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러시아의 붉은 혁명

한겨레에서 연재되고 있는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의 두번째 편이다. '붉은 혁명'은 물론 1917년의 10월 혁명을 가리킬 텐데, 사진은 1945년 2차 대전의 종전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다음주면 종전(러시아로서는 승전) 62주년이 되는군...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 2. 붉은 혁명 3. 볼셰비키 4. 예술의 꽃 5. 노동자의 삶 6. 사회주의의 죽음 등이다.

한겨레(07. 05. 04)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② 붉은 혁명

» 정치범들. <북폴리오> 제공
정치범들 = 2월 쿠데타가 시작되고 처음 며칠 동안 페트로그라드의 슐루셀베르크 요새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볼셰비키는 유능하지 못한 음모가들이어서 차르의 비밀경찰이 쉽게 침투했다. 혁명 36시간 전에 레닌의 여동생을 포함한 수도의 마지막 대규모 그룹이 체포되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거의 어떠한 역할도 못 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모든 사태가 종결된 뒤 망명지에서 돌아왔을 뿐이었다. 깃발에 적힌 문구는 이렇다. “감옥 문을 연 인민 만세”, “모두 다 인민을 위해 : 공장, 토지, 자유.”

» 제국을 끝장낸 사람들. <북폴리오> 제공
제국을 끝장낸 사람들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병사 분과가 국가두마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모든 색깔의 좌파 대표들을 포함한 소비에트는 사진의 플래카드에서 보듯이 아직 볼셰비키의 도구가 아니었다. 제일 위 왼쪽에 있는 플래카드에는 “레닌 타도”라고 쓰여 있다. 또 다른 플래카드에는 “민족의 자유를 위한 전쟁…… 독일 군국주의를 완전히 파괴할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 내전의 결정적인 해. <북폴리오> 제공
내전의 결정적인 해 = 1919년 서부 러시아에서 부상당한 적군들. 몇몇 전선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한 백군은 근거지를 벗어나면서 약해진 반면, 적군은 전선이 압축되어 전선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더욱 강해졌다.

» 내전의 붉은 영웅. <북폴리오> 제공
내전의 붉은 영웅 = 1918년 기관총 사수 안톤 블리즈냐크. 소매의 줄무늬가 보여주듯이 블리즈냐크는 13번 부상당하고 한쪽 눈을 잃었다. 손에 든 시가는 보상이다. 트로츠키의 장갑열차는 내전 기간에 구하기 어려웠던, 특별히 마련한 담배와 시가들을 싣고 다녔고 트로츠키는 이것들을 우수한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 당 활동가. <북폴리오> 제공
당 활동가 = 검은 셔츠를 입은 당 활동가가 추바쉬 공화국에서 농촌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쿨라크, 즉 부농에 대해 일종의 히스테리 상태를 조성한다. “그들은 마술에라도 걸린 양 꼬마들을 ‘쿨라크 짐승들’이라 부르고 ‘흡혈귀’라고 소리치면서 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곤 했다.”라고 한 목격자는 썼다. “그들은 이른바 쿨라크를 혐오스럽고 역겨운 소, 돼지로 간주했다. 쿨라크는 영혼이 없었다. 쿨라크는 악취가 났다. 쿨라크는 모두 성병에 걸렸다. 쿨라크는 인민의 적이었다.”

» 코러스 라인. <북폴리오> 제공
코러스 라인 = 1936년 선전팀이 투르크메니스탄의 마을들에 당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 당은 끊임없이 선전을 해댔다. 그것은 피할 수 없고 계속 되풀이되었으며 바다 위에 있는 배의 엔진 소리처럼 끊임없이 지속되는, 모든 당 활동의 배경이었다. 깃발과 슬로건 없이는 어떤 추수도 어떤 파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베를린 상공의 붉은 깃발. 사진/Y. 할데이. <북폴리오> 제공
베를린 상공의 붉은 깃발 =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를 오르는 러시아 병사. 1945년 4월 30일 이른 오후 베를린 상공에 붉은 깃발을 내걸기 위해 러시아 병사가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에 오르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은 파괴된 도시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살했다. 주검은 러시아군 카츄샤 로켓의 일제 포격으로 쓰레기장에서 불탔다. 이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독일군은 제국 의사당 지하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그들은 5월 2일 새벽까지 버텼다. 러시아군의 총성은 그날 오후 3시에 멈췄다.

07.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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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결혼은 쇼핑이다?


김카피, 인간이 결혼백화점의 상품으로 전락한 광고에 기함하다

오늘 할 얘기는 지난주에 본 자일리톨의 느닷없는 티징 광고에 대한 얘기도 아니고, 요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쌩쑈 광고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번 주에 꼭 매듭지어야만 하는 얘기도 아니다. 다소 기원전 느낌이 들 정도로 오래 전부터, 마주칠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에 심기가 거슬렸던 어느 결혼정보회사의 광고에 대한 얘기다. 그러나 언제나 이야기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

결혼. 혼기가 훌떡 지나버린 처자가 이런 화두를 도마 위에 올려놓는 건, 지뢰자리 확인하고 부러 밟는 자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괜히 결혼에 관련된 주제에 의견을 내놓았다가 독신주의자나 페미니스트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해도 자기변명으로 치부되는 느낌이다. 아무 의견을 내놓지 않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는데도 결론은 언제나 미혼의 결혼일정을 묻는 인사로 끝나기 마련. 후유증이 부디 가벼운 두통 정도로만 끝나준다면 감사할 정도랄까. 따라서 편협한 자기주장으로 비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으면 덮어놓고 싶은 이야기를 일부러 헤집는 것은 요즘 지하철에서 나를 향해 도전하는 이 광고의 참을 수 없는 네이밍 때문이다.

이름하여 ‘닥스클럽’. 그렇다. 그 닥스 맞다. '닥스'라는 말을 보자마자 당신의 머리에 떠오른 그 이미지. 샤넬, 루이비통 같은 그 명품, 맞다. 그런데, 이 이름을 쓰는 회사가 무슨 회사인 줄 알고 있는가? 바로 로열층만을 연결해준다고 광고하고 있는 결혼정보회사의 네이밍이다.

결혼시장을 깔보는 결혼백화점의 등장

결혼정보회사의 광고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나로서는 듀오다. ‘결혼은 귀찮아’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싱글 남녀가 이 광고를 통해 듀오에 접속했다.(물론 나도 접속했지) 그리고 소위 ‘신고식’이라 할 수 있는 ‘등급 매기기’를 한 번 경험한 후 자신의 배우자로서의 등급에 쇼크들을 먹어도 한참 먹었다. 아니 회사에선 썩 잘 나가주는 내가 15등급? 아니 아버지가 샐러리맨이라서 18등급? 결혼시장에서는 사람의 가치가, ‘부모님이 국회의원인가, 재벌인가’(아니 재벌이 결혼정보회사를 왜 이용하겠남!), ‘가진 땅이 몇 평인가, 건물이 몇 채인가’ 등의 여부에 따라 20여 개의 등급으로 계량화되어지고 있다. 이 등급은 정확히 얘기하자면 인간의 인성은 포함되지 않는다. 명백한 ‘부의 등급’이다. 결혼시장에서 훌륭한 결혼 상대는 부로 판단된다는 거다. 이런 사실은 물론 다른 결혼정보회사들도 똑같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네이밍에서부터 속셈을 드러내 보인 회사는 본 적이 없다. 닥스는 명품이다. 즉 상품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상품을 고르라고 말하고 있다. 가뜩이나 계급사회인 이 시장에서 시장 물품 사지 말고 백화점 물품 사라고 경계까지 친절히 그어주신다. 예를 들면 이들은 샤넬을 쇼핑하듯이 결혼을 쇼핑한다. 이를테면 조건 좋은 상품들만 모아놓은 결혼백화점에서 명품 신랑신부를 자신의 품위를 위해 걸치는 것이 이들 명품 결혼의 지론이다. 파는 물건이 사람이 아니고 상품이다 보니, 참으로 놀라운 세일 광고도 등장한다. 재밌는가? 재미있다. 인간의 치부가 너무나도 드러나 있어 토악질이 날 지경으로 재미있다.

논리의 오류: 부자 결혼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얼마 전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 "왜 부자들은 부자들 하고만 결혼하는 거야?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맞다, 이것이 현실이다. 부자는 부자랑 결혼한다. 명품만이 명품을 고를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이 광고는 뭘까?

당신은 당신의 가치가 겨우 당신 지갑 속의 푼돈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부모의 직업만으로 결정지어지는 조선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 차치하고, 단 20가지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나 있을까? 적어도 인간에게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2만여 개의 게놈이 있고, 이 사회가 부정할지라도 십수 년을 쌓아온 지성이 있고, 닥스보다는 확실히 비싼 인성이란 것이 있으며, 저마다의 소중한 추억과 오늘과, 미래라는 것이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명품인가?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당신은 작품이며 아직 손에 가진 것이 없어도 당신은 충분히 명품이 될 수 있다. 물론 나도 그렇다. 스스로 명품이 되라. 부자가 될 사람도 안 말린다, 스스로 부자가 되라.

 

출처 :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12003003&article_id=4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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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5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재灰 > 블룸하르트: "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레디앙>에 길게 연재되고 있는 '세계의 사회주의자들' 중 하나를 옮겨왔다.

 

"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세계의 사회주의자 - 28] 영성 깊은 목회자 블룸하르트

 

비행기 한 번 타지 못한 터라 다른 나라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두 가지 오해

첫 번째 오해는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는 이른바 영적인 신앙인들은 결국 보수적(친미적이든 친한나라적이든) 입장을 가지게 되고, 기도도 하지 않고 룻이 여자인지 롯이 여자인지도 모르는 신앙인들은 결국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색과 구도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세상만사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황희처럼 네 말이 옳구나, 네 말도 옳다, 허허, 당신 말도 옳소, 라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맞장구칠 수 있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투캅스의 안성기처럼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일요일, 수요일에 예배당에 앉아서 눈물 찔끔 흘리고 십일조 봉투를 내미는 사람을 예수께서 장하다고 하실까? 전두환을 앞에 두고 하늘이 내린 영도자라고 칭송했던 목사들을 예수께서 충성했다고 칭찬하실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까닭은 성경 자체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고민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모범으로 삼을만한 신앙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블룸하르트의 성장 배경, 영적 경험

   
  ▲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1842~1919)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1842~1919)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는 대단히 유명한 목회자였으며 치유자였다.

아버지 블룸하르트가 1844년 카타리나라는 여자 교인의 병을 고치고 난 후, 참회운동이 온 마을을 휩쓸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모여 죄를 고백하고, 알콜중독자들이 술을 끊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으며, 병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도 아버지 블룸하르트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열려져 있는 서재 창문을 통해서 병이 낫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1852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괴핑겐 근처로 이사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도움받길 원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부족한 면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양친과 그들을 늘 가득 채우고 있던 영적 온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나는 늘 소외감을 느꼈고 그러한 생활은 나와는 거리가 먼 뭔가 거룩한 것이었고 내 영혼을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의 내적 확신보다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유명한 신앙인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1872년 고트리빈 디투스(카타리나의 언니)의 영면을 지켜보면서 당시 30세이던 블룸하르트는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 사도들이 어떻게 설교했는지 이해할 정도로 “이상스러운 탄생”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후 블룸하르트에겐 모든 의심과 불확실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에게 오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맡아 썼고, 목회일도 대리했다. 1880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회의감

더 많은 사람들이 블룸하르트를 찾아오는데, 정작 블룸하르트는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블룸하르트는 병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더럽혀 놓은 온갖 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 놓아야 한다는 식으로,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취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면 거기엔 허위가 남게 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늘 이기적 성향이 깃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향한 구걸을 그만두고 어떻게 죄를 인식할 것인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노력하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용납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으시오.”

개개인의 고난을 중요시하지 말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기적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에 봉사하는 것을 원했다. 블룸하르트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의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교회를 향해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라고 했다.

보다 넓어진 시각과 공개적인 '편들기' 

이후 블룸하르트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사회운동을 벌였다. “예수는 많은 대중, 프롤레타리아 등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자의 편이었다. 기쁜 소식이란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얻어야 할 내용이다.”

블룸하르트는,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과 함께 사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당시 교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블룸하르트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거룩한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운동을 반교회적인 태도,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몰아붙였다.

밧볼에서 조용히 지내던 블룸하르트가 공개적으로 사회 문제를 거론하게 된 계기는 이른바 ‘교도소 법률안’이었다. 이는 '기업의 노동관계 보호를 위한 법'의 초안인데 1899년부터 작성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파업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했다. 문제가 있으면 기업주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선 사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룸하르트는 자본이 갖는 악마적 속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법안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노동자들 편에 서기로 했다.

그는 1899년 9월 19일, 괴핑겐에서 열린 항거대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나는 지금 알려진 법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정된 후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서 거기에 대한 반대입장을 천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의에 반하는 범죄입니다.”

그의 등장은 위축되어 있던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블룸하르트는 1899년 10월 2일 두 번째 집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오늘날 노동계급의 편에 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극히 적은 자들에게 속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의 친구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이 되고 내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한다고 비난할 사람이 있습니까? ...... 1900년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제 우리가 다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것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어야 합니까?”

민주주의적 신문인 「호펜스타우펜」은 그의 연설을 “사회민주주의의 신봉자 블룸하르트”란 제목으로 뽑아 호외로 발간했다.

이때까지 블룸하르트는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그가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사람들은 블룸하르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블룸하르트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특별한 해명없이 공식적으로 입당했다. 그러자 교계와 정치계의 신문들이 본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블룸하르트는 천대받는 개개인을 돕는 것보다 멸시받는 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그때까지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그렇게 됐다.

비템베르그주교회는 그에게 목사직과 그 외 다른 직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해왔고 그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라고 했으나 블룸하르트는 교회와 싸우지 않았다. 이후 블룸하르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종교적, 정치적 강연들을 했다. 비템베르그 지방의회에 사회민주당 후보로 추천되고 당선되기도 했다.

여전히 깊은 영성을 지녔던 블룸하르트

블룸하르트는 1906년 지방의회 의원 임기를 마치자 재출마 권유를 물리치고 팔레스틴(이스라엘) 여행길에 오른다.

그는 1888년까지 대전도운동을 전개하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그후 약 10년 동안 명상과 피정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하느님 나라’를 강조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블룸하르트의 여정이 왔다갔다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작 블룸하르트의 생각은 초지일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림’이었다.

그에게 기다림의 공동체는 곧 이 세상에서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교두보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예수가 승리한다!’는 확신 가운데 살았다. 여동생 안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름살 투성이의 손을 가슴에 얹고 조용히 누워 있거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하고 속삭였다.”
1919년 8월 2일 영면한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예수가 승리했다는 것은
영원히 남으리라.
온 세계는 그의 것이 되리라.

※ 이 글은 『혁명적 신앙인들』(1987년, 손규태 편저, 한국신학연구소 펴냄)을 주교재로 블룸하르트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2007년 04월 06일 (금) 09:03:52 서민식 목사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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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프라하의 국립박물관

매월 첫째주 월요일은 입장료가 무료랍니다.

보통 입장료가 3,4천원인데, 그래도 무료라서 더 좋아요^^

사진 찍는데도 돈을 내야하는데 살짝 몰래 찍었습니다... ㅠㅠ

 


















마지막은 뭔가 다이아몬드라고 찍은 거 같은데...












박제된 동물들과 곤충 표본들이 많답니다.

대체적으로 체코어로 써 있어서 그냥 구경만 했어요.

구경하는데 한시간 정도 시간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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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재灰 > '김윤식'에게 끼인 '냉장고'

 

책읽기는 더딘데 책사기는 줄기차다. 김윤식의 교토기행기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솔, 1999)이, 오늘 배달되어 온 책들 중에 끼어 있다. 근대한국문학사상, 작가론, 한일문학 관계론, 기행기, 현장비평. 다섯 가지로 대분류했을 때, 그의 중심적인 책들은 모두 갖고 있다. 그의 글이 한겨레에서 연재되고 있다는 것은 지나는 말로 들어 알았다. 둔감한 이는 공부의 범위가 좁을 수밖에 없음을 알겠다.

<인터넷 한겨레>에서 옮긴다. 한국근대문학이 스스로에게 젖줄(受乳)이었던 까닭을 '수유+너머'의 다층적인 이들에게 선보였으리라. 언젠가, '김윤식'이라는 산은 깍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 넘는 것이라고 메모했었다. 걷기는 걷되, 넘을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해 보게된다. 중요한 것은 넘는 것이 아니라 '김윤식'을 답파(踏把, 破가 아니다)하는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넘어 어디로 갈 것인가'이다. 그것에 대한 짧은 답변이 김윤식의 토막글을 절단내고 있는 지펠 냉장고에 있다. 그나마 이미지로 도배되어 실체를 뒤덮는 광고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김윤식'과 '차인표'가 어떤 배리를 이루고 있다.

ps. 광고는 쉼이 없다. 시시각각 변한다. 변해야 <한겨레>도 먹고 산다. 문제는 그 변함 속에 개재되는 척도적 권력의 토대다. 그 비판/비평이다.  

 

아, ‘수유+너머’의 맛을 보다

한겨레
»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

연초 난데없이 한 통의 전화가 왔소. ‘수유+너머’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이동이겠군, 하자 잠시 주춤하더니, 좌우간 여기에 와서 강의를 한번 해보겠느냐 했소. 잠시 주춤할 수밖에. 그러자 조심스레 이렇게 잇지 않겠는가. 그대 역시 ‘수유’를 넘어서고자 한다는 풍문이 들렸기 때문이라고.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종교를 바꾸는 것이 커피를 바꾸기보다 쉽다는 말이 있거니와 전공 바꾸기도 그러할까. 내 ‘수유’는 한국근대문학이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 순간 선인들이 즐겨 쓰던 속담 하나가 스치지 않겠는가. ‘불 안 땐 굴뚝에 연기 나랴’가 그것. 정년 이후 만 6년째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꿈이긴 하나, 하나의 꿈을 꾸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 그 꿈 왈, 나도 내 수유를 언젠가 넘어서리라는 것. 이것이 저 풍문의 씨앗이었던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그 꿈꾸는 것을 조금 말해보아도 되겠느냐고. 다행스럽게도 ‘된다!’고 힘차게 대답하지 않겠는가.

‘수유+너머’는 남산 밑 용산동에 있었소. 수유에서 밀리고 종로에서 치여 이곳까지 밀려온 것일까. 점점 덩치가 커져 여기까지 달려온 것일까. 청파동을 지나 용산고를 넘어 골목을 여러 번 톺아 마주친 곳, 비쩍 마른 시멘트 4층 건물이 그 둥지였소. 오후 6시. 식당부터 갔소. 이곳 주인은 모두 식모이자 주방장. 반찬으로 멸치도 있고 보면 채식주의자들은 아닌 듯. 놀라운 것은 접시를 그럴 수 없이 깨끗이 비우기. 식사 후, 여제(女帝) 또는 마녀라 불리는 두목이 마을 내부를 안내했소. 공부방, 서실, 세미나실, 심지어 육아실까지 있지 않겠는가. 인문학 공부이기에 앞서 바로 생존의 터전. 두목이 마지막으로 안내한 곳은 썩 근사한 카페. 들어서자 진한 커피 향기와 함께 닐 다이아몬드의 <비(Be)>의 깊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겠소. 단박에 요란한 기계소리와 함께 커피 잔이 둥근 탁자 위에 놓이지 않겠는가. 한 모금에 혀가 얼얼. 이 광장한 호사스러움. 순간 문득 깨달았소. 아, 이것이 ‘수유+너머’의 맛이다, 라고.

강의는 7시부터. 어찌 시간제한이 있으랴. 제1강(1월 8일). 어째서 한국근대문학사가 내게 있어 수유일 수밖에 없었던가. 말을 바꾸면 어째서 인문학의 근거가 ‘식민지 사관 극복’에 있었는가를 로스토의 <경제발전의 제단계>(1960)를 들어,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염치없이 떠들었소.

제2강(1월 9일). 한국 근대사 속에 섬처럼 놓인 이중어 글쓰기 공간(1942.10-1945.8). 어떤 국민국가의 시선도 미치지 않는 열린 글쓰기의 공간에 대한 논의.

제3강(1월 10일). 해방공간(1945.8-1948.8)의 글쓰기론. 이 또한 특수공간이기에 모두가 민족문학론의 깃발을 내세웠지만 어느 국민국가에도 소속되지 않는 열린 글쓰기 공간.




제4강(1월 11일). 위의 두 공간이 어째서 꿈꾸기인가에 대해서. 그 지겨운 ‘한국’에서 멀어지기, 또 그 지겨운 ‘문학’에서 벗어나기. 국어도 만국어도 아닌 그냥 글쓰기.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근대’뿐인가. 그런데 봐라, 남았다고는 하나 ‘근대’ 자체도 초극의 형태이자 해체일 수밖에.

횡설수설이 끝났을 땐 밤 11시 20분.(중간에 한 번 쉬었던가?) 안쓰러웠던지 여두목께서 카페로 안내. 커피 티켓 한 묶음을 선물하지 않겠는가.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들르라고. 휘청거리며 귀가하자 자정. 페넬로페보다 늙은 마누라가 근심스레 기다리고 있었소. 마누라여, 그런 표정은 거두시라. ‘수유+너머’ 문턱까지 갔다가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으니까.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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