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5 (완전판) - 운명의 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천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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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도 이름을 한두 가지 생각해 보았지요. 그런데 비어트리스가 그러는데 아가씨는 전에 이 마을에 살던 메리 조던이라는 사람을 안다고요?"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는 들었어요. 전쟁 무렵의 일이죠. 아니, 지난번 전쟁 말고요.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체펠린 비행선이 날아왔을 때의 전쟁 말이에요."

"체펠린에 대해서라면 나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터펜스가 말했다.

"1915년인가 1916년에 런던을 공습했다더군요."

"내가 어느 날 작은 할머니와 함께 육해군 매점에 가 있는데 공습경보가 울리더군."

"밤에 날아오는 때도 있었다던데요? 꽤 무서웠겠어요."

"글쎄, 생각보다는 무섭지 않았어요. 모두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하지만 저번 세계대전 때의 비행 폭탄보다는 덜 무서웠지요. 그것은 우리가 달아나는 곳은 어디든 뒤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밤마다 지하철 역에서 지내곤 했다면서요? 런던에 친구가 있었는데 밤이면 지하철 역에 머물렀다더군요. 워렌 가에 있는 것 말예요. 모두들 자기가 찾아갈 역을 정해 놓고 있었답니다."

"나는 이번 대전 중에는 런던에 있지 않았어요. 밤새 지하철 역에 있을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데."

터펜스가 말했다.

"하지만 제니라는 이 친구는 아주 재미있었다고 했어요. 역에서 한사람씩 사용하는 계단이 정해져 있었대요. 그 계단에서 잠도 자고 샌드위치도 먹고 함께 놀고 얘기도 나눴대요. 밤새 그런 식으로 재미있게 보냈대요. 지하철도 아침까지 운행되었고요. 제 친구는 전쟁이 끝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더래요."

"어쨌든 1914년에는 비행 폭탄 같은 건 없었어요. 체펠린 비행선 뿐이었지."

이미 체펠린 같은 것은 그웬다의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다.

 

1973년에 나온 소설로, 토미와 터펜스가 등장하는 마지막 소설이다. 1922년의 <비밀결사>, 1929년의 <부부탐정> 1941년의 <N 또는 M>, 1968년의 <엄지손가락의 아픔>을 이은 소설로, 이제는 70대가 되고 손자, 손녀까지 둔 노부부로, 한적한 마을로 막 이주한 상태이다. <비밀결사>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였다. 토미와 터펜스가 만나게 된 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군인과 간호사로 만난 것이다. 정보부에서 일하며 국가와 국가 사이의 첩보전까지 확대되었던 <부부탐정>을 지나 <N 또는 M>에서 제2차세계대전을 겪었고, <엄지손가락의 아픔>에서는 전쟁이 아닌 개인적인 사건을 겪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영화처럼 생각하는 세대와의 대화는, 이들이 얼마나 긴 시간을 겪어냈는지 한순간에 느끼게 한다.

 

"할로케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지? 정말 스파이와 관련된 일이었나?"

"사실 워낙 옛날 일이라서 나도 그다지 잘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세. 그떄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 나무랄 데 없는 젊고 우수한 해군 장교에다 꼭 영국인 같았어.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고용되어 있었던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지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독일인이었던 것 같아. 1914년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말이야. 맞아, 그게 틀림없어."

"그 사건에는 어떤 여자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메리 조던인가 하는 여자 이야기를 들은 것 같군.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네. 신문에도 났는데 아마 그 남자 아내라고 생각되네. 아까 말한 그 해군 장교 말일세. 그 여자가 러시아 사람들과 접촉해서...... 아니, 그건 그 뒤에 있었던 일이지. 자칫하면 이야기가 뒤범벅이 되어 버린단 말이야. 모두 비슷비슷한 이야기라서 말일세.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남편의 수입이 넉넉지 못하다, 즉, 자기 실수입이 넉넉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아니, 그런데 이 사람아! 왜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캐내려고 하나? 이제 와서 그게 자네와 무슨 관계라도 있나? 자네는 옛날 루시타니아 호에 탔다든가, 루시타니아 호와 함께 가라앉았다든가 하는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지?(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3권 『비밀결사』의 내용-옮긴이)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사건에 자네나 자네 부인이 말려들었지?"

"둘 다 말려들었지만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이제 완전히 잊어버렸네."

"그때도 어떤 여자가 관련되어 있지 않았나? 제인 피시인가 하는 여자, 아니 제인 왜일이었던가?"

"제인 핀이야."

"그 여자는 지금 어디서 사나?"

"미국 사람과 결혼했다네."

"흠, 그거 잘됐군. 옛날 친구들과 그때 일을 떠올리면 항상 이야기에 열을 올리게 된단 말이야. 옛날 친구들 얘기를 하다 보면 녀석들이 죽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더 놀라기도 하지. 그러니 참 까다로운 세상이야."

 

머튼 촙이라는 별명을 지닌, 토미의 과거 동료와 토미와의 대화이다. 예전에 빨강 머리 톰이라고 불리던 토미는 이제 백발의 톰이 되어 버린 상태로 최근에 이주한 할로케이에 대한 이야기를 동료와 나눈다. 머튼 촙이란 양의 갈빗살을 가리키는 단어로,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삼각형 모양의 구레나룻을 뜻하기도 한다고 한다. 노인이 되어서도 젊은 시절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제인과 그녀의 부자 사촌, 그리고 토미 베레스퍼드와 프루던스 카울리는 4각관계였을 것이다. 잠깐 서로 엇갈려서 끌리는 듯 했지만, 결국 로맨스는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 이후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미국으로 건너간 제인 핀과 그녀의 남편의 이야기 또한 토미와 터펜스 못지 않는 장대한 스토리가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단시간 내에 크리스티의 전집을 읽고 있기 때문에 수십년의 세월을 한 번에 느끼게 되어서 좀 아찔했지만, 오랫동안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으며 그녀와 함께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온 독자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감개무량하지 않을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희 내외는 새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신경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그렇겠죠. 저도 압니다. 전기 기사가 마룻바닥을 온통 차지하고 여기 저기 구멍을 뚫어 대지요. 그러면 거기에 발이 빠져서......."

"전에 살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책을 저희한테 팔고 갔습니다. 아동용 도서가 많았는데 정말 종류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헨티(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소년 위주의 모험 역사 소설 작가-옮긴이)라든가 그런 작가들의 작품 말입니다."

"기억 나네요. 헨티의 작품이라면 어릴 때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읽던 책 속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글자 밑에 그어진 줄을 이어나가다 보니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가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흠,기대가 되는군요. 엉뚱한 이야기는 언제나 듣고 싶어지더군요."

"이런 문장이 되는 겁니다. '메리 조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범인은 우리 가운데에 있다.'고 말입니다."

"정말 흥미롭군요. 이런 건 처음인데요. 틀림없이 그런 문장이었습니까? 메리 조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었다고요? 누가 그렇게 적어 놓았죠?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있었습니까?"

"초등학생 정도의 사내아이 같습니다. 파킨슨이 그 일가의 성입니다. 그 일가가 저희가 이사 간 집에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내아이도 아마 파킨슨 집안의 한 사람이겠지요. 알렉산더 파킨슨! 어쨌든 지금 그 아이는 그 지방의 교회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파킨슨이라? 잠깐, 생각 좀 해 봅시다. 사건에 관련된 이름 중에 파킨슨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지요."

"저희 내외는 메리 조던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메리 조던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었으니까요. 그쪽은 당신의 전문 분야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정말 묘한 이야기로군요. 혹시 메리 조던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도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고작 지금으로 말하자면 오페어 걸이거나 가정 교사였다고 알려 준 사람이 있었지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맘젤이나 프로라인이라고 불렸다는 정도였죠. 완전히 두 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녀의 사망 원인은 뭐죠?"

"누군가가 디기탈리스 잎을 시금치와 함께 정원에서 모르고 뜯어 와서 그것을 먹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정도로는 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요. 그 정도로는 죽지 않지요. 하지만 치사량의 디기탈리스 알칼로이드를 커피나 식전에 마시는 칵테일에 넣어 두고 그것을 메리 조던이 마시도록 했다면 디기탈리스 잎 때문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알렉산더 파커인가 하는 학생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다는 거죠? 그밖에 알게 된 것 없습니까? 언제적 일이죠? 2차 대전, 1차 대전, 아니면 그보다 앞서 일어난 일입니까?"

"그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독일 스파이였던 모양입니다."

"그 사건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큰 소란을 일으켰죠. 1914년 이전에 영국에서 일했던 독일인은 모두 스파이라고들 했습니다. 사건에 가담한 영국인 장교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죠. 저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을 유심히 살핍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군요. 최근에는 기삿거리도 되지 않죠. 사건 기록이 공개되어도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기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사는 모두 개략적인 것이지요."

"예, 그럴 테지요. 그 사건은 그 무렵 도난당한 잠수함 기밀과 관련이 있었지요. 아니, 비행기에 관한 기사도 있었지. 이쪽 사건의 기사도 꽤 많았어요. 그런 것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죠. 하지만 다른 사정이 많이 있었던 겁니다. 거기에는 정치적인 면도 있었지요. 유명한 정치인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었어요. 대중으로부터 정말 청렴결백한 정치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 말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청렴결백이라니 얼미도 없는 소리죠. 그러보 보니 2차 대전 무렵이 생각나는군요. 세상 소문과는 반대로 청렴결백한 면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이 부근에서 살았지요. 해안 쪽에 방갈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봉자를 잔뜩 길어서는 히틀러를 추켜세웠지요. 이 나라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히틀러와 손을 잡는 것밖에 없다면서 말입니다. 분명 그 녀석은 고결한 인물로 보였지요. 아주 훌륭한 뜻을 품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가난, 억압, 부정 같은 것들을 근절하자고 소리 높여 외쳐댔습니다. 파시즘은 아니라고 하면서 실은 파시즘의 기수였던 것이죠. 스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코를 위시한 그 일파와 손을 잡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변을 토하고 다닌 무솔리니도 물론 있었죠. 전쟁 직전에는 언제나 많은 간접적인 원인이 있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일 말입니다."

"모르시는 게 없는 것 같군요. 이런 말씀 드리면 무례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을 만나면 사실 저는 몹시 흥분이 됩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는 종종 그런 일들에 관여했습니다. 원인이나 배경이 되는 문제들 말입니다. 귀를 열고 있으면 많은 얘기를 듣게 되지요.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어 많은 것을 아는 옛친구들한테서도 얘기를 듣게 되죠. 당신도 그런 친구를 찾아 나설 생각이겠죠?"

"예, 실은 저도 옛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옛친구들과 만나곤 하니까요. 그러는 가운데 많은 얘기를 듣게 되죠. 그때까지는 한데 묶어서 생각지 않았던 이야기도 다시 들어보게 되면 아주 흥미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예, 이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런 사건과 부딪치다니 재미있군요."

"문제는 그걸 나 자신도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발을 들여 놓았는지도 모르지요. 오래 전부터 탐내던 집도 샀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집을 손보고 나서 정원을 꾸며 보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제 다시는 사건이나 그런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단지 호기심에서 이러는 겁니다. 오래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알고 싶은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마찬가지지요. 여기에 어떤 목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해 봐야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로빈슨 씨와 토미의 대화이다. 이사한 집에서 발견한 의문의 메시지를 보고 부부는 각자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은다. 터펜스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고, 토미는 옛 동료들을 수소문한다. 로빈슨 씨는 이쪽 분야에서 일급 인물로, 그가 토미의 지인의 딸의 대부인 관계로 그를 만나게 된다.

 

"응, 그러니까 모두들 나를 찾는 것 아닌가? 연기로 숨이 막히니 어쩌니 군소리를 해 가면서도 나를 찾아오지. 그건, 그래 그 무렵이었어. 바로 그 프랑크푸르트 일당의 사건 무렵이었어.(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6권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의 내용-옮긴이) 우리는 그것을 겨우 막아냈지. 사건의 배후 인물을 밝혀내어 겨우 막았던 것일세. 이번 경우에도 누군가가, 그렇다고 한 사람은 아니야. 여러 사람이 배후에 있을 걸세. 설령 배후 인물을 밝혀낼 수 없다고 해도 일의 경위는 알 수 있겠지."

 

파이커웨이 대령과의 면담이다. 로빈슨 씨도, 파이커웨이 대령도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인 1970년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에서 활약한 인물로 이 소설에 나타난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히틀러가 사망한지 25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 망령을 두려워하는 크리스티의 심정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이 소설에도 그 기조가 이어진다.

 

"메리 조던?"

"그래. 그 일 때문이었어."

"나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려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대체 현대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과거가 어떻다는 건가요? 아무 관계가 없어야 마땅해야. 지금 와서......."

"과거는 현재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야? 하지만 관계가 있어. 틀림없이 잇지. 생각지도 못할 묘한 곳이나, 설마 하고 생각할 그런 곳에서 말이야."

"과거에 원인을 두고 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래. 기다란 사슬 같은 것이지. 당신도 가지고 있잖아. 틈새가 있고 군데군데 구슬이 달려 있는 것."

"제인 핀 사건 같은 거로군요. 우리가 젊어서 모험이 하고 싶었을 때 원하던 대로 모험을 하게 된 그 제인 핀 사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모험을 했었지. 가끔 옛날 모험을 되돌아보면 둘 다 용케 목숨을 부지해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또 있어요. 생각 안 나요? 둘이서 손을 맞잡고 사립 탐정 흉내를 내던 일 말이에요."

"응, 그건 재미있었지. 당신, 기억 나? 왜, 그때......?"

"아니, 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는 건 사양하겠어요. 뭐 발판으로라면 또 모르지만. 정말이에요. 하지만 여하튼 그건 좋은 연습은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또 하나 있었죠."

"그래, 블렌킨솝 부인, 맞아?"

터펜스는 웃었다.

"네, 블렌킨소프 부인이에요.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당신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봤던 일은 잊혀지지도 않아요."

"잘도 그런 뻔뻔스러운 행동을 했지, 터펜스. 장롱 뒤인가 하는 곳에 숨어들어 가서 나와 그 남자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서 블렌킨솝 부인이라고요."

터펜스는 다시 웃었다.

"N 또는 M, 그리고 '거위야, 거위야, 어디에 갔다 왔니'잖아요."

"하지만 설마......."

토미는 잠깐 주저했다.

"설마 그런 것들이 이번 사건의 발판이 되는 건 아니겠지?"

"맞아요. 어떤 뜻으로는 발판이 되는 거지요. 로빈슨 씨도 그런 옛날 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당신 동료 중 한 사람이니까."

"당신은 틀림없이 내 동료 중 한 사람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 일로 완전히 사정이 바뀌고 말았어요. 아이작 말이에요. 그가 살해당했잖아요? 머리를 얻어맞고, 우리 집 정원에서요."

"설마, 그 일과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점을 나는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지금부터는 단순한 범죄 사건을 조사한다고 생각해선 안 돼요. 과거에 대해 조사하고 과거에 누가 무슨 이유로 죽었는가 하는 점을 밝혀야 해요.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거예요.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이작 영감이 죽은 것을 말하고 있는 거 말예요."

 

설령 메리 조던과 알렉산더 파킨슨의 일에 음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수십 년 전의 일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을 때쯤 부부의 정원일을 도와주던 노인이 살해된다. 여기까지 소설이 도달하면 크리스티 특유의, 과거의 죄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바로 그런 스토리로 연결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건은 너무나 쉽게 풀려버려 맥이 빠진다. 1973년 <운명의 문> 이후로 1975년 <커튼>, 1976년 <잠자는 살인>이 나왔지만, 뒤의 두 소설은 사실 몇 십년 전에 미리 쓴 소설이기 때문에, 사실상 크리스티가 쓴 마지막 소설이 이 소설일 것이다. 소설이 다소 헐거운 것에 불만을 표하고 싶다가도 이 소설을 쓸 당시의 크리스티의 나이가 83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경의를 표하게 된다. 사실상 크리스티가 쓴 마지막 소설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마을은 깨끗해졌습니다. 벌집이 완전히 제거되었거든요. 조용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마을로 되돌아간 겁니다. 녀석들은 베리 세인트 에드먼드 부근으로 본부를 옮겼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으니까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크리스핀이 말했다.

터펜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제 딸 데보라가 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따금 묵어 가곤 하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로빈슨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N 또는 M' 사건이 있은 뒤로 두 분은 그 사건과 관련된 아이를 양녀로 삼으셨죠? 그 『거위야, 거위야, 어디에 갔다 왔니?』인가 하는 동화책을 가지고 있던 아이 말입니다."

"베티 말이에요? 네, 대학에서 성적이 좋아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조사하고 있어요. 그런 일에 열중하는 젊은이가 꽤 많은가 봐요. 베티는 정말 귀여워요. 아주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요."

로빈슨은 목청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건배 하시죠. 베레스퍼드 부부의 조국에 대한 공로에 감사하는 뜻에서."

일동은 한마음이 되어서 잔을 비웠다.

"한 번 더 건배하죠. 이번에는 한니발을 위해서."

로빈슨이 말했다.

"자, 한니발!"

터펜스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분들이 너를 위해 건배를 해주시는 거란다. 이건 기사의 작위나 훈장을 받는 것만큼이나 멋진 일이야. 전 얼마 전에 스탠리 웨이먼의 『한니발 백작』을 읽었답니다."

"저도 어릴 적에 그 책을 읽었습니다."

로빈슨이 말했다.

"'내 형에게 상처를 주는 자는 타반에게 상처 주는 자다.'라고 했던가요? 파이커웨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에게 작위 수여식을 하고 싶은데."

앞으로 한 발짝 나선 한니발을 로빈슨이 관례에 따라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자 개는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지금부터 그대를 우리 왕국의 백작에 봉하노라."

"한니발 백작, 멋지지 않니?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니?"

터펜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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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 주머니 속의 호밀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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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일 가능성은 눈꼽만큼도 없지."

번스도프 선생은 호언장담하더니 "물론 비공시적인 이야기지만." 하면서 뒤늦게 몸을 사렸다.

"예, 예, 이해합니다. 그런데 독살인가요?"

"응, 게다가...... 이건 정말 비공식적인 이야기인데......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해....... 어떤 독극물이 쓰였는지 내기를 해도 되겠어."

"그래요?"

"탁신이야, 이 친구야. 탁신이라고."

"탁신? 그런 독극물은 처음 듣는데요."

"당연하지. 그래서 아주 특이한 사건인 거야. 기분 좋을 만큼 특이한 사건이라고. 3~4주 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면 나도 몰랐을 거야. 소꿉장난을 하던 아이들 몇 명이 주목 열매를 따가 그걸로 차를 끓였거든."

"거기 들어 있는 겁니까? 주목 열매에?"

"열매 아니면 잎에 들었지. 아주 유독해. 물론 알칼리성이고. 이 독극물이 사용된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러니 정말 흥미진진하고 특이한 사건 아닌가....... 허구한 날 제초제만 다루다 보면 얼마나 지겨운지, 닐 자네는 모를 거야. 탁신은 고마운 선물이지. 물론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으니까 절대 다른 데 옮기지는 말아 줘. 하지만 거의 확실해. 자네한테도 흥미진진한 사건이 되겠군. 일상의 변화 아닌가?"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라는 건가요? 희생자만 빼고?"

"그렇지, 그렇지. 희생자만 딱하게 됐지. 아주 운이 안 좋았던 거야."

번스도프 선생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고인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있나요?"

"글쎄? 자네 부하 직원 하나가 공책을 들고 옆에 앉아 있었으니 자세한 건 그 사람한테 듣도록 해. 차가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사무실에서 마신 차 속에 뭐가 들어 있었다고 말이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닐 경위는 매력적인 그로브너 양이 차를 끓인 다음, 그 속에 주목열매를 넣는 장면을 곰곰이 따져 보았다. 하지만 이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게 금세 효과가 나타날 수 없거든. 듣기로는 차를 마시자마자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금새 효과가 나타나는 독극물은 거의 없어.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게 청산가리라고...... 순수 니코틴인데......."

"그런데 청산가리나 니코틴은 분명 아니었고요?"

"이봐. 그랬다면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죽었을 거야. 청산가리나 니코틴은 분명 아니었어. 스트리크닌인가 의심하긴 했는데, 스트리크닌의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경련을 일으키지 않아.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탁신이라는데 내 이름을 걸어도 좋아."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는 거죠?"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한 시간? 혹은 두세 시간? 죽은 사람을 보아하니 대식가였던 것 같던데, 만약 아침을 푸짐하게 먹었다면 그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겠지."

"아침이라......."

닐 경위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예. 아침일 것 같네요."

"범인과의 아침 식사였던 셈이지."

 

부유한 금융 회사 사장이 출근 후 회사에서 차를 마시다가 사망한다. 죽기 전 그는 차가 이상하다는 말을 남겼고, 사인은 탁신으로 인한 독살. 현재 보톡스에 쓰이는 그 독극물이다.

 

"예. 그런데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입고 있는 양복 주머니 속에 뭐가 있는지 봤거든요. 손수건, 열쇠, 잔돈, 지갑. 여기까지는 평범한데, 특이한 게 한 가지 있었어요. 재킷 오른쪽 주머니에 곡식이 들어 있는 겁니다."

"곡식?"

"예."

"곡식이라니? 옥수수나 보리, 뭐 그런 거 말인가?"

"예, 맞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호밀 같았는데, 제법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의 호밀>이라는 제목만 보았을 때는, 호밀밭 근처에서 살해당했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범인의 눈속임이었다

 

닐 경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약 10초 동안 마플 양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처음에는 이 노부인의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싶었다.

"지빠귀요?"

마플 양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빠귀."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가사를 읊었다.

"6펜스 노래를 부르자. 주머니는 호밀로 한가득.

파이로 구워진 넷하고 스무 마리의 지빠귀.

파이가 열리면 새들이 노래를 시작하지.

이건 왕 앞에 차릴 만한 진수성찬.

왕은 보물 창고에서 돈을 세고,

왕비는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고,

하녀는 정원에서 빨래를 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녀의 코를 물었지."

"이럴 수가."

닐 경위가 말했다.

"딱 들어맞지 않나요? 그 사람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게 호밀 맞지요? 어느 신문에서 그러던데. 다른 신문에서는 그냥 곡식이었다고 했으니 쌀일 수도 있고, 옥수수일 수도 있지만, 호밀이었지요?"

닐 경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마플 양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렉스 포티스큐. 렉스는 라틴어로 왕이라는 뜻이지요. 왕은 보물 창고에서, 왕비인 포티스큐 부인은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다가....... 그래서 범인이 가엾은 글래디스의 코를 빨래집게로 집은 거랍니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던 마더 구스의 노래가 또 한 번 등장한다. 미친 사람의 소행인지 아니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상황. 부자 사장과 그의 아내가 사망하였고, 동기만 놓고 보면 두 아들 부부와 딸에게로 좁혀진다.

 

그녀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안락의자에 앉았다. 닐은 등이 똑바르고 조그만 그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예전보다 조금 더 주의 깊게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여자 같았다. 그리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불안해하고, 불만이 많고, 소견이 좁아 보이지만, 간호사라는 자기 직업 세계에서는 유능하고 능숙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잣집 도련님과의 결혼을 통해 여유를 얻었지만, 그 여우가 만족을 선물하지는 못했다. 옷을 사고, 책을 읽고, 달짝지근한 간식을 입에 달고 살았겠지만, 경위는 렉스 포티스큐가 죽은 날 밤에 소식을 듣고 몹시 흥분하던 퍼시벌 부인의 모습이 생각났고, 그 모습에서 잔인한 기쁨을 포착했다기보다 그녀의 인생을 둘러싼 권태라는 사막을 보았다. 그가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아래로 내리깔렸다. 긴장을 해서 그런 것 같긷 하고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 보이기도 했는데,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번째 며느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 남자가 돈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나요?"

"예. 할머님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가요?"

"장담하지만 돈 많은 철물점 딸, 매리언 베이츠와 결혼한 엘리스 같겠죠. 매리언은 아주 평범한 아가씨고 엘리스한테 홀딱 반했는데, 의외로 잘 살았어요. 엘리스나 이 제럴드 라이트 같은 청년은 사랑한답시고 가난한 집 아가씨와 결혼했을 때 정말 꼴불견이 된답니다. 그런 짓을 저질러다는 게 너무 짜증이 나서 부인한테 화풀이를 하거든요. 하지만 돈 많은 아가씨하고 결혼하면 부인을 계속 대접해 주지요."

 

가난한 남자와 사귀고 있는 딸의 남자친구에 대한 대화이다. 놀랍게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지만, 사실상 공범인줄도 모르고 이용만 당한 사람까지 죽었기 때문에 범인을 검거하기는 힘든 상황. 이 때 책 마지막에서 의외의 단서가 나온다.

 

추신: 버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같이 보내요. 행락지에서 어떤 남자가 찍어서 준 거예요. 버트는 저한테 이 사진이 있는 걸 몰라요. 사진 찍는 걸 싫어하거든요. 하지만 마님도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잘생기지 않았나요?

마플 양은 입술을 오므리고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플 양의 시선이 홀딱 반해서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글래디스의 가엾은 얼굴에서 옆 사람 얼굴로 넘어갔다. 미소를 짓고 있는 랜스 포티스큐의 까무잡잡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 애처로운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정말 잘생기지 않았나요?'

마플 양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연민의 뒤를 이어 분노가 치밀었다. 잔인한 살인범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다 연민과 분노가 잦아들면서 승리의 기쁨이 용솟음쳤다. 턱뼈 일부분과 이빨 몇 개를 가지고 멸종된 생물은 복원하는 데 성공한 전문가가 느낌직한 승리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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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완전판) - 잠자는 살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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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크리스티 사후에 출간되었기에, 마플 양 최후의 소설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1973년에 출판된 <복수의 여신>이 마플 양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미 1962년 소설 <깨어진 거울>에서 그녀의 친구인 밴트리 대령이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또 세인트메리미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웨스트 부부가 하나의 사건만이 그곳에서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목사관의 살인>과 <서재의 시체> 사이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1930년에서 1942년 사이에 쓰여졌다는 말이 된다. 아마도 이 소설이 제때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크리스티 스스로 흡족하지 않은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독자들에게 불만족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1975년에 나온 <커튼>이 실제로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쓰여진 이야기이며, 푸아로의 죽음을 다루었기에 출판될 시기를 조절한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1976년에 사망한 크리스티가 1975년에 <커튼>을 출판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커튼>은 크리스티가 제2차세계대전 중 집필했고, 폭격을 피해 금고에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에 대한 책임감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녀에게 몇 년만 더 허락되었더라면, 마플 양에게도 비슷한 결말이 주어졌을 수 있을 것이리라. 어쨌든 1971년 출판된 <복수의 여신>이 마플 양의 마지막이었기에, 이 소설이 1976년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다. 195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크리스티의 소설은 가장 날카로우며, 원숙했다.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는 자일스의 젊은 아내가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그웬다가 그들을 보고 내심 좀 놀랐다 해도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우선 레이먼드는 외모가 괴상했다. 안 그래도 활개 치는 까마귀 같은 인상인데, 머리카락은 삐죽삐죽 솟았고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그의 이해하기 힘든 말버릇 때문에 그웬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할 뿐이었다.

그와 조앤은 둘이서 꼭 자기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학구적인 분위기를 경험해 본 적 없는 그웬다에겐 정말 낯선 체험이었다.

"그웬다, 우리와 같이 쇼를 한두 개 보러 갔다 오죠."

레이먼드가 말했다. 먼 길을 온 그웬다가 홍차였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진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웬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오늘 밤에는 새들러즈 웰스에서 발레를 보고, 내일은 우리의 놀라운 능력자 제인 아주머니의 생일 축하 파티를 합시다. 길더그 주연의 「말피 공작부인」을 보러 가자고요. 그리고 금요일엔 「그들은 발 없이 걷는다」를 봐야 해요. 러시아 번역 작품인데, 지난 20년간의 공연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요. 위트모어 극장으로 가는 겁니다."

 

주인공인 그웬다는 신혼 부부로, 남편인 자일스는 웨스트 부부와 사촌 관계이다. 새로 이사한 집인데 마치 자신이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때문에, 충동적으로 웨스트 부부를 방문하게 되고, 함께 연극을 보다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온다. 마플 양은 특유의 따뜻한 태도로 그웬다를 위로하며, 그웬다는 마플 양에게 처음 힐사이드 집을 보았을 때부터 시작해, 서서히 당혹감을 느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나무를 새로 심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정원 길, 막아놓았던 문, 본 적도 없는데 세세한 부분까지 상상했던 그대로였던 벽지, 그리고 연극을 보면서 떠오른, 살인 사건까지. 그웬다는 마플 양의 조언을 받아 죽은 어머니의 여동생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웬다의 부모가 인도에서 만나 결혼하였고, 그웬다가 2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으며, 아버지는 영국으로 그웬다를 데리고 와 재혼하였고, 1년 후 그녀와도 헤어졌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결국, 그녀가 환각이라고 느꼈던 것은 실제 그웬다의 어린 시절에 보았던 사실들로, 아버지는 오래 전에 사망했기에 살인 사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을 해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자일스와 그웬다는 마플 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년 전의 살인 사건을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다.

 

"정의가 잘못 실현된 경우는 없었을까요? 이 범죄의 결과로 고통 받은 사람은 없었다는 겁니까?"

"제가 아는 한은 없었어요."

"흠, 회상 속의 살인이라. 잠자는 살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예,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저라면 잠자는 살인 사건을 그대로 묻어 두겠습니다. 살인을 들쑤시는 건 위험합니다.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제가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살인자는 반드시 범행을 되풀이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한 번 죄를 저지르고 그것으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절대 다시 목을 빼지 않고 조심하는 범죄자도 있지요. 그런 자가 그 뒤 내내 행복하게 산다고 말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럴 것이라고는 절대 믿지 않으니까요. 세상에 여러 가지 형태의 징벌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만은 모든 일이 평화로웠겠지요. 마들렌 스미스 사건, 리지 보든 사건이 그 좋은 예입니다. 스미스와 보든은 비록 유죄로 입증되지는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 여자들 둘 다 유죄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이름을 들려면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범행을 되풀이하지 않았지요. 한 번의 범행만으로 바라던 것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위협을 느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말씀하신 살인자가 바로 그런 종류의 범죄자일 걸로 생각합니다. 그가 남자든 여자든 간에요. 그는 죄를 저지르고 보기 좋게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았지요. 하지만 누가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돌아다닌다면? 쿡쿡 찌르고, 쑤시고, 파내어 결국엔 목표를 찾아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살인범의 행동은 어떠할까요? 그저 빙그레 웃고 앉아서 수색이 점점 가까워 오기를 기다릴까요? 아니죠. 저는 무슨 뚜렷한 명분이 없는 한, 그저 내벼려 두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당시 영국에도 공소시효가 있었을지, 있었다면 몇 년 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영화 <살인의 추억>도 함께. 우리나라 공소시효는 15년이라 이미 영화 개봉 당시 공소시효까지 4년도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2006년을 기점으로 7차까지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법이 개정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발생한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는 25년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강력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당신의 가엾은 아이인가요?"(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엄지손가락의 아픔』에도 등장하는 말-옮긴이)

그웬다는 뒤로 팔짝 뛸 뻔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아, 난 혹시나 하고."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를 마셨다. 그런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10시 30분이에요. 항상 10시 30분으로 정해져 있지요. 특이하기도 하지."

그녀는 또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소곤거렸다.

"벽난로 뒤랍니다. 하지만 내가 얘기했다고는 하지 말아요." (이 역시 『엄지손가락의 아픔』의 패러디-옮긴이)

 

1968년 출판된 <엄지손가락의 아픔>이 출판시기로는 이 책보다 먼저지만, 사실 이 책이 훨씬 더 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추측되기에 여기에서 잠깐 사용했던 아이디어를 좀 더 발전시켜 <엄지손가락의 아픔> 에 크리스티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옮긴이의 말과는 정반대일 것 같다. 그곳에서도 요양원에 부부가 방문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부부가 정신 병원을 방문한다. 그웬다의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 그웬다는 자신이 본 살인 사건에서 목을 졸린 여자는 새어머니이며, 남자는 아버지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도, 새어머니의 배다른 오빠인 의사도, 아버지가 살인자는 아니며 다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살인은 실제로 일어났으며,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범인일까? 피살된 새어머니와 애정 관계가 있었던 세 명의 남자로 용의자는 좁혀지지만,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었고, 아버지 또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새어머니의 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마치 크리스티 자신을 닮은 듯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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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2 (완전판) - 죽은 자의 어리석음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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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도 하지요. 사람들이 건물을 세우는 장소 좀 보세요! 예를 들어 여기 이 건물요. 겨우 일 년 전에 세워졌어요. 이런 건물 양식 중에서는 아주 훌륭하고 시대와도 잘 어울려요. 하지만 왜 여기죠? 이런 물건은 드러나 보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사람들 말마따나 '높은 곳에 올려놓도록' 말이죠. 훌륭한 잔디와 수선화가 심어진 자동차 도로 따위와 함께요. 하지만 이 불쌍한 작은 녀석은 나무들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바람에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아요. 강에서 이놈을 바라보려면 나무를 스무 그루나 잘라내야 할 걸요."

"아마 마땅한 장소가 없었겠지요."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마이클 웨이먼이 코웃음을 쳤다.

"저택 옆의 풀이 무성한 강둑 꼭대기라면 자연 배경으로 완벽하죠. 하지만 안 돼요, 이 거물 양반들은 모두 똑같아요. 예술적인 감각이 없어요. '폴리'라는 것에 대한 환상만 갖고 주문을 한다니까요. 마땅한 장소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커다란 오크 나무가 골짜기로 쓰러져서 보기 싫은 흉터를 남겼습니다. 멍청한 당나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폴리를 세워서 이곳을 말끔하게 단장하면 되겠군.' 생각하는 게 그 정도밖에 안 된다니까요. 돈 많은 도시 촌놈들 같으니. 말끔하게 단장! 집 여기저기에 빨간 제라늄과 칼레올라리아 화단은 안 뒀는지 몰라요! 그런 사람은 이런 장소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요!"

그는 잔뜩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이 젊은이는 조지 스터브스 경을 좋아하지 않는 게 확실하군.'

푸아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건물은 콘크리트 위에 세워져 있지만, 그 아래 흙이 물러서 건물이 가라앉습니다. 여기 온통 금이 갔어요. 이곳은 곧 위험해질 겁니다....... 전체를 헐고 집 근처 강둑 꼭대기에 다시 세우는 편이 나아요. 하지만 그 완고한 늙은 바보는 이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총 20장으로 된 소설 중 2장에 나오는 부분으로, 건축가 마이클 웨이먼과 푸아로, 올리버 부인의 대화이다. 단순히 젊은 건축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고, 돈만 많고 교양은 없는 조지 스터브스의 천박함을 암시하는 부분인 줄 알았는데, 후에 이 부분은 엄청난 복선이 된다.

 

"누군가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걸 모르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누군가가 당신이고요?"

"아뇨, 아뇨, 나 개인이 아닙니다. 이런 시대에는 개인적이 되어선 안 되지요."

"왜 안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당신이 '이런 시대'라고 부르는 이때도 인간은 여전히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걸린 긴박한 시대에, 별 거 아닌 개인적인 병이나 취미에 몰두할 생각을 하면 안 되지요."

"그 말씀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최근 있었던 전쟁에서 심한 공습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보다 새끼발가락에 난 아픈 티눈에 훨씬 몰두했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도 놀랐지요.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어요. '생각해 봐. 지금 당장 죽음이 닥칠 수도 있어.' 하지만 여전히 나는 티눈을 의식했어요. 사실 죽음의 공포만큼이나 티눈이 괴롭다는 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죠. 하지만 내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내 삶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모든 일들이 더 큰 중요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 여자가 교통사고로 쓰러져 다리가 부러지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그녀는 자기 스타킹에 줄이 간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답니다."

"그건 여자들이 얼마나 바보인지 보여주는 일화에 지나지 않아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는 일화랍니다. 개인적인 삶에 열중한 덕분에 인류는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소설은 1956년에 나온 소실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10여년이 흘렀고, 이 당시 영국은 전례없는 번영과 안정을 누렸다고 한다. 실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해마다 경제는 성장했으며, 이 때 태어난 아이들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사회적 계급 이동이 어렵지 않았으며, 윈스턴 처칠과 해럴드 맥밀런 등 최고의 지도자들이 연이어 영국을 이끌면서 질서 정연하고 예의바르며 생기 있는 사회였다고 한다. 이 당시 영국 최고 지도자 해럴드 맥밀런이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으며, 그 말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한다. 물론 이 시기는 1960년대 급진파에 대해 비판을 받는 부분도 있는데, 이민을 혐오하고 신참자를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체제 순응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는 1950년대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커지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폭발했을 것 같은데, 아마도 푸아로와 대화를 주고 받는 알렉 레게와 같은 젊은이들도 그 중 하나였을 것 같다.

 

"그놈의 폴리라는 물건은 진짜 바보짓(폴리)이에요. 새로 유행하는 허튼 소리죠. 옛날 폴리엇 시대에는 폴리 같은 건 절대 없었어요. 그 부인의 생각이죠. 온 지 삼 주도 안 되어서 세워졌는데, 그 부인이 조지 경에게 그 생각을 불어넣은 게 분명해요. 저 나무들 사이에 이교도 사원처럼 삐죽 서 있으니 정말 바보처럼 보이잖습니까? 스테인드 글라스를 넣고 시골풍으로 지은 훌륭한 여름집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에는 아무 불만 없어요."

푸아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런던의 숙녀들, 그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환상을 지니고 있죠. 폴리엇 시대가 끝난 것이 슬프군요."

"우리는 그런 말 절대로 안 믿습니다, 선생. 나스에는 언제나 폴리엇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 집은 조지 스터브스 경의 것이잖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직 폴리엇 사람이 한 명 남아 있어요. 폴리엇 사람들은 참 약삭빠르다니까!"

"무슨 뜻이죠?"

노인은 교활한 눈초리로 푸아로를 곁눈질했다.

"폴리엇 부인이 저 문간채에 살고 있잖습니까, 네?"

그가 물었다.

"그렇죠. 폴리엇 부인은 문간채에 살고 있고, 세상은 아주 악독하고, 그 안의 사람들도 전부 악독하지요."

푸아로가 천천히 말했다. 노인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 뭔가 알아내셨구만요."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발을 질질 끌며 멀어져 갔다.

"하지만 내가 뭘 알았다는 거지?"

푸아로는 천천히 언덕을 올라 저택으로 가면서 화난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죽은 자의 어리석음>의 원제는 Dead man's folly 이다. 여기서 folly는 어리석음이라는 뜻도 있지만, 건축 용어이기도 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제목이 기가 막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세 가지 죽음 중 두 가지는 죽은 자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살해된 것이며, 나머지 하나의 경우 바로 건축물 folly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힌트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어리석은 것은 푸아로일지도 모른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되는데, 이미 크리스티는 초반에 복선을 깔아놓았다.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데다가, 제목에서도 한 번 힌트를 주었기 때문에 다 읽고 나면 모든 것이 정확히 들어맞는 다는 사실에 감탄과 함께, 빨리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한 허무함도 동시에 든다. 올리버 부인이 직관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어 푸아로를 이 곳으로 불러들였고, 푸아로 역시 기묘한 느낌을 받지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지 못한 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푸아로가 모든 것을 깨닫게 된 때는 종말에 다다라서이다.

 

이 소설이 정말 놀라운 것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라는 점이다. 특히 해티 스터브스에 대한 평가는 책 끝까지 읽고 나면 전부 사실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극히 전형적이지만, 그 전형성을 살짝 비틀었다고 할까? 아내가 없어진 경우, 가장 의심해야 할 사람은 남편이며, 남편이 없어진 경우, 가장 의심해야 할 사람은 아내이다. 이 부분이 책을 읽으면서는 공식처럼 머릿속에 들어맞지 않지만, 결국 다 보고 나면 그 공식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살해된 사람은 어떻게든 범인의 약점을 쥐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도 그렇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이 어떤 이유로든 불발된다면, 그것은 어느 한 쪽이 얼굴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도 그렇다. 사건은 교묘하게 뒤틀려 있고, 전형성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에 다다르면 놀랍게도 너무나 전형적인 사건이 된다. 매력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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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1 (완전판) - 히코리 디코리 독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홍현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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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로가 등장하는 1955년 소설이다. 여성적인 매력은 전혀 없고, 유능하기로는 제일 가는 비서 레몬 양, 정확히는 레몬 양의 언니 허버드 부인이 푸아로에게 고민을 상담하게 된다. 허버드 부인은 사별한지 4년 된 과부로, 오랫동안 영국 밖에서 거주한 데다가 자식도 없다. 적적해하던 그녀는 한 하숙집의 사감이자 관리인으로 일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꾸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럴게요. 돈이 없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여기저기서 돈이 조금씩 없어지는 거 말이에요. 그리고 보석이 없어진다 해도 납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 납득할 수 있기는 커녕 그 반대랍니다. 도벽이나 좋지 않은 버릇 때문일지도 몰라요. 제가 없어진 물건 목록을 적어 왔으니 한번 보세요."

허버드 부인이 가방을 열고 작은 수첩을 꺼냈다.

파티용 구두(새 구두의 한 짝)

팔찌(모조 보석)

다이아몬드 반지(수프접시 안에서 발견)

화장용 분

립스틱

청진기

귀걸이

라이터

낡은 플란넬 바지

전구

초콜릿 상자

실크 스카프(토막토막 잘린 채 발견)

배낭(위와 동일)

붕소 가루

목욕용 소금

요리책

"별스럽군. 그리고 아주, 아주 흥미진진해."

에르퀼 푸아로가 깊이 숨을 들이쉰 후에 말했다.

푸아로는 흥미를 느꼈다. 그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레몬 양의 얼굴과 진심으로 고민하는 허버드 부인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축하합니다."

푸아로가 허버드 부인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무슈 푸아로, 뭘 축하한다는 말씀이세요?"

허버드 부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렇게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제를 갖고 계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슈 푸아로께는 이해가 가는 일인지 모르지만......."

"저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젊은 친구들의 권유로 함께한 라운드 게임이 생각나는군요. '뿔 셋 난 귀부인'이라는 게임입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나는 파리에 가서 무엇을 샀지.'라고 말하면서 어떤 물건의 이름을 댑니다. 다음 사람이 앞 사람 말을 반복하고 나서, 다른 물건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이 게임은 사람들이 말한 여러 가지 물건의 이름을 외워서 순서대로 나열하는 건데, 때로는 아주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말이 되고 맙니다. 비누, 흰 코끼리, 접이식 탁자 그리고 사향 오리 같은 것들이 기억나는군요. 물론 아무 관련도 없는, 그러니까 아무런 전후 관계도 없는 물건을 순서대로 외우기는 어렵습니다. 허버드 부인이 방금 제게 보여 주신 목록처럼 말입니다. 게임이 무르익어 열두 가지 사물이나 동물의 이름이 나오면, 그것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제대로 열거하지 못한 사람은 종이로 된 뿔을 받아야 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다음 차례가 돌아오면 '뿔 하나 난 귀부인인 나는 파리에 가서.......'라고 말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뿔 세 개를 받으면 게임에서 빠져야 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던 푸아로는 이 기묘한 사건 뒤에 뭔가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하숙집을 직접 방문하여 머물고 있는 젊은이들 한 명 한 명과 각각 대화하며 단서를 찾아간다. 허버드 부인 이름이 낯설지 않은데, 그러고 보니 셜록 홈즈의 하숙집 주인 이름이 허드슨 부인이었다. 푸아로가 이야기하는 라운드 게임은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형식으로 존재한다. '시장에 가면'으로 시작하여 한 명 한 명씩 물건을 추가해가며 나열하는 바로 그 게임.

 

"실리아,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예를 들어, 어렸을 때 가정 생활이 어땠는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으셨니?"

"아니, 집에 있는 게 끔찍했어."

"딱 맞아떨어지네. 그리고......."

(중략)

"우리가 현대식 사랑의 한 장면을 참관한 느낌이군요."

에르퀼 푸아로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허버드 부인이 그의 말에 반박하듯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삶이여! 우리가 젊었을 때, 청년들은 여학생들에게 신지학(神智學)에 대한 책을 빌려 주거나,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 대해 토론하곤 했죠. 그 모든 감성과 고매한 이상에 대해서 말이에요. 한데 요즘은 현실 부적응자의 삶과 콤플렉스가 청춘 남녀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었군요."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허버드 부인이 말했다.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변의 논리는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콜린처럼 젊고 열성적인 학생은 콤플렉스와 피해자의 불행한 가정 생활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푸아로가 허버드 부인과는 다른 견해를 밝혔다.

"실리아가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더군요. 그래도 우둔하지만 상냥한 어머니와 괜찮은 어린 시절을 보낸 걸로 알고 있어요."

허버드 부인이 말했다.

"아, 하지만 실리아는 젊은 맥냅 군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을 만큼은 머리가 돌아갈 거예요! 맥냅 군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겠죠. 실리아는 사랑에 깊이 빠진 것 같아요."

"무슈 푸아로, 그 모든 허튼 소리를 믿으시는 거예요?"

"실리아에게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있다거나, 실리아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콜린 맥냅의 관심을 끌 목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들을 훔쳤을 것니다. 그리고 실리아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실리아가 예쁘장하고 수줍음 타는 평범한 여자로 남아 있었다면, 결코 맥냅 군의 관심을 끌 수 없었을 겁니다. 여자는 남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쓸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푸아로가 말했다.

"그애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똑똑하지는 않은 줄 알았는데요."

허버드 부인이 말했다.

푸아로는 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이 암컷의 몸부림이었단 말인가요! 무슈 푸아로,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하찮은 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시다니요. 어쨌든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었네요."

 

지금이나 60년전이나 청춘들의 남녀상열지사는 다른 게 없어 보인다. 한 공간에 비슷한 나이와 비슷한 지적 수준의 남녀가 있을 떄, 단일한 사건만으로도 서로에게 확 끌리는 것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로 상대를 해석하려 하며, 그 결과 연민에서 애정으로 발전하는 과정과 그 모든 것을 다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도.

 

"나이절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요. 어렸을 때, 가정 생활이 아주 힘겨웠거든요."

퍼트리샤가 열심히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또 시작이군!"

"뭐라고 하셨죠?"

(중략)

"나이절을 오랫동안 알고 지냈나요?"

"아뇨, 1년밖에 안됐어요. 루아르 성을 관광하다 만났죠. 그때 나이절이 독감에 걸렸다가 나중에 폐렴으로 악화되는 통에, 제가 내내 나이절을 간호해 줬어요. 나이절은 아주 예민한 사람이고 자기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아요. 어떤 면에서는 무척 독립적이지만, 어린 아이처럼 누군가가 보살펴 주기를 바라죠. 나이절은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을 간절히 필요로 한답니다."

푸아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불현듯 이 모든 사랑타령이 지겹게 느껴졌다....... 먼저 실리아가 누군가를 사모해 마지않는 눈빛을 하고 나타나더니, 이제 헌신적인 성모 마리아 같은 퍼트리샤라니. 분명 청춘남녀가 만나 짝을 이루는 사랑 이야기였다. 그는 그 모든 시기를 지나 보낸 게 다행스럽기만 했다.

 

젊은 남녀들간의 사랑만이 넘치는 이 공간에, 사소한 절도 사건으로 끝난 것 같아 보이던 이 소동은 결혼 발표를 한 다음날 실리아가 사망하면서 급변하며, 연이어 두 건의 살인이 더 일어난다. 그러면서 평범해 보이던 하숙집의 비밀이 드러나고,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등장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살인자일 가능성이 있는 셈이군요."

샤프 경위가 느릿느릿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레너드 베이트슨은 성격이 불같아서 자제력을 잃는 경우가 있죠. 발레리 홉하우스는 머리가 좋아서 뛰어난 계략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고요. 나이절 채프먼은 균형 감각이 없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돈이 생긴다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프랑스 여학생도 있어요. 퍼트리샤 레인은 모성이 강한 여자지만, 이 유형은 언제나 무자비하지요. 샐리 핀치라는 미국 여학생은 명랑하고 쾌활하지만, 그 누구보다 꾸며 낸 역할을 잘 해낼 사람입니다. 진 톰린슨은 상당히 친절하고 정의로워 보이지만, 우리 모두 일요 성경 학교에 헌신적으로 나가는 살인자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서인도 제도 출신의 엘리자베스 존스턴은 그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그 누구보다 머리가 좋을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감정을 이성의 하위에 두고 있는데, 그건 위험한 생각이지요. 게다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매력적인 아프리카 청년도 있죠. 심리학자인 콜린 맥냅도 있고. '의사여, 그대 자신을 치료하라.'라는 말에 해당되는 심리학자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슈 푸아로, 제발 그만 하십시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살인을 저지를 법하지 않은 사람은 없나요?"

"나도 그 점이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이 소설은 크리스티가 쓴 수십 편의 소설 중 상위 10%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기준이다. 이 소설은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대저택, 부호, 귀족, 미망인, 상속녀, 바람둥이, 팜므파탈 등 크리스티 특유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과는 구성이 사뭇 다르다. 희생자도, 범인도, 하숙집 젊은이들 중 하나이며, 살해 동기는 유산이나 원한 관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누군가를 정황상 범인으로 지목하기가 어렵고, 온전히 하숙생들의 캐릭터로만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또한 밀실 살인이나 신원 불명의 시신, 살해 도구의 실종 등 사건이 복잡하게 꼬여 있지 않고, 하숙집의 특성상 사람이 자주 드나들며, 각 인물 간의 공간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복잡한 트릭을 쓰지 않아도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전부 밝혀진 살해 동기와 수법도, 사실 알고 보면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 답지 않게 단순하다. 즉,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사건들이지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던 형태가 아니다. 아마도 하숙집과 트렁크, 여권 등의 이야기는 실제 이 시절, 빈번하게 존재했던 범죄의 한 형태이지 않을까 싶다. 신문을 통해 사건을 접한 크리스티가 재구성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건을 현실적이며, 인물들은 내 눈앞에 있는 것 같이 생생하다. <히코리 디코리 독>은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크리스티 소설에서 종종 인용되는 마더 구스의 노래로, 사건이 일어나는 하숙집 주소가 히코리 가 26번지라는 것을 제외하면 큰 관련은 없다. 아마도 크리스티는 이 소설을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고 단시간내에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리가 없고 산뜻하며, 소설 시작에 몰입한 그대로 멈추지 않고 끝까지 도달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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