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는다 창비시선 26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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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끊어버렸는지,

안개 자욱한 밤에 나는 보았다
주검의 모가지처럼
디롱거리는
디룽대는
외가닥 줄 끝을

또 어디선가 앰불런스 소리가 다급하게 흘러가고
죽지 않은 내가 가야 할 곳은
언제나 모든 것의 반대편이라고 중얼거리는 밤에
그칠 것 같지 않은 안개와 잡음과
신음이 흘러나오는 공중전화 수화기

인적 드문 기차 건널목 근처, 유리파편 흩어져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앰불런스에 실려간 주검이 남긴 잔액으로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를 누르면
안개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그대의 호곡(號哭)

뚜뚜뚜뚜뚜뚜.....-70-71쪽

새롭다. 환상적인 상황 설정. 괴기스러운 분위기. 공중전화 박스, 라는 이제는 '특이한 장소'가 되어버린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유리파편이 흩어져 있고, 벌써 '주검'이 된 통화하던 이가 앰불런스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는가.

시인은 그럼에도, 아니 그러니까 태연히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가 그 신음과 안개가 피어나는 수화기를 들고, '앰블런스에 실려간 주검이 남긴 잔액으로',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를 누르고, 상대의 '호곡(號哭)' 즉 부르짖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뚜뚜뚜뚜뚜뚜'라고. 어찌보면 결말은 우습기도 하고, 섬뜻하기도 하다.

단순 기계음에 대한 비유라기 보다는, 어떤 단절감, 단절감이라는 비명 소리. 허공과 공허라는 존재감 같이. 그러나 실제적인 소리로 울려퍼지는 네 부재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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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는다 창비시선 26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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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꿈틀거린다 요새는 자주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느낀다 지금도 가느다란 경련이 오고 있다 손을 뻗어 꿈틀거리는 눈썹을 문질러본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꼬옥 눌러본다 조금 걱정이 된다 눈썹이 달아나면 어떡하지,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달아난 눈썹을 따라 머나먼 곳으로 가야할지도 모른다 눈썹이 달아난 내 얼굴을 사람들은 잘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안되겠다 내일은 한의원에 갈까 성형외과에 가서 벌레문신을 할까, 걱정이다 오늘도 내 푸른 눈썹벌레 한 마리가 자꾸만 어딘가 기어가려고 꿈틀거린다-80쪽

꿈틀거리는 눈썹. 화가난 시인? 눈썹벌레가 기어가려고 한다. 끊임없이 시인의 육체는 변형되고, 시인의 시 속에서는 온전하지 못한 육체들과, 동물로 변화된, 아니 원래는 동물인데 탈을 쓰고 있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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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는다 창비시선 26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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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가 피었다 곰팡이가 슬었다
연화대 위 부처의 눈동자에
허옇게

백태가 꼈다

시치미 뚝 떼고 제 똥 위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부처,
저 지독한 부처의 똥냄새를 지우려고 날이면 날마다 피워대는
대웅전의 싸구려 향냄새

뭐라고, 대웅전이 아니라 여긴 영안실이라고?
뭐라고, 영안실이 아니라 여긴
똥덩어리 위에 허연 곰팡이 백련이 피어 있는

천년 묵은 해우소 연못이라고? 뭐라고, 연화대가 아니라
부처가 앉아 있는 저곳은 궁둥이 싸늘한 변기, 뭐라고?

치질 걸린 부처처럼 퍼질러 앉아 바라보는
절 밑 사하촌.....

담장 밑에 쪼그려 앉아 동백 몇그루
지금
시뻘건 꽃 떨어뜨리는 중, 시뻘건 피똥 싸지르고 있는 중

만화방창 꽃들의 똥냄새에 취해 재배 삼배 절을 올리고
엉거주춤 괴춤 추스르는 오늘은
오래오래 변비 앓던 꽃들의 배설일

백태 낀 부처의 눈동자 속으로
뻐얼건
동백 꽃덩이들 뚝뚝 싸갈기는 봄날-84-85쪽

부처님의 오묘한 미소가 '시치미 뚝 떼고 제 똥위에 앉아'서 뭉개고 있는 자의 표정으로 바뀌고, 화려한 동백꽃의 낙화가 '똥백꽃'들의 '꽃떵이'들을 싸갈기는 것으로 바뀐다. 시인이여!

마지막연, '동백 꽃덩이'가 자연스레 '똥백 꽃떵이'로 발음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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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는다 창비시선 26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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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반쪼가리 함석지붕 그림자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너 먹을래?
반쪼가리 옆집 누나의 손이 불쑥
반쪼가리 빵을 내밀었다
반쪼가리 빵을 쪼개 동생들에게 주었다
반쪼가리 빵 물고 어둠 내리는 교회 담장 밑에 앉아 울었다
반쪼가리 지붕 밑에서
반쪼가리 인간 부침개가 뒤집히고 있었다
반쪼가리 아버지가 반쪼가리 어머니 또 패대기치고 있었다
반쪼가리 밥상이 오리처럼 날아갔다
반쪼가리 마당 가득 반쪼가리 밥그릇들이 흩어졌다
반쪼가리 교과서를 북북 찢었다 나는
반쪼가리 교과서를 찢고 또 짖으며 울부짖었다
반쪼가리 아버지 런닝구도 너덜너덜했다
반쪼가리 달이 떠서
반쪼가리 잠 자고 어머니 또 행상 나갔다
반쪼가리 아버지 또 검은 고무튜브 옷 입고 시장바닥 기어다녔다
반쪼가리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반쪼가리 동생 업고 시장 입구에 서서 들었다
반쪼가리 태양이 썩은 재래시장 지붕 위로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42-43쪽

이 시를 읽으면서는 두번 놀라게 된다. '반쪼가리'라는 것이, 반쪼가리 아버지 '또 검은 고무튜브 옷 입고 시장바닥 기어다녔다'라는 것에서, 그 '반쪼가리'의 의미를 잠복시켰다가 터뜨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폭력적이고 잔인한 비유에 대해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는 너무 큰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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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발작 창비시선 267
조말선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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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줄에 동여매세요
자기 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일교차가 당도를 결정한다면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92-93쪽

사과 열매를 둥근 발작으로 보는 시인. 학교에 가서 '쓸모 있는' 사과가 되어가는, '인간'으로 퇴화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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