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의 카드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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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손님 여덟 명과 자신이 참석한 파티. 이를 테면 네 명의 '탐정' 대 네 명의 살인범!"

 

이 책은 마치 영화 '어벤저스'를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마블 코믹스의 모든 영웅들이 전부 총출동한 그런 느낌. 애거서 크리스티의 수많은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 네 명이 등장하는데, 각자의 시리즈에서 제각기 따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한번에 모아놓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서로 힘을 합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즐겁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서문을 지나고, 셰이터나 씨가 푸아로를 초대하는 장면을 지나고, 파티에서 네 명의 '탐정'들이 각각 등장하는 모습에서는 마치 God 노래의 friday night의 한 부분을 듣는 느낌이다. 아마 김태우의 목소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선수입장~!"

 

"살인범 넷과 탐정 넷, 런던 경시청, 영국 비밀 정보국, 사립 탐정, 추리 소설가. 재치 있는 발상이에요."

 

그럼 한 명 한 명 소개를 해 보자. 먼저 익숙한 탐정 넷. 런던 경시청의 배틀 총경, 영국 비밀 정보국의 레이스 대령, 사립 탐정 푸아로, 추리 소설가 올리버 부인.

 

배틀 총경이야 침니스에 일어났던 두 개의 사건과 <0시를 향하여>에 등장했던 인물. 이 소설 외에도 <위치우드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원제는 Easy to kill인 이 소설은 황금가지 전집에서는 빠진 것 같아 보인다. 이제 그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되니 좀 아쉬웠다.

 

레이스 대령은 <갈색 양복의 사나이>와 <나일 강의 죽음>에 등장했던 인물. 사실 억지로 머리를 쥐어뜯어야 겨우 기억이 날 정도의 인물이다. 사건에 적절한 단서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뚜렷한 특징이 있거나 결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서 기억에 남지 않았나보다. 이 책에서도 네 명의 '탐정'이 모이는 시간에 자신의 정보만 제공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일정상 외국으로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 외에도 <빛나는 청산가리>에 등장한다고. <죽음과의 약속>에서는 이 레이스 대령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의 소개장 덕분에 푸아로가 수사를 이어갈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의 푸아로. 마플 양과 함께 크리스티 소설의 좌청룡, 우백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설명이 필요없는 최고의 탐정.

 

"무슈 푸아로에 대해 저도 다 알고 있어요. 『ABC 살인 사건』(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으로 푸아로가 등장한다-옮긴이)을 해결하신 분이시지요."

 

저 'ABC 살인 사건'은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독자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크리스티 스스로도 흡족했던 작품인 것 같다. 이 소설 뿐 아니라 다른 소설에서도 푸아로의 명성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꼭 저 작품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못지 않게 푸아로의 유명세를 입증하는 사건으로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에서도 언급이 된다.

 

"칼입니다, 마드무아젤. 열두 명이 한 남자를 찔러 죽이는데 사용한 것이지요.(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의 내용-옮긴이』) 콩파니 앵테르 나시오날 데 바공 리(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운영한 회사-옮긴이)에서 기념으로 준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리아드네 올리버.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리아드네가 준 실 때문. 이 이름을 크리스티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에 부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다. 이 소설에서도 톡톡히 그 역할을 해낸다. 이름값이 아깝지 않다는 말. 그러고보니 <인셉션>에서 엘렌 페이지의 이름이었다. 다른 세 인물과는 달리 이 소설이 첫 등장이다.

 

"『서재의 시체(The Body in the Library)』(실은 마플 양이 주인공인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옮긴이)를 쓰신 그분이요?"

"바로 그 올리버 부인이지요."

 

이 부분을 보면 올리버 부인은 크리스티의 분신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적당한 소설을 알맞은 자리에 편의상 써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한 번 더 확인 사살하는 부분이 나온다.

 

"악당이 몇 명이든 혼자 너끈히 해치우고 시체까지 깨끗이 처리하는 영웅을 독자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내가 지금까지 서른두 권을 썼는데, 물론 무슈 푸아로가 지적하셨듯이 기본적인 구성은 똑같아요. 그걸 왜 아무도 눈치 못 챘는지 모르겠어요. 후회하는 건 딱 하나뿐이에요. 주인공인 탐정을 핀란드 인으로 설정한 거예요. 핀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핀란드 독자들로부터 이렇게 설정하면 안 된다는 둥 핀란드 인은 절대 그런 표현을 안 쓴다는 둥 이것저것 지적하는 편지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거든요. 핀란드 인들은 추리 소설을 무척 즐겨 읽는 모양이에요. 해가 짧은 겨울이 길어서 그런가? 불가리아나 루마니아 사람들은 내 책을 거의 안 읽나 보던데. 불가리아 인 탐정을 등장시켰으면 훨씬 편했을 뻔했어요."

 

이 부분을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벨기에 출신의 푸아로를 크리스티가 그리면서 얼마나 많은 벨기에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은 전에는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스벤 예르손(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캐릭터로, 스웨덴 어를 하는 핀란드 인 탐정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자신이 만들어낸 에르퀼 푸아로에 비유할 수 있다.-옮긴이)처럼 멋지게 척척 해내시겠지."

 

'스벤 예르손'이라는 이름은 '에르퀼 푸아로' 만큼이나 독특한 이름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에 이런 디테일한 설정까지 부여할 정도이니 크리스티는 참 꼼꼼한 작가이다. 또 올리버 부인에 대해 쓸 때마다 즐거워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충분히 들 수 있고. 그녀는 이 소설을 시작으로 <맥긴티 부인의 죽음>, <죽은 자의 어리석음>, <창백한 말>, <세 번째 여인>, <핼러윈 파티>, <코끼리는 기억한다>에 등장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읽어 본 소설은 <창백한 말> 한 권이지만, 올리버 부인은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 소설만 제외하면 다른 소설에서는 푸아로와 함께 등장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소설들은 올리버가 아니라 푸아로의 이야기로 기억될 것 같다.

 

나는 이 소설 속의 탐정 네 명은 '선수'라고 비유했는데, 작가인 크리스티는 서문에서 범인 후보 네 명을 '선수'에 비유했다. 한 번 이상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으며, 기회가 되면 또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동기와 범죄 양상은 각각 다르다.

 

"이런 살인을 저지르러면 대담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먼저 로버츠 박사를 생각해 볼 수 있군요. 가진 패보다 높게 부르는 버릇이 있는 허풍쟁이에다 모험을 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박사의 심리는 범인의 심리와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렇다면 메러지스 양은 용의 선상에서 제외할 수 있겠군요. 유악하고 소심해서 가진 패보다 높게 부르지도 못하며, 신중하고,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고, 매사에 조심하며, 자신감이 부족한 편이니까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담하고 위험한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가장 적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소심한 사람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던 사람이 더더욱 궁지에 몰리면, 막다른 길에 몰려 고양이에게 덤벼드는 쥐새끼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겁니다. 만약 메러디스 양이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다면, 그리고 셰이터나 씨가 그 범행의 전말을 알고 자신을 경찰에 넘길 거라고 믿었다면, 단단히 겁에 질려 물불 안 가리고 빠져나가려 했겠죠. 대담함뿐 아니라 절박한 공포심에서도 살인이라는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데스파드 소령을 봅시다. 냉철하고 수완이 좋으며, 성공할 확률이 낮더라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무슨 일이든 시도해 볼 사람입니다. 이것저것 가능성을 따져 보고 할 만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소령은 결정을 내리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또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위험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로리머 부인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정신이나 신체 모두 건강합니다. 냉철한 여성이죠. 계산적인 두뇌가 굉장히 발달한 사람입니다. 아마 넷 중에 머리가 가장 좋을 겁니다. 만일 로리머 부인이 범죄를 저리르기로 마음먹었다면 미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게끔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거죠. 그런 점 때문에 나머지 셋에 비해 범인일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셋 중 누구보다 강인한 성격을 가졌고, 일단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실수 없이 끝까지 해낼 사람입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여성이에요."

 

<테이블 위의 카드>라는 이 소설은 여러모로 수학적인 부분이 많다. 네 명의 탐정, 네 명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살인 사건 당시 탐정 네 명은 다른 방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고, 용의자 네 명은 또 다른 방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용의자 네 명이 함께 게임을 하던 그 테이블 근처에서 집주인이 있었고, 탐정 네 명이 다른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동안 용의자 네 명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 각각의 용의자는 한 번 이상 살인을 저질렀던 과거가 있고, 그 사건이 일어난 경위는 모두 이질적이며,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크리스티의 소설 답게, 푸아로는 용의자 네 명의 심리를 추적하며, 그 도구는 사건 당일의 카드 게임 내용.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술을 먹어 보아야 한다는 말도 있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라는 말도 있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게임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라는 내용도 있었던 것 같다. 비록 탐정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을 보여도, 게임하는 도중에는 어떻게든 심리가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독자들과 게임하는 것 같다. 위에 묘사된 대로 용의자른 단 네 명으로 제한해 버리면, 그에 대해 탐정의 입으로 판단을 내려주는 것은, 어쩌면 가지고 있는 카드를 전부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용의자 네 명 간에 실제로 이루어진 3개의 게임, 그리고 용의자와 탐정들간의 게임, 그리고 독자와 작가와의 게임. 네 명의 '탐정'이 총출동하기 때문에 이른바 아마추어의 수사에서 볼 수 있는 '삑사리'가 없으며, 각각 구분된 네 용의자의 캐릭터 또한 분명하고 확실해서 독자에게 애매한 부분에서 넘어지게 만들지 않는다. 안개가 낀 것 같은 모호한 길을 손으로 헤치며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하게 밝혀져 있는 대로를 걸어가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미를 주다니 역시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전혀 넘치지 않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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