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6 (완전판) - 3막의 비극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하드 커버를 넘기자마자 등장하는 가장 첫 페이지에는 다음의 글이 쓰여져 있다.

 

감독

찰스 카트라이트 경

 

조감독

새터스웨이트

허마이온 리튼 고어

 

의상

앰브로신 의상실

 

조명

에르퀼 푸아로

 

<3막의 비극>이라는 제목도 호기심을 끌지만, 본문 전에 등장하는 이 페이지야말로 시선을 붙들어놓는 최고의 떡밥(?)이 아닌가 싶다. 과연 무슨 내용일까? 푸아로가 맨 마지막에 등장하며, 이 연극에서 겨우 조명을 맡은 이유는 뭘까?

 

새터스웨이트는 익숙한 이름으로, <신비의 사나이 할리퀸>의 사실상 주인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티의 수많은 탐정들 중 아마도 푸아로와 할리퀸은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양이다. 여기서는 할리퀸이 아니라 푸아로가 등장한다.

 

키가 작고 체격이 마른 노인, 귀족은 아니지만 환영받는 사교계 인사,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사고력을 가진 연극계의 후원자. 새터스웨이트는 이런 사람이다. 치우침이 없는 온화하고 명석한 사람이지만, 주인공을 하기에는 늘 부족한 사람. 할리퀸은 기꺼이 자신은 조연으로 빠지고 새터스웨이트를 늘 주연으로 끌어올렸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새터스웨이트의 활약이 돋보인다.

 

외양으로 봐서는 젊었을 때 큰 인기를 끌었을 사람은 아니다. 지금 노인이 된 그는 아내도 아이도 애인도 없다. 다만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좋아하며 연인들에게 관대하고 인간의 본성을 관찰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추리 소설에 딱 맞는 인물이기는 하다. 젊은 시절 내내 주인공의 동창생, 어릴 적 친구, 군대 동기 등의 역할만 주어졌을 사람,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조연이라도 될 수 있는 사람. 왠지 가슴 짠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연인 찰스 카트라이트 경은 어떤 사람일까?

 

 "저 친구는 무대보다 오히려 실생활에서 더 뛰어난 연기자랍니다. 찰스는 언제나 연기를 합니다. 자기도 어쩔 수가 없나 봐요. 그건 저 친구의 제2의 천성이니까요. 찰스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히 방을 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퇴장'을 하죠. 늘 멋진 대사를 읊고요. 찰스는 항상 새로운 역할을 맡고 싶어합니다. 2년 전에 그는 무대 생활을 청산했지요.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바닷가에서 조용히 시골 생활을 즐기고 싶다면서 말입니다. 그리곤 이리 내려와 이 집을 지었습니다. 찰스는 이걸 작은 시골 오두막집이라고 부르죠. 욕실이 세 개에다 온갖 현대식 시설들을 갖춘 이 집을요! 저 친구한테는 관객이 필요해요. 은최한 선장 두서넛, 늙은 아낙네들, 그리고 교구 목사....... 이 정도론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죠. 이런 '바다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나이' 역할 따위는 기껏해야 반년도 못 갈 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어딜 가더라도 자신이 꼭 주인공이어야 하는 사람. 주목받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 요즘 말로 관심종자라고 할까. 이 책에서는 새터스웨이트와 정확하게 대비되는 사람이며, 사실 책 말미에 밝혀지는 그 결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면, 살인의 이유도, 목적도 전부 그 놈의 관심병 때문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멋대로인 사람, 있지 않은가. 젊은이가 자기 중심적인 것은 너그럽게 보아 넘겨줄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에게나 주변에게나 큰 비극이다. 너무나 연극적인 주인공들, 그리고 너무나 연극적인 살인 사건의 특성 떄문에 크리스티는 이 책에 <3막의 비극>이라는 제목을 붙인 모양이다. 어쩌면 먼저 제목을 떠올리고 나서 거기에 맞는 인물을 창조했을 수도 있고. 찰스 스트라이트 경은 정말로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인물이니까. 실제 연극배우이기도 하지만 삶에서도 배우였고.

 

첫번째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목사, 두번째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의사. 누가 보아도 이질적인 사람들로 서로간에 직업적인 공통점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연관성도 알기 어려우며, 원한 관계나 유산 상속과 같은 이유도 없다. 그야말로 실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극에서나 종종 볼 수 있는 사건. 책 맨 마지막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또 곰곰히 생각해보면 <에지웨어 경의 죽음>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는 연극 배우가 주인공이거나 사건의 핵심적인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 아마도 새터스웨이트가 연극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부분은 작가 스스로의 특성에서 뽑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떤 면에서든, 작가가 창조한 인물은 창조주를 닮기 마련이니까.

 

주인공은 연극 배우, 삶에서도 연극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인물, 그에 반대되는 인물은 늘 조연에 머물렀던 사람, 실제같지 않은 사건,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는 곳곳에 제목과 딱 맞는 구절들을 촘촘히 적어 놓았다. 작가가 얼마나 성실하고 꼼꼼한지 알게 되면 참 흐뭇하다.

 

 에그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세 사람 모두 에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에그는 푸아로의 도움을 원치 않는 게 틀림없었다.

 새터스웨이트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것은 찰스 카트라이트와 에그 리튼 고어, 두 사람만의 개인적인 게임이었다. 새터스웨이트는 무시해도 좋은 제3자라는 쌍방의 이해하에 참석이 허락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에르퀼 푸아로는 달랐다. 그는 주역을 맡을 사람이었다. 어쩌면 찰스 경을 밀어 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에그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된다.

 새터스웨이트는 에그가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빠졌는지 공감하며 그녀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다른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여성적인 감성을 지닌 새터스웨이트만은 그녀의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엇다. 에그는 자신의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과연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과연 마음속 생각을 어떤 말로 표현할까?

 '꺼져요. 꺼지란 말이에요. 당신 때문에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 난 당신이 필요 없다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그 리튼 고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을 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요. 도와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이런 부분도 있다.

 

 푸아로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나도 미흡했던 시절이 있지요. 이해가 느려서 시간을 끌고, 바로 그 자리에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떄가 있긴 합니다만......."

 "하지만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새터스웨이트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졋다.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로 궁금했다.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벨기에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맙시다."

 

벨기에 출신의 이 빈틈없는 탐정의 젊은 시절이 참 궁금한데, 크리스티는 왜 이 탐정이 영국으로 오기 전 일들에 대해 한번도 쓰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내가 만약 작가라면 이런 흥미로운 인간을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에 대해 뿌듯해하면서 그의 전 생애를 망라한 전기를 썼을 것 같은데. 특히나 이 책에서 푸아로는 철저하게 '조명'의 역할에 머무르는데, 그것은 그가 자청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연극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면서, 관객을 집중시키는 조명처럼, 이 소설의 푸아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에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데이크리스 부인, 데이크리스 대위, 윌스 양, 서트클리프 양, 레이디 메리 리튼 고어, 리튼 고어 양, 올리버 맨더스."

 푸아로가 말했다.

 "그렇군요. 상당히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뭐가 의미심장하단 말입니까?"

 "이름을 적어 놓은 순서 말입니다."

 "그게 어디가 이상하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뿐인데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는 겁니다. 명단이 데리크리스 부인으로 시작되는군요. 그걸로 보아 데이크리스 부인에게 가장 혐의를 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혐의가 안 가는 사람일 수도 있잖습니까?"

 "세 번째 가능성도 있지요. 가장 범인이기를 바라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은 데이크리스 부인이나 그의 남편이 범인이길 바라고 있지만 속으로는 젊은 맨더스 군이 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자잘한 단서들이 있었지요. 당신은 맨더스가 멜포트 애비에 오게 된 사고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당신은 찰스 경과 리튼 고어 양과 함께 배빙턴 부인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지요. 왜 그랬을까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생각을 조사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군가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레이디 메리를 찾아갔습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이 지역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올리버 맨더스밖에 없지요.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당신이 명단의 제일 마지막에 그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겁니다.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가장 확신하는 사람은 레이디 메리와 마드무아젤 에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의 이름을 이 두 사람 다음에 적어 두었지요. 그는 당신이 생각하는 다크호스이며, 당신은 그 사실을 자기 혼자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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