해요. 최근에는 문학이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이러한 문학 치료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죠. 소설을 읽으면 정서적 불안이 해소되고 시를 읽으면 우울증이 해소되고 이런 식입니다. 이것은 인문학을 굉장히 ‘실제적인 요구’에 맞추는 행위이기도 해요. 인문학에 대한 대중과 출판계의 요구도 아마 이런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겠죠.

 

 

 

 

 ■ 정서산업과 인문학

이게 한국적 문화코드예요. 신경증이라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 아닌가요. 프로이트 말대로라면 현대인은 모두 노이로제 환자이기도 하구요. 한국사회에서는 정신과에 가는 데 여러 가지 심리적∙문화적 장벽이 있기 때문에 이런 책들을 통해서 적절히 제어하는 거죠. ‘인문학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이런 부분이 다뤄져야 할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인문학의 운명이 최근의 산부인과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최근에 출산율 저하되면서 산부인과 광고가 전부 피부관리, 비만관리, 보톡스 이런 거예요. 비슷한 처지이다 보니 인문학도 보톡스 인문학, 체형관리 인문학, 피부관리 인문학 이런 식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문학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또 요즘은 그런 걸 요구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인문학의 생존술?


그렇죠. 한데 체형관리, 피부관리가 산부인과 본래 목적은 아니듯이 인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슬림’하게만 만드는 것이 과연 인문학의 본업에 맞는 일일까 의문은 갖게 됩니다. 제가 아는 전통적인 인문학은,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를 가르쳐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를 스스로 반문해보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인문학 자체가 원래 인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요? 나의 안락을 불편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는 것. 그런데 요즘 유행하고 있는, 또 한편에서 요구받고 있는 인문학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위무해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이게 인문학의 살길로 포장되고 있고. 새로운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지만, 이거야말로 반(反)인문학이 아닌가란 생각도 듭니다.


■ 배고픈 인문학


예전에 인문학은 배부른 학문으로 유한계급의 학문이었죠(*혹자는 '왕후장상의 학문'이라고 했다). 이제는 전형적으로 배고픈 학문이 되었어요.(웃음) 요즘 학문 후속 세대들은 수료 이후에 학위까지 받고 10년, 길게는 20년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로 버텨야 하거든요. 이것이 인문학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가장 실제적인 이유지요. 제가 간혹 동창들을 만나는 자리에 가보면 이야기의 결론은 다 부동산이더군요. 그런 부동산-테크가 없는 저로선 뭐 할 얘기도 없고 끼워주지도 않아요. 인문학자들이 저마다 고상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한가하거나 한심하게 보이는 거죠. 이제 이런 인문학의 형편이 들통 나는 바람에 더 이상 사회적 존경도 유지할 수 없는 그런 처지죠. 비관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위기 타개는 그런 정직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라이프 스토리

 

중학교 때부터 서점 순례가 취미였어요. 집에 가기 전에 동네 서점 다 둘러보고 들어오는 게 버릇이었는데, 늘 새 책이 별로 없어 본 책 또 보면서 반복적인 서점 순례를 했었죠. 그런 서점 순례 습관이 계속 이어지다가 디지털 미디어 시대가 되다보니 서점 순례를 인터넷 공간에서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그건 단순히 인터넷 탓만은 아니구요. 모든 생산이 위기에서 비롯되잖아요. 제 경우도 비슷합니다. 대학에서 박사과정 수료하고 결혼했는데(제가 원래 현실감각이 좀 없어서요), 상당히 암담하더군요. 담벼락에다 과외광고 붙이고 다니고 학원강의도 뛰고 그랬죠. 저대로는 위기국면이었는데 그렇다고 별수가 있었던 건 아니고 할 줄 아는 게 책읽기밖에 없어서 그거 가지고 버티다 보니까 어느 순간 다른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더군요.


■ 인문학 위기가 아니었다면?


논문만 써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논문 쓰는 것 좋아합니다.(웃음) 러시아 문학 같은 경우 국내 연구진들이 뭐든지 연구만 하면 ‘최초’일 경우가 많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가 작년에 나왔을 정도니까요. 러시아 문학이 번역은 꽤 되었지만 제대로 된 연구서는 여전히 빈약하죠. 연구인력도 부족하고요. 한데, 제도적인 뒷받침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런저런 관심도 돌보랴 생계도 유지하랴 정신없죠.(웃음)


■ 글쓰기와 인문학


프랑스 같은 경우 유명한 정치인 같으면 나름대로 역사서든 소설이건 내야지 자기자 제대로 된 정치인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예요. 우리 사회도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을까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든 철학서 역사서를 쓰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가 된다면 말이죠. 사회적인 동의도 필요하고, 붐도 있어야 하지만, 그저 자동적으로는 안 되죠.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적극적인 설득과 글쓰기의 강제도 필요한 것 같아요.

 


■ 인문학과 소통의 어려움


분과 학문 체계를 어차피 넘어서기로 했다면 더 과감한 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문화 콘텐츠 학과도 생기고 문화 콘텐츠 진흥원도 생길 정도로, ‘문화 콘텐츠’라는 말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죠. 그런데 실제로 ‘본토’에서는 안 쓰는 말이라네요. ‘문화산업’이라고 더 많이 쓰고요. 그런데 이게 한국적인 용어로 ‘문화 콘텐츠’란 말이 상용화된 거죠. 그러면서 디지털 스토리텔링, 이런 게 붐을 이루고 있고요. 더불어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들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제 생각엔 학제간 연구 자체가 기이한 알리바이입니다. 기존의 학과 구분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면 경계를 부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잘은 모르지만, 동경대 같은 경우 표상문화학부 이런 식의 편제가 있더군요. 나름대로 파격적이죠. 좀 더 파격적으로 학제간 연구를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끝으로 덧붙이자면, 오늘 좌담의 주제가 계속 인문학의 ‘대중적 소통’에 맞춰지고 있는 듯한 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문학 자체가 ‘소통 불가능성’ 내지는 ‘소통의 어려움’ 자체를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쉽게 소통되지 않는 부분이야말로 인문학의 독특한 관심 아닐까요?..

 

07. 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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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0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전출처 : Ritournelle > * 20대 젊은 보수주의자들의 현황 2

* 한겨레(2007. 5. 3)  / "구조조정은 해야죠…나는 빼고!"
  [20대 보수화?그 이면②]노동ㆍ노동자를 보는 모순된 시선

"요즘 애들한테는 희망이 없어요. 파시스트나 안 되면 다행이야."
  
  종종 진보단체들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는 한 대학 교수가 스치듯이 한 얘기다. 대학생이 변했다는 얘기는 이제 '식상한' 말이 된 지 오래다. '어른들'은 "20대들이 변했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20대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 '못마땅한' 눈빛이 당황스럽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들을 8% 가까이 되는 청년실업률 속으로 내 몬 어른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런 점까지 포함해 요즘의 20대가 과거의 20대와 다른 것만은 사실이다. 주요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매번 1위는 한나라당이다. '보수적'이라는 40-50대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강의실 대신 거리에 섰던 시간이 더 많은 '선배들'과 확실히 다르다.
  
  "민주화요? 이미 어느 정도 이룬 것 아닌가요? 지금 우리사회가 신경써야 할 것은 경제죠."
  
  그러나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과거와 다르다. 복지보다는 경쟁을,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시한다.
  

▲ 20대가 변했다고 한다. 확실히 지금의 20대는 그 이전의 선배들과 다르다. 민주화보다는 경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복지보다는 경쟁이 살 길이라고 믿는다. ⓒ프레시안

  "'구조조정 반대' 논리가 더 빈약해요"
  
  아직 학생인 대학생들과 막 졸업해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들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취재하면서 발견한 것은 그들의 생각 속에 자리 잡은 '모순들'이었다.
  
  "내 안정은 중요하지만 구조조정은 필요하다", "노동운동은 싫지만 노조에 가입하겠다", "자유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내 권리는 보장받아야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맥락의 얘기를 뒤섞어 쏟아냈다.
  
▲ 20대의 생각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혼돈기 같았다. 인터뷰 과정에서 앞의 대답과 상반되는 맥락의 답을 내놓기도 했다. ⓒ프레시안

  앞으로 직업을 구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안정'이라고 하는 대학 4학년 김희정 양(가명)은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기업 구조조정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는 "경쟁력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노동자의 고용을 불안하게 만든다.
  
  김 양에게 "본인이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고 묻자 그는 "내가 경쟁력을 키워 (구조조정) 대상에 안 끼면 된다"고 답했다.
  
  "과연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시대에 '구조조정은 안 된다'는 논리가 먹힐까요? 경쟁이 세계적 추세인걸요. 오히려 저는 반대하는 쪽의 논리가 더 빈약하다고 생각해요. 각자 경쟁력을 갖춰 그 속에서 살아남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죠."
  
  이처럼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시장경제의 경쟁 논리를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박준식 한림대 교수가 한국노총의 용역을 받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대학생 응답자의 70.1%가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마당에 이들 젊은이들 입장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다. (☞ 관련기사 보기 : 대학생 70.1%, 자본주의 긍정적으로 평가)
  
  하지만 자본주의 질서에 따라 밀려나야 할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적응 방법은 자신이 '구조조정의 대상자'에 포함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초부터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한다는 것. 지난 2월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김동운 씨는 "친구들 가운데 소위 '스펙'(학점과 영어점수 등)이 되는 아이들은 모두 공기업으로 간다"고 말했다.
  
  "아니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고시 공부'에 매달리지요. 대기업은 오히려 그 다음입니다."
  
  "노동조합? 내 방패막이가 되어 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시선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ㄱ기업에서 1년 계약의 기간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이모 씨(26)는 "잦은 노동조합의 '투쟁'이 우리 기업들의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한 요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에 대해서도 그는 "지나친 규제가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가로 막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는 기업 활동의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관점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호소하면서는 "우리 회사의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들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각종 사회적 현안에 노동조합이 나서는 것을 '삐딱'하게 보면서도, 자신의 '방패막이'로서의 노조는 긍정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의 관점은, 앞의 한국노총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노조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면서도 현재의 노동운동이 투쟁위주의 운동노선으로 인해 외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70% 가까이 됐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런 20대의 변화는 향후 노동운동에도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 노동운동가는 "지금의 20대가 조합원들의 다수가 되는 10년 후면 노동운동의 모습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며 "조합원들의 실리주의 경향은 점점 강화되고 자신들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참여는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무리 취업난이어도 일한 만큼 정당하게 대우 받고 싶다"
  
▲ 노동, 일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학원과 학점에 매달리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일정한 수준의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에 취직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노동, 즉 일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20대에게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해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삶의 질 또한 중요하다.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벼랑 끝까지 내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노동은 자아실현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적절한 수준의 삶의 질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지난 2월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해 H대기업에 입사한 문재희 씨(24, 가명)는 "이력서를 낼 회사를 선택한 기준은 복지후생이었다"고 말했다. 적절한 휴가와 지나치게 '빡빡하지' 않은 근로환경이 우선 순위가 됐다는 것이다.
  
  대학생들 역시 대부분 "일한만큼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삶의 질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것이다. 취업정보사이트인 인크루트가 260개의 중소·대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신입사원의 평균 퇴사비율은 28.8%였다. 그렇게 어렵다는 취업난을 뚫고 들어간 회사에서 1년 이내에 회사를 그만두는 신입사원이 10명 중 3명 꼴인 것이다.
  
  입사 2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김모 씨(28)는 지금 다른 기업에의 취직을 준비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일은 너무 많고 월급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인크루트의 또 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사무직과 대기업 생산직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5042명 가운데 3179명(63%)이 대기업 생산직을 골랐다.
  
  과거 같으면 사무직을 더 선호했겠지만 지금은 기름때가 묻더라도 더 높은 임금과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고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된 대기업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수? No!"…"노무현 정권, '진보'아닌 것들로 '진보' 채워 놓아"
  
▲ 누가 이들의 머리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을까? 노무현 정권의 등장 이후 혼란스러워진 진보와 보수의 개념도 한 가지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프레시안

  20대의 이같은 '실리주의적 경향'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에 외환위기라는 큰 태풍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외환위기 때 부모가 명예퇴직 당하고 하루 아침에 가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현재의 20대가 이전 세대에 비해 경제적인 마인드가 유독 발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대학의 공동체가 무너져 내리면서 20대가 주로 접하게 되는 '생각'은 사회 주류의 것들뿐이다. 부모의 영향력도 과거보다 막대해졌다. 80년대의 20대는 상당수가 그들의 부모보다 나은 학벌에 더 '똑똑한' 자식이었지만 지금의 20대는 부모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경우도 종종 있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20대 구직자 17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8.7%가 구직활동 시 부모의 관여도가 크다고 답했다. 심지어는 부모가 채용 문의를 하거나 면접시험에 동행했다는 응답도 각각 9.5%, 3.4%였다. 부모 세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실제 한 대학에서 만난 김희정 양은 "취업 문제를 부모님과 가장 많이 상의한다"고 말했다.
  
  우리사회에서 또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이 혼재ㆍ왜곡돼 사용되는 것도 20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중 하나다. 한 대학생은 "한미FTA 같은 개방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3년간 C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한 시간강사는 "20대는 아직 가치관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시기로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노무현 정권은 진보가 아닌 것들을 '진보'라는 개념 속에 담아둠으로써 학생들의 생각에 혼란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회 통념상 '보수'에 속하는 것들을 노무현 정권이 '진보'라고 주장함으로써 '진보'의 개념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보수적"이라는 20대의 주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쇄국론자'로 몰아붙이며 "개방만이 살 길"이라고 강변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논리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이 시간강사는 "온갖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면서도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며 '좌파신자유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노 대통령은 젊은이들의 의식 변화에 큰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20대의 이율배반적인 사고들, 그리고 그것들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의식구조는 요즘 20대들의 '생각 없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모순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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