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패딩턴발 4시 50분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당신도 이젠 옛날처럼 젊지 않으니까......."
마플 양은 마치 전투 작전을 세우는 장군처럼, 사업 내역을 평가하는 회계사처럼 앞으로 뛰어들 모험에 유리한 사실과 불리한 사실들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가늠해 보았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삶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나의 길고 풍부한 경험.
2. 헨리 클리서링 경과 그의 대자. 지금 런던 경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음. 리틀 패덕스 사건(『살인을 예고합니다』에 나오는 사건을 지칭하는 것임-옮긴이) 때 참 잘해 주었음.
3. 철도청에 근무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조카 레이먼드의 둘째아들 데이비드.
4. 지도에 대해 매우 풍부한 지식을 지닌 그리젤다의 아들 레너드.
마플 양은 이러한 이점들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고는 흡족해했다. 모두 그녀에게 불리한 사항, 특히 그녀의 신체적인 약점을 보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마플 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젠 내가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캐묻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사실이었다. 마플 양에게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나이와 신체적 나약함이었다. 나이에 비해 건강은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1957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마플 양이 처음으로 등장했던 <목사관의 살인>보다 27년이 흘렀다. 1930년에 첫 등장, 그리고 1932년에 <열세 가지 수수께끼>라는 단편집에서 열세 번 사건을 해결하였다. 그 이후로 잠잠하다 1942년이 되어서야 <서재의 시체>, <움직이는 손가락>에서 활약하는 마플 양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1950년에 <살인을 예고합니다>, 1952년 <마술 살인>, 1953년 <주머니 속의 호밀>, 그 다음에 나온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크리스티의 소설 속 탐정 중 푸아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마플 양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 문제이지만, 상대적으로 마플 양이 비중이 적은 것이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첫 등장 이후 27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녀도 나이를 먹었지만 그녀 주변 사람들도 나이를 먹었다. 항목 3의 조카 레이먼드는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 등장했던 인물로, 화요일 밤마다 함께 모이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화가 조이스와 결혼한다. 그 단편집에서는 암시만 나오고, 다른 소설 속에서 확실하게 결혼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아마도 <서재의 시체>, <움직이는 손가락>, <살인을 예고합니다> 중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나왔으니까. 젊은 청년이었던 레이먼드의 아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 철도청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보는 순간, 몇십 년의 세월이 소설 안에서 소설 밖과 똑같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에 뭉클해졌다. 항목 4의 그리젤다는 <목사관의 살인>에서 나왔던 인물로, 갓 결혼한 젊고 아름다운 목사 부인이었다. <서재의 시체>에서 역시 잠깐 등장했던 그녀는, 어느 새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목사관에서 아이와 놀고 있었다. 항목 2의 헨리 경은 역시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 나왔던 인물로, 그의 대자가 <살인을 예고합니다>에 나왔던 더못 크래독 경감으로, 이 소설 속에서도 마플 양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한다.
패딩턴에서 출발하는 4시 30분 기차. 마플 양과 절친한 노부인은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창 밖으로 지나가는 다른 기차의 객실에서 한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고, 순식간에 두 열차의 간격은 멀어져버린다. 그녀는 마플 양을 만나고, 마플 양은 나름대로 사건을 조사해보지만, 정작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실종 신고가 들어온 것도 없다. 마플은 직접 열차를 타보는 열성까지 보이며 이 열차가 한 저택 근처에서 급커브를 그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조력자를 그 저택으로 보낸다. 든든하고 영리한 조력자는 저택 근처에서 시신이 기차에서 떨어진 것 같은 흔적을 발견하고, 마침내 저택 주변에서 시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여자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 아마도 그 저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해 보는 과정에서, 저택 주인의 장남이 전사하기 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혼할 것이라고 했던 한 여자가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저택을 찾아올 뜻을 전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리가 살인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라는 것뿐입니다. 이건 부인 친구 분의 증언이고, 그분이 아시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러더퍼드 저택에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가 셋이나 있지요. 검시 심리가 있던 날, 저는 그 삼형제가 자동차를 타기 위해 인도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세 명 모두 제게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두꺼운 오버코트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놀랍도록 꼭 닮았더군요. 세 명이 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였던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세 사람은 완전히 대조적인 타입이죠."
이 저택의 주인은 그의 부친의 유언에 따라 어마어마한 재산을 직접 처분할 수는 없다. 신탁된 재산의 이자만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또한 적지 않은 금액이기는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건드릴 수도 없는 엄청난 부친의 재산이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에게 상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다. 어차피 내가 못 쓸 재산, 자식들 좋은 일은 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오래오래 자식들을 괴롭히며 장수할 생각이다. 장남은 이미 사망했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미혼의 장녀, 그리고 차남, 삼남, 사남. 여기에 죽은 차녀의 남편과 아이까지 노인이 죽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을 수 있지만, 죽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쪼들림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죽은 장남의 아이가 있다면 나머지 자손들이 받는 유산은 줄어든다. 이러는 와중에 노인이 독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또 누가 죽지 않겠느냐고요? 오, 부디 그렇지 않길 바랄 뿐이랍니다. 하지만 그건 모를 일이죠, 안 그래요? 정말로 사악한 사람이 있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난 이 사건에 엄청난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답니다."
"아니면 광기라든가요."
루시가 말했다.
"요즘에는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게 현대적이라고 하더군요. 나 자신은 동의하지 않지만."
대체 범인은 누구이며, 동기는 무엇일까? 아니, 살해당한 여자는 또 누구일까? 마플 양과 그녀의 조력자 루시를 비롯하여,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추리에 들어가지만 사건은 계속 오리무중이다. 시신이 발견된 시기가 이미 살인 사건이 일어난지 3주 정도 지난 데다가, 여자는 프랑스 국적이라서 피살자가 누구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단서가 희미해져 수사는 힘들어진다. 이 경우 보통 크리스티는 희생자와 범인의 심리에 주목한다.
"심리학이란 심리학자에게 맡겼을 때나 정확하지요. 문제는 요즘엔 누구나 다 아마추어 심리학자라는 거죠. 요즘 내 환자들은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자기가 무슨 콤플렉스에 무슨 노이로제를 앓고 있다고 정확하게 설명한다니까요. 고마워요, 에마. 한 잔 더 주겠습니까? 오늘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난 늘 의사들이 고귀하고 자기 희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마플 양이 말했다.
"의사들을 많이 안 만나보셨나 보군요."
큄퍼 박사가 말했다.
"많은 의사가 거머리 취급을 당한답니다. 사실 실제로 그런 의사들도 많고요. 어쩄든 이젠 우리도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돈을 번답니다. 더 이상 알지도 못하는 의사한테 청구서가 날아올 일도 없어요. 문제는 덕분에 모든 환자가 '정부'에서 최대한 많은 걸 받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거죠. 그 결과 꼬마 제니가 밤에 기침을 두 번 했다고 해서, 아니면 꼬마 지미가 사과 몇 알을 집어 먹었다는 이유로 불쌍한 의사가 한밤중에 달려가야 한다는 겁니다."
해결 가능성이 도저히 보이지 않던 사건은 마플 양의 기지로 멋지게 해결된다. 물론, 여기에도 특유의 로맨스는 빠지지 않는다. 아마 크리스티도 그런 지적을 많이 받았던 탓일까.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문장도 있다.
"하지만 큄퍼 박사는 마흔을 많이 넘기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가정 생활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고요. 에마 크랙켄소프는 아직 마흔이 안 되었으니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에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에요. 큄퍼 박사의 부인은 젊었을 때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었다면서요?"
"아마 그럴 거예요. 에마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요."
"큄퍼 박사는 틀림없이 외로운 처지일 거예요. 열심히 바쁘게 일하는 의사에게는 아내가 필요하죠.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너무 젊지 않은 그런 여자 말이에요."
"저기요, 우리 지금 범죄 사건을 조사하는 건가요, 아니면 중매를 서고 있는 건가요?"
루시의 말에 마플 양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난 너무 낭만적인가 봐요. 나이 많은 할머니가 돼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