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6 (완전판) -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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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작가는 아이디어와 등장인물을 생산해 냈다. 이제 세 번째 필수 요소가 있어야 한다. 바로, 배경이다. 앞서 두 가지 요소는 작가의 머리에서 나오지만, 세 번째 요소는 외부에서 도출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가 창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 실재하는 것이다.

작가가 나일 강 유람 여행을 해 보았고 그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치자. 작가가 지금 쓰고자 하는 이야기에 딱 맞는 설정이다. 첼시 카페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옆에서 마침 여자 둘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움을 하고 있다. 다음 책의 도입부로 써먹기에 딱 좋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 지금 구상 중인 책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넣으면 얼마나 흥미롭겠는가. 친구를 만나러 찻집에 나갔는데, 도착하는 순간 친구의 오빠가 읽고 있던 책을 탁 덮고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쁘진 않은데. 근데 도대체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은 걸까?"

그럼 곧 작업에 들어갈 책의 제목은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2권-옮긴이)'로 즉석에서 정해진다.

에번스가 누군지는 작가도 아직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때가 되면 떠오를 테니까. 중요한 건 제목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작가 서문의 일부이다. 크리스티는 서문을 잘 쓰지 않는다. 굳이 그녀가 서문을 썼다는 것은, 단단히 마음 먹고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작품에 대한 부연 설명이나 안내일 때가 많은데, 그 경우에도 길이는 길지 않다. 이 책의 서문은 6쪽이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작가가 아닌데, 의외다. 더구나 자신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고, 등장인물을 생산해 내며, 배경을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즉, 일종의 '영업 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왜일까? 서문은 계속 이어진다.

 

조간신문 1면에서 정보를 수집하라.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요즘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할까? 신문 한 부가 1970년 영국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신문 1면을 훑고, 메모를 하고, 그것을 깊이 곱씹고 분류하라.

매일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여자 아이가 교살당한다.

힘없는 할머니가 강도를 당해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뺴앗긴다.

젊은 청년과 어린 소년들이 폭행을 하거나 폭행을 당한다.

건물과 공중전화 부스는 허구한 날 부서지고 유리창이 박살난다.

마약 밀수.

약탈과 폭행.

실종되는 아이들, 그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시체.

이것이 영국의 실상인가? 이것이 진정 영국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것은 마치 세상이....... 아니,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두려움이 인다.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벌어지게 하는 원인을 떠올렸을 때 드는 두려움이다. 그 원인은, 명확히 드러난 것들도 있지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다. 게다가 영국에서만 이런 혀상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문의 다른 면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들을 샅샅이 훓어보라. 유럽 소식도 있고 아시아 소식, 아메리카 대륙 소식도 있다. 전 세계 뉴스가 신문 한 부에 다 실려 있다.

비행기 공중 납치.

유괴.

폭력.

폭동.

증오.

무정부주의.

모든 것이 점점 강도를 더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파괴에 대한 찬양, 잔악함이 주는 쾌락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게 다 무엇을 의미할까?

 

이 소설은 1970년에 쓰여졌다. 출판사 측의 설명에 따르면, 크리스티의 마지막 스파이 소설이며, 80회 생일을 기념하며 출판되었다고 한다. 1890년에 태어났으니, 이 소설 출판 당시 80세가 맞다. 80세 노인의 눈으로 바라본 당시 영국은, 세계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선함이 존재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친절과 정을 베풀고, 동정심을 보이고, 이웃을 돕고, 소년 소녀들은 노인을 부축해 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느낌을 주는 사건들이 매일 신문을 장식하는 걸까?

서기 1970년인 현재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현재의 배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배경이 아무리 터무니없다 해도 이야기는 그 배경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공상 문학,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배경 설정이 일상의 공상적 사실을 그대로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과연 그럴듯한 공상적 대의를 구상해 낼 수 있을까?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비밀 조직 운동은 어떨까? 한 사람의 광적인 파괴 욕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설정은 가능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너무나 공상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방법으로 그 세상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어떨까?

불가능이란 없다고, 이미 과학이 여러 차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 있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공상에 불과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났거나 혹은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사건들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공상적 성격을 띠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단위 시간 당 가장 변화가 컸던 떄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성인이 되어 두 번의 2차 대전을 겪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인 1837년부터 1901년까지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로 '빅토리아 시대'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고 있다. 이 책은 물론이고, 크리스티의 다른 책에서도 종종 '빅토리아 시대'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크리스티야 말로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즉, 대영 제국의 전성기와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종전 후 영국의 상황까지를 전생애에 걸쳐 경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변화는 그녀가 평생 썼던 80여편의 소설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영원할 것 같던 평화가 산산조각이 나고, 노년까지 혼란한 사회 속에서 살았던 그녀가 말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는 아주 조금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 박완서 작가도, 생전에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꼴 충분히 보았고, 한 번 본 것 두 번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갑자기 생각난 일화다.

 

"학생 운동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근데 사실 걱정해야 할 건 학생 운동이 아니야. 그들은,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청년들부터 건드리거든. 모든 국가의 청년층부터 건드리는 거야. 살살 구슬리기. 일단 구호부터 외치게 하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구호들. 정작 외치는 젊은이들은 그 구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텐데. 혁명을 일으키는 게 그렇게 쉽단다. 젊은이들의 본성이거든. 옛날 옛적부터 젊은이들은 항상 반항을 해 왔어. 반역을 일으키고, 뒤집어엎고, 세상을 바꾸려고 들지. 하지만 젊은이들은 눈이 멀었어. 눈을 가리고 현실을 어떻게 보겠다는 건지. 자기들이 어디로 휩쓸려 가고 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눈앞의 현실이 어떤지, 자기들을 부추기는 배후의 세력이 무엇인지. 무서운 게 바로 그거야. 앞에서 한 사람이 당근으로 유혹하고 뒤에서 다른 사람이 채찍질로 재촉하면 당나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끌려 간단다.(중략) 히틀러와 히틀러 소년단. 그런데 그 경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신중하게 준비된 것이었지. 2차 대전은 아주 치밀하게 준비된 전쟁이었어. 히틀러 소년단은 유전적으로 우월한 초인 집단이 정권을 장악하도록 돕기 위해 각국에 심은, 일종의 제 5열(전시에 후방 교란이나 간첩 행위 등으로 적국의 진격을 돕는 집단-옮긴이)이었어. 그렇게 해서 세워진 초인 집단은 독일의 꽃과도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나치스는 굳게 믿었어. 지금도 누군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족속들이 넙죽 받아먹을 만한 사상이니까. 잘만 포장해서 내놓는다면 말이야."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중국인이나 러시아 인들을 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얘기에요?"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해. 게다가 과거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어. 아까 말한 패턴 말이야. 패턴! 러시아? 공산주의의 수렁에 빠져서, 이제는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고 있지. 중국? 중국은 완전히 갈팡질팡 헤매고 있더구나. 너도나도 자기가 마오쩌둥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서 그런지도 모르지. 아무튼 계획을 세우고 주도하는 배후 집단의 정체가 뭔지는 나도 모른단다. 아까도 말했지만 중요한 건 왜, 어디서, 언제, 그리고 누구인가야."

"아주 흥미롭네요."

"흥미롭기도 하지만, 무섭지. 같은 사상이 자꾸자꾸 반복해서 일어나는 걸 보면. 역사가 반복되고 있어. 젊은 영웅, 모두가 본받아야 하는 초인."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25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망령이 아직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정부에서 일하는 그 멍청이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또 정부에 어떻게든 연줄이 있거나 아니면 다음에 들어설 정부에서 한몫 잡으려고 하는 사람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정치인들은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자기가 사는 나라를 하나의 거대한 유세장으로밖에 보지 않아. 그것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 거야. 자기들 입장에서 정말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 일들을 추진하는데, 정작 국민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거든. 그걸 못 깨달으니까 결과가 안 좋은 걸 보고도 정치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정치인들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기들한테 거짓말을 할 특권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아. 볼드윈 씨(세 차례나 영국의 수상을 지낸 정치가 스탠리 볼드윈을 말함-옮긴이)가 그 유명한 말을 뱉은 게 바로 얼마 전이었지.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선거에서 졌을 것이다.' 영국 수상들은 아직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가끔가다 좋은 정치가가 나오는 게 그나마 신께 감사할 일이지. 너무 드물어서 문제지만."

 

1970년의 영국 할머니가 아니라, 2015년의 한국 할머니가 이 말을 했었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상 요즘 모든 신문의 사설과 칼럼에서 나오는 말과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대사 부인 중 하나였는데, 똑똑하고 지적이고 교육도 많이 받은 여자였지.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연설을 직접 듣고 싶어서 안달을 했어. 물론 2차 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의 얘기야. 연설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했던 거야. 얼마나 대단하기에 사람들이 그렇게감동을 받을까. 그래서 갔지. 갔다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어. '정말 놀라웠어요. 직접 들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독일어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감동을 받을 정도라니까요. 이제 모두들 왜 그렇게 난리인지 이해하겠어요. 그 사람이 주장하는 사상은 정말 굉장한 것이었어요....... 가슴이 뜨거워졌죠. 그 사람이 한 말들....... 듣고 있으면 이것만이 진리로구나. 저 사람만 따라가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겟구나. 그렇게 믿게 되더군요.아, 말로 잘 설명 못하겠어요. 기억나는 대로 종이에 옮겨서 나중에 보여 줄게요. 그럼 내가 말로 전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해 줬지.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와서 이러는 거야.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날 들은 이야기, 히틀러가 한 말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거든요. 근데 그 말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니 정말로...... 무시무시한 얘기였어요. 옮겨 적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요. 자극적이고 감동적인 문장은 단 한 개도 떠올릴 수 없었거든요. 몇 마디 떠오르기는 했는데, 적고 보니까 들었을 때 생각했던 뜻과 전혀 달랐어요. 그 말들은...... 그냥, 쓸데없는 말들에 지나지 않았어요. 어째서 그럴까.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일화는 사람들이 좀처럼 자각하지 못하는 위험 한 가지를 일깨워 주지. 분명 실재로 존재하는 위험이야.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어. 어떤 삶, 어떠한 일의 환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야. 그들이 하는 말, 즉 우리가 듣는 말로써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그들이 이야기하는 개념에 자극을 받아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다른 뭔가가 있어. 바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야. 그런 힘을 가진 자들만이 뭔가 시작하고 또 환상을 빚어낼 수 있어. 그 인간적 매력을 이용해 환상을 창조하는 건데, 이를테면 목소리 톤이라든가 아니면 직접 마주했을 때 풍기는 감화력 같은 것이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그런 게 분명 있어.

그런 자들에게는 힘이 있어.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힘을 가졌고, 사악한 권력자도 그런 힘을 가졌어. 신념은 어떤 특정한 운동을 통해 불러일으킬 수가 있어. '이렇게 저렇게 하면 신천지를 창조할 수 있다.'라고 설득하면,사람들은 그걸 믿고 그렇게 되도록 기를 쓰고 투쟁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치는 거야."

앨터마운트 경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얀 스머츠가 이런 말로 잘 표현해 주었지. '리더십은 위대한 창조의 동력이지만, 때로 사악한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라고 말이야."

 

이 이야기는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 <목적지 불명>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크리스티가 그녀의 지인으로부터 실제로 들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당시의 충격과 공포가 이 일화를 계속 소설 속에서 쓰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저한테 몇 가지를 알려 달라고 하더군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아돌프 히틀러라고 믿는 환자들을 제가 많이 상대해 봤다고 마틴 B씨가 귀띔해 줬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꽤 흔한 일이며, 그 환자들이 히틀러 총통을 얼마나 존경하고 숭배하는지를 고려했을 때 히틀러가 되고 싶어 하는 열망은 자신들을 히틀러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연히 점차 사그라지게 될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설명을 할 때 속으로 조금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 총통 각하가 대단히 만족한 듯해서 안심이 되더군요. 고맙게도 각하는 자기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열망을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어서, 그런 증상을 앓고 있는 환자들 몇몇을 추려서 만나 보게 해 줄 수 있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논을 했습니다. 마틴 B씨는 스스로도 확신이 안 서는 듯 보였지만, 그래도 저를 따로 불러 총통 각하가 진심으로 이 만남을 경험하고 싶어 하신다고 확신을 시키더군요. 마틴 B 씨가 특별히 다짐받고 싶어 한 것은 히틀러 총통이 혹시나....... 아니, 쉽게 말해서 각하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거였어요. 작가 히틀러라고 주장한느 환자들 중에 혹시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 자칫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거였죠....... 그래서 제가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가장 온순한 히틀러들만 골라서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지요. B 씨는 총통 각하가 환자들과 만나는 자리에 제가 안 끼었으면 한다고 하더군요. 병원장이 합석하면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할 거라고요. 게다가 폭력적으로 돌변할 위험이 없다면야....... 그래서 저는 위험이야 없지만 B 씨가 총통 각하와 동석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B 씨는 그건 문제없다고 했죠. 그래서 그렇게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주 대단하신 분이 방문하셔서 꼭 대화를 나눠 보고자 하시니 히틀러들은 지정된 방으로 모여 달라고 방송을 내보냈습니다.(중략)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건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감춰 왔고 우리가 감춰 온 사실, 하지만 수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총통, 히틀러는 그날 자의로 정신병원에 남았고, 진짜 히틀러와 가장 많이 닮은 환자 한 명이 마틴 B와 함께 그곳에서 나갔습니다. 나중에 벙커에서 발견된 건 그 환자의 시체였습니다. (중략) 진짜 히틀러는 미리 준비된 지하 루트를 통해 아르헨티나로 밀입국해 거기서 몇 년간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아리안 혈통의 예쁜 여자를 만나 아들을 하나 두었고요. 영국 여자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히틀러의 정신병은 계속 악화되엇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미쳐서 자기가 전장에서 군을 지휘하는 환영을 보며 죽었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독일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그 계획을 받아들인 거였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그런 정보가 조금도 새어 나가지 않고 철저히 감춰져 왔다는 겁니까?"

"물론 소문이 돌았죠. 소문이란 항상 돌게 마련입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는데, 러시아 황제의 딸 중 하나가 황실 가족의 참변을 탈출해 살아남았다는 소문도 있었잖습니까."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요. 조작된 거짓이었잖아요."

조지 패컴이 또 말을 더듬거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증명했지요. 다른 무리는 진실이라고 끝까지 믿었고요. 양쪽 다 황제의 딸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진짜로 황제의 딸이었다, 아니다,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라는 여자는 사실 농부의 딸에 불과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소문이란! 오래 돌수록 믿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죠. 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나 계속 믿지, 히틀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문은 여러 차례 돌았습니다. 시체를 부검했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러시아 측이 부검했다고 주장했지만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지요."

 

생전에 히틀러는 대역을 썼으며, 죽은 것은 그의 대역이었고 히틀러가 살아 남았다는 음모론은 꽤 알려진 이야기이다. 러시아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져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아나스타샤라도 주장한 여성의 상속권은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고, 사망 후 유전자 검사 결과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와 불일치하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경우도 설령, 음모론이 맞다고 하더라도, 1889년에 출생한 그는 지금으로부터 몇십년 전에는 사망했을 것이다. 물론, 2차 세계 대전 후 지금까지 히틀러의 직계 후손이 나타났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둘 다 그저 루머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1970년대에는 이런 소문들이 꽤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소설자체의 완결성만 놓고 보면 사실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80세에 도달한 크리스티가 이 소설을 쓴 이유, 또 굳이 길게 서문을 쓴 이유는 단순히 소설을 쓰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어땠을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그런 분위기는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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