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쟈그 아탈리와 미래의 물결: 신유토피아-하이퍼 민주주의?
| * 한겨레(2007. 5. 11) / [블로그] 21세기 신유토피아 - 하이퍼 민주주의를 말하다 |
| 자크 아탈리의 <미래의 물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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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 미래를 알 수 있을까? 미래는 꿈과 희망과 동경의 대상인가? 아니면 절망과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가?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늘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은근한 동경이나 왠지 모를 불안이 모두 미래를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객관적 실체로 여기는 삶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떨까? 나아가 미래가 결코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로부터 예견되거나 결정지어지는 우리의 인식 영역 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일반화된 신유목주의(노마디즘) 시대의 예견을 통해 일약 최고의 미래학자로 명망을 얻고 우리 시대에 가장 왕성한 지적 사유를 펼치고 있는 자크 아탈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선택이 앞으로 다가올 50년 후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선언하면서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미래란 예측 가능한 영역이며, 나아가 현재가 그 미래를 준비하며 결정한다. 이처럼 예측 가능한 미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현재는 미래를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에 현재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측 가능한 미래의 역사”라는 이 당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아탈리의 확신은 과거에 대한 이해와 현재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되고 있다.
과거, 역사의 흐름의 법칙을 기록한 미래에 대한 안내서
과거의 역사는 아탈리에게 있어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일관된 법칙을 발견하게 해주는 교과서이었다. 그는 인류가 기록해 놓은 짧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역사가 어떤 법칙 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를 읽어냄으로써 앞으로의 짧은 미래에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를 예언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었다. 에드워드 기본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를 왕조 쇠망사 정도로 인식하게 될 경우 인류의 역사는 단지 왕조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순환하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에 역사란 순환의 역사가 되고 만다. 이런 역사관으로는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나 희망을 전망할 수 없다. 아탈리는 이런 순환론적 역사관 대신에 역사가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한다는 선적 역사관에 입각해 인류의 역사를 다시 분석하였다. 그런 역사관에 따라서 그가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견해 낸 역사의 의미가 바로 그가 말한 <자본주의史>였다. |
<짧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아탈리는 인류의 역사가 상업적 체제에 있어서 9개의 거점을 중심으로 단계적인 혁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러 왔음을 밝혔다. 그 상업적 체제의 혁명은 12세기 말 플랑드르 지방과 토스카니 지방을 배후로 한 브루게로부터 시작해서 베네치아, 앤트워프, 제노바, 암스테르담, 런던, 보스턴, 뉴욕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생산과 제조와 유통과 기술과 인적 자원과 금융을 지배하는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이동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일정한 법칙을 담고 있으며, 그 법칙에 따라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함으로써 아탈리는 미래의 물결을 과감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각 시대의 상업적 체제를 이끈 거점이 西에서 東으로 이동하는 일관된 법칙을 놓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으로, 그리고 태평양으로 그 거점이 이동되면서 오늘날 태평양 시대를 낳았다. 이런 경제적 거점 이동 현상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설명되었던 부분들이다. 자크 아탈리는 그러한 설명을 역사적 서술들을 통해 확정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여러 미래 사회학자들의 문명 중심 이론들을 들어왔다. 지난 참여정부 이래로 한국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림랜드 이론(rimland theory)였다. 과거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는 대륙을 지배하던 나라들로부터 해양을 지배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해양과 대륙을 연결시켜주는 림랜드(rimland)에 속하는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미국의 지정학자(地正學者)인 스파이크맨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이 이론은 유라시아 지방에서도 특별히 한국이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해석에 기반해 정치가들로 하여금 동북아중심권을 주창하도록 해 주었다. 아탈리의 상업적 체제의 “거점론”은 이런 림랜드 이론보다 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미래를 예견하는데 있어서 훨씬 더 신뢰할만한 이론적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이제 인류는 로스앤젤레스 넘어서 태평양의 신흥 경제 도시로 그 거점이 넘어올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런 거점의 이동에 대한 유추를 통해 우리는 향후 50년 앞의 역사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西에서 東으로의 거점 이동이라는 법칙 외에 거점이 되는 도시의 조건에 있어서도 일관된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에 따르면 각 거점은 거대한 농업과 제조업 배후지를 가져야 하며, 상품과 인적 자원들의 이동과 교류가 원활한 입지적인 조건들, 즉 항만과 공항 등의 시설을 갖추어야 하며,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교류가 보장되는 자유시장 체제 및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문화적 풍토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새로운 10번째 혁명을 이끌어갈 거점 도시는 어디가 될까? 저자는 이 혁명의 진원지를 여전히 멕시코와 남미, 그리고 태평양에 연접한 캘리포니아 남부의 도시로 지목하고 있지만 결국 가까운 미래에 미국은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세력의 지배하는 세계가 펼쳐질 것을 예견한다. 이른바 “일레븐”이 그것이다.
미국의 종말과 “일레븐”의 등장, 그리고 한국
아탈리에 의하면 미국은 궁극적으로 세계 대제국으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말 것이란다. 이미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국가 내적인 문제들을 방치한 채 국제적 혁명을 이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이제 자국 내 이익과 관리에 몰두하게 될 것이며, 국제적 지위는 다른 세력들에게 내주게 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미국의 패권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될 것이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결국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세력으로 부상하는 <일레븐> 국가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 것이다. 자크 아탈리가 제시한 그 일레븐에 속하는 국가들은 일본, 중국, 인도, 러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 멕시코이다.
이 <일레븐>은 현재 경제적, 정치적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국가들이다. 현재까지 이 국가들이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의 패권을 지배하면서 새로운 상업적 주체가 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만일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해 내고 현재의 잠재력을 잘 살려내기만 한다면 저들은 분명히 미래 사회를 이끌 주체들이 될 것이라는 게 아탈리의 예견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아탈리는 한국의 높은 경제 잠재력과 기술력을 <일레븐>에 들 수 있는 요건으로 보고 있지만 몇 가지 문화적, 정치적 상황이 극복되어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한국은 고질적인 관료체제, 해양산업의 소홀, 창조적 계급 양성 및 관리 실패,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 등 거점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몇 가지 결정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잘 극복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한국의 신기술 및 지정학적인 위치상의 이점 등으로 인해서 <일레븐>의 지위를 가지고 세계 거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나 비록 나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가능성이 상당히 요원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탈리의 한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눈여겨볼만하다.
그러나 미래의 물결은 결코 미국이나 <일레븐>과 같은 거점 도시 혹은 국가들의 패권으로만 이끌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 책에서 아탈리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논리이다. 그는 이런 거점 중심의 상업적 체제의 혁명을 넘어서 미래의 물결은 새로운 현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전에 인류 사회의 흐름을 노마디즘으로 예견하여 신유목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처럼 이제 그는 우리의 후손들을 놀라게 할 새로운 미래의 물결을 예견하고 있다. 바야흐로 하이퍼의 물결이 그것이다.
미래의 물결: 하이퍼 제국, 하이퍼 분쟁, 하이퍼 민주주의
자크 아탈리는 미국이든 <일레븐>이든 짧은 미래의 다중심 경제 주체로서 세계를 이끌어갈 국가 혹은 제국은 점차 해체되어 갈 것이며, 그 대신에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하이퍼 제국이 도래하게 될 것을 예견하면서 이를 미래의 첫 번째 물결로 예견하고 있다. 즉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첫 번째 현상은 하이퍼 제국의 도래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이미 유엔의 역할이라든지 보험회사의 발전, 다국적 기업의 거대화 등을 통해서 예견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국가의 기능이 축소되더라도 유목적 주체로서 인류는 하이퍼 제국의 통제 하에서 새로운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굳이 그의 통찰력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구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참고로 하이퍼란 3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어떤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국가를 유기체로서 이해하던 플라톤 식의 국가론은 이미 근대의 사회계약이론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그 사회계약적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한 제국주의적 국가의 멸망과 철저한 사회계약에 입각한 하이버 제국의 등장을 가능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퍼 제국의 등장은 인식 가능하다. 그러나 그 하이퍼 제국이 인류의 삶에 긍정적인 것으로의 변화인가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아탈리의 예견대로 하이퍼 제국은 미래의 두 번째 물결인 하이퍼 분쟁으로 이끌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이퍼 제국의 기능과 역할이 결코 인류의 삶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하이퍼 제국의 등장으로 인한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세계 긍정, 인생 긍정의 문화를 실현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하이퍼 제국의 주체자들과 희생자들이 극명하게 이원화되면서 하이퍼 제국은 하이퍼 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아탈리는 이런 부정적인 미래의 요인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빨리 찾아내는 길만이 인류의 미래가 희망으로 가는 길임을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세 번째 물결인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라는 것이다.
신 유토피아, 하이퍼 민주주의
여기에서 우리는 21세기의 유토피아를 읽게 된다. 그는 500년 전 토머스 모어가 그렸던 유토피아의 현대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토머스 모어의 꿈은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소망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버려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자크 아탈리에 의해서 하이퍼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는 미래의 물결이 결국에는 하이퍼 민주주의라는 신 유토피아로 갈 것이라고, 아니 그렇게 가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항상 희망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절대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하이퍼 민주주의란 하이퍼 제국의 도래와 그에 따른 하이퍼 분쟁을 긍정적으로 해결하여 인류의 희망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사회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하이퍼 민주주의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전위부대 역할을 할 트랜스휴먼(trans human)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다. 트랜스휴먼은 노마드이며, 창조적 계급이고, 이타적인 마인드를 구축한 신 민주주의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선을 대표한 사람들을 그 정신적 조상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저자는 빌 게이츠의 부인인 멜리나 게이츠와 테레사 수녀 등을 이러한 트랜스휴먼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들의 이타적이고 창조적인 역할로 인해 인류는 하이퍼 분쟁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미래의 세 번째 물결인 하이퍼 민주주의를 이끌어 낼 것이다.
하이퍼 민주주의는 이러한 트랜스휴먼들의 역할과 하이퍼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일관된 노력을 추진하는 범지구적 기구들로 인해 이끌려지게 됨으로써 안정적 사회 운영을 구축할 것이다. 마치 19세기 계몽주의자들이 합리적 이성으로 사회적 유토피아의 도래를 예견했던 것처럼 이제 아탈리는 트랜스휴먼과 범지구적 기구들에 의한 21세기의 유토피아로서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퍼 민주주의는 공동의 재산을 개발할 것이며, 집단 지능, 나아가 하이퍼 지능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삶을 존귀하게 하는 본질적인 재산, 즉 가치를 창출하도록 모든 사회적 역량을 구축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지식, 주거공간, 음식, 의료, 일거리, 물, 공기, 치안, 자유, 평등, 존엄성, 네트워크, 유소년기를 누릴 권리, 인간의 존엄성, 이동의 권리, 연민과 고독을 느낄 권리, 사랑의 권리...” 등을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야 말로 인류가 꿈꿔온 사회적 유토피아가 아닌가?
낭만주의의 부활인가? 이성적 사유의 결과인가?
정말 이런 사회가 짧은 미래의 역사에서 도래하게 될 것인가? 그의 이론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언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지난 세기에 우리는 이미 계몽주의의 꿈이 무너진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인류 역시 계몽주의적 가르침에 의해 그같은 유토피아를 꿈꿨다. 그러나 그 때 인류는 합리적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시킴으로써 1,2차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고 무수한 근대주의의 폐해 속에 신음했다. 그러자 포트스모더니즘이 등장해 인류의 유토피아적 꿈을 낭만주의로 치부한 채 희망 없이 그날그날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생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세대에 하이퍼 민주주의를 들고 또 다시 유토피아를 역설하고 있으니 자크 아탈리의 말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설사 또 다시 유토피아를 부정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현실에서는 그것을 꿈꿔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류가 사회에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테니까...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가 낭만적 사회주의자의 장밋빛 비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당위에 대해서까지 부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미래가 하이퍼 제국과 하이퍼 분쟁의 시대를 거쳐 하이퍼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이라는 아탈리의 모든 이론적 디테일을 우리가 다 검토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이론적 체계로 볼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는 그의 노력은 분명 이성적 사유의 과정임에 틀림없다. 그의 낭만주의적 견해는 그가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모두의 꿈이자 희망이기 때문에 나타난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닐까? 암튼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서 인류가 가까운 미래에 어떤 세계를 창출해야만 하는 지 그 분명한 목표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렸다는 그의 권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결국 그와 같이 낭만적 유토피아의 꿈을 다시 한 번 꿔도 괜찮지 않을까? 어쩜 우리는 지금 그 꿈을 잃어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도 하이퍼 민주주의를 말해야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