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발리바르-[마르크스를 위하여] 재판 서문

Etienne Balibar, “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 in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

 “맑스를 위하여”―하나의 호소, 거의 구호에 가까운 이 제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또는 아마도 새롭게,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높고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다른 이유들 때문에, 그리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렇다. 알튀세르의 책은 이제 새로운 독자들에게 전달될 것이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예전의 독자들의 경우는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텍스트를 수용하는 방식까지도 크게 변화했다.

1965년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는 자신의 고유한 논리 및 윤리를 지닌 특정한 방법에 따라 맑스를 읽자는 선언과 동시에 맑스주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진정한 맑스주의(한 운동, 한 “당파”와 분리할 수 없는,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이론, 철학으로서)를 위한 선언이 중요한 문제였다. 오늘날의 경우는, 아마도 이 책에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또는 심지어 상상적으로 이를 재개하려고 하는 향수에 젖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돌이킬 수 없이 끝나버린 맑스주의의 종언 이후, 맑스주의를 넘어서, 맑스를 읽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활용하고 변혁하자는 호소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 세기 이상 동안 맑스주의로 존재해 온 것에 대한, 이를 우리의 사고 및 우리의 역사와 결부시키는 복합적인 연계들에 대한 놀랄 만한 무지나 또는 보수주의적인 경멸을 용인하면서 그렇게 하자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제(foreclusion)는 늘 그렇듯이, 때로는 상반된 색조를 띠기도 하는 가상과 오류의 반복만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호소는 맑스 자신이 맑스주의와 맺고 있는 심층적으로 모순적인 관계, 이를 입증해 주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분석하려는 집요한 노력에 대한 호소다.

사실 이 책에는 맑스주의에 이론적인 실체와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는, 저물어가는 20세기에 이루어진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웅변적인 그리고 또한 가장 설득력 있는 논거를 지닌 시도들 중 하나가 담겨 있다. 맑스에 대한 해석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이 시도는 분명 맑스의 작업 및 그 계승자들의 “작업들”들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몰인식을 표현해 주었다(tradusait). 하지만 이 책에는 또한―적어도 나는 어느 때보다도 이를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맑스의 사고 양식, 또는 알튀세르가 제안한 표현에 따르면 그의 “이론적 실천”에 고유한 어떤 것이 다시 출현했는데, 이는 어떤 “맑스주의”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맑스주의의 한계들을 드러내 주는 데 기여했다. 이는 이 사고양식에 구성적인 명제들 및 아포리아들로 거슬러 올라가서 내부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더욱 더 강력한 기여였다.

이 때문에 1965년 『맑스를 위하여』의 출간(및 몇 주 뒤에는 『자본을 읽자』라는 집단 저작의 출간)이 곧바로 점화하고, 앙리 르페브르 같은 위대한 맑스주의자들 및 레몽 아롱 같은 맑스주의의 위대한 적수가 참여한 “상상적 맑스주의”와 “현실적 맑스주의” 사이의 논쟁은 오늘날 더 이상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모든 맑스주의는 상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들 중 일부, 서로 매우 다르고 사실은 매우 적은 또는 소수의 텍스트들이 대표하고 있는 몇 가지 맑스주의는 여전히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따라서 현실적 효과들을 생산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맑스를 위하여』의 “맑스주의”가 능히 이것들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

하지만 꼭 필요한 몇가지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정보들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 기록과 그 독자들 사이에 여러 개의 가리개―여러 가지 설명틀―을 만들어 놓을지도 모를 “낡아빠진” 독해의 시도를 예방하고 싶다.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텍스트들은 1961년에서 1965년 사이에 출간되었다가 한 권에 묶였다는 점을 잘 알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범죄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보고”(1956)와 부다페스트 봉기 및 수에즈 파병(둘 모두 1956에 벌어졌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알제리 무장 봉기 이후 드골 장군의 권력으로의 복귀(1958-1962), OECD의 창립(1960), 베를린 장벽 축조(1961) 같은 프랑스사 및 세계사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1965), 중국의 문화 혁명(1966에 시작), 프랑스와 다른 나라(멕시코, 독일, 미국, 폴란드 ...)에서 68년 5월에 일어난 사건들, “프라하의 봄” 및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마찬가지로 1968년), 사회당과 공산당 사이의 “좌파 연합에 따른 공동 강령”(1972), 70년대 “유로 공산주의” 탄생, 아옌데 정권의 몰락 및 아옌데 피살(1973),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1974) ...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맑스를 위하여』의 테제들을 맑스주의 및 맑스에 대한 논쟁의 역사만이 아니라 20세기 철학사―이 테제들은 이 역사 안에 아주 가시적인 흔적을 남겨 놓았다―안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이 책이 1960년이라는 아주 놀라운 해 바로 다음부터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게 유익할 뿐 아니라, 아마도 필수불가결할 것 같다. 1960년 이 해에는 메를로-퐁티의 『기호들』([모스에서 레비-스트로스까지] 및 [마키아벨리에 대한 노트]가 수록된)과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레비-스트로스는 1962년 『야생의 사고』에서 이 책에 답변할 것이다), 질-가스통 그랑제(Gilles-Gaston Granger)의 위대한 인식론 저서 『형식적 사고와 인간 과학』 및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앙리 에(Henry Ey)가 조직한, 라캉을 중심으로 한 정신분석에 관한 본느발 회의, 마지막으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 의식』의 불어 번역(저자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이 출간되었다. 앙리 르페브르의 『일상 생활 비판』(1958, 1961)과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1961), 자크 데리다의 『후설 『기하학의 기원』 서론』 및 레비나스의 『총체성과 무한』, 하이데거의 『니체』 강의 출간은 『맑스를 위하여』의 시작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계획적으로가 아니라 “개입”이라는 우연적 기회들에 따라 『맑스를 위하여』가 쓰여지고 있는 동안, 장-피에르 베르낭의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상』(1965),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1963),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1962),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1963), 르루아-구랑의 『행동과 말』 및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론』 1권(1964), 칼 포퍼의 『추측과 논박』과 비유멩의 『대수의 철학』(1962), 그리고 또한 코이레의 『뉴턴 연구』(1965)가 잇따라 출간됐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출간된 후 곧바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1차원 인간』, 피에르 쉐퍼의 『음악대상론』, 장켈레비치의 『죽음』, 바르트의 『비평과 진리』, 벤베니스트의 『일반 언어학의 문제들』, 푸코의 『말과 사물』, 라캉의 『에크리』, 캉길렘의 [개념과 생명][1968년 『과학사 및 과학 철학 연구』에 재수록] 등이 뒤따랐는데, 이 모두는 또 하나의 놀라운 해인 1966년에 출간되었다 ...

요컨대 프랑스 대학의 심장부에 거주하는 프랑스 공산당의 “기층”의 투사[평당원, militant “de base”]인 한 철학자의 『맑스를 위하여』의 저술 및 출간은, 점령 기간 중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냉전이 “평화 공존”으로 역전(또는 연장)되었을 때, 탈식민화가 불가피하게―하지만 항상 힘겨운 투쟁 끝에―일반화된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들의 경제적 성장과 문화적 변동이 부와 권력의 분배에 대한 반대를 확대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서유럽에서 (여전히) 민족적이고 (얼마간) 사회적인 국가가 세계화로의 전환점을 준비하고 있는 반면, 동쪽에서는 스탈린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공연하거나 잠재적인 위기가 여러 가지 형태로 “혁명 속의 혁명”(레지스 드브레)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처럼 보였을 때인 전후의 긴박한 정세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이 책은 전쟁 직후와 관련하여 철학 논쟁이 자신의 대상 및 스타일을 바꾸고 있던 시기에 출현했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도 유익하다. 단지 “의심의 철학들”―그 위대한 스승은 니체이고, 부차적으로는 프로이트 내지는 “구조주의들”이다―, 즉 사회적 실천과 의미작용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disciplines)에게 그것들에 본래적인 과학성을 부여하려는 야심을 지닌 철학들이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푸코가 자신의 천재적인 종합적 정식화의 능력으로 곧바로 말하게 될 것처럼 “지식과 권력의” 질문들이 오랫동안 도덕과 심리학(여기에는 현상학적 심리학도 포함된다)의 질문들을 압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또한, 그리고 아마도 무엇보다도 이 시기 전체 동안 역사와 인류학, 정신분석과 정치를 관통하면서 철학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타자, 자신의 무의식, 비철학에 직면하고, 이것들과 대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철학이 당시에 추구하던 것이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판과 자신의 재구성의 수단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분명히 바로 이것이, 모든 믿음들 및 소속들과 관련된 문제는 제쳐 둔다면, 철학이 맑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다, 이 모두는 유용하고 필수적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맑스를 위하여』는 기록 문헌(document)이 아니다. 이는 책이며, 여기에는 두 가지의 타당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이제부터 가능한 한 간명하게 그 이유들을 환기해 보고 싶다.

첫째로 『맑스를 위하여』는 용어의 강한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은 알튀세르의 철학 스타일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해 주는 것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다수의 미간행 원고들―이중 어떤 것들은 매우 이른 시기의 원고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말년의 원고들이다―의 출간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이 스타일이, 고전들의 취향으로 가득차 있고 영성과 역사에 대한 관심에 푹 젖어 있는, 매우 논쟁적인 한 사춘기 소년의 펜으로부터, 그 이후에는 우수한 대학 논문을 쓴 젊은 필자로부터 쓰여진 몽상들과 에세이들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추구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중에 가면 이 스타일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그 고유한 지반 위에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려는(concurrence) 이론적 투사의 시도 속에서, 그리고 허구적인 법정에 제출하기 위해 쓰여진 검사의 구형논고이자 동시에 변론인 자서전의 고백(나는 이 주장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 속에서 사라지고, 예외적으로 번득이는 자취 속에서 엿보일 뿐이다. 하지만 『맑스를 위하여』에서―이미 저 비범한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PUF, 1959; 1992년 Quadrige 총서로 재출간]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마키아벨리와 우리』[L.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ed.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5, pp. 42-168]라는 “책”(왜냐하면 이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이 그의 책상서랍에서 그에게는 유일하게 “이론”의 영예를 얻을 만한 것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에서―이 스타일은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이 책의 첫 번째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는 과학의 엄밀함에 대해 말하고, 그 수사법적, 개념적 경제성을 통해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는 스타일이면서 또한 매우 예외적으로 정열적인 스타일이기도 하다. 즉 알아내기 힘든 원천들에서 체험된 그 모든 정열이 일종의 추상의 서정주의(언젠가 알튀세르가 크레모니니에 대해 “추상 회화”가 아니라 “추상적인 것에 대한 회화”라고 말하게 될 의미에서)로 표현되는 스타일인 것이다. “결과들의 힘”([아미엥에서의 주장])이 공언되는 이 스타일은, 원하는 모든 것을 파스칼과 루소에게, 페귀와 사르트르(이는 분명한 사실이다)에게, 맑스와 니체에게 빚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절대적으로 독특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공적인 어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이는 우리에게 글쓰기의 발명 없이는, 이 글쓰기가 “편”드는(prend le “parti”) 개념에 의한, 이 개념을 위한 글쓰기의 발명 없이는 철학―추론적이든 반성적이든, 아포리즘적이든 논증적이든 간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다.

두 번째로, 『맑스를 위하여』는 아무런 고유한 교의도 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는 주어져 있는 한 교의(또는 이론), 즉 맑스의 교의를 위해 “봉사한다.” 하지만 이 교의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적어도 체계적 서술의 형태로는 실존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화는 분명히 이 교의의 희화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는 기묘한 특수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설명하듯이 구상[ébauches]과 응용, “전제 없는 결론들” 내지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작업들” 및 “실천적 작업들”에서 그 자체로 정식화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의 형태로 이를 발견함과 동시에 진정으로 이를 생산해야 한다.

즉 개념들을 명명하고 분절하고, 개념들이 그 속에 놓여 있는 테제들(사실은 물론 가설들)을 언표해야 한다.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에서 맑스로 하여금 그가 실제로 말했던 것 이상을, 그리고 그와는 다른 것을 말하게 하면서, 하지만 또한 인식론과 정치, 형이상학의 모든 영역으로 맑스에서 유래한 질문들과 통념들을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놀랄 만한 개념적 도구들의 배형(constellation)을 생산함으로써 끊임없이 수행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알튀세르는 [서문]([오늘], II, p. 24)에서 자신이 제시한 맑스 독해의 가설들을 “문제설정”(그는 이를 1963년에 죽은, 그리고 이 책이 헌정된 자크 마르탱(Jacques Martin)에게 빌려 왔다고 말한다)과 “인식론적 절단”(그는 이를 자신의 선생이었던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빌려 왔다고 말한다)이라는 주요한 두 가지 이론적 개념과 결부시켰다. 사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개념―이 개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함께―은 “알튀세르주의”의, 또는 오히려 그가 인식론 담론에 남긴 흔적의 서명 표시로 표상/대표된다. 『맑스를 위하여』의 기획에 본질적인 이 개념들은 하지만 분명히 『맑스를 위하여』의 이론적 내용 전체를 소진시키지는 않는다. 나로서는 이러한 단순화된 소개―여기서는 토론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논쟁의 소재를 지적해 두는 게 문제다―가 지닐 수 있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호 독립적인 통념들과 질문들의 세 가지 배형을 확인해 두고 싶다.

한 가지 배형은 “인식론적 절단”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사실 이 개념에는 이론적 실천, 과학성, 그리고 관념들이나 사고들 자체가 아니라 이것의 물질적 가능성의 체계적 통일성으로 사고된 문제설정(이 개념은 아마도 하이데거의 프로블렘슈텔룽(Problemstellung)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들뢰즈와 푸코의 “문제화”(problématisation) 개념과 이를 비교해 보면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같은 개념들이 속할 만한 충분한 권리를 갖고 있다.

여기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지점인데, 이는 과학이라는 관념이 품고 있는 정서들 및 이 관념이 포함하고 있는 난점들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이 점에 관해서는 두 가지 관찰만 제시해 두겠다. 알튀세르는 상이한 자기비판들(특히 “변증법적 유물론” 또는 “이론적 실천의 이론”이 과학 담론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철학 담론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을 전개할 때에도 (『자본』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맑스의 이론이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적인 중핵을 포함하고 있다는 관념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은 반면, 맑스 이론의 과학성에 대한 관점에서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전혀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연구인 [알튀세르의 대상](국역: [철학의 대상: ‘절단’과 ‘토픽’],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맑스주의의 전화』(이론, 1993) 참조].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이데올로기적 가상들을 넘어) “현실적인 것으로 회귀”한다는 관념으로부터 “이론적 전유”―이는 동시에 과학이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이자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가상적 권력에 대한 과학이기도 하다―라는 좀더 스피노자적인 관념으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맑스를 위하여』 및 후속 논문들이, 실존하는 과학성의 모델을 맑스주의적 논쟁 안으로 “수입”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또는 어쨌든 동시에) 역사유물론 (및 정신분석)이 구성하는 (갈등적이면서 엄밀한) 독특한 인식의 실천으로부터 출발해서 “과학” 개념을 개조하려고 한 것인지 질문해 볼 수 있다(또한 마땅히 질문해 봐야 한다). 이 경우 “과학”이 우리에게 절단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맑스의 절단에 고유한 명증성(흄식의 감각론적 형태뿐만 아니라 헤겔식의 사변적인 형태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경험론 및 직접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이야말로 과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우리가 다시 질문해 보도록 촉구한다. 다시 말해 과학이 포함하는, 하지만 과학이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인식과 진리 효과들 자체에 관해 질문해 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공된 두 번째 배형은 구조라는 통념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통념은 분명 체계적 통일성 내지는 “총체성”라는 관념에 준거하지만, 이 후자는 완전히 내재적인 방식으로, 또는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효과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부재하는 원인”의 양식으로 자신의 효과들 안에서 주어질 뿐이다(알튀세르는 나중에 이를 자신의 다양한 양태들 안에 내속하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비교하게 된다). 문제는 맑스 및, 그와 그 이후의 다른 맑스주의자들(특히 정세, “구체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할 때의 레닌)이 역사 안에서 발견하고 싶어 하는 인과성의 유형 자체이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다양성이 실천들의 다양성이라는 점이다. 실천들의 총화를 구조화하는 것은 실천들이 서로에 대해 작용하는 방식을 가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알튀세르는 실천들은 오직 본질적이고 환원불가능한 과잉결정의 양식으로 서로에게 작용한다고 말하는데, 어떤 “복잡성의 감축”도 이 과잉결정 너머에서 선형적 결정 관계의 단순성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여러 실천들 중 하나에 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 주장되면 될수록, 이와 상관적으로 이질적인 “지배”(domination), 또는 “지배작용”(dominance)의 필연성이 생겨 나고, 따라서 “순수한” 경제적 경향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의 다양화가 생겨 난다. 그리고 이 장애물들이야말로,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유일하고 진정한 “역사의 동력”을 이루는 계급투쟁의 소재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관점 ... 은 인문과학들의 인식론을 분할하고 있는 방법론적 “개체론”과 방법론적 “유기체론” 내지는 “전체론”에 대한 이중적 거부에 의해 부정적으로 표시된다. 따라서 이 관점은, 적어도 형태상으로는, 근원적으로 관개체적인(transindividuelles) “관계들”(“rapports” ou “relations”)의 결합으로서의 사회적인 것을 이론화하는 데서 철학적인 표현을 제공해 준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고전적인 관념론 및 유물론에 직면하여 이러한 이론화의 필요성을 깨달은 뒤, 계속 이에 관한 작업을 시도했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주관적 시간들의 분리 내지는 거리두기의 구조라는 관점에서 비범하게 소묘되고 있는 “의식”이라는 인간학적 범주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대응물로 지니고 있다. 이 논문은 책 전체의 이론적이고 기하학적인 중심이지만, 이 책에서 이 논문은 “도둑맞은 편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누구도 이를 그 자체로[즉 이 책의 중심으로] 읽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이 논문이 미학에 관한, 연극에 관한 논문이라는 암묵적인 이유(raison honteuse)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다시 한번, 알튀세르가 여기서, 궁극적으로는 역사나 역사성이 아니라, 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안에서 우연의 필연성을 사고하기 위해―단지 맑스 이론의 “시작들” 및 진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구조”라는 관념을 활용하는 방식에 내재하는 난점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 과잉결정이라는 관념은 사건이 포함하는 예견불가능성과 비가역성의 역설적 결합과 함께 사건의 가지성에 응용되었다( ... “정세” ... ). 다른 한편으로 이는 생산양식들의 범역사적 비교에, 따라서 계급투쟁 및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경향에 응용되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이것들을 진보의 이데올로기들 및 경제주의적 진화주의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종말론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한다면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혁명들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적 이행들에 응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 아니다. 연속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모순과 과잉결정], [유물변증법에 대하여]라는 위대한 두 논문을 읽거나 다시 읽어본다면, 내 생각으로는, 첫번째 논문은 사건에 대한 사고쪽에서 과잉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비해, 두 번째 논문은 경향 및 시기 구분쪽에서 이 개념을 이끌어낸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 하나의 관점을 다른 관점과 대립적으로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해결책은 『맑스를 위하여』에서,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구조에 대한 관념에서 이 두 관념 사이의 긴장, 또는 상호성으로서의 역사성이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은 아니겠지만, 매우 밀도있는 논의를 확인하는 데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라는 통념 및 질문 주위에서 조직되는 배형이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 통념에서 해석학이나 역사에 대한 담론의 계보학의 주요 장애물을 발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문제에 대한 30여년 간의 토론―이 역시 하나의 주기를 이루고 있다―이후에, 아마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에 대해 간단히 몇 마디를 결론적으로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통념은 그의 철학적 기획 및, 담론으로서, 학문으로서 철학과 그가 맺고 있는 관계의 핵심 자체를 구성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통념은 철학이 자신의 “자기의식”―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간에―을 통과해서, 그 자신을, 그 자신이 아닌 것, 즉 사회적 실천들의 장 안에, 자신의 물질적 가능성의 조건들과 관련하여 위치시킬 수 있게 해주기(또는 가설상으로는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그 자신을 제거해 버리거나 “반영물”로 환원시키지는 않고서. 바로 이 점에서 이 통념은 알튀세르의 이론을 그의 철학적 모델들, 즉 스피노자 및 어떤 프로이트와 결합시키는 능동적인 혈통 노선을 구성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 담론의 자율성과 자족성의 이론가가 아니라 타율성의 이론가들이다. “토픽”, 즉 사고가 분석하는 갈등의 장 안에서 사고의 위치에 관한, 따라서 사고의 현실적이지만 유한한 역량에 관한 이론가들인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후에도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존재(Sein)에 대한 의식(Bewusstsein), “물질적인 실존 조건들”을 반영하고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는”(즉 추상적, 관념적인) 담론들로 표현되는 “사회적인 의식의 형태”가 아니다. 이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실존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상상적으로 영위하는 의식 및 무의식의(재/인지 및 몰인식의) 형태다. 바로 여기에 적어도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의, 특히 계급 투쟁의 연속적인 형성체들 속에서 역사적 이데올로기들(“중세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담당하는 기능의 기본적인 수준, 근본 층위가 존재한다.

이로부터,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의 종언 역시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종언 또는 사회적 관계들의 투명성으로의 회귀의 다른 이름인 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괴적인 사실의 확인이 직접 따라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알튀세르는 단지 “자신의 진영에 맞서” 집요하게 작업(그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본질적 기능들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철학자는 진영을 가져야 한다)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명백한 형태상의 모순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는 계속해서―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맑스를 위하여』는 오직 이를 주장하기 위해 쓰여졌다―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정의는 유일하게 인식가능한 맑스주의적 정의, 어쨌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이론화와 일관된 유일한 정의이며, 이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을 보완할 수 있게 해준다. 분명 (다시 한번 내 주장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지겠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이러한 정의는 맑스 자신(엥겔스의 경우는 제쳐 두고)이 정식화할 수 있었던 정의들(특히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정반대일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의 집요한 적용은 사실은 맑스주의 이론 및 그 공언된 완결성에 대한 “해체”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가 그러한 정의야말로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아무런 어긋남 없이 “유물론적”이면서 동시에 “맑스주의적”인 철학의 지평은 점점 더 그 앞에서 멀어져 갔다.

분명 이 지점에서 알튀세르의 자기비판들에 대해 한 마디 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간략하게, 그저 독자들이 가장 특징적인 텍스트들을 참조하게 하는 정도로 그치고 싶다.

이제 우리는, 이름 그대로 지칭되든 아니든 간에, 다수의 “자기 비판들”을 보게 된다. 이 자기 비판들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정정하거나 와해시키고(심지어 자신을 파괴하고), 아마도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에게 복귀하려는 양가적인 성향을 표현하는데, 이는 전혀 알튀세르에게 (심지어 철학자들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경우에 자기 비판은 그의 실존 및 그가 이론과 맺고 있는 관계의 독특성을 비가역적으로 표시할 만큼 통상적인 비율을 넘어서는데, 이는 그의 사상의 내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주위의 끔찍한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정들이 반복되고, 또 이처럼 반복되면서 전환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또한 알튀세르 자신이 제시한 몇 가지 “길 안내”를 갖고 있지만, 이는 같은 길을 지시해 주지 않고 있으며, 이는 심지어 『맑스를 위하여』를 독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주해들―이것들은 때로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있으며, 또는 문제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을 사상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를 텍스트의 문자에 체계적으로 투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앞에서 우리는 『맑스를 위하여』를 그 시대와 그 환경 속에서 읽어야 하지만, 이를 기록 문서로 전환시키지는 말아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재발간에서 편집자는 매우 정당하면서 신중하게도,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의 외국어 번역본들을 위해 1967년에 작성한, 그리고 거기에서 제시된 해명들 및 평가들은 프랑스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가치를 지니는 [독자들에게]라는 서문을 [후기]라는 이름으로 포함시키고 싶어했다. 이 [서문]에 반영되어 있는 입장들(“이론주의”에 대한 자기 비판, “구조주의”에 대해 거리두기, 과학과 철학의 차이에 대한, 그리고 철학과 정치, 특히 혁명적 정치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강조)은 『레닌과 철학』(1968) 및 『자기 비판의 요소들』(1974)에서는 이론의 시각에서, 『입장들』(1976)이라는 논문 모음집 안의 몇몇 텍스트들(특히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및 마르타 아르네케르의 저서에 대한 서문으로 쓴 [맑스주의와 계급투쟁])에서는 정치의 시각에서 다시 제시되고 가공된 자기 비판들과 같은 것들이다. 이 자기 비판들은 알튀세르 자신이 선택했던 투쟁 동지들이지만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던, 하지만 또한 이론의 고상한 시선을 위해 “계급 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환기시키려고 했던 양쪽 편(프랑스 공산당(PCF)의 공산주의자들과 맑스-레닌주의 청년 동맹(UJCML)의 마오주의자들)에서 동시에 가해졌던 폭력적인 압박을 반영하고 있다.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 자기 비판들은 자신의 이론적 수단들을 통해 확장된 맑스주의 이론의 장―여기서는 착취 및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조건들이 “최종 심급에서 결정적이다”―안으로 당대의 68년 5월 및 다른 사건들을 끌고 들어가 해명하려고 했던 알튀세르의 시도를 반영한다.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자기 비판들은 하나의 “실천”으로서 이론을 끝까지 사고하는 데―이 시도가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는 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아무런 회고적인 진리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이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목적에 따라 생산되었고 상이한 측면들에 집중하고 있는 두 개의 또다른 “자기 비판”을 지적해 두고 싶다. 하나는 [아미엥에서의 주장](1975년에 쓰였고, 1976년 에디시옹 소시알에서 출간된 논문 모음집 『입장들』에 재수록)에서부터 1980년의 파국 이전이나 이후에 쓰인 매우 암시적인 또는 매우 밀도높은 몇 개의 텍스트들(1984년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철학에 대하여』, 서관모,백승욱 옮김(동문선, 1995)]에서 나타나는, 근대의 변증론자들보다는 에피쿠로스에서 영감을 받은 “불확실성의 유물론”을 인식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암시 같은 것들)에까지 진행된다. 과소결정이라는 단어가 이전의 저작들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1975년 국가 박사학위 심사위원들에게 제출한 [아미엥에서의 주장]이라는 텍스트에서 모순과 그에 고유한 “불균등성”에 관해 수수께끼처럼, 과잉결정은, 이것 못지 않게 본질적인 과소결정이 없이는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양자가 교대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과적 결정 자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일한 구조에 양자 모두가 구성적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여기서 주석 및 보충이라는 은폐된 형태로 이루어진 자기 비판을 읽어내야 할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자기 비판은 다른 것들보다 더 구성적이라는 점에서 훨씬 흥미로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비판이 제공하는 암시―우연의 필연성을 “구조적으로” 해명한 이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이러한 우연의 우연성, 동일한 사건의 내부에서 공존하는 가능태들 내지는 경향들의 “과소결정된”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는 하나의 테제나 심지어 하나의 가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적 프로그램이라는 점 역시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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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민노당 대권 후보 3인방 집중 분석 #3: 심상정 의원

* 레디앙(2007. 5. 16) / "아직 대중정치인 못 된 정책전문가"
[그들의 약점③-심상정] “지금은 성장기, 타후보 많이 추격할 것"

“정책전문가인가 대중정치인인가?”

민주노동당 심상정 대선예비후보를 두고 당 안팎의 인사들이 적지 않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강병익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심상정 후보를 두고 “정치인이라기보다 전문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말한다.

심상정 후보의 ‘전문가 이미지’는 심 후보의 활동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강병익 연구위원은 “국회에서 재경위 활동을 해왔는데 이는 ‘숫자스런 활동’이고 이 점이 많이 노출되다보니 그렇게 이미지가 형성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슈 앞서 제기하려 하지만 대중들 눈여겨 보지 않아

   
 ▲ 사진=심상정 의원실
 
당원들도 심상정 후보를 특정 영역의 대변자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진보정치연구소가 지난 해 12월에 발표한 ‘민주노동당 대선 전략 관련 당원 설문조사 보고서’에 포함된 분야별 적합 후보 조사에서 드러난다.

이 보고서 따르면 심상정 후보는 권영길, 노회찬 후보와 비교했을 때 ‘노동자, 농민, 서민 대변’ 분야와 ‘양극화 해소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적합 후보로 선택된 비율이 큰 격차를 보이지 않았지만 ‘사회 개혁과 정치진보’ 분야와 ‘한반도 평화 통일’ 분야에서는 현저하게 큰 격차를 보였다.

한 여론조사전문기관의 연구원은 “심상정 후보는 서민을 대변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 자체로는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이미지로 치우쳐 있다. 정치, 통일외교와 같이 대선 후보가 다루어야 하는 또 다른 영역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고 말한다.

강병익 연구위원도 “예비후보로서의 발언 영역은 넓어야 하는데 평소에 정치나 평화에 대한 발언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슈를 앞서서 제기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중들이 눈여겨 바라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상정 의원실의 손낙구 보좌관은 심 후보의 ‘전문가 이미지’가 형성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노동운동 하다가 정치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재경위에서 경제 문제로 정면 승부를 하다보니 정책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경제관료들을 상대할 수 없다.”

정책전문가는 대중정치인 못되나?

그리고 손 보좌관 말대로 “정책전문가가 대중정치인이 못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정치 입문과 함께 국회의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난 2004년 총선 이후에 국회에서 놀랍도록 성장한 심상정 후보가 대중정치인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전문가 이미지’만으로는 대중들에게 ‘대통령 그릇’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선 후보가 되겠다고 나선 지금 심 후보는 대중정치인이라기보다는 정책전문가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는 것은 썩 좋은 현상은 아니다.  

한 인터넷신문의 민주노동당 출입 기자는 “심상정 후보는 컨텐츠도 타당 후보들보다 우수하고 의정활동에서도 검증된 인물이지만 대선은 국회의원을 뽑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 기자는 “대선 후보에게는 ‘대통령 그릇’이냐는 게 중요한데 심상정 후보는 당 지지층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흥행카드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국정운영을 잘 하겠느냐 측면에서 대중들에게는 모자라게 비쳐진다”고 심 후보를 평가한다.

민동원 민주노동당 양천구위원장도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아직까지는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며 민심을 전한다.

지난 해 12월 진보정치연구소가 발표한 또 다른 보고서인 ‘민주노동당 대선 관련 당원 의식조사 표적집단 심층면접 보고서’에 따르면 능력지수와 대중성 지수 중 신뢰감, 친근감 등은 권영길, 노회찬 후보보다 높게 나왔지만 대중성 지수의 한 항목인 ‘민주노도동당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을 평가한 지수에서는 두 후보보다 낮았다.

능력, 신뢰감은 두 후보보다 높았지만 대중성은 낮아

당원들도 심상정 후보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뢰하지만 민주노동당 대표선수로는 다른 후보들에 비해 덜 인정하는 편이다.

대선후보 출마를 결심하기 전까지 국회의원으로서 재경위 활동에 집중했던 심상정 후보는 당을 이끌어간 경험이 없었던 점도 대중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 형성에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

서울의 한 지역위원장은 심상정 후보는 “정책가 스타일”이라며 “대형할인마트 법안과 같이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매개로 지역을 조직하고 지역주민을 만나는 ‘정치행위’를 보여주지 못했다. 당을 들썩거리게 하는 열정은 부족한 듯하다”고 평가한다.

결국 심상정 후보는 국회 재경위 활동으로 서민을 대변하는 영역에서는 짧은 시간에 전문적인 역량을 쌓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의정활동 잘 하네”로 그치고 있고 이런 이미지를 불식시킬 만큼의 대선후보로서의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들이다.

그러나 분명 이는 현재의 평가이다. 손낙구 보좌관은 “심상정 후보는 대중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또 손 보좌관은 지난 해 진보정치연구소의 조사결과 대해서 “예전에는 대선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지난 해까지는 그렇게 조사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면 평가가 많이 달라질 것”이라 반박한다.

‘대통령 그릇’을 언급한 인터넷신문 기자도 “심상정 후보는 만만치 않은 내공과 컨텐츠를 지녔다. 본격적인 선거가 시작되면 심상정 후보가 타 후보들을 많이 추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사진=심상정 의원실
 
"자신 강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최대 약점"

대중정치인보다는 전문가 이미지가 강하고 특정 영역에 쏠린 이미지로 대중과 당원들에게 각인된 상황은 벗어나리라는 진단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더더욱 문제다. 이재기 의정지원단장이 “장점을 대중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듯이 “심상정의 최대 약점은 자신의 강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심상정 후보는 민주노동당의 대표선수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평화문제로 시작해서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쏟아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전국의 당원을 직접 대면하는 자리를 갖고 있는 중이다.

이런 자리가 심상정 후보를 당원들에게 대중정치인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의 스타일 때문에 전문가 이미지를 강화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심 후보가 선생님처럼 가르치는 말투를 지녔다는 점은 그를 직접 대면한 당 안팎의 사람들이라면 공히 지적한다.

지난 15일 고양시위원회에서 열린 ‘강한당 토론회’에 참석한 이재정 원당분회장은 토론 후, “심상정 후보는 말이 설명조인 데다가 너무 많다”며 “정치인은 전문성보다는 상식으로 다가가는 게 필요하지 않겠냐”고 심 후보를 평가했다.

심상정 후보가 의욕적으로 기획한 ‘강한당 토론회’는 전국의 지역위원회를 찾아다니며 당원들과 정치 현안과 당내 문제에 의견을 나누는 자리이다.

"너무 가르치려 들어, 말도 많고"

심상정 후보와 오랜 기간 노동운동을 함께한 노조간부는 “심 후보는 아는 게 많고 워낙 똑똑해서 충분히 듣기보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말한다.

김형탁 대변인도 “심상정 후보의 말은 어렵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누굴 선택할까 생각 중인 사람한테는 그렇지 않다. 내용은 있되 쉬운 언어로 편하게 다가가야 한다”고 주문한다. 민주노동당의 한 관계자는 “정치인이라면 논리에 의해서 분위기를 압도하기보다는 포용력으로 압도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손낙구 보좌관은 “그런 면이 있다고 본다. 약점이라기보다는 개인의 개성”이라고는 하지만 “지위와 직책에 걸맞도록 말을 조절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리고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알아듣기 쉽게 다가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심상정 후보의 약점으로 여성후보로서의 강점을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여성후보 강점 못살려

강병익 연구위원은 “심 후보는 젠더적 의미에서 여성후보는 아니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후보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친화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전략이 없다”고 지적한다.

진보정당의 여성후보라면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따뜻함이나 보살핌과 같은 여성성에 목매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성정치인이라면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여성의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중요하다.

앞서 심 후보의 대중성을 평가한 인터넷신문 기자도 “심상정 후보는 색깔 자체가 여성정치인이 아니다. 남성적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성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는 당 관계자는 “심상정 후보의 중성적 이미지가 강점”이라고 반박한다. 이 관계자는 “심 후보는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 잘 진열된 백자나 청자가 아닌 질그릇처럼 언제나 쓸 수 있는 가깝고 단단한 그릇과 같은 여성상을 구현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중성적 이미지가 강점

여성후보로서의 전략은 여성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 형성과 더불어 여성관련 정책을 매개로 한 정치활동도 있다. 이는 비단 여성후보에게만 요구되는 바는 아니지만 심상정 후보는 아직까지 눈에 띠는 여성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손낙구 보좌관은 “조금 더 지켜볼 것”을 주문했다. 경선이 9월이니 속도 조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 보좌관은 “출마선언 후 첫 주제로 평화를 내세웠고 차례대로 발표하고 있다. 여성 정책은 준비 중에 있다”고 밝혔다.

심 후보도 고양시 ‘강한당 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의 여성주의가 어디까지 왔는가 하는 주제와 여성고용할당제, 육아휴직 부부 매칭 제도와 같이 여성 노동권을 주제로 하는 토론회를 6월에 열겠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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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민노당 대권 후보 3인방 집중분석 #2: 노회찬 의원

* 레디앙(2007. 5. 16)  / 참신함 약화, 경륜 이미지는 아직
[그들의 약점②-노회찬] "통찰력 숨겨진 인간적 면모 알릴 것"

소설가 공지영씨는 노회찬 의원에 대해 "한국의 좌파를 일약 역사의 무대에 정식 직원으로 데뷔시킨 장본인"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공씨가 노 의원을 단순한 좌파 성향의 정치인이나 좌파 조직에 소속된 정치인이 아니라 "좌파를 역사의 무대에 데뷔시킨 장본인"으로 규정한 것은 흥미롭다.

노회찬 의원의 '개인기' 장점이자 약점

   
  ▲ 사진=노회찬 의원실
 
지난 대선에서 자신의 정치적 존재를 처음 대중에게 알린 이래, 노 의원은 '조직을 넘어서는 개인', '조직보다 돋보이는 개인'의 이미지로 줄곧 비춰져 왔다. 공씨의 말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노회찬이라는 '탁월한 개인'이 펼친 눈부신 활약상에 대한 최고의 헌사이면서 노 의원이 구축한 정치적 개성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있다.

노 의원의 가장 큰 장점은 대중과의 소통능력이다. 대중적 관심사를, 대중에게 설득력을 갖는 화법으로 적시에 말하는 건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귀한 역량이다. 민주노동당의 고질적 병폐가 대중과의 괴리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당내 경선에서 노 의원을 지지하는 이들이 내거는 명분도 "노 의원이 가장 대중적 호소력이 있는 후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노 의원의 약점도 바로 이 '개인기'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대개 장점은 약점의 음화이기 쉽다. 크게 두 가지가 약점으로 지적된다.

"당내 정치에 대한 비전과 리더십이 없다"

먼저 당내 정치에서 분명한 역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플레이'에 치중하느라 당의 구조와 체질을 바꾸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 아니냐는 불만도 들린다. '개인기'로만 문제를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강병익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권영길 의원은 나름대로 당내 이견을 봉합하고 추스르는 리더십을 보여줬다"면서 "노 의원에 대해선 보다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방식의 당내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데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 의원은 당 사무총장 시절에도 미래지향적 당을 만들기 위한 인력의 결집과 형성에는 왠지 모르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었다"고 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번 경선에선 대선 한 게임만을 뛸 후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년 총선까지 당을 이끌 리더십을 뽑아야 한다"며 "노 의원은 당을 전체적으로 끌고 가는 리더십을 보여준 적이 없고, 그를 위한 방안도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노 의원의 '개인기'가 대권후보의 위상에 걸맞게 업그레이드 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기존의 '개인기'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병두 열린우리당 의원은 "노 의원의 대중적 인기 비결은 시원시원한 말"이라며 "대통령 후보로서 업그레이드 되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말에서 '울림'있는 말로 화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노 의원이 메시지 관리에서 아직 '울림'보다는 '재미'와 '화제'에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김종철 전 서울시장 후보는 "노 의원은 재치있고 똑똑하고 순발력 있는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면서 "대권후보로서 무게를 갖춰야 하고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 중앙일간지의 민주노동당 출입 기자는 "경제에 강한 심상정, 통일 문제의 권영길과 같은 정책 전문 분야가 노 의원에겐 없다"고 지적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처음에는 신선함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는 모습이 보인다"면서 "내용이 아니라 자꾸 언변으로 문제를 극복하려고 해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고 했다.

"반대만 하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다"

홍 소장은 또 "진보진영 전반이 비판하는 데는 익숙한데 비판받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최근 각종 토론에서 정책 및 대안과 관련해 비판을 받으면서 진보진영이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특히 노 의원의 경우 순발력있게 치고 나가는 것이 장점이었기 때문에 위축되는 모습이 더욱 커 보인다"고 했다.

홍 소장은 반값 아파트 정책에 대한 홍준표 의원과의 토론 및 한미FTA 협상에 대한 토론에서 노 의원이 보인 '부진'을 예로 들었다. 홍 소장은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토론에서는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간혹 비판만 해도 되는 토론에 나가서는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반대만 하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 의원의 대중적 이미지에 대해 "과거의 신선한 이미지는 약화되고 있는 반면 아직 경륜의 이미지는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총괄 평가했다.

노 의원의 경선 전략은 대국민 정치다.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를 통해 자신은 물론 당의 대중적 존재감을 높여 "당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당"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를 통해 당 내부에서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당내 조직과 계파는 없고 대중적 인기는 높은 노 의원에 적합한 경선전략이다.

노 의원측은 최근 시도한 대국민 정치의 한 사례로 '제주도 해공군기지' 문제를 들고 있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제주 지역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이 적지 않이 제고됐다는 것이다. 노 캠프의 한 관계자는 "후보 등록 마감 전에 크게 터트릴 건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 '조세'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했다.

'가벼움'은 장점이자 '셀링포인트'

대국민 정치에서 노 의원의 '가벼움'은 외려 장점이거나 적어도 불가피한 것으로 노 캠프는 보고 있다. 박권호 보좌관은 "아직 민주노동당에 대해 '무겁다' '칙칙하다' '행동이 굼뜨다'는 지적이 많다"면서 "현안에 대한 노 의원의 가볍고 순발력있는 대응과 화법은 약점이 아닌 강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 의원의 메시지가 '무게'와 '울림'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우리가 점잖게 얘기한다고 언론이 받아주겠느냐. 우리는 메이저가 아니다. 이런 저런 조어도 만들고 톡톡튀는 논평도 내는 것은 마이너의 생존전략이다. 국민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끌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했다.

노 캠프에서 공보업무를 맡고 있는 신장식 전 대표비서실장은 "국민과 의사소통을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노 의원의 장점이자 셀링포인트"라며, 다만 "당내에 '가볍다'는 식의 이미지 프레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만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 의원의 깊이와 통찰력, 숨겨진 인간적 면모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노 의원이 정책에 상대적으로 약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노 캠프측은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박권호 보좌관은 "지난 대선, 총선에서 당의 정책개발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노회찬 선대본부장이다. 당시 모든 정책토론에 당을 대표해서 나갔다"면서 "당의 정책과 공약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꿰고 있는 사람이 노 의원"이라고 했다.

   
  ▲ 사진=노회찬 의원실
 
당 개혁? 비전보다 리더십을 확보하는 게 중요

그는 '정책토론에서 노 의원이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홍준표 의원과의 '반값 아파트' 토론은 '반값 아파트'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식의 불리한 구도를 깔고 맞붙은 토론이었고, 한미FTA 토론도 협상의 세부내용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협상의 정보를 가장 많이 쥐고 있는 협상 당사자들과 맞붙었던 힘든 토론이었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당의 개혁방안과 관련, 노 캠프의 한 관계자는 "지금 당에 필요한 건 비전이 아니라 비전을 실천하기 위한 정치적 동력"이라고 했다. 지금껏 당의 체질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그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림'대로 실천할 당내 리더십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 의원은 대국민 정치를 통해 국민적 반향을 얻고, 이를 통해 당을 개혁할 수 있는 정치적 힘과 권위를 확보할 것이라고 했다.

노 의원측 경선 전략은 대국민 정치라는 한 방향으로 수미일관하고, 이것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대중적 반향을 얻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대중적 반향'을 재는 척도가 분명치 않다. 흔히 주요언론의 보도를 잣대로 삼지만 요즘 매체들의 분위기로 봐서는 어지간한 재료가 아니면 거의 반응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당원들의 '감'에서 '대중적 반향'의 정도가 실감나게 계측되지 않을 때 대국민 정치라는 노 캠프의 전략은, 의도와 무관하게, 실제 '대중적 반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적 호소력이 있는 후보'라는 기존의 이미지에 쉽게 편승해 가려는 당 내부용 홍보전략의 그럴듯한 방편 정도로 여겨지기 쉽다.

설혹 그런 평가를 받는다고 해도 탓할 일은 아니다. 경선 전략의 핵심은 '경선에서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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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민노당 대권 후보 3인방 집중 분석 #1 : 권영길 후보

      레디앙이 민주 노동당의 '유력 대권 후보 3인방'(사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어패가 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 민중의 희망, 민중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날까지)의 정치적 취약점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재미있는 기사를 냈다.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후보는 권영길씨다. 벌써 3번째 대권 도전이라니 믿기지가 않고 세월이 무상하기까지 하다.

 

* 레디앙(207. 5. 16) / 너무 신중한 삼수생, '안주'하고 있나
[그들의 약점①-권영길] 진보대연합 성공 여부 약점 극복 키워드

민주노동당 세 후보의 약점 또는 단점을 살표보는 일은 쉽지 않다. 지지하는 쪽은 감추려하고 경쟁 진영은 강조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1백% 객관적 평가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레디앙>이 약점 또는 단점이라는 문패를 달고 이들을 살펴보려 한 까닭은 후보들의 약점에 대한 솔직하고 다양한 시각과 이를 '방어'하는 쪽의 논리가 부딪치는 어느 지점에서 진실의 편린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객관성의 확보는 아니지만 객관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진보 진영의 터줏대감.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선 예비 후보를 소개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언어는 없다. 이 표현 속에는 권 후보를 대변하는 안정감, 신뢰감, 따뜻함 등이 총체적으로 집약돼있다. 이를 포괄하는 권 후보의 트레이드마크는 '신중한 리더십'으로 집약된다. 이에 대해 박용진 전 대변인은 권 후보에 대해 "침묵으로 말하고 의지로 실천한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실제 권 후보의 '신중한 리더십'은 수많은 갈래의 진보 진영을 한 조직 안으로 끌어안을 때 마다 십분 발휘되며 실질적인 성과를 이끌어냈다. 1997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에 맞서 정부 수립 후 최초 정치 파업을 이끌어낸 것을 시작으로 1988년 언론노조 설립, 1995년 민주노총 설립,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전면에는 권 후보가 있었다. 

안정인가 안주인가, 미덕이 구태로

   
  ▲ 자료사진=레디앙 문성준 기자
 
그러나 권 후보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의 '현재'에 주목한다. 현재 봉착한 민주노동당의 '위기'가 권 후보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는 관점이다. 한 최고위원은 "위기를 맞아 무력감으로 정체돼 있는 당의 오늘이, '안정'이 아닌 '안주'하는 권 후보의 그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당의 혁신을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한 당직자도 "정치적 지분이 적은 진보정당에게 안정감도 중요하지만, 지금 절실한 것은 이 위기를 타개해 낼 돌파력과 고립을 벗어나기 위한 공세적인 역동성”이라며 "지금까지 보여준 권 의원의 '좌고우면' 리더십만으론 결코 당의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당의 혁신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권 후보의 미덕인 '안정'과 '신중함'이 '안주'와 '좌고우면'이라는 '구태'로 비춰지고 있다. 특히, 이번 대선 출마 선언과 관련해 권 후보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는 '좌고우면' 성향에 '쐐기'를 박는 사례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이어 권 후보의 또 하나의 아킬레스건은 정치부 기자들이 가장 많이 궁금해 하는 '삼수론' 이다. 이에 맞서 권 후보는 '감동론' (삼수 한 사람이 당선돼야 더 감동적이다)에서 시작해 '자격론' (나는 대통령감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을 거쳐 '시대정신론'(빨치산의 아들인 권영길이 평화 통일의 시대정신이다)을 잇달아 제시하고 있지만, 주변의 반응은 여전히 '막연하다'는 게 지배적이다.

이에 권 후보를 애정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한 당직자는 "지난 번 당 대회에서 처음으로 (권 의원이) 삼수를 내세우며 자신이 돼야 더 감동이라고 했을 때, ' 당에서 가장 재미없는 권영길이 처음으로 당원을 웃겼다'(웃음)"며 "무거운 걸 가볍게 잘 다뤄 기대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 뒤 삼수론에 대해 더 발전된 그림과 명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한 인터넷 매체의 정치부 팀장은 "삼수론은 설사 본선에 진출 한다고 해도 계속 끊임없이 권 후보를 따라다닐 것"이라며 "지금의 명분으론 부족하다. 더 구체적인 역할과 밑그림을 제시해 야 한다"고 주문했다.

권 후보의 '삼수'는 자연스레 '나이' 문제로 이어진다. 이를 의식한 듯 권 후보는 기자들을 만날 때면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는 한나라당 대선 예비 주자인 이명박 전 시장과 '동갑'임을 자주 강조한다.

권영길과 이명박은 동갑내기

그러면서 권 후보는 삼수 끝에 당선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네 번의 도전 끝에 당선된 브라질의 룰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넬슨 만델라를 내세운다. 그러나 '나이' 문제는 단순히 주민등록번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당내 한 관계자는 "이 문제에 대해 권 캠프가 그저 나이가 많고 적음의 평면적 문제로 단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면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나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새로운 걸 보여주거나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더 나아가 대통령 후보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담지 못해 그에 따른 미래의 비전과 내용이 부족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게다가 권 후보가 먼저 출발한 두 주자보다 '상대적으로' 느린 행보를 보이고 있어 당 안팎에서는 이에 대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보폭이 느리다보니 자연스레 언론 노출의 빈도도 떨어지고, 당내 첫 경선을 위한 '흥행'에도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소극적인 권영길 ... 선배가 먼저 멍석을 깔아줘야

권 후보에게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한 당직자는 "(권 후보의)느린 행보를 보면 우리가 오히려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면서 "후발 주자에다가 (대표를 하느라)개인 의정 활동도 딱히 내세울 상징이 없는 분이 그리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또 당의 한 관계자는 '선배론'을 꺼내들었다. 그는 "그래도 최소한 '권영길'인데, 처음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의 선배라면 후배들에 앞서 먼저 멍석을 깔아주고 통 큰 정책이나 공약을 제시하면서 흥행을 몰아줘야 하는 게 맞다" 면서 "지금봐서는 내용이 없는 건지, 아니면 또 특유의 우유부단함을 부리고 있는 건지 솔직히 종잡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조금 더 솔직하다. 그는 "캠프 내부에서는 경선 당선권에 근접한 것으로 자체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의 소극적인 행보는)어떻게 보면 당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도 있다"고 쓴소리를 했다. 

또 한 인터넷 매체의 정치부 기자는 권 후보의 소극적 행보에 대해 "기자로서 (권 의원 캠프에) 아쉬운 게 있다면, 우리가 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왜 권영길이 ‘뉴스’가 되지 못하는지 캠프는 한 번 쯤 고민하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 자료사진=레디앙 문성준 기자
 
권영길의 핵심 키워드는 ‘진보대연합’ - 새로운 대선 구도와 판짜기

이렇듯 당 안팎에서 제기되는 권 후보의 약점에 대해 권 캠프 쪽은 공세적으로 맞받아치고 있다. 우유부단의 리더십은 이 시대의 갈등을 치유하는 포용의 리더십으로, 삼수론과 나이는 노련함과 연륜으로, 느린 행보는 본선 승리를 위한 권영길의 시간표로 대치시킨다.

권 후보가 이번에 '진보대연합을 통한 진보적 정권 교체를 달성 하는 것'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권 후보는 기자 간담회를 할 때마다 매번 ‘진보대연합’을 강조하며, 선언적 의미를 뛰어넘는 실질적인 행동을 이끌어내겠노라고 강조했다.

즉, 진보대연합의 판을 성공시키는 것이 이번 대선에 나서는 권영길의 역할이자 시대적 명분이라는 것이다. 권 캠프의 한 관계자는 “공약이나 정책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은 ‘진보대연합’인데, 이에 따른 권 후보의 행보나 결과가 쉽게 가시화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당에게 가장 절실한 건 위기를 돌파 할 새로운 정치판의 구도와 전망”이라면서 “이번에 권 의원이 나온 것도 그러한 판을 구성하고 짤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면에서 권 후보 특유의 ‘신중한 리더십’은 여전히 유효하는 입장이다. 즉, 진보대연합을 이뤄내기 위해 그 어느 때 보다도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이는 권 후보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과 당의 위기론에 대해 상황 인식은 같이하지만, 그에 따른 해법으로 반대의 리더십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또 권 후보의 편안한 이미지가 주는 익숙함에 대해 캠프 측은 “좌파의 강성 이미지를 희석시켜주는 자산”이라며 “대중 정치인으로서 오히려 더 강조하고 부각시켜야 할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어 캠프 측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공약에 관해서는 5월 말부터 서서히 공개 할 예정”이라며“당이 합의한 경선 시간표를 어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앞서 선언한 두 후보를 기준으로 권 후보가 무조건 느리다고 지적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 권 캠프 측은 “국민들이 진보에게 원하는 건 신선함이 아니다. 진보 정권도 수권이 가능하다는 저력을 보고 싶어 한다”면서 바로 그 역할의 적임자가 권 후보임을 강조한다.

즉, 권 후보가 필승 카드로 내세우고 있는 ‘진보대연합’의 성공 여부가 그의 약점을 ‘미덕’으로 승화시킬지 아니면, 도태된 ‘구태’로 내몰지 가늠하게 만드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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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ephistopheles > 27년전 역사 그리고 지금..

1980년

5월 17일 (토요일, 맑음)

24시 00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 시내의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하며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 (일요일, 맑음)

9시 40분
계엄군이 전남대생 50여명의 등교를 저지했다.
10시 15분
전남대생들이 "계엄해제", "휴교령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이자 공수부대원들이 곤봉으로 진압. 이에 학생들이 금난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5시 40분
유동 삼거리에 공수부대가 충돌하면서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19시 02분
계엄사령부는 광주의 통행금지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겼다.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3시 00분
증파된 11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9시 30분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에 맞서 누문동 파출소를 불태웠다.
10시 00분
금남로에서 시민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면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14시 40분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15시 00분
광주 시내의 기관장과 유지들이 대책회의를 갖고, 시위진압을 완화해달라며 계엄당국에 건의했다.
16시 30분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 부상을 입었다.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8시 00분
광주시내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졌다.
10시 20분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중이던 남녀 30여명이 속옷차림으로 공수부대원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했다.
18시 40분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였다.
20시 10분
도청을 향하는 시위대들은 금남로, 충정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했다.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의 버스가 경찰저지선을 돌진하여 경찰 4명이 사망했다.
21시 50분
광주의 실상을 왜곡보도하는 데 분노한 시위대가 광주 MBC건물에 방화했다.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5월 21일 (수요일, 맑음)

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시위대 2만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을 전개했다.
2시 18분
광주 전역의 시외전화가 단절되었다.
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로 향했다.
4시 30분
시위대가 광주 KBS건물에 방화했다.
8시 00분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시위대가 20사단 병력과 충돌했다.
10시 15분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드링 전면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10시 19분
광주세무서 건물이 전소됐다.
11시 10분
대형헬기 1대가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12시 59분
시위대가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했다.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13시 20분
금남로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에 쓰러졌다.
14시 15분
도지사는 경찰헬기를 타고 시위해산을 종용했다.
14시 35분
시위대가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과 장갑차 수십대를 탈취했다.
14시 40분
시위대가 지원동 탄약고에서 TNT를 탈취했다.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시내 빌딩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16시 00분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와 시가전을 전개했다.
16시 43분
대학생들이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2대를 설치했다.
17시 30분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다시 철수했다.

5월 22일 (목요일, 맑음)

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했다.
10시 30분
군용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며 경고전단을 살포했다.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호소하고, 도청 옥상에는 검은 리본과 함꼐 반기가 계양되었다.
13시 30분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7개항의 수습안을 전달했다.
15시 08분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5백여명이 광주에 도착했다.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다.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가 더 도착했다.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가 "광주는 치안부재상태" 라고 방송했다.

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떄 흐림)

10시 00분
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10시 15분
학생수습위가 특공대를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했다.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가 계시되었다.
13시 00분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을 가해 시민 17명이 사망했다.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고,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되었다.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이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5월 24일 (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공수부대가 운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14시 20분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 간의 오인 총격전이 발생했다.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5월 25일 (일요일, 비)

11시 00분
김수환 추기경이 광주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메시지와 함께 구호대책비 1천만원을 광주시에 전달했다.
15시 00분
제 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17시 00분
재야인사들이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이 광주지역 범죄발생 예방, 식량공급, 청소문제등을 논의했다.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5시 20분
계엄군이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했다.
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다.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가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금 등 8개항을 요구했다.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이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을 브리핑했다.
19시 10분
계엄군의 공격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시민군은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조치시켰다.
24시 00분
광주지역의 시내전화가 일제히 두절되었다.

5월 27일 (화요일 맑음)

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4시 00분
도청 주변이 완전포위되었고, 금남로에서는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을 계시했다.
5시 10분
계엄군이 도총을 비롯한 시내전역을 장악하고 진압잔전을 종료했다.
6시 00분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방송했다.
7시 00분
공수부대가 20사단 병력에게 도총을 인계했다.
8시 50분
광주지역의 시내전화가 다시 개통되었다.

 

5.18 항쟁당시 165명 사망.
5.18 항쟁 이후 약 376명 사망.
사망자들 평균연령 27.5세.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학생 2명


외면하지 마세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27년 전 그날의 역사입니다.


2007년 1월 28일, 경상남도 합천군의 군민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황강변 "새천년 생명의 숲"의 새로운 명칭을 "일해공원"으로 확정했다.
日海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아호이다.

믿으세요....
바로 지금 우리의 역사입니다.

 

뱀꼬리 : 일해공원에 관련된 사항을 인터넷을 통해 찾아봤습니다. 군민들의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벌인 적도 없다더군요. 군수의 단독행동으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는군요.  과연 합천군수의 뇌구조는 어떤 몰골을 하고 있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궁금증에 합청군청의 군수 프로필을 봤습니다. 존경하는 인물항목에서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박여사는 든든한 원군이 있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출처를 빼먹었어요..^^ 지식체널 e 라는 책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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