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0 (완전판) - 복수의 여신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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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스》 또한 예전같지가 않았다. 《타임스》에서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더 이상 뭘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1면을 훑어보면 특별히 관심이 있는 기사를 찾아 읽을 수 있었던 전통적인 차례가 괴상하게 변해 버렸다. 중간에 갑자기 삽화와 함께 카프리 섬 여행에 관한 내용이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가 하면, 스포츠 면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부각되었다. 법정 소식과 부고 기사는 그나마 충실한 편이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한때 마플 양의 관심을 끌었던 탄생과 결혼, 부고 기사들은 뒷장으로 밀려났으며, 그녀는 이 기사들이 앞으로도 영원히 뒷장에 실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늦게나마 눈치챘다.

마플 야은 먼저 1면에 실린 주요 뉴스들을 살펴보았다. 아침에 이미 읽은 것과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이라 꼼꼼히 읽지 않았지만, 《타임스》답게 좀 더 기품 있는 공손한 표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목차를 쭉 훑어보았다. 기사, 논평, 과학, 스포츠, 그러다 평소의 습관대로 신문을 뒤집어 탄생, 결혼, 부고 기사를 빠르게 훑어 내린 다음, 뉴스 면으로 넘겼는데 궁정기사부터 오늘의 경매장 소식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들이 있었다. 가끔은 짧은 과학 기사가 실리기도 했지만 읽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뿐이었다.

 

타임스는 1785년에 창간되었고, 1800년대에 들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자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명성의 토대를 쌓았다고 한다. 독립적이며 정확하고, 혁신적이며 분명했던 신문의 위상은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때 내리막을 걸었다고 한다. 1952년 BBC 사장이 편집주간을 맡으면서 서서히 명성을 회복하였고, 1966년에는 제 1면에 실었던 광고를 다른 면으로 옮기고 뉴스 기사를 실어 오늘날 신문 구성의 틀을 다졌다고 한다. 198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루퍼트 머독이 인수하였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이 소설이 나온 것은 1971년이니 타임스가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을 시기이다.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에서 타임스가 자주 언급되는 반면, 전기 소설에서는 타임스가 아닌 다른 신문이 언급되는 것이 이상했는데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결혼하면서 신문 경조사란으로 발표했다는 기사를 봤는데, 대변인이나 매니지먼트를 통하는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전통적이라는 이유로 화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신문도 타임스였다.

 

분홍색 털실. 잠깐, 뭔가 생각이 나는 듯한데? 그래....... 그래....... 방금 신문에서 본 그 이름. 분홍색 털실, 푸른 바다, 카리브 해, 모래사장, 햇빛. 그녀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그래, 라피엘 씨. 그녀는 카리브 해로 여행을 갔었다. 생 오노레 섬. 조카인 레이먼드의 초대로(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8권『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의 내용-옮긴이), 그리고 레이먼드의 아내인 질부 조앤이 했던 말도 기억이 났다.

"제인 고모님, 더 이상은 살인 사건에 휘말리지 마세요. 고모님에게 좋지 않아요."

 

부고란을 훑어 보던 마플 양은 눈에 익은 이름을 발견한다. 바로 1964년에 나온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사건을 해결했던 갑부 라피엘. 당시에도 몸이 좋지 않았던 그가 사망한 것이다. 강하고 고집이 세지만, 판단력이 뛰어났고 유머 감각도 있던 그는, 푸아로나 미스 마플 등 크리스티 소설 속 탐정을 제외하면, 내 기준으로 크리스티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 책의 마지막은 마플 양과 라피엘 씨가 헤어지면서 끝나는데, 여태까지 내가 본 크리스티 소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끝맺음이었다.

 

크리스티의 소설은 종종 소설끼리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마플 양만 하더라도 14권의 책에 나왔기 때문에 앞서 나온 책의 사건에 대해 뒤에 나온 책이 언급하기도 하고, 마플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소설에 나왔던 푸아로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푸아로와 배틀 총경, 레이스 대령과 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이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책도 있었다.

 

"저는 헤이스팅스 부인 댁에서 채소를 키우고 있어요. 따분하긴 하지만 필요하죠. 자, 저는 이만 가 봐야겠네요."

그녀의 눈길이 기억해 두겠다는 듯 마플 양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으며, 그런 후에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갔다.

헤이스팅스 부인? 마플 양은 헤이스팅스 부인이라는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헤이스팅스 부인은 그녀의 친구이거나 정원일을 함께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 어쩌면 지브롤터 로 끝의 새집에 사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작년에 그곳으로 서너 가족들이 이사를 왔다.

 

헤이스팅스라는 이름만 보면 자연스레 푸아로의 친구인 아서 헤이스팅스가 떠오르게 된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뒤에 가면 이 사칭은 거짓임이 드러나지만, 어차피 어떤 이름을 대도 중요하지 않을 것을 굳이 크리스티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성을 사용하는 것이 좀 이상했다. 아마도 이 의문은 크리스티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풀렸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소설은 크리스티가 생전에 쓴 마플 양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한다. 출판은 1976년의 <잠자는 살인>이 마플 양이 등장하는 마지막 소설이자 크리스티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책이지만, 사실 이 책이 크리스티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이며, 애초에 크리스티는 마플 양 3부작을 기획하고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와 연결하여 <복수의 여신>을 썼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 마플 양의 소설은 크리스티의 머릿속에만 남게 된 것이다. 푸아로에게 멋진 결말을 선사한 <커튼>을 생각해보면, 크리스티가 그린 마플 양의 마지막 모습을 독자로서 읽을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세인트 메리 미드의 제인 마플 양에게

이 편지는 내가 죽은 후 훌륭한 변호사인 제임스 브로드립이 전해 드리게 될 거요. 제임스 브로드립은 내가 사업이 아니라 개인적 문제에 관한 법률 조언을 받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라오. 착실하고 믿을 만한 변호사지.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 또한 호기심이라는 죄악을 저지를 수 있소. 나는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문제는 당신과 나 사이의 일로 남게 될 거요. 친애하는 마플 양, 우리의 암호명의 네메시스요. 당신이 처음으로 내게 그 말을 한 것이 어디에서였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였는지 잊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오. 나는 오랜 세월 사업을 하면서 직원을 뽑는 데에 한 가지 신념을 가지게 되었소.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거요. 그 직원이 할 일에 대한 재능 말이오. 지식도, 경력도 아니라오. 오로지 재능뿐이오. 특정한 일을 수행하는 데 타고난 재능 말이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정의에 관한 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소. 다시 말해 범죄에 대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 특정한 범죄 사건 하나를 조사해 주셨으면 하오. 내가 당신 앞으로 남겨 둔 돈이 있소. 만약 내 요청을 수락하고, 이 범죄 사건을 조사한 결과가 명확히 밝혀진다면 그 돈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이 임무를 위해 당신에게 1년이라는 기한을 드리오. 당신은 젊지는 않지만, 강한 사람이지. 최소한 1년간은 죽음이 당신을 데려가지 않으리라 믿소.

당신이 이 일로 불쾌해하지는 않을 걸 생각하오. 당신은 조사에는 타고난 천재이지. 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언제라도 보내 드릴 거요. 이 일을 수락할 것이냐, 아니면 현재의 삶을 고수할 것이냐는 당신의 선택에 맡겨 두겠소.

당신이 어떤 종류의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든 편안하고 안락하게 받쳐 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오. 당신 나이대의 사람들은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기 마련이지. 무릎이나 등에 류머티즘이 걸렸다면 돌아다니기가 힘들어 주로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겠군. 그날 밤, 분홍색 스카프를 두르고 갑자기 방에 쳐들어 와 내 잠을 깨우던 당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오.

스웨터와 스카프를 그 밖에 이름도 모를 다른 많은 훌륭한 것들을 뜨는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 만약 계속해서 뜨개질을 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소. 만약 당신이 정의를 수호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건에 흥미가 있길 바라오.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

-아모스 서

 

라피엘 씨의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온다. 변호사가 남긴 라피엘 씨의 편지. 그리고 임무 완수 시 받을 수 있는 금액 2만 파운드. 현재 기준으로는 약 3400만원 정도이다. 물론 이 당시에는 그보다 더 큰 가치였겠지. 과연 이 정도면 당시에는 어느 정도 돈이었을까 궁금했다. 19세기, 그러니까 1800년대 파운드는 오늘날 50배 가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2만파운드라면 20억, 물론 이 소설이 나온 시기는 1971년이니까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의 3400만원 보다는 더 많은 가치일 것이다. 2만 파운드는 영국 소설에서 엄청난 금액을 말할 때 종종 등장하는데, 80일간의 세계 1주에서 주인공 포그가 걸었던 돈이 2만 파운드이며, 제인 에어가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았다고 나오는데 그 금액이 2만 파운드였다. 아마도 미국의 백만장자와 비슷한 표현일 것 같다. 죽은 사람이 엄청난 갑부이며, 또 마플 양이 노년기를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배려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3억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대략 20~30년 정도지나면 물가가 2배 정도 오르는데 40년 전의 일이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노후 자금으로는 60세부터 90세까지 총 5억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때의 마플 양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70대는 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등장한 것이 1930년 <목사관의 살인>이었고, 그때도 절대 젊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노부인이라고까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노처녀라는 표현은 있었던 것 같다. 마흔으로 잡아도 일흔은 훌쩍 넘어가는 나이이다. 이런 할머니가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게 지극히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여겨질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이 소설을 쓸 무렵 크리스티의 나이도 여든 즈음이었다.

 

"저 노부인이 섬뜩하게 느껴지는군요."

앤드류 맥닐 경은 마플 양에게 작별인사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말했다.

"너무나도 상냥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냉혹합니다."

국장이 말했다.

완스테드 교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차까지 마플 양을 안내했고, 다시 돌아와 마지막으로 몇 마디를 나누었다.

"마플 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드먼드?"

"내가 만난 여자 중에 가장 무시무시한 여자던군."

내무부 장관이 말했다.

"냉혹하다는 말입니까?" 

완스테드 교수가 물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은 아니네만....... 글쎄, 아주 무서운 여자야."

"네메시스라."

완스테드 교수는 생각에 잠겼다.

교도소장이 끼어들었다.

"마플 양을 보호하던 그 두 여자 사립탐정이 그날 밤 마플 양에 대해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 주었다네. 둘은 그 집에 쉽게 들어가 아래층의 작은 방에 몸을 숨겼다가 모두들 윗층으로 올라간 후에 한 명은 벽장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한 명은 바깥에서 망을 보았다네. 침실 벽장에 숨어 있던 여자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더니 그 노부인이 복슬복슬한 분홍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마치 늙은 여선생처럼 이야기하고 있더라지 뭔가. 경악했다고 하더군."

"복슬복슬한 분홍색 숄이라. 그래, 그래, 기억이 나는군......."

완스테드 교수가 말했다.

"뭐가 기억난다는 건가?"

"라피엘 씨가 한 말. 한번은 내게 마플 양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는 웃음을 터뜨렸지. 평생 단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게 있다고 했어. 서인도 제도에 있을 당시 복슬복슬한 분홍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그의 침실로 쳐들어와 당장 일어나서 살인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정신 나간 할머니라고 햇어. 그리고 그가 '도대체 당신이 뭔데 이러는 거요?'라고 묻자 마플 양은 자기가 네메시스라고 대답했다지. 네메시스라! 그처럼 네메시스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그가 말했다네. 난 복슬복슬 분홍색 스카프의 감촉이 좋아. 아주 좋아하지."

완스테드 교수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네메시스, 복수의 여신은 라피엘 씨와 마플 양 사이의 암호였다. 아마도 이들은 정확히 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강력한 사건을 함께 공유한 두 사람끼리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이니까.

 

"흠, 그리 열정적인 젊은이는 아닌 것 같군요. 마플 양께 좀 더 열렬하게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요."

"오, 괜찮아요. 그 젊은이가 그러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당황해서 쩔쩔매는 게 안쓰러웠는데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새 인생을 살아야 하고, 모든 걸 새로운 각도에서 봐야 할 때는 아주 당황스러운 법이잖아요. 그 젊은이라면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요. 격렬한 증오심에 불타오르지도 않고, 그게 어디에요. 왜 그 아가씨가 그를 사랑했는지 잘 알 것 같네요......."

"뭐, 어쩌면 이번에는 그 청년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그 젊은이가 혼자서 제대로 해 나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참한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면 몰라도 말이에요."

"제가 마플 양을 좋아하는 건, 마플 양의 유쾌할 정도로 실용적인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역시 우리의 마플 양은 사건을 해결한다. 개인적으로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속 라피엘의 캐릭터도 좋았고, 마플 양도 좋아하는 탐정이기 때문에 구성은 반가웠지만, 긴장도는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갑부인 라피엘 씨가 이런 식으로 마플 양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이면, 사건은 분명히 직계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며, 꼼짝달싹 못하는 함정에 빠진 젊은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썼으며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과정으로 흘러가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더구나 누가 범인일지도 생각보다 빨리 노출되기도 했다. 아마 이 다음 소설은 라피엘 씨의 아들이나, 이 책에서 언급만 되고 지나간 딸의 자손, 혹은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에서 인연을 맺었지만 여기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잭슨이나 재혼해서 앤더슨 부인이 된 에스더 월터스 등의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물론 책으로 나왔다면 말이다. 처음부터 3부작을 기획했다면, 방점은 마지막 책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책은 첫번째 책과 마지막 책의 연결고리였을지도 모르고. 여러 모로 아쉬웠다.

 

"이제 저희가 보관하고 있는 그 돈은 마플 양이 원하시는 대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마플 양의 계좌로 넣어 드릴까요, 아니면 투자 문제와 관련해 저희와 의논을 해 보고 싶으신가요? 꽤 많은 액수입니다."

"2만 파운드라. 예, 내가 보기에는 아주 큰 액수예요. 청말 엄청난 액수예요."

"원하신다면 저희 주식 중개인을 한 명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투자에 관련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 드릴 겁니다."

"오, 난 그 돈을 투자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그러는 편이......."

"내 나이에 돈을 아낄 이유가 없죠. 더구나 이 돈을요....... 라피엘 씨께서 그런 의미로 이 돈을 나에게 주었다고 생각해요....... 한 번도 맘껏 즐길 만한 돈이 없었던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말이에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은행으로 보내 달라는 말씀이시죠?"

브로드립 씨가 말했다.

"세인트 메리 미드, 하이 가 132번지, 미들턴 은행이에요."

"저축예금 계좌가 있으시겠죠? 저축예근 계좌로 보내 드리면 될까요?"

"물론 아니에요. 당좌 예금 계좌로 넣어 주세요."

"설마......."

"정말이에요. 당좌 예금 계좌로 넣어 주셨으면 해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신사와 악수를 나눴다.

"은행 지점장과 상담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플 양, 궂은 날에 대비해 여윳돈이 필요할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궂은 날에 대비해 필요한 건 딱 하나, 우산뿐이에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두 신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정말 고마워요, 브로드립 씨. 그리고 슈스터 씨 당신도요. 두 분 다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내게 필요한 정보도 모두 주셨죠."

"정말로 그 돈을 당좌 예금 계좌로 넣어 드리길 원하십니까?"

"예, 난 그 돈을 다 써 버릴 거예요. 신나게 살아 볼 작정이에요."

그녀는 문을 나서다 뒤돌아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브로드립씨보다 상상력이 좀 더 풍부한 슈스터 씨는 시골의 가든 파티에서 목사와 악수를 나누는 젊고 예쁜 아가씨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일순간 마플 양이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한 아가끼, 젊고 행복하며 인생을 즐기던 한 아가씨의 모습과 겹쳐졌다.

"라피엘 씨는 제가 즐겁게 살길 바라셨을 거예요."

마플 양이 이렇게 말하고는 문을 나섰다.

"네메시스. 라피엘 씨가 마플 양을 그렇게 불렀었다네. 네메시스. 마플 양만큼 네메시스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브로드립 씨의 말에 슈스터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엘 씨가 농담한 게 분명해."

브로드립 씨가 덧붙였다.

 

아마도 이 책의 마지막에서 라피엘 씨의 유산을 받은 마플 양은 또 한 번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까?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는 서인도 제도, <복수의 여신>은 런던 정원 여행, 아마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미지의 소설에서는 그 유산을 가지고 망중한을 즐기던 마플 양에게 생긴 마지막 사건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어쩌면 푸아로의 마지막을 다룬 <커튼>이, 첫 소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의 바로 그 장소에서 막을 내린 것처럼, <목사관의 살인>의 바로 그 장소,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벌어졌을 수도 있고. 자꾸 미지의 소설에 대해 안타까웠지만, 이 소설의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라피엘 씨의 유산으로 마플 양은 말년을 평화롭게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되니까. 의도된 죽음이라고 해도 <커튼>에서 푸아로의 마지막을 독자로서 보게 되는 것은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 인물에 대한 어떠한 열린 결말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왠지 모르게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우리의 마플 양에게 가장 어울리는 결말이자, 독자가 보고 싶은 끝맺음이자 작가가 선물하고 싶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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