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마이클 부라보이와 공공사회학

마이클 부라보이라는 미국의 거물급 사회학자가 방한했다고 한다. '공공사회학'을 주창한 학자라는데, 요즘 사회학 책들을 별로 안 읽은 탓인지 '공공사회학'이란 말 자체가 생소하다(저자는 <생산의 정치>(박종철출판사, 1999)로 이미 오래전에 소개됐다). 설명에는 '전문(professional) 사회학’과 대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강단사회학의 두 조류가 되는 것인가?(뒤집어 생각해보면, 공공사회학은 가장 실제적/실천적인 학문이어야 할 '사회학'이 그간에 얼마나 폐쇄적으로 전문화되었던가에 대한 반증이자 반성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공공사회학보다는 그가 러시아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데 두어진다. 그 방면의 책들이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건 차베스에 대한 평가이다. 말발만 앞세운 사회학자들과는 좀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한겨레(07. 05. 12) 사회학자여, 강단을 넘어 대중과 만나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마이클 부라보이는 ‘공공사회학(public sociology)의 전도사’로 불린다.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사회학자인 그는 사회학이 사회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믿는다. 사회학이 지향하는 가치가 강단을 넘어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학자는 강단에서 학문적 엄밀성만 추구할 게 아니라 그들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직접 대중과 만나고 토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우리 학계에 널리 퍼졌던 실천적 경향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 사회학회 회장(2003~2004년) 시절 공공사회학을 주제로 미국사회학회 연례회의를 주재했으며, 지금도 각국을 돌며 공공사회학의 이념 전파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전 헝가리 철강 공장에 직접 취업해 노동과정을 연구하는 등 현장 체험에 바탕을 둔 실증적인 노동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난 3일 중앙대·연세대 두뇌한국(BK)21 사업단 초청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 부라보이 교수를 4일 연세대 사회학과 원재연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사회학자들이 왜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하나.

=시민들이 그들의 존립에 물질적 지원을 하고 있다.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학자들이 봉급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시민사회에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 사회를 위한 의무다. 사회 역시 사회학자들의 가치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자본과 국가로부터 시민사회를 지켜내는 데 학자들이 적극 기여해야 한다.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공공사회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공공사회학은 사회 문제에 직접 관여해 이슈들을 토론하는 것을 강조한다. 지향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단일한 정의는 없다. 다양한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공공사회학계에서는 사회정의와 평등의 가치가 점차 중요성을 얻고 있다. 내게는 ‘사회정의’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 가치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전달할 것인지 궁금하다.

=제도권 언론들이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모두 단일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미디어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치가 혼재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유력지에서도 진보적 칼럼을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선 ‘공공 라디오’들이 훨씬 개방적이다. 사회학계 주최의 여러 행사에 언론인들을 초청해 교육시키는 데도 비중을 두고 있다. 중간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대중과 직접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노조와 각종 시민·지역 단체 회원들과 수시로 만나 토론한다.

-한국 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강단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영향이 크다. 미국의 사회학은 과도한 전문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아울러 시민사회의 조직화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학문적 지배권을 가진 미국의 이런 경향을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 중심의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가 갈수록 강단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주요한 이유다.

-일각에선 세계화가 정점에 도달했다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어디를 가도 세계화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본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전기·수도 등 공공서비스가 민영화되고 있고, 중국과 인도 농민들은 각종 토목 공사 때문에 땅에서 쫓겨나고 있다.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시장화는 그 반대세력을 키우고 있다.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 브라질 우루과이 등 남미에서 이런 기류가 확연하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나.

=그가 세계에서 미국 지배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석유다. 그는 너무나 많은 ‘오일머니’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이유가 없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타협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대토지 소유자로부터 땅을 사버린다. 그들을 추방하지 않는다. 금융과 은행 제도와도 타협하고 있다. 너무 돈이 많아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게 가능하다. 나는 그를 ‘민족적 대중주의자(national populist)’로 본다. 그가 도시 변두리 주민들의 빈곤을 개선하기 위해 일종의 재분배를 한 것은 인정한다.

-세계화 흐름 이후 양극화 경향이 거세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최근의 사회운동은 일종의 수세적인 방어 운동이다. 공공영역의 민영화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의 미래에 대해선 비관적이다. 하지만 남미를 비롯해 세계화에 저항하는 많은 대안 찾기가 시도되고 있다. 시장화에 반대하는 조직화가 여러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대안은 이런 사회운동에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행로에 대해 어떻게 보나.

=1991년 이후 러시아 경제는 하강했으나 중국은 반대로 상승하고 있다. 러시아는 조직적으로 국가 전복을 시도했다. 혁명적인 방식으로 시장자본주의로 이행했다. 충격요법을 썼지만 치유책은 내놓지 못했다. 중국은 국가의 후원 아래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가치로서 언제든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매우 다층적이고 비동질적인 사유체계이다. 자본주의에 대항한 사회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구실을 할 것이다.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를 체감하는지.

=내가 재직 중인 대학의 사회학과는 지금까지 계속 그 규모가 늘어나고 있다. 학문의 인기는 일자리의 수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의 물질적 매력에 기반한 지배력이 학문의 세계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한 영향이다. 미국의 힘은 자신들의 교육 체계나 지식·이데올로기에 권위를 부여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남미가 저항 아이디어로 맞서듯, 유럽 등 다른 대륙도 미국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공공사회학 = 학문이 강단을 넘어 대중과 만나 지향하는 가치를 전파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학의 한 분야. 1988년 미국에서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동료 전문 학자들과 이론적 논의에 그치는 강단사회학인 ‘전문(professional) 사회학’과 대비되는 개념이다.(강성만 기자) 

07. 05. 13.

P.S. 부라보이 교수의 홈피(http://sociology.berkeley.edu/faculty/burawoy/workingpapers.htm)에는 그의 '워킹 페이퍼'들이 링크돼 있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논문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편저인 <세계화와 새로운 정체성들>(2007)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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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서구 유럽에서 개인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진행중)
개인의 발견 - 어떻게 개인을 찾아가는가 1500 - 1800
리햐르트 반 뒬멘 지음, 최윤영 옮김 / 현실문화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1. 이 책의 목적

     이 책의 저자 리하르트 반 뒬멘(1937~2004)는 독일의 역사학자로서 독일 근대사, 그중 근세사가 주요 연구분야로 삼으며 특히 문화사 연구에 큰 역할을 하였다. 책 소개 페이지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나치시대의 일상사>의 저자 알프 뤼트케와 함께 일상사 연구자들과 독일의 '문화사 지향의 새로운 역사학'을 이끌어가는 학술지 <역사인류학>을 창간한 다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고 되어있다. 주요저서들도 주로 근대초기에 대한 일상사, 문화사적 관점을 통한 역사연구분석서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역사인류학에 대한 개론서적 성격의 <역사인류학이란 무엇인가>가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의 목적은 "근대적 개인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개인들이 자신의 사적 목표와 소망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개인들이 자신의 길을 발견하려고 어떤 시도를 했는지, 그런 가운데 어떻게 전통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기 위함이다."(9) 저자는 이러한 목적에 대한 잠정적(사실 이 책 전체의 결론도 이와 같다)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인'이라는 정의는 근대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말한 대로 개인과 개인성을 근대의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적어도 근대적 개인이 시민사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생각과 결별해야 한다. 개인주의적 행동은 근대초기에도 있었고, 전통주의적 행동은 19세기의 시민사회에도 존재했다."(16) 저자의 이러한 잠정적 결론은 위해 '근대적 개인'(근대적 개인이기보다는 보편적 개인의 특수적 표현으로서의 '개인')의 출현이 16세기에서부터 시작되어 19세기까지에 이르러 완성되기까지 시대와 사회구조의 변동 맥락에 따라 어떠한 관계를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었는지를 탐색한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는 "자아-발견, 사회변천 과정에서의 자아-발견의 전개, 그리고 개인적 사유 영역과 행동 영역의 발전을 부각시키고 있다."(17)

  2. 책의 본문 내용에 대하여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자기자신을 하나의 양식으로 정립한다는 것, 그를 통해 개인주의적 시대의 특유성들을 고안해 냈다는 것은 16세기에 있어 하나의 화두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주로 종교적, 미학적, 문학적 측면을 통해 증명한다. 이는 서구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규정될 수 있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근대적 개인주의 이전의 고대시대, 중세시대,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존재했었던)와는 확연히 분절되는 '특수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의 발견의 모태가 되는 16세기적 사회역사적 조건을 탐색하는 것으로 구체화 된다. 2장에서는 교회, 국가, 학교 등의 제도적 조건들이 어떻게 근대적 개인(주의)을 형성하는가를 탐색한다. 여기서 저자는 자기통제, 자기인식, 자기분석의 과정을 통해 개인의 형성 메커니즘은 이 세 가지 외부적 요인으로서의 제도의 힘에 의해 구성됨을 밝혀낸다. 저자는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사회라는 개인의 외부의 압력과 힘에 의해서, 즉 사회적 교육화에 의해서 개인화의 과정이 파생된 것임을 증명한다. 3장에서 저자는 인간 개인이 형성되는 조건들을 포획하는 지식적/담론적 구성의 역사적/사회적 과정들을 분석한다. 여기에는 크게 인간 개인의 육체, 영혼, 타자에 대한 인식, 야만, 문명, 동물과의 관계 등의 언표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크게 18세기의 '인류학'이라는 광범위한 학문적 범주의 틀 안에서 사유되었다(이는 다시 다섯 가지 핵심적 범주와 주제로 분류되는데 1) 인간과 동물의 관계 2)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과 자연존재로서의 인간의 관계 3) 육체와 영혼의 관계 4) 이성과 충동(본능)의 관계 5) 문명과 야만의 갈등 등이 그것이다).이는 다시 '주체와 타자'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재분류 될 수 있는데 여기엔 '몸',  '마음'. '인종'의 문제들이 개입된다. 각각 '골상학', '심리학', '인류학'과 같은 세부적 분과 학문 영역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포함된다. 저자의 이런 주장을 보다 면밀히 독해한다면 서구에서의 서구적 개인의 역사적 구성에 대한 학적 탐구(인간, 인간 본성, 인간의 역사,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탐구)는 서구 이외의 타자에 대한 바깥에 대한 탐사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장에서는 근대적 개인의 형성과 그것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주로 개인의 내밀성의 형식을 표지하는 수단들(편지, 일기, 자서전)의 흔적들을 통해 탐색한다. 이는 개인의 자기 동일성의 현존적 표지(表紙)가 어떻게 양식화되는가를 밝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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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쟈그 아탈리와 미래의 물결: 신유토피아-하이퍼 민주주의?

* 한겨레(2007. 5. 11)  / [블로그] 21세기 신유토피아 - 하이퍼 민주주의를 말하다
자크 아탈리의 <미래의 물결>
블로그
인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 미래를 알 수 있을까? 미래는 꿈과 희망과 동경의 대상인가? 아니면 절망과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가?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늘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은근한 동경이나 왠지 모를 불안이 모두 미래를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객관적 실체로 여기는 삶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떨까? 나아가 미래가 결코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로부터 예견되거나 결정지어지는 우리의 인식 영역 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일반화된 신유목주의(노마디즘) 시대의 예견을 통해 일약 최고의 미래학자로 명망을 얻고 우리 시대에 가장 왕성한 지적 사유를 펼치고 있는 자크 아탈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선택이 앞으로 다가올 50년 후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선언하면서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미래란 예측 가능한 영역이며, 나아가 현재가 그 미래를 준비하며 결정한다. 이처럼 예측 가능한 미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현재는 미래를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에 현재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측 가능한 미래의 역사”라는 이 당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아탈리의 확신은 과거에 대한 이해와 현재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되고 있다.

과거, 역사의 흐름의 법칙을 기록한 미래에 대한 안내서

과거의 역사는 아탈리에게 있어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일관된 법칙을 발견하게 해주는 교과서이었다. 그는 인류가 기록해 놓은 짧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역사가 어떤 법칙 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를 읽어냄으로써 앞으로의 짧은 미래에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를 예언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었다. 에드워드 기본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를 왕조 쇠망사 정도로 인식하게 될 경우 인류의 역사는 단지 왕조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순환하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에 역사란 순환의 역사가 되고 만다. 이런 역사관으로는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나 희망을 전망할 수 없다. 아탈리는 이런 순환론적 역사관 대신에 역사가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한다는 선적 역사관에 입각해 인류의 역사를 다시 분석하였다. 그런 역사관에 따라서 그가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견해 낸 역사의 의미가 바로 그가 말한 <자본주의史>였다.

 

<짧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아탈리는 인류의 역사가 상업적 체제에 있어서 9개의 거점을 중심으로 단계적인 혁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러 왔음을 밝혔다. 그 상업적 체제의 혁명은 12세기 말 플랑드르 지방과 토스카니 지방을 배후로 한 브루게로부터 시작해서 베네치아, 앤트워프, 제노바, 암스테르담, 런던, 보스턴, 뉴욕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생산과 제조와 유통과 기술과 인적 자원과 금융을 지배하는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이동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일정한 법칙을 담고 있으며, 그 법칙에 따라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함으로써 아탈리는 미래의 물결을 과감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각 시대의 상업적 체제를 이끈 거점이 西에서 東으로 이동하는 일관된 법칙을 놓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으로, 그리고 태평양으로 그 거점이 이동되면서 오늘날 태평양 시대를 낳았다. 이런 경제적 거점 이동 현상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설명되었던 부분들이다. 자크 아탈리는 그러한 설명을 역사적 서술들을 통해 확정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여러 미래 사회학자들의 문명 중심 이론들을 들어왔다. 지난 참여정부 이래로 한국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림랜드 이론(rimland theory)였다. 과거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는 대륙을 지배하던 나라들로부터 해양을 지배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해양과 대륙을 연결시켜주는 림랜드(rimland)에 속하는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미국의 지정학자(地正學者)인 스파이크맨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이 이론은 유라시아 지방에서도 특별히 한국이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해석에 기반해 정치가들로 하여금 동북아중심권을 주창하도록 해 주었다. 아탈리의 상업적 체제의 “거점론”은 이런 림랜드 이론보다 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미래를 예견하는데 있어서 훨씬 더 신뢰할만한 이론적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이제 인류는 로스앤젤레스 넘어서 태평양의 신흥 경제 도시로 그 거점이 넘어올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런 거점의 이동에 대한 유추를 통해 우리는 향후 50년 앞의 역사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西에서 東으로의 거점 이동이라는 법칙 외에 거점이 되는 도시의 조건에 있어서도 일관된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에 따르면 각 거점은 거대한 농업과 제조업 배후지를 가져야 하며, 상품과 인적 자원들의 이동과 교류가 원활한 입지적인 조건들, 즉 항만과 공항 등의 시설을 갖추어야 하며,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교류가 보장되는 자유시장 체제 및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문화적 풍토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새로운 10번째 혁명을 이끌어갈 거점 도시는 어디가 될까? 저자는 이 혁명의 진원지를 여전히 멕시코와 남미, 그리고 태평양에 연접한 캘리포니아 남부의 도시로 지목하고 있지만 결국 가까운 미래에 미국은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세력의 지배하는 세계가 펼쳐질 것을 예견한다. 이른바 “일레븐”이 그것이다.

미국의 종말과 “일레븐”의 등장, 그리고 한국

아탈리에 의하면 미국은 궁극적으로 세계 대제국으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말 것이란다. 이미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국가 내적인 문제들을 방치한 채 국제적 혁명을 이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이제 자국 내 이익과 관리에 몰두하게 될 것이며, 국제적 지위는 다른 세력들에게 내주게 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미국의 패권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될 것이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결국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세력으로 부상하는 <일레븐> 국가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 것이다. 자크 아탈리가 제시한 그 일레븐에 속하는 국가들은 일본, 중국, 인도, 러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 멕시코이다.

이 <일레븐>은 현재 경제적, 정치적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국가들이다. 현재까지 이 국가들이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의 패권을 지배하면서 새로운 상업적 주체가 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만일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해 내고 현재의 잠재력을 잘 살려내기만 한다면 저들은 분명히 미래 사회를 이끌 주체들이 될 것이라는 게 아탈리의 예견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아탈리는 한국의 높은 경제 잠재력과 기술력을 <일레븐>에 들 수 있는 요건으로 보고 있지만 몇 가지 문화적, 정치적 상황이 극복되어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한국은 고질적인 관료체제, 해양산업의 소홀, 창조적 계급 양성 및 관리 실패,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 등 거점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몇 가지 결정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잘 극복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한국의 신기술 및 지정학적인 위치상의 이점 등으로 인해서 <일레븐>의 지위를 가지고 세계 거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나 비록 나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가능성이 상당히 요원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탈리의 한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눈여겨볼만하다.

그러나 미래의 물결은 결코 미국이나 <일레븐>과 같은 거점 도시 혹은 국가들의 패권으로만 이끌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 책에서 아탈리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논리이다. 그는 이런 거점 중심의 상업적 체제의 혁명을 넘어서 미래의 물결은 새로운 현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전에 인류 사회의 흐름을 노마디즘으로 예견하여 신유목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처럼 이제 그는 우리의 후손들을 놀라게 할 새로운 미래의 물결을 예견하고 있다. 바야흐로 하이퍼의 물결이 그것이다.

미래의 물결: 하이퍼 제국, 하이퍼 분쟁, 하이퍼 민주주의

자크 아탈리는 미국이든 <일레븐>이든 짧은 미래의 다중심 경제 주체로서 세계를 이끌어갈 국가 혹은 제국은 점차 해체되어 갈 것이며, 그 대신에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하이퍼 제국이 도래하게 될 것을 예견하면서 이를 미래의 첫 번째 물결로 예견하고 있다. 즉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첫 번째 현상은 하이퍼 제국의 도래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이미 유엔의 역할이라든지 보험회사의 발전, 다국적 기업의 거대화 등을 통해서 예견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국가의 기능이 축소되더라도 유목적 주체로서 인류는 하이퍼 제국의 통제 하에서 새로운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굳이 그의 통찰력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구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참고로 하이퍼란 3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어떤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국가를 유기체로서 이해하던 플라톤 식의 국가론은 이미 근대의 사회계약이론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그 사회계약적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한 제국주의적 국가의 멸망과 철저한 사회계약에 입각한 하이버 제국의 등장을 가능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퍼 제국의 등장은 인식 가능하다. 그러나 그 하이퍼 제국이 인류의 삶에 긍정적인 것으로의 변화인가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아탈리의 예견대로 하이퍼 제국은 미래의 두 번째 물결인 하이퍼 분쟁으로 이끌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이퍼 제국의 기능과 역할이 결코 인류의 삶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하이퍼 제국의 등장으로 인한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세계 긍정, 인생 긍정의 문화를 실현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하이퍼 제국의 주체자들과 희생자들이 극명하게 이원화되면서 하이퍼 제국은 하이퍼 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아탈리는 이런 부정적인 미래의 요인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빨리 찾아내는 길만이 인류의 미래가 희망으로 가는 길임을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세 번째 물결인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라는 것이다.

신 유토피아, 하이퍼 민주주의

여기에서 우리는 21세기의 유토피아를 읽게 된다. 그는 500년 전 토머스 모어가 그렸던 유토피아의 현대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토머스 모어의 꿈은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소망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버려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자크 아탈리에 의해서 하이퍼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는 미래의 물결이 결국에는 하이퍼 민주주의라는 신 유토피아로 갈 것이라고, 아니 그렇게 가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항상 희망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절대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하이퍼 민주주의란 하이퍼 제국의 도래와 그에 따른 하이퍼 분쟁을 긍정적으로 해결하여 인류의 희망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사회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하이퍼 민주주의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전위부대 역할을 할 트랜스휴먼(trans human)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다. 트랜스휴먼은 노마드이며, 창조적 계급이고, 이타적인 마인드를 구축한 신 민주주의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선을 대표한 사람들을 그 정신적 조상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저자는 빌 게이츠의 부인인 멜리나 게이츠와 테레사 수녀 등을 이러한 트랜스휴먼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들의 이타적이고 창조적인 역할로 인해 인류는 하이퍼 분쟁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미래의 세 번째 물결인 하이퍼 민주주의를 이끌어 낼 것이다.

하이퍼 민주주의는 이러한 트랜스휴먼들의 역할과 하이퍼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일관된 노력을 추진하는 범지구적 기구들로 인해 이끌려지게 됨으로써 안정적 사회 운영을 구축할 것이다. 마치 19세기 계몽주의자들이 합리적 이성으로 사회적 유토피아의 도래를 예견했던 것처럼 이제 아탈리는 트랜스휴먼과 범지구적 기구들에 의한 21세기의 유토피아로서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퍼 민주주의는 공동의 재산을 개발할 것이며, 집단 지능, 나아가 하이퍼 지능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삶을 존귀하게 하는 본질적인 재산, 즉 가치를 창출하도록 모든 사회적 역량을 구축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지식, 주거공간, 음식, 의료, 일거리, 물, 공기, 치안, 자유, 평등, 존엄성, 네트워크, 유소년기를 누릴 권리, 인간의 존엄성, 이동의 권리, 연민과 고독을 느낄 권리, 사랑의 권리...” 등을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야 말로 인류가 꿈꿔온 사회적 유토피아가 아닌가?

낭만주의의 부활인가? 이성적 사유의 결과인가?

정말 이런 사회가 짧은 미래의 역사에서 도래하게 될 것인가? 그의 이론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언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지난 세기에 우리는 이미 계몽주의의 꿈이 무너진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인류 역시 계몽주의적 가르침에 의해 그같은 유토피아를 꿈꿨다. 그러나 그 때 인류는 합리적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시킴으로써 1,2차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고 무수한 근대주의의 폐해 속에 신음했다. 그러자 포트스모더니즘이 등장해 인류의 유토피아적 꿈을 낭만주의로 치부한 채 희망 없이 그날그날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생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세대에 하이퍼 민주주의를 들고 또 다시 유토피아를 역설하고 있으니 자크 아탈리의 말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설사 또 다시 유토피아를 부정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현실에서는 그것을 꿈꿔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류가 사회에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테니까...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가 낭만적 사회주의자의 장밋빛 비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당위에 대해서까지 부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미래가 하이퍼 제국과 하이퍼 분쟁의 시대를 거쳐 하이퍼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이라는 아탈리의 모든 이론적 디테일을 우리가 다 검토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이론적 체계로 볼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는 그의 노력은 분명 이성적 사유의 과정임에 틀림없다. 그의 낭만주의적 견해는 그가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모두의 꿈이자 희망이기 때문에 나타난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닐까? 암튼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서 인류가 가까운 미래에 어떤 세계를 창출해야만 하는 지 그 분명한 목표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렸다는 그의 권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결국 그와 같이 낭만적 유토피아의 꿈을 다시 한 번 꿔도 괜찮지 않을까? 어쩜 우리는 지금 그 꿈을 잃어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도 하이퍼 민주주의를 말해야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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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아줌마, 앞집 아저씨가 만든 '희망세상'
  <박원순의 희망탐사·10>부산 반송동 사람들
  2007-05-11 오전 11:21:04
  '희망세상'을 만든 반송사람들
  
  부산의 반송동은 꽤나 유명한 마을이다. 여러 신문이 앞 다퉈 이 마을을 소개했으며, 행자부와 국가균형발전위는 대한민국 지역혁신 박람회를 통해 반송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의 대표적 사례로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건교부가 추진하는 '살고 싶은 시범마을'로 선정됐다.
  
  그러나 반송동은 넉넉하지 않은 마을하다. 집값도 높지 않고 임대아파트들이 밀집해 있다. 그 넉넉지 않은 마을의 구석구석은 그보다 더 값진 넉넉한 인심과 사람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가득 메운다. 그래서 반송동은 유명한 마을이 됐다.
  
  반송마을의 저력은 높은 집값이나 대단위 공단이 아니라 반송동 주민들로 이뤄진 마을 공동체 '희망세상'이다. 전국에 수많은 마을 가운데 하나였던 반송마을을 지역주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전국의 마을과는 또 다른 최고의 브랜드 '반송마을'을 만들어낸 그들을 찾아 부산에 갔다.
  
▲ 도시에서도 아름다운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반송동 사람들. ⓒ희망제작소

  어려움에서 나온 진한 애정, 마을을 바꾸다
  
  그들은 달랐다. 눈빛이 달랐고 푸릇한 삶의 향이 그득했다. 희망세상의 5평 사무실을 가득 메운 희망세상 전 회장인 고창권 해운대구 구의원과 김형도 회장, 김혜정 사무국장, 석연실 총무간사, 정화헌 행복한 나눔가게 팀장, 김태성 좋은 아버지모임 기획홍보팀장, 김선미 운영위원 그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반송마을을 생기 가득한 마을로 바꿨다.
  
  반송마을은 지난 60~70년대 부산시 곳곳에서 철거된 판자집 주민들이 단체로 이주한 마을이다. 소외되고 지역주민 사이에 패배감과 소외감이 팽배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다들 돈 벌어서 이 마을을 뜨려는 꿈을 안고 살았다.
  희망세상의 전신인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든 고창권 의원은 9살 때 이곳으로 이사 왔다.
  
  "나 또한 어릴 때 어려운 형편에 이곳에 왔어요. 나중에 의대를 졸업하고 다시 여기에 돌아와 개업해 활동하면서 고향과 다름없는 이곳을 사람들이 뜨길 바라는 마을이 아닌 살고 싶어하는 마을로 바꾸고 싶어졌어요. 몇 사람들이 의기투합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98년 만들어진 것이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다들 어려웠기에, 다들 이곳을 뜨고 싶어 했기에 반송마을에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이곳을 뜨고 싶어 했던 주민들이었다는 것은 그들 속에 '왜 우리가 사는 마을은 이럴까', '우리 마을은 달라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반송마을에 대해 애정도 더 클 수 있었던 거죠. 지금까지는 그럴 계기가 없었던 거예요. 조금씩 달라지는 마을의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용기를 다들 얻게 됐어요. 주민들이 점차 탄력을 받았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우선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소모임이었다. 마을 신문이 발행되는 한편 여러 행사가 벌어져 주민의 화합을 도왔다. 제일 먼저 조직된 소모임이 '함께 나눔반'이었는데 노인과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해 밑반찬을 만들어주는 봉사모임이었다. 반송마을에 영세민 임대아파트가 집중되어 있어 3000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가장 필요한 일들을, 지역주민들이 먼저 찾아 한 것이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자녀교육반, 영아반도 만들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좋은 아버지 모임'도 만들었다.
  
  주민이 모두 볼 수 있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어린이날에는 지역의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잔치도 벌이는데 주민들이 몇만 원씩 낸 돈으로 이뤄지는 일이라 어렵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역주민 6만 명 가운데 1만 명이 넘게 참여하는 마을의 큰잔치가 됐다.
  
  옆집 아줌마, 앞집 아저씨가 운영하는 희망세상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시작한 지 6년이 넘으면서 반송을 넘어 부산 전역으로 확대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운영진들도 좋은 모임들이 부산 전체로 확대되면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희망세상'이라는 새 이름을 달고 부산 전체로 활동을 확장했다. 함께 하는 지역이 넓어지고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 그들의 활동 또한 더욱 다양해졌다. '행복한 나눔가게'와 '느티나무 도서관'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 반송동 사람들의 생활나눔터가 되고 있는 '행복한 나눔가게'. ⓒ희망제작소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활동하는 고리를 만들고자 설립한 '행복한 나눔가게'는 헌 물건을 기부받아 판매하는 재활용 가게로 수입금은 어린이 지원사업에 쓰고 있다. '느티나무 도서관'은 그저 책만 있는 도서관이 아니라 주부들로 구성된 도서팀을 두어, 어린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학습여행을 함께하는 등의 적극적 활동을 벌인다.
  이웃들이 이웃에게 벌이는 행복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따뜻한 활동에 힘입어 희망세상의 회원도 늘어났다.
  
  김형도 회장은 "회원도 적고 회비도 들쑥날쑥 했는데 지금은 200여 명의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회비를 내고 있어요. 많지 않은 숫자지만 결코 적지 않지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 덕에 전에는 상근 주부들에게 전혀 지원을 못했는데 요즘은 반찬값이라도 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사무국에는 사무국장을 포함하여 상근자가 3명이 있다. 모두 이 지역에 사는 주부들이다. 17명의 운영위원도 길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지역주민들이다.
  
  "저는 빵집 아저씨였어요. 너무 멋진 일 아닌가요? 런닝에 슬리퍼를 신고 마을 앞에서 인사 나누던 옆집 아저씨와 앞집 아줌마, 뒷집 총각이 마을을 새롭게 바꾸는 이 기적 같은 일을 진행할 회장이 될 수 있어요."
  
▲ 희망세상 회장 김형도 씨. ⓒ희망제작소

  '빵집아저씨' 김형도 씨의 말에 자부심이 가득 묻어난다. 이유 있는 자부심이다. 실제로 지역에 뿌리를 받고 살아가던 평범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학습과 실천을 통해 지역운동가가 되고 있다. 북한 핵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FTA는 무엇인지, 간부가 되려면 어떤 품성을 가져야 하는지 등을 공부한다. 소모임이나 단체운영은 어떻게 하는지, 지역주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는 등의 방법도 배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10년을 그리다
  
  희망세상이 탄생한 지 10년이 되어간다. 지난 10년의 성과도 있고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각오도 있다.
  
  김형도 회장은 "주민자치위원회의 이름으로 '청소년선도자율방범단'을 운영하면서 마을 순찰을 도는 등의 활동을 벌이는데 실제로 청소년 범죄율이 줄었어요. '소년분류심사원'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입소 청소년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하더라고요. 믿기세요? 다른 지역에서도 그런 방범단을 운영하겠지만 저희는 다른 활동과 아울러서 하니깐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신뢰를 갖고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이런 수치적 변화와 더불어 반송마을을 다루고 있는 언론의 보도들, 중앙정부에서의 다양한 지원책과 시범마을 등으로의 선정 등은 그들의 지난 10년의 성과를 말해주는 것이다.
  
  성과의 크기만큼 앞으로의 각오도 단단하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벌이는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지원사업'의 반송지역 프로젝트 조정을 맡고 있는 이승훈 씨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반송지역학교를 새롭게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놓는 것보다는 실질적으로 아이들을 지원하고자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여기에 희망세상의 '희망의 사다리운동'이 함께 한다.
  
  '희망의 사다리운동'은 밥을 굶거나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없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고 하는 마당에 모든 아이가 사랑받게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먼저 들지만, 그래도 희망세상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쓸데없는 나무토막도 연결되면 훌륭한 사다리가 되잖아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지역과 지역이 만나면 불가능한 일은 없지 않을까요? 교육부의 지원은 5년이 지나면 끝나는데 벌써 4년차가 됐어요. 하지만 교육복지사업은 계속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희망의 사다리운동을 생각하게 됐어요." 김형도 회장의 설명이다.
  
  "우선은 학교를 넘어서서 지역교육공동체를 만들려고 해요. 마을 전체가 하나의 학교, 마을 사람 모두가 교육자가 되는 거죠. 이렇게 하면 복지정책과 교육정책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어요. 또 교육부 사업으로 인한 성과를 지속시키고 자생력을 기르기 위해 별도의 회원체계를 운영하는 데에 단 몇 천 원씩이라도 내는 사람들이 300여 명으로 늘어났어요. 정부의 예산은 경직성이 있지만 이렇게 모여진 돈은 가정과 얽힌 복잡한 문제로 둘러싸인 어린이들을 유동적으로 지원하는 데 효과적이죠. 지역사회가 학교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왔고, 앞으로도 이 사업에 주력하고자 해요."
  
▲느티나무 도서관. ⓒ희망제작소

  자랑스러운 명함, "희망세상의 회원입니다."
  
  희망세상은 이렇게 지역사회를 바꿔나가고 있지만 그곳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먼저 바꿔놓았다. 사람을 바꾸는 일, 진정성이 없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김선미 운영위원은 희망세상을 두고 '나의 종교'라고 표현한다.
  
  "평범한 주부였죠. 그런데 희망세상을 만들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풍물을 배웠고, 선거운동도 했고, 명함도 생겼어요. 마을신문의 편집부 일을 하는데 사진도 찍고 글을 쓰기도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절을 찾아 또는 교회를 찾아 잘못을 반성하고 앞날의 각오를 다지듯 제게 희망세상이 그래요. 일을 하다 보니 봉사가 무엇인지 알겠어요. 작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이 내 앞에 열려 있으니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고요. 여기에서 일하면서 어엿하게 성장한 저를 발견합니다."
  
  김선미 씨가 가지고 있다는 명함은 그럴싸한 직책이 쓰여 있는 그렇고 그런 명함이 아니다. "희망세상의 회원입니다"라는 자부심 넘치는 명함이다.
  
  사무실을 나와 그들이 해 온 일들을 곳곳을 다니면서 소개받았다. 동네 주변은 주민들이 직접 만든 벽화로 갤러리가 따로 없었고, 아파트 뒤 작은 언덕은 나무와 야생화가 가꿔진 아이들의 학습장이 되었다. 그냥 스쳐지나갈 만한 구석구석에도 그들이 함께 한 값진 경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 속에서 제일 중심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을 주민 모두가 공감하며, 활동가들의 다양한 활동의 중심을 지나는 궤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었다. 마치 지역 활동의 동력이 바로 가족에게 있었듯이 말이다.
  
▲ 반송동 사람들. 뒷줄 왼쪽부터 김태성 고창권 김형도 (필자를 건너 뛰어) 이승훈 정화언 씨. 그리고 앞줄 왼쪽부터 김정숙 김혜정 송정숙 김선미 석연실 씨. ⓒ희망제작소

  
면담일시 -2006년 10월 17일 오전 11시
  
  면담장소 -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2동 77번지
  
  면담인사 - 고창권(해운대구의회 의원. 전 회장.의사) 김형도(희망세상 회장) 김혜정(희망세상 사무국장) 이승훈(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지원사업 반송지역프로젝트 조정자) 석연실(희망세상 사무국 총무간사) 정화언(희망세상 행복한나눔가게 팀장) 김태성(희망세상 좋은아버지모임 기획홍보팀장) 김선미(희망세상 운영위원.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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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도덕 비판의 도덕’에 관한 연구

박종균(한남대 전임연구원)


1. 들어가면서


   니체는 도덕을 오직 비판하고 파괴하려고만 했는가? 아니면 도덕의 비판에 대한 새로운 도덕을 정립시키려 했는가? 이러한 논쟁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권위 있는 니체 해석가들은 니체가 비록 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옹호하고 있는 바 그것을 도덕적 가치로 여길 수 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즉 니체를 도덕 비판의 도덕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카우프만(Walter Kaufmann)같은 학자는 “승화”(Sublimierung)의 개념을 통해 이를 논증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 즉 충동들간의 세력다툼이 의미하는 바는 동물적 본능의 무차별적인 발산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니체는 『서광』(Morgenröte)에서 “자기억제와 순화 및 그것의 마지막 동기”라는 제목의 긴 아포리즘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1) 이를 통해 카우프만은 니체에게서 나치주의의 혐의로서의 초인(Übermensch) 사상2)을 벗겨내고 니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것은 반정치주의자로서의 니체, 철저한 개인주의자로서의 니체를 말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관련해서 “자기극복”을 통한 “자기만족”이라는 개인적 가치를 지향한 도덕주의자로서의 니체의 상이 새롭게 부상한다. 샤츠키(Theodore Schatzki) 역시 카우프만의 개인주의 해석을 따르면서, 니체의 관점을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순응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주의적 윤리학”3)이라고 부른다. 누스바움(Martha Nussbaum)도 비슷한 입장에서 니체는 “자기지배와 자기계발이라는 스토아적인 가치의 부활”4)을 추구했다고 보면서 니체의 주장을 스토아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게어하르트(Volker Gerhardt)도 니체는 “미래의 도덕”, “비도덕주의자 또는 자유로운 정신들을 위한 도덕”, “비도덕주의의 개인적 도덕”을 주장했다고 해석한다. 즉 니체가 솔직성, 진실성, 책임성, 독립성 등과 같은 가치들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니체가 도덕적 요구를 포기했다는 주장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견해이다.5) 야스퍼스도 같은 맥락에서 니체의 보다 높은 인간형에 대한 요구는 그 자체로 도덕적인 요구라고 지적한다. “새롭고, 더 높으며 미정의 도덕, 그것은 ‘창조자의 도덕’이다. 이것이 니체에 의해 형상을 물론 내용에 따라 말해진 것이다. 모든 가치의 창조적 재평가는 이 새로운 ‘도덕’을 초래한다.”6) 톤게렌(Paul van Tongeren)역시 게어하르트와 비슷한 입장에서 니체의 도덕비판이 어느 정도로 도덕적․규범적으로 동기부여 되었는가를 논의한다. 그에 의하면 니체의 도덕비판의 도덕, 다시 말해 도덕적 이상은 삶을 권력의 의지 즉 투쟁으로 이해하고 이 투쟁이 종료되려고 할 때, 투쟁을 요청하고 그것을 강화시키려는 “투쟁의 도덕”이라는 것이다.7) 


   이상에서 살펴본 견해를 종합해 볼 때, 니체는 그의 철저한 도덕비판에도 불구하고 도덕비판의 도덕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논의가 전혀 억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니체가 옹호하는 가치를 도덕적이라고 보는 견지에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2장에서는 니체의 도덕에 대한 계보학적인 분석을 통해 도덕적 가치의 유래를 고찰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니체의 도덕 비판의 방법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3장에서는 니체가 작업한 도덕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한 비판의 양상과 철저한 비판의 이유를 개인적 삶과 문화의 문제와 연계시켜 논의할 것이다. 4장에서는 니체의 도덕 비판의 도덕, 즉 새로운 도덕을 정립하기 위한 원리가 무엇인지를 고찰할 것이다. 니체가 도덕 비판을 통해 진정으로 의도하는 것이 단순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였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모든 가치에 대한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는 새로운 가치 창조라는 견지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니체의 새로운 도덕이 오늘의 현실에 어떤 의의를 갖는가를 논의함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한다.


2. 도덕의 계보학

   니체는 근대와 함께 시작된 보편성으로부터의 이탈을 “신의 죽음”으로 극화한다. 신은 곧 보편성을 뜻한다. 니체가 보기에 신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조차 신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현대인들은 오히려 대용품으로서의 신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거짓 무신론자”였던 셈이다. 특히 도덕은 무신론자들의 신의 대용품이다. 이점에 대해 야스퍼스(Karl Jaspers)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계몽의 과정을 통해 신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 동안의 문명화 과정을 통해 그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적 존재(궁극성) 없이는 살 수 없도록 길들여져 왔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에 회의적인 사람들도 그들의 삶의 의미를 부여받기 위해 도덕의 자명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8) 또한 베르그만(Frithjof Bergmann)은 모든 도덕적 표현은 근본적으로 신학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유죄’, 도덕적인 의미에서 ‘책임성’, 도덕적인 의미의 ‘그릇된’ 또는 ‘악’ 등과 같은 용어의 완전한 의미는, 그것들이 신에 대한 믿음과 분리된다면, 파악될 수도 재 진술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것들은 세속화될 수 없는 신학적 언어의 일부인 것이다.9)


   바로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신을 떠나 보내는 사람은 도덕에 대한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한다”10)고 말한다. 신을 추방한 근대인들은 그 허전함을 도덕으로 메우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니체에게 도덕적 가치의 유래11)에 대한 물음은 가장 우선적인 질문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정초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2)


   그렇다면 도덕적 가치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도덕적 가치는 인간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역사단계에서 어떤 특정한 유형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방법을 “계보학”이라 일컫는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을 찾자마자 그 원인에 대한 원인을 묻는 습관이 있다. 기원에 대한 연쇄적 질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 즉 신의 도입을 초래한다. 계보학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거부한다. 계보학은 사건의 발생 시점에서 시작하여 그것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봄으로써, 그 사건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존재의 출현을 막아낼 수가 있다. 더욱이 그것은 그 사건의 발생의 시점에서의 필연성을 부정함으로 해서, 지금까지 그것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지배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고도의 정치 권력의 문제와 연계되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에서 계보학을  자연과학적 의미에서의 “역사적 철학”(형이상학적 철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이라고 부른다. 니체는 계보학을 통해서만 “날카롭고 중립적인 눈에게 더 나은 방향, 즉 실제적인 도덕의 역사에 대한 방향을 제공할 수 있다”13)고 믿었다. 그리하여 니체는 지금까지의 철학의 오류는 특정한 시대에 한정된 개념을 영원한 것이라고 믿는데 있는 것이며, 모든 개념은 되어진 것, 특수한 역사적 상황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되어진 것이다. 영원한 사실들이란 없다. 절대적인 진리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따라서 역사적으로 철학하기가 지금부터 필요하고, 그와 더불어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14)


   계보학은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도덕의 생성근거를 살펴봄으로써 도덕을 비판하고자 하는 니체의 방법론이다. 니체는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유럽적인 도덕성을 저 멀리서 한번 알아보기 위해서, 그것을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다른 도덕성들에 견주어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한 도시의 탑들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고자 하는 나그네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는 이를 위해 도시를 떠난다. 편견에 대한 편견이 되지 않고자 한다면 ‘도덕적 편견에 대한 사고’는 도덕 바깥의 한 위치, 즉 사람들이 올라가고, 기어오르며, 날아가야만 하는 선과 악의 저편 어딘가를 전제한다.15)


   그런데 도덕을 떠나 도덕을 조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도덕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도덕에 길들여져 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제 이를 악물자! 눈을 부릅뜨자! 조정키를 단단히 붙잡자! - 우리는 도덕의 바로 위를 넘어 항해하고 있다. 이 방향으로 항해를 감행함으로써, 우리는 도덕성이 되어버린 우리 자신의 몸뚱이를 억누르고 갈기갈기 찢을지 모른다”16)라고 하면서 도덕을 떠나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것인가를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계보학은 도덕으로부터 벗어나서 도덕을 비판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Gill Deleuze)는 계보학의 비판적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보학은 기원의 가치와 가치의 기원 둘 다를 뜻한다. 계보학은 상대적인 또는 공리적인 가치들에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가치들에 반대한다. 계보학은 가치 자체가 파생되는 가치들의 요인들이 다름을 보여준다. 계보학은 따라서 기원 또는 탄생을 의미하지만 기원에서의 차이 또는 거리를 또한 의미하기도 한다. 계보학은 기원에 있어서 고귀함과 저속함, 고귀함과 천박함, 고귀함과 데카당스를 뜻한다. 고귀함과 천박함, 높고 낮음 - 이는 정말로 계보학적이고 비판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해되면 비판은 역시 그것의 가장 명확한 속성이다.17)

   니체는 어원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선”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규명한다. 이에  따르면 “선”이란 개념은 모든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고귀한(vornehm)귀족적인(edel), 정신적으로 우월한 등의 표현에서 파생했으며, “나쁨”이란 개념은 천민적인(pöbelhaft), 저급한(niedrig), 비천한(vulgär) 등의 표현에서 파생한 것이다.18) 그런데 이때의 “나쁨”은 “악”이란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좋음”과 “나쁨”은 단지 타고난 성격을 지칭할 뿐이지, 찬양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한 것이며, 원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지는 자연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좋음”과 “나쁨”이란 개념의 유래를 정치적 또는 계급적으로 해석한다. “정치적인 우월 개념이 늘 정신적인 우월 개념을 초래하는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19)

 

은혜를 은혜로서, 원수를 원수로서 보복할 힘을 가지고, 또한 그것을 실제로 행사하는, 즉 감사할 것이 있고 보복심이 강한 사람은 좋다라고 불려진다. 반면에 무력하고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은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 . . 좋은 사람들은 소수의 계층이고 나쁜 사람들은 먼지와 같은 대중들이다. 좋고 나쁜 것은 오랫동안 고귀하고 저속한 것, 주인과 노예와 같은 것이다.20)

 

   그런데 사회적 신분과 특성을 의미하던 말인 좋음과 나쁨의 관념이 어떻게 전혀 다른 가치들인 선과 악으로 대체가 되었는가? 이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것의 과정은 원한(Ressentiment)을 통해 성립하는 바, 그것은 약자에 의한 심리적 과정으로 실제적인 아닌 상상적인 혹은 정신적인 복수로 그들 자신을 보상하면서 이루어진다. 즉 노예는 귀족의 힘과 권력을 두려워한다. 그는 무기력하여 주인의 자리를 차지할 힘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 무리의 가치가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 귀족을 극복하려고 한다. 따라서 귀족에게서의 좋음과 노예의 좋음은 매우 다른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귀족적 인간은 그 개념을 자신에게서 고안해 낸 후 반대 개념을 생각해 내는 데 비해 노예는 상대의 가치를 먼저 나쁜 것으로 정한 후 자신을 그 결과를 평가한다. 그 결과 주인의 덕이라든지 힘은 죄가 되며 자신들 무리들의 덕목을 선으로 여기게 된다. 단순한 성격을 지칭하던 “나쁨”이 이제 드디어 증오의 대상으로서의 “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빈곤한 자들만이 선한 사람이다. 가난한 자들, 천박한 자들만이 선한 사람이다. 고통받고 있는 자들, 결핍된 자들, 병든 자들, 추악한 자들만이 경건한 자들이고, 신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다. 은총은 그들에게만 있으며, 반대로 너희, 너희 고귀한 자들, 강자들, 너희들은 영원히 약하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우며, 만족할 줄 모르고, 신을 모르는 자들이다. 너희들은 또한 영원히 은총을 바지 못하고, 저주받으며, 낙인찍힌 채로 존재할 것이다.21)


   이렇게 “노예적” 가치판단의 배후에는 무력하고, 저급한 다수의 대중들이 소수의 지배계층에 대한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다. “도덕적 판단과 편견은 정신적으로 편협한 사람들이 덜 그러한 사람들에게 즐겨 행하는 복수인 동시에, 그들이 자연에 의해 나쁘게 배려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22) 요컨대, 도덕은 나약한 자들의 강한 자들에 대한 “정신적인 복수행위”로서 그 성격상 도덕에 있어서 “노예 반란”(Der Sklavenaufstand)이 성공한 결과이다.23) 그러나 이러한 노예들의 가치반란도 그 자체가 창조적이 되어 가치를 산출한다는 점에서는 힘에의 의지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24) 단지 그것이 열등한 자들의 가치를 보편화시키고 절대화함으로써 삶을 부패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모든 선한 것들은 전에는 악한 것들이었다.”25)


3. 도덕 비판과 문화의 타락

   니체는 차이성과 다양성을 묵살하고 극단적인 평등으로 몰고 가는 도덕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가한다. 먼저 도덕의 보편성에 대해서, 도덕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가치가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시기의 특수한 계급에 의한 특수한 가치판단에 불과하다.26)  니체에게 있어 도덕은 사회적으로 보자면 특정한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관습체계(das System der Sittlichkeit)에서 기원한다. “윤리(Sittlichkeit)란 어떤 종류의 관습이든 간에 관습에 대한 복종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관습(Sitten)은 그러나 습관적인 행위와 평가방식이다.”27) 그리고 “도덕은 공동체를 어떤 수준, 어떤 질로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다.”28) 즉 관습은 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 해가 되는 것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나타내며 그 관습은 세월이 흐르면서 공정화, 불변화 되면서, 관습의 기원은 차츰 망각되고 관습의 외면적 형식은 보다 공고해진다. 관습으로서의 도덕은 관습 그 자체가 도덕이 되었다는 것보다, 그것에 대한 복종의 감정에서 도덕이 연유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복종하는 고도의 권위”29)가 도덕이다.


   따라서 관습에서 유래한 도덕은 보편 타당한 원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집단이 개인을 굴복시키기 위한 강요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강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로운 복종, 거의 본능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그것은 쾌락(Lust)과 결부되어 그 때부터 미덕(Tugend)으로 불리게 된다.”30)   


   니체는 도덕의 보편성 비판에 이어 도덕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있다. 즉 니체에게 있어서 도덕은 어떤 절대적, 신적 영역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모든 다른 현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도덕은 한 개인 속에 존재하는 여러 충동들 가운데 한 충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 점에서 “도덕에 있어서 인간은 분열되지 않는 자기(Individuum)가 아니라 분열적인 자기(dividuum)로서 행동한다”31)라고 말한다. 분열적인 자기(dividuum)는 도덕의 절대성뿐만 아니라, 도덕의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인격의 통일성마저도 부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 파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32) 니체는 “한 도덕에의 의지는 따라서 이 도덕에 짜 맞추어진 성품의 다른 종류의 성품들에 대한 독재(Tyrannei)로 판명된다. 그것은 파괴이거나 지배적인 것을 위한 단일화이다.“33)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도덕은 절대적일 수 없다. 니체가 모든 도덕은 거짓, 오해 또는 왜곡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절대성이란 거짓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34) 그리하여 그는 ”도덕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 도덕은 어떤 현상들에 대한 의미부여(ausdeutung)에 불과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된 의미부여(Missdeutung)이다.“35) 즉 니체에게 절대적인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이 불가능하고 허위적인 것이라면, 니체가 그토록 철저하게 도덕을 비판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도덕이 거짓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도덕이 삶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양한 충동(본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충동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도덕의 지배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충동들은 악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충동들은 억압될 뿐이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정신의 병이다. 왜냐하면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충동들은 안으로 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가 “양심의 가책”을 “깊은 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아주 심한 병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없어도 될 마음 속 깊이에 존재하는 병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36) 그가 그의 저작 곳곳에서 도덕을 ‘삶을 부정하는 가치’로서 평가하고 있는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도덕에 길들여진 삶이 늘 부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삶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다.37)


   도덕은 이처럼 한 개인의 삶만을 부정하고 억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어떤 도덕을 유일한 가치기준으로 삼게 됨으로써 인간적 삶의 풍요로운 터전인 문화의 타락이 초래케 된다. 니체가 노예 도덕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를 상징화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도덕은 노예의 문화이다. 예컨대 고상한 근대의 자유주의 이념이나 민주주의 정치체제, 자본주의 경제체제 역시 노예적 도덕에 기초한 정치 이념이나 체계에 다름 아니다.


   정치에서의 노예 반란의 성공 즉, 자유주의의 등장은 모든 인간에 대한 자유와 평등38)의 보장이라는 정치 이념을 실천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니체는 이를 약자들의 자유와 평등일 뿐이며,39) 이러한 사상을 기초로 한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국가의 타락된 형태라고 비판한다.40)

 

자유주의적 제도들은 그것이 완성되자 마자 자유주의적이길 멈춘다. 이후에 자유주의적 제도들만큼 지독하고도 근본적으로 자유를 손상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완수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도 남는다. 자유주의는 힘에의 의지를 저해한다. 그것은 도덕으로 승화된 산과 계곡의 평준화다. 그것은 사람들을 왜소하게, 비겁하게 그리고 향락적으로 만든다. 그것과 더불어 군집동물이 늘 승리한다. 자유주의 그것은 독일어로 가축 무리화(Heerden-Verthierung)이다.41)

 

   근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인류의 진보가 아니라,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노예 도덕의 승리”, 곧 “인류의 퇴보”이자, “인간의 치욕”이었다. 니체가 이와 같은 노예문화 속에서의 삶을 쇠퇴한 삶, 유약한 삶, 피곤한 삶 등으로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니체는 또한 근대사회의 산업화의 결과로 나타난 비인간화, 인간의 왜소화(기계의 나사 같은 존재), 자본화와 물신주의의 현상으로서의 화폐를 통한 노예화, 인간 및 일상생활의 정치화 문화영역에서의 야만화를 비판한다. 기계노동에서 인간은 점차 내적 감각의 불모성, 즉 비인격성과 비주체성(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정신적 자각의 결여), 비인간성(자기 자신의 내면적․도덕적 가치에 대한 결여)과 익명성(이름 없는 대중으로의 자기 도피)을 경험한다.42) “삶은 이러한 비인간화된 구동장치와 기계주의에서, 노동자의 비인격성에서, 그리고 노동분화의 잘못된 경제학에서 병든다. 목적은 사라져가고, 문화 수단은, 근대의 학문적 운용은 야만화된다.”43) 화폐가 세속화된 힘으로 나타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삶의 가치는 화폐 획득과 소비를 통해 규정된다. 화폐에 대한 물신주의가 완전히 삶을 장악할 때, 그 외의 모든 가치들은 경제적 가치에 종속된다. 니체는 물질적 부에 대한 욕망과 병행해서 영혼의 빈곤이 진행되고 있음을 직시한다. “그들[쓸데없는 인간들]은 부를 얻지만 그로 인해 더욱 가난해 진다. 그들은 권력을 탐내며 먼저 권력의 보루인 많은 돈을 탐낸다. 이 무능한 사람들은!”44) 이러한 가치가 지배하는 곳에서 인간 영혼의 자기소외와 문화적 타락이 이루어진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황금화 되고 지나치게 치장한 천민”45)이 되는 것이다.


4. 도덕 비판의 도덕

   이상에 본 바와 같이 니체는 도덕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도덕 비판은 새로운 가치 정립을 위한 토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사유의 태도를 요하며 인간을 보는 입장에서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필요로 한다. 또한 모든 부정과 전복은 긍정을 위한 조건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하며, 또한 이러한 긍정은 모든 가치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창조하는 자 외에는. . . 그런데 창조하는 자란 인간의 목표를 창조하고 대지에게 그 의미와 그 미래를 부여한 자이다. 이러한 자들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창조한다.46)

 

   가치가 인간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도덕기준을 설정하는 것, 이것이 니체가 시도하는 가치전도의 핵심일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모든 부정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에서의 긍정으로 유도되며 그의 비도덕주의는 비인간적 도덕을 극복하는 도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삶을 위해 세계를 해석하고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문화 생활을 영위한다. 단순히 삶을 영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의 자신 이상이 되기 위해 소유하고 의욕하며 생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확보되는 것이 가치라고 할 수 있는데, 니체는 가치에 대해 “가치라는 관점은 생성 과정 속에 나타나는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복잡한 형성물에 관한 보존, 상승의 조건에 관한 관점”47)이라고 말한다. 즉 가치는 생성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과 생성이라는 것은 니체 사유에서 삶이며 삶은 곧 힘에의 의지의 표현으로 사유되어진다. 그렇다면 힘에의 의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 성격이며 이 힘에의 의지가 있는 곳에는 어디서건 그것의 고양을 위해 조건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가치가 존재한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기존하던 최고 가치들의 근저에 존재하는 힘에의 의지는 기존의 가치들의 전복의 원리가 되는 힘에의 의지와는 다르다. 지금까지 가치체계에서 인간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던 것은 선한 이상과 덕목들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통해서 선한 인간이 되려는 의지는 힘에의 의지이기는 하지만 이는 이상들이 힘을 갖게 하고 자신은 무기력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도덕을 숭배하는 선한 인간은 그 가치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이 가치를 무조건적인 것으로 정립하기 때문에 힘을 목표로 하는 인간의 가치평가로부터 가치가 유래한다는 사실이 은폐된다. 그래서 가치들이 그 자체로 존재한 것인 양 믿게 되고 이 가치는 초월적인 것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분명 힘에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지만 이는 힘에 대한 무기력한 포기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새로운 도덕을 위한 원리로서의 힘에의 의지는 성격을 달리한다.

 

자연을 지배하고 힘을 획득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를 지배할 어떤 힘을 획득하는 일. (도덕은, 자연이나 야수와의 투쟁에 있어서 인간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하였다.) 자연을 지배할 힘을 획득하는 일을 마쳤다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자유로이 계속 형성하기 위해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기 향상(Selbsterhöhung)과 강화(Verstärkung)으로서의 힘의 의지 말이다.48)

 

   이제 힘에의 의지는 힘의 본질로써 모든 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평가기준이 되며 모든 것은 그에 비추어 가치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힘에의 의지의 원리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긍정으로서의 도덕이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마땅히 추구해야할 바를 과도하게 강요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데에서, 바로 인간의 삶은 왜곡된다. 인간 내부에 있는 제 충동은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고정된 대립은 없는 것이다. 이를 기꺼이 인정하는 가운데서 삶을 바라보게 하는 것, 이것이 니체의 진정한 의도이다. 삶의 긍정은 곧 대지의 긍정, 몸(Leib)의 긍정이다.


몸은 하나의 큰 이성(Vernunft)이며, 의미들을 지닌 하나의 복합체(Vielheit)이고 전쟁이며 평화이고 양떼이며 목자다.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역시, 육체의 도구이다. 너의 큰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노리개(Spielzeug)인 것이다. . .그 큰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하는 것이다.49)


   결국 가치는 삶과 몸에서 출발하며 이 몸은 단순히 생리적인 몸이 아니라 사유와 느낌이, 갖가지 힘들이 표현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세계는 정지된 불모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는 생동적, 생성의 세계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인간이 아니라 선악의 피안에 선 자, 모든 생명 속에 깃든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자, 사물의 대립을 견뎌내는 자, 위대한 삶의 시인, 즉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상승시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다른 사람들의 동일한 노력과 상충할 때, 어느 정도까지 힘 의지를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즉 가치척도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니체에 있어서 한 행위의 가치척도는 자기 안에서 표현되는 자기극복의 정도이다. 자기극복 없이는 각 개인의 삶의 정초는 불가능하다. 상승되는 힘에의 의지는 사회적인 힘을 사용할 때 동반되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자기개방성”50)이다. 근원적으로 니체는 그들 통해 다양한 도덕들 가운데 인간행위가 규정되는 다원적 규범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5. 나오면서

   니체가 도덕비판을 통해 수행하고자 한 것은 가치들의 유래에 대한 계보학적인 해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도덕적 관념에 대한 계보학적인 고찰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도덕적 가치가 사실은 나름의 목적과 가치를 지닌 해석이나 힘에의 의지의 반영이었다는 점을 여지없이 폭로시킨다. 그런고로 많은 사람들은 니체가 기독교 도덕뿐만 아니라 도덕 전체를 부정하고 파괴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도덕 그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는 도덕성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에 저항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니체가 도덕과의 투쟁을 통해 우리가 인간이 될 것과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것은 바로 도덕 비판이 비판을 넘어 새로운 가치 창조의 원리가 됨을 암시한다. 새로운 가치의 정립이란 관점에서 니체의 도덕 비판을 이해한다면, 도덕이 당위적 규범으로 인간에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의미를 담지하게 될 것이다. 즉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자는 마치 예술가가 예술품을 창작하듯 자신의 규범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도덕비판의 도덕이 현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선, 니체가 주장하는 “네 자신이 되라”는 의미를 본래적인 자기로의 귀환으로 이해하여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일이다. 이는 자신의 실존적 유일함과 존귀함을 깨닫고 더불어 자기 자신을 실현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니체에게서 한 개인이란 전체 속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저열한 대중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자유정신을 소지한 참된 개인으로서의 가능성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오늘날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 체계는 그 제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개인의 삶을 평균화시켜가고 있다. 평균적인 인간의 양산, 틀에 박힌 규범에의 순종, 기술문명에의 지나친 삶의 의존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정신적으로 수동적 삶의 태도가 확산되어가며 도덕적 의미에서는 고상함의 결여가 팽배해 진다. 니체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인간 소외의 시대에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참다운 인간이 되자는 메시지로 공명된다. 


   다음으로, 니체에게 유일무이한 현실은 삶이다. 그는 삶의 도덕을 수립하기 위해 모든 가치의 전복을 시도한다. 지상에서의 이 삶 이외에 어떠한 삶도 없다면 이 삶 자체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이 땅위에서의 현실성 그것이 바로 모든 가치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일한 권위로서 삶에 있어서의 힘에의 의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삶을 확보하고 보존하며 더 나아가 이를 발전 향상시켜 강화하는 것이다.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그 삶과 자신의 인간성을 왜곡시키지 않고 가장 본래적인 자신을 형성하는 것, 이것을 위한 형식으로 요구되어 지는 것이 새로운 도덕이다.      


   끝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철학은 서구의 문화와 그 가치관이 지닌 폐쇄적 경직성을 타파하고, 삶을 삶 자체로 해방시킴과 동시에 삶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 탈근대적 이론가들에 의해 니체의 글은, 삶 이외의 기준으로 삶을 제약하고, 자연적인 본능을 억압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막는 이상주의와 개인들을 평균화된 권리 주체로 길들이려는 온갖 전체주의적 성격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귀중한 텍스트로 이용되고 있다. 과히 ‘니체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영향은 시간이 갈수록 인문․사회학 전 영역에 걸쳐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아직도 니체를 비판하는 반대 진영의 목소리를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니체의 작업을 통해 최우선적으로, 오직 일회적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니체의 작업은 유의미하다고 사려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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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KSA 2.

Die Fröhliche Wissenschaft. KSA 3.

Morgenröte. KSA 3.

Also sprach Zarathustra. KSA 4.

Zur Genealogie der Moral. KSA 5.

Jenseits von Gut und Böse. KSA 5.

Götzen-Dämmerung 1, KSA 6.

Ecce Homo. KSA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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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Morality of Nietzsche's Moral Critique"


   Friedrich Nietzsche is commonly referred to as 'nihilist' on the grounds that he rejects morality. Yet this article dose argue Nietzsche dose argue for a specific morality, based upon what he calls the 'the will to power'.


   The centrality of Nietzsche's attack on morality is a matter of reputation as intention. But his central concern is not the attack and destruction of morality, but a  creation of new value and morality. He attack the claim of moral principles to be universal and absolute, but he dose not deny the proper domain of morality.


   The concept of the value is the key to Nietzsche's philosophy. It is the value of value that he seeks to understand. He had demanded a critique of moral values and announced that he was calling in question the value of these values themselves. And It is the revaluation of values that he undertakes as the goal of his philosophizing. Nietzsche argues, moral values, like all values, aim at the maximization of personal power, and the denial of this "will to power" is but a deception of the weak in order to maximize their slight power at the expense of those who are stronger. Using the life as his criterion, Nietzsche argues that truth is not the correspondence between our ideas and the real world, but the value of those ideas for the life.


   According to Nietzsche the Judaeo-Christian and metaphysical moral that is traditionally accepted as true and valid in European civilization and culture is not other than slave morality. Slave wanted to justify their situations by means of absolute value criteria (good and evil) devoid of a sense of reality, because they are too weak to enforce their masters directly. What is primary in slave morality is the evil, meaning the awesome force and pride of the masters. The good is whatever opposes this evil. The slave values especially those qualities which allow him to elude the oppression of the evil masters: humility, compassion, and a willingness to help fellow sufferers. Yet since the slave is at bottom a frustrated master, his moral outlook is stained with hypocrisy.


   He attacks this morality by exposing its origin and development through the methodology, ie what is called genealogy. He wanted to show the western morality as a slave moral not being rooted in anything fine or admirable but rather in weakness, fear, and malice. Even the noble values that we trust such as freedom, justice, love are the mimicry of impotent hatred. And at the core of those moralities is there ressentiment.


   To the contrary of such "other-worldly", "decadent", "impersonal", "herd", and "life-threatening" values is "naturalistic", "life-affirming" personal virtues. Such values are personal needs, desires, aspirations, and "instincts". The source of such values is individual psychology, depending upon th character and circumstance of the individual.


   Nietzsche views man as more than a being that passively alteration. He believes that man is free and that he develops himself. Thus Nietzsche's freedom without transcendence is by no means intent upon simply returning to mere life. It aspires to the life of authentic creation. The creative trans-valuation of all values must bring must forth his new morality.


       

☞ 출처:  (http://jkp.bj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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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5-1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잽싸게 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