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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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올려주소서
깜깜한 방 속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신, 왜 그랬을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거리로 나가 무신론자,
그는 어디로 굴러가는지 모르는
속이 빈 커다란 드럼통을 요란하게 굴렸을까

유신론자는 겸손해진다
신이 푸른색 양피지에 적어
돌돌 만 수수께끼 두루마리를
끝도 없이 자기 앞에 늘어놓을 때

그러나 무신론자, 그에게는 다만 즐거운 일
여름이 되면 장미 정원에서
수만 개의 꽃송이가 저절로 피어나듯
수수께끼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맡으면 되는 일이다
피지 않고 떨어지는 꽃봉오리도 그런대로 좋은 법

유신론자는 매일 확인한다
어디에나 똑같이 찍힌 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돛단배 사과나무와 기린 화산 무지개
수염고래가 뿜어내는 투명한 물줄기에서
잠자리 날개의 은빛 무늬에서

그런 관점을 비웃을 틈은 없다
사물의 바닷가에 기기묘묘하게 그려진 모래 그림을 관찰하느라
무신론자, 그는 항상 바쁘니까
순간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잠깐 동안에
한 번도 똑같지 않은 그 기하학적 연속 무늬를

그는 어리석자, 유신론자가 보기엔
이미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두고
차들이 과속으로 달리는 도로 속으로 들어가니까
노란색 페인트 통을 들고
자신이 지나갈 건널목을 멋대로 그리면서

유신론자처럼 무신론자도 죽는다
두 사람은 수줍게 머뭇거리며 나아간다
하느님의 두 손바닥으로
밤하늘 별로 만들어진 저울 위로
영혼의 무게는 똑같다
사이좋게 먹으려고 두 쪽으로 쪼개놓은 사과처럼-45-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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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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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횬막?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소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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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 갔다 오십니까? 문학과지성 시인선 213
성기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3월
품절


문명의 가을이다 다이어트 식품이 팔리고 小食이 권장되는 옆에선 오늘도 새로 들어온 다국적 치킨점이 생긴다 그들은 소식을 권장하는 지역 정부를 불공정 무역 혐의로 제소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를 쓰고 식물만 먹는 '베지테리언'이라는 기이한 변종이 양키의 도심에 서식하지만 그들은 식물 이외의 것은 날것으로 다 내다 버리는 버릇이 있다 병마개를 소재로 한 소비자의 무의식을 더 질끈 잡아맬 다국적 광고가 그 썩은 고기에 기생한다 백두산 꼭대기 천지에서도 그 병마개는 신비스러운 상징이다 호주의 시드니 거리에도 미국의 뉴욕 거리에도 파리에도 런던에도 가장 번화한 유흥가의 뒷골목에는 너무 살이 쪄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랑자가 우물우물 기름진 피자 조각을 씹으며 앉아 젖꼭지를 내놓고 다니는 창녀들을 바라보며 자위 행위를 하고 있다 어디서나 그들은 우울하고 내성적이며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때로는 변태적이다 늘씬한 다리는 언제나 상품이고 그 상품을 둘러싼 모든 것은 비만이다 기름 덩어리가 우적우적 씹히는 삼겹살처럼 겹겹이 더러운 비계가 늘씬한 다리를 거대한 빌딩의 옥상에 검은 스타킹을 신겨 올려보낸다-98쪽

그것이 방송광고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비계의 공식적인 포스터다 늘 구도는 이런 식이다 권태가 가장 기본적인 저항의 방식으로 선언되고 차라리 비만을 거부하지 않는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반문명적'인 할리우드의 안티 할리우드 스타들이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그들에 의하면 비만은 편견이고 기만이다 그러나 그 기만은 자기 기만 미국 놈들은 남의 나라에 파는 닭에 성장 호르몬을 워낙 많이 주사하기 때문에 전세계의 소녀들은 일찍 어른이 된다 곧 있으면 포르노 시장도 개방하라고 할 것이고 청소년들의 건전한 생활을 권장하는 정부를 불공정 거래 혐의로 제소할 것이다 무역에는 분명히 방해니까 미국 놈들 위주의 위원회는 한국 정부의 혐의를 인정하여 경제 제재를 가할 것이다 점점 살찌는 놈들의 자본 천고마비의 자본 헉헉대며 더 많은 피자 조각을 원하는 비곗덩이들 그들은 우울하고 내성적이며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때로는 변태적이다 그것이 그들의 예술이고 문화며 세련된 전위 문명이 그들 발 아래 있으므로 그들이 살찌는 가을은 문명의 가을이다 히스테리와 편집 자학 그리고 피학 절망적으로 거울을 바라보고 거울을 조작하고 거울을 깨고 울며 주인공은 외친다 "다 죽여!" 하긴 3편이 지나도록 람보는 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들 위안을 삼지만 아무도 문명의 체중은 물어보질 않는다 그것이 예의니까-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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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 갔다 오십니까? 문학과지성 시인선 213
성기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3월
품절


새벽이다 부엌은 텅 비어 있다 나는 많은 음식을 껴안고 있다 맨 아래칸에는 푸른색의 풀들이 있다 상추와 쑥갓 파와 양파 그리고 사과 이제는 오랫동안 그냥 놔둬서 부패하기 시작한 포도 송이가 두엇 있다 나의 바구니 같은 팔은 콜라와 주스와 생수통을 안고 있다 방금 잠든 나의 여인은 콜라를 좋아한다 그것들은 병이나 플라스틱 통에 담겨져 있다 다음으로 나의 심장부 바로 밑에는 큰 김치통과 하야 꽃이 핀 고추장통 그리고 자주 종류가 바뀌는 밑반찬들 젓갈들 뭐 그런것들이 순서 없이 들어 있다 오늘 내 뱃속에는 멸치볶음과 반쯤 남은 알찌개(이것은 랩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리고 역시 반쯤 남은 참치 캔이 들어 있다 갓김치도 있고 먹다 남은 간장 종지도 (역시 랩을 쓰고) 들어 있다 나의 심장부는 내 몸통에서 가장 차가운 곳이다 나의 머리는 나의 심장부이다 거기에는 사철 성에가 끼어 있다 사실은 이것은 매섭다 꽝꽝 언 얼음들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칸 속에 채워져 있다 그곳에서 나는 냉혈한 미소를 사철 얼린 표정으로 짓고 있다 다른 모든 곳에서 내게 쳐들어오는 수많은 문 여닫듬 혹은 침범을 그 빙하기의 사각 공간에서 단죄한다....-94쪽

나는 다시 징- 하고 낮게 울어대기 시작한다 시간이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몸이 달아오르려 하면 피드백 시스템은 난폭하게 작동하고 내 체온은 내려가기 시작한다 징- 이때 나의 연인은 이따금 잠을 깬다 그러나 그녀의 잠을 깬 것이 나의 울음인지는 잘 모른다 여전히 꿈결 속을 헤매는 황홀한 표정으로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걸친 채 화장실로 향하곤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몸 속의 냉매가 돌아 체온이 급강하하는 것은 일종의 아찔한 추락이다 중독자처럼 찬란한 그 고통 나는 몸을 떨면서 환각 속에 빠진다 그녀가 오줌을 누고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의 바닷가 파도 소리 나는 어깨동무하고 앉아 그녀의 식은 살갗을 느낀다 모래 바람이 섞여들어 바삭바삭한 그 살결을 나의 살갗에 아주 미세하게 비빈다 조금 있으면 우린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러면 따뜻한 것들이 오가고 지금 이 선선한 여름의 새벽은 차라리 그때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나는 장난기 섞인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을 만져본다 그녀는 피하려 하지 않고 이유 없이 반짝이는 먼 불빛을 본다....-95쪽

그녀가 다시 화장실의 문을 연다 나는 아직도 징- 다시 꿈속으로 쓰러지겠다는 의지밖에는 없는 그 여인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는 아침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이런 때면 나는 느낀다
나는 너무 거추장스럽고 뚱뚱하다
소화되지 않은 많은 음식들이 뱃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새벽은 너무 길고 차갑다-95~96쪽

알레고리, 또는 아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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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절판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들을 바라본다.

(17세기의 일본 시인, 이싸의 시)-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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