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여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오늘 아침 어떤 아가씨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약속을 잡고 오라고 했죠. 누구나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며 당장 나를 만나고 싶다지 뭡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 다 있네요.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모른다니 말이에요."

"내 말이 그겁니다. 세 이누이(정말 이상한 일이었어요)! 너무 이상해서 조지에게 그 여자를 들여보내라고 했죠! 잠시 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앉지도 않고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서 있더군요. 정신이 나간 것 같았어요. 나름대로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몇 마디 건넸는데, 갑자기 그녀가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다음에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글쎄 내가 너무 늙었다는 겁니다......."

 

이 책은 1966년에 나온 소설로, 푸아로와 올리버 부인이 등장한다. 이상하게 올리버 부인이 등장하면 소설의 톤이 확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창백한 말>을 제외하면 늘 올리버 부인은 푸아로와 등장하는데, 1936년에 나온 <테이블 위의 카드>를 제외하면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에 등장한다. 처음에 등장한 것은 크리스티가 자신의 분신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였던 것 같고, 계속해서 등장한 것은 변화한 시대상에 맞추어 기존의 탐정이 아니라 새로운 해결사를 등장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푸아로나 마플 양, 배틀 총경과 레이스 대령 같은, 초기부터 등장했던 크리스티의 다른 주인공들과 올리버 부인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그것은, 올리버 부인이 경찰이나 탐정처럼 사건을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세계를 다루는 소설가라는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세 번째 여자예요."

"외동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적어도 내 생각에는요."

"그럼 세 번째 여자란 말은 무슨 뜻이지요?"

"세상에! 세 번째 여자란 말도 몰라요? 《타임스》도 안 읽나보군요."

"출생, 사망, 결혼 기사는 나도 읽어요. 그 밖의 관심 있는 기사 몇 개하고요."

"그게 아니라 제1면 광고 페이지 말이에요. 요즘은 제1면에 실리지 않지만. 그래서 다른 신문을 볼까 생각 중이에요. 어쨌든 당신에게 보여 줄게요."

그녀는 사이드테이블에 가서《타임스》를 집어 들어 몇 장을 넘기더니 푸아로 앞에 내밀었다.

"자, 여기 봐요. '안락한 아파트 2층을 함께 쓸 세 번째 여성분 구함. 독방. 중앙난방. 얼스 코트.''아파트를 함께 쓸 세 번째 여성 분 구함. 주당 5기니. 독방을 쓸 수 있음.''네 번째 여성 분 구함. 리젠트 파크. 독방.' 이게 요즘 여자 애들의 생활 방식이에요. 하숙이나 호스텔보다 나으니까요. 첫 번째 여자가 가구가 딸린 아파트를 얻은 다음 세를 내는 거예요. 두 번째 여자는 보통 친구인 경우가 많아요. 그다음에 다른 친구가 없으면 광고를 내서 세 번째 여자를 찾아요. 그리고 아까 봣던 것처럼 네 번째 여자를 억지로 끼워 넣기도 하죠. 첫 번째 여자가 가장 좋은 방을 쓰고, 두 번째 여자가 세를 좀 덜 내고 그다음 방을, 세 번째 여자는 세를 그보다 조금 더 덜 내는 대신 손바닥만한 방을 써요. 주중 하루 누가 아파트를 독차지할 건지 날을 정하기도 한대요. 꽤 잘 돌아가고 있지요."

 

<세번째 여자>. 이 책 제목의 의미가 나오는 부분이다. 당연히 제목만 보고는 치정 사건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의미가 있었다니. 전쟁 이후 여권은 급속도로 신장하였고, 예전과는 달리 젊은 여자들이 직장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직장 근처에 집을 얻고, 다른 룸메이트를 구하여 사는, 요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종종 보여지는 그런 삶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나보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쉽게 몰입이 되었던 이유는, 소설의 구성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이면 당연히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마치 몇 년 전 한참 유행했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칙 릿' 소설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이 시대에 일흔이 넘었던 크리스티에게 20대 젊은이들의 삶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소함 그 자체였을 것이기 때문에, 소설 전체에서 이 당시 젊은이들이 이전 시대와 얼마나 달랐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젊은이들의 부모 세대가 얼마나 당혹스러워하는지에 대해 내내 나오기 때문에, 마치 내가 유행의 최첨단의 젊은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크리스티의 눈높이에서 당시의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 노마의 두 남자도, 크리스티의 이전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과는 사뭇 다르다. 생김새도 태도도,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만약 지금과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푸아로에게 그다지 낯선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런던 거리나 파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는 검정 코트에 정교한 벨벳 조끼,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풍성한 밤색 고수머리를 어깨 위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국적이면서도 약간은 아름다운 외모였는데, 성별을 확실히 구분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노마의 남자친구인 데이비드는 비트족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비트족은 1950년대 전후 미국의 풍요로운 물질 환경 속에서 보수화된 기성 질서에 반발해 저항적인 문화와 기행을 추구했던 일단의 젊은 세대이다. 즉,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지만 노마의 집안 어른들은 좋아할 수 없는, 그런 청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영화 <위아영>의 아담 드라이버가 떠올랐다. 옷차림이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보는 이에게 하여금 경계심이 들게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끌리게 되는, 불안불안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올렸다.

 

붉은 머리에 잘생기진 않았지만 은근한 매력이 있는, 우락부락하면서도 재미있는 인상을 가진 서른 살 정도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안심시키려는 듯한 태도로 노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략)

"그러니까 당신은 자살하려고 했군요, 맞죠? 뭐가 문제입니까? 나한테 말해 보세요. 남자 친구? 그것도 사람 기분 엉망으로 만들 순 있겠죠. 자살하면 남자 친구가 미안해할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만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해요.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한 일을 미안해하지도 않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까요. 남자 친구들은 다들 이렇게 말할걸요. '항상 그녀의 정신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해 왔어. 결국 잘된 일이야.' 다음번에 또 재규어에 돌진하고 싶을 때는 이것만 기억해요. 재규어도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요. 그나저나 정말 이유가 그거였어요? 남자 친구한테 버림받아서?"

(중략)

"네. 여기는 진찰실이 맞고 나는 의사입니다. 내 이름은 스틸링플릿이에요."

"오, 의사는 싫어요! 의사하고는 얘기도 하고 싶지 않고요! 나는 정말......."

"진정해요, 진정해. 당신은 이미 10분간 의사와 얘기했습니다. 그나저나 의사가 뭐가 어떻다는 거죠?"

(중략)

"이런, 이런! 당신은 의사들에 대해서 아주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군요.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가두겠습니까? 차 한 잔 하겠어요?"

그는 곧바로 덧붙여 물었다.

"아니면 환각제나 진정제가 필요한가요? 당신 또래 젊은이들은 그런 걸 좋아하잖아요. 당신도 먹어 봤겠죠, 그렇죠?"

노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어요."

"못 믿겠는데요. 어쨌든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의기소침해하는 거죠? 정신병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 이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네요. 의사들은 사람 가두는 취미 같은 건 없답니다. 정신병원도 이미 환자들로 넘쳐 나고 있어서 더는 입원시킬 수도 없어요. 사실 요즘에는 꽤 많은 사람을 내보내고 있지요. 그것도 필사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까지 말이에요. 요즘 이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도 사람들로 넘쳐 나지요."

잠시 후 그가 다시 물었다.

"음, 뭐로 하겠어요? 약장에 있는 걸로? 아니면 구닥다리 영국식 차?"

"음...... 차가 좋겠네요."

노마가 대답했다.

"인도산? 아니면 중국산? 이렇게 물어봐야 되는 거죠, 맞죠? 미안하지만 중국산은 없을지도 몰라요."

"인도산이 좋겠네요."

"잘됐네요."

(중략)

"주소는 없어요. 집이 없거든요."

"그거 재미있군요."

스틸링플릿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찰들이 말하는 '주거 부정'이로군요. 그럼 매일 엠뱅크먼트에 앉아서 밤을 지새우나요?"

노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고를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지만 내게 꼭 그래야 하는 의무는 없지요. 그보다 딴 생각에 빠져 왼쪽을 살피지 못하고 길을 건너려고 했다는 쪽을 택하겠어요."

"내가 생각했던 의사랑은 전혀 다르시네요."

노마가 말했다.

"그래요? 나는 이 나라에서 의사 노릇을 하는 데 점점 환멸을 느끼고 있어요. 사실 이곳 병원을 접고 2주 뒤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려고 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뭐든 말해도 돼요. 벽에서 분홍색 코끼리가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거나,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 나와서 당신 목을 조르는 것 같다거나, 사람들 눈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는 게 보인다거나, 그 밖의 기분 좋은 환상 같은 게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봐요. 무슨 얘기를 해도 가만 있을 테니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제정신으로 보이거든요."

 

또 다른 젊은이는 스틸링플릿이라는 의사다. 크리스티의 소설에는 대부분 의사가 등장하는데, 보통 평생 한 지역을 떠난 적 없는, 지긋한 나이에 이른 노인이거나, 돈이나 학문적 성취와 같은 야망에 물타는 젊은이인 경우가 많다.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대체로 강한 인상이 없이 흘러가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 스틸링플릿이라는 의사는 데이비드와는 전혀 비슷한 부류가 아니지만, 이전 세대의 의사들과도 또 다른 모습이다. 이 당시 젊은이들이 이전 세대와는 매우 다르며, 또 그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사는 형태가 천차만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크리스티의 초기 소설에서 인물을 묘사할 때 개인의 특성보다는 그가 소속된 곳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좀 심하게 말하면 이름만 바꿔 달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전형성이 많이 깨진 느낌이었다.

 

다만 이런 흥미있는 부분들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해서 아쉬웠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에 대한 마음이 굳건했던 아가씨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그것도 한 장 정도 되는 분량에서 급속도로 마음의 변화를 겪는 부분도 그렇지만, 마치 복잡한 심리극인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대담한 사기꾼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던 사건의 전모도 다소 실망스럽다. 그리고 의문의 오 페어 걸 소냐의 결말도.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저 명석한 여성이었다는 설정은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종종 나오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 앞에서 깔아놓은 이야기에 대한 해명은 늘 있어왔는데 여기서는 그 부분이 빠져 있다. 식물원, 그리고 책으로 연결된 한 남자, 그 남자는 소설 밖 사건으로 인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노출했으면, 최소한 거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지. 용두사미 같은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