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 -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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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출판사 쪽의 책 소개를 보자.

 

호화 침대열차 블루 트레인이 니스에 도착하고, 승무원은 낮잠을 자는 손님을 깨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여자가 한 명 있었으니, 그녀는 얼굴을 얻어맞아 짓이겨진 시체가 되어 있었다. 한편 희생자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 중 세계 최대의 루비로 유명한 '불의 심장'이 도난당한 사실이 발견된다.

마침 그 열차에 타고 있던 에르퀼 푸아로는, 살인 용의자로 아내와 불화가 있었던 남편이 체포되는 광경을 보고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살인자가 타고 있을 것이 분명한 푸른 열차에 다시 몸을 싣는다.

 

크리스티의 팬이라면 여기까지만 보고도 다음의 추리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 얼굴을 얻어맞아 짓이겨졌다는 것은 피해자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며, 죽은 여인은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것. 요즘 같으면 전혀 쓸 수 없는 트릭이다. DNA 검사로 간단히 해결될테니까.

 

둘째, 살인 동기는 크게 두 가지. 희생자가 가지고 있던 세계 최대의 루비와 불행한 결혼 생활. 루비를 노리는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닐 것이며 살인을 저지른 자와 루비를 훔친 자는 전혀 다른 인물일 수 있다는 것. 즉, 독립된 두 개의 사건이 합쳐졌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

 

셋째,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토록 잔인하고 대담하며 철두철미한 범인이라면, 어쩌다 범죄를 저지르게 된 사람이 아니라 평생 범죄에 몸을 담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년 동안 기다릴 줄 아는, 그런 거물이라면 절대 사랑 같은 것 때문에 일을 그르칠 리가 없다는 것.

 

이 세 가지를 완벽히 배반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가 된다. 물론 진범의 정체와 공범의 정체 또한 사실 초반에 눈치채기가 쉽다. 크리스티가 깔아놓은 복선 때문이 아니라, 등장 인물을 묘사하는 사소한 정보 때문이다. 굳이 그런 표현은 빼놓아도 좋았을 텐데, 독자에 대한 친절함일 수도 있고, 작가의 자만일 수도 있겠다. 훌륭한 추리 소설이라면 이른바 독자와의 '밀당'이 중요한데, 1928년에 나온 이 작품은 크리스티의 8번째 장편 소설로, 아마 아직 노련함을 갖추지 못한 작가의 작은 실책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범과 공범을 눈치챈 후에도, 그들이 이 일을 벌인 이유를 정확히 알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건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연이어서 추리 소설을 읽다 보니 내 머리가 다 어지러운 요즘이다. 시간가는 것도 모르는 채 어딘가에 몰입하게 하는 것에는 추리 소설만한 것이 없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자 유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무작정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느껴지는 때가 모두에게 있지 않은가. 그럴 때 추리 소설은 훌륭한 해결책이자, 좋은 벗이겠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떄가 있다. 하루 걸러 살인을 보다 보면 그것이 비록 허구의 이야기라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사실, 실제 삶은 책보다 더 잔인하고 냉정할 수 있는데도. 그러고 있던 차에 책의 마지막 부분 덕분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기차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무슈 푸아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죽어 가는데도 쉬지 않고 변함없이 달리잖아요. 웃기는 얘기죠? 하지만 탐정님은 제 말뜻을 아실 거예요."

"그럼요, 알다마다요. 레녹스 양, 사람의 인생도 기차하고 똑같답니다. 쉬지 않고 흘러가죠. 또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겁니다."

"왜요?"

"결국 기차도 종착역에서 여행을 마치니까요. 왜, 영국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여행은 끝난다.'"

레녹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 같아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젊습니다. 그것도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차를 믿으세요, 레녹스 양. 그것을 이끄시는 분은 자비로운 하느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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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 살인 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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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23년에 나온 크리스티의 세번째 장편 소설이다.

참고로 첫번째는 1920년에 출판된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두번째는 1922년에 출판된 <비밀 결사>로

푸아로가 등장하는 두번째 소설이자, 역시 그의 친구인 아서 헤이스팅스가 등장하는 두번째 소설이다.

 

크리스티 초기 소설의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아이디어는 놀랍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상대적으로 원숙함은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

반대로 후기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전체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문장도 아름다우며, 인생의 의미를 깊숙이 찌르는 노련함도 느껴지지만 상대적으로 침착함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조금 더 흥분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

 

<비밀 결사>의 경우는 나중에 부부가 되는 토미와 터펜스가 등장하며, 톡톡 튀기는 하지만 좀 부산스러운 느낌이었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나 이 <골프장 살인 사건>의 경우 청년 특유의 활기찬 느낌은 좋지만 크리스티가 노년에 쓴 소설들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부분은 많지 않다. 나중에 나온 소설일 수록 메모하고 싶어지는 구절이 많아지는 이유인 것 같다. 아마 소설책을 여러 권 내고 나서야 세세한 문장이나 표현에 더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고,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젊은 등장 인물 간의 로맨스가 튀지 않게 조합되어 꽤 재미있게 읽힌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신데렐라'는 아마도 헤이스팅스와 맺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소설 이후에 헤이스팅스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빅 포>에서 이미 결혼한 상태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의 여성은 아마도 이 소설 <골프장 살인 사건> 후 결혼하였고, 함께 남미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2남 2녀를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종종 영국으로 헤이스팅스가 건너올 때마다 푸아로와 만나 사건을 해결하였으며, <커튼>에서 알 수 있듯이 헤이스팅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르헨티나에 묻혔다.

 

<빅포>의 제 1장과 2장에서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헤이스팅스를 통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후 푸아로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정황을 알지 못해 궁금했었는데 이 소설에서 확인하게 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책의 또다른 재미도 있었는데 프랑스 형사 지로. <구름 속의 죽음>에서 푸아로가 프랑스로 건너가 수사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된 파리 경시청의 무슈 푸르니에가 무슈 지로로부터 푸아로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푸아로는 '인간 사냥개'라고 불렀던 그의 몇 년 전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자신에 대해 뭐라고 했을지 짐작이 가는 터라 웃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사건이 어떤 책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했었다. 차례차례 읽으면 헷갈리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시리즈 간에 시간이 왔다갔다 하면서 읽는 것도 마치 퍼즐 맞추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골프장에서 죽은 갑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는 아들,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을 감추려는 것 같기도 한 갑부의 아내이자 그 아들의 어머니, 과거가 미심쩍은 아름다운 중년 여인과 그녀의 매혹적인 딸, 그리고 매력적인 쌍둥이 자매. 몇 십 년 전의 사건이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되풀이된다는 것, 그리고 두 사건 사이에 눈치채기 힘든 연결고리. 여러 모로 재미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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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의 카드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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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손님 여덟 명과 자신이 참석한 파티. 이를 테면 네 명의 '탐정' 대 네 명의 살인범!"

 

이 책은 마치 영화 '어벤저스'를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마블 코믹스의 모든 영웅들이 전부 총출동한 그런 느낌. 애거서 크리스티의 수많은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 네 명이 등장하는데, 각자의 시리즈에서 제각기 따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한번에 모아놓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서로 힘을 합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즐겁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서문을 지나고, 셰이터나 씨가 푸아로를 초대하는 장면을 지나고, 파티에서 네 명의 '탐정'들이 각각 등장하는 모습에서는 마치 God 노래의 friday night의 한 부분을 듣는 느낌이다. 아마 김태우의 목소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선수입장~!"

 

"살인범 넷과 탐정 넷, 런던 경시청, 영국 비밀 정보국, 사립 탐정, 추리 소설가. 재치 있는 발상이에요."

 

그럼 한 명 한 명 소개를 해 보자. 먼저 익숙한 탐정 넷. 런던 경시청의 배틀 총경, 영국 비밀 정보국의 레이스 대령, 사립 탐정 푸아로, 추리 소설가 올리버 부인.

 

배틀 총경이야 침니스에 일어났던 두 개의 사건과 <0시를 향하여>에 등장했던 인물. 이 소설 외에도 <위치우드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원제는 Easy to kill인 이 소설은 황금가지 전집에서는 빠진 것 같아 보인다. 이제 그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되니 좀 아쉬웠다.

 

레이스 대령은 <갈색 양복의 사나이>와 <나일 강의 죽음>에 등장했던 인물. 사실 억지로 머리를 쥐어뜯어야 겨우 기억이 날 정도의 인물이다. 사건에 적절한 단서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뚜렷한 특징이 있거나 결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서 기억에 남지 않았나보다. 이 책에서도 네 명의 '탐정'이 모이는 시간에 자신의 정보만 제공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일정상 외국으로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 외에도 <빛나는 청산가리>에 등장한다고. <죽음과의 약속>에서는 이 레이스 대령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의 소개장 덕분에 푸아로가 수사를 이어갈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의 푸아로. 마플 양과 함께 크리스티 소설의 좌청룡, 우백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설명이 필요없는 최고의 탐정.

 

"무슈 푸아로에 대해 저도 다 알고 있어요. 『ABC 살인 사건』(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으로 푸아로가 등장한다-옮긴이)을 해결하신 분이시지요."

 

저 'ABC 살인 사건'은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독자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크리스티 스스로도 흡족했던 작품인 것 같다. 이 소설 뿐 아니라 다른 소설에서도 푸아로의 명성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꼭 저 작품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못지 않게 푸아로의 유명세를 입증하는 사건으로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에서도 언급이 된다.

 

"칼입니다, 마드무아젤. 열두 명이 한 남자를 찔러 죽이는데 사용한 것이지요.(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의 내용-옮긴이』) 콩파니 앵테르 나시오날 데 바공 리(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운영한 회사-옮긴이)에서 기념으로 준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리아드네 올리버.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리아드네가 준 실 때문. 이 이름을 크리스티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에 부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다. 이 소설에서도 톡톡히 그 역할을 해낸다. 이름값이 아깝지 않다는 말. 그러고보니 <인셉션>에서 엘렌 페이지의 이름이었다. 다른 세 인물과는 달리 이 소설이 첫 등장이다.

 

"『서재의 시체(The Body in the Library)』(실은 마플 양이 주인공인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옮긴이)를 쓰신 그분이요?"

"바로 그 올리버 부인이지요."

 

이 부분을 보면 올리버 부인은 크리스티의 분신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적당한 소설을 알맞은 자리에 편의상 써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한 번 더 확인 사살하는 부분이 나온다.

 

"악당이 몇 명이든 혼자 너끈히 해치우고 시체까지 깨끗이 처리하는 영웅을 독자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내가 지금까지 서른두 권을 썼는데, 물론 무슈 푸아로가 지적하셨듯이 기본적인 구성은 똑같아요. 그걸 왜 아무도 눈치 못 챘는지 모르겠어요. 후회하는 건 딱 하나뿐이에요. 주인공인 탐정을 핀란드 인으로 설정한 거예요. 핀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핀란드 독자들로부터 이렇게 설정하면 안 된다는 둥 핀란드 인은 절대 그런 표현을 안 쓴다는 둥 이것저것 지적하는 편지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거든요. 핀란드 인들은 추리 소설을 무척 즐겨 읽는 모양이에요. 해가 짧은 겨울이 길어서 그런가? 불가리아나 루마니아 사람들은 내 책을 거의 안 읽나 보던데. 불가리아 인 탐정을 등장시켰으면 훨씬 편했을 뻔했어요."

 

이 부분을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벨기에 출신의 푸아로를 크리스티가 그리면서 얼마나 많은 벨기에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은 전에는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스벤 예르손(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캐릭터로, 스웨덴 어를 하는 핀란드 인 탐정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자신이 만들어낸 에르퀼 푸아로에 비유할 수 있다.-옮긴이)처럼 멋지게 척척 해내시겠지."

 

'스벤 예르손'이라는 이름은 '에르퀼 푸아로' 만큼이나 독특한 이름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에 이런 디테일한 설정까지 부여할 정도이니 크리스티는 참 꼼꼼한 작가이다. 또 올리버 부인에 대해 쓸 때마다 즐거워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충분히 들 수 있고. 그녀는 이 소설을 시작으로 <맥긴티 부인의 죽음>, <죽은 자의 어리석음>, <창백한 말>, <세 번째 여인>, <핼러윈 파티>, <코끼리는 기억한다>에 등장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읽어 본 소설은 <창백한 말> 한 권이지만, 올리버 부인은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 소설만 제외하면 다른 소설에서는 푸아로와 함께 등장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소설들은 올리버가 아니라 푸아로의 이야기로 기억될 것 같다.

 

나는 이 소설 속의 탐정 네 명은 '선수'라고 비유했는데, 작가인 크리스티는 서문에서 범인 후보 네 명을 '선수'에 비유했다. 한 번 이상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으며, 기회가 되면 또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동기와 범죄 양상은 각각 다르다.

 

"이런 살인을 저지르러면 대담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먼저 로버츠 박사를 생각해 볼 수 있군요. 가진 패보다 높게 부르는 버릇이 있는 허풍쟁이에다 모험을 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박사의 심리는 범인의 심리와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렇다면 메러지스 양은 용의 선상에서 제외할 수 있겠군요. 유악하고 소심해서 가진 패보다 높게 부르지도 못하며, 신중하고,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고, 매사에 조심하며, 자신감이 부족한 편이니까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담하고 위험한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가장 적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소심한 사람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던 사람이 더더욱 궁지에 몰리면, 막다른 길에 몰려 고양이에게 덤벼드는 쥐새끼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겁니다. 만약 메러디스 양이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다면, 그리고 셰이터나 씨가 그 범행의 전말을 알고 자신을 경찰에 넘길 거라고 믿었다면, 단단히 겁에 질려 물불 안 가리고 빠져나가려 했겠죠. 대담함뿐 아니라 절박한 공포심에서도 살인이라는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데스파드 소령을 봅시다. 냉철하고 수완이 좋으며, 성공할 확률이 낮더라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무슨 일이든 시도해 볼 사람입니다. 이것저것 가능성을 따져 보고 할 만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소령은 결정을 내리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또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위험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로리머 부인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정신이나 신체 모두 건강합니다. 냉철한 여성이죠. 계산적인 두뇌가 굉장히 발달한 사람입니다. 아마 넷 중에 머리가 가장 좋을 겁니다. 만일 로리머 부인이 범죄를 저리르기로 마음먹었다면 미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게끔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거죠. 그런 점 때문에 나머지 셋에 비해 범인일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셋 중 누구보다 강인한 성격을 가졌고, 일단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실수 없이 끝까지 해낼 사람입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여성이에요."

 

<테이블 위의 카드>라는 이 소설은 여러모로 수학적인 부분이 많다. 네 명의 탐정, 네 명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살인 사건 당시 탐정 네 명은 다른 방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고, 용의자 네 명은 또 다른 방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용의자 네 명이 함께 게임을 하던 그 테이블 근처에서 집주인이 있었고, 탐정 네 명이 다른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동안 용의자 네 명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 각각의 용의자는 한 번 이상 살인을 저질렀던 과거가 있고, 그 사건이 일어난 경위는 모두 이질적이며,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크리스티의 소설 답게, 푸아로는 용의자 네 명의 심리를 추적하며, 그 도구는 사건 당일의 카드 게임 내용.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술을 먹어 보아야 한다는 말도 있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라는 말도 있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게임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라는 내용도 있었던 것 같다. 비록 탐정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을 보여도, 게임하는 도중에는 어떻게든 심리가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독자들과 게임하는 것 같다. 위에 묘사된 대로 용의자른 단 네 명으로 제한해 버리면, 그에 대해 탐정의 입으로 판단을 내려주는 것은, 어쩌면 가지고 있는 카드를 전부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용의자 네 명 간에 실제로 이루어진 3개의 게임, 그리고 용의자와 탐정들간의 게임, 그리고 독자와 작가와의 게임. 네 명의 '탐정'이 총출동하기 때문에 이른바 아마추어의 수사에서 볼 수 있는 '삑사리'가 없으며, 각각 구분된 네 용의자의 캐릭터 또한 분명하고 확실해서 독자에게 애매한 부분에서 넘어지게 만들지 않는다. 안개가 낀 것 같은 모호한 길을 손으로 헤치며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하게 밝혀져 있는 대로를 걸어가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미를 주다니 역시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전혀 넘치지 않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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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스가의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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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는 장편과 단편에서 모두 번뜩이는 기지를 보여주는 작가이다. 이 책은 그런 크리스티의 중편을 모은 책들이다. 보통 한 권의 책에 10개가 넘는 이야기가 들어가는 단편집과는 달리, 이 책에는 네 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와는 달리 이야기가 바뀌기 때문에 계속 자극을 받는 느낌이 들고, 짤막짤막한 이야기를 읽을 때보다 아쉬움이 덜하다. 물론 이 장점은 뒤집을 수도 있겠다. 이제 곧 집중할 만하면 이야기가 끝나버려 깊이가 덜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으며, 어쩄든 짧지 않은 이야기이기에 읽으면서 숨고르기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아마도 크리스티가 구상할 때 단편으로 풀기에는 이야기가 좀 많고, 장편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한 면이 느껴져서 이 정도 길이로 구상한 것 같다. 주어진 구성에서, 단서를 제대로 다 줄려면 단편으로는 길이가 부족할 것이지만 이걸 장편으로 만들 경우에는 결말에 대한 노출이 빨리 일어날 것 같은 염려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어디까지나 취향 문제지만, 개인적으로 이 정도 길이의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짧지만 여운이 남는 단편 소설, 혹은 손에서 책을 놓기 어려울만큼 시간을 잊고 빠져들게 만드는 장편 소설이 내가 사랑하는 부류이다. 물론 중편 소설들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또 베스트가 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소설들의 장점이자,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추리 소설들의 공식을 뒤집은 것이다. 어떻게 죽은 여인은 오른손으로 권총을 잡고 왼쪽 관자놀이를 쏠 수 있었는가? (『뮤스가의 살인』) 유령 소동과 사라진 일급 군사 기밀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미궁에 빠진 절도』) 남작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은 어떻게 엉뚱한 위치에 있는 거울을 박살낼 수 있었을까? (『죽은 자의 거울』) 삼각관계에 빠진 여인 밸런타인 챈트리의 미모는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 것인가? (『로도스 섬의 삼각형』) 와 같은 의문들은,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이면서, 다른 추리 소설에서도 늘 비슷하게 등장하는 의문들이다. 곧 이 의문들은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풀리게 되는데, 그 방식이 의문의 해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그 의문 자체가 사건의 핵심에 비껴 있었다는 데에서 쾌감이 있다.

 

자살처럼 꾸민 타살, 그러나 만약 자살을 타살처럼 꾸민 거라면? 애초에 기밀 따위가 사라진 적이 없었다면? 중요한 것은 왜 살인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여자가 삼각관계의 주연이 아니라 덜 아름다운 여자의 조연에 불과했다면? 이런 사건들을 통해 고정관념이 뒤집히는 과정도 신선하지만, 이 소설들의 푸아로의 태도도 흥미롭다. 푸아로는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행위를 덮어주기도 하고,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위해 모르는 척 눈감아주기도 하며, 범죄자의 처지를 생각하여 최대한 그의 비밀을 보호해 주며, 때로는 방관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소설에서 보았던 적극적인 해결사의 모습이 공통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소설들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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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6 (완전판) - 3막의 비극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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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의 하드 커버를 넘기자마자 등장하는 가장 첫 페이지에는 다음의 글이 쓰여져 있다.

 

감독

찰스 카트라이트 경

 

조감독

새터스웨이트

허마이온 리튼 고어

 

의상

앰브로신 의상실

 

조명

에르퀼 푸아로

 

<3막의 비극>이라는 제목도 호기심을 끌지만, 본문 전에 등장하는 이 페이지야말로 시선을 붙들어놓는 최고의 떡밥(?)이 아닌가 싶다. 과연 무슨 내용일까? 푸아로가 맨 마지막에 등장하며, 이 연극에서 겨우 조명을 맡은 이유는 뭘까?

 

새터스웨이트는 익숙한 이름으로, <신비의 사나이 할리퀸>의 사실상 주인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티의 수많은 탐정들 중 아마도 푸아로와 할리퀸은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양이다. 여기서는 할리퀸이 아니라 푸아로가 등장한다.

 

키가 작고 체격이 마른 노인, 귀족은 아니지만 환영받는 사교계 인사,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사고력을 가진 연극계의 후원자. 새터스웨이트는 이런 사람이다. 치우침이 없는 온화하고 명석한 사람이지만, 주인공을 하기에는 늘 부족한 사람. 할리퀸은 기꺼이 자신은 조연으로 빠지고 새터스웨이트를 늘 주연으로 끌어올렸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새터스웨이트의 활약이 돋보인다.

 

외양으로 봐서는 젊었을 때 큰 인기를 끌었을 사람은 아니다. 지금 노인이 된 그는 아내도 아이도 애인도 없다. 다만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좋아하며 연인들에게 관대하고 인간의 본성을 관찰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추리 소설에 딱 맞는 인물이기는 하다. 젊은 시절 내내 주인공의 동창생, 어릴 적 친구, 군대 동기 등의 역할만 주어졌을 사람,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조연이라도 될 수 있는 사람. 왠지 가슴 짠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연인 찰스 카트라이트 경은 어떤 사람일까?

 

 "저 친구는 무대보다 오히려 실생활에서 더 뛰어난 연기자랍니다. 찰스는 언제나 연기를 합니다. 자기도 어쩔 수가 없나 봐요. 그건 저 친구의 제2의 천성이니까요. 찰스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히 방을 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퇴장'을 하죠. 늘 멋진 대사를 읊고요. 찰스는 항상 새로운 역할을 맡고 싶어합니다. 2년 전에 그는 무대 생활을 청산했지요.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바닷가에서 조용히 시골 생활을 즐기고 싶다면서 말입니다. 그리곤 이리 내려와 이 집을 지었습니다. 찰스는 이걸 작은 시골 오두막집이라고 부르죠. 욕실이 세 개에다 온갖 현대식 시설들을 갖춘 이 집을요! 저 친구한테는 관객이 필요해요. 은최한 선장 두서넛, 늙은 아낙네들, 그리고 교구 목사....... 이 정도론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죠. 이런 '바다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나이' 역할 따위는 기껏해야 반년도 못 갈 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어딜 가더라도 자신이 꼭 주인공이어야 하는 사람. 주목받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 요즘 말로 관심종자라고 할까. 이 책에서는 새터스웨이트와 정확하게 대비되는 사람이며, 사실 책 말미에 밝혀지는 그 결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면, 살인의 이유도, 목적도 전부 그 놈의 관심병 때문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멋대로인 사람, 있지 않은가. 젊은이가 자기 중심적인 것은 너그럽게 보아 넘겨줄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에게나 주변에게나 큰 비극이다. 너무나 연극적인 주인공들, 그리고 너무나 연극적인 살인 사건의 특성 떄문에 크리스티는 이 책에 <3막의 비극>이라는 제목을 붙인 모양이다. 어쩌면 먼저 제목을 떠올리고 나서 거기에 맞는 인물을 창조했을 수도 있고. 찰스 스트라이트 경은 정말로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인물이니까. 실제 연극배우이기도 하지만 삶에서도 배우였고.

 

첫번째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목사, 두번째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의사. 누가 보아도 이질적인 사람들로 서로간에 직업적인 공통점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연관성도 알기 어려우며, 원한 관계나 유산 상속과 같은 이유도 없다. 그야말로 실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극에서나 종종 볼 수 있는 사건. 책 맨 마지막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또 곰곰히 생각해보면 <에지웨어 경의 죽음>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는 연극 배우가 주인공이거나 사건의 핵심적인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 아마도 새터스웨이트가 연극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부분은 작가 스스로의 특성에서 뽑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떤 면에서든, 작가가 창조한 인물은 창조주를 닮기 마련이니까.

 

주인공은 연극 배우, 삶에서도 연극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인물, 그에 반대되는 인물은 늘 조연에 머물렀던 사람, 실제같지 않은 사건,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는 곳곳에 제목과 딱 맞는 구절들을 촘촘히 적어 놓았다. 작가가 얼마나 성실하고 꼼꼼한지 알게 되면 참 흐뭇하다.

 

 에그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세 사람 모두 에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에그는 푸아로의 도움을 원치 않는 게 틀림없었다.

 새터스웨이트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것은 찰스 카트라이트와 에그 리튼 고어, 두 사람만의 개인적인 게임이었다. 새터스웨이트는 무시해도 좋은 제3자라는 쌍방의 이해하에 참석이 허락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에르퀼 푸아로는 달랐다. 그는 주역을 맡을 사람이었다. 어쩌면 찰스 경을 밀어 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에그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된다.

 새터스웨이트는 에그가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빠졌는지 공감하며 그녀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다른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여성적인 감성을 지닌 새터스웨이트만은 그녀의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엇다. 에그는 자신의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과연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과연 마음속 생각을 어떤 말로 표현할까?

 '꺼져요. 꺼지란 말이에요. 당신 때문에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 난 당신이 필요 없다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그 리튼 고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을 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요. 도와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이런 부분도 있다.

 

 푸아로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나도 미흡했던 시절이 있지요. 이해가 느려서 시간을 끌고, 바로 그 자리에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떄가 있긴 합니다만......."

 "하지만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새터스웨이트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졋다.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로 궁금했다.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벨기에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맙시다."

 

벨기에 출신의 이 빈틈없는 탐정의 젊은 시절이 참 궁금한데, 크리스티는 왜 이 탐정이 영국으로 오기 전 일들에 대해 한번도 쓰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내가 만약 작가라면 이런 흥미로운 인간을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에 대해 뿌듯해하면서 그의 전 생애를 망라한 전기를 썼을 것 같은데. 특히나 이 책에서 푸아로는 철저하게 '조명'의 역할에 머무르는데, 그것은 그가 자청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연극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면서, 관객을 집중시키는 조명처럼, 이 소설의 푸아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에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데이크리스 부인, 데이크리스 대위, 윌스 양, 서트클리프 양, 레이디 메리 리튼 고어, 리튼 고어 양, 올리버 맨더스."

 푸아로가 말했다.

 "그렇군요. 상당히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뭐가 의미심장하단 말입니까?"

 "이름을 적어 놓은 순서 말입니다."

 "그게 어디가 이상하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뿐인데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는 겁니다. 명단이 데리크리스 부인으로 시작되는군요. 그걸로 보아 데이크리스 부인에게 가장 혐의를 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혐의가 안 가는 사람일 수도 있잖습니까?"

 "세 번째 가능성도 있지요. 가장 범인이기를 바라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은 데이크리스 부인이나 그의 남편이 범인이길 바라고 있지만 속으로는 젊은 맨더스 군이 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자잘한 단서들이 있었지요. 당신은 맨더스가 멜포트 애비에 오게 된 사고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당신은 찰스 경과 리튼 고어 양과 함께 배빙턴 부인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지요. 왜 그랬을까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생각을 조사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군가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레이디 메리를 찾아갔습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이 지역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올리버 맨더스밖에 없지요.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당신이 명단의 제일 마지막에 그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겁니다.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가장 확신하는 사람은 레이디 메리와 마드무아젤 에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의 이름을 이 두 사람 다음에 적어 두었지요. 그는 당신이 생각하는 다크호스이며, 당신은 그 사실을 자기 혼자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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