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또는 M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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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와 터펜스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때는 1940년 봄. 이제 마흔 여섯 살이 된 토미는 예전과 같은 일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에게 일자리를 주려는 사람은 없다. 부인 터펜스도 마찬가지. 그들 사이에는 데보라와 데릭이라는 쌍둥이 남매가 있으며, 둘 다 전쟁 중 자국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예전에 그들에게 일을 주었던 이스트햄턴 경, 즉, '카터 씨' 또한 은퇴하여 스코틀랜드에서 낚시나 하고 있는 상황. 그러던 중 이스트햄턴 경의 소개로 방문한 그랜트라는 사람이 방문하여 토미에게 영국 내에 있는 나치 스파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줄 것을 의뢰한다.

 

<비밀 결사>, <부부 탐정>에 이은, 토미와 터펜스 커플이 등장하는 세 번째 소설이다. 1922년, 제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만날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종전 후 겪게 되는 좌충우돌 모험 이후 1929년, 이미 부부가 된 두 사람이 사무소를 차리고 함께 활동을 벌이다 제2차세계대전 가운데의 1941년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비밀 결사>와 <부부 탐정> 사이에는 책의 출판 기준으로는 7년의 차이가 있지만 책 속에서는 6년인 것으로 나오고, 역시 <비밀 결사>와 이 책 사이에는 출판 기준으로는 19년이고 <부부 탐정>과는 12년이지만 이 책의 본문에서 20년도 더 지났다는 문장이 있다. 이래 저래 숫자가 좀 맞지 않기는 하는데, 사실 크리스티의 다른 탐정인 푸아로의 경우, 계산해 보면 나이가 100살이 넘는다는 글도 본 적이 있다. 크리스티가 그런 쪽으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몇십년간 수십 편의 소설을 써 낸 작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소설에서 명시하고 있는 시기는 1940년으로, 제2차세계대전중인 상황. 암호명 N과 M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모험이다.

 

토미와 터펜스가 등장하는 소설이 다 그렇긴하지만, 열정은 넘치고 눈썰미는 다소 모자라기 때문에 늘 죽음의 위기를 넘기곤 한다. 덕분에 소설이 좀 헐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범인의 정체를 빨리 눈치챌 수 있어서 좀 김이 빠지기도 했다. 이들의 모험은 늘 거국적으로 느껴지지만, 그 규모에 비해 두 명의 프로 정신은 좀 부족한 것 같아 진지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젊었던 <비밀 결사>와 <부부 탐정>에서는 그런 점도 매력이었지만, 장성한 자녀를 둔 중년의 부부가 되어서도 전혀 달라진 점이 없어서 좀 황당하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후함이 엿보이면 더 좋았을텐데. 아직도 이들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명분보다는 재미에 좀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40년이고, 출판된 것은 1941년. 크리스티는 한참 전쟁 중에 이 소설을 구상하고 써냈다는 것인데 1939년에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 전쟁의 참혹함이 덜했던 시기여서일까? 아니면, 이미 제1차세계대전에 20대로 전쟁을 겪었던 크리스티 입장에서 좀 더 대범하게 전쟁을 보았고, 비슷한 연배인 토미와 터펜스 부부에게 감정을 주입했던 것일까?

 

이래 저래 아쉬움이 좀 남긴 하지만, 비교적 분량이 많지 않아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읽을만한 책이다. 너무 단순해서 머리를 쓰는 즐거움이 없긴 하지만.

 

"B 말이에요, 바보같긴. 베레스퍼드도 B, 블렌켄솝도 B. 제 내의에는 B가 수놓아져 있단 말이에요. 패트리샤 블렌켄솝. 프루던스 베레스퍼드와 머리글자가 같죠. 그런데 당신은 왜 메도즈에요? 바보 같은 이름이네요."

"우선 말이야,"

토미가 대답했다.

"나는 내 바지에 B자가 수놓아져 있지도 않고 말이지. 게다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그렇게 지시를 받았지. 메도즈 씨는 제법 훌륭한 삶을 살아온 신사라고. 난 그 내용 전부를 외워야 했어."

"좋아요. 당신은 기혼이에요, 미혼이에요?"

터펜스가 말했다.

"상처했지."

토미가 품위있게 말했다.

"10년 전 부인이 싱가폴에서 죽었대."

"왜 하필 싱가폴이에요?"

"어디선가는 죽었어야 하잖아. 싱가폴이 어때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제일 좋은 장소일 수도 있죠. 저도 미망인이에요."

"남편은 어디서 죽은 거야?"

"그게 상관있나요? 아마도 요양원에서 죽었을걸요. 간경변으로 죽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어요."

"그렇군. 가슴 아픈 이야기야. 그럼 아들 더글라스는?"

"더글러스는 해군이에요."

"어제 저녁에 들었어."

"그리고 제겐 아들이 둘이나 더 있어요. 레이먼드는 공군이고, 막내인 시릴은 지방수비군이지요."

"그런데 누군가 그 상상의 블렌켄솝 일가를 조사하려고 하면?"

"아이들은 블렌켄솝이 아니에요. 블렌켄솝은 제 두 번째 남편이거든요. 내 첫 남편은 힐이에요. 전화번호부에는 힐이라는 이름이 세 페이지나 되죠. 그 모든 힐을 다 찾아 볼 수는 없어요."

토미가 한숨을 쉬었다.

"터펜스, 그게 당신의 고질병이야. 당신은 항상 너무 과해. 남편이 둘에, 아들이 셋이라고. 그건 너무 지나쳐.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가면 결국 스스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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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딩턴발 4시 50분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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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이젠 옛날처럼 젊지 않으니까......."

마플 양은 마치 전투 작전을 세우는 장군처럼, 사업 내역을 평가하는 회계사처럼 앞으로 뛰어들 모험에 유리한 사실과 불리한 사실들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가늠해 보았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삶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나의 길고 풍부한 경험.

2. 헨리 클리서링 경과 그의 대자. 지금 런던 경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음. 리틀 패덕스 사건(『살인을 예고합니다』에 나오는 사건을 지칭하는 것임-옮긴이) 때 참 잘해 주었음.

3. 철도청에 근무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조카 레이먼드의 둘째아들 데이비드.

4. 지도에 대해 매우 풍부한 지식을 지닌 그리젤다의 아들 레너드.

 

마플 양은 이러한 이점들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고는 흡족해했다. 모두 그녀에게 불리한 사항, 특히 그녀의 신체적인 약점을 보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마플 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젠 내가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캐묻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사실이었다. 마플 양에게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나이와 신체적 나약함이었다. 나이에 비해 건강은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1957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마플 양이 처음으로 등장했던 <목사관의 살인>보다 27년이 흘렀다. 1930년에 첫 등장, 그리고 1932년에 <열세 가지 수수께끼>라는 단편집에서 열세 번 사건을 해결하였다. 그 이후로 잠잠하다 1942년이 되어서야 <서재의 시체>, <움직이는 손가락>에서 활약하는 마플 양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1950년에 <살인을 예고합니다>, 1952년 <마술 살인>, 1953년 <주머니 속의 호밀>, 그 다음에 나온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크리스티의 소설 속 탐정 중 푸아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마플 양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 문제이지만, 상대적으로 마플 양이 비중이 적은 것이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첫 등장 이후 27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녀도 나이를 먹었지만 그녀 주변 사람들도 나이를 먹었다. 항목 3의 조카 레이먼드는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 등장했던 인물로, 화요일 밤마다 함께 모이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화가 조이스와 결혼한다. 그 단편집에서는 암시만 나오고, 다른 소설 속에서 확실하게 결혼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아마도 <서재의 시체>, <움직이는 손가락>, <살인을 예고합니다> 중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나왔으니까. 젊은 청년이었던 레이먼드의 아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 철도청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보는 순간, 몇십 년의 세월이 소설 안에서 소설 밖과 똑같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에 뭉클해졌다. 항목 4의 그리젤다는 <목사관의 살인>에서 나왔던 인물로, 갓 결혼한 젊고 아름다운 목사 부인이었다. <서재의 시체>에서 역시 잠깐 등장했던 그녀는, 어느 새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목사관에서 아이와 놀고 있었다. 항목 2의 헨리 경은 역시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 나왔던 인물로, 그의 대자가 <살인을 예고합니다>에 나왔던 더못 크래독 경감으로, 이 소설 속에서도 마플 양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한다.

 

패딩턴에서 출발하는 4시 30분 기차. 마플 양과 절친한 노부인은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창 밖으로 지나가는 다른 기차의 객실에서 한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고, 순식간에 두 열차의 간격은 멀어져버린다. 그녀는 마플 양을 만나고, 마플 양은 나름대로 사건을 조사해보지만, 정작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실종 신고가 들어온 것도 없다. 마플은 직접 열차를 타보는 열성까지 보이며 이 열차가 한 저택 근처에서 급커브를 그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조력자를 그 저택으로 보낸다. 든든하고 영리한 조력자는 저택 근처에서 시신이 기차에서 떨어진 것 같은 흔적을 발견하고, 마침내 저택 주변에서 시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여자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 아마도 그 저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해 보는 과정에서, 저택 주인의 장남이 전사하기 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혼할 것이라고 했던 한 여자가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저택을 찾아올 뜻을 전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리가 살인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라는 것뿐입니다. 이건 부인 친구 분의 증언이고, 그분이 아시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러더퍼드 저택에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가 셋이나 있지요. 검시 심리가 있던 날, 저는 그 삼형제가 자동차를 타기 위해 인도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세 명 모두 제게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두꺼운 오버코트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놀랍도록 꼭 닮았더군요. 세 명이 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였던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세 사람은 완전히 대조적인 타입이죠."

 

이 저택의 주인은 그의 부친의 유언에 따라 어마어마한 재산을 직접 처분할 수는 없다. 신탁된 재산의 이자만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또한 적지 않은 금액이기는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건드릴 수도 없는 엄청난 부친의 재산이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에게 상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다. 어차피 내가 못 쓸 재산, 자식들 좋은 일은 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오래오래 자식들을 괴롭히며 장수할 생각이다. 장남은 이미 사망했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미혼의 장녀, 그리고 차남, 삼남, 사남. 여기에 죽은 차녀의 남편과 아이까지 노인이 죽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을 수 있지만, 죽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쪼들림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죽은 장남의 아이가 있다면 나머지 자손들이 받는 유산은 줄어든다. 이러는 와중에 노인이 독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또 누가 죽지 않겠느냐고요? 오, 부디 그렇지 않길 바랄 뿐이랍니다. 하지만 그건 모를 일이죠, 안 그래요? 정말로 사악한 사람이 있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난 이 사건에 엄청난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답니다."

"아니면 광기라든가요."

루시가 말했다.

"요즘에는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게 현대적이라고 하더군요. 나 자신은 동의하지 않지만."

 

대체 범인은 누구이며, 동기는 무엇일까? 아니, 살해당한 여자는 또 누구일까? 마플 양과 그녀의 조력자 루시를 비롯하여,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추리에 들어가지만 사건은 계속 오리무중이다. 시신이 발견된 시기가 이미 살인 사건이 일어난지 3주 정도 지난 데다가, 여자는 프랑스 국적이라서 피살자가 누구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단서가 희미해져 수사는 힘들어진다. 이 경우 보통 크리스티는 희생자와 범인의 심리에 주목한다.

 

"심리학이란 심리학자에게 맡겼을 때나 정확하지요. 문제는 요즘엔 누구나 다 아마추어 심리학자라는 거죠. 요즘 내 환자들은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자기가 무슨 콤플렉스에 무슨 노이로제를 앓고 있다고 정확하게 설명한다니까요. 고마워요, 에마. 한 잔 더 주겠습니까? 오늘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난 늘 의사들이 고귀하고 자기 희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마플 양이 말했다.

"의사들을 많이 안 만나보셨나 보군요."

큄퍼 박사가 말했다.

"많은 의사가 거머리 취급을 당한답니다. 사실 실제로 그런 의사들도 많고요. 어쩄든 이젠 우리도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돈을 번답니다. 더 이상 알지도 못하는 의사한테 청구서가 날아올 일도 없어요. 문제는 덕분에 모든 환자가 '정부'에서 최대한 많은 걸 받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거죠. 그 결과 꼬마 제니가 밤에 기침을 두 번 했다고 해서, 아니면 꼬마 지미가 사과 몇 알을 집어 먹었다는 이유로 불쌍한 의사가 한밤중에 달려가야 한다는 겁니다."

 

해결 가능성이 도저히 보이지 않던 사건은 마플 양의 기지로 멋지게 해결된다. 물론, 여기에도 특유의 로맨스는 빠지지 않는다. 아마 크리스티도 그런 지적을 많이 받았던 탓일까.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문장도 있다.

 

"하지만 큄퍼 박사는 마흔을 많이 넘기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가정 생활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고요. 에마 크랙켄소프는 아직 마흔이 안 되었으니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에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에요. 큄퍼 박사의 부인은 젊었을 때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었다면서요?"

"아마 그럴 거예요. 에마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요."

"큄퍼 박사는 틀림없이 외로운 처지일 거예요. 열심히 바쁘게 일하는 의사에게는 아내가 필요하죠.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너무 젊지 않은 그런 여자 말이에요."

"저기요, 우리 지금 범죄 사건을 조사하는 건가요, 아니면 중매를 서고 있는 건가요?"

루시의 말에 마플 양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난 너무 낭만적인가 봐요. 나이 많은 할머니가 돼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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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8 (완전판) - 밀물을 타고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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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1944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에르퀼 푸아로를 찾아온 것은 1946년 봄이었다.

 

내가 대충 읽은 것이 아니라면,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시간이 나온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추리 소설로서의 의무 때문에, 날짜와 시간, 계절등은 명확하게 제시되지만, 연도까지 세세하게 알려준 적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저 문장을 집어넣은 이유는?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문장이라는 점에서 꼭 저 문장을 써서 강조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잇다. 1944년 가을, 제 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 그리고 1946년 봄, 전쟁이 끝난 직후.

 

1890년 영국에서 출생한 크리스티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약제사와 간호사로 근무했다. 이때 그녀는 20대였다. 그녀의 첫 소설은 1920년에 나왔고,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0대. 이 소설은 1948년에 나왔다.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일생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겪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대였던 첫번째 전쟁 당시 그녀는 부상자를 돌보는 병원에서 일을 하였고, 50대였던 두번째 전쟁 당시 그녀는 한참 소설을 정력적으로 쓰고 있던 유명한 작가였다. 한창의 나이에 젊음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했을 것이며, 친척과 지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비록 승전국이었지만 전쟁 후 경제 위기와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자국민에 대해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소설가에게 전쟁과도 같은 참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소설가들이 전쟁 그 자체와 남북분단을 겪으며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녹아 있는 귀한 소설들을 썼다. 전세계적으로는 더하다.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도,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쓴 헤밍웨이처럼 직접적인 언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 그 이후의 삶을 다룬 소설들 중 빼어난 명작은 정말 많다. 이런 고전들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벼운 소설을 쓰는 대중 소설가인 크리스티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녀 작품의 주인공의 상당수가 군인이며, 대표적인 인물인 푸아로의 친구 아서 헤이스팅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으로 제대한 인물로 나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린도 여자해군부대에서 근무했다가 종전과 함께 제대한 것으로 나온다.

 

제1차세계대전보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영국의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규모로도 그렇고, 기간으로도 그렇다. 그녀의 초창기 소설에서 전쟁이라는 소재는 다소 낭만적으로 댜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이 소설 속의 전쟁은 좀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종전 직후, 당시 영국 국민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척박한 삶을 버텨야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린은 언제나 결심히 확고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았다.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생활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 바로 그거였다.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기분!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이 살아가는 것. 군을 제대하고 집에 돌아온 이후 린은 줄곧 그런 기분이었다. 전장에 나가 있던 시절에는 향수병에 젖어 살았다. 그때는 정해진 의무가 명확하게 있었고, 삶에는 계획과 질서가 잡혀 있었다.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생각을 하나하나 하고 있자니 린은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도처에서 모두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결국 전쟁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 바닷속 어뢰,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사막을 건널 때면 똑똑히 들려오던 '탕'하는 총탄 소리처럼 눈에 보이는 위험이 무서운 게 아니다. 생각을 멈추면 사는 게 훨씬 쉬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런 정신 상태가 무서운 것이다. 린 마치몬트는 더 이상 입대할 때처럼 단순하고 결단력 있고 똑똑한 여자가 아니었다. 전에는 특정한 분야에서 이미 정해진 경로를 따라 머리를 쓰면 되었다. 이제 다시 한 번 삶의 주인이 되었지만, 문제와 맞서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고 린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들이야말로 전쟁을 통해 진정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라고 하면 정말 이상하겠지. 이들에게는 수많은 '금기 사항'이 족쇄처럼 붙어 다니기는 하지만 따라야 할 명확한 '의무' 같은 건 전혀 없다. 이들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사고해 그떄그때 상황에 맞게 방편을 마련할 수 있어야 했다. 모든 재능을 짜내야 했고, 심지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재능까지 계발해야 했다. 지금 린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책임질 수 있는 건 그들뿐이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똑똑하며 우수한 지능과 철저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을 무사히 마친 린 마치몬트 자신은 정작 방향도 결의도 잃어버린 상태였다. 입에 올리기 싫지만 표류하고 있다는 게 딱 맞는 말이었다.

'고향에 죽 머물렀던 롤리 같은 사람들은 어땠을까.'

 

전쟁 직후 집으로 돌아온 린. 변함없다고 생각했던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은 스스로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을 비롯해 온 일가 친척을 돌보아주던 든든한 외삼촌은 딸 뻘인 여자와 결혼하자마자 유언장도 없이 사망하였고, 전재산이 미망인에게로 넘어가버려 그녀를 비롯한 친척들은 생계조차 어려운 현실. 그 와중에 새롭게 시선을 끄는 남자는 외삼촌과 재혼한 그 젊은 여자, 자신을 비롯해서 온 친척을 경제적 곤궁에 빠지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자의 오빠다. 그 여자는 외삼촌과의 결혼이 두번째로, 첫번째 결혼 후 남편은 아프리카에서 사망하였고 그곳에 묻혔다. 그러던 중 마을에 의문의 남자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고, 죽은 남자의 친구는 그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진 첫번째 남편이라고 법정에서 증언한다. 끝까지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젊은 여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그녀의 오빠가 체포된어 재판을 받게 된다. 만약 죽은 남자가 첫번째 남편이 맞다면, 두번째 결혼은 중혼이 되므로 무효가 되어 버리며, 그녀가 상속받은 남편의 거대한 재산은 다시 몰수되어 가까운 친척들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횡재를 하게 된 동생 덕분에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던 오빠에게는 살인 동기도 있고, 기회도 있었다.

 

"물론 전 형사사건에는 경험이 전무합니다. 하지만 의학적 증거란 것이 일반인이나 소설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틀릴 수 있어요. 의학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진단이란 게 뭡니까? 빈약한 지식을 근거로 추측하는 거 아닙니까. 애매한 단서는 한 가지 방향만 제시하지 않지요. 전 홍역을 진단하는 데는 꽤 자신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의사로 활동하면서 홍역에 걸린 사례를 수백번이나 보았고 수없이 다양하게 변형된 징후와 증상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역설적이지만 선생이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홍역에 걸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의사로 살면서 전 별별 일을 다 보았습니다. 한 여자는 맹장염인 줄 알고 수술대까지 갔다가 수술 직전에 파라티푸스 진단을 받았지요. 또 열성적이고 성실한 한 젊은 의사는 피부병에 걸린 아이를 보고 심각한 비타민 결핍이라고 진단했지만, 그 동네 수의사가 엄마한테 와서는 아이가 안고 있던 고양이가 백선에 걸려 아이에게 옮은 거라고 설명해 주었지요.

선입관에 피해를 입기는 우리 의사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 한 남자의 시신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피가 얼룩진 부젓가락이 놓여 있고요. 그가 다른 물건으로 가격당했다고 하면 터무니없어 보이겠지요. 물론 두부 골절을 치료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드리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저는 뭔가 다른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표면이 그렇게 매끄럽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은 물건 말입니다. 아, 뭐라고 해야 하나. 모서리가 있는 물건, 벽돌 같은 것 말입니다."

 

죽은 남자의 뒤를 이어, 증언했던 사람이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뒤이어 젊은 미망인마저 자살한다. 세 사람이 죽었고, 스펜스 총경은 살인이 한 건, 자살이 두 건이라고 정리하며 푸아로는 자살이 한 건, 사고가 한 건, 살인이 한 건이라고 단언한다.  

 

"맞습니다, 이번 사건은 영락없이 셰익스피어 작품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요. 셰익스피어라면 그 모든 질투며 증오, 열정에서 나온 도발적인 행동들을 엮어서 멋들어지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겁니다. 또 이 사건에는 기회에 성공적으로 편승한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사에도 파도처럼 흐름이 있나니, 밀물을 타면 행운을 만나리.......' 총경님, 바로 이걸 따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를 잡아서 자기 나름의 목적에 맞게 변용한 사람 말입니다."

 

여기에서 제목의 의도가 드러난다. 푸아로가 인용한 저 문장은 셰익스피어 작 「줄리어스 시저」 제 3장 중 브루투스의 대사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 그로 인해 행운을 거머쥐었던 범인. 범인의 정체보다도 세 명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게 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 더,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덧붙인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종전 후 피폐해진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절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문장.

 

화창한 아침이었다. 꼭 여름 같은 봄날의 이런 아침에는 정작 여름에는 맛볼 수 없는 상쾌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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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이프러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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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세상에 나온 크리스티의 이 소설은 구성이 굉장히 독특하다. 프롤로그에서는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을 비추며, 이 재판의 피고가 누구이고 그녀의 죄목이 무엇인지 나온다. 1부에서는 재판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피고가 살해했다고 의심을 받는 사람이 살아있었던 시간으로, 그녀가 죽기 전까지의 상황이 그려진다. 2부에서는 푸아로가 이 사건에 대해 수사하는 과정이 나오며, 3부에서는 다시 법정으로 돌아가 프롤로그의 뒷부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목이 독특했다. 슬픈 사이프러스. 본문이 시작되기 전 셰익스피어가 인용되는데, '십이야'의 한 구적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다른 출판사에서 이 책의 제목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삼나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확히 말하면 삼나무가 아니고 편백나무라고 한다. 두 나무는 언뜻 보아서는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종으로, 두 나무 중 하나를 검색할 경우 두 나무의 구분법이 관련 검색어로 뜰 정도이니, 이 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나무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알지 못할 경우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프러스, 그러니까 편백나무는 상중을 의미한다고 한다. 셰익스피어가 '십이야'에서 저 구절을 쓴 것도 슬픔에 잠긴 주인공이 저 나무로 짠 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노래하는 부분이었다고. 그런데 여기까지의 소설 밖 지식을 알고 난 후에도, 이 책의 제목이 왜 <슬픈 사이프러스>인지는 여전히 알수가 없었다. '십이야'는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인데, 내 기억이 맞다면 '십이야'는 난파 후 함께 있던 쌍둥이 오빠와 헤어지고 남장을 하여 한 귀족의 하인 역할을 하던 여성이 주인공으로, 귀족의 짝사랑 대상이었던 여자로부터는 연정을, 자신이 모시던 귀족으로부터는 질투를 받다가 쌍둥이 오빠가 등장한 후 두 남녀가 각각 짝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소설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처음부터 시선을 집중시키는 법정 장면, 플래시백으로 돌아간 과거,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어지는 공방. 초반부터 살해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지고, 줄줄이 불리한 증언들이 이어지다가 사소한 사실 하나로 한번에 뒤집히는 사건. 타임스로부터 '스릴러를 표방한 소설들의 난립에 지친 독자들을 다시금 고전적 본격 추리의 매력으로 빠져들게 할 걸작' 이라는 극찬을 받았다는데 딱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호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처럼 젊은 분 입장에서는 조금 귀찮지요? 전문의가 되고 싶지 않으세요? 시골의 일반 개업의 일이 지루하지 않으세요?"

로드는 모래빛 머리를 저었다.

"아뇨.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좋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질환이 좋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질병의 희귀한 병균 연구를 파고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홍역, 수두, 기타 등등이 좋아요. 사람들마다 그런 병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는 것도 좋고요. 이미 알려진 치료법을 개선할 수 없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저의 문제점은 야심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저는 구레나룻이 길게 자라고, 사람들이 '그래, 우리 마을에는 로드 선생님이 계시지. 좋은 양반이야. 하지만 방법이 너무 구식이란 말이야. 젊은 아무개가 최신식이라던데, 그 사람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말을 할 때까지 여기서 살 겁니다."

 

법정 장면 후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1부와 2부에서는 피고, 피해자,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인물이 어떤 성격인지 대화를 통해 묘사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이런 부분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그 인물이 소설 속에서 빠져나와 구체적인 형태를 띄고 내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예상보다 이런 경우가 흔하거든요. 일종의 미신 같은 겁니다. 시간이 많다고들 생각하는 거죠. 유언장을 쓰기만 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더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터무니없는 발상이지만, 실상이 그렇습니다."

(중략)

"하지만 처음으로 발작을 일으키신 뒤에는......?"

세던 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더 완강하게 거부하시더군요. 아예 유언장이라는 단어 자체를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디가 물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세던 씨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아, 아닙니다. 병환 떄문에 더 불안해지신 거죠."

엘리너가 어리둥절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죽고 싶다고 하셨는데......."

세던 씨가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엘리너 양, 인간의 머리는 아주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답니다. 웰먼 부인은 죽고 싶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계셨을 겁니다. 그런 희망 때문에 유언장을 만들면 재수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셨겠죠. 부인은 유언장을 만들 생각이 없으셨던 게 아니라 영원히 미루셨던 겁니다."

세던 씨는 갑자기 로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친근한 말투로 물었다.

"사람들이 하기 싫은 일,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떤 식으로 미루고 피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로디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예, 물...... 물론 잘 알죠.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바로 그겁니다. 웰먼 부인꼐서는 예전부터 유언장을 만들 작정이었지만, 오늘 할 일을 계속 내일로 미루셨던 겁니다! 시간은 많다고 계속 자기 최면을 걸면서 말이죠."

 

이런 부분도 마찬가지. 사람이란 원래 감정에 휘둘리거나 미신적인 요소를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일수록 역으로 이런 경우가 많다. 여러 의미에서 인간은 참 모순적인 존재로,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그런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이 소설 속에서 유언장도 없이 엄청난 재산을 남기고 사망한 노부인에 대한 묘사가 그런 의미에서 퍽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이 대화에서는 겉으로는 노부인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지만, 단 두 문장을 통해 다른 주요 인물의 성격에 대한 단서마저 제시한다.

 

이 소설 속에 느껴지는 크리스티의 노련함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단 몇 줄 만으로도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거나, 인생의 진리를 꿰뚫어보는 듯한 통쾌함은 물론이다. 피살자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상이 푸아로가 누구에게 물어보느냐에 따라서 매번 달라지는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짝사랑하던 청년에게는 한 송이 꽃과 같았던 사람, 피고에게 연정을 품고 푸아로에게 사건을 의뢰한 마을의 의사에게는 착한 아이, 노부인의 간호사이자 그녀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었던 이에게는 당장 영화계로 진출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고, 노부인의 가정부는 거들먹거리는 젊은 여자였다는 것. 이런 부분을 영상화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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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쉽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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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부인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어. 내가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게 어렵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녀는 내가 틀렸다고 하더군. 살인을 하기는 아주 쉽다는 거야......."

 

이 책의 원제는 <Murder is easy> 혹은 <Easy to kill> 이다. 사실 어느 쪽으로 해도 뜻은 똑같은데, 왜 이런 식으로 구분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각각 소설이 따로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위키피디아에 들어가보니 같은 소설로 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바로 같은 해인 1939년에 출판된 장편 소설도 비슷한데 <Ten Little Niggers> 혹은 <And then there were none> 혹은 <Ten Little Indians> 이렇게 3가지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이름이 여러 개인 이유는, 처음에 소설이 나왔을 때, 'Niggers'나 'Indians'라는 단어들이 인종차별적이기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소설은 왜 이름이 두 가지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목록을 죽 살펴보면, 꽤 여러 편의 소설들이 이처럼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저작권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절, 작가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책 제목을 바꿔서 출판된 경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발표 이후 사람들이 원래 책 제목이 아니라 다르게 부르면서 재판을 찍을 때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자연스럽게 제목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경우도, 첫번째 책은 원래 <해리포터와 철학자의 돌>이었지만, 미국에서 출판되면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경우는 마케팅 때문이었는데, 아마 크리스티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루크라는 남자가 있다. 말레이 해협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영국에 귀국한 전직 경찰로, 몀예 퇴직해서 연금과 소소하게 들어오는 수입으로 한가롭게 살아가는 신사이다. 기차에서 만난 한 노부인으로부터 위치우드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여러 건의 의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런던의 친구 집에 도착한 주인공은 신문을 통해 런던 경시청으로 가던 그녀가 차에 치여 숨졌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1주일 후, 또다시 신문에서 그녀가 다음 희생자로 생각된다고 했던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고, 사망한 그 사람의 장소와 직업이 당시 그녀의 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위치우드로 직접 내려가 사건을 조사한다.

 

"살아가면서 직시해야 하는 가장 불쾌한 진실 중 하나는 모든 죽음에는 그 죽음으로 인해 득을 보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때입니다. 단순히 돈 문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침 루크의 친구 지미의 사촌 브리짓이 이 마을에 살고 있기에, 지미가 브리짓에게 잘 말해주어 루크는 지미의 촌으로 그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미신과 관습에 대해 인터뷰를 한다는 명목으로 머무르게 된다.

 

"사람들은 타고난 성정이 그래서가 아니라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게 잔호간 짓을 할 때도 있어요. 어린아이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성인이 미치광이 같은 교활함과 야만성을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면모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일어나는 모든 잔혹하고 어리석은 일의 근원에는 바로 그런 성숙 문제가 있다고 봐요. 그런 유치한 것들을 없애야죠."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손을 폈다.

브리짓이 갑자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목사님 말씀이 옳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요. 어른인데 아이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죠......."

루크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누군가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위필드 경이 어떤 면에서 지독히 유치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이 위필드 경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위필드 경은 조금 우스꽝스럽기는 했지만 확실히 무서운 인물은 아니었다. 루크 피츠윌리엄은 브리짓이 누구를 생각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루크가 기차에서 만난 핀커튼 부인은 헤어지기 전 자신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말을 근거로 삼아 루크는 살인자는 최소한 핀커튼 부인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심되는 사람 중 먼저 의사인 토머스 박사를 찾아간다. 그는 패혈증으로 사망한 험블비 박사와 종종 의학적인 견해가 충돌하였고, 험블비 박사는 자신의 딸에 대한 토머스 박사의 구애를 무시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사인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희생자에게 약물 처방을 할 수 있는 의사이기도 하다.

 

"꽤 쉬워요."

"뭐가요?"

"무사히 빠져나가는 거 말입니다."

그는 다시 매력적이고 소년 같은 미소를 띠었다.

"조심한다면 말이죠. 조심하기만 하면 됩니다! 영리한 사람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죠. 그게 바로 비결입니다."

그는 미소를 짓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루크는 서서 계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의사의 미소에는 짐짓 겸손한 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루크는 자신을 성숙한 어른으로, 토머스 박사는 젊고 순진한 젊은이로 보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그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의사의 그 미소는 어른이 똑똑한 아이에게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아마도 런던에서 핀커튼 부인을 차로 친 사람은 살인자일 것이다. 따라서 그 날 위치우드를 비웠던 사람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그러던 도중 한 명이 더 살해되고, 모든 정황상 단 한 명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막판에 가서 또 한번 역전된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루크는 사랑하는 브리짓의 생명을 구하지만, 기존의 탐정들과는 다르게 추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나가던 험블비 박사의 부인의 조언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비껴간다. 마지막에 배틀 총경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사건을 정리할 뿐이다. 굉장히 복잡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가능했던 이유는 구식 수법이었기 떄문이다. 즉, 살해 방법이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했기 떄문인데, 단 하나 그 사람이 의심받지 않았던 이유는 첫번째는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고, 두번쨰는 눈에 보이는 동기가 없었기 때문에.

 

추리 소설에서 사실 살인광이 등장하면 재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확실한 동기가 있는 사람들이 용의자가 되고, 숨겨졌던 뒷이야기가 밝혀지며, 알리바이가 전복되어야 추리의 재미가 있다. 이 소설에서는 자신이 평생동안 원한을 품었던 한 사람에게 혐의를 씌우기 위한 이유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살인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복수라는 동기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직접 그 대상에게 하는 복수가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면서 복수한다는 것은 사실 맞지 않는다. 그보다도 살인 자체에 대한 즐거움, 스스로의 영리함에 대한 만족, 그러면서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 혐의를 덮어씌우는 쾌감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일 것이다. 즉, 이 경우 살인의 동기는 그저 살인자의 감정인 것이다. 이 경우 의외의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지면서 오는 즐거움은 있지만, 이후에 동기를 알고 나면 다소 김이 빠지기도 한다.

 

살해 수법도 정교하지 않고 즉흥적인 것이 많았으며, 어쩌면 시골 마을, 그것도 아직까지 민간전승이 남아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살인의 몇몇 경우는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았고, 어떤 면에서 범죄자의 운이 좋았기 떄문에. 하지만 소설의 구성 면에서는 마지막까지 사건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던 주인공에게는 딱 맞는 상대라고 생각한다. 초반의 기차 장면도 좋았고, 제목과 완벽히 상응하는 내용이며, 군데 군데 복선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시 떠올리게 할 만큼 알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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