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정치화되지 않기 위한 주체의 이론적 전략

(출처: 담비 www.dambee.net )

 

 

▲ 뒤늦은 국내 상륙을 앞두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의 주저인 '미학의 정치' 등이 도서출판 울력을 비롯한 몇몇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지난 1980년대에,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팀 일원이었다가 알튀세르와 틀어져서 다른 길을 걸어간 이로만 알려진, 아니 그 이후 15~16년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왔던 철학자다.

랑시에르의 한국 상륙은 "왜 그런 중요한 사람이 번역되지 않는지 정말 이상하다"라는 어느 소장 철학자의 말마따나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프랑스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뒤를 이어 지성계를 주름잡은 비판철학자 4인방 가운데 에티엔 발리바르는 윤소영 한신대 교수가 지난 80~90년대에 이미 소개해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같은 네오 맑시스트와 '따로 또 같이' 진격하면서 맑스주의가 90년대 후반까지 그 담론적 생명을 이어가는 데 골몰했고, 그의 동료인 랑시에르에겐 너무 무관심했다. 아니, 발리바르가 랑시에르를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한국 학자들의 무관심이 더 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2명인 알랭 바디우와  E. 라클라우가 최근 들어서야 한국에 소개되고 있어 이들과 함께 랑시에르의 책들도 본격 조명될 조짐이다. 알랭 바디우의 책들은 현재 새물결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라클라우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통해 대중들과 얼굴을 '쎄게' 익혔으니, 아마 곧 주저가 소개돼 대학원생들이 손때를 어지간히 묻힐 것으로 예상된다.

랑시에르의 책이 서점에 깔리기 전에 왜 지금 이 시점에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 시작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매우 극단적인 주체성의 이론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랑시에르는 현대사회가 선전하는 '자유', '평등' 같은 가치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괘씸죄'를 건다. '배제된 목소리'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이기도 하며, 랑시에르의 표현대로라면 사회라는 건축물 속에 그 자신의 '공간'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쉬운 예를 들면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거기 해당하며, 일본의 불가촉천민으로 여겨지는 '부라쿠민(部落民)'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주의 체제이든 뭐든 간에 이들을 계산에 넣지 않고 호혜와 평등을 주창해왔다는 것이 랑시에르가 벌인 폭로전의 전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랑시에르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해설을 몇차례나 썼다. 특히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 b, 2005)에서는 아주 길게 랑시에르의 비판이론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어 맛보기로서는 안성맞춤이다. 왜 지젝 얘기를 꺼내는가 하면 이런 랑시에르의 핵심주장은 얼핏 접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고 '극단적'인 주장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고대 그리스의 예를 들며, 귀족정과 과두정이 상류층 체제라고 비판하며 스스로의 몫을 요구한 데모스 집단을 강조할 때는 "뭐지?, 원시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젝은 랑시에르가 결코 앞뒤 재지 않는 원칙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랑시에르의 주장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서 풀뿌리 연대를 강조하는 요즘의 진보주의자들과 기본 멘탈리티는 동일하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렌즈를 국가 내부의 국부적인 현실에 맞출 때가 많기 때문에 훨씬 검증해보기 쉬운 쪽에 속한다.

최근 한국에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화재가 발생해 3층에 머물던 외국인들이 대량 참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관리가 허술했다, 직원들 근무가 엉망이었다는 후속보도가 나오고, 이들 이주노동자들에게 보호한답시고 수갑을 채우고, 문을 밖에서 잠궈놓았던 정황이 알려지면서 성토여론이 일고 있다.

랑시에르는 바로 이런 존재들, 수갑에 묶여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체제를 합리화해온 것이 오늘날의 정치철학이라는 것을 탁월하게 이론화했다. 또한 이들 정치철학들은 랑시에르 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데,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원정치(arche-politics), 초정치(para-politics),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 극정치(ultra-politics)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중 극정치의 예만 들어본다면, 이들은 정치의 직접적 군국화를 통해 정치를 부정한다. 이들이 부정하는 정치는 물론 '사회에 자신의 몫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투쟁으로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정치'를 말한다. 투쟁을 더 큰 투쟁으로 말소시키는 전략인데, 오늘날 급진적 우파가 계급 투쟁보다는 계급(또는 성)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는 어떤 은폐를 가하는가. 지젝은 이 대목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을 빌려온다. 제임슨은 맑스주의가 때로 인간 행위를 실용성의 극대화로서 보편적으로 모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 판본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는데, 양자 모두가 고유한 정치적 사고의 필요성을 없애버리는 것은 똑같다는 지적이다. 그에 비해 랑시에르는 '언어의 모호성' 같은 문학이론을 철학적 사유 속에 도입하면서까지 정치라는 것의 미묘한 운동성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쉬운말로 정리하자면, 소수자들의 정치적 발언은 이러한 네가지 형태의 '부정'에 의해 정치적 시민권을 갖지 못한채 주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이 밀려만 나겠는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의 프랑스혁명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듯, 막히면 터지게 마련이다. 물론 랑시에르에 따른다면 터진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로가 다양해졌고 사회의 기득권 섹트들이 수없이 쪼개져있는 현 상황에서는 다른 식의 정치적 투쟁이 가능하다는 점을 랑시에르의 이론은 환기시켜주는 듯하다.

경제적 성장을 이룬 중산층의 나태한 무의식을 겨냥한 랑시에르의 이론이 한국땅에서 얼마나 생산적으로 음미되고 변형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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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논문은 아니고,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 또는 하버마스 이후 세대의 철학자들 중에서 국내에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은 철학자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시간이 더 있고 지면의 여유가 좀더 있었다면 한 2-3명의 정치철학자들을 더 보태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의 철학자 3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을 마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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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 -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20세기 유럽 정치철학의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주의 역사였다면, 21세기 벽두의 유럽 정치철학은 역사적인 종언을 고한 마르크스주의 이후에 어떻게 지배에 맞서 저항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의 변혁을 사고할 것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상이한 응답의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유럽정치철학은 근본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펴볼 3명의 정치철학자들 중 누구도 더 이상 잉여가치의 착취 메커니즘을 정치적 지배의 핵심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노동자 계급이라는 정치적 주체에 근거를 둔 정치적 변혁과 대안 사회의 구성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들은 모두, 근대 정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문제들이나 마르크스주의 자신을 포함한 근대 정치 문명 전체에 함축된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근대 정치 구조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결과라는 고발로 제시되거나(조르지오 아감벤), 정치란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급진적인 선언으로 표현되기도 하며(자크 랑시에르), 또는 모든 정치 투쟁, 모든 권리에 대한 옹호 투쟁은 인정을 둘러싼 갈등과 다르지 않다는 규범적인 원리의 정초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악셀 호네트).  

 

  따라서 이들의 이론적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비판적 사회이론이 가능한지, 또 지배자들의 질서에 맞서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여부를 평가해보기 위한 좋은 시금석을 제공해준다. 현실의 가장 민감한 지점, 가장 깊고 예민한 상처를 진단하고 그 뿌리를 드러내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정치철학이 단지 철학의 한 하위분과에 그치지 않고, 철학과 현실의 마주침, 철학과 현실의 상호침투가 발생하는 자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바탕이라면, 이들의 작업은 오늘날 정치철학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매우 드문 성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지오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의 묵시록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1941~)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나 안토니오 네그리와 더불어 이탈리아가 배출한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정치철학자로서 아감벤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호모 사케르Homo Sacer󰡕(1995)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관한 하이데거의 관점과 발터 벤야민의 종말론적인 폭력의 비판을 밑바탕에 두고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 푸코의 생명권력론, 칼 슈미트의 주권 개념 등을 비판적으로 전유하여 정치 공동체의 구조와 정치적 주체의 본성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주장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서양 근대정치철학의 규범적 기초 전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호모 사케르󰡕의 핵심 테제는 아감벤 자신이 요약하고 있듯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배제ban(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이 구분되지 않는 지대로서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다.

2) 주권의 근본 활동은, 원초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zoē와 bios의 접합의 임계(臨界)로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생산에 있다.

3) 서구의 근본적인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은 도시가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있다.

 

  이 세 가지 테제는 이 책 1, 2, 3부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벌거벗은 생명”이란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사용한 “blosses Leben”이라는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아감벤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정치학의 논의와 직접 결부시켜 서양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근본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한편으로 “비오스bios”와 “조에zoē”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법인데, 전자는 인간에 고유한 생명/삶을 가리키고, 후자는 인간, 동물, 신에게 고유한 자연적 생명/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비오스에 놓여 있다는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on hē on”를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1 철학으로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여기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바로 “순수 존재”, 곧 “온 하플로스on haplōs”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삶/생명zoē을 추출해내려는 노력과 “순수 존재”를 분리하려는 노력, 곧 정치학과 형이상학 사이에는 체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의 최초의 법적 유래를, 고대 로마법에 나오는 “homo sacer”라는 표현에서 찾는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희생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sacer”가 종교적 의미에서 “성스러운”을 가리키지 않음을 의미하고(신의 법에서 배제), 그를 죽이는 게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호모 사케르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으며(인간의 법에서 제외), 그의 삶은 “비오스”가 아니라 “조에”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감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 비로소 이 “조에”, 호모 사케르가 법적ㆍ정치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 권력의 문제설정과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을 결합하여 󰡔인권선언󰡕(1789)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이 제 1조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할 때의 “인간”은 인간주의적인 전통이 해석해온 것처럼 천부인권의 담지자가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을 가리킨다. 곧 󰡔인권선언󰡕은 아무런 특질도 지니지 않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벌거벗은 생명체가 정치의 대상이 되었음을 공표한 선언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민들이 누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들은 우선 그들 각자가 인간=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주권자의 통치의 대상으로 포섭된 이후에 얻게 되는 특질들의 표현에 불과하다. 푸코가 말하듯 생명권력이 근대성의 문턱을 이룬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아감벤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수행한 “민족국가의 위기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여기에 결부시킨다. 아렌트는 1차 대전 이후에 특히 유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민족국가의 위기는 동시에 인권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국가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이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시시각각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주의적 전통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 개념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선행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인간은 주권적 권력에 포섭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아감벤에게 󰡔인권선언󰡕은 근대 정치철학의 규범주의적 해석과는 정반대로 주권자의 생명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예속의 선언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아감벤은 나치즘이 근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돌연변이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잠재력의 표출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되는데, 그는 주권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슈미트의 테제, 곧 “주권자는 법질서 바깥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이 질서에 속해 있는데, 왜냐하면 헌정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테제를 준거로 삼고 있다. 그가 이처럼 슈미트의 테제에 주목하는 것은 이 테제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생명정치의 핵심을 매우 정확히 드러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우선 나치 강제수용소의 법적 지위의 특이성에 주목하는데, 강제수용소는 나치 시대에 처음 설치된 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사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단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강제수용소의 설치 및 운용에 관한 사항,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주권자가 국민들의 기본권을 잠정 중단시키고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사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나치 수용소의 경우는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가운데 강제수용소를 설치, 운용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는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로운 점이다. 우선 첫째, 이처럼 명시적인 규정 없이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예외상태에 돌입함으로써,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하게 된다. 바이마르 헌법이 규정하는 예외상태는 정확히 헌법이라는 정상적인 법적 규범에 따라 자신의 효력을 얻게 되는 반면, 나치 법에서는 법적 규범에 대한 준거가 없이 예외상태가 성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에 따라 예외상태는 실질적으로 법질서 자체가 되는데, 이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총통)의 결정에 따라 직접 성립하기 때문에, 이제는 단지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법과 사실 사이의 구분도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아감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치의 특이성, “예외성”은 사실은 전혀 예외가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성립 이래 존재해온 잠재적 경향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조에”와 “하플로스” 사이의 내적 연관성과 고대 로마법에서 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고 있는데, 나치가 정상화된 예외상태 속에서 설립한 강제수용소는 이를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주권자(총통)의 권력은 기본권-인권의 “금지”와 이질적인 존재들의 “추방”의 권력이며, 이를 통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일체의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한낱 몸뚱아리로 환원되어, 그를 살해한다고 해서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가 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란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대상으로 출현하는 장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이제 수용소는 나치의 유대인수용소나 소련의 정치범수용소 같은 것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훨씬 보편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 된다. 예컨대 아감벤은 프랑스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난민 신청자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장소 역시 일종의 수용소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법적 기관에 넘겨지기 전까지 이 사람들은 “예외상태” 속에서 어떤 법적 지위나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 전에 참사를 빚은 여수의 외국인보호소 역시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말하는 수용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의 작업은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적 토대인 인권의 원리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자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혁신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의 정치철학은 그가 원용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들은 제쳐둔다 하더라도,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기초의 여지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가령 그는 법과 폭력을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고,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와 현대의 서구 자유주의를 본질적으로 등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나치의 강제수용소와 현대의 난민 보호소 등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과연 어떠한 정치적 행동이 가능할까, 또 어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악셀 호네트와 인정 투쟁


  아감벤이 근대성(또는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면, 독일 비판이론의 제 3세대 대표자로 불리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1949~)의 “인정투쟁Kamp um Anerkennung” 이론은 반대로 근대성이 이룩한 핵심적인 성과, 곧 계몽주의 이래 서양 사회가 이룩한 합리적ㆍ도덕적 진보에 대한 긍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가 제안한 이론적 전회, 다시 말해 주체 중심적인 철학에서 상호주관성 철학으로의 전회에서 출발한다. 곧 이들에게 주체는 타인들과의 관계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형성되며, 주체가 지닌 언어적ㆍ실천적ㆍ반성적 자율성은 상호주관적 규준들을 내면화함으로써 형성된 산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네트는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성이 지나치게 보편적 화용론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다른 종류의 규범적 토대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곧 주체들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는 언어적 소통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관계 및 구체적인 욕구들을 포함하는 주체들의 정체성의 실현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버마스의 이론에는 이러한 차원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하버마스는 구체적인 사회적 투쟁들 속에 담겨 있는 규범적 쟁점들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하버마스 이론의 이러한 난점 내지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1990년대 이래 호네트는 헤겔 철학에서 유래한 인정투쟁 이론을 발전시켜왔으며, 이는 그가 하버마스의 이론적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철학자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호네트의 출발점은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데서나 사회가 성립하는 데서 주체들 사이의 상호 인정 관계가 핵심적이라는 데 있다. 곧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자기 긍정은 이 개인에 대한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또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ㆍ발전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그는 인정의 세 가지 차원을 구별한다. 곧 한편으로는 엄마와 아이나 연인들 간의 사랑과 상호배려에서 표현되는 정서적 차원의 인정의 관계가 있고,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른 성원들을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인정하고 배려하는 법적 인정의 관계가 존재하며, 분업적으로 조직된 사회 단체 내부에서 동료들에 의한 사회적 평판이라는 인정 관계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인정은 각각의 개인들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주체들의 정체성 형성에는 역시 독립된 주체로서의 타인들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는 또한 상호주관적인 사회화의 조건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정관계의 정치적ㆍ사회적 함의는 어떤 것인가? 호네트가 주목하는 것은 인정의 반대, 곧 무시의 경험이다. 인정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 및 사회적 유대관계의 형성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역으로 개인이 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그 개인의 정체성 및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만큼 또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무시가 특수한 한 개인에 대해 우발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에 대해 구조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이는 곧바로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가령 식민지 주민들이 정복자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나, 소수 인종, 소수 종족들이 한 사회의 지배 인종, 종족들에게 멸시받고 차별받는 것, 또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조선족이나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멸시와 차별대우, 따돌림 등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할 때 인정투쟁은 정치적 투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에 맞서 저항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합당한 규범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해줄 수 있으며, 역으로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도 제시해줄 수 있다. 각각의 사회 성원들이 억압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 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사회 또는 특정한 집단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다른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사회는 병리적이고 부당한 사회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가령 영미권에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나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등이 발전시킨 “인정의 정치학”보다 좀더 규범적이고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이론은 1980년대 다문화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의 맥락에 따라 전개된 인정의 정치학과 달리 적절한 인정을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며, 따라서 이는 초역사적ㆍ초문화적인 규범적 기초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의 화용론 중심의 상호주관성 모델을 인간학적으로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피지배자들의 부정적 경험을 자신의 비판이론의 원천으로 삼으면서 비판이론이 지닌 해방론적 함축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방론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호네트 자신은 인정투쟁 이론이 지닌 정치철학적 측면들을 발전시키지 않은 채, 인정투쟁 이론의 규범적인 측면을 좀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호네트의 작업에서는 인정투쟁 이론이 사회구조 또는 사회제도들의 형성과 개조, 변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이 비판이론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ㆍ사회적 차원에 대한 논의를 보완ㆍ확장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호네트는, 스승인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어두운 측면, 곧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절한 이론적 해명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얼마간 맹목적이다. 한나 아렌트 이래 또는 비판이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아도르노 이래 현대 철학자들 중 상당수가 근대성에 내재한 도착성의 뿌리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정투쟁 이론이 정치철학으로서의 이론적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 점은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와 평등의 원리로서 정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철학계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1940~)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스승인 알튀세르에 대한 지적 반역을 감행한 인물로 기억되어 왔다. 1965년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저술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에 공저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1974년 󰡔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이라는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독립선언”을 했던 만큼 이러한 평판은 얼마간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1980년대부터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1987), 󰡔불화La mésentente󰡕(1995) 같은 독창적인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알튀세르의 그늘에서 벗어나 곧바로 현대 철학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하나의 근본적인 통찰, 곧 정치는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통찰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정치la politique”와 “치안/통치la police”를 구별하면서 출발한다. 치안/통치는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를 가리키며, 따라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식인 내지 철학자와 대중 사이의 근원적인 불평등을 가정한다. 반면 정치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며, 누구나 다 동등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심지어 지적인 능력에서도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철학은 한 사회의 구조와 성립 근거를 밝히고 그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원리를 해명하는 것, “치안/통치”를 확립하는 것, 곧 위계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정치철학”이란 용어모순이며,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와 “치안/통치”,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와 근원적인 불평등의 질서 중에서 우선하는 것은 바로 정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불평등을 가정하는 “치안/통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를 지배자로서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지배자와 근원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근원적인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를 자신의 존립의 기초로 삼고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잘못/왜곡tort”이라는 중의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인 이유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치안/통치”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별이 근원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평등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또한 “왜곡”되고 “뒤틀린”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공동체의 성원들은 모두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동등성 때문에 비로소 “치안/통치”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치안/통치”의 질서는 사회 성원들에게 자원과 권한을 불균등하게 배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치안/통치”의 질서에 대해 저항하는 것, 이를 전복시키거나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제 3의 용어, 곧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통치”가 조우하는 장소, 곧 “치안/통치”의 잘못과 왜곡이 드러나는 장소를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은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러한 질서 속에서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면서 저항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치안/통치”의 균형잡힌 질서를 뒤틀고 균열을 낼 때, 그것의 잘못을 보여줄 때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고정된 불변의 장소,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등장할 때마다, “치안/통치”의 도덕적 잘못을 드러내고 이로써 그 존재론적 질서의 왜곡을 보여줄 때마다 형성된다. 아니 그러한 보여줌의 사건 자체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주체” 역시 어떤 객관적인 속성에 따라 (예컨대 노동자 계급인지 여부)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아테네의 자유 빈민들(“데모이demoï”)이 민주주의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나섰을 때 그들이 곧 정치적 주체였으며, 또 1871년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 1968년에 학생-노동자들이 “우리 모두는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라고 외치며 거리에 나섰을 때, 그들 역시 정치적 주체들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주체란 어떤 존재론적 규정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 따라 규정된 존재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정치적 투쟁이 전개될 때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주체화”를 “탈정체화”, “탈분류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볼 때 그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랑시에르는 의회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를 “탈민주주의post-démocratie”라고 부른다. 곧 “치안-통치”의 “잘못/왜곡”을 드러내줄 수 있는 여지가 대부분 사라지고 정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집단들의 산술적 합의(“선거”)로 환원되는 곳, 전문가들과 정책입안자들이 통치하는 곳이 바로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자유민주주의(또는 근대성) 일체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감벤이나 알랭 바디우와 달리 랑시에르는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긍정적인 함의들을 인정하는데, 이는 이 제도들이 바로 과거 정치적 주체들의 투쟁의 산물이며, 그러한 투쟁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제도들 덕분에 이전에 일어났던 정치적 투쟁의 사건, 민주주의의 사건은 언젠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한 제도, 어떤 특정한 정치유형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정치 제도 속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규범적 원리로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지닌 강점은 바로 이처럼 혁명적 전통의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규범적 측면을 함께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에 정치를 사회적 질서와 대립시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에 관한 사고를 실재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와 근본적으로 절연시키고 있는 것은 랑시에르의 철학이 지닌 중대한 문제점 중 하나다. 게다가 이는 민주주의적 제도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도 얼마간 모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제도들에 대한 객관적 규정의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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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yoonta >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체? (박노자)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체?

- 1917년 이전의 러시아 – 국가의 폭력 기구가 비대화되고, “위로부터”의 국가 지휘 하의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시작한 매우 “전통적인” 사회 – 약 80%의 수출은 농산물이었음. 농촌에서 – 약 3만 호구의 대지주 (주로 귀족)들은 약 7천만 데샤티나, 즉 천만 농민 가구들이 소유한 면적만큼이나 소유하는 등 농촌은 극단적인 “불균형적 토지 소유 관계”에 시달렸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14년에 도시 공업에서 500명 이상의 대규모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전체의 54%에 달하는 등 노동 계급의 대규모 작업장에서의 집중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음. 후진적인 러시아이었지만 군사적 “열강”이었기에 군수공업은 세계적 수준에 있었으며, 대표적인 군수 공업 업체인 Putilov 공장 (St.-Peterburg)은 약 3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등 그 당시 세계 최대이었음. 결국 대공장에서 집중된 노동자들이 혁명 사상에 쉽게 노출됐으며, 도시 노동자의 혁명 운동과 농촌에서의 농민 반란 운동이 합쳐지는 순간 제정 러시아 체제나 매우 취약한 러시아 자본가들의 지배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복합형 불균형 발달의 과정”은 러시아 혁명을 다 준비해놓았음.
- “고질화된 불만의 상태” – 내전이 종식된 1921년 이후에 사실상 재현됐음. 농민들이 노동자 위주의 새로운 국가를 아직 강력하게 이질시했음. 풍년 때에 곡물의 과잉 공급으로 시장 식량품 가격들이 폭락할 수 있었기에 특히 부농들이나 중농들이 식량 방매를 유보하는 등 “식량 파업”을 벌이곤 했으며 국가는 가격의 폭등을 막기 위해 법정 수매 가격을 정해 그 나름의 “저곡가 정책”을 시도하는 등 농민과 국가는 “準 적대 관계”에 있었음. 트로츠키파의 경제학자 Preobrazhensky – 1925년에 “저곡가 정책을 통해서 농민층을 ‘착취’하지 않으면 산업화와 진정한 사회주의로의 이동을 이룰 수도 없으며 부농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을 달랠 수도 없다, 법정 저곡가 정책을 펴서 농촌의 잉여를 산업 투자로 돌리자”는 이야기로 유명해졌음. 결국 국정 참여 기회가 거의 없었던 농민과, 농업보다 산업을 우선시하는 “도시인들의 국가”의 숙명적 갈등.
노동자들이 산업 발전이 지지부진하는 “신경제정책” 시절 (1921-1928)에 높은 실업률 (25%)과 매우 열악한 생활 조건 등에 시달리고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던가”와 같은 질문들을 공개적으로 던지곤 했다. 공업 관료 (주로 당원이 아닌 지배인 등)와 당 관료에 대한 불만 – 트로츠키파 등에 대한 상당수 평당원들의 지지로 이어졌다. 반대파의 지지기반 – 공업시설이 가장 밀집한 모스크바의 소콜니키, 크라스나야 프레스냐 등의 지역. 성장률 2%밖에 안되는 1920년대의 소련 도시 사회 –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 – 관료화되어 더 이상 “밑바닥”을 거의 대표하지 않았음. 노조의 지도부 – 당원이 아닌 일반 노동자의 비율은 12-13%이었음 (1926년). 일반 노동자와 노조 간부, 십장, 지배인과의 관계 – 거의 “혁명 이전의 예속적인 형태”로 돌아왔다는 평가. 
- “1920년대의 구조적 위기” – 결국 스탈린 지도부가 2 가지 방법으로 돌파했음:
* 포섭 – “미완의 혁명”에 대한 좌절과 불만에 젖은 노동자나 농민들을 위해 “신분 상승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1924년 교육부의 훈령 – 대학 입학은 노조 조합원들에게만 허할 것, 전역 군인과 Rabfak (노동자 출신들을 위한 예비 과정) 출신, 내전의 상이군 등을 특채로 뽑을 것 등을 명령했다. 원칙상 해당 노조의 추천서가 있는 젊은 노동자에게는 고등교육 받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 됐다. 그런데 사실상 1930년에 대학생들 중에서는 노동자, 농민 출신의 비율은 37%에 불과했음. 다수는 전문가, 지식인, 자영업자 출신들이었음 –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대학 교수들은 되도록이면 노동자/농민들의 비율을 줄이려고 노력했음. 대학 교육은 노동자에게는 무상이었지만 노동자/빈농이 아닐 경우에는 여전히 학비를 징수했음. 1933년 경 – 초등학교 입학률이 거의 100% 이름. 1940년대말 – “문맹 퇴치” 거의 완성. 1970년대 중반 – 거의 100%에 가까운 학생들이 중학교 졸업하게 됨 – 중등 교육 보편화. 대학교 입학생의 총수 – 몇 배 증가하여 1940년쯤에 백만 명에 이름. 그런데, “노동자/농민들을 위한 역차별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중의 노동자/농민 자녀의 비율은 사실 1980년대초까지 45% 정도 넘지 못했음 – 여전히 실질적인 사회적 헤게모니는 고학력자 중산층에 있었음. 1920년대의 또 다른 對사회 “유화 정책” – 낙태수술의 허용 (허가제 – 불법 수술의 비율은 약 20-30%), 이혼 절차의 간소화, 동성연애의 인정 등 – 새 정권에 대한 도시 사회 특히 젊은이들의 환심 사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음 - 1930년대 후반에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거의 다 사라졌음.
* 폭력 – 국가에 의한 사회의 무력화와 공포 분위기 조성, 개인의 원자화 – “가시적인 공판” - 1928년의 Shakhty 공판 (“사회주의적인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부르주아적 전문가 응징”) 이후 특정 집단들을 겨냥하는 일련의 공판들이 열림. 절정 – 1936-37년의 레닌의 주요 동지 (“파시스트 간첩이자 트로츠키주의적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개 재판 (“Moscow Processes”). 사법적인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이미 사회가 경험한 기존의 폭력의 규모를 염두에 두어야 함 – 1917-1921년간에 내전, 대량 기아, 이민 등으로 러시아의 전체 인구가 약 1천3백만 명으로 줄어들었음. 그런데, 1940년에 수용소와 감옥을 합쳐서 수감돼 있는 인구는 정확히 1.850.258명 이었음 – 즉, 다수의 주민들에게 스탈린의 숙청보다도 1917-1921년간의 일련의 참극들이 “진정한 참사”로 보였을 것. 수감자 중에서는 거의 상당수를 이루는 것은 각종의 “정치, 사상범”이었음: 1937-1938년에 정치 관련 범죄로 체포, 수감된 인구는 1.344.923명, 그 중에서는 총살된 인구는 681.692명. 그 뒤에는 연간 총살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1940년대에 (정치범에 한해서) 7500명 정도이었음. 대체로 총살되는 이들 – 거의 다수의 “舊 공산당원” 등 잠재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었던 자 – 잠재적인 적에 대한 “선제공격”. 결과 – 원자화된, 순치된 사회 – “사회적 운동” 가능성의 봉쇄. 
경제적 폭력 – 특히 “농민들의 협동화” – 1929년 이후 – 사실상 농민들의 자율성을 말살시키고 농촌으로부터 잉여를 수취하여 공업부문에 투자시키기 위한 매우 가혹한 “농업 희생 정책”. 결과 – 특히 우크라이나 지방에서의 대량 아사 사태, 아사자의 수는 전국적으로는 1932-34년간 약 4백만 명으로 추산됨. “생존 경쟁” 사회의 탄생 – 하류층 출신의 소련 시민에게는 최대의 과제란 “굶어죽지 않기”, “가족 살리기” 정도. 정권이 안정된 상황에서는 “생존”의 주된 방법은 정권에 대한 충성 – 소련 국민의 “가시적인 충성심”은 상당부분 내면화된 생존의 전략.
* 성장 – 폭력적인 “농촌 말살”을 기반으로 하여 공업 경제는 1930년대에 기적적인 압축 성장을 이루어 도시 주민에 대한 포섭 정책을 가능케 했다. 성장률 연간 13-15%. 1928-1937년간 강철 생산은 3백만 톤에서 1천5백만 톤으로 늘어남 – 거의 5배 정도의 증가. 1930년대말 – 자동차 (연간 20만대), 비행기 생산 등 – 군사화된 중공업의 구축이 거의 완성됐음. 대가 – 실질 임금의 동결 내지 소폭 하락 (1928-1940), 구조화된 과로 (하루 15시간씩 노동), 매우 높은 산재사망률 – 그런데 교육, 의료 분야에서의 국가의 포섭 정책이 민중의 희생에 대한 일종의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었음.
결국 – 박정희 정권보다는 오히려 스탈린주의는 “대중 독재”의 형태에 다 가까웠음 – 기본적인 위로부터의 압축 성장 패턴은 비슷해도.

#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인정할 수 없는 여러 이유:
- 철저한 비민주성.
- 혁명 이전의 시절을 방불케 하는 양극화 - 1930년대 후반의 노동자 월급 평균 150루불, 고급 간부는 보통 3000-4000루불 이상. 같은 탄광에서 광부와 지배인의 월급 차이는 약 80배.
- 전사회의 군사화
- 퇴영적이며 제국주의적 “민족 정책”. 이미 1924년부터 이슬람 공산주의자 Sultan-Galiev 등에 대한 박해 시작 – 1930년 체포, 1937년 총살. “소수 민족 공산주의자”, 즉 소수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할 수 있었던 거의 일체 활동가 - 1930년대말 총살됐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상당수의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적 배경 – 국민주의/대러시아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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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yoonta > 트로츠키의 사상 (박노자)

                        트로츠키 사상.

1) 트로츠키 생애: 1879년 – 유대계 평민 출신의 지주 가정에서 태어남. 유대계지만 가정에서는 Yiddish 대신에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사용 – “러시아화된 유대인”. 여동생인 Olga – 볼셰비키당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명인 Lev Kamenev과 결혼 – “혼맥을 통한 밀접한 관계”. 1896년 – 노동 운동에의 입문, 1900-1902년 – 시베리아 귀양과 도망, 해외 망명 (원래 이름 – Bronstein; Trotsky는 위조된 여권에서 찍힌 이름). 1902년부터 런던에서 러시아 사민당 기관지인 Iskra 편집에 참여, Plekhanov 등 “구파”와 대립 관계에 돌입. 개방적인 사생활 – 첫 부인 (Sokolovskaya)와 이혼하여 두 번째 부인 (Sedova)를 맞이한 뒤에도 첫 부인과 매우 친근한 친구 관계 유지했음. 1903년 러시아 사민당 분당 (分黨) 사태 때에 – 처음에 레닌의 비민주성에 격분하여 멘셰비키에 가담했지만 그 뒤에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 노선”에 실망하여 1904-1917년간 “독립적인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해왔음 – 억압적인 규율을 不忍하는 정치적인 성질. 1905년 –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회주의 신문 발행인 및 논객이 됐으며 “직접 민주주의” 기관인 페테르부르그 소비예트의 지도자가 됨. 소비에트 – 제정 러시아 정부가 빌린 외국 차관 (외채)를 갚을 필요 없다는 선언을 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음. 1906년 – 체포, 공판, 귀양. 1907년 – 다시 한번 도망해서 런던으로 탈출했음. 소비에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트로츠키의 무산계급 집권론 – 총파업과 “무산자들의 연대”를 “반란”보다 훨씬 더 강조했음: “The main weapon of the Soviet was a political strike of the masses. The power of the strike lies in disorganizing the power of the government. The greater the “anarchy” created by a strike, the nearer its victory. This is true only where “anarchy” is not being created by anarchic actions. The class that puts into motion, day in and day out, the industrial apparatus and the governmental apparatus; the class that is able, by a sudden stoppage of work, to paralyze both industry and government, must be organized enough not to fall the first victim of the very “anarchy” it has created. The more effective the disorganization of government caused by a strike, the more the strike organization is compelled to assume governmental functions.
The Council of Workmen’s Delegates introduces a free press. It organizes street patrols to secure the safety of the citizens. It takes over, to a greater or less extent, the post office, the telegraph, and the railroads. It makes an effort to introduce the eight hour workday. Paralyzing the autocratic government by a strike, it brings its own democratic order into the life of the working city population” 소비에트 –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대안적인 非권력적인 권력”.
1907-1914 – 런던에서 빈으로 이동하여 주로 빈에서 살면서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활동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했음. 독립적인 사회주의적 신문 <프라우다> 발행 (나중에 볼셰비키당 기관지가 그 이름을 “도용”했다고 트로츠키는 매우 격분했음). 많은 문제에 있어서는 볼셰비키들과 충동했음. 1912년 - <Kievskaya Mysl’>의 종군 기자로서 발칸 전쟁을 취재하여 발칸지역의 사회, 정치적 발전, 현대 전쟁의 문제 등을 깊이 연구했음.
1914-1917 –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지에서 반전 활동을 하다가 결국 1917년2월 부르주아 혁명 이후로 러시아로 돌아감. “개량주의적 사민주의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레닌보다 훨씬 더 중도적인 soft line – 전쟁에 대한 반대를 굳게 하면서 제2차인터네서널의 완전한 파탄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음 – 레닌보다 예컨대 국제감각이 다소 예리하고 조금 더 “원대한” 구상을 지닌 듯함 –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우려해서 “주류 사민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려고 노력했음.
1917년 – 여름에 볼셰비키들에게 합류하여 1917년10월 혁명을 사실상 주도했음. 혁명 이후에 – 멘셰비키 등 온건 사회주의자들과의 “연합 정권” 구상을 반대했음 – 레닌과 마찬가지로 보다 급진적인 혁명을 지향함.
1918년3월까지 트로츠키 – 외무부 장관 (외무 인민 위원) – 독일과의 강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역시 미래 지향적인 중도적 입장을 취했음 – 독일제국과의 협정을 맺음으로서 소비에트 정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일단 독일과의 협상에서 시간 끌기 하고 독일 병사 사이의 혁명적 선전에 중점을 두자 – 즉, 독일에서의 혁명에 주력하자는 입장 –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의 가장 “국제주의적” 접근. 그런데 독일에서의 혁명이 늦어져 결국 레닌의 제안대로 강화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강화 협정은 볼셰비키들의 국내 혁명적 명분을 크게 실추시키고 좌파 사회혁명당 등의 농촌의 혁명 세력들과의 유대 관계를 파괴하게 했음 – 트로츠키의 반대는 이유가 있었음. 
1918년3월-1920년간 – 赤軍 (적군 –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군) 지휘자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트로츠키 – 적군의 “정규군化” – 구 제정정권 군 장교 재임명 (배신 시 원칙상 전 가족 총살 내지 수용소로의 체포), 징병제, 사병들에 대한 군재판, 탈영 등 범죄 시 총살. 트로츠키 – “민주적인 노동자 권력”의 이상을 저버리지 않았겠지만 정규군인 백군 (白軍 – 반동군)이나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군과의 전투에서 “비대칭적 전투”로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여 “현실과의 타협”을 한 셈임. 실제 “군인”으로서의 트로츠키 – 나름대로의 “중도 노선” - 1920년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폴란드 영토로의 진입 등 “혁명의 수출” 시도를 반대했음 (결국, 1920년8월에 바르샤바 정복의 시도가 좌절됨 – 트로츠키 의견이 맞았음). 그런데 1920-21년에 트로츠키가 “노조의 국가기관화”와 “노동의 군사화” – 노동자의 직장 이동 권리 박탈 및 국가 기관에 의한 무제한적 징발, 전직의 가능성 – 를 주장하여 특히 노동자 출신의 공산당 중간, 고급 간부로부터 많은 원망을 샀음 (“노동자 반대파”). 이 “노동 군사화” 제안은 군대, 철도 책임자로서의, 즉 고급관료로서의 트로츠키 입장을 반영했음. 트로츠키는 “노동자의 국가에서 노동자가 국가의 명령을 미워할 이유가 없으며 국가를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여 “국가”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을 보여주었음 – 근대 지상주의적인 볼셰비키들의 “국가/권력 집중의 숭배” – 볼셰비즘의 공동된 문제. 
- 1922년 – 레닌이 치명적인 병환을 앓고 있는 데에, 총서기관이 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의 “정통적 지도자”인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트로츠키의 집권 시도를 우려하여 “삼두 마차”로서 “반트로츠키 블록”을 만들었음. 1922년 후반부 – 소수 민족들을 다루는 스탈린의 비민주성을 목격한 레닌이 스탈린이 지휘하는 당 관료의 잠재적 반동성에 위기 의식을 느껴 트로츠키와는 급속히 가까워졌음. 1923년부터 – 스탈린/지노비예프 등이 트로츠키와 가까운 관료들을 좌천시키는 등 트로츠키와 “권력형 암투”를 노골적으로 벌임 – 이 과정에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허구성이 드러남 (라코브스키 주영국 대사로의 좌천 등).
- 1923년10월8일 –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당내 민주주의의 실종”을 극론함 – 지역 서기관들이 중앙으로부터 임명되는 시스템을 “당의 관료화”의 원천으로 생각함 – 그 후 1927년까지 “합법적인 당 민주주의 반대파”로 기능해온 것. 1923-25 – 반대파가 그 의견을 <프라우다> 등에서 발표하여 공개적인 논쟁을 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지는 게임”이었음 – 각종의 당 대회, 회의에서 대표자의 선출부터 이미 위로부터 임명된 서기의 선출에 의거했기 때문에 “당 중앙”을 반대하는 어떤 의견도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음. 트로츠키 입장 – 보다 급속한 공업 경제 건설 (“총동원”을 주장하지 않았음), “일국 사회주의” 불가능성과 세계 혁명 지향 노선 등 – 많은 면에서 옳았다 해도 이미 국가의 관료 기구가 된 당에서는 권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어떤 입장도 “힘”을 얻지 못했음. 트로츠키 입장의 치명적 약점 – 그가 “당내 민주주의의 부활”을 주장했지만 “당외 민주주의” (예컨대 같은 사회주의적 계통의 멘셰비키 등의 합법적 활동 허용)에 대해 무관심했음 – “볼셰비키 국가”에 대한 맹신의 지속. 1926년 – 계속 강화돼 가는 스탈린의 권력이 눌린 지노비예프/카메네프가 트로츠키 편에 옮기지만 1927년부터 스탈린이 반대파에 대해 비밀 경찰의 탄압을 이용하기 시작했음. 1927년 – 많은 반대파들이 당적 박탈. 1928년 초기 – 트로츠키가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로 귀양가야 함 – 사실상 스탈린의 “무제한 독재”의 시초.
- 1929-1940 – 트로츠키의 해외 망명 생활 –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 처음에는 소련 주도의 코민테른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코민테른이 파시즘의 독일에서의 집권을 방지하지 못하고 나서는 1938년에 “제4차 인터네서널”을 결성했다. 문제 – “리더”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구조로 인해서 그 트로츠키주의적 분파들이 계속 분당 과정을 겪어 작은 섹트 (종파)로 나누어짐 – 극단적 “수령주의”와 교조주의. 가장 큰 분열의 원인 – “입장주의” (entrism)의 문제 –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대중적인 노동자 정치를 펴고 있는 사민당/공산당에 의견그룹으로서 입당할 필요가 있는가? 이외에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을 “타락된 노동자 국가”로 봐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분열의 가장 큰 이론적인 기제이었음.

트로츠키 인생의 가장 큰 모순 – 한편으로는 권력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늘 권력에 반발해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국가”와 “당”의 권력을 물신화/절대화시킴 – 자신을 죽인 소련 국가를 끝내 “타락된 노동자 국가”라고 옹호해왔음. 근대주의적 정치인의 특징 – 특정 이데올로기/정당을 “역사의 논리를 전개시키는 주체”, 거의 헤겔의 “신의 의지의 실행자”로 보는 입장. 결국, 1923년 이후의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적 투쟁이 대단히 “온건”했다 – 그는 끝내 “반스탈린 혁명”을 주장하지 않았다.

2) 트로츠키 사상의 요점:
- “지속 혁명” (permanent revolution) – 1905년의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 개발해왔음 – 후진국에 있어서는 부르주아들은 민주혁명조차 이루어낼 수 없기에 미완의 민주혁명 바로 뒤에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지속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이어져야 함. 왜 혁명이 후진국에서 일어나는가? 트로츠키의 대답은 “복합적이며 불균형한 발전의 법칙” (law of 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 – 발전 수준이 고르지 않은 나라들이 같은 역사적인 세계적 과정 (예컨대 세계대전)으로 휘말리는 와중에서 “약한 고리” (국가 권력이 역하거나 부패한 후진국)가 먼저 터질 수 있다는 논리:
“The first and most general explanation is: Russia is a backward country, but only a part of world economy, only an element of the capitalist world system. In this sense Lenin solved the enigma of the Russian Revolution with the lapidary formula, “The chain broke at its weakest link.”
A crude illustration: the Great War, the result of the contradictions of world imperialism, drew into its maelstrom countries of different stages of development, but made the same claims on all the participants. It is clear that the burdens of the war would be particularly intolerable for the most backward countries. Russia was the first to be compelled to leave the field. But to tear itself away from the war, the Russian people had to overthrow the ruling classes. In this way the chain of war broke at its weakest link.
Still, war is not a catastrophe coming from outside like an earthquake, but, as old Clausewitz said, the continuation of politics by other means. In the last war, the main tendencies of the imperialistic system of “peace” time only expressed themselves more crudely. The higher the general forces of production, the tenser the competition on the world markets, the sharper the antagonisms and the madder the race for armaments, so much the more difficult it became for the weaker participants. That is precisely why the backward countries assumed the first places in the succession of collapse. The chain of world capitalism always tends to break at its weakest link.” – 국가간의 경쟁과 전쟁 등이 멈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약한 고리”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라는 예상. 한 국가 안에서의 “불균형 발전”도 마찬가지 (재벌과 중소 기업 사이의 괴리): “While peasant agriculture often remained at the level of the seventeenth century, Russia's industry, if not in scope, at least in type, reached the level of progressive countries and in some respects rushed ahead of them. It suffices to say that gigantic enterprises, with over a thousand workers each, employed in the United States less than 18 per cent of the total number of industrial workers. In Russia it was over 41%. This fact is hard to reconcile with the conventional conception of the economic backwardness of Russia. It does not on the other hand, refute this backwardness, but dialectically complements it.
The same contradictory character was shown by the class structure of the country. The finance capital of Europe industrialised Russian economy at an accelerated tempo. The industrial bourgeoisie forthwith assumed a large scale capitalistic and anti-popular character. The foreign stock-holders moreover, lived outside of the country. The workers, on the other hand, were naturally Russians. Against a numerically weak Russian bourgeoisie, which had no national roots, there stood confronting it a relatively strong proletariat with strong roots in the depths of the people”
러시아의 “복합형 발전”이라는 과정 속에서 외연이 강해도 국내적 민중과의 연결이 약해 강력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러시아 부르주아들이 결국 전제 정권이 물러나는 대로 무산계급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 – 후진국의 국가의존 외세의존형 자본계급의 약점을 매우 정확하게 꿰뚫어봄. 그러기에 무산계급에 의한 “지속 혁명”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In accordance with its immediate tasks, the Russian Revolution is a bourgeois revolution. But the Russian bourgeoisie is anti-revolutionary. The victory of the Revolution is therefore possible only as a victory of the proletariat. But the victorious proletariat will not stop at the programme of bourgeois democracy: it will go on to the programme of socialism. The Russian Revolution will become the first stage of the Socialist world revolution” (<In Defence of October>, Denmark, 1932).

- 국가와 노동자 민주주의 문제. 문제 – 만약 후진적인 국가의 무산계급을 지도한다는 공산당 그 자체가 억압적인 국가의 골간이 된다면? 여기에서는 “민주주의”가 견제 장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노동자의 직접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트로츠키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원칙상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요구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국가의 틀 안에서라면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 참여는 “계급간의 협력” 그 이상이 못되고 어차피 부르주아에 의해서 견제 받아 잘 실행될 수 없다고 내다봤음. 즉, 트로츠키에게는 노동자의 생산 통제에서의 참여는 “부르주아 국가 파괴의 첫 단계”, 즉 “국가 권력의 문제”로서만 의미 있음. 비록 부르주아 국가라는 한계가 있어도 생산 민주주의 그 자체의 잠재력을 트로츠키는 과소평가함:
“What state regime corresponds to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It is obvious that the power is not yet in the hands of the proletariat, otherwise we would have not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but the control of production by the workers’ state as an introduction to a regime of state production on the foundations of nationalization. What we are talking about is workers’ control under the capitalist regime, under the power of the bourgeoisie. However, a bourgeoisie that feels it is firmly in the saddle will never tolerate dual power in its enterprises. workers’ control consequently, can be carried out only under the condition of an abrupt change in the relationship of forces unfavorable to the bourgeoisie and its state. Control can be imposed only by force upon the bourgeoisie, by a proletariat on the road to the moment of taking power from them, and then also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Thus the regime of workers’ control, a provisional transitional regime by its very essence, can correspond only to the period of the convulsing of the bourgeois state, the proletarian offensive, and the failing back of the bourgeoisie, that is, to the period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the fullest sense of the word.
If the bourgeois is already no longer the master, that is, not entirely the master, in his factory, then it follows that he is also no longer completely the master in his state. This means that to the regime of dual power in the factories corresponds the regime of dual power in the state.
This correspondence, however, should not be understood mechanically, that is, not as meaning that dual power in the enterprises and dual power in the state are born on one and the same day. An advanced regime of dual power, as one of the highly probable stages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every country, can develop in different countries in different ways, from differing elements. Thus, for example, in certain circumstances (a deep and persevering economic crisis, a strong state of organization of the workers in the enterprises, a relatively weak revolutionary party, a relatively strong state keeping a vigorous fascism in reserve, etc.)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can come considerably ahead of developed political dual power in a country”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1931).
트로츠키는 주로 “부르주아 국가 파괴의 단계”에서의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소”에 노동자들이 공장 운영 위원회에서 직접적 민주주의의 경험을 쌓는 데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경멸적이었음 (“계급간의 협조”) 그리고 “노동자의 국가”가 되면 일단 “노동자의 국가에 의한 국유화”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것처럼 예상함 – “노동자 국가”의 물신화, “노동자 국가” 안에서의 모순 관계를 보지 못하는, 비변증법적 사고.

국가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다는 반론에 대해서 트로츠키의 반박: “With the exception of one country, state power throughout the world is in the hands of the bourgeoisie. It is in this, and only in this, tha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roletariat, the danger of state power lies. The proletariat’s historical task is to wrest this most powerful instrument of oppression from the hands of the bourgeoisie. The Communists do not deny the difficulties, the dangers that are connected with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But can this lessen by one iota the necessity to seize power? If the whole proletariat were carried by an irresistible force to the conquest of power, or if it had already conquered it, one could, strictly speaking, understand this or that warning of the syndicalists. Lenin, as is known, warned in his testament against the abuse of revolutionary power. The struggle against the distortions of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has been conducted by the Opposition since its inception and without the need of borrowing from the arsenal of anarchism.
But in the bourgeois countries, the misfortune lies in the fac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the proletariat does not understand as it should the dangers of the bourgeois state. By the manner in which they treat the question, the syndicalists, unwittingly of course, contribute to the passive conciliation of the workers with the capitalist state. When the syndicalists keep drumming into the workers, who are oppressed by the bourgeois state, their warnings about the dangers of a proletarian state, they play a purely reactionary role. The bourgeois will readily repeat to the workers: “Do not touch the state because it is a snare full of dangers to you.” The Communist will say to the workers: “The difficulties and dangers with which the proletariat is confronted the day after the conquest of power – we will learn to overcome them on the basis of experience. But at the present time, the most menacing dangers lie in the fact that our class enemy holds the reins of power in its hands and directs it against us.” (<The Errors in Principle of Syndicalism>, 1929)
국가 위험성에 대한 몰이해는 자본주의 국가의 개량주의자들에게 더 강하며, 소련 안에서는 국가의 관료화에 대해서는 좌파 반대파가 잘 투쟁하고 있다는 것은 이 반박의 논지. 문제 – “좌파 반대파의 투쟁”은 실제로 승산이 없었으며 트로츠키 예상과 달리 스탈린의 독재 국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결국 – “국가의 위험성”을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반체제 운동 (공산주의 운동) 등에서나 동질적인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그런데, 트로츠키는 이와 같은 시각에 끝내 동의하지 않았음.

- 소련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Dissertations upon “the dictatorship of the bureaucracy over the proletariat” without a much deeper analysis, that is, without a clear explanation of the social roots and the class limits of bureaucratic domination, boil down merely to high-faluting democratic phrases so extremely popular among the Mensheviks. One need not doub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Soviet workers are dissatisfied with the bureaucracy and that a considerable section, by no means the worst, hates it. However, it is not simply due to repression that this dissatisfaction does not assume violent mass forms; the workers fear that they will clear the field for the class enemy if they overthrow the bureaucracy. The interrelations between the bureaucracy and the class are really much more complex than they appear to be to the frothy “democrats.” The Soviet workers would have settled accounts with the despotism of the apparatus had other perspectives opened before them, had the Western horizon flamed not with the brown color of fascism but with the red of revolution. So long as this does not happen, the proletariat with clenched teeth bears (“tolerates”) the bureaucracy and, in this sense, recognizes it as the bearer of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In a heart to heart conversation, no Soviet worker would be sparing of strong words addressed to the Stalinist bureaucracy. But not a single one of them would admit that the counterrevolution has already taken place. The proletariat is the spine of the Soviet state. But insofar as the function of governing is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an irresponsible bureaucracy, we have before us an obviously sick state. Can it be cured? Will not further attempts at cures mean a fruitless expenditure of precious time? The question is badly put. By cures we understand not all sorts of artificial measures separate and apart from the world revolutionary movement but a further struggle under the banner of Marxism. Merciless criticism of the Stalinist bureaucracy, training the cadres of the new International, resurrecting the fighting capacity of the world proletarian vanguard – this is the essence of the “cure.” It coincides with the fundamental direction of historical progress” (<The Class Nature of the Soviet State>, 1933)

트로츠키가 소련 관료계급이 아직도 “지배계급”이 되지 못했다고 보고 그들의 “사회적 기생성”을 폭로해도 그들을 과거의 부르주아와의 동질의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음. 즉 “타락된 노동자 국가” 논리. 사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국가의 부활이 두려워서 관료적인 타락을 견디는” 형태는 아니었음. 새로운 국민 국가에서의 사회적 진출의 기회에 많은 노동자들이 신흥 국가에 대한 충성을 느꼈음 – 매우 빠른 사회 진출의 가능성. 1941-45년의 소독 전쟁 이후 – 새로운 국가는 막강한 국민주의적 이데올로기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음. “국가에 의한 대중의 포섭” – 트로츠키가 역시 놓친 부분.

트로츠키 사상의 장점: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의 복합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부분, 혁명의 이상에 충실해온 부분. 단점 – “국가/당 등 유사 국가적 조직의 내재적 위험성”에 다소 무감각하고 특히 소련의 국가/당을 끝까지 물신화했음 – 대중의 민주적 자율성의 문제를 잘 간파하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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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yoonta > 레닌의 사상 (박노자)

레닌의 사상:

1) 레닌의 생애:
- 가정적 배경 – 외조부 – Aleksander Dmitrievich Blank – 유대계/스웨덴계의 부유한 의사, 정교회로 개종하여 경찰의관으로서 출세, 귀족 신분까지 부여 받았음. 외조부의 부인: 부유한 독일계 상인 가정의 출신 (Groschopf 가문). Blank가는 Kokushkino 라는 농장을 보유했으며, 거기에서 1861년의 농노제 혁파 이전까지 농노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레닌 – 자신이 세습적인 귀족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제정 러시아 시절에 숨기려 하지 않았음 – 각종 신청서 등에서 “세습적 귀족”이라고 사인했음. 레닌 아버지 쪽 – 비교적으로 미미한 가문 (농노 출신의 수공업자). 그러나 레닌의 아버지 Ilya Nikolaevich Ulyanov – 교육관료계에서 자수성가하여 일선 교사에서 Simbirsk도(道) 교육감까지 올랐음. 아버지의 品等 – “국가자문관” (State Councillor) – 군대에서의 장군급과 같은 수준. 1886년에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정은 유가족 연금과 Kokushkino농장의 소작료로만 경제 문제 해결. 레닌의 아버지 – “개명 관료” – 아이들을 평등하게 대해주고 가정 잡지 발행해주고 각자에게 자신의 방을 주고, 집안에서 외국어 사용을 장려했음. 레닌 – 늘 학급 우수생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대단한 자신감을 과시했음 – 가정에서 “천재”로 인정됨. 레닌을 “모범생”에서 “혁명가”로 바꾼 경험 – 형 Aleksander의 사형 집행 (1887년) – 황제 암살 음모 혐의. 레닌의 형 – 비상한 정직함과 용기를 보임 (끝까지 반성문 작성을 거부하여 감형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음). 레닌 – 이 기회에 “영웅주의적 투쟁의 한계” 통감, “대중 노선”을 택했음. 형의 사형 집행 이후 – 레닌이 경찰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어 Kazan대학교로부터의 제적 등 각종의 처벌에 시달렸음. 정상적인 대학생이 될 수 없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그 황립대학고 법학부 “원격 학생” 신분으로 겨우 졸업했음. 주로 독습에 의존했음 – 가장 애호하는 작가 – Chernyshevsky “무엇을 할 것인가?” – 자기 희생적 “혁명적 전위”의 타입을 보여주었음. “민중 노선”이 돼도 레닌은 끝내 그의 형과 같은 “인민주의자”들의 영웅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듯함 –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일 없는 혁명 전위” 강조 – Vladimir Voitinsky와의 대화에서 1905년에 “혁명을 하얀 장갑을 끼고 할 수 없다. 우리에게 가끔가다 몹쓸 짓을 할 수 있는 이들도 바로 몹쓸 짓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필요하다”. 일종의 “혁명 엘리트 현실주의”.
- 레닌과 Krupskaya 결혼 – “운동권 방식의 결합” – 같이 마르크스주의 노동 운동에 종사해온 부인이 남편과 운동을 함께 하게 됨 – 그런데 외형은 “동지적 결합”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조”형에 가까웠음 – 남편의 원고 작업 등 도와주는 일이 주종을 이룸. 1909년 이후 레닌 – Inessa Armand – Krupskaya의 “삼각형 관계” – 세 사람 다 동의했으며 “부르주아적 가족 이상의 타파”와 “혁명적 동지애” 차원에서 문제 삼지 않았음 – 일부일처제 타파의 성공적인 사례.
- 레닌의 재정적인 상황 – 개인 재정과 당 운영비 철저하게 분리했음 – “깔끔한 재정 운영”. 개인 재정 – 어머니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 + “당으로부터 주이지는 활동비” (최대한 350스위스 프랑크 – 숙련공 월급보다 다소 높음). 레닌 – “철저한 근대인” – 일체 영수증 등 늘 전부 다 보관했음, 가계부 작성. 당 운영비 – 1905-1907년간 – “은행털이”로 얻어지는 소득 – 1907년7월26일 Tiflis에서의 은행 마차 “털이”가 제일 유명했음 (3명 사망). 이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출신의 “물주”들의 도움 – Savva Morozov (1905년 자살, 그 유서에 의해 그 재산이 Gor’ky를 통해 볼셰비키당에 귀속됐음) 등. 당 운영비 관리 때문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분쟁 결과 - 1910녀부터 3명의 독일 사민당 지도자 (Zetkin, Kautsky, Mehring)가 러시아 사민주의 운동 활동비 최고 관리자로 임명됐음. 레닌 – 재정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Kausky와 V.Adler 등 독일, 오스트리아 동지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아왔음 – 그 만큼 그들과의 궁극적인 단절은 마음 아픈 일이었음.
- 레닌과 1905년 혁명 – 레닌이 무장 반란 (“무산 계급과 농민계급이 주도할 민주 혁명”)을 조직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음. 1905년 – 레닌 – “민주혁명에 있어서의 사민주의자들의 두 개의 전략” 집필, 무장 혁명 준비 지향. 레닌의 급진 노선 – 당에 인기를 끌었음. 1906년말 – 당원의 수는 거의 15만 명을 넘었음. 그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제정 정권의 폭정보다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무장 투쟁이라 하더라도 차라리 “차악”으로 여겨질 만한 분위기는 팽배했음 – 레닌 급진주의의 “현실적인 근거”.  레닌의 “무장 폭동 노선” – “도시 게릴라전”을 총체적인 무장 반란의 “준비 단계” 내지 ‘보조적인 작전’으로 인식했음. <게릴라전에 대해서> (1906년9월) – 라트비아 사민주의자들의 무장 폭력 노선을 다음과 같이 “모범”으로 제시했음:
“The Lettish Social-Democratic Labour Party (a section of the Russian Social-Democratic Labour Party) regularly issues its paper in 30,000 copies. The announcement columns publish lists of spies whom it is the duty of every decent person to exterminate. People who assist the police are proclaimed “enemies of the revolution”, liable to execution and, moreover, to confiscation of property. The public is instructed to give money to the Social-Democratic Party only against signed and stamped receipt. In the Party’s latest report, showing a total income of 48,000 rubles for the year, there figures a sum of 5,600 rubles contributed by the Libau branch for arms which was obtained by expropriation”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06/gw/index.htm) 민족 모순들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탐정 박살” 등의 잔혹성은 불가피했는지도 모르지만, 과연 현재의 지배계급의 왜곡된 도덕관과 질적으로 다른 생명 존중 위주의 사회주의적인 도덕관이 있는지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게끔 하기도 함.  

2) 1890-1900년대의 독일 사민주의: 현실과 사상의 괴리. 현실 – 체제에의 포섭이 돼감. 사상 – Kautsky – “중소 기업의 경쟁에서의 소멸, 전체 경제가 하나의 커다란 기업 되기” – 독점화 경향 이론을 극단적으로 설명했음. 역시 현실에의 안주의 반영 – 사회주의의 도래를 거의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설명했음 – “不可逆의 사회, 경제적 경향”. 그것보다 훨씬 더 현실 순응주의로 나아간 것은 Bernstein – 노동가치론의 전면적인 부정, 상품의 가치를 “원가 + 이윤 마진”으로만 이해하고 “잉여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했음. Bernstein –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민주주의”를 ‘무산 계급의 독재” 달성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노동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것 – 즉 사회주의를 “전면적인, 포괄적인 민주주의의 사회”로 이해한 것. 급진주의와 개량주의 사이에 있었던 이론가 – Hilferding - <금융자본론> (1910) –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론, 금융자본과 국가 권력의 일체화 경향 – 자국의 금융자본을 위해 무리한 식민지 획득을 마다하지 않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무력 갈등 가능성의 제고 –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종말을 고하지 않아도 정치적으로 세계 전쟁이라는 통로를 통해 망할 수 있는 것이다”. 레닌 – Kautsky를 일종의 “스승”으로 받들면서도 혁명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요인”, 즉 전위정당의 조직력과 전투성을 훨씬 더 강조하는 등 “개량주의자”들과 노골적인 강등을 빚지 않으면서도 유럽 사민주의의 “급진파”를 이루었다. 또 한 가지 특징 – 서구 중심주의의 일정한 타파 – 비서구 민중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관심 - (1908) – 중국이 “중세적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 근대적 혁명 운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예견했음: “In China, too, the revolutionary movement against the medieval order has made itself felt with particular force in recent months. True, nothing definite can yet be said about the present movement’—there is such scanty information about it and such a spate of reports about revolts in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But there can be no doubt about the vigorous growth of the “new spirit” and the “European currents” that are stirring in China, especially since the Russo-Japanese war; and consequently, the old-style Chinese revolts will inevitably develop into a conscious democratic movement.” 그리고 “아시아 혁명”이 러시아 혁명의 핵심적인 우군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음: “The Russian revolution has a great international ally both in Europe and   in Asia, but, at the same time, and for that very reason, it has not only a national, not only a Russian, but also an international enemy” “세계 혁명”의 구도를, “유럽”의 한계를 넘어서 구체화했음.   
3) 제1차세계 대전 – 사민주의 사상의 전환점 – 레닌 - <자본주의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1916) – 제국주의를 “경제결정론적” 입장에서 이해함:
“If it were necessary to give the briefest possible definition of imperialism we should have to say that imperialism is the monopoly stage of capitalism. Such a definition would include what is most important, for, on the one hand, finance capital is the bank capital of a few very big monopolist banks, merged with the capital of the monopolist associations of industrialists; and, on the other hand, the division of the world is the transition from a colonial policy which has extended without hindrance to territories unseized by any capitalist power, to a colonial policy of monopolist possession of the territory of the world, which has been completely divided up.
(…) We must give a definition of imperialism that will include the following five of its basic features:
(1) the concentration of production and capital has developed to such a high stage that it has created monopolies which play a decisive role in economic life; (2) the merging of bank capital with industrial capital, and the creation, on the basis of this “finance capital”, of a financial oligarchy; (3) the export of capital as distinguished from the export of commodities acquires exceptional importance; (4) the formation of international monopolist capitalist associations which share the world among themselves, and (5) the territorial division of the whole world among the biggest capitalist powers is completed. Imperialism is capitalism at that stage of development at which the dominance of monopolies and finance capital is established; in   which the export of capital has acquired pronounced importance; in which the division of the world among the international trusts has begun, in which the division of all territories of the globe among the biggest capitalist powers has been completed”
즉, 레닌이 제국주의를 단순히 “생산, 자본의 집중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 자본의 수출, 국제적 독점 자본의 형성, 주요 자본주의 열강 사이의 지구 나누어먹기” 식으로 이해함. 기본적으로 맞는데, 빠진 부분은 근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Kautsky가 레닌에게 반론을 제기했듯이, 아직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까지 가지 못하는 후진적 열강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도 이미 침략주의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함  - 1910년, “한일합방” 그 당시의 일본도 마찬가지, 아직도 중공업마저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음. 여기에서 침략의 엔진 – (사회의 모든 계급들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유하는 근대 국가. 근대 국가가 먼저 성립되어 자본가 계급을 탄생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후진 국가에서 (특히 1868년 이후의 일본), 대외 침략의 시작은 근대 국가 탄생의 시점과 같음 (일본 – 1873년 오키나와 병합, 1876년 강화 조약 강요). 근대 국가의 대외 침략 – 물론 자본가 계급을 위해주는 측면이 강하지만 그걸로만 설명되지 않음 (일본 산업 자본의 본격적인 한반도 투자 - 1920년대 후반기부터). 성공적인 침략 – 국가의 “정통성 확립”, 승리 의식을 통한 “민족 만들기” – 일본에서의 “민족/국민 만들기”에서의 청-일,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의 역할. 레닌 – 근대 관료국가의 자율적인 역할 과소 평가, 그리고 총체적으로는 민중에 대한 국가의 포획력, “민족주의적” 주술의 힘을 과소평가했음. 결국 – 본인이 1917년 이후에 만든 “혁명적인” 근대 국가가 일반적인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는 필요한 조치를 거의 취하지 못하고 혁명의 퇴락을 막지 못했음.

4) 레닌의 반군사주의 (anti-militarism) 특징 – 군인들의 “혁명화”에 중점을 둠 – 어떻게 해서 병영에서 혁명적인 선전, 선동을 할 수 있는가 (1907: “Anti-Militarist Propaganda and Young Socialist Workers’ Leagues”).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레닌은 어느 “추상적인 평화주의자”보다도 근대적 전쟁의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었다. 레닌 – 군수 복합체 (아직은 그 용어는 없었지만 그 뜻임)가 정치에 깊이 개입하여 사실상 “돈벌이로서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다고 봤다: “Armaments are considered a national matter, a matter of patriotism; it is presumed that everyone maintains strict secrecy. But the shipyards, the ordnance, dynamite and small-arms factories are international enterprises, in which the capitalists of the various countries work together in duping and fleecing the public of the various countries, and   making ships and guns alike for Britain against Italy, and for Italy against Britain.
An ingenious capitalist set-up! Civilisation, law and order, culture, peace—and hundreds of millions of rubles being plundered by capitalist businessmen and swindlers in ship building, dynamite manufacture, etc.!
Britain is a member of the Triple Entente, which is hostile to the Triple Alliance. Italy is a member of the Triple Alliance. The well-known firm of Vickers (Britain) has branches in Italy. The shareholders and directors of this firm (through the venal press and through venal parliamentary “figures”, Conservative and Liberal alike) incite Britain against Italy, and vice versa. And profit is taken both from the workers of Britain and those of Italy; the people are fleeced in both countries.
Conservative and Liberal Cabinet Ministers and Members of Parliament are almost all shareholders in these firms. They work hand in glove. The son of the “great” Liberal Minister, Gladstone, is a director of the Armstrong concern. Rear-Admiral Bacon, the celebrated naval specialist and a high official at the Admiralty, has been appointed to a post at an ordnance works in Coventry at a salary of £7,000 (over 60,000 rubles). The salary of the British Prime Minister is £5,000 (about 45,000 rubles)” (“Armaments and Capitalism”, 1913).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에 대해서는 레닌은 “일본과의 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전쟁의 준비 작전”, “상비군 증강을 위한 전략”, “민주적인 구호는 오로지 기만일뿐”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꿰뚫었다: “On the question of America entering the war I shall say this. People argue that America is a democracy, America   has the White House. I say: slavery was abolished there half a century ago. The anti-slave war ended in 1865. Since then multimillionaires have mushroomed. They have the whole of America in their financial grip. They are making ready to subdue Mexico and will inevitably come to war with Japan over a carve-up of the Pacific. This war has been brewing for several decades. All literature speaks about it. America’s real aim in entering the war is to prepare for this future war with Japan. The American people do enjoy considerable freedom and it is difficult to conceive them standing for compulsory military service, for the setting up of an army pursuing any aims of conquest a struggle with Japan, for instance. The Americans have the example of Europe to show them what this leads to. The American capitalists have stepped into this war in order to have an excuse, behind a smoke-screen of lofty ideals championing the rights of small nations, for building up a strong standing army” (“War and Revolution”, May 1917)
전쟁에 대한 철저한 사회, 경제적인 분석이 가해지는 한편, 혁명적이지 않는 평화 운동을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와 연결시켜 분석한다. 레닌에 의하면 “주류 평화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민주적인 평화 체계”는 기만일뿐, 자본주의가 남아 있으면 전쟁들이 불가피함. 그래서 전쟁 와중에서는 그가 “평화 진영”을 세 가지로 분류함:
“In the realistic politics of the capitalist countries, three kinds of peace sympathies can be seen:
(1) The more enlightened millionaires wish an early peace because they are afraid of revolutions. They have soberly and correctly described any “democratic” peace (without annexations, but with limited armaments, etc.) as Utopian under capitalism.
This philistine Utopia is being advocated by the opportunists, the adherents of Kautsky, and the like.
(2) The unenlightened masses of the people (the petty bourgeois, semi-proletarians, part of the workers, etc.) whose desire for peace is very vague, are thereby expressing a growing protest against the war and a growing but as yet vague revolutionary sentiment.
(3) The revolutionary Social-Democrats, the enlightened advance guard of the proletariat, are attentively studying the sentiments of the masses, utilising the latter’s growing striving for peace, not in order to bolster the vulgar utopias of a “democratic” peace under capitalism, not in order to encourage hopes being placed in the philanthropists, he authorities, and the bourgeoisie., but to bring clarity into vague revolutionary sentiments, to enlighten the masses with a thousand facts of pre-war politics; basing that work on the experience of the masses and on their sentiments, they are out to prove systematically, steadfastly and unswervingly the need for mass revolutionary action against the bourgeoisie and the governments of their respective countries as the only road towards democracy and socialism” (1915, “Bourgeois Philanthropists and Revolutionary Social-Democracy”)
“주류 평화주의”의 유토피아적인 성격에 대한 레닌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폭력 혁명”을 지향하지 않는 반자본주의적인 평화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레닌이 무관심했다. 그에게는 “영구적인 평화”로의 유일한 길은 “세계 전쟁을 계급간의 내전으로” 바꾸는 일이었음.  

레닌 – 제1차세계 대전의 참극을 목도하면서 새로운 “계급간의 내전”을 이미 이론적으로 구상한다. 그에게는 장기적인 내전이란 성공적인 혁명의 불가피한 결과다. 사회주의가 먼저 한 나라에서 승리할 경우,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의로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레닌으로서는 “역사의 당연한 논리” – 대량적인 군사적 폭력의 지속을 통한 “해방의 역사의 전개”를 예상한다:
“Civil war is just as much a war as any other. He who accepts the class struggle cannot fail to accept civil wars, which in every class society are the natural, and under certain conditions inevitable, continuation, development and intensification of the class struggle. That has been confirmed by every great revolution. To repudiate   civil war, or to forget about it, is to fall into extreme opportunism and renounce the socialist revolution.
(…) The victory of socialism in one country does not at one stroke eliminate all wars in general. On the contrary, it presupposes wars.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proceeds extremely unevenly in different countries. It cannot be otherwise under commodity production. From this it follows irrefutably that socialism cannot achieve victory simultaneously in all countries. It will achieve victory first in one or several countries, while the others will for some time remain bourgeois or pre-bourgeois. This is bound to create not only friction, but a direct attempt on the part of the bourgeoisie of other countries to crush the socialist state’s victorious proletariat. In such cases, a war on our part would be a legitimate and just war. It would be a war for socialism, for the liberation of other nations from the bourgeoisie. Engels was perfectly right when, in his letter to Kautsky of September 12, 1882, he clearly stated that it was possible for already victorious socialism to wage “defensive wars”. What he had in mind was defense of the victorious proletariat against the bourgeoisie of other countries.
Only after we have overthrown, finally vanquished and expropriated the bourgeoisie of the whole world, and not merely in one country, will wars become impossible. And from a scientific point of view it would be utterly wrong—and utterly unrevolutionary—for us to evade or gloss over the most important things: crushing the resistance of the bourgeoisie—the most difficult task, and one demanding the greatest amount of fighting, in the transition to socialism. The “social” parsons and opportunists are always ready to build dreams of future peaceful socialism. But the very thing that distinguishes them from revolutionary Social-Democrats is that they refuse to think about and reflect on the fierce class struggle and class wars needed to achieve that beautiful future”.  (1916, “The Military Programme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즉,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격렬한 내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이미 설파하는 것임.

집권 이후의 레닌 – 1917년12월20일 – 비밀경찰 (ChK) 창설, 1920년 – 중앙 및 지방 비밀경찰은 약 3만 명에 가까운 요원을 확보했음; 1918년5월에는 전국적인 징병제 부활 (그전에는 “노동자 민병대”들은 혁명의 기둥이었음) – 약 5만 명의 구 제정 러시아 군대의 장교들을 동원 내지 초빙하여 이 새로운 군대의 “기간병”으로 삼았음. 1924년까지는 공산당의 “정치 위원” (Komissar)은 장교를 감시해야 했지만 그 후에는 군대는 다시 한 번 “장교 권력 일원주의”로 귀결됐음. 졸병들의 80% - 농민 출신. 농민은 – “무산계급 독재 국가”에서 아예 법적으로까지 평등권을 누리지 못했음 – 도심지역에서 중앙 소비에트 대표 1사람을 2만5천 명이 뽑았지만 지방 (농촌 지대)에서는 12만5천 명이 뽑았음 – 법제화된 차별대우. 대신에 군복무를 마친 농민에 대해서는 국가는 각종의 혜택을 부여했음 (대학교 입학 우선권 등) – “準노동자” 신분 – 군 복무는 “입신출세의 디딤돌”로 인식되게 됐음 – 초기 소비에트 러시아 대다수 제도권 남성의 공통 경험. 사회의 군사화와 당의 군사화 - 1919년에 50만 명의 전체 공산당 당원 중에서는 약 절반은 군복무를 여러 형태로 하고 있었음. 군 복무 – 농민들을 위해 “입당 – 출세”의 첩경. 결국, 레닌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내전의 결과 – 철저하게 군사적으로 조직된 “총동원 사회”.

레닌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 한편으로는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탁월한 급진적인 분석.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의 극복 방안으로서 레닌이 제안한 것은 단순히 근대적 “총동원 전쟁”의 “혁명적” 연장에 불과했음 – 근대 자본주의적 수단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입장의 모순성. 레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만성”을 폭로한 것은 상당부분 타당하지만 그에게는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었으며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은 매우 희박했다. 결국 1917년10월 혁명 이후에 그와 그의 당이 사실상 중앙집권적인 전시 국가 자본주의적 체계를 확대, 심화시켜 부활시킨 것은 –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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