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창비시선 216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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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을 한방 장전해놓고 그 환한 입구를 바라본 사람은 부드러움이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을 안겨주는 고양이를 만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눈이 조리개처럼 조절 가능하게 된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 핏물이 지평선에 활처럼 휘어져 있다.-102쪽

지평선에 활처럼 휘어져 있는 핏물이라. 그리고 제목과 첫 행. 그리고 꽃.
뒤엉켜 있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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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창비시선 216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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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앉아, 아들이 물끄러미
바닥에 누워 자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 숱 없는 여인의 머리맡,
떨기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하느님이
서툴게 밑줄 그어져 있다, 모나미 볼펜이
펼쳐진 성경책에 놓여 있다.
침대 위엔 화투패가 널려 있고
방금 운을 뗀 아들은 패를 손에 쥔다.
비오는 달밤에 님을 만난다.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찾아
아들은 밤마다 눈을 뜨고,
잠결에 앓는 소리를 하며
어머니가 무릎을 만지고,
무더운 한여름밤
반쯤 열어논 창문에 새앙쥐 꼬리만한 초생달

들어온다, 삶이란
조금씩 무릎이 아파지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무릎을
뻑뻑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저 여인은 무릎이 비어 있다.

한달에 한번 시골에서 올라와
밀린 빨래와 밥을 해주고
시골 밭 뒤 공동묘지 앞에 서 있는 아그배나무처럼
울고 있는 여인.
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가슴을 찢어라 그래야 네 삶이 보인다,고
올라올 때마다 일제시대 언문체로 편지를 써놓고 가는
가난한 여인, 새벽 세시에 아들은
혼자 화투패를 쥐고 내려다보는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이미 꺼진 지 오래,
불길에 하나도 상하지 않던
열매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졌지만
일찍 바닥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침대 위의 화투를 치우고
모로 누운 서른셋 아들의 머리를 바로 뉘어주고
한시간 일찍 서울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린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그 시각
밭 갈 줄 모르는 아들의 머리맡에
놓인 언문 편지 한장.

"어머니가 너잠자는데 깨수업서 그양 간다 밥잘먹어라 건강이 솟애내고 힘이 잇다"-43-45쪽

상투적이지만, 보편적인 것의 힘. 세세한 행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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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8-08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어온다, 삶이란
조금씩 무릎이 아파지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무릎을
뻑뻑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저 여인은 무릎이 비어 있다.

시 잘 읽고 갑니다.

기인 2006-08-09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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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놀라서 뒷걸음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14-15쪽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적이고 정통파적인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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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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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졸린 잠이야 그 잠 속엔
볼 만한 비디오도 되새길 경구도 없어
그냥 안개 속 같은 잠이야, 라고 잠꼬대하는 순간
안개 속에서 총성이 울리고
안개 속에서 누군가 살해된다
안개 속에서 어디론가 실려가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취조당한다
나는 아무것도 협조하지 않았어 아메리칸 드림도
저팬 드림도 꿈꾸지 않았어 빨간 불일 땐 정지했고
휴일과 안식일도 거르지 않았다 한 번도 여당은 뽑지 않았고
금지된 장소에서 개나 오리를 잡은 적도
잔디밭에 들어가 오줌을 눈 적도, 그런데 왜

기계들은 피 흘리며 돌아가는가
착한 사람들의 국경선은 불타는가

치솟아 오르는 燃霧 도시 한가운데
내 코가, 내 입이, 내 눈이 잠든다
우주의 고층빌딩 꼭대기 작은 창
신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살 타는 냄새
탁, 창문을 닫는다-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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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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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나에게 맡기신 창세기
수리수리 사과나무 서툰 주문에,
자꾸만 복숭아, 복숭아나무

내가 만든 사과 한 알을 따기 위해
이브는 복숭아가 익어가는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다, 잠이 든다
에덴 동산의 시간에 출현한 무릉도원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윌리엄 텔은 아들에게 독화살을 날리는
비인간적인 일에서 해방된다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마치고
왕비는 여전히 질투심에 불탔지만 한 알의 사과를 구하지 못했네

복숭아나무 아래 떨어지는 분홍 꽃잎, 꽃잎
뉴턴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만유인력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사라진다
맑은 밤, 들에 나가면 목성의 주황색 얼음띠가
예쁜 팔찌처럼 선명하네

그래도 세잔은 한 알의 복숭아로 빛의 마술을 부렸겠지
프로스트는 복숭아를 딴 후에 한 편의 시를 완성했을거야

트로이 전쟁에 쓰려고 준비해둔 한 알까지
사과의 역사책을 얼른 덮고,
빈 사과 궤짝을 타고 나는 도망가야겠다
하느님이 돌아오시면 화내며 세상을 멸망시키실까
그래도 나는 오늘,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48-49쪽

귀여운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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