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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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ž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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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이근배 지음 / 문학세계사 / 2004년 3월
절판


다시 냉이꽃

하늘은 무슨 땡볕을
그리 달구어 내리쬐이던지
땅은 또 떡시루를 연 듯
뜨거운 입김을 뿜어 올리던
한여름 그 밭고랑에 나가 앉으시던
어머니, 바로 그맘때쯤인
신사년 윤유월 스무사흘 새벽
내몰라라 잘도 삭히셨던
가시방석보다 더 쓰리고 아픈
망백의 세월 훌훌 털어버리시고
언제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는
지아비를 찾아 당신은 떠나셨습니다
저 조선왕조를 한몸으로 지키려던
거유 면암*의 문하에서도
으뜸이던 장후재학사의 셋째딸로
타고난 복을 누렸을 만도 한데
어쩌다 나라 빼앗긴 세상을 만나
지아비 섬길 날도 모두 빼앗기고
한시도 마를 날 없는
슬픔의 긴 강을 건너오셨습니다
텃밭에서 이른봄부터 늦여름까지
당신의 손끝에 무수히 뽑히던 냉이꽃풀
그것들은 당신의 얼굴에서 내리던 것이
땀방울인 줄만 알았겠지요
이 못난 아들도 알아채지 못해쓰니까요
누군가 당신의 빈소에 와서
냉이꽃 할머니가 돌아가셨네요
짧은 한 마디에
당신은 고향집 텃밭에 앉아 계셨습니다

*면암: 최익현의 호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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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서울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24
오장환 지음 / 미래사 / 2003년 4월
품절


독초

썩어 문드러진 나무뿌리에서는 버섯들이 생겨난다. 썩은 나무뿌리의 냄새는 훗훗한 땅속에 묻히어 붉은 흙을 거멓게 살지워 놓는다. 버섯은 밤내어 이상한 빛깔을 내었다. 어두운 밤을 독한 색채는 성좌를 향하여 쏘아오른다. 혼란한 삿갓을 뒤집어쓴 가냘픈 버섯은 한자리에 무성히 솟아올라서 사념을 모르는 들쥐의 식욕을 쏘을게 한다. 진한 병균의 독기를 빨아들이어 자줏빛 빳빳하게 싸늘해지는 소동물들의 인광! 밤내어 밤내어 안개가 끼이고 찬이슬 내려올 때면, 독한 풀에서는 요기의 광채가 피직, 피직 다 타버리려는 기름불처럼 튀어나오고. 어둠 속에 시신만이 겅충 서 있는 썩은 나무는 이상한 내음새를 몹시는 풍기며, 딱다구리는, 딱다구리는, 불길한 까마귀처럼 밤눈을 밝혀가지고 병든 나무의 뇌수를 쪼읏고 있다. 쪼우고 있다.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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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 문학동네 시집 35
서동욱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품절


사라진 길 -책에 대해서

송도의 서경덕이 죽었을 때
그의 서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죽음은 마침표 박힌 기념비를 세우고 --화담집(花潭集)
늙은 혈관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던 링겔 줄 따라가면
그 먼 끝에 서 있는 저자(著者)의 비밀 도서관

수없는 가을 오후마다 바스라질 듯한 햇살이
넘기는 책장들 사이에 스며들었고 화담의 쌓여가는
나이와 추억들이 서가 속에 정성 들여 미로를 그렸다
배회하던 송도의 거리,
기생들과 술래잡기하던 날의
어지러운 발자국들, 우매한 삶의 이 모든 페이지마다
엿보며 키들거리던 이웃의 종년들

그는 사라졌고
그가 다니던 서가 속의 길들은 찾을 길 없네
죽음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미궁의 문을 닫고 말았다 이제 종이 속의 끝없는
길들은 얽힌 실타래 한 뭉치의 배회하는 문서에 불과한 것

상여가 나가고 뭇 선비들 틈에서 막
태어나는 어린 화담집은 알 길이 없지
시(詩)가 안 되던 날
자기 자신이 어떤 미로를 헤맸고 그 길목마다
일몰은 담벼락에 어떤 모습으로 몸을 기댔고
소란스런 악사(樂士)들과 박연 폭포와
늙은 몸 위에 기마형으로 올라타던 기생들이
목숨을 끊고 싶도록 지루한 가을과 봄을
어떻게 견디도록 해주었는지,
그리고 그토록 많은 서책 속의 길과
서책 밖의 길들 뒤에 도달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우연한 종착점인지를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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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문학.판 시 7
김민정 지음 / 열림원 / 2005년 5월
구판절판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

계란이 터졌는데 안 닦이는 창문 속에 네가 서 있어

언제까지나 거기, 뒤집어쓴 팬티의 녹물로 흐느끼는

내 천사

은총의 고문으로 얼룩진 겹겹의 거울 속 빌어먹을 나야-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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