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일본의 근대성에 대한 에세이

동국대 대학원신문에 게재된 리뷰 하나를 담비에서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idxno=1604&rsec=MAIN§ion=MAIN). <일본 근대 독자의 성립>(이룸, 2003)의 저자인 일본의 근대문학 연구자 마에다 아이의 연구논문들이 지난 2004년에 <텍스트와 도시: 일본의 근대성에 대한 에세이(Text and the City: Essays on Japanese Modernity>(듀크대출판부)로 영역되었다고 하는바 이 책에 대한 소개이다. 리뷰의 내용이 흥미로워서 옮겨놓는 것인데 이왕이면 번역/소개되었으면 싶다. 근대성(모더니티)과 관련하여 이정표가 될 만한 도시를 넷만 꼽자면 파리, 페테부르크, 뉴욕, 그리고 도쿄 정도가 아닐까 싶고(물론 더 많은 도시들이 거기에 덧붙여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들에 관한 연구서들은 좀더 많이 소개되면 좋지 않을까 한다(발터 벤야민, 데이비드 하비, 마샬 버먼 등의 책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서울, 부산, 인천 등에 관한 연구서들도 좀 나와주고. 마에다 아이의 책이 자극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동국대 대학원신문(141호) 마에다 아이의『텍스트와 도시』

'근대독자의 성립'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마에다 아이(前田愛)는 '도시 공간 속의 문학', '히구치 이치요의 세계', '마에다 아이 저작집' 등을 통해 일본 문학과 문화에 관한 주목할 만한 비평과 연구를 남겼다. 안타깝게도 지난 1987년 55세의 나이에 요절한 그는 메이지 시대 출판문화와 근대 문학의 성립을 살핀 메이지 근대 문학 연구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본 근대 문화에 대한 탁월하고 개성적인 관점의 비평을 수행한 문화비평가로서도 유명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임스 후지에 의해 편집, 해설되고 해리 하루투니언의 서문이 실린 '텍스트와 도시(Text and the City)'는 메이지 시기 일본 문학 뿐 아니라 근대성과 도시의 관련성에 주목하는 문학, 문화 연구자들에게는 유용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근대성에 관한 소론’이라는 부제를 단 '텍스트와 도시'는 마에다 아이의 여러 저작 중 '도시 공간 속의 문학'을 중심으로 도시 공간에 대한 연구물들을 모은 앤솔러지 형식의 저서이다.

이 책은 크게 4개의 장, 11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감옥의 유토피아’, ‘개화의 파노라마’, ‘폐원의 정령’으로 이루어진 1장은 〈빛의 도시, 암흑의 도시〉라는 테마 아래 도시의 명암을 다루고 있으며 ‘아이들의 시간’, ‘극장으로서의 아사쿠사’, ‘다이쇼 후기 통속소설의 전개’로 구성된 2장은 〈놀이, 공간, 그리고 대중문화〉라는 테마 아래 요시와라와 아사쿠사의 어두운 활력을 다룬다. ‘음독에서 묵독으로’, ‘근대 문학과 출판의 세계’로 이루어진 3장 〈텍스트, 공간, 시각성〉은 근대 독자의 성립과 출판에 관한 문제를, ‘파리의 류호쿠’, ‘베를린 1888’, ‘야마노테의 오지’를 담은 4장은 〈도시공간의 경계를 가로지르기〉라는 테마 아래 도쿄를 비롯하여 파리와 베를린 등의 도시를 해석한다.

경계를 설정하고 고립된 구역을 상정하는 중세 유럽의 도시상은 “격리와 징벌의 장치로서의 감옥”과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약속하는 유토피아의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흥미로운 발상으로 시작되는 마에다 아이의 논의는 ‘개화의 파노라마’에서 도쿄라는 도시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4개의 텍스트를 통해 주의 깊게 탐색한다.

그는 우선 메이지 시기 유명한 작품인 고바야시 키요치카의 ‘도쿄명소도’(1876)에 묘사된 국립제일은행의 모습을 통해 키요치카의 문명개화에 대한 감정을 읽어낸다. 에도의 구도시에서 태어난 키요치카로서는 메이지 초기의 문명개화라는 격변은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담아내고 있는 것은 과거의 공간, ‘물의 도시’ 에도에 대한 풍부한 기억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에 비해 비슷한 시기의 베스트셀러였던 핫토리 부쇼의 '도쿄신번창기'(1874)는 ‘물의 도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육지의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물의 도시’ 에도가 점차 해체되며 ‘육지의 도시’ 도쿄가 구축되는 변화를 알려준다.

사이토 게신의 에도 관광 책자인 '에도명소도회'는 에도라는 도시를 사당, 신전, 그리고 역사적 자리와 같은 상징적인 장소들로 구성한다. '에도명소도회'에서 에도는 성스러운 것이 전면에 등장하는 “신화의 공간”으로 해독되는 것이다. 반면 테라카도 세이칸의 '에도번창기'는 스모, 요시와라, 극장과 같은 비일상적인 것들에 주목함으로써 일상의 세계와 비일상의 세계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마에다의 이러한 공간 성찰은 비단 도쿄에 한정되지 않는다. ‘베를린 1888’에서 그는 모리 오가이의 '무희'를 통해 베를린의 도시 공간을 탐사한다. '무희'의 주인공 도요타로에게서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베를린에 도착한 동양의 한 젊은이가 유럽 문명의 정화를 조국에 전달하겠다는 강렬한 사명감이다. 더불어 그는 이 대도시가 지닌 장관에 압도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매력적인 외부의 경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거듭 다짐을 하게 만드는 것이 운데르 덴 린덴의 대로라면 엘리스의 다락방이 있는 크로스텔가는 베를린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 크로스텔 거리는 옛 베를린의 암울한 이미지를 상징하며 운데르 덴 린덴에 대치하는 장소가 된다. 이것은 메이지 후기의 개인이 자각하게 된 내면의 어둠, 즉 개인의 고독에 관한 공간의 아날로지이다.

'텍스트와 도시'의 특징적인 점은 오가이의 '무희' 소세키의 '문'과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 뿐 아니라 키요치카의 판화 ‘동경명소도’를 비롯, 메이지 시기 사절단의 공식기록물이던 '미구회람실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텍스트들을 해석의 자리에 동참시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텍스트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메이지 시기 전후의 ‘오래된’ 텍스트들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구성한다.

마에다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대립항의 계열로 이루어진 도시의 속성이다. ‘개화의 파노라마’에서 이루어지는 물의 도시/육지의 도시, 신성의 공간/놀이의 공간으로서의 도쿄 읽기, ‘폐원의 정령’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세계/어머니의 세계, ‘베를린 1888’에 나타난 운데르 덴 린덴/크로스텔 거리라는 구분들은 이를 잘 나타낸다. 그가 설정하고 있는 이러한 대립항은 결과적으로 성과 속의 연관, 정과 부의 교호, 근대와 반근대의 친연성에 대한 반증이다. 이러한 대립항은 메이지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격변과 조우한 개인들의 착잡한 내면의 풍경을 다양하게 읽어내려는 마에다의 개성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마에다 아이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도시가 지닌 빛과 암흑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면서 근대의 새로운 풍경에 당면한 다양한 개인의 활력과 좌절을 함께 포착해내고 있다. 출간된 지 20여년이 된 그의 저서가 지난 2004년 해리 하루투니언, 미요시 마사오와 같은 미국 내 대표적인 일본 연구가들에 의해 영문판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텍스트와 도시'가 지닌 다양한 장점이 미국 내 동아시아 문화연구에 있어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김문정 동국대 강사)

07.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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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ephistopheles > 삐져서 이벤트 합니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116682

삐질 일이 생겼습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을 한권 접하고 감동했습니다.
인지도가 낮은건지 아님 글빨이 바닥을 치는 제 리뷰가 문제인지 도통 관심대상이
되질 않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추태까지 선보였는데도 불구하고..흑흑...

Mephisto
어머 이렇게 아름다운 책에 관한 리뷰에 댓글이 하나도 없다니..속상하네 거참~~ - 2007-05-15 14:23 수정  삭제

그래서 삐진 기념으로 이벤트 합니다.
단순하게 숫자잡기 이벤트로 합니다.

52525를 잡으시는 2번째 분과 5번째 분께 무조건 원인이 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난 죽으면 죽었지 저 책은 싫어..! 하신다면 진짜로 삐질 껍니다. 흥!

뱀꼬리1 : 3번째 이벤트 당첨자도 존재합니다..
뱀꼬리2 : 저는 저 책의 저자와 출판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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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끄러움은 아직 무덤에 가지 못한다
  [김명인 칼럼]5.18광주학살/항쟁 27주년을 맞으며
  2007-05-15 오전 8:41:11
  며칠 뒤면 5.18 광주학살/항쟁 27주년이 돌아온다. 내 기억 속의 광주는 아직도 늘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80년대 후반생들이 대부분인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5.18은 너무 오래 전 일이라 3.1절이나 4.19 등과 구별이 잘 안 되는 교과서 속의 아스라한 옛일로 받아들여진다. 하긴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77년은 6.25가 27주년을 맞았던 해인데 그때 내게도 6.25는 조금 과장하자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정보의 과잉 속에 살고 있는 요즘 세대들이 그저 5.18이 대강 무엇이었다 정도만 알고 있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나마 6.25는 우리가 자라던 내내 '상기하자 6.25!'라는 반복되는 냉전적 훈육과 주입을 통해 늘 강박적으로 호명되던 기호였지만 '상기하자 5.18!'식의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는 요즘 세대들에게 5.18도 모르냐고 퉁박을 주는 것조차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거대한 기념공원과 연례적인 국가의례와 보상과 교과서 수록 등으로 이미 국가적으로 전유된 공식기념일이 됨으로써 5.18은 그 본연의 선연한 핏빛 아우라조차 안전하게 박제처리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얼마 전 5.18민중항쟁 서울시 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주최한 5.18 민중항쟁 기념 서울시 청소년 백일장 및 사생대회 운문부 장원을 차지한 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이미 많은 네티즌들이 그 작품을 각자의 블로그에 퍼 담았고 게시판마다 화제가 된 듯했다. <그날>이라는 제목의 그 작품 전문을 일단 인용해 본다.
  
  그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제.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얘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제.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 있데. 어린 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 보고야, 라디오도 안 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시적 화자의 '그날'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의 막힘없는 흐름 속에서 (물론 '놈'보다는 '아그'라는 아랫사람에 대한 전라도식 애칭을 사용했으면 더 완벽했겠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훌륭한 산문시다. 서울 강남에서 여고 3학년에 다니는 18세의 여학생이 어떻게 해서 이런 구체적 서사성을 획득한 시를 써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여학생의 부모나 부모세대의 친지가 들려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위를 하다가 계엄군에 쫓겨 다급하게 지나가던 시적 화자의 자전거 뒤에 올라탄 고등학생과 그를 잡아가기 위해 둘 사이의 관계를 묻는 계엄군, 겁이 나서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해버린 화자, 결국 그 학생 '어린 놈'은 끌려가고 아직도 그날 그 부끄러운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화자…. 상황의 급박한 속도감과 전라도 사투리의 느린 전달감이 절묘한 엇박자를 이루는 가운데 "갑시다 갑시다"라는 절박한 청유가 지금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불리는 그 학살과 항쟁의 기억은 수많은 학술대회와 추도사와 공식 기록 속에서 이제 한국민주주의의 권화로, 민중항쟁의 기념비로 남게 되었지만, 사실 그 순간을 함께 살았던 구체적인 인간들에게는 그날 생사의 기로에 선 희생자들이 내뻗은 "갑시다"라는 간절한 연대의 손짓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 어떤 기념비도 호사한 무덤도 교과서도 결코 덮지 못한다.
  
  더구나 그 시절 한때 그 기억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특권화하고 그것을 한갓 '저항의 추억'으로 화석화하는, 배에 기름 낀 운동베테랑들의 그 어떤 회고담도 그 부끄러움을 장송할 수는 없다. 설사 학살원흉이 밝혀져 그날의 구호처럼 그 원흉을 '찢어 죽일' 수 있게 되더라도 그 부끄러움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광주학살/항쟁을 27년이 지나도록 현재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부끄러움은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렇게 절망적 상황에서 고립된 채로 고통받거나 죽어가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실천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존재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8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인권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고투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온갖 투기적 개발에 의해 생존의 경계 밖으로 떠밀려 나가는 사람들….
  
  사실은 다수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타자화되고 주변화되어 소수성을 강제당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그때 광주에서 처절하게 고립되어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 남았어야 했던 광주시민들은 지금도 생생한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그날이 남긴 부끄러움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속되고 있는 이 저강도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한 광주학살/항쟁의 기억은 그저 '추억'으로 남아 연례적 기념행사 속에서 서서히 묻혀갈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우리가 몰고 가고 있는 자동차 뒷좌석에 황급히 뛰어들어 '갑시다, 같이 갑시다'하고 울면서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당신 누구냐고 빨리 내 차에서 내리라고, 나는 당신 아는 바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한 어린 여학생의 시 한 편을 읽으며 나는 진땀을 흘리면서 자꾸 내 등 뒤를 돌아본다.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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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5-1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말입니다..가끔 포탈 사이트에 올라오는 개념 무탑재 댓글들을 보면
기분이 착잡해집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은 빨갱이들의 좌익선동이였다고
떠드는 내용이 불특정 다수에 의해 자꾸 거론되는 내용인데...세상이 어찌
돌아가나 모르겠어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5-1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phisto/// 엥..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불특정 다수가 있나요?
(아닌줄 알면서도)장난으로 올리는 댓글이 아닌 진심이 담긴 댓글이라면 이건 정말 충격인데요,,,,,
평소에 네이버기사 댓글보면서도 '이건 대체로 장난이야'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대부분의 댓글을 보던 저로서는 진심으로 그러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해준 Mephisto 님의 댓글 이네요....ㅋ

Mephistopheles 2007-05-1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63945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기인 2007-05-15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기사 감사드립니다..
저 시가 계속 마음에 울리네요..

바라 2007-05-19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이제서야 보다니..; 퍼가서 볼게요. 감사합니다(요새 많이 바쁘신가봐요?)

기인 2007-05-1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하는게 너무 많아지고, 더 게을러져서 ^^;
 
 전출처 : 짱꿀라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Ⅱ-2. 정치권력과 지식인 (上)

(2007. 5. 14.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Ⅱ-2 정치권력과 지식인(上) : 추종과 저항만 있다

-폴리페서(polifessor)의 내습-

‘폴리페서’라는 ‘망령’이 한국사회를 활보하고 있다. 이 망령은 1997년에는 어렴풋이, 2002년에는 조금 더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 폴리페서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다. 폴리페서란 ‘politics’와 ‘professor’의 합성어로, 대통령을 지망하는 정치인들 주변을 맴도는 ‘정치 지향의 교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5년 주기의 대통령 선거가 유지되는 한, 이 망령은 이후에도 5년 주기로 발작하는 유행병처럼 한국사회에 출몰할지도 모르겠다. 전문관료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 달리 폴리페서는 대개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보여주는 용어로서 의미심장하다. 폴리페서라는 용어가 드러내고 있는 한국적 현실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지식인과 정치권력

이 용어는 우선 한국사회가 민주화된 이후 지식인의 정치 참여가 확대됐으며, 그 주도적인 역할을 교수 집단이 담당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지식인의 정치 참여 자체를 두고 ‘옳다’ ‘그르다’는 가치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전문적 지식인의 정치 참여가 늘어나는 것은 더욱 복잡하게 분화해가는 각 분야의 전문 지식을 현실정치에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다수를 교수 집단이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긍정 일변도의 평가를 하기 어렵다. 압도적인 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은 대학이라는 제도만을 학문 활동의 현장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진입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이 실제로 학문 활동을 위한 유일한 장이 되어야 하는가는 제쳐두고 현실이 그렇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대학내 지식인들이 다시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지향을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전문성이 결여돼 있고 학문적 자의식조차 갖추지 못한 한국 교수집단의 현재 상황을 폴리페서라는 용어가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한국의 교수들은 ‘줄을 잘 서서’ 대선에 참여함으로써 일거에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권력 지향의 화신인 것인가.
 


한편 폴리페서라는 용어는 지식인의 정치 참여를 필요로 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도 잘 대변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각 정당의 이합집산을 보노라면, 한국의 정당정치는 요원한 미래에나 제도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정당정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정치인 충원구조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도 없다. 정당이 대통령 후보에게 대안적 정책을 제시할 수도 없고 정치인도 충원할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으므로, 이런 문제들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개인이 해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정당정치의 미비라는 한국의 정치 현실이 지식인의 대규모 정치 참여를 필요로 하고, 상대적으로 전문성과 명망성을 가진 교수 집단이 충원의 1차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정치의 측면에서도 폴리페서라는 용어가 드러내는 한국적 현실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국가를 향한 자유, 국가로부터의 자유

헌법이 제정된 이래, 제2공화국 시기 잠깐을 제외하면, 한국 헌법은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삼아왔다. ‘대권’ 혹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개념을 두고도 잘 알 수 있듯, 대통령제는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에게 군주의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제가 유지돼 온 것은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통령제가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일정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대통령제에 대한 호의적 태도는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가졌던 국가, 권력에 대한 시각과도 관련 있다. 더 이상 소급할 필요 없이, 국가 부재의 식민지배기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근대국가에 대한 열망을 키워왔다. 이런 국가에 대한 열망은 해방 후 분단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됐다.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할 때까지는 현존 분단국가를 온전한 근대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발상은 이런 열망에 바탕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국가에 대한 저속한 숭배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분단)국가를 무시하는 이런 발상이, 한국 지식인들의 국가론 부재를 초래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온전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 국가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 현실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가는 개혁이나 통일을 위해 탈취해야 할 대상이 돼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맹목은 좌·우파 모두에게 공통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오랜 주제이다. 국가는 정부 혹은 관료제 일반으로 간단히 치환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특히 근대국가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확히 규정될 수 있다. 국가도구설의 입장에서 국가는 개인을 바탕으로 규정되는 권력이지만, 국가유기체설에서는 국가로부터 개인이 도출된다. 개인을 우선할 것이냐, 국가를 우선할 것이냐는 차이에 따라 국가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인데, 이는 국가론의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를 상부구조의 일환으로 간주하거나 탈취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면, 국가 자체에 대한 고민이나 사유는 시작되지 않는다. 나아가 국가가 권력으로서의 정통성을 갖게 되는 근거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없으며, 입법권을 경시하고 집행권을 우선하는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지식인들이 국가권력을 ‘부정’하거나 ‘추종’하는 양극단만 취해왔다는 비판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거리를 두고 국가를 바라보게 될 때, 국가 또는 권력과 지식인 사이에는 긴장이 유지될 수 있다. 이를 두고 ‘국가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식인들이 취해온 국가에 대한 태도를 ‘국가를 향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진대, 이제 더욱 필요한 것은 ‘국가로부터의 자유’가 아닐까.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태도, 곧 ‘국가를 향한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입장을 입법자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국가로부터의 자유’, 곧 국가와의 긴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입장을 해석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입법자로부터 해석

한국 지식인들의 국가에 대한 열망이 국가론 부재로 이어지고, 이런 인식은 정당정치의 미비라는 한국의 정치 현실과 맞물려 지식인들의 대규모 정치 참여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가 바람직한 결과만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이제 지식인과 정치권 양쪽 모두 자기성찰이 필요한 때다.

전 지구화와 아울러 사회는 더욱 복잡하게 변화하고,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하면서 지식의 존재조건도 그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는 더욱 파편화하고 ‘의미공동체’의 분화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종말을 고한 것인가. 오히려 지식인은 전문성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그 전문성을 통하여 파편화된 의미공동체 사이를 매개하는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식인은 이제 무책임한 입법자로서의 행세를 그만두고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가야 할 것이다. (윤해동|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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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63명 군사→문민정권 옮겨타
 
역대 정부에서 지식인 출신 장관 10명 중 3명이 평소 자신의 이념이나 노선과 상관없이 군사정부에 이어 문민정부에서도 계속 주요 공직을 맡은 것으로 조사됐다.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별취재팀이 13일 이승만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입각한 862명 중 대학교수·강사, 연구원, 언론인 출신 182명의 인물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 중 63명(34.6%)이 군사정부(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에 이어 문민정부(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공직을 맡았다. 이 조사는 지식인의 정권참여가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정부에 참여하는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 소신과 무관하게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정부에 자신의 지식을 파는 ‘지식상인형’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장관을 포함한 중앙행정부처 관료, 정부 자문·행정위원회 위원, 정부 관계 기관의 기관장 등 고위직을 연이어 맡은 사례를 보면,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친 이는 11명(6.0%)에 달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등 4개 정부에 걸쳐 공직을 맡은 이는 6명(3.3%),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 등 5개 정부에 걸쳐 공직에 있던 이는 4명(2.2%)이었다.

지식인 장관 182명 중 152명(83.5%)은 입각 전에 이미 공직을 맡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맡은 자리 수는 모두 486개다.

정부 자문·행정위원회 자리가 173개(35.6%), 정부 산하·소속기관, 공기업 등 정부 관계기관 간부·고위직이 141개(29.0%), 중앙행정부처 간부·고위직이 90개(18.5%), 청와대 대통령 비서·보좌관, 특보 자리가 35개(7.2%)였다. 지식인 장관들의 ‘낙하산 인사 및 회전문 현상’도 두드러졌다. 장관을 끝낸 182명 중 142명(78.0%)이 계속해서 327개의 공직을 가졌다. 이 가운데 정부 산하·소속기관, 공기업 등 ‘정부 관계기관(115개·35.2%)’의 고위직이 가장 많았다. 정부 자문 및 행정위원회 위원 자리가 102개(31.2%), 중앙행정부처 고위직이 78개(23.9%) 순이었다. 이 중 장관직은 31개, 국무총리직은 6개였다.

182명 중 가장 많은 137명(75.3%)이 장관직을 마친 뒤 교육계에 몸담았다. 이들이 맡은 자리 수는 214개로 대학총장직이 37개(17.3%)로 가장 많았다. 정교수직 35개(16.4%), 학원·학교재단 이사장직 34개(15.9%), 석좌교수직 23개(10.7%), 명예교수직 19개(8.9%)였다. 정계 진출도 두드러진다. 장관을 그만둔 뒤 정치권에 몸담은 이들은 73명(40.1%)이었다.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 가운데 58명(31.9%)이 입각 전 정치에 참여했다. 입각 전 58명, 장관직 이후에 44명이 각각 국회의원(유신정우회·국가보위입법의원·민의원 등 포함)을 지냈다. 지식인 장관 182명 중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108명(59.3%)으로 조사됐다. 이 중 63명(58.3%)이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 대학 박사 학위자는 27명(25.0%), 유럽 대학 12명(11.1%), 일본 대학 6명(5.6%)이다.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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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Ⅱ-2. 정치권력과 지식인 (上)
 
한승수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 그는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8월 상공부 무역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며 정권과 연을 맺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던 때였다. 한위원장은 이듬해 5월 민정당 공천을 받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다음해 12월 제34대 상공부 장관에 취임했다. 노태우 정권 때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의 경력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군사-민간’ 정권을 두루 거친 지식인들은 모두 63명(34.6%)이었다.
지식인 개인의 관점에서 국가권력에 참여할 때 자기정체성이 없었거나, 정체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결과이다. 정부 참여가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국정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권력 획득과 기득권 진입을 위해 지식인으로서의 위상을 활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군사정권 때 획득한 ‘파워 엘리트’로서의 기득권이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문민 또는 민주 정부가 인재 풀(Pool)의 취약성으로 인해 이전 군사정부의 인물로부터 수혈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좌파정권’이란 오해를 없애고 보수세력 껴안기를 위해 군사정권으로부터 ‘공인’된 이들을 의도적으로 임명했다는 평도 받고 있다. ‘군사-민간 정권’ 다음으로 46명(25.3%)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에 참여했다.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적 지식인이 탄생한 이 시기는 ‘어용 지식인’이란 말이 공공연해진 때이기도 하다.

지식인의 어용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실례는 박정희 정권 때의 유신정우회(유정회)다.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낸 지식인 출신 장관만 8명이다. 유정회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전국구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원내교섭단체로 군사정권의 2중대란 비판을 받았다.

김기형 과기처장(정권 참여 당시 대구대 교수), 김동성 공보부장관(서울대 부교수), 신범식 공보부장관(경북대 조교수), 윤주영 문화부장관(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승윤 재무부 장관(서강대 학장), 이자헌 체신부장관(서울신문 편집국장), 이진희 공보부장관(서울신문 정치부장), 최영철 체신부장관(동아일보 기자), 이해원 보건사회부장관(성균관대 교수) 등이 유정회 출신이다. 윤천주 전 문교부 장관은 고려대 정경대학 교수로 일하던 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정권에 들어가 박정희 정권의 이론적 토대를 닦았다. 이 기획위원회는 ‘중정(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이라 불리던 곳이다.

박정희 정권 때 유정회가 있다면 전두환 정권 때는 국가보위입법의원들이 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80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어 5공화국 출범을 위한 정치적·법적 틀을 만들었다. 대통령 선출을 간선으로, 임기를 7년 단임으로 바꾼 게 대표적이다. 김만제 재무부장관(서강대 교수), 권이혁 문교부장관(서울대 교수), 이종률 정무제1장관(외교안보연구소 부교수), 김상협 문교부장관(고려대 교수), 박일경 문교부장관(서울대 조교수) 등이 대표적인 지식인 출신 입법의원들이다.



이승만 정권 때 지식인 출신 장관은 16명(8.8%),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연속해 몸담았던 지식인 출신은 17명(9.3%)이다. 이 시기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 출신 장관 중에는 친일파들이 눈에 띈다. 이승만 정권 때 공보처장을 지낸 갈홍기(연희전문·숙명여대 교수) 및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문교부 장관을 지낸 백낙준(연희대학 총장), 박정희 정권 당시 문교부 장관을 지낸 고광만(서울사범대 학장), 이병도(서울대 대학원 원장) 등이 대표적이다.

지식인 출신 장관들이 군사·민간 정권에서 두루 요직을 거치는 ‘회전문’ 현상에는 장관별로 일정한 흐름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교육부(문교부 포함) 장관이다.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 중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가 38명(17.7%)으로 가장 많다. 교육부 장관들은 ‘교육부 자문위원→교육부 장관→대학 총장 및 재단 이사(장), 혹은 명예·석좌교수’의 패턴을 보이고 있다. 교육부 자문위원을 지낸 이들은 19명, 장관 퇴직 이후 대학 총장이나 재단 이사(장)를 지낸 이들은 19명이다.

‘자문위원→장관→총장·이사(장)’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는 12명.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85년 교육개혁심의회 교육발전분과위원장을 맡은 뒤 88년 문교부 장관을 지냈고, 95년 서울대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브니엘학원 이사장, 계원학원 이사장도 지냈다. 문교부 국정교과서 편찬위원(73년), 문교부 교육정책심의위원(78년)으로 일한 김덕중 전 교육부 장관은 2000년 장관에 발탁되고, 장관에서 물러나면서 바로 아주대 총장을 맡았다. 2003년에는 서강대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술원, 대한교원공제회 등 정부 산하 기관의 기관장·고위직도 주요 순환 코스다. 재정경제부(재무부·경제기획원 등 포함) 장관들은 입각 전 ‘재무부·경제기획원 자문·행정 위원회, 한국은행’ 등을 거쳐 장관 퇴직 이후에는 주로 국책은행, 공기업의 기관장을 맡았다. 민간 기업의 사외이사, 전경련 등 이익단체의 고문도 주요 코스다.

80년 재무부 장관, 91년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이승윤 전 장관의 경우 입각 전인 71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96년 금호그룹 고문, 98년 전경련 자문위원직을 맡았다. 지식인 출신 장관 41명은 장관 퇴직 뒤 민간 영역에 진출해 총 80개 자리를 차지했는데, 기업 대표 41개(51.3%), 사외이사 17개(21.3%), 기업고문 13개(16.3%)였다.

공보부 장관 21명 중 11명은 언론인 출신이었다. 이들은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 해외대사 공보관, 언론사 임원’을 거쳐 장관에 임명되었다. 장관 퇴직 이후에는 정부 소유 언론사, 한국언론인기금, 언론재단, 간행물윤리위원회, 한국신문협회 등에서 기관장을 맡았다. 동양통신 정치부장 출신인 김성진 전 공보부 장관은 71년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을 지낸 뒤 75년 장관을 거쳐 80년 동양통신 사장, 81년 서울언론재단 이사장, 99년 성곡언론재단 이사를 지냈다.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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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어떻게 했나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별취재팀은 지난달 말 이승만 정권~노무현 정권에 입각한 장관 862명을 대상으로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장관 명단은 행정자치부, 한국행정학회 홈페이지 등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구했다. 전체 장관 중에서 ‘지식인 출신’ 분류 기준은 교수, 강사, 연구원, 언론인 등이었다. 인물연감, 인터넷 사이트, 한국언론재단 데이터베이스(KINDS), 경향신문 정보자료실 자료 등을 참고해 입각 전, 퇴임 후 경력, 특이사항 등을 조사했다. 인물 정보의 기재 미비, 자료 부족으로 일부 누락된 사항이 있을 수도 있다. 검색한 자료를 분류하는 작업은 엑셀(EXCEL)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공직 참여’ 분류를 할 때 정부 자문·행정위원, 대통령 자문위원회, 중앙행정부처, 정부 출연·투자·소속·협력기관, 공기업 등 정부 관계기관에서 일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공직 및 민간 영역에서 구한 일자리는 원칙적으로 조사된 것들을 모두 기재했다. 정권별 참여를 나눌 때 대선 이듬해 3월 인사에서 교체된 이들은 제외했다. ‘명예 박사’는 국적별·대학별 박사 학위 소지자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해외 대학 연수’ ‘대학원 수료’ 등도 학력에서 제외했다. 입각 전, 퇴임 뒤 공직 진출 현황, 교육계 진출 현황, 민간 기업 진출 현황 등을 분석할 때는 지식인 장관이 맡은 자리를 기준으로 했다. 취재팀은 이번 지식인 출신 장관 분석 과정에서 2003년 발표된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장관 임용 실태 분석(이시원 경상대 정치행정학부 교수)’ 논문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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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보혁 아우른 변혁적 중도 필요”'
 
“올해 대통령 선거는 ‘87년 체제’ 극복에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민주개혁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간주하는 보수세력과 급진적 진보세력의 대립이 계속된다면 우리 사회의 교착상태는 계속될 것입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가치로 ‘변혁적 중도주의’를 강조하고 나섰다. 지난 1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UCLA 한국학연구소, 민화협 미주한인협의회 공동 주최로 미 LA에서 열린 ‘6월항쟁 20주년기념 국제심포지엄’의 기조연설에서 그는 “무조건 87년 체제의 극복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87년 체제의 구체적인 성격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면서 “87년 이후 20년간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확대된 건 사실이지만 분단체제 극복에서도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분단체제 극복을 논의하는 것이 현 단계의 중요한 과제”이라고 밝혔다. 이 기조연설문은 곧 발간되는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도 실릴 예정이다. 백교수는 “87년 이후 20년을 민주주의의 모양새만 얻고 알맹이는 놓친 좌절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일면적인 해석”이라면서 “민주화의 내용을 ‘형식’과 ‘실질’로 가르는 것은 편의상의 구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때 한꺼번에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민주화 자체가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고비고비마다 조금씩 확장돼 왔거니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실질적 민주화 역시 87년 당시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진전했다는 것이다. 그는 “87년 6월 항쟁 이후의 정치적 민주화가 신자유주의의 득세를 수반하는 실질적 민주화 실패의 역사라고 보는 관점은 지난 20년간의 한국사회를 80년대 초반에 시작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신자유주의 국면 중심으로만 파악하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87년 체제를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시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한반도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97년의 경제위기에서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폭로됐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이지만 그럼에도 87년은 남한민주화의 결정적 전환점이며 분단체제 동요기의 시작”이며 “87년 체제의 긍정적 동력이 완전히 소진되었다는 진단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이다. 백교수는 “뉴라이트 논객들이나 야당내 수구인사들이 ‘87년 이래 방황의 시간을 극복하고 새로운 선진화 체계를 출범시키겠다’고 말하지만 87년 이래의 정치적 민주화 과정을 근본적으로 돌려놓거나 6·15공동선언을 폐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진보세력에 대해서도 “분단체제 변혁이라는 목표를 확실히 간직하면서 그 실현을 위해 다양한 세력들의 문제의식을 수렴하는 중도적 노선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이와 관련 그는 북미 당국자의 입장과 이익에 휘둘리지 않는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제3당사자인 시민사회, 나아가 해외동포의 적극적인 역할론을 강조했다. 백교수는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한미FTA 협상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꽤나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했지만 결국 타결을 저지하지 못했다”면서 이는 “운동 자체가 각기 속내가 다른 세력들의 다분히 전술적인 연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을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기쇄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보수야당과 단순한 양적 확대에 만족하는 급진 정파들의 대립은 87년 체제의 내리막길을 더욱 가파르게 한다“면서 “FTA협정의 국회비준을 막는 과정에서야말로 단순한 전술적 연대를 넘어 87년 체제에 대한 통찰과 실질적인 극복방안을 갖고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윤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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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이명박 전 서울 시장의 노조비하 발언 물의

* 한겨레(2007. 5. 13)  / 이명박 노조비하 발언 물의

[한겨레]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최근 한 초청강연에서 노동자와 노조를 헐뜯는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정치권과 노동계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 전 시장은 지난 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서울파이낸스포럼의 초청강연에서 “(지난달 인도의 소프트웨어업체 ‘위프로’를 방문해 보니) 소위 대학 출신 종업원들이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다’며 평시에 오버타임(초과근무)을 해도 수당을 안 받는다고 하더라”며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조도 만들지 않는다던데, 만들 수 없어서 못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 수 있는데도 스스로 프라이드(자부심)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대학 교수들의 노조를 만들기 위한 법안이 국회 상임위의 소위원회를 통과했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전 시장은 또 “서울시 오케스트라가 민주노총에 가입돼 있다. 아니, 음악하는 사람들이 민주노총에 가 있는데, 그것도 전에는 금속노조에 가 있었다”며 “아마 바이올린 줄이 금속이라서 그랬나 보다”라며 좌중의 웃음을 유도했다.



이런 발언을 뒤늦게 접한 민주노총은 지난 11일 성명을 내어 “이 전 시장이 ‘자부심이 없는 사람들이나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고 노조를 만든다’는 망발을 했다”며 “이런 노조 비하 발언은 스스로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천박한 노동관을 보여준 데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대선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이명박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나가겠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은 같은날 논평을 내 “초과근무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도록 돼 있는 근로기준법 등 현행법을 아예 무시하자는 것이냐”며 “노동자를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의식을 가진 이 전 시장의 대선출마 선언은 결국 재벌을 대신해 권력을 잡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9일 논평을 내 “이 전 시장의 발언은 ‘무노조’를 칭송하고 나선 것이며, 개발독재 시대의 빈곤한 노동철학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 소속 전국공공서비스노조는 10일 “(이 전 시장이) 예술하는 사람들이 무슨 노조냐는 식의 비하 발언을 했다”며 “오케스트라노조는 금속노조에 가입한 적도 없어 사실까지 왜곡했다”고 말했다. 공공서비스노조 산하에는 서울시향 직원노조인 세종문화회관지부가 있으나, 서울시향이 2005년 독립법인으로 출범하면서 세종문화회관지부 소속 오케스트라지회 조합원들이 모두 노조를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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