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샨 사 지음, 성귀수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10월
절판


인생에 있어 아름다운 젊은 시절엔
서로 헤어진다 해도 곧 다시 만날 거라 여기기 마련.
그러나 언젠가 그대와 나 늙어 시들어지면
그 옛날의 안녕이란 말 그리 쉽게 할 수가 없다네.

그저 좋은 날이라고는 말하지 마시게.
내일도 우리 그런 날 정녕 누릴 수 있으리오?
꿈이라 한들, 우리 서로 맺어준 그 길을 잊는다면,
어찌 때늦은 회한이나마 서로 위로할 수 있으리오?-9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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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묘지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4
조정권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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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月은, 달리는 강물, 들소들의 콧김소리.
오렌지색 무늬를 등에 두르고
달려오는 들소들의 거친 숨소리.
정오의 태양은 中天에서 곤두박질치며
들판에 화살촉을 날리고,
바람은 실로폰 소리같이
大地의 실핏줄을 터뜨려
이미 흘러간 냇물줄기를 다시 끌어당기고 있다.
흙먼지 자욱한 바람 속에서
턱이 굳은 꽃들이 피고 있다.
아, 턱이 굳센 꽃들이 딛고 있는
땅덩어리 같은 힘, 그곳에서
고통이 나를 움트게 하고 나를 내딛게 한 것인가.
위대한 정신이여 오라.
영혼 속으로 방문하라, 두드리라.
지금 저 광막한 大地에서 북을 두드리는
강철 같은 打鍵, 저 소리들이 귀를 단단히 하고
무르팍을 곧추세우게 하였는가.
자, 들어보라, 그들이 오고 있다.
힘의 씨앗을 은밀히 마련하며
영혼 속에 기쁨을 부여하는 봄사냥꾼들,
북소리 울리는 大地를 두 발굽으로 들어올리며
달리는 봄사냥꾼들이
끌어 안으면서 넘쳐 버린 유리빛 바다여,
위대한 정신이여, 다시 오라,
더 가까이 더 가까이
저 대지의 북소리 속에서
내 피를 푸르게 튀게 하라.
거기서 내가 듣던 꽃들의 은밀한 打鐘,
영혼의 마지막날 하얀 성찬.
한 잎 한 잎 내 근심을 벗기어 주는
빗방울보다도 가볍고 작은 손들의 打鐘.
위대한 정신이여 한번만 더 오라,
돌밭에 발굽을 찍으면서 달려가버린
내 푸른 말잔등을 한번만 더
혼신의 힘으로 난타하게 해 달라.
난타하게 해 달라.-28쪽

2

허나, 우리들의 낮 속으로는 거대한 밤이 뒤따르고 있다.
내 시계는 벌써 밤이었다.
나는 몇 번인가 그 밤을 찾아갔다.
초침 하나가 정거해 있는 황막한 대지의
황량한 역,
거기에는 모든 시간들이 정거해 있었다.
내 시계는 벌써 밤이었고
무수한 사람들이 헝겊으로 눈을 가리운 채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의 어둠 속으로 인도되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내내 내 노트에는
쇳덩어리 같은 암흑이 응고되어 있었다.
다음해에도 내 노트에는
쇳덩어리 같은 암흑이 응고되어 있었다.
우리들의 시계는 이미 밤이었고
초침 하나가 황막한 들판에서 녹슬어 가고 있었다.
나는 벌써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몇 번인가 그 밤을 찾아갔다.
황막한 들판과 계곡, 강물.
밤은 푸른 파충류의 처녀 같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강가에서
우유빛 달을 하나 놓아 버리고
돌아왔다.
내가 갈대를 헤치고 강물 위로 띄워 놓은 소쿠리가
神의 문간으로 도착하기를 기대하면서.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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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 시인선 199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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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아침 속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들리는 것 같은 비명. 너무 커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어젯밤의 어둠이 내지르는 비명. 오늘 아침 허공중에 느닷없이 희디흰 비명이 아 아 아 아 흩뿌려지다가 거두어졌다. 사람들은 알까? 한밤중 불을 탁 켜면 그 밤의 어둠이 얼마나 아파하는지를. 나는 밤이 와도 불도 못 켜겠네. 첫눈 내린 날, 내시경 찍고 왔다. 그 다음 아무에게나 물어보았다. 너 내장 속에 불켜본 적 있니? 한없이 질량이 나가는 어둠, 이것이 나의 본질이었나? 내 어둠 속에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마치 앞핀에 꽂힌 풍뎅이처럼, 주둥이에 검은 줄을 물고 붕 붕 붕 붕 고개를 내흔들었다. 단숨에 나는 파충류를 거쳐 빛에 맞아 뒤집어진 풍뎅이로 역진화해나갔다. 나의 존엄성은 검은 내부, 바로 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나? 불을 탁 켜자 나의 지하 감옥, 그 속의 내 사랑하는 흑인이 벌벌 떨었다. 이 밤, 창밖에서 들어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내 방의 상한 벽들이 부르르 떨고, 수만 개의 아픈 빛살이 웅크린 검은 얼굴의 나를 들쑤시네. 첫눈 내린 날, 어디로 가버렸는지 흰 눈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창밖으로 불 밝힌 집들. 밤은 저 빛이 얼마나 아플까.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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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 시인선 199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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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주제로 한 식사 1

이를테면 길은
스파게티처럼 포크에 감아 먹을 수도 있지

만 갈래로 쏟아진
여름 뜨거운 길들 위에
검붉은 태양이 쏟아져 꿈틀거리듯
뜨거운 스파게티 국수 위에
검붉은 소스를 끼얹어 먹는 거야
저것 봐, 그녀가 스파게티를 먹다 말고
냅킨을 접어 무언가 끄적거리고 있잖아
너무 뜨거운가봐 눈물까지 머금고 있네
그녀가 앉은 프라이데이 창문 밑으론
이 밤, 붉은 국수 가닥 같은 자동차길
누군가 그 길을 포크에 감아 먹고 있나봐
길이 자꾸만 어디론가 끌려들고 있잖아

아아, 이렇게 길이 엉켜들고 있을 땐
천천히 혼자 스파게티를 먹는 거야
높은 창문 아래 프라이데이 식탁에 앉아
수많은 세기를 기다려
바람이 산등성이를 깎아먹듯
모래가 바다를 마셔버리고 드디어
붉은 소스가 칠해진 모래 접시만 남듯
그렇게 용암처럼 붉은 소스를 끼얹어 꿀꺽 삼키는 거야
먼 그를 그녀가 먹듯 그렇게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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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 시인선 199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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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들어온다. 입술을 쫑긋거리는 꽃이. 트럭 한대 가득 실린 꽃이 터널 벽을 쪽쪽 빨아먹는다. 터널이 잠시 빨갛게 익는다. 그가 새싹을 똑똑 꺾어 입 속에 집어넣는다. 두릅이 두릅나무에서 똑똑 떨어져 초장 그릇 속에 빠진다. 한 트럭 가득 두릅이 들어온다. 두릅이 서울의 입 안을 초록으로 물들인다. 가자미가 들어온다. 얼음에 채워진 가자미 천 마리가 모두 기절한 채 들어온다. 동해 바다 한 트럭이 실려 들어온다. 돼지들이 들어온다. 돼지들이 서울의 입술을 꿀꿀 빤다. 그는 돼지 목살 수육을 새우젖 찍어 먹는다. 꿈틀거리는 그의 목구멍은 잡식성이다. 미꾸라지가 흙탕물 개울처럼 밀려 들어온다. 태백산맥이 갈가리 찢어져 꿈틀거리며 들어온다. 설악산 자락의 고냉지밭이 소금에 절여져 들어온다. 트럭 하나 가득 반만 나온 무의 하얀 엉덩이들이 겹겹이 실려 있다. 불켠트럭들이 들어온다. 이빨 사이로 줄지어 들어온다. 트럭들이 터널을 나서면 검푸른 서울의 위액이 트럭을 감싸안는다. 입구를 나선 트럭 중엔 그 큰 눈으로 휘이익 위액의 바다를 헤쳐보는 놈도 있지만 서울의 내장 속 어둠은 짙다. 푸성귀가 자루에 실려 들어온다. 수만 마리의 닭이 오늘 낳은 수만 개의 달걀을 따라 벼슬을 붉히며 실려 들어온다. 코끼리만한 황소들이 눈을 부릅뜨고 들어온다. 서울 사람의 몸 속 길로 황소떼가 떼지어 몰려간다. (-> 계속)-18쪽

그는 오늘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신다. 소주가 부어지는 이 터널은 길고 어둡다. 소양호를 채우고도 남을 흰 우유가 터널 밖을 나와 밤의 내장 속으로 쏟아진다. 호남평야가 통째로 실려 들어온다. 그러나 터널의 반대 차선으론 정화조를 실은 트럭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다. 술자리를 파한 내가 소주방의 문을 나서자마자 토하기 시작한다. 서울은 같은 문으로 싸고 먹는다. 지렁이처럼 내 몸이 도르르 말린다. 몇 일에 한번쯤, 하늘에서 큰 손이 내려와 흰구름 같은 두루마리 휴지를 펴 서울의 입인 동시에 항문인 터널을 닦아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 막차가 터널을 나서자 함박눈이 쏟아진다. 나는 눈을 받아 입안에 처넣는다.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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