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열정의 역사가' 홉스봄을 만나다

오마이뉴스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방한을 회고하는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13708&ar_seq=7). 그의 책들을 많이 출간한 한길사 김언호 사장의 회고인데(연재물인 '책의 탄생, 시대의 풍경'의 한 꼭지이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홉스봄은 20년전, 그러니까 지난 1987년 5월에 한국을 다녀갔다. 전혀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나는 대학생활에 적응하기 바빴던 모양이다(6월 항쟁 한달 전이니까 사실 '적응'이라는 말 자체가 사치스럽다. 적응해야 할 대학생활이라는 게 있었나?). 어쨌든 흘려보낸 시간의 이면을 들추는 듯해서 흥미롭다. 최근 그가 편집한 <만들어진 전통>(휴머니스트, 2004)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도 기사에 대한 흥미를 느낀 또 다른 이유이다. 방학때 그의 자서전(<미완의 시대>)이나 읽어볼까 싶다.

오마이뉴스(07. 05. 31) '열정의 역사가' 홉스봄을 만나다

1987년 5월 12일 화요일 오후 5시 영국의 세계적인 사회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 )이 안암동에 있는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참으로 귀한 손님이었다. 이런 석학을 모실 수 있다니 출판사·출판인으로서 대단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정현백·박지향 교수가 안내했다. 나는 홉스봄에게 한국사회에서 당시 힘차게 전개되고 있는 사회운동과 출판운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책과 권위주의적 권력이 갈등하고 있는 양상에 대해서도 말했다. 홉스봄은 어떤 책들이 판금되었는가를 저자 이름, 책 이름을 일일이 메모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진실을 추구하는 노학자의 정정한 모습이었다.

"한국사회는 지금 격동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간평등을 주창하는 젊은이들의 운동과 정신은 일련의 젊은 출판인들이 펼치는 출판운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사회과학적 문제의식으로 '독서'하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젊은이들이 읽고 있는 책을 두려워하면서 그런 책들을 판매금지시키고 있지만, 독자들의 문제의식은 엄청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금서정책'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문제의식과 행동은 정부의 금서조치를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대석학은 나의 설명을 경청했다. 한국의 사회운동과 출판상황은 선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회사적 자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해 4월 28일 서울지검 공안2부는 '좌경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젊은 출판인 5명을 구속했다. 녹두출판사 김영호(27) 대표와 사계절출판사 김영종(32) 대표, 동녘출판사 이건복(33) 대표, 세계사 윤후덕(30) 대표, 거름 편집인 강경철(26)씨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괄호 속 나이는 1987년 당시 기준)

나의 방에서 나는 선생과 한 시간 정도 한국의 사회상황·출판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수많은 책들이 판금되거나 강제 수거되며, 때로는 구속되는 상황에서도 젊은 출판인들은 계속 책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런 대화를 홉스봄 선생과 나누던 그 80년대는 나에게 분명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홉스봄은 서울대 이인호 교수가 재직하던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초청하고 국제문화협회의 협찬을 받아 방한했다. 한길사와 서울대 서양사학과가 공동주최하는 '홉스봄 교수 초청 학술강연회'가 5월 9일 오후 동숭동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열렸다. 그날 '최초의 산업국가의 흥망 : 영국 1780~1980'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홉스봄은 당대의 석학답게 신념에 찬 목소리로 열강 했다. 영국의 상황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조건도 비교해가면서 강연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그의 이론과 사상은 열려 있었다.

한길사는 일찍이 홉스봄의 <의적의 사회사>(Bandits, 1969)를 1978년 11월에 펴냈다. 공업화되기 이전의 농업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비적 내지 의적현상을 분석하는 책이다. 역사 연구의 주류에서는 이제까지 별로 연구되지 않은 사회적 반항, 또는 민중의 원망(願望)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저술이다. 로빈 후드에서 양산박(梁山泊)의 산적들, 멕시코 초원의 혁명아 판초 비야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뒤안에서, 그러나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민중과 더불어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나이들의 이야기다.



한길사는 다시 '오늘의 사상신서' 제71권으로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 1975)를 1983년 12월에 펴냈다. 이어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colution, 1962)를 '오늘의 사상신서' 제74권으로 1984년 8월에 펴냈다. 그리고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 1987)를 '한길그레이트북스' 제14권으로 1998년 10월에 펴냈다. 이 세 권의 책은 홉스봄의 대표적인 저술로 이른바 '자본주의 역사 3부작'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914년까지의 '통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들은 유럽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세계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홉스봄의 이 3부작을 읽으면, 역사란 이렇게 흥미진진하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당대를 살아간 민중들의 생활상까지를 생생하게 재현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역사란 제도사(制度史)나 경제사만이 아닌 인간이 엮어내는 경이로운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필력을 홉스봄은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읽어서 재미있고 즐거운 책'이라는 격찬을 받은 저술이다.

홉스봄이 그려내는 역사라는 풍경화는 '역사서술이란 당초부터 탁월한 문학'이라는 명제를 일깨워준다. 나는 홉스봄의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대하소설 속에 들어서 있는 듯한 감흥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넓게 열려 있는 시야와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란 참으로 위대한 교훈이자 오락이라는 명제도 아울러 확인하게 된다.

한길사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진행하고 있는 대형기획 '한길그레이트북스'의 제12·13·14권으로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를 배치했다. 이 '자본주의 역사 3부작'은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되고 있지만, 홉스봄 선생의 고전이란 또 다른 문학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된다.

1987년 5월 12일, 나는 홉스봄과 우리가 펴낸 <혁명의 시대>와 <자본의 시대>를 들고 현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나는 세미나실을 보여드리면서 그때 우리가 펼치고 있는 한길역사강좌·한길역사기행·한길사회과학강좌 등을 설명했다. 나는 홉스봄에게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홉스봄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국가사회의 성원들은 '역사'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토가 분단되고 동족끼리 전쟁을 하는 참으로 비극적인 현대사의 아픈 체험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은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이 분단시대사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의 설명을 들은 홉스봄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미래에 희망을 건다는 것입니다"라는 말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삶의 희망과 미래의 지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연구해보면, 역사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현대 역사학의 거장 홉스봄은 1980년대에 우리 국가사회의 성원들이 총체적으로 체험하던 민주화운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암동의 그 작은 세미나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책장에 꽂혀 있는 한길사의 책들을 펼쳐보는 것이었다.



나는 홉스봄을 인사동으로 모시고 가서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한국적인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국악을 연주해주는 '산촌'으로 갔다. 스님이 경영하는 음식점 산촌에서는 고기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저녁 8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된 국악과 춤을 선생은 흥미롭게 보고 들었다. 홉스봄은 특히 국악기 아쟁의 소리가 좋았다는 코멘트를 했다. 재즈 전문가로서 재즈에 관한 책과 글들을 쓰고 있던 그에게 한국 음악에 대한 관찰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1986년 1월 6일자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발표한 글에서 홉스봄은 "1950년대 미국 대중음악에서는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록이 재즈를 살해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 같은 표현을 두고 <옵서버>지는 "재즈에 대해 쓸 때 그는 자신이 애정을 품고 있는 것을 옹호하고자 사나운 채찍을 휘두른다"고 했다. 그러나 "홉스봄은 역사까지 이런 식으로 서술하지 않았다는데 안도감이 든다"고 했다.



이 전문가의 시대에 홉스봄 선생만큼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갖춘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세기의 노동운동, 아방가르드 운동예술과 사회주의와의 관계, 농민운동, 베트남전, 듀크 엘링턴과 빌리 홀리데이 같은 재즈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과 천착은 놀랍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보통 사람들이, 사실은 역사를 만들고 일으켜 세우는 역사의 주역이라고 말하는 홉스봄, 통상 평범한 사람들(Common People)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Uncommon People)이다. 이름 없는 이들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다. 홉스봄은 바로 '참으로 위대한 보통의 사람들'을 늘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라는 제목으로 영림카디널에서 2003년에 번역되어 나온 < Uncommon People >(1998)도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

홉스봄은 '자본주의 역사 3부작'에 이어 1994년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를 저술한다. 이는 20세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극단의 시대>는 까치글방에 의해 1997년에 번역출간 되었다. 또 <역사론>(On History)을 1997년에 저술했다. 이 책은 2002년 민음사에서 번역출판 되었다. 2002년에는 자서전 <흥미로운 시대(Interesting Times)>를 저술한다. 이 책 역시 <미완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2007년에 민음사에서 번역출판 했다.



홉스봄은 참으로 독특한 삶을 살아온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가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확산 반대 시위운동을 벌였고,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으며, 런던에서는 재즈에 심취했다.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판해서 이스라엘에서는 왕따 당했다.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지만 소련에서 그의 저서는 판금 당했다. 영국의 비타협 노동운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사회정의를 위해 90살이 넘어서도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는 열정의 역사가다. 그는 그 정신과 사상이 살아 있는 20세기의 현자다. 역사의 힘, 역사의 지혜를 실증해보인 실천하는 현자!

홉스봄이 한국을 방문하던 1987년 5월 그 무렵 나의 '일기'에는 이른바 '판금도서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1982년부터의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1980년대에 창출된 책 또는 책의 정신과 사상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다. 70년대와 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회과학적 인식을 시대를 거쳐서 한국사회는 오늘 이만큼 성장했다.(김언호 기자)

07. 0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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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재灰 > '아도르노'가 멀지 않은 까닭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대한 노성숙의 서평 한 대목은 헤겔 변증법과 아도르노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이러한 헤겔 변증법(자체 긍정성These, 이를 부정하는 반정립 Antithese, 마지막 '단계'로서 그 둘의 모순 대립을 고차원적으로 매개하는 종합Synthese으로의 '이행'을 강조)과 가장 다른 점은, 두 번째 단계에서의 부정성이 세 번째의 긍정성에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도르느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성에로 대치되는 데에서 '동일성 사고'의 전형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동일성 사고 안에서 주체성의 원칙만을 절대시하는, 그리하여 객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경험적 내용들을 배제한 채 단지 순수하게 형식적으로만 치닫는 기만성이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변증법은 필연적으로 주체와 객체(타자), 나와 남, 부분과 전체, 개별과 보편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짜임 관계"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한 가지 답안이다. 벤야민의 '성좌', 이진경의 '외부', 들뢰즈의 '리좀', 조동일의 '화이부동', 지젝의 헤겔옹호론이 떠오른다.


"짜임 관계"에 들어선 이후에 대한 한 대목: "객체는 더 이상 주체의 지배 아래 놓인 동일성의 폐쇄적인 체계안에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며, 주체는 객체의 비동일적인, "질적인 계기"(103쪽)들을 수용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주체는 이중적인 의미를 확인하게 되는데, 내적으로는 그 스스로도 역시 하나의 객체임을 인정하는 한편, 외적으로는 주체 자신이 항상 타자인 객체들과의 연관성 속에서야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객체(타자, 비동일자)의 우선성으로 이행함으로써 변증법은 유물론적으로 된다.(274쪽)"

'변증법이 유물론적으로 된다'는 아도르노의 명제에 대한 한 대목: "아도르노가 '객체의 우선성'을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주체(동일자)에 대항하는 객체의 유물론적 경험인데, 이는 곧 동일성에 대항하는 비동일자의 저항의 경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에게서 객체란 "비동일자의 긍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도르노는 주체성의 기만을 깨뜨리는 비동일성의 철학, 즉 주-객의 위계질서에 의한 '동일성의 인식'을 해체함으로써 주-객의 새로운 '짜임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비동일자에 대한 '철학적 경험'에 이르게 된다."; '주체성의 기만을 깨트리는 비동일성의 철학'이라는 노성숙의 서평 표제가 타당하다.

<부정변증법>의 '방법'에 대한 역자 김유동의 서평 한 대목: "그의 방법에서 오해되어서는 안될 중요한 점은 그가 부정적 총체성이나마 총체성의 범주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개념이 만든 족쇄는 개념이 풀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충실히 지킴으로써 합리성의 속박 너머에 있는 비합리성의 세계에 충분히 열려져 있으면서도 비합리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 "주체나 주체의 현실적 속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우주 속으로 달아나버리는 교의들은 쉽게 세계의 경직된 상황 및 그 속의 성공기회들과 결합될 수 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은 속박의 틀이 완벽해짐에 따라 유목민적인 탈주의 논리가 새로운 지배조류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경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속된 탈주들, 난립하는 차이들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김유동은, 아도르노의 '잘못된 세계의 존재론'이 "질(質)과 사용가치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말살되어버린 채 순수한 양(量)으로서의 교환가치의 지배가 더욱더 철저해지는 카지노자본주의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론"일 수 있음을 제임슨과 함께 긍정했다. 그런 긍정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일종의 '감옥'으로 되며, 현대의 지식인은 그 감옥에서의 '탈주'라는 책무를 부과받는다: "20세기 초의 위대한 모더니스트들과 동시대인이면서 아우슈비츠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아도르노는 현대세계라는 체계 바깥에서 이 체계를 관조하고 비판하는 개인적 주체의 경험적 특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러한 자리가 오늘날의 지식인에게 마련될 것 같지는 않다. 그 때문에 현실이라는 족쇄를 재현하는 아도르노 사상은 그 자체가 또다른 의미의 족쇄로 다가오는데, 그 올가미를 감당하면서 어떻게 삶을, 실천이나 탈주의 놀이로 풀어갈 것이가는 오늘날의 지식인의 숙제일 것이다." 아도르노가 '참된 중도(中道)'였는지는 논외로 하고, 그가 좌우의 포격으로 68혁명의 와중에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사태는 우리 사회 '중도의 괴멸'이라는 한 단면을 환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족쇄이자, 탈주의 디딤돌인 아도르노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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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2-3. 정치권력과 지식인 下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2-3. 정치권력과 지식인 下

 
2007 대통령 선거전이 서서히 달궈지고 있는 요즘 지식인들의 줄서기도 한창이다.
 


지난 달 27일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 출연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진영의 정동양 한국교원대 기술교육학과 교수(왼쪽)와 유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정교수는 대운하 옹호를 하다 한 방청객으로부터 “3년전에는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받자 “당시엔 깊이 있게 검토해보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문화방송 제공 

정치학을 전공하는 서울 한 사립대의 ㄱ교수는 최근 같은 대학 출신 선후배 교수, 주변 교수들로부터 정치 참여 동향을 자주 듣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이 학교 ㄴ·ㄷ교수 등은 교수 회식 때면 “나는 이번에는 꼭 누구 대선기획단에 들어갈테다”라며 공공연하게 말한다고 한다. 이미 “비선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교수도 여럿이다. “나보다 훨씬 못한 녀석들이 정치 한답시고 이름 날리는 거 그냥 못 보는 게 교수들이야.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고, 빽 써서 교수 된 데다 교수 되고 나서 연구도 게을리한 애들이 어느날 정치권에 이름을 떡 하니 올려놓는 거야. 그 꼴을 못 보는 거지.” 그러니 이 참에 나도 한번 나서보자고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ㄱ교수는 정치권에 줄대는 교수들의 행태의 본질을 ‘명예욕’으로 규정했다. 그는 “교수들이 정치에 무슨 전문성을 보여주겠느냐”면서 “전문성을 가장한 정치판 가담 행위”라고 지적했다.

국립대 어느 교수의 월·수·금 수업 중 금요일은 ‘자율 학습’이다. 그는 금요일 여의도를 오가며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고 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기필코 대통령시켜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던 서울 사립대의 어느 교수. 그는 ‘이명박 대세론’이 일자 MB캠프로 선회했다. 교수들 사이에서는 “‘대선 로또 5년장’이 섰다”는 말이 나들고 있다. 한 교수는 “될 만한 후보 캠프에 줄만 잘 서면 차기 정권에서 중요한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것을 몇 차례 대선을 거듭하며 학습한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지식인의 정치 참여가 정치인을 통해 자기의 철학과 신념을 구현하는 일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지난달 27일 문화방송 ‘100분 토론’의 경우를 보자. 이날 주제는 이명박 전 시장이 공약으로 내건 한반도 대운하였다. 정동양 한국교원대 교수(기술교육학), 유우익 서울대 교수(지리학)가 찬성쪽 패널로, 홍종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와 박진섭 생태지평연구소 부소장이 반대쪽 패널로 나왔다. 팽팽하게 진행되던 이날 토론의 균형은 시민 패널의 질문 하나로 깨졌다. 주부 김정애씨는 정교수에게 이렇게 따졌다. “2004년 건교부 주최 전문가 회의에서 ‘서울에서 배를 타고 소백산맥을 넘어 부산까지 가려면 1주일에서 열흘까지 걸린다며 경부운하를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젝트’라고 강하게 비판하셨던데 지난 11일 심포지엄에서는 운항시간이 24시간이라고 바꿨다. 3년 사이에 같은 사안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지느냐.” 정교수의 답변은 “오래돼 잘 기억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질문이 계속됐다. 그러자 그는 “당시엔 깊이 있게 검토해보지 못한 것이었고, 설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명했다.

곽승준 고려대 교수. 환경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새만금생명학회의 창립멤버다. 정부의 지속가능개발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새만금공사를 강행하자 학자적 소신을 지킨다며 위원회를 탈퇴했다. 그런 곽교수는 지금 이명박 전 시장 캠프 환경특보다. 그는 지난 3월 라디오 프로에 나가 “한반도 대운하 주위에 산업단지, 유락시설이 만들어질 수 있다. 부가가치 창출도 고려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새만금공사를 강행한 정부 논리와 비슷했다.

지식인들도 야당에만 몰리고, 인기없는 여권에는 ‘지식인 가뭄’이다. 한자릿수 지지율을 보이는 여권 주자들에게는 교수들이 모이지 않는다. 유력 주자에게 몰리는 현상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여권 한 주자의 핵심 참모는 “후보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몇몇 소신형·이념형 교수들만 참여하고 있다. 우리 후보랑 맞을 것 같아 영입을 타진해보면 대부분 사양한다”고 말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권 전체나 지지율이 바닥인 게 제일 크다”며 “이념·소신이 맞아서 저쪽(한나라당) 캠프에 가는 분들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세론’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 설문에서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설문 대상 74명 중 68명이 답변을 해왔다. 주관식 답변을 유형화해 크게 분류하면 ‘찬성(긍정)’이 49명(66.2%)으로 ‘반대(부정)’ 11명(14.9%)보다 훨씬 많았다. 찬성(긍정) 중 정치 참여의 조건과 전제를 내건 ‘조건부 찬성(긍정)’ 24명(32.4%), ‘인간은 정치적 동물’ ‘참정권’ 차원의 원론적 찬성(긍정)이 12명(16.2%)으로 절반가량(36명·48.6%)이었다. 조건부·원론적 찬성(긍정)의 의견을 낸 지식인들도 정치 참여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어느 교수는 “교수들의 지위가 과대 평가되었다. 사회가 필요 이상으로 교수에게 많은 권위를 떠안겼다”“정부에 참여할 때 4급 서기관이나 5급 사무관 정도의 자리로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에서 지식인 정치 참여가 문제되는 이유는 ‘비정치적 경로와 수단’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정치인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선 시대 이래 지식인이 ‘사대부-선비-권력 진출’의 틀을 은연중 답습하려는 경향을 지적했다. 유명 지식인일수록 정치 참여 때 ‘공천’이 확실시되는 것이 바로 그런 전통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사례로는 서울대 총장이라는 후광 효과로 정치권의 꽃가마를 기대했던 정운찬 전 총장이 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정치 참여는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지식인의 정치 참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민주화는 넓은 범위에서 볼 때 정치에 대한 지식인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처럼 하나의 좋은 전통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문제는 정부나 정당에 참여하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정치 참여의 경우 지식과 권력과 거래하는 것”이라며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행태가 그 부정적인 양상의 한 전형”이라고 말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도 “지식인에게 넓은 의미의 현실 참여는 불가피하며 비판적 참여조차 이미 정치를 뜻한다”면서 “그러나 최근 의원 공천을 위해, 또는 정부 고위직을 위해 대선 캠프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는 지식인들의 정부 위원회 참여를 주목했다.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도덕적 판단을 떠나서 하나의 현상이다. 과거에도 통치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거나 혁명에 참여하는 형태로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있었고, 앞으로도 지식의 중요성이 증대될수록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싫든 좋든 증대될 것이다.” 그는 “다만 지난 20년간 김영삼 정부 이후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도 정치권에 참여했는데 진보 인사들이 권력에 다가갈수록 진보 운동이 쇠퇴하는 ‘역설’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참여가 아니라 변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참여 지식인들은 스스로 대중의 시선을 잃어버리고 통치자의 시각에서 사회발전 방안을 고민하게 된다. 사회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하던 ‘투쟁위원회’에서, 갈등의 중재자인 양 행세하는 ‘수습위원회’, 나아가 국가 전체의 성장과 발전을 자기 과제로 삼는 ‘발전위원회’로 변신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장기 휴직계-〉낙하산 식 정계·공직 진출-〉대학 복직’에 대해 하종문 한신대 교수는 “정치 참여의 뜻이 있는 사람은 ‘사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 참여의 범위와 내용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우선 ‘제도 정당’ 참여 여부를 두고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이제는 바깥에서 한가로운 평론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념에 맞는 정당에 적극 참여해 일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정치에 참여)할 수야 있지만, 자신의 철학과 원칙을 따르면서 하는 게 좋을 듯하다”며 “예컨대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의 좌파 지식인이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적 정권에 들어가서 일한다는 것은, 그 지식인 신념의 진솔성을 의심케 한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최근 민노당 노회찬 후보 지지 뜻을 밝혔고, 정태인 교수도 민노당 심상정 캠프에서 일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지식인의 현실 참여가 곧 제도 정치권에의 접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식인의 현실 참여는 기본적으로 시민사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도 “운동 정치 참여의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정부나 국회에 참여하는 것은 지식인이 허명이나 지위, 지식을 팔아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서 정치를 정의한다면, 그런 정치 참여는 지식을 삶과 결부시키려는 점에서 좋다”고 말했다.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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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노무현의 ‘위원회 정부’와 지식인


노무현 정부를 위원회 정부라고도 한다. 정권마다 필요시 위원회를 두는 것이 상례였으나 노무현 정부는 그 숫자와 권한 부여에 있어서 이전의 정부와 구별된다. 이런 이유로 노무현 정부가 위원회 정부라는 말이 나왔다.
 

  김병준 대통령 정책기획위원장 

대통령이 공무원 조직을 활용하기보다는 위원회를 따로 두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개혁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함이며, 다른 하나는 기존 공무원의 간섭을 억제하기 위함이다. 노무현 정부는 기득권 공무원의 현상 유지 습성을 잘 간파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이들과의 동거형 개혁을 원하지 않았다. 결과는 대통령과 늘 직접 대면하는 위원회의 창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동북아시대위원회는 대표적인 정권 차원의 개혁 위원회라 할 수 있다. 한편, 노정권은 청와대 참모에 의한 개혁도 빠뜨리지 않았다. 청와대 정책기획실, 청와대 비서실장, 홍보수석실, 시민참여수석실 등을 활용한 정치적 개혁도 추진하였다. 정치적 개혁에 치중한 나머지 교육문화관련 수석과 같은 자리도 두지 않았다. 노대통령 당선 이후 열린우리당은 정권의 신 인맥이 되어 구태의연한 민주당을 제치고 새로운 정치 지원 세력이 되었다.

이로써 개혁의 분담 체계가 완벽하게 정비된 듯하였다. 청와대는 정치 개혁의 눈과 부리의 역할을, 대통령 직속 위원회와 열린우리당은 개혁의 양 날개 역할을, 기존 행정조직은 개혁의 성과를 뽑아내는 기능적 발톱의 역할을 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기존 행정 조직도 그냥 두지 않았다. 장·차관급은 물론이거니와 준공공기관의 장, 감사, 이사, 대학 등 교육기관에까지도 코드와 낙하산 인사를 통해 장악하였다. 개혁이란 명분으로 한국의 권력 기득권 상부 구조를 청소하는 수준의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비록 하향식 개혁 구상이지만 노정권 나름대로는 상당한 공을 들인 구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사청탁하면 패가망신이다’라는 구호는 코드 인사에는 통하지 않는 경구가 되었다.

실제로 노무현의 코드 인사는 참여정부 개혁 추진의 몸통을 구성하는 것이었기에, 노정권으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획이었다. 코드 인사의 핵심은 이른바 ‘진보그룹’에 속하면서 정권창출에 기여한 지식인을 동원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기준에 해당하는 지식인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 경력을 쌓은 지식인조차 배척되었으며, ‘노무현 지지의 의리를 지킨’ 진보적 지식인이 새 판을 주도해야 한다는 폐쇄적 나눠먹기식 인사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러다 보니 그동안 소외된 비주류 정치지식인이 대통령위원회 및 각종 정부 기관의 장으로 앉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노정권의 개혁 정책에 아첨을 일삼는 아마추어 정치지식인의 시행착오적 정책 남발이었다. 대표적인 실책으로는 민생 경제 파탄, 청년 실업, 전국적 부동산 투기 조장을 들 수 있다. 또한 엄청난 시간과 인력을 들여 수백개에 달하는 개혁 로드맵을 만들었지만 결국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은 종국적으로는 노대통령의 경륜 부족과 판단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대통령에게는 측근 지식인을 믿어주는 우직함이 있었을지 몰라도, 세계화 시대의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폭넓게 쓰는 도량과 노련함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아직까지도 ‘그 나물에 그 밥’ 식 인사를 고집스럽게 계속하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른바 정치권을 어슬렁거리는 지식인의 습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신문이나 방송에 출연해서 이념적 논쟁을 일삼는 정치지식인들이 얼마나 ‘자기 판매’에 능숙한 사람들인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정치지식인에게 좌파 성향이니 우파 성향이니 하는 것은 어쩌면 겉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것인데 말이다. 그들 지식인은 진보로 해달라면 진보로 코드를 맞출 것이며, 보수로 해달라면 보수로 코드를 맞출 것이다. 그동안 변방을 떠돌며 권력에 굶주린 비주류 정치지식인들에게 노무현 정부는 한판 놀 수 있는 ‘일터’를 제공한 셈이다.

그들에게는 진보나 보수라는 코드, 좌파나 우파라는 코드보다는 청와대가 원하는 코드가 무엇이며, 무엇이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면밀한 계산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라크 파병, 한·미 FTA와 같은 우파적 정책에도 청와대의 코드에 맞추어 처신을 이리 저리 바꾸면서 제 자리를 지키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장관이 되라면 장관이 되고, 장관 사직하고 선거에 나가라면 나가고, 선거에 지면 다시 공직에 돌아가고, 위에서 지시하면 정치적 충성자를 공무원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그들의 코드였다. 대통령보다 앞서서 정권 홍보의 ‘괴벨스’와 같은 역할을 자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정치지식인의 코드는 정말로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권력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코드 외에는 진보라는 코드도 보수라는 코드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이러한 구성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송강의 ‘양산박’을 연상시킨다. 세상을 바꾸어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양산박 협객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정치지식인들은 외관상으로는 어느 정부 못지않게 화려한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고 비교적 젊은 연령대의 교수들이었다. 이들은 각자 분야를 나누어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고유성과 정통성을 유지 계승하기 위한 작업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위원회 정권’으로 불리는 노무현 정권에서 주로 비상근 위원장에 부임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정부위원회에서 참여정부의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정권의 행동대원 역할 정도는 매우 적극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과거 정권 지식인의 주된 역할-소극적인 정권의 하수인-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서투르고 조급했다. 그들은 정권 창출과 초기 개혁 청사진 마련에 기여하였으나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일등 공신급 정치지식인들은 제 풀에 지쳐 돌아간 반면, 삼등 공신 반열에도 못 드는 정치지식인들은 감지덕지하며 여전히 공직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노대통령은 자기의 인맥을 3기로 나누어 분류하였다고 한다. 인맥에도 기수와 ‘짠밥’(서열)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노무현 인맥이 기수와 짠밥에 따라 어떻게 움직였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노무현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경륜과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 지식인은 코드, 충성심, 활용가능성이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등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정권의 나팔수가 되든지 기능적으로 봉사하든지 해야 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치가는 언제나 지식인을 필요로 하고, 지식인은 정치인을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극히 적은 사례를 제외하고는 지식인이 나서서 정치를 성공으로 이끈 적은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정치지식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도 노무현의 지식인은 아직도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국민과 비평가를 원망하고 싶겠지만 말이다.

한국에 키신저나 그린스펀 같은 학자출신 정치인이 당장 나타나기는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이 시행착오를 피하고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다소 보수적이지만 경험과 학식이 대내외적으로 검증된 학자를 등용하는 것이 선진국의 추세라는 점에서, 노무현의 지식인 기용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외형적 학벌이나 학력 앞에 무릎을 꿇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식인 사회, 전문가 사회에서의 인증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인의 지식인 선택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저명교수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술 이론서가 아닌 교과서를 써서 유명세를 탄 사람들이거나, 방송 출연에 열중하고,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학술적 식견이 탁월한 사람이 정책을 잘 만든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학문적 식견도 없이, 정치적 주장만 일삼는 저급 학자들이 더 잘한다는 보장은 더욱 없지 않은가.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정책 실패를 그들 학자의 실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실책의 근본 원인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제대로 된 정치와 정책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이다. 어차피 정치지식인들이야 어떤 정권에서든 권력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바칠 수밖에 없는 신세가 아닌가. (전영평|대구대 도시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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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靑코드 맞춘 실패한 참여”
 
개혁을 표방하며 출범했던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충성과 출세 코드로 일관하거나 책사로 기능함으로써 결국 지식인의 노무현 정부 참여는 실패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전영평 대구대 교수는 20일 경향신문 특별기획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기고에서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들을 “충성심 코드만 있는 ‘정치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전교수는 “(이들에게는) 진보나 보수라는 코드, 좌파나 우파라는 코드보다는 청와대가 원하는 코드가 무엇이며, 무엇이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면밀한 계산이 중요했다”며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우파적 정책에도 청와대의 코드에 맞추어 처신을 이리 저리 바꾸면서 제 자리를 지키는 수완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전교수는 김병준 대통령 정책기획위원장(국민대 교수)에 대해 “외관상으로는 지식인 교수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무현의 정치적 동지 및 책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교수는 “지방분권 프로젝트는 그가 일본에 머물렀을 때 체험한 일본 지방자치를 본뜬 것”이라며 “지방의 열악한 정치적 상황은 무시한 채 도식적으로 분권을 끼워맞춘 지식인 참여의 대표적 실패 사례”라고 지적했다.

대통령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도 김병준 위원장에 대해 “전형적인 정치가”라면서 “교수 시절 열린우리당·재정경제부와 잘 지내려는 사람 정도였다”고 밝혔다. 정교수는 김위원장의 역할이 삼성과 재경부의 영향을 받아 내부에서 개혁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교수는 “2004년 말쯤 청와대에서 조윤제 경제보좌관 후임을 추천하라고 해서 개혁적인 이동걸 박사(전 금융감독위 부위원장)를 추천했더니, 김위원장이 삼성과 재경부가 극렬하게 반대한다며 한·미 FTA의 주역이 된 정문수씨로 뒤집었다”고 말했다.

정교수는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에 대해서는 “공무원보다 더 공무원다웠던, 덕분에 행정가로서 일정 부분 성공한” ‘행정가형 지식인’으로 분류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 시장주의와 경쟁 체제에 대해 입장을 선회하려고 노력했다”고 평했다.

재벌해체·사회복지정책 강화 등을 주장하다 장관이 된 뒤 각종 노사분규에 대해 직권중재 결정을 내리며 노동운동과 대립했던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에 대해서는 “내가 청와대에서 쫓겨나기 전부터 실망했다”고 말했다. 평소의 진보·개혁적 소신을 뒤집었다는 지적이다.

정교수는 개혁적 소신을 유지하던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이동걸 박사, 유종일 교수(전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의 조기퇴진 배경에 대해 삼성생명 상장 및 개혁정책을 둘러싸고 청와대 386 및 관료들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린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진보·개혁적 지식인들의 노무현 정부 참여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박교수는 “이정우 교수는 ‘사회투자형 국가를 지향한다’는 등의 ‘사민주의적’ 발언을 해오신 분”이라며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사회 투자를 거의 늘리지 않고, 이라크 침략을 방조했는데도 어떻게 해서 3년이나 같이 갔는지 의아하다”고 비판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최근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행태는 지식과 권력을 거래하는 부정적 양상의 한 전형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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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희망에 대하여

요즘 이 서재를 찾는 분들이 하루에 400여분 안팎이 되는 걸로 뜨지만, 즐찾이 늘거나 주는 것도 아니고 댓글이 더 달리는 것도 아니므로 대부분의 경우 유령-독자들이 아닌가 싶다(아니면 400이란 숫자 자체가 허수이거나). 이런 류의 블로그가 생기기 이전에 혼자 PC에 쳐넣곤 하던 일기와의 차이점이라면 이 '유령들'의 존재인데, 그건 좀 자극적이면서 동시에 성가신 일이기도 하다. 무슨 '유령수업' 같기도 하고...

 

 

 

 

공개된 서재(블로그)인 이상 얼마간의 '공공성'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또 얼마간은 '사적인' 공간인 이상 나만의 '자유'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해서, 이 공간에 적어놓는 글들은 교묘한 줄타기, 혹은 이중적인 플레이의 산물이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면서, 또 나 자신을 위한 것만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작년 1월초 모스크바 통신에 '언더그라운드에 대하여'라고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정리해서 옮겨온다. 대체 너의 포지션이란 게 뭐냐, 란 질문을 바람결에 듣기도 하는데, 거기에 답한다는 의미도 있다(그러니까 나는 두 번 대답하는 셈이 되겠다).

글의 내용은 대부분 당시에 읽었던 김규항의 칼럼 '희망에 대하여'에 대해 코멘트를 덧붙이는 것으로 돼 있다(칼럼은 <나는 왜 불온한가>에 포함돼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기생적'이며, 텍스트라기보다는 '곁다리텍스트'이다. 사실, '블로그'가 아니라면 이런 류의 텍스트가 살아남았을 리 없다. 좋은 세상이고, 좋은 세월이다. 그럼, 고대되는 이창동의 신작 <밀양>에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도록 한다.  아래 사진은 밀양 사자평 억새고원이라고.

김훈의 치정소설이 밀양을 배경으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온 이창동의 신작은 밀양이배경이다(나는 두 주 전쯤에 <씨네21>에서 그런 내용이 실린 인터뷰를 읽었다). 밀양(密陽), 혹은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신작의 영어제목이다).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그곳에서 일어났다는 걸 보면, 밀양은 햇빛이 좋은 만큼이나 그늘도 깊은 모양이다. 나는 밀양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잘하면 올해 안에 밀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크린에서.

홍상수의 신작 <극장전>도 크랭크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불과 작년초를 기준으로 한 얘기인데, 왜 이렇게 코믹하게 느껴지는지!). 그의 행보가 빨라진 건 아마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럼, <친절한 금자씨>를 찍는 박찬욱은? <올드보이>의 믿기지 않는 ‘성공’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어쨌거나 이들이 빨리-찍기에 있어서 김기덕과 경쟁하는 것은 (관객으로서) 고무적이다. 허진호도 신작을 찍는다고 하고. 보기에, 한국영화는 현재의 세계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활력을 자랑하는 듯하다. 그건, 그렇고 이어지는 건 김규항의 한 최근(?) 칼럼이다(최근에 인터넷에서 읽은 것일 뿐이어서 정말로 최근의 칼럼인지는 자신할 수 없다. 제목은 ‘희망에 대하여’인가 그렇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은 80년대가 준 것이다. 젊은이들의 알록달록한 머리색,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권리, 그 대통령을 욕할 자유, 북한군을 인간으로 그린 영화, 민주적인 노동조합...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어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의 9할은 80년대, 그 불의 시대가 준 선물이다. 한국의 80년대는 특별했다.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하고 스러져간 시대가 있었던가.

이 시작부터 두드러지는 건 그의 ‘나르시시즘’이다: “한국의 80년대는 특별했다.” ‘386’이라는 언론의 표현 대신에 ‘80년대 청년들’이라고 그는 쓰지만, ‘인텔리 청년들’이라고 하는 걸로 봐서 ‘80년대 청년들’의 9할은 ‘80년대 학번의 대학생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사실, 그 대학생들/인텔리들이 그렇게 많아진 건 5공의 ‘선심성’ 대학정책 때문이었다(더불어 군사정권은 통행금지를 해지하고, 중고등학교의 두발과 교복을 ‘자율화’했다. 머리에 물을 들이려면 ‘머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사립대학의 설립조건을 완화함으로써 대학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졸업정원제라는 걸 도입하면서 대학 입학생 수를 더 늘려놓은 것이다. 해서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의 ‘물적 토대’는 역설적이지만, ‘파시스트들’이 마련해주었다.

더불어, 당시는 경제호황국면이었기 때문에 요즘과 같은 대졸자 취업문제가 거의 없었다. 90년대 후반 이후 대학생/졸업생들이 좀스럽게도 취업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반면에 ‘80년대 청년들’은 군사정권 타도와 조국의 민주화 같은 ‘대의’에 ‘투신’하다가도 원하기만 하면, 직장인/생활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물론 일부 스러져가기도 했지만. 그런데, 김규항은 그런 ‘희생’에 대해서, 다른 세대들이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기념관’이라고 세워달라는 것일까?

 

 

 

 

자기 세대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과 나르시시즘이 김규항만의 것은 아닐 것이기에 더 트집을 잡지는 않겠지만(가령, 4.19세대의 자부심, 이명박 세대의 자부심, 김훈 세대의 자부심 등), 그런 자부심을 객관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면 곤란하다. “인류 역사에서” 운운하는 것이 그렇다. 사실, 그런 청년들의 원조는 러시아이며, 인텔리’란 말 자체가 러시아어 ‘인텔리겐챠(intelligentsia)’의 준말이다(‘인텔리겐챠’란 말 자체는 러시아의 고유어가 아니지만). 그러니 ‘인텔리’라는 부정확한 표현 대신에(흔히 고학력자를 ‘인텔리’라고 지칭하므로) ‘인텔리겐챠’(표준어는 ‘인텔리겐치아’)라고 써주는 것이 옳지만, 김규항은 이 말의 소속을 (무)의식적으로 부인/거부한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된다.)

-80년대 청년들의 땀과 피가 땅에 베어(*배어) 파시스트들이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될 무렵,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물론 그것은 사회주의의 붕괴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한 졸렬한 시도의 붕괴였지만) 더 이상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적인 우경화가 시작되었다. 이 모순된 상황은 일견, 한국은 살 만한 나라가 되었고 사회주의적 가치는 시효를 다한 것처럼 보였다. 10여 년을 극악한 군사 파시즘과 싸우던 청년들의 긴장은 그 변화한 상황 속에서 혼란에 빠졌고, 정처 없이 흐트러져갔다.

이 대목에서 현실 사회주의 붕괴를 ‘사회주의 한 졸렬한 시도의 붕괴’라고 한 것은 유감스럽다(짐작에는 이 때문에 이 칼럼에서 ‘인텔리겐챠’는 ‘인텔리’가 되었다). 러시아 인텔리겐챠들의 땀과 피가 땅에 배어(이건 ‘비유’가 아니다. 그들의 희생은 사실 양적으로 한국의 ‘80년대 청년들’과는 비교가 안된다. 남의 나라 역사라고 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성취한 것이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며, 2,000만명으로 ‘인민의 적’으로 몰아 희생시켜가면서 건설한 것이 (스탈린식의) 현실 사회주의였다.

이전에 한번 인용한 바 있지만, “스탈린 시대에 소련은 농업집산화, 중공업 중심의 급속한 산업화, 문화혁명 등 여러 조치들을 통하여 위대한 성취와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 내었고,(…) 당시 소련은 자본주의 세계가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계속 유지하였고, 그 결과 소련 사회의 모습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문맹자들의 농업국가에서 국민 다수가 문맹에서 벗어난 도시 중심의 산업국가로 완전히 변모하였다.” 



조금 더 인용하자면, “이런 변화는 소련의 많은 사람들, 특히 노동자와 농민 출신의 젊은이들에게는 영웅적인 희생, 교육, 신분 상승 등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도시의 노동자들과 중간계층들은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낸 채, 국민의 모든 힘을 경제 발전에 최대한 동원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호응은 산업 및 관료제의 팽창, 대대적인 숙청, 교육 기회의 확대 등과 연결되면서 노동자 및 농민 출신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 결과 노동계급 및 농민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등학교 학생수는 1926-7년의 1,834,260명에서 1938-9년의 12,088,772명으로 증가하였고, 고등교육기관 학생수는 1927-8년과 1932-3년 사이에 159,800명에서 469,800명으로 증가했는데, 그 중 노동계급출신의 비중은 25.8%에서 50.3%로 증가하였다. 또한 고등교육기관 졸업생들의 승진은 매우 급속하여 이미 1941년에는 1928-32년 졸업생의 89%와, 1933-7년 졸업생의 72%가 국가 및 당의 지도적인 간부로 성장하였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2,000만 명 이상이 희생됐지만, 이게 ‘현실사회주의’였다. 이게 왜 ‘한 졸렬한 시도’인가? 희생자들 때문에? 하면, (A급 좌파가 아닌) ‘B급 좌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설마 중앙집권적 권력이라는 게 필요없는 것인가?), 좀 달라지는가? 과연 사회주의건설에 반대하거나 적극 동참하지 않는 세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거기서는 ‘희생’ 혹은 ‘숙청’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가? 가령 개량적 진보주의에서부터, 중도보수, 수구보수, 수구꼴통에 이르는, 그리하여 아마도 현재 인구의 70%는 확실히 넘을 만한, 3,000만 명은 확실히 넘을 만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어떻게 개량하고 개조할 것인가? 무엇으로 그들의 동참을 ‘강제’하는가? 그들의 자발적 동참을 기다리는가?

소련은 자연자원이라도 풍부했지만 그마저 없는 한국의 생존은 어떤 방식으로 확보할 것인가? (자본주의 이후) 생산수단의 공유,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라는 ‘아름다운 원칙’을 과연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일국사회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그럼, 전세계의 사회주의화, 공산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주의적 가치’가 시효를 다하지 않았다면, 다른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혹 모든 (이성적인)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실현불가능한 자기모순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기대하는 건 이런 물음들에 대한 대답 혹은 의견이지만, 김규항의 칼럼은 무력한 ‘적전(敵前) 분열 이후 10년’으로 넘어간다.

-10년이 지났다. 오늘 그들은 대략 셋으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의 내용은 폐기하고 이력만을 팔아 장사에 나선 부류는 접고 가자. 그런 천박함까지 80년대의 이름으로 언급할 순 없으니.) 첫째,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이다. 손에 꼽을 만치 적은 그들은 곤란한 처지에 있다. 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변했다고 합의했고, 그런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방식의 운동이 각광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이 지키는 신념은 낡은 것으로 비쳐지기 일쑤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들은 ‘여전히 남은 문제들’과 싸우는 유일한 세력이다. 그들은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새로운 세상에 접근한 사람들이다.

“오늘 그들은” 대략 셋으로 나뉘었다고 하지만, “어제(=80년대) 그들은” 그렇게 구분될 수 있었을까? “80년대의 내용은 폐기하고 이력만을 팔아 장사에 나선 부류”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80년대 운동권의 (잘나가는) 핵심들이었다(이 ‘장사꾼’들이 ‘386 국회의원들’을 지칭하는지, ‘벤처사업가’들을 지칭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들이 10년 후에는 ‘이력을 팔아 장사에 나설 천박한 부류’들로 분류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지금 그들이 그런 식으로 분류되고 걸러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라는 폭압적 상황하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사소한’ 차이들이 ‘오늘’ 드러난 것.

레닌주의의 기치하에서는 스탈린도 트로츠키도 부하린도 모두가 한몸이고 한 통속이었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고 세상이 달라지자 그들은 스탈린파와 트로츠키파와 부하린파로 분리/분열돼 가고 사회주의의 적통과 반동으로 구분/숙청된다. 그런 식으로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다(김규항의 박노해 비판을 떠올려보라. 하지만, 80년대 누가 박노해를, 혹은 노동해방문학을 비판할 수 있었을까? 혹은 김수환 추기경은? 80년대 누가 추기경을 비판할 수 있었을까?). 왜?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로 분류되는 이들은 쿠스투리차의 영화제목을 빌리자면 ‘언더그라운드’의 사람들이다. ‘80년대의 연속성’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전두환(파쇼정권)이나 김영삼(문민정부), 김대중(국민의 정부), 노무현(참여정부)이 다 똑같다는 것이다. 전선(戰線)의 외양만이 바뀌었을 뿐, 근본적인 사회적 적대관계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으며 그런 적대의 혁파를 위해 자신을 희생/투신하는 사람들! 이러한 논리의 자연적 귀결은,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인간개조 혹은 인간복제이며(그것만이 ‘근본적인 변화’이기에), 네그리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기계-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다. 그것은 김규항의 입장이기도 한가?

하지만, 그는 한 문단 내에서 이야기를 묘하게 비튼다.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들은 ‘여전히 남은 문제들’과 싸우는 유일한 세력”으로도 지칭되는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라는 건 이들간에도 두 부류가 있다는 얘기인가? 이 문단의 시작에서 이들은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한다고 분명히 언급되었다. 이 두 구절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그들은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는 것인가?

그리고 “여전히 남은 문제들”은 뭔가? ‘남은 문제들’이란 말은 해결된 문제들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해결된 문제들은 무엇인가? “여전히 남은 문제들만” 마저(!) 해결하면 ‘근본적인 변화’가 성취되는가? 여기에 논리적 균열이 있는 건 아닌가? 나로선 이 균열이 “그들은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새로운 세상에 접근한 사람들이다.”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의해 봉합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둘째, 이른바 90년대 이후의 변화한 상황을 근본적인 변화로 규정하고 적응한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90년대 중반 이후 급부상한 부르주아적 시민운동이다. 그런 새로운 방식의 운동은 80년대의 전체운동 중심 운동의 그물에 담지 못했던 중산층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챙기며, 준 정당에 가까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 성과야 지나칠 만큼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런 운동이 오늘의 유일한 운동인 양 주장되는 일이다. 그런 주장들은 바로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을 어리석고 낡았다고 비난하는 일이 된다.(그들은 여전히 ‘80년대의 연속성’이나 ‘변혁의 전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들의 실제 활동 속에서 그런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지를 위해 많은 것을 타협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언론에 의지하다 보니 언론문제에 불분명한 입장을 보인다든가, 언론에서 다뤄줄 만한 주제에 편중한다든가, 그 번듯한 살림을 꾸리기 위해선 과격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든가 하는 문제들은 그들의 족쇄다.)

여기에 또다른 부류가 있다. 이들과 첫번째 부류와의 종차(種差)는 90년대 이후의 변화를 보는 시각에 달려 있다. 첫번째 부류(=언더그라운드)가 90년대를 80년대로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 반해서, 두번째 부류는 그걸 인정한다. 그리고 거기에 적응한다. 그런데 여전히 ‘80년대의 연속성’이란 말을 쓴다. 그런 그들을 김규항은 ‘부르주아적 시민운동가들’이라고 일컫을 모양이다. 이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중적인데, 그들의 인식과 운동방식에 ‘반대’하진 않지만, 그것이 운동의 전부인 걸로 간주되는/간주하는 건 반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동은 (부르주아적) 한계를 명백하게 갖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과 달리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을 사람들로 하여금 간과하게(결과적으론 ‘낡은 운동’으로 비난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력을 팔아 장사에 나설 만큼 간교하지도 변화한 상황에 적응할 만큼 재빠르지도 못했지만, 여전히 신념을 지키며 살기엔 변화한 상황의 혼란과 피로를 이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80년대의 청년들의 가장 많은 부분일 그들은 말 그대로 청년 시절의 노고가 허망해져버린 사람들이다. 남들이 일신의 안위를 준비하느라 열심일 때 거리와 현장을 내달려야 했던 그들은, 꼭 그만큼 경쟁에 뒤진 삶을 어색하게 꾸려간다. <한겨레>를 구독하고 남들보다 진지한 책을 읽고 선거 때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정당에 투표하기도 하지만, 그런 작은 노력들은 이미 천민자본주의의 정신에 사로잡힌 그들의 주변으로부터 은근한 경멸의 대상일 뿐이다.

어떤 근거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규항은 이 세번째 부류를 ‘80년대 청년들의 가장 많은 부분’, 즉 대다수로 규정한다.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80년대 청년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제한된 범위의 ‘운동권’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소위 ‘운동권’ 바깥에 있었던 나로선 그 속뜻을 알지 못하겠다). 정말로 그 운동권 ‘대다수’는 “말 그대로 청년 시절의 노고가 허망해져버린 사람들”인지? 그래서 “경쟁에 뒤진 삶을 어색하게” 꾸리면서 “주변으로부터 은근한 경멸의 대상일 뿐”인지?

나로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은 칼럼의 서두에서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하고 스러져간 시대가 있었던가.”라고 감회를 섞어 얘기한 것과 그 인텔리 청년들(=80년대 청년들) 대다수가 “주변으로부터 은근한 경멸의 대상일 뿐”이라는 이 대목에서의 지적 사이의 간극이다. 내가 아는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며(그들은 오히려 나보다 잘나간다. 집행유예를 받았던 한 친구는 10년후 내게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를 읽어보라고 권했었다), 혹 ‘경멸의 대상’일지도 모르는 ‘80년대 청년들’은 ‘대다수’가 아니라 ‘소수’이다(어떤 다수가 ‘경멸받는다면’, 오히려 경멸받지 않는 소수가 비정상 아닌가?).

‘은근한’ 경멸? “(겉으론 아니지만) 네들이 속으로 날 경멸하는 걸 다 알아!” 같은 건가? 그건 자의식의 일종이고 피해의식의 일종 아닌가? 사회/운동의 대의(大義)를 위해서 거리와 현장을 내달려야 했다면, ‘그만큼 경쟁에 뒤진 삶’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거꾸로 그런 경력 때문에 ‘경쟁에 앞선 삶’이어야 정상인가? 더불어, 운동을 했으면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하나? 민주화 운동 유공자들처럼? ‘고상하지만 무력한’ 이들(=아름다운 영혼들)의 주변은 ‘천민자본주의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데, 이 주변인들은 다수인 세번째 부류보다도 더 다수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칼럼의 주장에 시비를 걸려는 게 아니라 그 ‘진의’를 좀더 명료하게 해두기 위해서 제기하는 것이다.

-오늘 80년대의 청년들은 (변화한 세상에 적응한 사람들을 빼고는) 대개 세상의 경멸에 처해 있다. 희한한 일은, 사람들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그 청년들을 마치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처럼 경멸하곤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동의는 그런 경멸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 청년들이 ‘그 80년대에 데모 한번 안 해본 놈들’에게서까지 받는 그런 경멸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여기서도 ‘80년대 청년들’이라고 다소간 모호하게 지칭되고 있는 이들은 ‘그 80년대에 데모 한번 안 해본 놈들’과 대비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 모호성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청년들’은 ‘한번이라도 데모 해본 놈들’부터 ‘데모현장이 강의실이었던 분들’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절대 다수이고 후자라면 소수 정예이지만, 내가 보기에 김규항은 이들을 뒤섞는다. ‘절대 다수’가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으로서 경멸 받는 것은 넌센스이므로,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적어도 운동 경력 때문에 ‘훈장’이라도 달고 나온 이들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80년대 청년들’로 지칭될 만큼, ‘인류 역사’를 들먹일 만큼 다수였는가? 운동을 위해서 일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 새삼 주변(=사람들)의 시선에 그토록 민감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분명 사람들의 정신이 ‘천민자본주의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들의 경멸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그런 주변인들로부터 환영/존경받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 아닐까? ‘천민자본주의 정신’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사람은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존경해줄 수 있는 것인지? 자세하게 읽으려고 하면, 칼럼은 이해되지 않는 대목들이 수두룩하다.

가령, “희한한 일은, 사람들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그 청년들을 마치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처럼 경멸하곤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동의는 그런 경멸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라는 대목은 전형적인 히스테리증자의 담론을 떠올리게 한다(예컨대, 히스테리증자에게는 어떠한 사랑의 고백도 변심으로 의심받을 것이다. “저 남자가 갑자기 무관심해졌어. 딴 여자가 생긴 거야!” “저 남자가 왜 갑자기 친절하지? 딴 여자가 생긴 걸 감추려고 하는군!”).

이 ‘동의’를 ‘존경’으로 바꾸어도 사태는 역전되지 않을 것이다. 히스테리증자에게서는 그 ‘존경’ 또한 ‘경멸’을 위한 준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경멸이 아닌 진정한 동의이며, 존경인지는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궁예처럼) 보면 아는가? 하여간에 이런 식의 징징대는 소리는 듣기에 불편하다(영화 <람보>의 끝장면에서 남들의 ‘경멸’에 대해 자못 억울하다는 듯이 징징대는 ‘람보’ 실베스타 스탤론과 무엇이 다른가? 참고로, 이 <람보>는 레이건 시대의 미국, 80년대 시대정신의 영화적 상관물이었다).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다”는 대목은 어떤가? 그들은 무얼 돌려받기 위해서 주었는가? ‘인류 역사’는 차치하고 한국의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모든 앞선 세대는 자신들이 피땀흘린 노고의 대가를 후대에 물려주었다. 이건 당연한 것 아닌가? 이전 통신문에서 살펴본 김훈의 세대만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국전쟁의 참전세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있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얼 말하자는 것인가?

사실, 김규항이 80년대 청년들이 주었다고 주장하는 건 비판적 사회 ‘의식’ 아닌가? ‘의식화’란 당대의 상투어. 그 ‘의식’이란 소프트웨어는 ‘물적 토대’라는 하드웨어가 없이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결국 이건 하나마나 한 얘기 아닌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는데, 어쩌라는 얘기인가? ‘80년대 청년들’은 무슨 특별한 역사적 사명의 유전자라도 갖고 태어났었더란 말인가? 지금의 2000년대 학번들도 노무현 정부가 아닌, 5공 정권하에서였다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했을 것이다. 그건 한 개인의 앙가주망 이전에 ‘시대정신’이자 시대적 요청이(었으)니까.

-하는 말대로, 그들이 80년대의 후반기에 그렇게 열심하던 사상 투쟁이나 사회구성체 논쟁은 분명 과열된 부분이 있었고 그들의 운동엔 편중된 부분이 있었다. 그들이 90년대의 혼란에 그렇게 무력하게 흐트러진 일 또한 그런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해선 그런 오류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오히려 80년대가 종료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토론이 진행되지 않은 일은 아쉬운 일이다.

김훈의 인터뷰에서 이 대목에 상응하는 부분은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에 대해서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라고 답하는 부분이다. 김규항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물론 80년대 운동에 과열된/편중된 부분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김훈의 경우에도 지적했지만, 이런 판타지야말로 자기기만이다. 나는 당시에 그렇게 ‘열심하던’ 사상투쟁 등속도 혐오스러웠지만(그들은 주체사상이나 스탈린주의는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소프트 스탈린체제’였던 박정희나 그 ‘외설적 이면’으로서의 전두환은 혐오했다), 그러한 ‘오류/과오’까지가 온전하게 80년대 청년 정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때문에 그와는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우경화된 파쇼정권에 대응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좌경화’가 요구되었던 건 당연한 일, 이해할 만한 일 아닌가? 그게 옳거나 그르다고 판정하는 것은 이차적이다. 운동은 이성에 의해 조율되지 않으며, 거기에 언제나 동반되는 것은 ‘광기’이다. 김규항의 지적대로, (80년대 청년들이) “90년대의 혼란에 그렇게 무력하게 흐트러진 일 또한 그런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인바, (김규항의 주장대로) 그들이 현재 사람들로부터 경멸받는다면, 그건 일정 부분 자기책임이다. 이제 결론이다.

-문제는, 80년대의 오류에 대한 그런 비판들이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한 생산적인 목적이 아닌 엉뚱한 목적,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80년대의 정신은 ‘지나친 자본주의’로서 신자유주의 정신과 적대적이며, 80년대의 정신이 아무 구분없이 경멸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거기 있다. 오늘의 정신, 신자유주의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는, 모든 경제적 실패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넘겨지는,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대로 신분을 나누는, 일류대학이 부자의 자식들로 채워지는, 오로지 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올바로 살라고 가르치는 일이 자식과 제자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정신이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부당한 경멸을 돌려주는 일에서만 출발할 것이다. 80년대, 그 위엄을 되찾아야 할 때다.

“80년대의 정신이 아무 구분없이 경멸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거기 있다.”라는 대목은 문맥과 맞지 않는데, 오타가 아니라면 아이러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80년대의 정신’은 ‘신자유주의 정신’과 적대적이기에, 그 ‘신자유주의 정신’이 지배적인 정신, ‘오늘의 정신’이 된 우리시대에 ‘경멸’받는다는 것. 그런 맥락에서라면, 사람들의 경멸은 ‘80년대 정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징표일 것이므로 (부당한 것으로 불평해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환영해마지 않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80년대 청년들’이 김규항의 주장대로 경멸받는 ‘다수’라면, 신자유주의 정신을 상대로 좌절할 이유는 무엇인가?

저항의 ‘물적 토대’를 문제삼는 거라면 모를까(그건 좀 어렵고 복잡하다), 그가 내내 내세우고 있는 것은 ‘정신’, 곧 ‘의식’ 아닌가? 부당한 결멸 정도를 (되)돌려주는 일에서 ‘희망’이 출발될 수 있다면, 이 또한 너무도 쉬운 일 아닌가? 자신을 은근히 경멸하던 주변 사람들에게 당장 내일 아침부터 경멸의 시선을 되돌려주면 되는 것이니까. 그걸로 80년대, 그 위엄을 되찾을 수 있는 거라면 말이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위엄’의 내용이다. ‘그 위엄’을 되찾아야 하지만, 그리고 그걸 ‘재단언(reassert)’해야 하지만, 정작 그 위엄의 내용은 아직 정리되지/갖춰지지 않았다. 80년대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 (그간에 편파적으로 진행되었을 뿐) 아직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80년대가 종료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토론이 진행되지 않은 일은 아쉬운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 그대로 적용가능한 것은 재작년 연말인가 하머바스(독일)와 데리다(프랑스) 등 대표적인 서유럽 지식인/철학자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다.

 

 

 

 

자신들의 선언서에서 두 철학자는 유럽이 자신의 “윤리-정치적 유산”을 재단언할 힘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바, 지젝은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왜나면, “우리가 미국 정치와 문명 속에서 비난받아야 하는 것으로 그리고 위험한 것으로 발견하는 것은 유럽 자체의 일부이며, 유럽적 기획의 가능한 결과들 중 하나”(<이라크>, 50쪽)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유럽 자체의 왜곡된 거울이다.”(즉 미국이란 거울에 비쳐지고 있는 것은 유럽 자신의 얼굴이다.)

해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자기비판이다. “유럽 자체에 대해 비판적으로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은 미국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51쪽) 그것이 지젝의 단언이며, 이는 새로운 주장으로 이어진다. “유럽적 유산의 방어가 연대와 인권이라는 위협받는 유럽적 민주주의 전통의 방어에 국한된다면 전투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유럽의 유산이 방어되기 위해서는 유럽이 스스로를 재창안해야 한다. 방어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방어해야만 하는 그 무엇을 재창안해야 한다.”(51쪽)

즉 한쪽에서는 우리의 ‘금송아지’를 보호/방어하기 위해서 피 흘리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그 ‘금송아지’를 열심히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김규항이 옹호하며 재단언하고자 하는 ‘80년대 정신’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자체의 오류를 제거한, 순수하게 진보적인 ‘80년대 정신’(=금송아지)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그 정신의 윤곽과 아직 ‘참호’(=언더그라운드) 안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소수의 전사(戰士)들, 그리고 대다수 ‘패잔병들’뿐이다. 때문에, “80년대, 그 위엄”을 한편으론 되찾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런 게 아직 없으므로) 만들어내야 한다.

해서, 남들의 경멸에 신경쓰거나 발목 잡혀 있을 때가 아니며, 자화자찬하거나 징징댈 시간이 아니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그건, 한가한 질문이다. “누가 승리를 말하는가? 극복이 전부인 것을.”(릴케)이란 시구를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전진이 전부인 것을.” 묵묵한 전진이…(*여기까지가 본문이었다. 이어지는 것은 본문에 덧붙인 군말이었다.) 

 

 

 

 

김규항의 칼럼에 대한 논평에 생각보다 길어졌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은 80년대가 준 것이다.”란 첫문장을 읽으면서부터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해서, 결국은 한때 그의 칼럼의 애독자였지만 나는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나는 분류하자면, “세금 왕창 내는” ‘중도 우파’도 부르주아도 아니지만, 김규항의 분류대로라면 ‘80년대 청년’도 아니다. ‘80년대 인텔리’이긴 하지만, 나는 일단 ‘팔아먹을 이력’이 없고, 세상이 좀 달라졌다고 믿기 때문에 ‘80년대적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으며, 남들만큼 ‘간교하지도’ ‘재빠르지도’ 않아서 경쟁에 뒤진 감은 있지만, 그건 자업자득 정도로 여긴다(그러니 굳이 분류하면, 세번째 부류의 ‘변이형’ 정도 될까?).

단 하나, 내가 내심으로 자긍심을 갖는 것은 세상이 좀 달라지긴 했어도 나의 정치적 태도는 80년대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김훈의 분류대로 하자면, 나는 ‘회색분자’이어서(최인훈의 명명에 따르면, ‘회색인’), 그다지 달라질 게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내 주변에서 80년대에 ‘운동’을 잘하던 이들은 대부분 지금도 잘나간다(한나라당 공천까지 신청해 가면서). 그들에 주눅들어 하던 이들은 지금도 그냥 그 주변에서 주눅든 채 살아가고. 그리고, 나 같은 회색분자는 지금도 회색분자이다(나도 기회주의적으로 좀 처신하고 싶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빌어먹을 ‘기회’란 게 안 주어진다. ‘기회’는 나를 경멸하는 모양이다). 이건 일종의 생태학이다. ‘운동생태학’. ‘운동윤리학’ 이전에 말이다.

나는 김규항이 자신을 어떻게 분류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에 속하리라, 혹은 속해야만 하리라. 적어도 ‘B급 좌파’라는 명패에 값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손에 꼽을 만치 적은 그들”의 “곤란한 처지”에 합류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또한 정말로 ‘곤란한 처지’에 있는지? ‘언더그라운드’의 처지라면, 세 부류를 ‘개관(槪觀)’할 만한 처지가 안된다. 그걸 개관하기 위해서는 언더그라운드 ‘바깥’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세상이 변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하며(그럴 경우, 운동방식 또한 바뀌어야 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그럴 경우, 운동방식은 바뀌면 안된다). 그러니까 그의 처지를 규정하는 건 모종의 아포리아이다. 본문에서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라는 애매한/유보적 표현은 짐작에 아마도 그래서 들어갔을 것이다. 김규항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본문에서 한번 언급했던 쿠스투리차의 영화 <언더그라운드>(1995)의 줄거리는 이렇다. “1941년 독일에게 점령당한 유고의 베오그라드. 무기밀매를 하던 블래키와 마르코는 지하실에 무기생산고를 만든다. 이로부터 3년후, 마르코는 블래키를 독일군으로부터 구출해 지하실로 숨게 한다. 하지만 유고가 해방된 후에도 마르코는 지하실 사람들을 속여 계속 무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블래키가 사랑하는 여자 나탈리아를 빼앗고, 티토의 측근이 되어 부와 명예를 누린다. 블래키의 아들 요반의 결혼식날 언더그라운드는 사고로 파괴되고 아직도 전쟁이 진행중인 것으로 믿고 있는 블래키는 자신의 영웅담을 영화화하고 있는 촬영현장에 도착해 진짜 총을 발사한다. 1992년 다시 전쟁에 휩싸인 베오그라드. 마르코와 나탈리아는 블래키의 지하군에 의해 살해된다. 마지막, 블래키의 죽음에 의해 잉태된 꿈의 장면, 모든 죽은 사람들이 햇살 밝은 곳에서 축제를 벌이는데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이 육지로부터 떨어져 나간다.”(김소영 교수의 요약)

유고 내전에 관한 이 ‘블랙 코미디’에서조차도 언더그라운드의 사람들은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했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로 분류되는 이들은 이 ‘언더그라운드’의 사람들을 닮았다. 나는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가늠할 수 없다(1980년부터만 잡아도 벌써 25년째이다!). 그들과는 달리 나에게 먹구름 같던 80년대는 지난 김영삼 정부때 전두환, 노태우가 내란수괴죄 등으로 수감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이 구속되는 날, 나는 젊은 날 머리속을 내내 감싸던 무거운 안개 같은 것이 걷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87년 6월의 ‘함성’이 그날에서야 비로소 결실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했다). 나는 그 이후의 한국 정치사에 대해서는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이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낙관이다(더 이상의 후퇴는 없을 거라는).

나는 우리의 삶에서 정치가 해줄 수 있는 몫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나머지 문제들, “여전히 남은 문제들”은 종교(=종교 없는 종교)와 예술/문학에 의해서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본다(데리다의 저작들 중 일부는 'Acts of Religion'과 'Acts of Literature'란 제목으로 묶였는데, 나의 모든 관심 또한 그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엊그제, 그러니까 지난해의 마지막날 저녁에 읽은 단편소설은 체홉의 <다락방이 있는 집>(1896)인데(‘운동’의 방식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차이가 이 단편의 이데올로기적 테마를 구성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화자(=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필요한 건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정신의 자유, 정신의 대학은 정치가 충족시켜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대학(교육)’을 유보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구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어떻게 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말할 수도 없다. 그건 또다른 ‘폭력’이다(인간에겐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내게 ‘언더그라운드’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80년대의 연속성’이란 무엇인가? <언더그라운드>에서 2차 대전이 계속 진행중이라고 믿고 있듯이, 군사파쇼 정권과 피억압 민중간의 대립구도의 연속성인가? 아니면, 다국적자본의 신자유주의와 전세계 노동계급간의 대립구도의 연속성? 어쨌거나 5공 때의 구호는 매번 반복되었다. “김영삼 정권 타도하자!” “김대중 정권 타도하자!” “노무현 정권 끝장내자!”(하지만, 그 구호들이 언제 실현됐던가? 메아리 없는 구호는 ‘구호를 위한 구호’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그러한 구호들에서 지속적인 것은 ‘타도하자/끝장내자’라는 ‘관성’이다. 영어로는 ‘overthrow’.

'Overthrow'는 타도/전복하다란 뜻도 되지만, 야구 용어로는 폭투(暴投), 그러니까 투수가 공을 너무 멀리 너무 높게 던지는 걸 말한다.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요구는 폭투처럼 콘트롤이 안되는 요구이다. ‘근본적인 변화’라는 건 아무도 정의/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와일드(wild)하며, ‘정의(正義)’를 닮았다(짓궂게도 5공의 집권여당은 ‘민주정의당’이었다. ‘80년대 청년들’과 집권여당의 지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치했던 것. ‘민주주의’와 ‘정의’!). 단, 그것이 ‘근본주의’에 붙들리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하지만, ‘폭투로서의 정의(Justice as a Overthrow)’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혹은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해야 한다.

 

 

 



정의로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요구하는 사람들이 왜 경멸 받는가? 그건 힘이 없기 때문이다. 김훈의 표현을 갖다 쓰자면, ‘물적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그런 이유로 김훈은 좌파를 ‘멸시’한다). 몽테뉴-파스칼의 통찰을 다시 반복하자면,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경멸)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데리다, <법의 힘>, 27쪽)

책임질 수 없는 구호들만을 남발하는 걸로 자신이 정의(=근본적인 변화)에 편에 서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그건 자신들이 ‘물적 토대’(=힘)를 갖고 있기에 곧 정의롭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오도된 것이다. 자신의 말(=구호)에 책임지고, 그 말에 ‘물적 토대’(=힘)를 부여함으로써, 말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때만이 정의는 반격/경멸을 받지 않게 된다. 거기에 비하면, “그 청년들이 ‘그 80년대에 데모 한번 안 해본 놈들’에게서까지 받는 그런 경멸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라고 따위의 질문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라는 질문만큼이나 부차적이며 한가하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그것이 정당(온당)해서가 아니다.



지난주에(*2005년초) 인터넷에는 지난해 10월에 사망한 철학자 데리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 50주년 기념연설(발체)문이 영역본과 함께 올라왔었는데(강연은 5월에 있었고, 강연문은 11월호에 게재됐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다음의 문단이었다. 나는 한 문단을 둘로 나누어서 영역과 국역을 같이 제시하겠다(국역은 신기섭님의 것을 약간 수정했다).

Caught between US hegemony and the rising power of China and Arab/Muslim theocracy, Europe has a unique responsibility. I am hardly thought of as a Eurocentric intellectual; these past 40 years, I have more often been accused of the opposite. But I do believe, without the slightest sense of European nationalism or much confidence in the European Union as we currently know it, that we must fight for what the word Europe means today. This includes our Enlightenment heritage, and also an awareness and regretful acceptance of the totalitarian, genocidal and colonialist crimes of the past. Europe’s heritage is irreplaceable and vital for the future of the world. We must fight to hold on to it. We should not allow Europe to be reduced to the status of a common market, or a common currency, or a neo-nationalist conglomerate, or a military power.

“미국의 헤게모니와 중국의 떠오르는 힘, 그리고 아랍/이슬람의 신권 정치 사이에 낀 유럽은 독특한 책임을 지고 있다. 나는 ‘유럽 중심적인’ 지식인이 아니며, 지난 40년 동안 정반대의 이유로 곤욕을 치러왔다. 하지만, 나는 한치의 유럽 국수주의도 갖지 않고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유럽연합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유럽’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를 위해서 우리가 싸워야만 한다고 확고하게 믿는다. 여기에는 계몽주의의 전통과 함께, 과거 전체주의의 범죄행위와 인종학살, 식민주의적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유감도 포함된다. 이러한 유럽의 전통은 대체될 수 없으며, 세계의 미래를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이걸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유럽이 그저 하나의 시장이나 하나의 통화체제, 혹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연합이나 통합된 군사력 등으로 축소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문단의 이러한 전반부가 연설의 핵심을 구성하지만, 내가 더 주목한 것은 이어지는 후반부의 유보조항이다: “Though, on that last point, I am tempted to agree with those who argue that the EU needs a common defence force and foreign policy. Such a force could help to support a transformed UN, based in Europe and given the means to enact its own resolutions without having to negotiate with vested interests, or with unilateralist opportunism from that technological, economic and military bully,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비록, ‘통합된 군사력’이라는 이 마지막 요점에서는 유럽연합이 공동의 방위력과 외교정책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동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말이다. 그러한 힘은 유엔이 기술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불량배 국가인 미국과 타협하지 않고, 미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가운데 유럽에 근거를 두고서 독자적으로 그 결의를 실행할 수 있는 기구로 탈바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나의 것인데, 강조된 것은, 그리고 데리다가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힘’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군사력(a military power)’. ‘불량배’(=미국)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유엔이 자신의 결의를 독자적으로 실행하는 걸 도와주기 위해서라도 유럽연합의 힘(군사력)은 불가불 요구된다고 이 ‘해체철학자’는 보는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어떤 발언이나 결의에 수행력을 덧붙여주는 ‘물적 토대’이다. 이러한 물적 토대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정의는 곧 반격 받으며,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철학자마저 이러할진대, 하물며 ‘운동가’가 세상 사람들의 경멸이나 탓하고 있다는 건 넌센스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은 80년대가 준 것이다.”에서 내가 읽는 것은 바로 그 넌센스이다...

06. 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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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이 번역본은 (당장) 출판을 염두에 둔 게 아니며, 아직 충분한 교열을 거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 번역본을 출력하고 옮기고 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공적인 매체에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합니다. 인용을 원하는 분은 사전에 이메일로 역자에게 허락을 얻기 바랍니다.

* 이 글은 후기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독해와 마주침의 유물론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및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론의 난점들을 넘어서려는 그의 시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해명하려는 한 가지 시도이다. 이런저런 점에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매우 집약적이고 풍부한 논점을 담고 있어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정세에서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는 데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특히 이런저런 명목으로 정치 이론 및 정치적 실천에서 주체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복권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이 글은 영어로 된 원고를 불어로 옮긴 글인데, 번역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불어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나 표현들이 여럿 눈에 띄고, 불어 문장을 그대로 따를 경우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역자가 임의로 약간의 첨삭과 교정을 한 곳이 두어 군데 있다. 나중에 영어 원고가 발표되면, 대조를 거쳐 교정할 생각이다. 꺾쇠들 중 하나는 원주이고, 다른 하나는 역자가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역자).  


Miguel Vatter, "Althusser et Machiavel: La politique apres la critique de Marx", Multudes 13, 2003.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비판 이후의 정치


  1977년 이후 알튀세르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하나의 "전회"를 실행한다. 이 시기의 유고들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위한 극히 풍부한 영감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두 가지 오류에 대한 논박을 보게 되는데, 이는 알튀세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뿌리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폄훼와 몰이해,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생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구성물에 대한 종속. 정치의 자율적이고 구성적인 차원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지평을 정의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로 복귀해야 할 필연성을 느끼고 있다. 역사에 대한 근대 철학의 압류(emprise) 및 역사적 주체에 대한 근대 철학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튀세르는 사건의 차원에 우선권을 주는 역사이론 및 역사적 생성의 모든 실체 및 주체를 비워내는 우연적 마주침의 이론을 소묘해볼 것을 제안한다. 정치의 필연성과 역사의 우연성은 "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를 재발견하기 위한 두 가지 선행조건이다.


    지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국가와 정치를 적합하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는 그것이 정치적 "상부구조"와 관련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경제적 "토대"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사회를 표상하는 결함이 있는 은유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이론은 역사적 생성을 적합하게 고려하지도 못했는데, 이는 결정론적 법칙들과 과정들에 따라 전개되는 것으로 역사를 간주하는 결함이 있는 전제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대표한다고 자부했던 사람들 쪽에서 실질적인 답변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매우 드문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77년 경 알튀세르의 사상은 예기지 못한 전회를 보여주는데, 이는 최근 그의 후기 저술들의 유고집 출간으로 해명되고 있다. 이 텍스트들에서 그는 이러한 비판들이 적절했음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파멸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는 점을 수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몰락 속에서도,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좌파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혁신적인 답변들을 소묘해보려고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 사회적 적대와 정치의 자율성

    1977-1978년 동안 알튀세르는 <자신의 한계들 안의 마르크스>[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pp.359-524]라는 텍스트를 쓰는데, 이 텍스트는 그가 여기서 앞서 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약점들을 이론의 "절대적 한계들"로, 스탈린주의의 공포와 유로코뮤니즘의 정치적 실패를 불러온 한계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두 가지 중심적인 해석적 테제는 알튀세르의 입장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의 관점을 넘어 전위시킨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에게 비판은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현실적인 것[실재, le reel]이다"라고 쓰면서, 공산주의가 "사물들의 실존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과 동일시되고 있는『독일 이데올로기』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현실적인 것"을 "계급들에 대한 계급투쟁의 우위"에 준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계급들"과 "계급투쟁"의 구분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이다. 계급 개념이 생산의 사회경제적 문법(마르크스주의 용어법으로 하면, 생산력, 생산수단, 노동분할[분업])에 의존하는 반면, 계급들 사이에서 생산되는 투쟁 개념은, 계급들에 선행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러한 문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투쟁이라는 개념을 생산관계의 문법과 연합시킨다. 항상 이미 정치적이고 착취의 사실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관계들은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며, 지배와 저항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들이 없이는 계급형성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그것 자체에 거슬러 받아들이면서 알튀세르는 필연적으로 적대를 어떤 종합 속에서 극복해야 한다는 일체의 주장과 독립해서 "계급투쟁의 우위"를 이해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적대는 계급투쟁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그 다음에는 계급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목적론적 "이행"의 관념(마르크스는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내는 1852년 3월 5일자 편지에서 이를 옹호하고 있다)과 완전히 독립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그 모든 변종들 속에서도 사회적 적대, 곧 어떠한 보충적이고 해결적인 종합 없이 사회적 관계들 전체를 관통하는 "현실 운동"으로서의 투쟁을 사고하지 못했다. 사회적 적대를 총체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이를 하나의 종합 안으로 해소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러한 전통과 단절한다. 사회적 적대는 영속적이며, "역사의 종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해석적 테제는 사회적 적대의 영속성에서 따라나온다. 정치, 국가 및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단지 생산의 사회적 조건들의 반영 내지는 표현으로서, 이러한 조건들이 변혁되자마자 제거되는 것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은 고유한 별도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 사회적 적대의 영속성은 정치적인 것의 영속성을 요구한다. "국가는 물론 낡지만 영속적이다 [...] 국가는 계급투쟁, 곧 착취가 폐지되는 게 아니라 보존되고 유지되고 강화됨에 따라 [...] 낡게 된다." 알튀세르의 판단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법적-정치적 장치와, 소위 그것의 "토대"("생산관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몰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상부구조"를 그 자체로 파악하지 못하며, 이는 그 이론의 "절대적 한계"를 나타낸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마르크스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소묘한 이 관계에 대한 표상을 따르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로부터 "성립된다."(erhebt)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이러한 성립의 순간, 이러한 관계를 결코 문제삼지 않았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상부구조의 "제도[화]" 및 "구성"은 결코 문제화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들 안의 마르크스>의 중요성은, 정치적인 것은 토대의 실존조건이어서 "계급투쟁"과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생산의 토대로부터 "성립"하거나 이 토대의 "반영물"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치적인 것의 이러한 분리된 실존은 사회적 적대의 보존, 곧 착취가 그 내부에서 생산되는 생산관계들의 재생산을 자신의 대상으로 지니고 있다. 정치적인 것을 특징짓는 것이 적대와의 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적대가 자신을 재생산하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적대는 정치적인 것의 제도[화]의 원인일 수 없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국가가 지배계급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서는 계급들 사이의 투쟁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테제를 사고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아마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을 결론, 곧 정치적인 것은 자기-제도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치적인 것은 투쟁의 효과이기는커녕 사실은 "계급투쟁에 영향받지 않고, 심지어 이 투쟁에 의해 "관철될"" 수도 없다.[앞의 책, p. 437]
    1977년의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관한 1970년 논문에서 제시된 정식과 관련하여 자신의 재생산 이론을 심화한다. 정치적인 것의 분리 없이는 "계급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분리되어-있음"이라는 점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생산관계들을 재생산하는 과제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 이제는 알튀세르의 테제가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비판받는 것은 이 이론이 어떤 의미에서 국가가 분리된 도구인지 또는 "기계"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에게 국가는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기계인 반면, 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적(이고 심지어 물질적인) 조건들의 재생산관계 하에서 국가를 파악하지 못한다."[같은 책, p. 457] 알튀세르의 테제는 정치적인 것이 생산의 적대적 관계들(여기서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에 의해 착취당한다)을 재생산하며, 역으로 이 적대적 관계들은 경제적 생산(곧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들 사이의 투쟁은 생산과 관련하여(사회적 노동분할, 계급들과 관련하여) 우위를 지니며, 역으로 정치적인 것은 재생산과 관련하여, 그리고 따라서 계급투쟁의 실존 그 자체와 관련하여 우위를 지닌다. 이 때문에 생산(관계들)의 조건들은 정치적 가능성의 조건, 이 관계들의 재생산의 정치적 원인을 갖는다. 알튀세르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주의 도식을 완전히 전복시키며, 이렇게 되면 폐허만이 남는다. 계급투쟁은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소여이기 이전에 정치의 사실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키아벨리: 공화주의적 자유의 회복

    유고로 출간된 {마키아벨리와 우리}(1972-1986)에서 알튀세르는 소위 경제적 "토대"와 관련하여 국가의 정치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국가와 정치에 관한 이론을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에 대해 마키아벨리로의 회귀는 무엇을 보태주는가? 우선 이는 화해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의 심연적인 "토대"로부터 출발하는, 무로부터의 정치적인 것의 자기-구성이라는 이론을 보태준다. 피렌체 서기장의 중심적인 질문이 정확히 말하면 지속 가능한 정치적 국가가 무로부터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마르크스는 결코 이 문제를 검토하지 않는다 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새로운 군주라는 오래된 그람시의 문제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독해에서 혁신적인 점은 그가 이 문제를『로마사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통해 해소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로 돌아간다. 알튀세르에게 공화국은 국가의 지속의 계기를 포함하며 구성적 권력의 재생산에 따라 질서지어져 있다. 반면 새로운 군주는 단지 국가의 시작의 계기만을 포함할 뿐이다. 마키아벨리를 통해 알튀세르는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의 공화적 형태 속에, 곧 군주적 형태가 아니라 법의 통치로서의 공화국 속에 담겨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이에 따라 알튀세르는 암묵적으로, 1971년의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관한 텍스트 속에도 여전히 현존하고 있는 계급의 "독재" 형태로서의 국가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념을 거부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독해를 통해 알튀세르는 재생산 문제에 대해 한 가지 보족적인 재귀성(반성성, reflexivite)의 차원을 추가한다. 곧 1971년에 일차적인 질문은 단지 생산의 재생산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마키아벨리에 관한 텍스트에서 일차적인 질문은 재생산 자체의 재생산이 된다. 새로운 군주와 공화국, 구성적 권력과 구성된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자기 자신에 의한 국가(재생산 권력으로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 및 따라서 그 지속이라는 문제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독해가 르포르의 혁신적인 마키아벨리 독해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한다. 르포르와 관련하여 그가 혁신적인 점은 "지속하는 국가"의 구성을 "무로부터의" 성립(emergence)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무"를, 정치적인 것(비르투)과 사회적인 것(포르투나)의 사건적이고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분절(표현, articule)하는데, 이는 가능한 일체의 역사철학 및 "역사의 법칙들"과 "역사적 필연성"에 관한 일체의 담론 바깥에 놓여 있다. 정치적인 것의 자기-구성을 사건과 우발성의 지평(그가 "정세적 결합"(conjonction)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고하면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두 가지 근본적인 이론적 한계, 곧 정치이론의 결여 및 역사의 형이상학에 대한 의존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찾으려고 한다. 알튀세르는 역사를 유물론적 사건이론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할 목적으로 마키아벨리로 되돌아가는데, 이 이론에서 사건들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 적대의 "현실 운동"의 "마주침" 내지는 "정세적 결합"으로 인식된다. 다만 이 적대는 더 이상, "최종 심급에서" 정치적 마주침의 방도(issue)를 규정하는, 구조적이거나 실체적인 과정(곧 생산의 존재론)으로 이루어진 "토대"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렇다. 반대로 사회적 적대는 "공백"으로, 정치적 마주침을 규정 불가능한 것으로, 따라서 자유로운 것으로 남겨두는 유일한 조건으로 이해된다.
    주요 논점은 이로부터 성립하는 정치적 형태들을 계급투쟁이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계급투쟁의 적대는 단지, 그 결과 여부가 완전히 열려 있는 어떤 마주침의 "불충분근거"[충분근거율 내지는 충족이유율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 역자]일 뿐이다. 알튀세르에게 사회적 적대가 "규정적" 이것의 인과적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적대 자체의 자기 동일성도, 존재론적 실재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키아벨리 독해에서 적대 자체가 소송의 대상, 갈등하는 관점들(perspectives)의 대상임을 의식하게 된다. "정치적 시점(point de vue)의 장소와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장소 사이에는, 정치적 시점의 "주체", 곧 인민과 정치적 실천의 "주체", 곧 군주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이원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원성, 이러한 환원 불가능성은 군주 인민 모두를 변용시킨다(affecte)."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그로부터 군주의 정치 전체를 정의하게 될 이 인민, 이 인민에 대해 어떤 것도 스스로를 인민으로 구성하도록, 또는 정치적 세력으로 생성되도록 강제하거나 심지어 제안하지도 않는다. ... 그리고 어떤 것도 마키아벨리가 어떻게든 이러한 분할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고 지시해 주지도 않는다. 역사는 인민의 관점에서 군주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인민은 아직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새로운 군주의 구성적 기획은 이러한 기획 바깥에 놓여 있고, 그 기획보다 훨씬 원초적인 어떤 관점에 따라 분석되고 평가된다. 곧 또다른 정치적 주체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합성과 순치(pacification) 이것이 어떤 정치적 형태를 띠든 간에 를 금지하는 사회적 적대에 대한 관점으로서 인민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여기서 장래의 마키아벨리 해석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그가 이룩한 중요한 진전은 "정치적 시점"과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 사이의 차이를 명료화했다는 데 있다. "정치적 시점"이 정치적 통치 형태들의 구성의 시점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인민의 관점은 정치 형태의 제도화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 어떤 정치의 원천이 된다. 이는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정치가 해야 할 게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인지에 관한 쇄신된 이해를 위해 지극히 의미심장한 직관적 통찰이다[Le pouvoir constituant, PUF, 1997에서 Negri의 마키아벨리 독해와 비교해보라. 네그리는 인민의 "정치적 시점"과 새로운 군주의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네그리는 인민을 새로운 군주로 이론화할 수 있는데, 이는 인민이 "민주주의"라 불리는 통치의 "절대적" 형태를 구성하도록 요구받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비르투(virt , 역량)가 사회적 적대의 "현실 운동"과 조우하게 되는, 사건의 근원적으로 우연적인 성격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구성적으로 관점주의적이다. "현실 운동"이 주어진 어떤 정치 형태 속에서 완전히 합성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적 사건 안에는 정치 형태의 구성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을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형태의 "해체"이며, 또한 모든 정치 형태의 성립에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임박한 방식으로 따라다니는(귀신들려 있는, hante) 갈등적 사건 속으로 [정치] 형태의 복귀이다[해체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Derrida, Spectres de Marx, Galilee, 1993; Marx & sons, PUF/Galilee, 2002 참조].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과 대립하는 "정치적 시점"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사건 속으로 이러한 형태의 복귀이다. 인민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힘"[세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인민이 정치적 기동력(ressort)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은 정치적인 것이 형태를 구성하는 실천으로 환원되거나 이러한 실천으로 소진된다는 생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는 이러한 전제를 반박한다. 마키아벨리가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인민은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에 따라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인민의 정치적 행위는 항상, 어떤 정치적인 또는 적법한 지배형태 안에서 인민의 [구체적인] 표현 가능성(figurabilite)을 초과하며, 일차적으로는 통치형태들을 구성하는 것으로서보다는 해체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국가의 해체에 관해 다루기 전에, 국가의 구성의 비밀은 무엇인가? 한 국가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구성된 재생산의 권력은, 말하자면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인민을 복속시켜야 하며, 인민이 자신의 "주체"로서, 자신의 "기원"으로서 기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로마 공화국에 대한 분석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마키아벨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 지속 가능한 국가의 정초, 시작인데, 이 국가는 일단 군주에 의해 정초되면 "혼합" 통치의 효과에 의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중심은 로마, [오랜 시간 동안] 지속했던 국가이다. 로마의 중심은 그 시작이다. 이 공화국의 시작은 군주정이었다는 데 있으며, 이 군주정은 이 국가를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적절한 어떤 통치[정부], 곧 혼합 통치를 로마에 덧붙였고, [이를 통해] 이러한 통치는 공화국의 관점에서 추구되었다."[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 p, p. 96] 국가의 지속은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한 국가의 구성에서 두 가지 계기. 1) 절대적 시작의 계기가 존재하는데, 이는 단 하나, "단 하나의 개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계기는 그 자체로는 불안정하다 [...] 2) 두 번째 계기는 지속의 계기인데, 이는 법률의 부여(donation, 제정) 및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이중적 작용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같은 책, p. 115] 이 두 번째 계기에서 국가는 군대, 동의(곧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에 의한 통치 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인민 속에 "뿌리내린다." 로마사에서 공화국의 계기는, 단지 자기 자신을 국가를 "보존하는" 권력으로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절대적인" 구성적 시작으로 주어지는(se donne, 스스로를 제시하는) 재생산의 계기에 상응한다.
    알튀세르는 국가 이것 자체가 생산관계들의 재생산 형태이다 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해명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모델로서 로마 공화국 헌정[구성]의 발전에 대한 이러한 독해에 의지하고 있다. 로마 헌정의 발전은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재생산 형태로서의 국가)의 이데올로기(재생산)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이는 로마인들이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헌정을 발전시키면서 제도화했던 정치적 권위를 산출하는 체계와 다르지 않다. 국가의 권위(auctoritas)는, 정초자가 형태를 부여하고(agere) 다수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유지하는(gerere) 관계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가 설명하듯이, "국가의 건국에는 단지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를 많은 사람들이 보살피게 될 때, 즉 그 유지가 많은 사람들의 책임에 내맡겨지게 될 때, 그것은 실로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로마사론』1권 9장; 강정인·안선재 옮김,『로마사론』한길사, 2003, 109쪽]. 정치 형태는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를 뒷받침하려는 태세가 되어 있는 한에서만 지속할 수 있다. 이러한 뒷받침은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최초의 시작, 정초와 단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결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오히려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초를 완수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통치자에서 시민들로 전달되고 대의 정치 기구(본질적으로는 입법 의회) 안에 제도화되는 이러한 요청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호명이라고 부른 것에 밀접하게 상응한다. 호명의 기능은 인민을 정치적 기체(基體, subjectum), 국가를 구성하는 토대로 만드는 데 있으며, 역으로 이러한 토대는 국가가 실행하는 예속과 지배에 대해 지속과 적법성을 부여함으로써 국가를 정초한다. 
    로마 공화국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독해에서 알튀세르는 이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결정적인 직관에 대한 확증을 발견한다. 이 직관은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국가가 자기 자신의 정초, 지속 내지는 재생산을 위해 인민이 탁월한 정치적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곧 인민이 구성 권력이 되고 이를 통해 통치의 토대로 제공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이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절대적 한계들" 너머로 나아가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속 가능한 국가의 토대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국가는 자신의 토양 내지는 자신의 토대를 자기 바깥에서, 예컨대 특수한 경제적 이해관계들에서 발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 공화국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의적이고 입헌적인 민주주의 형태 안에서 발견한다. 대의·입헌 민주주의는 국가가 자신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소명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 형태이다. 이는 구성된 권력이 자기 자신을 구성 권력으로, 곧 국가의 주체로서의 인민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해주는 형태이며, 역으로 이 후자는 국가 자신이 가장 오래 지속되도록, 가장 효과적으로 재생산되도록 보증해준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재생산 이론이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담론에서 자신의 확증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의 마키아벨리 독해는 환원적이어서, 정치적 지배의 비밀들에 대한 이해가 아닌 정치적 자유의 가능성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담론적 함의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결여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유일한 통치 형태, 곧 국가가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 형태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인민의 시점을 군주의 시점에 종속시킨다. 잘 정초되고 지속할 수 있는 정치 형태를 지향하는 것은 오직 군주일 뿐, 인민도 그런 것은 아니다. 인민의 관점은 국가의 주체-기체(sujet-subjectum)의 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로마의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는 이전 및 이후의 모든 정치 사상과 관련하여『로마사론』의 진귀함은, 시민의 삶(vivere civile)은 정치가 잘 정초된 법의 통치라는 이상 이는 로마식의 권위 체계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을 초월하고 전복하는 한에서만 자유로운 삶(vivere libero)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로마사론』3권에서 등장하고 줄곧 옹호되고 있는데,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이 시초로의 회귀(riduzione verso il principio)라고 부르는 것을 경유함으로써만 정치체는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옹호하고 있다. 내용 및 형태에서 "시초로의 회귀"는 혁명을 의미한다. 여기서 회귀하는 시초는 권위의 시초, 정초의 절대적 시작과 동일한 "시초"이며, 이러한 회귀는 권위로부터 역사적 생성에 어떤 정치적 형태를 각인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역사적 생성의 근원적 우연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이러한 근원적 우연성을 모든 정치 형태의 사건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모든 정치 형태가 그로부터 성립해야 하고, 또 어떤 주어진 정치 형태가 확립한 특권 내지는 불평등이 이 정치 형태 아래서 번영을 누리고 이 정치 형태의 특혜를 받는 사람들을 타락시킬 때마다 모든 정치 형태가 거기로 회귀할 수 있는, 권리평등(isonomy)의 시공간으로 재정의한다. 타락은 불평등의 소외인데, 이는 모든 주어진 지배의 정치 형태가 고착되고 존속됨에 따라 생산된다. 이 때문에 공적 공간의 평등 및 자유로의 회-귀(re-duction)는 "시초로 회귀하는", 곧 정치 형태를 혁-명(re-volutionne)하고 정치체 내의 타락과정에 저항하는 사건 속에서만 생산될 수 있다.

사건들의 유물론을 향하여

    자신의 마지막 혁신적인 철학 텍스트인 <마주침의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1982)에서 알튀세르는, 하이데거, 푸코, 들뢰즈 및 데리다 같이 그보다 먼저 이 오솔길을 밟아간 일련의 철학자들에 강하게 준거하면서, 명시적으로 형태 및 사실에 대한 사건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또한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는 "사건들의 유물론"이라 불리기도 한다)은 사건들로부터 출발하여 형태들의 세계의 성립을 사고하려는 시도이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정세적 결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는, 사건적인 마주침들로부터 출발하여 형태들의 세계의 구성 및 원자들의 결집을 설명하는 원자들의 클리나멘(clinamen) 또는 편향(deviation)에 관한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의 학설에 준거함으로써, 좀더 적합하게 마주침이라고 지시된다. "세계는 완성된 사실(기성 사실, fait accompli), 일단 사실이 완성된 후에 그 속에서 근거[이성], 의미, 필연성 및 목적의 군림이 시작되는 완성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의 이 완성은 우연의 순수한 효과일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클리나멘의 편향에 기인하는 원자들의 우발적 마주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실의 완성 이전에는, 세계 이전에는 사실의 미완성만이, 원자들의 비현실적 실존에 불과한 비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알튀세르,『철학과 맑스주의』서관모·백승욱 옮김, 새길, 1996, 39-40쪽] 어떤 것도 원자들의 마주침에 선행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이러한 마주침을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의 완성"의 "구성적" 차원 그 자체가 하나의 우연적 사건이며, 이러한 차원은 알튀세르가 "사실의 미완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결코 규정될 수 없다. 정치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사실의 완성에서 완성된 사실로의 이행이 군주 또는 국가의 활동을 기술한다면, 이러한 이행의 우연적 성격, "완성" 자체가 지닌 사건적 성격 이는 완성이, 자신의 가능한 실현 여부에 대해 무-차별적으로(in-differente) 남아 있는 역량으로서의 "미완성"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은 인민의 해-체적(탈-구성적, de-constructive) 활동에 상응한다. 이러한 해-체적 활동에서 인민은 더 이상 국가의 정치적 주체로, 국가에 의해 정립된 구성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으며, 오히려 통치되지 않으려고 하는 정치적 행위자로 간주된다.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처럼 이 텍스트에서도 군주의 비르투는 마주침을 "지속"시키는 권력으로 정의된다. 군주는 "마주침의 효과들에 형태를 부여하는 형태들"에 상응한다. 군주는 "우연적인 것들의 마주침의 필연-화(필연적-생성, devenir-necessaire)"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이전의 마키아벨리 독해와 달리 여기서는 "필연의 우연에 대한 종속"을 사고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함축하고 있다. 곧 "결코 어떤 것도 완성된 사실의 실재성그 영구성의 보증이 될 것이라고 보증하지 못한다. (...) 역사는 (...) 완성해야 할 또 다른 판독 불가능한 사실에 의한 완성된 사실의 영속적인 폐지이며,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이 폐지라는 사건이 일어나는지 결코 미리 알지 못한다. 다만, 패를 다시 분배하고 주사위를 빈 탁자 위에 다시 던져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철학과 맑스주의』, 46-47쪽] 지속하는 국가는 항상 이미 자신의 "폐지"의 내재적이고 임박한 가능성 내부에 기입되어 있다. "시초로의 복귀"가 단지 완성된 사실을 사실의 완성을 구성하는 권력으로 되돌려보낼 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으로는 완성 자체가 자신의 사건 및 자신의 비 사건에 대해 완전히 무차별적으로 남아 있게 만들 때, 그 때가 바로 "폐지"의 순간이다. 이러한 무차별성은 완성의 문법의 견지에서는 판독 불가능한 "또 다른 사실"에 상응할 것이다.
    알튀세르는 결코, 완성된 사실을 폐지하는 역량으로 이해된 인민의 역량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량은 새로운 구성적 활동의 전제일 뿐 아니라, 좀더 원초적으로는 인민 편에서 보여주는 주권적 무차별성[무관심]의 표현이며, 따라서 국가 및 정치 정당 체계가 부과하는 통치의 기획에 대한 정치적 시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민의 역량이라는 관념과 관련하여 "통치에 대한 주권적 무-차별성"이라는 표현에 의지하여 나는, 소위 구성적이라고 하는 인민의 입장의 세 가지 특징을 부각시켜 보려고 한다. 첫째, 인민은 국가의 정초 기획에 대한 자신의 차이를 주장하는 한에서만 역량을 지닐 뿐이다. 그의 무-차별성은 이러한 차이 "내"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데 있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국가의 정초와 동일시하는 모든 전통적인 "공화주의" 기획을 좌초하게 만든다). 그 다음으로 비통치의 행위자로서 인민은 국가 및 그것의 통치 기획에 의해 정식화될 수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으며, 그의 "무-차별성"은 통치 가능성의 결과들에 대한 근원적 비-이해관계[무-관심]에 준거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문제가 되는 결과들에 대한 진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국가를 판정할 수 있으려면 인민은 국가 및 정치 체계가 적법성을 획득하기 위해 재합성해야 하는, 특수한 이해관계의 저장소로 기능해서는 안된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시민사회와 동일시하는 모든 "다원주의적" 시도를 좌초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인민의 주권적 무차별성은 의회의 호명에 대한 그들의 무반응(impassibilite)에 준거한다. 인민은 역량을 지니고 있을 때 정치적으로 대표되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국가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정치적 인정의 형태는 인민들의 예속적 주체화(sujetion)를 획득하는 주요 방식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선거 민주주의에 의해 구성된 공적 공간[공론장]과 동일시하는 모든 "자유주의적"인 시도를 좌초하게 만든다).
    혁명적 사건에서 인민은 더 이상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가 욕망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국가에 의해 통치의 기획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 통치되지 않으려는 욕망은 국가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며, 이러한 욕망이야말로 인민의 역량을 국가가 다루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민이 통치되지 않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때마다 재생산 과정은 정지의 고통을 겪고 국가의 기계는 중단된다.
    이러한 호명에 대한 위반들(manquements), 국가-기계의 갑작스런 중단들을 해명할 수 있는 인민의 역량이라는 관념은 이제 겨우 몇몇 사람들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크 데리다와 자크 랑시에르가 최근 개진했던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들은 특히 풍부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이 과거에 알튀세르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그렇다]. 이러한 인민의 역량이 마르크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곧 국가의 궁극적인 파괴를 목표로 하는 국가 권력의 획득) 정식이나, "인민을 위한 인민의 통치"라는 참여 민주주의적 정식으로 파악될 수 없음이 이미 분명히 드러난다. 이 두 가지 정식은 헤게모니 투쟁의 형태, 곧 통치를 위한 투쟁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는 반면, 우리가 방금 호소했던 것은 정확히 말하면 가능한 한 엄밀하게, 통치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투쟁 이는 결코 명령하지 않는다 을 헤게모니의 세력과 정치적 실천들에 의한 이 투쟁의 "복속"으로부터 구분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인민이 역량을 지니고 있다면, 구성된 권력이 사회적 적대와 정치 형태의 분리를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이러한 분리를 항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의 형태 아래 제어하며, 이를 명령의 대상이 되는 주체에 대한 투쟁이다. 하지만 "현실 운동"으로서 적대는 그 자체로는 헤게모니적이지 않으며, 헤게모니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구성된 모든 정치 형태와 관련하여 이러한 적대가 지니고 있는 무차별적이고 근원적으로 비정초적 성격은 재생산적이고 해체적이며 정초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적인 것의 두 가지 계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 계기의 상호 작용이 없다면 정치적 자유는 인식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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