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0 (완전판) - 복수의 여신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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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스》 또한 예전같지가 않았다. 《타임스》에서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더 이상 뭘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1면을 훑어보면 특별히 관심이 있는 기사를 찾아 읽을 수 있었던 전통적인 차례가 괴상하게 변해 버렸다. 중간에 갑자기 삽화와 함께 카프리 섬 여행에 관한 내용이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가 하면, 스포츠 면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부각되었다. 법정 소식과 부고 기사는 그나마 충실한 편이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한때 마플 양의 관심을 끌었던 탄생과 결혼, 부고 기사들은 뒷장으로 밀려났으며, 그녀는 이 기사들이 앞으로도 영원히 뒷장에 실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늦게나마 눈치챘다.

마플 야은 먼저 1면에 실린 주요 뉴스들을 살펴보았다. 아침에 이미 읽은 것과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이라 꼼꼼히 읽지 않았지만, 《타임스》답게 좀 더 기품 있는 공손한 표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목차를 쭉 훑어보았다. 기사, 논평, 과학, 스포츠, 그러다 평소의 습관대로 신문을 뒤집어 탄생, 결혼, 부고 기사를 빠르게 훑어 내린 다음, 뉴스 면으로 넘겼는데 궁정기사부터 오늘의 경매장 소식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들이 있었다. 가끔은 짧은 과학 기사가 실리기도 했지만 읽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뿐이었다.

 

타임스는 1785년에 창간되었고, 1800년대에 들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자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명성의 토대를 쌓았다고 한다. 독립적이며 정확하고, 혁신적이며 분명했던 신문의 위상은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때 내리막을 걸었다고 한다. 1952년 BBC 사장이 편집주간을 맡으면서 서서히 명성을 회복하였고, 1966년에는 제 1면에 실었던 광고를 다른 면으로 옮기고 뉴스 기사를 실어 오늘날 신문 구성의 틀을 다졌다고 한다. 198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루퍼트 머독이 인수하였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이 소설이 나온 것은 1971년이니 타임스가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을 시기이다.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에서 타임스가 자주 언급되는 반면, 전기 소설에서는 타임스가 아닌 다른 신문이 언급되는 것이 이상했는데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결혼하면서 신문 경조사란으로 발표했다는 기사를 봤는데, 대변인이나 매니지먼트를 통하는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전통적이라는 이유로 화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신문도 타임스였다.

 

분홍색 털실. 잠깐, 뭔가 생각이 나는 듯한데? 그래....... 그래....... 방금 신문에서 본 그 이름. 분홍색 털실, 푸른 바다, 카리브 해, 모래사장, 햇빛. 그녀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그래, 라피엘 씨. 그녀는 카리브 해로 여행을 갔었다. 생 오노레 섬. 조카인 레이먼드의 초대로(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8권『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의 내용-옮긴이), 그리고 레이먼드의 아내인 질부 조앤이 했던 말도 기억이 났다.

"제인 고모님, 더 이상은 살인 사건에 휘말리지 마세요. 고모님에게 좋지 않아요."

 

부고란을 훑어 보던 마플 양은 눈에 익은 이름을 발견한다. 바로 1964년에 나온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사건을 해결했던 갑부 라피엘. 당시에도 몸이 좋지 않았던 그가 사망한 것이다. 강하고 고집이 세지만, 판단력이 뛰어났고 유머 감각도 있던 그는, 푸아로나 미스 마플 등 크리스티 소설 속 탐정을 제외하면, 내 기준으로 크리스티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 책의 마지막은 마플 양과 라피엘 씨가 헤어지면서 끝나는데, 여태까지 내가 본 크리스티 소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끝맺음이었다.

 

크리스티의 소설은 종종 소설끼리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마플 양만 하더라도 14권의 책에 나왔기 때문에 앞서 나온 책의 사건에 대해 뒤에 나온 책이 언급하기도 하고, 마플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소설에 나왔던 푸아로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푸아로와 배틀 총경, 레이스 대령과 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이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책도 있었다.

 

"저는 헤이스팅스 부인 댁에서 채소를 키우고 있어요. 따분하긴 하지만 필요하죠. 자, 저는 이만 가 봐야겠네요."

그녀의 눈길이 기억해 두겠다는 듯 마플 양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으며, 그런 후에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갔다.

헤이스팅스 부인? 마플 양은 헤이스팅스 부인이라는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헤이스팅스 부인은 그녀의 친구이거나 정원일을 함께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 어쩌면 지브롤터 로 끝의 새집에 사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작년에 그곳으로 서너 가족들이 이사를 왔다.

 

헤이스팅스라는 이름만 보면 자연스레 푸아로의 친구인 아서 헤이스팅스가 떠오르게 된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뒤에 가면 이 사칭은 거짓임이 드러나지만, 어차피 어떤 이름을 대도 중요하지 않을 것을 굳이 크리스티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성을 사용하는 것이 좀 이상했다. 아마도 이 의문은 크리스티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풀렸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소설은 크리스티가 생전에 쓴 마플 양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한다. 출판은 1976년의 <잠자는 살인>이 마플 양이 등장하는 마지막 소설이자 크리스티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책이지만, 사실 이 책이 크리스티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이며, 애초에 크리스티는 마플 양 3부작을 기획하고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와 연결하여 <복수의 여신>을 썼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 마플 양의 소설은 크리스티의 머릿속에만 남게 된 것이다. 푸아로에게 멋진 결말을 선사한 <커튼>을 생각해보면, 크리스티가 그린 마플 양의 마지막 모습을 독자로서 읽을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세인트 메리 미드의 제인 마플 양에게

이 편지는 내가 죽은 후 훌륭한 변호사인 제임스 브로드립이 전해 드리게 될 거요. 제임스 브로드립은 내가 사업이 아니라 개인적 문제에 관한 법률 조언을 받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라오. 착실하고 믿을 만한 변호사지.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 또한 호기심이라는 죄악을 저지를 수 있소. 나는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문제는 당신과 나 사이의 일로 남게 될 거요. 친애하는 마플 양, 우리의 암호명의 네메시스요. 당신이 처음으로 내게 그 말을 한 것이 어디에서였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였는지 잊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오. 나는 오랜 세월 사업을 하면서 직원을 뽑는 데에 한 가지 신념을 가지게 되었소.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거요. 그 직원이 할 일에 대한 재능 말이오. 지식도, 경력도 아니라오. 오로지 재능뿐이오. 특정한 일을 수행하는 데 타고난 재능 말이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정의에 관한 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소. 다시 말해 범죄에 대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 특정한 범죄 사건 하나를 조사해 주셨으면 하오. 내가 당신 앞으로 남겨 둔 돈이 있소. 만약 내 요청을 수락하고, 이 범죄 사건을 조사한 결과가 명확히 밝혀진다면 그 돈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이 임무를 위해 당신에게 1년이라는 기한을 드리오. 당신은 젊지는 않지만, 강한 사람이지. 최소한 1년간은 죽음이 당신을 데려가지 않으리라 믿소.

당신이 이 일로 불쾌해하지는 않을 걸 생각하오. 당신은 조사에는 타고난 천재이지. 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언제라도 보내 드릴 거요. 이 일을 수락할 것이냐, 아니면 현재의 삶을 고수할 것이냐는 당신의 선택에 맡겨 두겠소.

당신이 어떤 종류의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든 편안하고 안락하게 받쳐 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오. 당신 나이대의 사람들은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기 마련이지. 무릎이나 등에 류머티즘이 걸렸다면 돌아다니기가 힘들어 주로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겠군. 그날 밤, 분홍색 스카프를 두르고 갑자기 방에 쳐들어 와 내 잠을 깨우던 당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오.

스웨터와 스카프를 그 밖에 이름도 모를 다른 많은 훌륭한 것들을 뜨는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 만약 계속해서 뜨개질을 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소. 만약 당신이 정의를 수호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건에 흥미가 있길 바라오.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

-아모스 서

 

라피엘 씨의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온다. 변호사가 남긴 라피엘 씨의 편지. 그리고 임무 완수 시 받을 수 있는 금액 2만 파운드. 현재 기준으로는 약 3400만원 정도이다. 물론 이 당시에는 그보다 더 큰 가치였겠지. 과연 이 정도면 당시에는 어느 정도 돈이었을까 궁금했다. 19세기, 그러니까 1800년대 파운드는 오늘날 50배 가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2만파운드라면 20억, 물론 이 소설이 나온 시기는 1971년이니까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의 3400만원 보다는 더 많은 가치일 것이다. 2만 파운드는 영국 소설에서 엄청난 금액을 말할 때 종종 등장하는데, 80일간의 세계 1주에서 주인공 포그가 걸었던 돈이 2만 파운드이며, 제인 에어가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았다고 나오는데 그 금액이 2만 파운드였다. 아마도 미국의 백만장자와 비슷한 표현일 것 같다. 죽은 사람이 엄청난 갑부이며, 또 마플 양이 노년기를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배려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3억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대략 20~30년 정도지나면 물가가 2배 정도 오르는데 40년 전의 일이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노후 자금으로는 60세부터 90세까지 총 5억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때의 마플 양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70대는 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등장한 것이 1930년 <목사관의 살인>이었고, 그때도 절대 젊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노부인이라고까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노처녀라는 표현은 있었던 것 같다. 마흔으로 잡아도 일흔은 훌쩍 넘어가는 나이이다. 이런 할머니가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게 지극히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여겨질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이 소설을 쓸 무렵 크리스티의 나이도 여든 즈음이었다.

 

"저 노부인이 섬뜩하게 느껴지는군요."

앤드류 맥닐 경은 마플 양에게 작별인사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말했다.

"너무나도 상냥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냉혹합니다."

국장이 말했다.

완스테드 교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차까지 마플 양을 안내했고, 다시 돌아와 마지막으로 몇 마디를 나누었다.

"마플 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드먼드?"

"내가 만난 여자 중에 가장 무시무시한 여자던군."

내무부 장관이 말했다.

"냉혹하다는 말입니까?" 

완스테드 교수가 물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은 아니네만....... 글쎄, 아주 무서운 여자야."

"네메시스라."

완스테드 교수는 생각에 잠겼다.

교도소장이 끼어들었다.

"마플 양을 보호하던 그 두 여자 사립탐정이 그날 밤 마플 양에 대해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 주었다네. 둘은 그 집에 쉽게 들어가 아래층의 작은 방에 몸을 숨겼다가 모두들 윗층으로 올라간 후에 한 명은 벽장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한 명은 바깥에서 망을 보았다네. 침실 벽장에 숨어 있던 여자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더니 그 노부인이 복슬복슬한 분홍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마치 늙은 여선생처럼 이야기하고 있더라지 뭔가. 경악했다고 하더군."

"복슬복슬한 분홍색 숄이라. 그래, 그래, 기억이 나는군......."

완스테드 교수가 말했다.

"뭐가 기억난다는 건가?"

"라피엘 씨가 한 말. 한번은 내게 마플 양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는 웃음을 터뜨렸지. 평생 단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게 있다고 했어. 서인도 제도에 있을 당시 복슬복슬한 분홍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그의 침실로 쳐들어와 당장 일어나서 살인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정신 나간 할머니라고 햇어. 그리고 그가 '도대체 당신이 뭔데 이러는 거요?'라고 묻자 마플 양은 자기가 네메시스라고 대답했다지. 네메시스라! 그처럼 네메시스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그가 말했다네. 난 복슬복슬 분홍색 스카프의 감촉이 좋아. 아주 좋아하지."

완스테드 교수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네메시스, 복수의 여신은 라피엘 씨와 마플 양 사이의 암호였다. 아마도 이들은 정확히 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강력한 사건을 함께 공유한 두 사람끼리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이니까.

 

"흠, 그리 열정적인 젊은이는 아닌 것 같군요. 마플 양께 좀 더 열렬하게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요."

"오, 괜찮아요. 그 젊은이가 그러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당황해서 쩔쩔매는 게 안쓰러웠는데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새 인생을 살아야 하고, 모든 걸 새로운 각도에서 봐야 할 때는 아주 당황스러운 법이잖아요. 그 젊은이라면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요. 격렬한 증오심에 불타오르지도 않고, 그게 어디에요. 왜 그 아가씨가 그를 사랑했는지 잘 알 것 같네요......."

"뭐, 어쩌면 이번에는 그 청년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그 젊은이가 혼자서 제대로 해 나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참한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면 몰라도 말이에요."

"제가 마플 양을 좋아하는 건, 마플 양의 유쾌할 정도로 실용적인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역시 우리의 마플 양은 사건을 해결한다. 개인적으로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속 라피엘의 캐릭터도 좋았고, 마플 양도 좋아하는 탐정이기 때문에 구성은 반가웠지만, 긴장도는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갑부인 라피엘 씨가 이런 식으로 마플 양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이면, 사건은 분명히 직계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며, 꼼짝달싹 못하는 함정에 빠진 젊은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썼으며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과정으로 흘러가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더구나 누가 범인일지도 생각보다 빨리 노출되기도 했다. 아마 이 다음 소설은 라피엘 씨의 아들이나, 이 책에서 언급만 되고 지나간 딸의 자손, 혹은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에서 인연을 맺었지만 여기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잭슨이나 재혼해서 앤더슨 부인이 된 에스더 월터스 등의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물론 책으로 나왔다면 말이다. 처음부터 3부작을 기획했다면, 방점은 마지막 책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책은 첫번째 책과 마지막 책의 연결고리였을지도 모르고. 여러 모로 아쉬웠다.

 

"이제 저희가 보관하고 있는 그 돈은 마플 양이 원하시는 대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마플 양의 계좌로 넣어 드릴까요, 아니면 투자 문제와 관련해 저희와 의논을 해 보고 싶으신가요? 꽤 많은 액수입니다."

"2만 파운드라. 예, 내가 보기에는 아주 큰 액수예요. 청말 엄청난 액수예요."

"원하신다면 저희 주식 중개인을 한 명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투자에 관련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 드릴 겁니다."

"오, 난 그 돈을 투자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그러는 편이......."

"내 나이에 돈을 아낄 이유가 없죠. 더구나 이 돈을요....... 라피엘 씨께서 그런 의미로 이 돈을 나에게 주었다고 생각해요....... 한 번도 맘껏 즐길 만한 돈이 없었던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말이에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은행으로 보내 달라는 말씀이시죠?"

브로드립 씨가 말했다.

"세인트 메리 미드, 하이 가 132번지, 미들턴 은행이에요."

"저축예금 계좌가 있으시겠죠? 저축예근 계좌로 보내 드리면 될까요?"

"물론 아니에요. 당좌 예금 계좌로 넣어 주세요."

"설마......."

"정말이에요. 당좌 예금 계좌로 넣어 주셨으면 해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신사와 악수를 나눴다.

"은행 지점장과 상담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플 양, 궂은 날에 대비해 여윳돈이 필요할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궂은 날에 대비해 필요한 건 딱 하나, 우산뿐이에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두 신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정말 고마워요, 브로드립 씨. 그리고 슈스터 씨 당신도요. 두 분 다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내게 필요한 정보도 모두 주셨죠."

"정말로 그 돈을 당좌 예금 계좌로 넣어 드리길 원하십니까?"

"예, 난 그 돈을 다 써 버릴 거예요. 신나게 살아 볼 작정이에요."

그녀는 문을 나서다 뒤돌아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브로드립씨보다 상상력이 좀 더 풍부한 슈스터 씨는 시골의 가든 파티에서 목사와 악수를 나누는 젊고 예쁜 아가씨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일순간 마플 양이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한 아가끼, 젊고 행복하며 인생을 즐기던 한 아가씨의 모습과 겹쳐졌다.

"라피엘 씨는 제가 즐겁게 살길 바라셨을 거예요."

마플 양이 이렇게 말하고는 문을 나섰다.

"네메시스. 라피엘 씨가 마플 양을 그렇게 불렀었다네. 네메시스. 마플 양만큼 네메시스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브로드립 씨의 말에 슈스터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엘 씨가 농담한 게 분명해."

브로드립 씨가 덧붙였다.

 

아마도 이 책의 마지막에서 라피엘 씨의 유산을 받은 마플 양은 또 한 번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까?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는 서인도 제도, <복수의 여신>은 런던 정원 여행, 아마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미지의 소설에서는 그 유산을 가지고 망중한을 즐기던 마플 양에게 생긴 마지막 사건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어쩌면 푸아로의 마지막을 다룬 <커튼>이, 첫 소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의 바로 그 장소에서 막을 내린 것처럼, <목사관의 살인>의 바로 그 장소,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벌어졌을 수도 있고. 자꾸 미지의 소설에 대해 안타까웠지만, 이 소설의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라피엘 씨의 유산으로 마플 양은 말년을 평화롭게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되니까. 의도된 죽음이라고 해도 <커튼>에서 푸아로의 마지막을 독자로서 보게 되는 것은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 인물에 대한 어떠한 열린 결말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왠지 모르게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우리의 마플 양에게 가장 어울리는 결말이자, 독자가 보고 싶은 끝맺음이자 작가가 선물하고 싶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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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 파티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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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살인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어요."

조이스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해, 조이스."

교사인 휘태커 양이 말했다.

"정말 봤어요."

조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정말 봤다고? 누군가 살인하는 광경을 진짜 봤단 말이야?"

캐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조이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조이스."

드레이크 부인이 말했다.

사다리 위에 서 있던 열일곱 살 소년이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떤 살인이었는데?"

"난 못 믿겠어."

비어트리스가 말했다.

"물론이지. 저 애는 이야기를 꾸며 내고 있어."

캐시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에요. 전 분명히 봤어요."

"그럼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니?"

캐시가 물었다.

"그때는 그게 살인인 줄 몰랐으니까. 나중에야 그게 살인이었다는 걸 알았어. 한두 달 전에 누가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났거든. 내가 본 건 살인이 분명해."

"이봐, 다 지어낸 이야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앤이 말했다.

"언제 있었던 일인데?"

비어트리스가 물었다.

"몇 년 전에요. 그때 난 정말 어린아이였어요."

조이스가 대답했다.

"누가 누굴 죽였는데?"

비어트리스가 물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예요. 모두 너무해요."

조이스가 말했다.

 

이 대화 이후 정말 조이스는 아무한테도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살해당했으니까. 당시 핼러윈 파티에 참석했던 아리아드네 올리버는 푸아로를 찾아와 이 사건에 대해 의논하고, 푸아로는 <맥긴티 부인의 죽음>에서 만났던 스펜스 총경이 퇴직 후 이 아이가 살았던 지역에서 현재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도움을 청한다.

 

"우들레이 커먼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나요?"

"제 기억으로는 없어요."

드레이크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범죄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정말 희한한 일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푸아로가 말했다.

"음, 화물차 운전사가 친구를 죽인 사건이 있었고, 여기서 24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자갈 채취장에서 작은 여자 아이의 시체가 매장된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지만 오래전 일이에요. 둘 다 야비하지만 시시한 범죄였죠. 아마 술김에 저지른 사고였을 거예요."

"열두세 살짜리 여자 아이가 목격할 만한 건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그리고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푸아로 씨, 조이스는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유명 작가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거리는 거예요."

드레이크 부인은 조금 차가운 눈길로 올리버 부인을 쳐다보았다.

"사실 제가 그 파티에 간 게 잘못이었죠."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아니, 무슨 말씀을, 부인.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올리버 부인과 함께 그 집을 나오면서 푸아로는 한숨을 쉬었다.

"살인 사건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집이군요. 아무런 정황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낌새도, 살인자로 의심할 만한 인물도 없어요. 그냥 어쩌다 드레이크 부인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있을 것 같지만."

 

언뜻 보기에 살인 사건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지역. 대체 이 아이는 무엇을 본 것일까? 단서가 너무 없다. 더 이상한 것은, 죽은 아이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도, 심지어 죽은 아이의 언니나 남동생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아이는 거짓말쟁이였어요."

매케이 부인이 말했다.

"그 아이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뜻입니까?"

엘스페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믿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잘도 꾸며 냈죠. 저는 그 아이 말을 믿은 적이 없어요."

(중략)

"그렇다면 부인은 조이스 레이놀즈가 살인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믿지 않을 거라는 거죠?"

"그럴 거예요."

매케이 부인이 대답했다.

"네 생각이 틀린 걸지도 몰라."

스펜스가 말했다.

"그래요. 누구든 틀릴 수 있어요. 그건 마치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과 비슷해요. 그 말을 너무 자주 써먹으면 정말 늑대가 나타나도 아무도 소년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결국 늑대가 소년을 잡아먹어 버리죠."

(중략)

"그 애 말대로 누군가 살해되는 광경을 본 걸까요?"

푸아로는 오빠에게서 여동생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매케이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려면 지난 3년 동안 이 마을에서 누군가 죽었어야 해요."

(중략)

"희생자 명단인가요?"

"그것만큼 힘들었습니다.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두죠."

푸아로가 소리 내어 읽었다.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 샬럿 벤필드, 재닛 화이트, 레슬리 페리어."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이 죽고 나서 모든 재산이 오페어 걸에게 넘어갔다. 열여섯 살 샬럿 벤필드의 경우 두 명의 남자 친구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레슬리 페리어는 등을 찔려 죽었는데, 집주인 해리 그리핀의 아내와 불륜 관계였다고 했다. 그가 근무하던 법률 사무소는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을 담당했다. 목이 졸려 죽은 재닛 화이트는 1년 전 헤어진 남자가 가끔 협박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룸메이트 교사에게 한 적이 있으나, 그 남자의 이름이나 사는 곳은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드레이크 부인으로, 바로 그녀의 집에서 열린 핼러윈 파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살인자는 우선 그곳에 있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소? 그허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 수가 없으니까. 그렇죠? 범인은 손님이나 도와주는 사람들 중 한 명이거나 아니면 악의를 품고 계획적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이 분명하오. 그 집 잠금잠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겠지. 그곳에 미리 와서 둘러봤을 수도 있소. 아는 사람이나 내 아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합시다. 드문 일은 아니지요. 메드체스터에서 그런 일이 있었소. 6년이나 7년쯤 지나서야 밝혀졌는데, 범인은 열세 살짜리 소년이었소.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그 소년은 아홉 살짜리 아이를 죽인 뒤 훔친 차를 몰고 12킬로미터쯤 떨어진 관목 숲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시체를 태우고 달아났소. 그러고는 스물 한두 살이 될 때까지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았다고 하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오. 그건 그 사람 말이고 계속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아마 그랬을 거요. 그는 살인을 즐겼으니 말이오. 그렇다고 그가 사람을 여럿 죽였거나 전에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다만 때때로 그런 충동을 느꼈다는 거지. 정신이 이상해졌을 때 살인을 저질렀을 거요. 나는 지금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하려는 거요. 어쨌든 그런 유의 사건이니까. 다행히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오. 친구 중에 정신과 의사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오.그중에는 지각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되레 정신감정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소. 조이스를 죽인 범인은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랐고 품행이 정상적이며 외모도 멀쩡한 사람일 거요. 어느 누구도 그가 문제 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거요. 붉고 탐스러운 사과를 한입 베어 먹었는데 사과 속 바로 옆에서 보기에도 역겨운 벌레가 튀어나와 눈앞에서 머리를 흔들어 댄 경험이 있소? 많은 인간들이 그와 비슷하오. 예전보다 지금 더 많아졌지요."

 

죽은 아이를 담당했던 의사의 말이다. 미치광이에 의한 살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 반응이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것 같기도 하다.

 

"만나서 반가워요, 푸아로 씨. 푸아로 씨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매우 친절하시군요."

푸아로가 말했다.

"제 죽마고우이자 메도우뱅크의 교장인 불스트로드 선생(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8권, 『비둘기 속의 고양이』에 등장-옮긴이)에게 들었습니다. 불스트로드 양을 기억하시겠죠?"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분이시죠."

"맞아요. 지금의 메도우뱅크를 만든 사람이지요."

에믈린 양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 소설은 1969년에 나온 소설이다.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앞서 나왔던 크리스티의 소설들과 계속해서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비둘기 속의 고양이>는 1959년에 나온 작품으로, 정확히 이 책보다 10년 전의 일이다.

 

그제서야 푸아로는 비탈 너머에서 황금빛 도는 붉은 잎에 둘러싸여 있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요즘은 젊은 남자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통 젊은 남자에 대해서는 성적 매력이나 열정적인 매력을 말하게 되고, 그렇게 칭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 윤기 흐르는 헝클어진 머리칼, 평범한 외모와는 거리가 먼 그런 남자 말이다. 젊은 남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말을 하면 마치 오래전에 사라진 어떤 특징을 칭찬하는 것처럼 미안해하는 투로 말해야 한다. 매력적인 아가씨들은 류트를 뜯는 오르페우스가 아니라, 쉰 목소리에 강렬한 눈빛, 파격적인 머리 모양을 연출한 대중가수를 원한다.

 

이 시기에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보면, 젊은이들의 패션에 대해 지적하는 부분이 많다. 푸아로나 마플 양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데, 아마도 이미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 당시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한 생각이겠지.

 

"당신은 이곳을 정말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소. 아름다움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산업에만 쫓겨 파헤쳐진 돌이라는 거친 재료에 미래의 전망과 계획을 덧입혔소. 마음의 눈으로 그려 본 것을 덧입혔고 그것을 실현할 돈도 마련했소. 축하할 일이오. 경의를 표하는 바요. 자신이 하던 일을 접을 때가 가까워 온 한 노인이 보내는 찬사이자 경의를 표하는 거요."

 

푸아로는 이 청년이 외모 뿐 아니라 열정도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찬사를 보내는 경우는, 그것도 상대가 남자일 경우는, 이 소설에서 처음 본 것 같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뭐든 잘 봅니다. 언제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게 아이들이죠."

푸아로가 말했다.

"하지만 집에 가서 자기가 본 걸 말하겠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본 게 어떤 건지 확실하게 모를 때가 있거든요. 특히 어떤 일을 보고 어렴풋하게나마 무섭게 느껴졌을 때 더욱 그렇죠.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사고나 예기치 않은 폭력 사건을 보고 집에 가서 그것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비밀을 정말 잘 지키거든요. 비밀로 해두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겁니다. 때로는 혼자만의 비밀로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을 좋아하죠."

"그래도 엄마한테는 말하겠지요."

풀러턴이 말했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아이들이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 일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한 때 아이었던 우리들도 어린 시절, 가장 가까운 어른이었던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간직했던 기억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뚜렷이 모르면서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보면 아이들이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 자기도 모르는 채 위험해질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새 위협적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다 겪은 일이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잊어버린 일들. 작가들은 예외없이 이런 부분에 대해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다.

 

이 소설 속 사건 또한 바로 그러한 아이의 특성 때문에 비롯된 사건이다. 만약, 주인공이 어른이었다면 바로 경찰에 알렸거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이 본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였기에 안타까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희생자는 한 명 더 생겼다.

 

"네. 누가 전화로 알려 줬어요. 조이스의 동생이라고요. 그 애는 어떻게 하다가 이 이에 연루된 거죠?"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얻어 냈죠. 그러다 적당한 때에 냇가에서 죽임을 당했고요."

푸아로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굳이 변한 게 있다면 어조가 더욱 강경해졌다는 것이었다.

"동정심으로 가득 찬 어떤 사람이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였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까지 동정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죽은그 아이는 어리기는 했지만 우연한 사고로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그의 행동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 아이는 돈을 원했고 모험을 감수했습니다. 자신이 모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만큼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였지만 돈을 원했습니다. 그 아이는 열 살밖에 안 되었지만 삼십대나 오십대, 혹은 구십대라고 해도 원인과 결과는 같습니다. 그런 경우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아마 동정심보다는 정의가 중요하다는 거겠죠."

에믈린 양이 말했다.

"제가 볼 때 동정심은 리어폴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아이는 도와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는 에믈린 양도 저와 같은 생각인 듯하니 우리가 정의를 실현한다 해도 그 정의 역시 리어폴드를 구제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리어폴드를 구할 수는 있을 겁니다. 곧바로 정의를 실현한다면 다른 아이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살인을 한 번 이상 저지른 범인, 살인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 버린 사람은 결코 안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저는 런던으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논의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 사건만큼은 그들이 저의 확신을 따라야 하니 말입니다."

 

첫번째 살인과 두번째 살인. 둘 다 아이가 죽었지만 푸아로는 사건의 성격을 다르게 본다. 결국 희생자가 될 뻔한 아이를 구하고 나서, 밝혀진 사건의 전말을 놀랍다. 보통 희생자의 성격을 묘사하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뒤에 가서 어떤 이유로든 뒤집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결국 주변인들이 본 게 사실이었다. 크리스티의 상당수의 소설에서, 범인이 아니라 '희생자의 심리'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이야말로 정확히 피해자의 심리가 사건의 전말과 딱 맞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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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8 (완전판) - 버트럼 호텔에서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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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해 주십시오, 험프리스 씨, 이 할머니들이 어떻게 이곳에 머물 수 있는 겁니까?"

"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험프리스는 자못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뭐,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지요. 하지만......."

험프리스가 말을 멈췄다.

"하지만 당신이 특별한 가격으로 묵게 해준다, 그겁니까?"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특별한 가격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알게 된다 하더라도 오랜 단골이라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단골이라서 할인해 준 것만은 아니란 건가요?"

"러스컴 대령님, 저는 호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돈을 벌어야겠지요."

"하지만 그런 게 무슨 돈이 되겠습니까?"

"분위기 때문이지요....... 이 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특히 미국인들 말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영구겡 대해 묘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수시로 대서양을 넘나드는 비즈니스계의 부유한 거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보통 사보이나 도체스터에 머물죠. 현대적인 인테리어와 미국식 식사, 집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원하니까요. 하지만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나온 분들, 이 나라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뭐 디킨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겠지만 크랜퍼드와 헨리 제임스를 읽은 분들은 이 나라가 고국과 뭔가 다르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이렇게 말하겠죠. '런던에 아주 근사한 곳이 있어. 버트럼 호텔이라고. 마치 10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니까. 정말 옛날 영국 모습 그대로야! 그리고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하며! 다른 곳에서는 절대 마주칠 수 없는 사람들이야. 나이 많은 공작 부인은 얼마나 멋진지 몰라. 영국의 전통 음식에 아주 근사한 옛날식 비프스테이크 푸딩까지! 다른 데서는 절대 맛볼 수 없을 거야. 맛있는 소 등심이며 양고기 등살, 영국 전통 차에 환상적인 영국식 아침 식사 등이 모두 가능하다고. 그리고 물론 다른 것들도 다 근사하지. 게다가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한지. 장작을 쓰는 벽난로도 있어.'"

험프리스는 흉내 내기를 멈추고 씩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러스컴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이 사람들, 그러니까 쇠락한 귀족이자 스러진 옛 지방 명문가 사람들이 전부 무대장치였군요?"

 

버트럼 호텔은 에드워드 왕조 시대의 건축물과 같이 오래된 느낌이 나면서 동시에 현대적이고 쾌적한 설비를 갖춘 장소이다. 타깃은 고풍스러운 광경을 느끼고 싶은 외국인이나, 20세기 초의 분위기를 추억할 수 있는 노부인이다. 그렇다면... 역시 그렇다! 마플 양이다. 잘나가는 소설가인 조카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가 보내 준 곳이다. 20세기 초가 추억의 시대가 되는, 이 소설의 시대는 1965년이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 레이먼드와 연인 사이였던 젊은 화가 조앤은 이제 쉰이 다 되었다. 1928년에 연재가 시작되어 1932년에 출판되었던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 조앤의 작품은 마플 양의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현대적이었지만, 이 소설에서는 젊고 야심 찬 예술가들로부터 완전히 구세대 취급을 받고 있다. 늘 제인 마플을 좋아했던 이 부부는 이 책의 바로 전해인 1964년에 나온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에서도 기꺼이 그들의 고모를 위해 여행비를 대 준다.

 

이 호텔은 열네 살 때 마플 양이 묵었던 적이 있는 곳이다. 호텔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이 떠올랐다. 물론 둘 사이에는 전혀 상관이 없고, 어떤 유사성도 없다. 다만, 유서 깊은 신비스러운 호텔에 대한 이미지가 이미 영화를 통해 구축된 덕분에 소설에 몰입하기가 한결 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엄청난 사건이 펼쳐진다. 전쟁에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며 직접 독일인을 사살하고 여러 번의 결혼을 한 여성, 21살이 되면 엄청난 유산을 받을 수 있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상속녀, 갑자기 사라진 성직자, 전직 배우인 지배인... 이 버트럼 호텔을 지난 몇 년 간 악명을 떨친 최고이자 최대 범죄 조직의 본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큰 반전은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나타난다.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국제적인 범죄, 첩보물 등이 또 나오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은 맥거핀에 불과했고, 더 놀라운 사실이 뒤에 있었다. 이 소설에서만큼은 마플 양은 방관자적인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전과는 달리 먼저 경찰을 찾아가는 적극성을 보이거나, 범죄자를 잡기 위한 연극을 하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묻기 전에는 대답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에서도 그저 사건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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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7 (완전판) - 세 번째 여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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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오늘 아침 어떤 아가씨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약속을 잡고 오라고 했죠. 누구나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며 당장 나를 만나고 싶다지 뭡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 다 있네요.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모른다니 말이에요."

"내 말이 그겁니다. 세 이누이(정말 이상한 일이었어요)! 너무 이상해서 조지에게 그 여자를 들여보내라고 했죠! 잠시 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앉지도 않고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서 있더군요. 정신이 나간 것 같았어요. 나름대로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몇 마디 건넸는데, 갑자기 그녀가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다음에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글쎄 내가 너무 늙었다는 겁니다......."

 

이 책은 1966년에 나온 소설로, 푸아로와 올리버 부인이 등장한다. 이상하게 올리버 부인이 등장하면 소설의 톤이 확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창백한 말>을 제외하면 늘 올리버 부인은 푸아로와 등장하는데, 1936년에 나온 <테이블 위의 카드>를 제외하면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에 등장한다. 처음에 등장한 것은 크리스티가 자신의 분신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였던 것 같고, 계속해서 등장한 것은 변화한 시대상에 맞추어 기존의 탐정이 아니라 새로운 해결사를 등장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푸아로나 마플 양, 배틀 총경과 레이스 대령 같은, 초기부터 등장했던 크리스티의 다른 주인공들과 올리버 부인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그것은, 올리버 부인이 경찰이나 탐정처럼 사건을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세계를 다루는 소설가라는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세 번째 여자예요."

"외동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적어도 내 생각에는요."

"그럼 세 번째 여자란 말은 무슨 뜻이지요?"

"세상에! 세 번째 여자란 말도 몰라요? 《타임스》도 안 읽나보군요."

"출생, 사망, 결혼 기사는 나도 읽어요. 그 밖의 관심 있는 기사 몇 개하고요."

"그게 아니라 제1면 광고 페이지 말이에요. 요즘은 제1면에 실리지 않지만. 그래서 다른 신문을 볼까 생각 중이에요. 어쨌든 당신에게 보여 줄게요."

그녀는 사이드테이블에 가서《타임스》를 집어 들어 몇 장을 넘기더니 푸아로 앞에 내밀었다.

"자, 여기 봐요. '안락한 아파트 2층을 함께 쓸 세 번째 여성분 구함. 독방. 중앙난방. 얼스 코트.''아파트를 함께 쓸 세 번째 여성 분 구함. 주당 5기니. 독방을 쓸 수 있음.''네 번째 여성 분 구함. 리젠트 파크. 독방.' 이게 요즘 여자 애들의 생활 방식이에요. 하숙이나 호스텔보다 나으니까요. 첫 번째 여자가 가구가 딸린 아파트를 얻은 다음 세를 내는 거예요. 두 번째 여자는 보통 친구인 경우가 많아요. 그다음에 다른 친구가 없으면 광고를 내서 세 번째 여자를 찾아요. 그리고 아까 봣던 것처럼 네 번째 여자를 억지로 끼워 넣기도 하죠. 첫 번째 여자가 가장 좋은 방을 쓰고, 두 번째 여자가 세를 좀 덜 내고 그다음 방을, 세 번째 여자는 세를 그보다 조금 더 덜 내는 대신 손바닥만한 방을 써요. 주중 하루 누가 아파트를 독차지할 건지 날을 정하기도 한대요. 꽤 잘 돌아가고 있지요."

 

<세번째 여자>. 이 책 제목의 의미가 나오는 부분이다. 당연히 제목만 보고는 치정 사건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의미가 있었다니. 전쟁 이후 여권은 급속도로 신장하였고, 예전과는 달리 젊은 여자들이 직장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직장 근처에 집을 얻고, 다른 룸메이트를 구하여 사는, 요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종종 보여지는 그런 삶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나보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쉽게 몰입이 되었던 이유는, 소설의 구성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이면 당연히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마치 몇 년 전 한참 유행했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칙 릿' 소설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이 시대에 일흔이 넘었던 크리스티에게 20대 젊은이들의 삶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소함 그 자체였을 것이기 때문에, 소설 전체에서 이 당시 젊은이들이 이전 시대와 얼마나 달랐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젊은이들의 부모 세대가 얼마나 당혹스러워하는지에 대해 내내 나오기 때문에, 마치 내가 유행의 최첨단의 젊은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크리스티의 눈높이에서 당시의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 노마의 두 남자도, 크리스티의 이전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과는 사뭇 다르다. 생김새도 태도도,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만약 지금과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푸아로에게 그다지 낯선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런던 거리나 파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는 검정 코트에 정교한 벨벳 조끼,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풍성한 밤색 고수머리를 어깨 위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국적이면서도 약간은 아름다운 외모였는데, 성별을 확실히 구분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노마의 남자친구인 데이비드는 비트족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비트족은 1950년대 전후 미국의 풍요로운 물질 환경 속에서 보수화된 기성 질서에 반발해 저항적인 문화와 기행을 추구했던 일단의 젊은 세대이다. 즉,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지만 노마의 집안 어른들은 좋아할 수 없는, 그런 청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영화 <위아영>의 아담 드라이버가 떠올랐다. 옷차림이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보는 이에게 하여금 경계심이 들게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끌리게 되는, 불안불안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올렸다.

 

붉은 머리에 잘생기진 않았지만 은근한 매력이 있는, 우락부락하면서도 재미있는 인상을 가진 서른 살 정도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안심시키려는 듯한 태도로 노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략)

"그러니까 당신은 자살하려고 했군요, 맞죠? 뭐가 문제입니까? 나한테 말해 보세요. 남자 친구? 그것도 사람 기분 엉망으로 만들 순 있겠죠. 자살하면 남자 친구가 미안해할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만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해요.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한 일을 미안해하지도 않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까요. 남자 친구들은 다들 이렇게 말할걸요. '항상 그녀의 정신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해 왔어. 결국 잘된 일이야.' 다음번에 또 재규어에 돌진하고 싶을 때는 이것만 기억해요. 재규어도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요. 그나저나 정말 이유가 그거였어요? 남자 친구한테 버림받아서?"

(중략)

"네. 여기는 진찰실이 맞고 나는 의사입니다. 내 이름은 스틸링플릿이에요."

"오, 의사는 싫어요! 의사하고는 얘기도 하고 싶지 않고요! 나는 정말......."

"진정해요, 진정해. 당신은 이미 10분간 의사와 얘기했습니다. 그나저나 의사가 뭐가 어떻다는 거죠?"

(중략)

"이런, 이런! 당신은 의사들에 대해서 아주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군요.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가두겠습니까? 차 한 잔 하겠어요?"

그는 곧바로 덧붙여 물었다.

"아니면 환각제나 진정제가 필요한가요? 당신 또래 젊은이들은 그런 걸 좋아하잖아요. 당신도 먹어 봤겠죠, 그렇죠?"

노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어요."

"못 믿겠는데요. 어쨌든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의기소침해하는 거죠? 정신병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 이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네요. 의사들은 사람 가두는 취미 같은 건 없답니다. 정신병원도 이미 환자들로 넘쳐 나고 있어서 더는 입원시킬 수도 없어요. 사실 요즘에는 꽤 많은 사람을 내보내고 있지요. 그것도 필사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까지 말이에요. 요즘 이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도 사람들로 넘쳐 나지요."

잠시 후 그가 다시 물었다.

"음, 뭐로 하겠어요? 약장에 있는 걸로? 아니면 구닥다리 영국식 차?"

"음...... 차가 좋겠네요."

노마가 대답했다.

"인도산? 아니면 중국산? 이렇게 물어봐야 되는 거죠, 맞죠? 미안하지만 중국산은 없을지도 몰라요."

"인도산이 좋겠네요."

"잘됐네요."

(중략)

"주소는 없어요. 집이 없거든요."

"그거 재미있군요."

스틸링플릿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찰들이 말하는 '주거 부정'이로군요. 그럼 매일 엠뱅크먼트에 앉아서 밤을 지새우나요?"

노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고를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지만 내게 꼭 그래야 하는 의무는 없지요. 그보다 딴 생각에 빠져 왼쪽을 살피지 못하고 길을 건너려고 했다는 쪽을 택하겠어요."

"내가 생각했던 의사랑은 전혀 다르시네요."

노마가 말했다.

"그래요? 나는 이 나라에서 의사 노릇을 하는 데 점점 환멸을 느끼고 있어요. 사실 이곳 병원을 접고 2주 뒤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려고 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뭐든 말해도 돼요. 벽에서 분홍색 코끼리가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거나,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 나와서 당신 목을 조르는 것 같다거나, 사람들 눈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는 게 보인다거나, 그 밖의 기분 좋은 환상 같은 게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봐요. 무슨 얘기를 해도 가만 있을 테니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제정신으로 보이거든요."

 

또 다른 젊은이는 스틸링플릿이라는 의사다. 크리스티의 소설에는 대부분 의사가 등장하는데, 보통 평생 한 지역을 떠난 적 없는, 지긋한 나이에 이른 노인이거나, 돈이나 학문적 성취와 같은 야망에 물타는 젊은이인 경우가 많다.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대체로 강한 인상이 없이 흘러가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 스틸링플릿이라는 의사는 데이비드와는 전혀 비슷한 부류가 아니지만, 이전 세대의 의사들과도 또 다른 모습이다. 이 당시 젊은이들이 이전 세대와는 매우 다르며, 또 그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사는 형태가 천차만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크리스티의 초기 소설에서 인물을 묘사할 때 개인의 특성보다는 그가 소속된 곳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좀 심하게 말하면 이름만 바꿔 달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전형성이 많이 깨진 느낌이었다.

 

다만 이런 흥미있는 부분들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해서 아쉬웠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에 대한 마음이 굳건했던 아가씨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그것도 한 장 정도 되는 분량에서 급속도로 마음의 변화를 겪는 부분도 그렇지만, 마치 복잡한 심리극인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대담한 사기꾼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던 사건의 전모도 다소 실망스럽다. 그리고 의문의 오 페어 걸 소냐의 결말도.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저 명석한 여성이었다는 설정은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종종 나오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 앞에서 깔아놓은 이야기에 대한 해명은 늘 있어왔는데 여기서는 그 부분이 빠져 있다. 식물원, 그리고 책으로 연결된 한 남자, 그 남자는 소설 밖 사건으로 인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노출했으면, 최소한 거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지. 용두사미 같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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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6 (완전판) -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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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작가는 아이디어와 등장인물을 생산해 냈다. 이제 세 번째 필수 요소가 있어야 한다. 바로, 배경이다. 앞서 두 가지 요소는 작가의 머리에서 나오지만, 세 번째 요소는 외부에서 도출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가 창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 실재하는 것이다.

작가가 나일 강 유람 여행을 해 보았고 그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치자. 작가가 지금 쓰고자 하는 이야기에 딱 맞는 설정이다. 첼시 카페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옆에서 마침 여자 둘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움을 하고 있다. 다음 책의 도입부로 써먹기에 딱 좋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 지금 구상 중인 책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넣으면 얼마나 흥미롭겠는가. 친구를 만나러 찻집에 나갔는데, 도착하는 순간 친구의 오빠가 읽고 있던 책을 탁 덮고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쁘진 않은데. 근데 도대체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은 걸까?"

그럼 곧 작업에 들어갈 책의 제목은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2권-옮긴이)'로 즉석에서 정해진다.

에번스가 누군지는 작가도 아직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때가 되면 떠오를 테니까. 중요한 건 제목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작가 서문의 일부이다. 크리스티는 서문을 잘 쓰지 않는다. 굳이 그녀가 서문을 썼다는 것은, 단단히 마음 먹고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작품에 대한 부연 설명이나 안내일 때가 많은데, 그 경우에도 길이는 길지 않다. 이 책의 서문은 6쪽이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작가가 아닌데, 의외다. 더구나 자신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고, 등장인물을 생산해 내며, 배경을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즉, 일종의 '영업 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왜일까? 서문은 계속 이어진다.

 

조간신문 1면에서 정보를 수집하라.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요즘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할까? 신문 한 부가 1970년 영국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신문 1면을 훑고, 메모를 하고, 그것을 깊이 곱씹고 분류하라.

매일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여자 아이가 교살당한다.

힘없는 할머니가 강도를 당해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뺴앗긴다.

젊은 청년과 어린 소년들이 폭행을 하거나 폭행을 당한다.

건물과 공중전화 부스는 허구한 날 부서지고 유리창이 박살난다.

마약 밀수.

약탈과 폭행.

실종되는 아이들, 그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시체.

이것이 영국의 실상인가? 이것이 진정 영국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것은 마치 세상이....... 아니,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두려움이 인다.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벌어지게 하는 원인을 떠올렸을 때 드는 두려움이다. 그 원인은, 명확히 드러난 것들도 있지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다. 게다가 영국에서만 이런 혀상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문의 다른 면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들을 샅샅이 훓어보라. 유럽 소식도 있고 아시아 소식, 아메리카 대륙 소식도 있다. 전 세계 뉴스가 신문 한 부에 다 실려 있다.

비행기 공중 납치.

유괴.

폭력.

폭동.

증오.

무정부주의.

모든 것이 점점 강도를 더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파괴에 대한 찬양, 잔악함이 주는 쾌락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게 다 무엇을 의미할까?

 

이 소설은 1970년에 쓰여졌다. 출판사 측의 설명에 따르면, 크리스티의 마지막 스파이 소설이며, 80회 생일을 기념하며 출판되었다고 한다. 1890년에 태어났으니, 이 소설 출판 당시 80세가 맞다. 80세 노인의 눈으로 바라본 당시 영국은, 세계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선함이 존재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친절과 정을 베풀고, 동정심을 보이고, 이웃을 돕고, 소년 소녀들은 노인을 부축해 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느낌을 주는 사건들이 매일 신문을 장식하는 걸까?

서기 1970년인 현재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현재의 배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배경이 아무리 터무니없다 해도 이야기는 그 배경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공상 문학,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배경 설정이 일상의 공상적 사실을 그대로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과연 그럴듯한 공상적 대의를 구상해 낼 수 있을까?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비밀 조직 운동은 어떨까? 한 사람의 광적인 파괴 욕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설정은 가능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너무나 공상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방법으로 그 세상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어떨까?

불가능이란 없다고, 이미 과학이 여러 차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 있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공상에 불과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났거나 혹은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사건들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공상적 성격을 띠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단위 시간 당 가장 변화가 컸던 떄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성인이 되어 두 번의 2차 대전을 겪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인 1837년부터 1901년까지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로 '빅토리아 시대'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고 있다. 이 책은 물론이고, 크리스티의 다른 책에서도 종종 '빅토리아 시대'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크리스티야 말로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즉, 대영 제국의 전성기와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종전 후 영국의 상황까지를 전생애에 걸쳐 경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변화는 그녀가 평생 썼던 80여편의 소설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영원할 것 같던 평화가 산산조각이 나고, 노년까지 혼란한 사회 속에서 살았던 그녀가 말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는 아주 조금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 박완서 작가도, 생전에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꼴 충분히 보았고, 한 번 본 것 두 번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갑자기 생각난 일화다.

 

"학생 운동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근데 사실 걱정해야 할 건 학생 운동이 아니야. 그들은,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청년들부터 건드리거든. 모든 국가의 청년층부터 건드리는 거야. 살살 구슬리기. 일단 구호부터 외치게 하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구호들. 정작 외치는 젊은이들은 그 구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텐데. 혁명을 일으키는 게 그렇게 쉽단다. 젊은이들의 본성이거든. 옛날 옛적부터 젊은이들은 항상 반항을 해 왔어. 반역을 일으키고, 뒤집어엎고, 세상을 바꾸려고 들지. 하지만 젊은이들은 눈이 멀었어. 눈을 가리고 현실을 어떻게 보겠다는 건지. 자기들이 어디로 휩쓸려 가고 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눈앞의 현실이 어떤지, 자기들을 부추기는 배후의 세력이 무엇인지. 무서운 게 바로 그거야. 앞에서 한 사람이 당근으로 유혹하고 뒤에서 다른 사람이 채찍질로 재촉하면 당나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끌려 간단다.(중략) 히틀러와 히틀러 소년단. 그런데 그 경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신중하게 준비된 것이었지. 2차 대전은 아주 치밀하게 준비된 전쟁이었어. 히틀러 소년단은 유전적으로 우월한 초인 집단이 정권을 장악하도록 돕기 위해 각국에 심은, 일종의 제 5열(전시에 후방 교란이나 간첩 행위 등으로 적국의 진격을 돕는 집단-옮긴이)이었어. 그렇게 해서 세워진 초인 집단은 독일의 꽃과도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나치스는 굳게 믿었어. 지금도 누군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족속들이 넙죽 받아먹을 만한 사상이니까. 잘만 포장해서 내놓는다면 말이야."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중국인이나 러시아 인들을 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얘기에요?"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해. 게다가 과거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어. 아까 말한 패턴 말이야. 패턴! 러시아? 공산주의의 수렁에 빠져서, 이제는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고 있지. 중국? 중국은 완전히 갈팡질팡 헤매고 있더구나. 너도나도 자기가 마오쩌둥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서 그런지도 모르지. 아무튼 계획을 세우고 주도하는 배후 집단의 정체가 뭔지는 나도 모른단다. 아까도 말했지만 중요한 건 왜, 어디서, 언제, 그리고 누구인가야."

"아주 흥미롭네요."

"흥미롭기도 하지만, 무섭지. 같은 사상이 자꾸자꾸 반복해서 일어나는 걸 보면. 역사가 반복되고 있어. 젊은 영웅, 모두가 본받아야 하는 초인."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25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망령이 아직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정부에서 일하는 그 멍청이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또 정부에 어떻게든 연줄이 있거나 아니면 다음에 들어설 정부에서 한몫 잡으려고 하는 사람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정치인들은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자기가 사는 나라를 하나의 거대한 유세장으로밖에 보지 않아. 그것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 거야. 자기들 입장에서 정말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 일들을 추진하는데, 정작 국민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거든. 그걸 못 깨달으니까 결과가 안 좋은 걸 보고도 정치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정치인들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기들한테 거짓말을 할 특권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아. 볼드윈 씨(세 차례나 영국의 수상을 지낸 정치가 스탠리 볼드윈을 말함-옮긴이)가 그 유명한 말을 뱉은 게 바로 얼마 전이었지.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선거에서 졌을 것이다.' 영국 수상들은 아직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가끔가다 좋은 정치가가 나오는 게 그나마 신께 감사할 일이지. 너무 드물어서 문제지만."

 

1970년의 영국 할머니가 아니라, 2015년의 한국 할머니가 이 말을 했었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상 요즘 모든 신문의 사설과 칼럼에서 나오는 말과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대사 부인 중 하나였는데, 똑똑하고 지적이고 교육도 많이 받은 여자였지.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연설을 직접 듣고 싶어서 안달을 했어. 물론 2차 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의 얘기야. 연설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했던 거야. 얼마나 대단하기에 사람들이 그렇게감동을 받을까. 그래서 갔지. 갔다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어. '정말 놀라웠어요. 직접 들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독일어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감동을 받을 정도라니까요. 이제 모두들 왜 그렇게 난리인지 이해하겠어요. 그 사람이 주장하는 사상은 정말 굉장한 것이었어요....... 가슴이 뜨거워졌죠. 그 사람이 한 말들....... 듣고 있으면 이것만이 진리로구나. 저 사람만 따라가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겟구나. 그렇게 믿게 되더군요.아, 말로 잘 설명 못하겠어요. 기억나는 대로 종이에 옮겨서 나중에 보여 줄게요. 그럼 내가 말로 전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해 줬지.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와서 이러는 거야.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날 들은 이야기, 히틀러가 한 말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거든요. 근데 그 말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니 정말로...... 무시무시한 얘기였어요. 옮겨 적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요. 자극적이고 감동적인 문장은 단 한 개도 떠올릴 수 없었거든요. 몇 마디 떠오르기는 했는데, 적고 보니까 들었을 때 생각했던 뜻과 전혀 달랐어요. 그 말들은...... 그냥, 쓸데없는 말들에 지나지 않았어요. 어째서 그럴까.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일화는 사람들이 좀처럼 자각하지 못하는 위험 한 가지를 일깨워 주지. 분명 실재로 존재하는 위험이야.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어. 어떤 삶, 어떠한 일의 환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야. 그들이 하는 말, 즉 우리가 듣는 말로써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그들이 이야기하는 개념에 자극을 받아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다른 뭔가가 있어. 바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야. 그런 힘을 가진 자들만이 뭔가 시작하고 또 환상을 빚어낼 수 있어. 그 인간적 매력을 이용해 환상을 창조하는 건데, 이를테면 목소리 톤이라든가 아니면 직접 마주했을 때 풍기는 감화력 같은 것이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그런 게 분명 있어.

그런 자들에게는 힘이 있어.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힘을 가졌고, 사악한 권력자도 그런 힘을 가졌어. 신념은 어떤 특정한 운동을 통해 불러일으킬 수가 있어. '이렇게 저렇게 하면 신천지를 창조할 수 있다.'라고 설득하면,사람들은 그걸 믿고 그렇게 되도록 기를 쓰고 투쟁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치는 거야."

앨터마운트 경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얀 스머츠가 이런 말로 잘 표현해 주었지. '리더십은 위대한 창조의 동력이지만, 때로 사악한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라고 말이야."

 

이 이야기는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 <목적지 불명>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크리스티가 그녀의 지인으로부터 실제로 들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당시의 충격과 공포가 이 일화를 계속 소설 속에서 쓰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저한테 몇 가지를 알려 달라고 하더군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아돌프 히틀러라고 믿는 환자들을 제가 많이 상대해 봤다고 마틴 B씨가 귀띔해 줬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꽤 흔한 일이며, 그 환자들이 히틀러 총통을 얼마나 존경하고 숭배하는지를 고려했을 때 히틀러가 되고 싶어 하는 열망은 자신들을 히틀러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연히 점차 사그라지게 될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설명을 할 때 속으로 조금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 총통 각하가 대단히 만족한 듯해서 안심이 되더군요. 고맙게도 각하는 자기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열망을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어서, 그런 증상을 앓고 있는 환자들 몇몇을 추려서 만나 보게 해 줄 수 있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논을 했습니다. 마틴 B씨는 스스로도 확신이 안 서는 듯 보였지만, 그래도 저를 따로 불러 총통 각하가 진심으로 이 만남을 경험하고 싶어 하신다고 확신을 시키더군요. 마틴 B 씨가 특별히 다짐받고 싶어 한 것은 히틀러 총통이 혹시나....... 아니, 쉽게 말해서 각하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거였어요. 작가 히틀러라고 주장한느 환자들 중에 혹시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 자칫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거였죠....... 그래서 제가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가장 온순한 히틀러들만 골라서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지요. B 씨는 총통 각하가 환자들과 만나는 자리에 제가 안 끼었으면 한다고 하더군요. 병원장이 합석하면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할 거라고요. 게다가 폭력적으로 돌변할 위험이 없다면야....... 그래서 저는 위험이야 없지만 B 씨가 총통 각하와 동석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B 씨는 그건 문제없다고 했죠. 그래서 그렇게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주 대단하신 분이 방문하셔서 꼭 대화를 나눠 보고자 하시니 히틀러들은 지정된 방으로 모여 달라고 방송을 내보냈습니다.(중략)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건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감춰 왔고 우리가 감춰 온 사실, 하지만 수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총통, 히틀러는 그날 자의로 정신병원에 남았고, 진짜 히틀러와 가장 많이 닮은 환자 한 명이 마틴 B와 함께 그곳에서 나갔습니다. 나중에 벙커에서 발견된 건 그 환자의 시체였습니다. (중략) 진짜 히틀러는 미리 준비된 지하 루트를 통해 아르헨티나로 밀입국해 거기서 몇 년간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아리안 혈통의 예쁜 여자를 만나 아들을 하나 두었고요. 영국 여자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히틀러의 정신병은 계속 악화되엇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미쳐서 자기가 전장에서 군을 지휘하는 환영을 보며 죽었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독일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그 계획을 받아들인 거였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그런 정보가 조금도 새어 나가지 않고 철저히 감춰져 왔다는 겁니까?"

"물론 소문이 돌았죠. 소문이란 항상 돌게 마련입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는데, 러시아 황제의 딸 중 하나가 황실 가족의 참변을 탈출해 살아남았다는 소문도 있었잖습니까."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요. 조작된 거짓이었잖아요."

조지 패컴이 또 말을 더듬거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증명했지요. 다른 무리는 진실이라고 끝까지 믿었고요. 양쪽 다 황제의 딸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진짜로 황제의 딸이었다, 아니다,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라는 여자는 사실 농부의 딸에 불과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소문이란! 오래 돌수록 믿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죠. 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나 계속 믿지, 히틀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문은 여러 차례 돌았습니다. 시체를 부검했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러시아 측이 부검했다고 주장했지만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지요."

 

생전에 히틀러는 대역을 썼으며, 죽은 것은 그의 대역이었고 히틀러가 살아 남았다는 음모론은 꽤 알려진 이야기이다. 러시아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져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아나스타샤라도 주장한 여성의 상속권은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고, 사망 후 유전자 검사 결과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와 불일치하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경우도 설령, 음모론이 맞다고 하더라도, 1889년에 출생한 그는 지금으로부터 몇십년 전에는 사망했을 것이다. 물론, 2차 세계 대전 후 지금까지 히틀러의 직계 후손이 나타났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둘 다 그저 루머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1970년대에는 이런 소문들이 꽤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소설자체의 완결성만 놓고 보면 사실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80세에 도달한 크리스티가 이 소설을 쓴 이유, 또 굳이 길게 서문을 쓴 이유는 단순히 소설을 쓰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어땠을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그런 분위기는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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